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나가라크르타가마(데사와르나나)

Nāgarakṛtāgama · Deśawarṇana (고대 자와어 카카윈)

1365년 · 동부 자와 마자파힛 궁정 (마자파힛)

한 문장으로

『나가라크르타가마』는 1365년 불교 시인 프라판차가 고대 자와어로 지은 긴 시로, 마자파힛 왕국의 하얌 우룩 왕을 찬양하며 그의 궁정과 순행, 그리고 왕을 우러른 여러 땅을 묘사해요.

나가라크르타가마(데사와르나나)
이미지: Unknown author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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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650여 년 전 자와섬에는 마자파힛이라는 강한 왕국이 있었어요. 젊은 임금 하얌 우룩은 수레와 관리와 사제들을 거느린 긴 행렬을 이끌고 나라 곳곳을 다니며 마을과 사원,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곤 했어요.

궁정에서 일하다 물러난 한 시인이 프라판차라는 이름으로 임금에 관한 긴 시를 썼어요. 붉은 벽돌 담장의 왕궁, 축제, 임금의 할머니를 위한 의식, 시골길을 따라가는 긴 여행을 그렸지요. 수마트라에서 뉴기니까지 마자파힛을 우러렀다는 섬과 나라들의 목록도 적었어요.

이 시는 ‘카카윈’이라는 특별한 운문으로 쓰였어요. 긴 음절과 짧은 음절을 엄격하게 맞추어야 해서 음악과 조금 비슷해요. 한 연은 네 줄이에요. 프라판차는 책 이름을 ‘지방들의 묘사’라고 붙였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뒷날 한 필사자가 끝에 적어 넣은 다른 이름, 『나가라크르타가마』로 주로 불러요.

수백 년 동안 이 시는 발리섬과 롬복섬에서 야자잎에 손으로 베껴 쓰였어요. 1894년 식민지 전쟁 때 한 네덜란드 학자가 궁전 도서관에서 이 야자잎 책을 건져 냈어요. 뒤에 네덜란드는 이 책을 인도네시아에 돌려주었고, 지금은 자카르타의 국립도서관에 있어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 시를 보물로 여겨요. 옛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줄 뿐 아니라, 여러 섬이 하나로 이어진 모습이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거든요. 하지만 역사가들은 찬양하는 시는 임금을 실제보다 더 위대하게 그릴 수 있다는 점도 잊지 않아요.

한눈에 보기

성립
사카력 1287년 아스와유자월(서기 1365년 9~10월) 완성
지은이
음푸 프라판차(필명). 마자파힛 궁정과 관련 있던 불교 성직자
언어·형식
고대 자와어(카위), 산스크리트 운율을 따르는 카카윈 운문
분량
98편(푸푸), 49편씩 두 부분. 각 편은 4행 연 1~10개
내용
하얌 우룩 왕(라자사나가라, 재위 1350~1389) 찬양. 왕실, 수도, 순행, 조상 제례, 종교 시설, 영역
원제
데사와르나나(Deśawarṇana, ‘지방들의 묘사’). ‘나가라크르타가마’는 1740년 발리 필사자의 간기에서 유래
필사본
롬복·발리의 야자잎(론타르) 사본. 롬복 사본은 현재 인도네시아 국립도서관 소장
지정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2008년 아시아·태평양 목록, 2013년 국제 목록)

쉬움

『나가라크르타가마』는 어떤 작품인가

『나가라크르타가마』는 14세기 자와에서 가장 강력했던 왕국 마자파힛의 하얌 우룩 왕 치세인 1365년(사카력 1287년)에 완성된 고대 자와어 시다. 지은이는 프라판차라는 필명을 썼다. 왕을 기리는 찬가이지만 동시에 궁정과 수도, 동부 자와 농촌을 생생하게 묘사한 기록이며, 전성기 마자파힛 역사를 알려 주는 가장 중요한 문헌 사료다.

이 시는 카카윈, 곧 산스크리트 운율 규칙에 따라 고대 자와어로 지은 장편시 갈래에 속한다. 카카윈 전통은 9세기부터 자와에서 꽃피었다. 대부분의 카카윈이 『라마야나』나 『마하바라타』 같은 인도 서사시를 다시 들려주는 것과 달리, 『나가라크르타가마』는 당대의 사건과 실제 장소를 다룬다. 역사가들이 이 작품을 그토록 높이 치는 까닭이다.

