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공책만 한 크기에 동전만큼 얇은 구리판을 떠올려 보세요. 누군가 그 한쪽 면에 아주 작은 글자 열 줄을 꾹꾹 눌러 새겼어요. 천 년도 더 지난 뒤, 필리핀의 한 강에서 모래를 퍼 올리던 일꾼이 진흙 속에서 구겨진 이 판을 찾아냈답니다.
글자를 읽어 보니 일종의 영수증이었어요. 어떤 가족이 더 이상 많은 금을 빚지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지요. 나중에 누가 와서 아직 빚이 남았다고 우기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말까지 들어 있어요. 나뭇잎이나 종이가 아니라 금속에 새겨졌기 때문에 이 기록은 천 년 넘게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이 판에는 쓴 날짜까지 정확히 적혀 있어요. 900년 4월의 어느 월요일이에요. 그래서 필리핀에서 찾은 글 가운데 날짜가 적힌 가장 오래된 글이 되었어요.
이 판이 발견되기 전에는 많은 역사책이 필리핀의 글로 쓴 역사를 1521년부터 시작했어요. 유럽 뱃사람들이 와서 섬들에 대해 기록한 해예요. 이 작은 판은 마닐라만 근처 사람들이 그보다 600년도 더 전에 이미 글과 금의 무게 단위와 문서로 된 약속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어요.
지금 이 판은 마닐라에 있는 필리핀 국립박물관에 있어요. 나라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 가운데 하나라는 뜻의 ‘국가 문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한눈에 보기
- 무엇
- 얇은 구리판 한 장에 새긴 채무 면제 문서. 원래 두 장짜리 가운데 첫 장으로 보인다
- 날짜
- 사카력 822년 바이샤카월, 이지러지는 달의 넷째 날, 월요일 = 율리우스력 서기 900년 4월 21일
- 발견
- 루손섬 라구나주 룸반 근처 룸방강의 모래 준설 작업 중. 포스트마는 1987년 무렵으로 보았고, 1986년이나 1989년으로 적은 기록도 있다
- 크기
- 약 17.5 × 30.5cm, 두께 약 1mm. 한쪽 면에 열 줄의 글
- 문자
- 초기 카위 문자(흔히 고대 자와 문자라고도 함). 900년 무렵 자와와 그 너머에서 쓰인 인도계 문자
- 언어
- 고대 말레이어. 산스크리트어 용어와 고대 자와어 낱말이 많고, 고대 타갈로그어 요소를 찾는 학자도 있다
- 첫 해독
- 안톤 포스트마, 1991–92년 발표
- 소장
- 마닐라의 필리핀 국립박물관. 국가 문화 보물(2010년 지정)
쉬움
라구나 동판 비문이란?
라구나 동판 비문(줄여서 LCI)은 한쪽 면에 열 줄의 글을 눌러 새긴 구리판이다. 내용은 금으로 진 빚이 정리되었다는 공식 확인서다. 관련된 사람들, 빚의 면제를 승인한 관리들, 그리고 그 관리들과 관련된 지명이 나오고, 나중에 빚이 아직 남아 있다고 주장할 사람에게 보내는 경고로 끝난다.
이 판이 그토록 중요한 까닭은 날짜에 있다. 첫 줄은 인도의 사카력으로 정확한 날을 밝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율리우스력 서기 900년 4월 21일 월요일로 환산했다. 필리핀에서 이보다 오래된, 날짜가 적힌 문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판은 흔히 필리핀 문자 기록 역사의 첫 페이지라고 불린다.
‘라구나 동판 비문’이라는 이름은 현대에 붙인 것이다. 처음 이 글을 읽은 학자 안톤 포스트마가 마닐라 남동쪽의 큰 호수인 라구나호(라구나 데 바이) 기슭에서 판이 나왔다는 이유로 붙였다. 문서 자체는 스스로를 비숫다파트라(viśuddhapātra), 곧 대략 ‘면제 증서’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용어로 부른다.
쉬움
얇은 구리판 한 장: 유물과 발견 경위
판의 크기는 약 17.5 × 30.5cm이고 두께는 1mm 남짓에 불과하다. 너무 얇아서 앞면에 새긴 글자가 뒷면에 도드라진 모양으로 비쳐 보인다. 처음 연구한 포스트마는 대략 가로세로 20cm라고 적었고, 더 정확한 치수는 뒤에 금석학자 엘사 클라베와 아를로 그리피스가 실물을 직접 조사해 밝혔다. 발견 당시 판은 구겨지고 검게 변해 있었다. 그 뒤 평평하게 폈지만 접힌 자국은 아직 남아 있다.
이 판은 계획된 발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라구나호로 흘러드는 룸방강에서, 룸반 마을 근처의 모래·자갈 준설 작업 중 기계식 컨베이어에 딸려 올라왔다. 포스트마는 현지 사람들에게 수소문한 끝에 1987년 무렵 건져 올린 것으로 결론지었고,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1986년 무렵’이라고 쓰며, 1989년이라고 적은 뒤의 기록도 있다. 골동품 시장에 팔려던 시도가 잘되지 않자 1990년 1월 마닐라의 국립박물관에 매물로 나왔고, 박물관은 이를 사들여 소장품 번호 1990-B-1로 등록했다.
글은 열째 줄 끝에서 문장 중간에 끊긴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판이 적어도 두 장 가운데 첫 장이었다고 본다. 포스트마는 비슷한 시기에 글이 새겨진 또 다른 판을 보았다는 현지 증언을 들었지만, 그런 판이 있었다 해도 지금은 사라졌다.
오늘날 이 판은 마닐라의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필리핀의 옛 문자와 전통 문자를 다루는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2010년 국립박물관이 국가 문화 보물로 지정한 고고 유물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쉬움
글자와 언어
이 판에 쓰인 문자를 학자들은 초기 카위 문자, 때로는 고대 자와 문자라고 부른다. 카위 문자는 남아시아의 옛 문자인 브라흐미 문자에서 갈라져 나온 인도계 문자라는 큰 가족에 속한다. 카위 문자에서 기본 글자 하나는 모음이 딸린 자음 하나를 나타내고, 글자 위·아래·옆에 붙는 작은 기호가 모음을 바꾼다. 900년 무렵에는 같은 모양의 카위 문자가 자와를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서 쓰였고, 라구나 동판의 글자는 당시 자와 문서의 글자와 거의 똑같아 보인다.
그러나 언어는 자와어가 아니다. 포스트마는 이를 고대 말레이어, 곧 뒤에 현대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가 되는 언어의 이른 형태로 판별했다. 연대가 확실한 현존 고대 말레이어 비문 가운데 가장 이른 것들은 680년대 수마트라 남부의 스리위자야 왕국에서 나왔고, 이 언어는 뒤에 자와의 일부 비문에도 쓰였다. 라구나 동판은 필리핀에서 나온 유일한 고대 말레이어 문서이며, 고대 말레이어를 주 언어로 한 동판으로는 세계에서 하나뿐이다.
고대 말레이어 안에는 빌려 온 낱말이 많이 섞여 있다. 첫머리의 날짜 공식과, 면제 증서를 가리키는 말이나 ‘서기(書記)’를 뜻하는 카야스타(kāyastha) 같은 법률 용어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왔다. ‘관리’를 뜻하는 팜갓(pamgat) 같은 칭호는 고대 자와어에서 왔다. 포스트마는 지위 높은 여성을 가리키는 다양(dayang), 빚이 청산되었음을 뜻하는 랍파스(lappas)처럼 에스파냐인이 왔을 때 마닐라 일대에서 쓰이던 고대 타갈로그어와 맞아떨어지는 낱말도 짚었다. 이 글에 타갈로그어가 실제로 얼마나 들어 있는지는 ‘여러 관점’ 절에서 보듯 아직 논쟁 중이다.
중급
안톤 포스트마와 해독
안톤 포스트마(1929–2016)는 네덜란드 출신 선교사이자 인류학자로, 민도로섬의 망얀족 사이에서 반세기 가까이 살며 그들의 하누노오 문자를 연구한 것으로 이름났다. 판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필리핀에서 이런 것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인도네시아에서 온 물건이리라고 생각했다. 한때 국보로 떠받들어졌다가 위조로 드러난 ‘옛 문서’들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진품임을 입증하는 일이 첫 과제였다.
포스트마는 처음에는 직접 베낀 그림으로, 다음에는 사진으로 작업하면서 19세기에 나온 인도네시아 문자 대조표의 도움을 받아 글자 대부분을 판독했다. 인도네시아 비문 연구의 권위자인 네덜란드 고문자학자 J. G. 더카스파리스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더카스파리스는 애매한 글자를 밝혀 주었고, 포스트마가 처음 사카력 844년으로 읽었던 연도를 822년으로 바로잡아 주었다.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의 전문가들은 문자가 10세기 형태와 맞고 언어가 현대의 위조자라면 흉내 내기 매우 어려운 방식으로 문법에 맞는다는 점을 들어 진품으로 판단했다.