지은이는 이 작품을 ‘지방들의 묘사’라는 뜻의 『데사와르나나』라고 불렀고, 이 제목은 시의 끝부분에 나온다. 더 익숙한 이름 ‘나가라크르타가마’는 흔히 ‘전통으로 완성된 나라’ 또는 ‘나라에 관한 완전한 가르침’으로 옮기는데, 1740년 발리에서 베낀 한 사본의 간기(刊記)에만 나온다. 네덜란드 학자 J. L. A. 브란데스가 1902년 첫 교감본에 이 이름을 쓰면서 널리 굳어졌다.

이 시는 마자파힛이 무너진 뒤에도 자와 궁정 문학이 계속 필사된 롬복과 발리의 야자잎 필사본으로 전한다. 1894년 롬복에서 발견된 사본은 지금 인도네시아 국립도서관에 있다. 유네스코는 『나가라크르타가마』를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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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무엇이 들어 있나: 98편의 지도

『나가라크르타가마』는 98편(푸푸)으로 되어 있으며, 49편씩 똑같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각 편은 네 줄짜리 연 1~10개로 이루어진다. 구성이 치밀해서 학자들은 그 대칭성에 주목해 왔다.

앞부분은 왕과 왕실을 찬양하며 시작해, 마자파힛의 수도와 영역, 그리고 유명한 해외 지역 목록을 묘사한다. 이 부분에서 가장 긴 대목은 동부 자와를 가로질러 루마장까지 이어진 대순행으로, 왕이 마을과 성소와 귀족 영지에 머무는 모습을 따라간다. 마지막은 싱하사리 왕조를 연 라자사(켄 앙록)부터 크르타나가라까지, 그리고 마자파힛을 세운 크르타라자사부터 하얌 우룩까지의 왕통으로 끝난다.

뒷부분은 난다와 숲에서의 왕실 사냥과 수도로의 귀환, 왕의 조상 공경, 무엇보다 할머니 라자파트니를 위한 대규모 추모 제례(스라다), 재상 가자 마다의 죽음, 자와와 발리의 종교 시설 목록, 그리고 해마다 되풀이되는 궁정 회의·행렬·축제를 다룬다.

마지막 편들은 시인 자신에게로 향한다. 다른 시인들이 왕에게 바친 찬사, 그리고 궁정을 떠나 산골 마을에 살며 왕이 충실한 옛 신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프라판차 자신의 사정이다. 이런 개인적인 결말은 드물어서, 시에 인간적인 목소리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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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왕과 함께 떠나는 여행

시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는 대목의 하나는 왕의 순행이다. 마자파힛 왕들은 영역 곳곳을 순행하며 지방 영주를 맞고, 사원을 살피고, 조상의 성소에 참배했다. 궁정과 함께 여행한 프라판차는 수레와 수행원의 긴 행렬, 산과 강과 논이 펼쳐진 풍경, 왕이 머문 마을들을 묘사한다.

시인은 길을 따라 수십 곳의 지명을 드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도 동부 자와의 마을이나 유적과 맞춰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일종의 역사 지리서이기도 하며, 현대 연구자들은 실제로 그 길을 다시 걸어 보기도 했다.

순행에는 종교적 목적도 있었다. 왕은 증조부 크르타나가라를 모신 찬디 싱하사리와, 싱하사리 왕가의 시조 라자사의 성소인 카게넹안을 찾아 참배했다. 죽은 뒤 신격화된 조상을 공경함으로써, 왕국을 지킨다고 믿은 영적인 힘을 북돋운 것이다.

이런 여행은 정치적 연출이기도 했다. 왕이 몸소 지방에 나타나면 지방 통치자들은 충성을 되새겼고, 왕에게 바친 선물과 접대는 복종의 표시였다. 시는 이 장면들을 왕과 백성 사이의 즐거운 조화로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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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시인 프라판차

‘프라판차’는 필명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다양함’이나 ‘세계의 펼쳐짐’을 뜻할 수 있고, 불교 철학에서는 개념이 끝없이 불어나는 희론(戱論)을 가리킨다. 인도네시아 학자들은 ‘어리둥절함’이라는 뜻으로 풀기도 하고, 지은이의 본명이 다섯 음절이었음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한다. 시인은 자신을 궁정 불교 관리의 아들이며 한때 궁정에서 일했다고 소개한다.