포스트마는 1990년 8월 자와섬 욕야카르타에서 열린 인도·태평양 선사학회 대회에서 예비 논문을 발표했다. 이어 1991년과 1992년에 내용이 서로 겹치는 여러 편의 글로 판독문·번역·해설을 내놓았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92년 학술지 『필리핀 스터디스(Philippine Studies)』에 실린 논문이다. 그는 자신의 번역이 잠정적이라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포스트마의 판독문은 그 뒤 모든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2022년 고대 말레이어·고대 자와어 비문 전문가인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2012년 마닐라에서 실물을 직접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새 판독문을 냈다. 그들은 포스트마의 작업이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여러 글자 판독과 낱말 띄어 읽기를 고쳤고, 이 수정으로 몇몇 핵심 구절의 뜻이 달라졌다.
중급
문서에 적힌 내용
글은 ‘만세’라는 뜻의 스바스티(svasti)로 시작해 날짜를 밝힌다. 경과한 사카력 822년, 바이샤카월, 이지러지는 반달의 넷째 날, 월요일이다. 이어서 그날 ‘당 환(dang hwan)’이라는 존칭을 지닌 남와란(판에는 Namwran으로 적힘)이라는 사람의 가족과 관련해 면제 증서가 주어졌다고 적는다.
면제 증서를 내린 사람은 툰둔(Tundun)이라는 곳에서 ‘사령관’을 뜻하는 군사 칭호 세나파티(senāpati)를 지닌 관리(상 팜갓)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두 주요 판독이 다르게 본다. 포스트마는 툰둔의 사령관이 또 다른 인물, 곧 파일라(Pailah)의 지도자 자야데와를 대리했다고 읽었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한 사람으로 읽는다. 툰둔의 사령관이 파일라의 나야카 투한이라는 칭호도 지녔고, 그 이름 또는 칭호가 자야데와라는 것이다. 빚은 금 1카티 8수와르나로 적혀 있다. 서기(카야스타) 한 사람이 관여했고, 나야카 투한(nāyaka tuhān)이라는 칭호를 지닌 지도자 세 명이 증인으로 이름을 올렸다(포스트마는 면제의 증인으로 보았고,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원래 빚을 질 때의 증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면서도 두 경우를 모두 열어 둔다). 풀리란(Puliran)의 지도자, 가나삭티라는 칭호를 지닌 파일라의 지도자, 비스루타라는 칭호를 지닌 빈왕안(Binwangan)의 지도자다. 포스트마는 풀리란 뒤의 카수무란을 그 지도자의 이름으로 보면서도 지명일 가능성을 열어 두었고, 티옹손과 그 뒤의 클라베·그리피스는 ‘풀리란 카수무란’을 하나의 지명으로 읽어, 이 지도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 셈이 된다.
뒷부분은 빚이 어떻게, 누구를 위해 정리되었는지 설명한다. 포스트마는 채권자를 므당(Mdang)의 수장을 대리하는 데와타의 수장으로 이해했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채권자를 한 사람, 곧 ‘므당의 관리’라는 칭호를 지닌 ‘신(神)의 관리(상 팜갓 데와타)’로 읽는다. 충실한 섬김을 이유로 남와란의 자녀와 손자녀 모두가 그의 빚에서 풀려났다고 선언한다. 마지막 줄은 앞으로 빚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사람에 대한 경고를 시작하다가 끊기는데, 아마 다른 판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몇몇 대목은 두 주요 판독이 다르게 읽는다. 포스트마는 ‘다양 앙카탄(dayang Angkatan)’을 앙카탄이라는 귀부인으로 보고, 그녀가 친척 부카와 함께 문서를 받았다고 해석했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같은 낱말을 ‘[빚의 대가로] 넘겨받은 여자 종’으로 읽고, 부카를 그 종의 이름으로 본다. 포스트마는 빚을 ‘봉급과 관련된’ 것으로 옮겼지만,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군대와 관련된 빚이거나, 새긴 사람의 실수라면 ‘아버지의 빚’일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차이는 문서 뒤에 있는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영향을 준다.