인도네시아 역사가 하디 시도물요는 프라판차가 1358년 칙서에 불교 담당 장관(다르마댝샤 링 카소가탄)으로 이름이 오른 당 아차르야 나덴드라라고 제안했다. 그럴듯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테오도르 피조와 P. J. 조트물더 같은 이전 전문가들은 시인 자신이 그 높은 관직에 있었다는 데 의문을 품었다.

프라판차는 궁정에서 물러난 뒤, 산비탈의 카말라사나라는 마을에서 이 시를 지었다. 마지막 편들에서 그는 자신을 스스로 놀리듯,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한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그린다. 이 시는 왕의 명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왕의 은총을 바라는 옛 신하가 바친 것으로 보인다.

불교 성직자라는 프라판차의 처지는 그가 무엇에 주목했는지를 좌우했다. 그는 시바교와 불교 양쪽의 종교 시설, 궁정 의례, 왕실의 영적 지위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카카윈 전통의 운율과 관습을 완전히 익힌 솜씨 좋은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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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역사적 배경: 전성기의 마자파힛

마자파힛은 원나라가 보낸 몽골군의 자와 원정 직후인 1292년 라덴 위자야가 세웠다. 싱하사리의 마지막 왕 크르타나가라의 사위였던 위자야는 먼저 몽골군과 손잡고 찬탈자 자야카트왕을 무너뜨린 뒤 몽골군을 몰아냈다. 지금의 동부 자와 트로울란 부근에 세운 새 도읍은 브란타스강 유역의 풍요로운 논과 교역을 바탕으로 한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

왕국은 14세기 중엽 트리부와나 여왕과 그 아들 하얌 우룩, 그리고 재상 가자 마다 때 전성기를 맞았다. 하얌 우룩은 1350년 열여섯 살에 즉위했다. 후대 전승에 따르면 가자 마다는 1336년 군도의 섬들을 마자파힛 아래 하나로 모으기 전에는 쉬지 않겠다는 ‘팔라파 맹세’를 했다. 원정과 외교로 마자파힛의 영향력은 자와 너머 멀리까지 뻗었다.

『나가라크르타가마』는 이 힘과 자신감의 순간을 그린다. 그러나 어떤 아픈 사건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후대의 연대기 『파라라톤』과 『키둥 순다』 같은 다른 사료는 1357년의 부밧 사건을 전한다. 하얌 우룩과 순다 공주의 혼인을 위해 마자파힛에 온 순다 왕실 일행이 마자파힛 군대와 충돌해 몰살당한 일이다. 시가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찬양시임을 일깨운다.

1389년 하얌 우룩이 죽은 뒤 왕위 분쟁과 1405~06년의 레그렉 전쟁이 왕국을 약하게 만들었다. 15세기에 자와 북부 해안에 무슬림 항구 국가들이 자라나면서 마자파힛은 쇠퇴했고, 16세기 초에 막을 내렸다. 많은 귀족과 사제와 예술가가 발리로 건너갔는데, 이것이 마자파힛 문학이 그곳에 살아남은 까닭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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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수도와 궁정

이 시는 마자파힛 수도를 자세히 묘사한 유일한 당대 기록이다. 왕궁 구역은 두껍고 높은 붉은 벽돌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 담의 정문에는 장식한 커다란 철문이 달려 있었고, 그 바깥에는 신하들이 해마다 모이는 긴 회당, 시장, 신성한 네거리가 있었다. 안쪽에는 종교 건물이 선 뜰, 목욕하는 수로로 둘러싸인 정자, 궁정 하인들의 집, 알현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한 큰 회당이 있었다.

왕의 처소에는 장식한 붉은 벽돌 기단 위의 정자, 조각한 나무 기둥, 흙으로 빚은 장식을 올린 지붕이 있었다. 왕궁 둘레에는 시바교 사제, 불교도, 귀족들의 구역이 있었고, 더 멀리 들판 너머에는 가자 마다의 저택을 비롯한 다른 왕족 구역이 있었다.

트로울란의 고고학 조사는 마자파힛이 벽돌 문명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수로, 스가란 연못 같은 저수지, 가운데가 갈라진 문(찬디 벤타르), 그리고 많은 테라코타 조각과 생활 용품이 나왔다. 항공·위성 사진은 유적 둘레의 수로망을 드러냈다. 시와 발굴은 서로를 보완하지만, 특정 묘사를 특정 유적과 맞추기는 쉽지 않다.