중급
900년 무렵 마닐라만 일대 사회의 단면
손상된 한 장뿐이지만, 이 판은 신분과 칭호가 있는 사회를 보여 준다. 사람들은 당 환, 상 팜갓, 나야카 투한 같은 존칭과 함께 소개되며, 그 가운데 일부는 자와와 말레이 비문에서도 알려진 말이다. 네 명의 나야카 투한 가운데 세 명은 자야데와, 가나삭티, 비스루타처럼 산스크리트어 이름이나 칭호를 지녀, 인도에서 온 이름이 현지에서 위신을 지녔음을 알려 준다. 포스트마는 팜갓이 타갈로그어에 칭호를 뜻하는 파마갓(pamagat)으로 남았고, 줄임꼴 갓(gat)이 뒤의 타갈로그 칭호와 갓마이탄(Gatmaitan) 같은 성씨에 보인다고 지적했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이 말이 자와의 행정 용어에서 고대 말레이어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금은 이 글의 중심이다. 빚은 자와에서도 쓰인 무게 단위인 카티와 수와르나로 재며, 판에는 줄임꼴로 적혀 있다. 학자마다 환산이 다르다. 포스트마는 1수와르나를 1카티의 16분의 1로, 1카티를 약 617.6g으로 보아 빚을 금 약 926g으로 계산했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초기 자와에서 확인되는 값, 곧 1카티 750–768g과 1수와르나 약 38.6g을 써서 약 1.06–1.08kg으로 계산한다. 어느 쪽이든 큰 액수였다. 이 단위는 특정 동전이라기보다 장부상의 셈 단위였을 가능성이 크므로, 금은 처음에 여러 형태로 빌려주었을 수 있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그 한 가능성으로, 수집가들이 필론시토스(piloncitos)라고 부르는 작은 구슬 모양의 금 조각을 든다. 이 금 조각은 대략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유통되었으며 마닐라만 일대와 필리핀 여러 섬에서 발견된다.
이 문서는 빚이 한 가족 전체를 묶을 수 있었음도 보여 준다. 포스트마는 이를 16–17세기 에스파냐 측 보고와 타갈로그어 사전에 견주었는데, 이 자료들은 높은 이자와, 빚진 사람과 그 자손이 예속 상태로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는 이를 근거로 그런 제도가 오랜 뿌리를 지녔다고 주장했다. 다만 판과 그 자료들 사이의 여섯 세기라는 간격 때문에 이 비교에는 한계가 있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판 자체가, 예속 상태로 섬기다가 그 섬김을 이유로 풀려난 가족 구성원들을 묘사한다고 읽는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이 판은 필리핀에서 부채 노예(채무 예속)를 보여 주는 가장 이른 문자 증거다.
끝으로 이 판은 문서로 된 증거를 중시한 법 문화를 보여 준다. 증인, 서기, 정확한 날짜를 적은 기록은 모두 자와와 발리에서 알려진 문서의 틀을 따르며, 면제 증서를 가리키는 말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퍼진 산스크리트 법률 어휘에서 왔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5세기 무렵의 산스크리트 법전 『야즈냐발키아 법전』이 이미, 증인 앞에서 진 빚은 증인 앞에서 갚고 영수증을 만들라고 권했다는 점을 짚는다.
중급
자와·수마트라, 그리고 더 넓은 말레이어 세계와의 연결
판의 형식은 거의 모든 면에서 자와를 가리킨다. 자와와 발리에는 대략 9세기 이후의 글이 새겨진 구리·청동판이 수백 점 남아 있고, 대부분 면세 토지를 하사한 기록이다. 같은 시기 자와에서는 채무 면제나 소송 승소를 금속판에 적은 문서도 만들어졌다. 라구나 동판이 날짜를 적는 방식(달을 먼저, 이어 날과 반달)도 더 이른 수마트라의 고대 말레이어 방식이 아니라 자와 방식을 따른다. 다만 자와 날짜에 들어가는 5일·6일 주기 장날은 빠져 있다. 판에 나오는 므당(메당)은 중부 자와 마타람 왕들과 깊이 연결된 왕도의 이름이다.
900년은 마타람의 발리퉁 왕(재위 약 898–910) 치세가 막 시작된 때였고, 그의 치세에는 대부분 고대 자와어로 된 동판 칙허장이 많이 만들어졌다. 포스트마는 이 날짜가 판이 발리퉁의 궁정에서 왔다는 뜻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판에는 왕의 이름도 없고 왕의 칙허장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닐라만 일대 사람들이 당시 가장 강력한 자와 국가의 문서 관행과 접촉하고 있었음은 분명히 보여 준다.
언어는 수마트라와 스리위자야도 가리킨다. 고대 말레이어는 680년대 그곳에서 처음 글로 나타나며, 684년의 탈랑 투워 비문이 그 예다. 그래서 루손에 스리위자야의 영향이 미쳤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다른 그림을 제시한다. 900년 무렵 말레이어는 다른 지역에서 라틴어나 페르시아어가 그랬듯 해양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공유되는 문어(文語)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792년의 만주스리그리하 비문에서 보듯, 고대 말레이어는 고대 자와어가 주된 문어가 되기 전 자와 안에서도 쓰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루손에서 자와어 낱말을 섞은 말레이어로 글을 쓰는 데에는 자와나 수마트라의 지배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문자와 법을 공유하는 국제적 문화면 충분했다.