시가 그리는 궁정 생활은 해마다 되풀이되는 의례 주기를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각지의 대표가 수도에 와서 경의를 표했고, 행렬·놀이·춤·잔치가 벌어졌다. 정자와 뜰에 대한 시의 묘사는 뒷날 자와 왕궁(크라톤)과 발리 사원·왕궁의 배치와 비교되어 왔다.

[1][4]

중급

종교: 시바, 부처, 그리고 신이 된 조상

마자파힛은 공식적으로 힌두교(시바교, 그리고 그보다는 덜한 비슈누교)와 불교를 함께 받들었고, 시는 궁정이 두 공동체를 모두 후원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프라판차는 양쪽의 종교 시설을 나열하고 시바교와 불교 업무를 맡은 관리들을 묘사한다. 시는 이슬람을 언급하지 않지만, 수도 권역 안 트롤로요의 1360~70년대 무슬림 묘비는 이미 궁정 가까이에 무슬림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시의 눈에 띄는 생각 하나는 시바와 부처의 합일이다. 프라판차는 죽은 크르타나가라 왕이 지나(부처), 그리고 시바–부처를 비롯한 여러 모습으로 신격화되었다고 적고, 그를 세계의 수호자로 찬양한다. 최고 차원에서 두 종교를 하나로 보는 이 생각은 같은 시대 음푸 탄툴라르의 시 『수타소마』에도 나타나며, 인도네시아의 국가 표어 ‘비네카 퉁갈 이카’(흔히 ‘다양성 속의 통일’로 옮김)가 바로 이 시에서 나왔다.

왕실 조상 숭배는 핵심적이었다. 크르타나가라의 딸이자 왕의 할머니인 라자파트니(가야트리)를 위한 스라다 제례에 관한 긴 서술은, 이레 동안의 화려한 행사 속에서 사제들이 그녀의 영혼을 사자 옥좌 위에 놓인 꽃 인형으로 불러 내리는 모습을 그린다. 그 뒤 그녀는 새 성소에서 불교의 지혜의 여신 프라즈냐파라미타로 모셔졌다.

프라판차에게 이런 의례는 신앙의 행위일 뿐 아니라 왕국 번영의 원천이었다. 왕은 신성의 현현으로 그려졌고, 의례를 올바르게 행하는 것이 나라의 풍요와 질서를 보장했다.

[1][4]

중급

카카윈이라는 예술

카카윈은 산스크리트 궁정 미문시 카비야의 자와식 형식이다. 한 연은 같은 운율의 네 줄로 이루어지며, 운율은 긴 음절과 짧은 음절을 배열하는 산스크리트 체계를 따른다. 시인은 산스크리트 차용어가 많은 고대 자와어를 이 틀에 맞춰 넣어야 했으므로 고도의 기교가 필요했다. 『나가라크르타가마』는 편마다 운율을 바꾸며 다양한 운율을 쓴다.

카카윈은 소리 내어 읽거나 노래하는 것이었고, 오락이자 신앙 행위로 여겨졌다. 시 짓기는 일종의 요가로 이해될 수 있었고, 시구의 아름다움은 신성을 드러내는 길이었다. 프라판차가 왕에게 시를 바친 것도 시를 공양으로 보는 이런 생각과 맞닿아 있다.

마타람 시대의 고대 자와어 『라마야나』나 11세기의 『아르주나위와하』 같은 이전의 고전은 인도 서사시에서 이야기를 가져왔다. 14세기 마자파힛에서도 탄툴라르의 『수타소마』와 『아르주나위자야』 같은 작품으로 전통이 이어졌다. 『나가라크르타가마』가 돋보이는 것은 자연·사랑·전투 묘사 같은 장르의 관습을 실제 당대의 삶에 돌려 썼기 때문이다.

언어가 매우 문학적이고 암시로 가득하므로 해석은 꼼꼼한 문헌학에 달려 있다. 번역자들은 예컨대 지명 목록이 실제 지배를 말하는지 시적 찬사인지, 어떤 낱말이 건물의 종류인지 의례인지를 판단해야 했다. 번역마다 인상이 꽤 다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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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야자잎에서 국가의 보물로

프라판차 당대의 필사본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시는 자와 궁정 문화가 퍼진 발리와 롬복에서 필사자들이 야자잎(론타르)에 거듭 베껴 전했다. 필사자 아르타 파마사는 1740년 동부 발리에서 사본을 마치며 이 시에 ‘나가라크르타가마’라는 이름을 붙인 간기를 덧붙였다.