이렇게 이 판은 마닐라만 일대를 루손과 자와, 수마트라, 말레이반도, 그리고 더 멀리 인도와 중국을 잇는 교역과 사상의 연결망 안에 놓는다. 그러나 판 하나만으로는 누가 그 연결망을 주도했는지 알 수 없다. 자와의 궁정은 그 뒤에도 바깥을 바라보았다. 4세기 남짓 지난 1365년의 고대 자와어 시 『나가라크르타가마』는 군도 곳곳의 수십 개 지역을 마자파힛 왕국에 복속한 곳으로 열거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일부 학자가 오늘날의 필리핀에 비정하는 이름도 있다. 역사가들은 이런 주장을 신중하게 다룬다.
중급
그 무렵 세계에서는
중부 자와에서는 마타람(메당) 왕국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9세기 동안 이 왕국의 지배자들은 불교의 보로부두르와 힌두교의 프람바난 같은 거대한 사원을 세웠다. 라구나 동판이 쓰이기 두 해쯤 전에 즉위한 발리퉁 왕은 고대 자와어로 된 동판 칙허장을 많이 내렸다. 동판이 쓰이고 서른 해가 채 지나지 않은 929년, 왕국의 중심은 음푸 신독 아래 동부 자와로 옮겨 갔다. 이는 단지 같은 시기의 사건이 아니다. 라구나 동판은 이 자와 세계와 문자, 기록 매체, 어휘 일부를 공유하며, 므당이라는 이름까지 적고 있다.
수마트라와 자와에서 고대 말레이어는 680년대 스리위자야의 돌 비문부터 792년 만주스리그리하 비문 같은 중부 자와의 고대 말레이어 비문까지, 이미 두 세기 넘게 글로 쓰이고 있었다. 라구나 동판은 이 초기 고대 말레이어 기록 가운데 필리핀에서 나온 유일한 유물이며, 이 문어가 루손까지 닿았음을 보여 준다.
같은 무렵 자와와 발리에서는 ‘정리됨’을 뜻하는 숫다(śuddha) 같은 비슷한 어휘를 쓴 채무 면제 문서가 발행되고 있었다. 예컨대 912년의 한 자와 비문은 어떤 채무자가 이웃 마을 증인 다섯 명 앞에서 아버지의 빚을 금으로 갚은 일을 기록하며, 문서는 그 지역 영주가 썼다. 이런 글을 견주어 보면 라구나 동판의 증인과 서기를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조금 뒤의 중국 기록은 섬들과의 해상 교역이 커져 갔음을 보여 준다. 971년의 송나라 기록은 마이(麻逸)라는 곳을 남해의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꼽고, 982년에는 마이의 상인들이 중국 해안에 물건을 가져왔다. 11세기 초에는 민다나오의 항구 부투안이 송나라 조정에 사절을 보냈다. 마이가 민도로섬에 있었는지 라구나호 일대에 있었는지는 논쟁 중이어서 이 기록들이 900년의 마닐라만을 직접 묘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판의 세계가 그 속으로 자라 들어가던 더 넓은 지역 교역을 보여 준다.
중급
필리핀 역사의 출발점을 다시 쓰다
20세기의 상당 기간 필리핀에서 선사와 역사를 가르는 일반적인 기준선은 안토니오 피가페타가 페르디난드 마젤란 원정대의 일지를 쓴 1521년이었다. 고고학은 이 섬들에 수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밝혀 왔지만, 날짜가 적힌 현지 문서가 없었기에 문자로 쓴 이야기는 유럽 관찰자들과 함께 시작되는 것처럼 보였다. 일부 서구 역사가들은 에스파냐인이 오기 전의 이 섬들을 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문화적으로 고립된 곳으로 그리기도 했다.