1894년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가 롬복의 차크라네가라 궁전을 공격했다. 원정에 동행한 문헌학자 J. L. A. 브란데스는 궁전이 불타기 전에 왕실 도서관의 필사본들을 구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필사본들은 ‘롬복 보물’이라 불린 전리품의 일부로 반출되었다. 『나가라크르타가마』 사본은 레이던 대학 도서관(청구기호 L Or 5.023)으로 갔고, 브란데스는 이것이 유일한 사본이라고 믿고 1902년 첫 교감본을 냈다.

1970년대에 네덜란드는 이 사본을 인도네시아에 돌려주었다. 반환 시점은 자료에 따라 1970년에서 1974년 사이로 엇갈린다. 사본은 인도네시아 국립도서관에 NB 9라는 번호로 보관되어 있다. 1978년부터 발리에서 다른 사본들이 발견되었는데, 카랑아슴의 암라푸라에서 나온 『데사와르나나』라는 제목의 사본을 비롯해 사제 가문(그리아)과 왕궁 소장본들이다. 이 사본들 덕분에 학자들은 본문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롬복의 일화는 이 시의 생존이 식민지 폭력과 얽혀 있음을 보여 준다. 학자가 불길에서 구한 책은 동시에 정복의 전리품이었다. 뒷날의 반환은 이 사본을 인도네시아 문화 주권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유네스코는 2008년 『나가라크르타가마』를 아시아·태평양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2013년 국제 목록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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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유산: 마자파힛과 인도네시아라는 생각

20세기 초 번역되자 『나가라크르타가마』는 유럽 식민 지배 이전에 군도의 섬들을 이었던 위대한 토착 국가의 생생한 모습을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통일 인도네시아의 선구로서의 마자파힛 이미지를 끌어왔고, 이 시는 독립운동의 영감이 되었다.

그 영향은 현대의 상징에도 이어진다. 가자 마다의 팔라파 맹세는 1976년부터 쏘아 올린 인도네시아 최초의 통신위성 시리즈에 이름을 주었다. 통신으로 군도를 하나로 잇겠다는 뜻이었다. 국가 표어 ‘비네카 퉁갈 이카’는 같은 마자파힛 문학 세계의 시 『수타소마』에서 왔다.

동남아시아 역사가들에게 이 시는 만달라 모델, 곧 나라를 고정된 국경이 아니라 중심과 충성·조공 관계로 규정하는 정치권력 모델의 핵심 사료이기도 하다. 수마트라·보르네오·말레이반도·술라웨시·소순다 열도·말루쿠·뉴기니 서부의 지역 목록과 시암·참파·캄보디아와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마자파힛 권력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다.

이 지역의 다른 나라에서는 같은 목록을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시에 나오는 지명들은 지금 말레이시아·싱가포르·브루나이·필리핀·동티모르에 있고, 그곳들이 마자파힛의 속령이었다는 주장은 인도네시아 밖의 역사가들이 신중하게 다룬다. 그러므로 이 시는 공유된 지역사와 국가 서사가 만나는 자리에 놓여 있다.

[1][4][6]

심화

논쟁: 찬양시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나가라크르타가마』는 통치자를 찬양하는 문학, 곧 푸자사스트라이며, 은총을 바라는 궁정 출신 인사가 썼다. 모든 내용이 왕과 왕조를 빛내도록 짜여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읽는다. 부밧 사건처럼 궁정에 불리한 일은 빠지고, 왕의 자질은 신성 왕권의 이상화된 언어로 묘사된다.

가장 많이 논의되는 대목은 자와 밖의 땅 수십 곳을 나열한 제13~15편이다. 예전 역사가들은 이를 현대 인도네시아의 대부분과 그 너머를 덮는 마자파힛 제국의 지도로 읽곤 했다. 지금 많은 학자는 마자파힛의 직접 통치가 동부 자와와 발리를 크게 넘지 않았고, 바깥 지역들은 교역·조공·간헐적 원정, 또는 그저 시인의 지리 지식으로 이어져 있었다고 본다. 시 자체도 시암·참파·캄보디아 같은 외국 땅은 복속지가 아니라 우호국이나 ‘보호받는’ 나라로 구분한다.