라구나 동판은 그 기준선을 600년 넘게 앞당겼다. 포스트마는 이제 필리핀이 스리위자야, 마타람, 앙코르, 참파와 나란히 10세기 동남아시아 지도에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썼고, 이 판을 최근의 가장 중요한 발견 가운데 하나로 본 더카스파리스의 평가도 전했다. 이 판은 문자 사용, 금의 표준 무게, 정식 법적 절차, 칭호를 지닌 관리가 1521년보다 훨씬 전에 이미 마닐라만 일대에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포스트마는 섬들에 관한 더 오래된 증거, 이를테면 교역지를 다룬 중국 기록도 이 판에 비추어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뒤의 연구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예컨대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이 판을 마이와 부투안에 관한 중국 기록, 그리고 민다나오 부투안에서 나온 인도계 문자 유물과 함께 읽는다. 판 자체는 국가 유산의 상징이 되어 국립박물관에 전시되고 국가 문화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 의미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뒷시대 타갈로그 사회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판의 말레이·자와적 성격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이 판과 에스파냐인이 기록한 바이바인(baybayin) 문자 사이의 문자사를 아직 끊김 없이 이어 볼 수 없으며, 카위 문자가 바이바인의 직접 조상인지는 열린 질문이라고 지적한다. 이 판은 문서 한 장일 뿐이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심화
여러 관점
지명. 널리 합의된 비정(比定)은 하나뿐이다. 툰둔은 오늘날 마닐라의 파시그강 삼각주 북쪽에 있는 톤도다. 포스트마는 처음에 파일라를 필라와, 풀리란을 라구나호 남동쪽 지역과 연결했지만, 판이 두 곳을 별개의 장소로 다룬다고 판단하고 지명 전체를 북쪽 불라칸으로 옮겼다. 파일라는 노르사가라이의 파일라 마을, 풀리란은 앙갓강 가의 풀릴란, 빈왕안은 불라칸강 하구 오반도의 비누앙안이라는 것이다. 하이메 티옹손과 필라 역사학회 재단(2013)은 무대를 다시 라구나로 옮겨, 파일라를 필라로, 풀리란을 라구나호와 그 기슭의 옛 이름으로 보았고, 클라베와 그리피스도 이 라구나 비정을 받아들인다. 빈왕안에 대해서는 오반도의 비누앙안(포스트마), 북카마리네스주 카팔롱가의 비나왕안(티옹손), 리살주의 비낭오난(인도네시아 학자 쿠센, 1991) 같은 안이 나와 있고,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결론을 열어 둔다.
메당과 데와타. 므당(메당)은 중부 자와 마타람 왕들의 왕도이자 조상과 관련된 중심지의 이름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아직 모른다. 쿠센은 이를 자와의 그곳을 직접 가리키는 말로 보았고, 일부 역사가는 이 판을 마타람의 영향이 루손에 미친 증거로 본다. 포스트마는 자와 이주민이 그 이름을 필리핀으로 가져왔을 수 있다고 보았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꼭 자와의 장소를 뜻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름이 조상과의 연관을 간직한 채 옮겨 심어졌을 수도 있고, ‘상 팜갓 므당’이 조상 숭배를 맡은 사제의 칭호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포스트마와 그 뒤의 역사가 E. P. 파탄녜는 데와타를 민다나오 부투안 근처의 디와타라는 지명들과 연결했지만,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데와타를 ‘신’으로 읽고, 채권자가 신격화된 조상을 모시는 종교 기관의 관리였다고 본다.
언어. 포스트마와 클라베·그리피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문가는 이 글을 고대 말레이어로 분류한다. 포스트마는 일부 낱말이 고대 타갈로그어일 수 있다고 보았다. 티옹손(2013)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7세기 사전으로 읽으면 이 언어가 고대 타갈로그어라고 주장했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글 속의 정형화된 고대 말레이어 표현들을 근거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고대 타갈로그어가 이 글의 언어에 기여한 바는 거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이것이 타갈로그 문화를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당시 타갈로그어는 아마 아직 글로 쓰이지 않았고, 그래서 법적 기록을 이 지역의 공유 문어로 남겼다는 것이다.
톤도의 정치체. 대중적인 설명은 흔히 이 판을 ‘톤도 왕국’의 칙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글 자체는 면제 증서를 내린 툰둔의 사령관(세나파티)과, 증인으로 나오는 다른 곳의 지도자 세 명(원래 빚을 질 때의 증인인지 면제할 때의 증인인지는 불확실하다)을 언급할 뿐, 왕의 이름도 국가의 모습도 적지 않는다. 필리핀 초기 사회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대체로 중립적인 ‘정치체(polity)’라는 말을 선호하며, 일부는 타갈로그의 정치 조직을 영토 왕국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분권적 동맹으로 묘사한다. 클라베와 그리피스는 툰둔이 더 큰 교역 중심지, 아마도 중국 기록의 마이에 딸린 전초 기지로서 이웃 정착지들을 어느 정도 감독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하면서,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은 증거를 넘어선다고 경고한다. 이 판은 900년에 톤도가 고위 관리를 둔 이름 있는 장소로 존재했음을 증명하지만, 그 지배가 얼마나 넓고 중앙집권적이었는지는 증명하지 않는다.
심화
증거와 방법: 연대, 진위, 출처
날짜는 이 판에 관해 가장 확실한 사실이다. 날짜 공식은 기원, 연도, 달, 반달, 음력 날짜, 요일을 모두 밝힌다. 이 모두가 서로 맞아야 하므로, 환산이 틀리면 대개 요일이 어긋난다. 헥터 산토스(1996)는 율리우스력으로 900년 4월 21일 월요일이라는 결과를 냈고, 클라베와 그리피스도 서로 다른 두 천문 계산 프로그램으로 같은 결과를 얻었다. 글은 사카력 연도가 ‘경과한(atīta)’ 해라는 점도 밝히는데, 이 역시 환산할 때 따져야 할 세부 사항이다.
진위는 내적 증거에 기댄다. 문자는 약 850–925년의 표준 초기 카위 문자와 맞고, 언어는 현대의 위조자가 재현하기 매우 어려웠을 세부까지 고대 말레이어의 철자와 문법을 따른다. 새긴 사람의 작은 실수도 진짜처럼 보인다. 셋째 줄에서 산스크리트 복합어의 한 음절을 빠뜨렸다가 줄 아래에 덧새기고 점으로 고친 자리를 표시해 두었다. 포스트마에게 조언한 학자들부터 2022년 판독자들까지, 실물을 살핀 전문가들은 모두 진품으로 받아들인다.
출처 정보는 더 약하다. 이 판은 발굴이 아니라 준설로 나왔기 때문에, 연대를 알 수 있는 지층이나 함께 나온 유물 같은 고고학적 맥락이 없다. 박물관에 닿기 전에 골동품 거래를 거쳤고, 발견 연도에 대한 기록도 엇갈린다(1986년, 1987년 무렵, 1989년). 판이 얇고 들고 다니기 쉬우므로 발견 장소가 곧 작성 장소를 증명하지는 않지만, 톤도를 포함한 지명들은 마닐라만과 라구나 일대를 가리킨다.
끝으로 이 글은 완전하지 않다. 글은 아마 둘째 판으로 이어져 경고문의 끝과 더 많은 이름이나 맺음 공식을 담았겠지만, 그 판은 발견되거나 확인되지 않았다. 정치적 배경에 관한 해석은 몇 개의 칭호와 지명에 기대고 있으므로, 신중한 학자들은 글이 밝히는 것(날짜가 적힌 금 빚 면제, 증인, 칭호, 지명)과 글이 시사하는 것(자와 문서 관행과의 연결), 그리고 여전히 추측인 것(톤도 권력의 규모, 외부 세력의 개입 여부)을 구분한다.
핵심 개념
-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날짜가 적힌 문서
- 판의 사카력 날짜는 율리우스력으로 서기 900년 4월 21일로, 피가페타의 1521년 기록보다 600년 넘게 앞선다.
- 채무 면제
- 금 빚이 정리되었음을 기록해, 빚진 사람의 자손을 앞으로의 청구로부터 보호하는 문서다.
- 공유 문어로서의 고대 말레이어
- 산스크리트어와 자와어 용어가 섞인 말레이어 글은 루손이 수마트라와 자와에서 뻗어 나온 지역 문자 문화에 참여했음을 보여 준다.
- 자와의 문서 문화
- 동판이라는 매체, 날짜 공식, 서기, 증인, 므당이라는 이름이 이 판을 당대 자와의 관행과 잇는다.
- 신분과 칭호
- 당 환, 상 팜갓, 나야카 투한 같은 존칭과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위신 있는 칭호를 지닌 위계 사회를 보여 준다.
- 금 경제
- 빚을 자와와 공유한 무게 단위인 카티와 수와르나로 재어, 금이 가치의 기준으로 쓰였음을 보여 준다.
- 불확실성 속의 해석
- 여러 지명, 므당과 데와타의 뜻, 톤도 권력의 성격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기록
- 684년 — 가장 이른 날짜가 적힌 고대 말레이어 글 가운데 하나인 탈랑 투워 비문이 수마트라 팔렘방 근처에 스리위자야 치하에서 세워진다.
- 792년 — 고대 말레이어로 된 만주스리그리하 비문이 중부 자와의 세우 사원 단지에 세워진다.
- 약 898년 — 발리퉁이 중부 자와 마타람(메당) 왕국의 왕위에 오른다(재위 약 898–910).
- 900년 — 4월 21일 월요일(율리우스력, 사카력 822년 바이샤카월), 채무 면제 문서가 발행된다.
- 929년 — 음푸 신독 아래 마타람 왕국의 중심이 중부 자와에서 동부 자와로 옮겨 간다.
- 982년 — 마이(麻逸)의 상인들이 중국 해안에 물건을 가져온다. 이곳은 971년 송나라 기록에 처음 이름이 오른다. 필리핀 교역지에 관한 가장 이른 중국 기록 가운데 하나다.
- 1521년 — 안토니오 피가페타가 마젤란 원정을 기록한다. 오랫동안 필리핀 문자 역사의 시작으로 여겨졌다.
- 약 1987년 — 라구나주 룸반 근처 룸방강에서 판이 준설로 건져 올려진다(기록에 따라 1986–1989년).
- 1990년 — 1월 판이 국립박물관에 매물로 나오고, 8월 포스트마가 욕야카르타에서 첫 논문을 발표한다.
- 1992년 — 1991년의 첫 글들에 이어 포스트마의 판독문과 해설이 『필리핀 스터디스』에 실린다.