반대편 끝에서 네덜란드 학자 C. C. 베르흐는 자와 연대기 일반의 사료 가치를 의심하고, 그것을 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례적·주술적 텍스트로 읽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는 그 중간에 선다. 이 시는 궁정과 그 지리와 의례에 대한 진정한 당대 증언이지만, 그 정치적 주장은 비문, 중국 기록, 고고학, 그리고 『파라라톤』 같은 후대 사료와 견주어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 속 사건들의 연대는 비교적 확실하다. 프라판차가 때로는 연대를 수수께끼처럼 표현하는 크로노그램까지 써 가며 사카력 연대를 많이 밝히고,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던 때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두 사료가 엇갈릴 때, 예컨대 왕실 계보의 세부에서 훨씬 뒤에 쓰인 『파라라톤』보다 이 시를 대체로 더 신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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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교감본, 번역, 그리고 제목 문제

이 시에 대한 학문의 역사는 롬복 사본 하나에 바탕한 브란데스의 1902년 교감본에서 시작되었다. H. 케른의 네덜란드어 번역에 N. J. 크롬의 주석을 붙인 책이 1919년에 나왔다. 인도네시아 역사가 슬라멧 물랴나는 1953년 인도네시아어판을, 뒤에 역사 주석서를 냈다. 테오도르 피조의 다섯 권짜리 『14세기의 자와』(1960~63)는 전사·영어 번역·방대한 주석을 담아 지금도 표준 참고서로 쓰인다. 스튜어트 롭슨의 영어 번역 『데사와르나나(나가라크르타가마)』(1995)는 1978년 이후 발견된 발리 사본들을 활용했다.

롭슨 등은 지은이 자신이 붙인 제목 『데사와르나나』를 쓰자고 주장한다. 영역과 그 지방들에 대한 묘사라는, 이 시의 실제 성격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뒷날의 간기에만 나오는 ‘나가라크르타가마’라는 이름은 한 발리 필사자가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 준다. 인도네시아 학자 포르바차라카가 이미 1914년에 원제를 지적했지만,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후대의 이름이 우세하다.

추가 사본의 발견은 이 텍스트가 브란데스의 생각처럼 가느다란 한 가닥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발리의 필사 문화 속에서 전해졌음을 보여 준다. 사본들을 비교하면 필사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고, 발리 독자들이 이 시를 마자파힛에서 물려받은 유산의 일부로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풀리지 않은 문제도 남아 있다. 시인의 정체, 일부 순행의 정확한 연대, 많은 지명의 비정, 관직·건물·의례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의 뜻 등이다. 고대 자와어 어휘는 일부만 이해되어 있으므로, P. J. 조트물더가 편찬한 대규모 고대 자와어–영어 사전을 비롯한 언어 연구가 계속 시의 독법을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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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푸자사스트라(찬양시)
하얌 우룩 왕을 기리는 시. 정보는 풍부하지만 선별적이고 이상화되어 있다.
카카윈
산스크리트 운율로 지은 고대 자와어 궁정시. 『나가라크르타가마』는 이 학문적 형식을 당대의 삶에 적용했다.
왕의 순행
영역을 도는 왕의 여행은 종교적 참배, 정치적 과시, 시찰을 겸했다.
신격화된 조상
죽은 왕과 왕비는 성소에서 신으로 모셔졌고, 그 제례가 왕국을 떠받쳤다.
시바–부처 합일
궁정은 힌두교와 불교의 형상을 하나의 최고 실재의 여러 모습으로 공경했다.
만달라 권력
마자파힛 ‘제국’은 고정된 국경보다 충성과 조공의 동심원을 거느린 중심으로 이해하는 편이 알맞다.
텍스트와 국가
식민 지배 아래 재발견된 이 시는 인도네시아의 식민 이전 통일과 문화유산의 상징이 되었다.