- 2010년 — 국립박물관이 이 판을 국가 문화 보물로 지정한다.
- 2022년 — 엘사 클라베와 아를로 그리피스가 새 판독문과 해석을 발표한다.
용어 풀이
- 동판(銅板)
- 공식 문서를 새긴 얇은 금속판. 인도, 자와, 발리에서 쓰인 문서 형식이다.
- 카위 문자
- 8세기 무렵부터 자와와 주변 지역에서 쓰인 인도계 문자. 고대 자와 문자라고도 한다.
- 고대 말레이어
- 7세기 이후의 비문으로 알려진, 말레이어의 이른 문어 형태.
- 사카력
- 서기 78년을 기점으로 하는 인도의 기년법. 동남아시아 비문의 연대 표기에 널리 쓰였다.
- 비숫다파트라
- 판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 ‘면제 증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계통의 용어다.
- 카티와 수와르나
- 자와와 그 너머에서 쓰인 금의 무게 단위. 카티가 더 큰 단위이며, 이 문서에서 두 단위의 무게와 비율은 학자마다 다르게 추정한다.
- 세나파티
- ‘군 사령관’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칭호. 툰둔의 관리가 지녔다.
- 팜갓
- 관리를 가리키는 칭호. 고대 자와어에서 알려져 있고, 뒤에 타갈로그어에 파마갓으로 보인다.
- 부채 노예(채무 예속)
- 빚진 사람과 때로는 그 가족이 빚이 정리될 때까지 채권자를 섬겨야 하는 상태.
- 국가 문화 보물
- 필리핀 문화유산 법에서 문화재에 주는 가장 높은 지정 등급. 국가 문화 기관이 지정한다.
묻고 답하기
빚 영수증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날짜가 적혀 있기 때문이에요. 서기 900년 마닐라만 일대에서 문자, 법적 기록, 금의 표준이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최초의 유럽 기록보다 수백 년 앞서 증명해요.
타갈로그어로 쓴 글인가요?
대부분의 전문가는 아니라고 봐요. 주 언어는 고대 말레이어이고,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자와어 낱말이 섞여 있어요. 고대 타갈로그어 요소가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고대 타갈로그어가 주 언어라고 주장한 연구도 하나 있지만 소수 의견이에요.
누가 해독했나요?
네덜란드 인류학자 안톤 포스트마가 고문자학자 J. G. 더카스파리스의 도움을 받아 1991–92년에 첫 판독을 발표했어요. 2022년에는 엘사 클라베와 아를로 그리피스의 수정 판독문이 나왔어요.
빚은 금 얼마였나요?
1카티 8수와르나예요. 단위를 어떻게 환산하느냐에 따라 대략 0.9–1.1kg의 금이에요.
톤도 왕국이 있었다는 증거인가요?
톤도(툰둔)가 존재했고 법적 문서를 낼 수 있는 사령관이 있었다는 것은 증명해요. 하지만 왕의 이름이 없어서, 톤도의 지배가 얼마나 넓고 중앙집권적이었는지는 이 판만으로 알 수 없어요.
메당이 나오니 자와에서 만든 판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문자와 일부 낱말은 자와식이고 메당은 자와의 왕도였지만, 다른 지명들은 루손을 가리켜요. 메당이 자와를 직접 가리키는지, 옮겨 온 이름이나 칭호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어요.
직접 볼 수 있나요?
네. 필리핀 국립박물관에 속한 마닐라의 국립인류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Antoon Postma, The Laguna Copper-Plate Inscription: Text and Commentary. Philippine Studies 40(2), Ateneo de Manila University, 1992
- Elsa Clavé and Arlo Griffiths, The Laguna Copperplate Inscription: Tenth-Century Luzon, Java, and the Malay World. Philippine Studies: Historical and Ethnographic Viewpoints 70(2), 2022
- Hector Santos, The Date of the Laguna Copperplate Inscription. Philippine Studies 44(4), Ateneo de Manila University, 1996
- The 9th to 10th Century Archaeological Evidence of Maritime Relations between the Philippines and the Islands of Southeast Asia.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2022
- National Cultural Treasures (Archaeology collection).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 Laguna Copperplate Inscription. Wikipedia
- List of National Cultural Treasures in the Philippines. Wikipedia
- Mataram Kingdom (Medang). Wikipedia
- Kawi script. Wikipedia
- Tondo (historical polity). Wikipedia
- Talang Tuwo inscription. Wikipedia
- Manjusrigrha inscription. Wikipedia
- Ma-i. Wikipedia
- Piloncitos. Wikipedia
- Rajahnate of Butuan. Wikipedia
- Nagarakretagama. Wikipedia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