기록

  1. 1292년 — 싱하사리 멸망과 몽골의 자와 원정 뒤 라덴 위자야가 마자파힛 건국.
  2. 1334년 —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따르면 끌룻 화산이 폭발한 해에 하얌 우룩 출생.
  3. 약 1336년 — 가자 마다가 재상이 되고, 후대 전승에 따르면 팔라파 맹세를 함.
  4. 1350년 — 하얌 우룩이 열여섯 살에 라자사나가라라는 이름으로 즉위.
  5. 1357년 — 부밧 사건. 후대 사료에 기록되었으나 이 시에는 언급되지 않음.
  6. 약 1364년 — 가자 마다 사망. 시에 묘사됨.
  7. 1365년 — 프라판차가 사카력 1287년 아스와유자월에 시를 완성.
  8. 1389년 — 하얌 우룩 사망. 왕위 다툼이 뒤따름.
  9. 1740년 — 발리의 필사자가 작품을 ‘나가라크르타가마’라 부르는 간기를 붙여 사본 완성.
  10. 1894년 — 네덜란드군의 롬복 차크라네가라 궁전 공격 때 J. L. A. 브란데스가 사본을 구해 냄.
  11. 1902년 — 브란데스가 첫 교감본 출간.
  12. 1978년 — 암라푸라를 시작으로 발리에서 추가 사본 발견.
  13. 1995년 — 스튜어트 롭슨의 영어 번역 『데사와르나나』 출간.
  14. 2013년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 목록 등재.

용어 풀이

카카윈
산스크리트 운율로 지은 고대 자와어 장편시.
고대 자와어(카위)
약 9~15세기 자와의 문학 언어. 산스크리트 차용어가 많다.
푸푸(pupuh)
한 가지 운율로 된 시의 한 편.
론타르
필기 재료로 손질한 야자잎. 이 시는 론타르 필사본으로 전한다.
간기(colophon)
필사본 끝에 필사자·날짜·제목 등을 적은 기록.
사카력
자와와 인도에서 쓴 기년법. 사카력 1287년은 서기 1365년에 해당한다.
스라다
죽은 이를 위한 추모 제례. 시는 왕의 할머니를 위한 성대한 스라다를 묘사한다.
푸자사스트라
통치자를 찬양하려고 쓴 문학 작품.
만달라
통치자를 중심으로 종속국·동맹국이 동심원처럼 둘러싼 정치권력 모델.
마자파힛
동부 자와의 힌두·불교 왕국(1292~16세기 초). 하얌 우룩 때 전성기.

묻고 답하기

『나가라크르타가마』는 누가 썼나요?

마자파힛 궁정에서 일했던 불교 성직자가 프라판차라는 이름으로 썼어요. 본명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아요.

왜 이름이 두 개인가요?

시인은 ‘지방들의 묘사’라는 뜻의 『데사와르나나』라고 불렀어요. ‘나가라크르타가마’는 뒷날 발리의 필사자가 적은 이름인데, 첫 인쇄본이 이 이름을 쓰면서 널리 퍼졌어요.

역사책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찬양하는 시이지만 그 시대의 실제 사람·장소·사건을 묘사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아주 중요한 사료로 다뤄요.

마자파힛이 시에 나오는 모든 땅을 정말 다스렸나요?

직접 다스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많은 역사가는 마자파힛이 동부 자와와 발리는 직접 다스리고, 먼 곳들과는 교역·조공·동맹 같은 느슨한 관계를 맺었다고 봐요.

이 시는 어떻게 살아남았나요?

수백 년 동안 발리와 롬복에서 야자잎에 손으로 베껴 전했어요. 1894년 롬복에서 반출된 사본은 뒤에 인도네시아로 돌아왔고, 1978년부터 발리에서 다른 사본들도 발견되었어요.

오늘날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왜 중요한가요?

식민 지배 이전에 많은 섬을 이은 위대한 왕국을 보여 주어 독립운동에 영감을 주었고, 유네스코가 인정한 인도네시아의 기록유산이기 때문이에요.

시는 왜 부밧 사건을 말하지 않나요?

찬양시라서 왕과 궁정에 불리한 일은 뺐어요. 이 사건은 『파라라톤』이나 『키둥 순다』 같은 후대 사료로 알려져 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Nagarakretagama. Wikipedia
  2. Kakawin Nagarakretagama. 인도네시아어 위키백과
  3. Empu Prapañca. 인도네시아어 위키백과
  4. Majapahit. Wikipedia
  5. Hayam Wuruk. Wikipedia
  6. Gajah Mada. Wikipedia
  7. Theodore G. Th. Pigeaud, Java in the 14th Century: A Study in Cultural History (전 5권). Martinus Nijhoff, 1960–1963
  8. Stuart Robson (역), Deśawarṇana (Nāgarakṛtāgama) by Mpu Prapañca. KITLV Press, 199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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