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직지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1377년 · 청주 흥덕사 (고려)

한 문장으로

『직지』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찍은 불교 책으로,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직지
이미지: Authored by Baegun Hwaseng (1289-1374), a master of Seon Buddhism in Korea, and published by his students, Seokchan and Daljam in 1377.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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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복사기도 컴퓨터도 없던 옛날에 책을 여러 권 만들려면 어떻게 했을까요? 한 장 한 장 손으로 베껴 쓸 수도 있지만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립니다. 고려 사람들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글자 하나하나를 작은 쇠붙이 도장처럼 만든 거예요.

이 작은 쇠 도장들을 줄지어 늘어놓아 한 쪽을 만들고, 먹을 바른 뒤 종이를 얹어 문지르면 책 한 쪽이 찍혀 나옵니다. 다 찍고 나면 도장을 떼어 내서 다른 쪽을 찍을 때 다시 쓸 수 있어요. 글자를 옮겨 가며 쓴다고 해서 이것을 ‘활자’라고 합니다.

1377년, 청주 근처 흥덕사라는 절의 스님들이 이런 금속활자로 지혜로운 가르침을 담은 책을 찍었습니다. 짧게 『직지』라고 부르는데, ‘곧바로 가리킨다’는 뜻이에요. 마음을 맑게 들여다보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는 옛 스님들의 말씀을 모아 놓은 책이지요.

『직지』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유명한 성경을 찍은 것보다 약 78년 앞서 만들어졌어요. 스님들은 두 권을 찍었지만 지금은 아래 권 한 권만 남아 있고, 프랑스 파리의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습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 책이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프랑스 도서관은 온 인류의 보물로서 그곳에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디에 있든 『직지』는 쇠로 만든 글자로 책을 찍는 생각이 세계 여러 곳에서 자라났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한눈에 보기

정식 서명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백운 화상이 부처와 조사들의 가르침 가운데 마음의 본체를 곧바로 가리키는 요긴한 구절을 뽑아 엮은 책)
엮은이
고려 말의 선승 백운 화상 경한(景閑, 1298–1374). 1372년에 엮음
인쇄
1377년(우왕 3) 7월, 주조한 금속활자로 찍음
장소
청주목 바깥 흥덕사(오늘날 충청북도 청주시 운천동)
현존본
하권 1책(첫 장 없음), 약 24.6×17cm,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소장
목판본
1378년 여주 취암사 간행. 상·하권이 국내에 전함(보물 제1132호)
지위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2004년부터 ‘유네스코 직지 세계기록유산상’ 제정

쉬움

『직지』는 어떤 책인가

『직지』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쉽게 말해 선집(選集)이다. 과거의 부처들과 이름난 선사(禪師)들의 짧은 법문·일화·게송을 골라 모아, 수행자가 자기 본래의 성품을 깨닫도록 돕는 책이다. ‘직지’라는 말은 선종에서 널리 쓰는 구절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곧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그 성품을 보면 부처가 된다’에서 왔다.

『직지』가 유명한 까닭은 내용보다 만든 방법에 있다. 책 끝에 찍힌 간기(刊記)에 따르면 1377년 7월 청주목 바깥의 흥덕사에서 주조한 활자, 곧 금속활자로 찍었다. 이보다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은 세계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유네스코는 이를 인정해 2001년 이 책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스님들은 이 책을 상·하 두 권으로 찍었다. 상권은 전하지 않고, 첫 장이 떨어져 나간 하권만 남아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에 소장되어 있다. 도서관은 디지털 사본을 온라인으로 공개하고 있다. 금속활자로 찍은 이듬해인 1378년에는 다른 제자들이 같은 내용을 목판에 새겨 다시 찍었고, 이 목판본은 국내에 전한다.

[5][2][1]

쉬움

쇠로 만든 글자로 어떻게 책을 찍을까

당시 고려의 책은 한자로 썼다. 한자는 몇십 자로 된 알파벳과 달리 글자 하나가 낱말이나 그 일부를 나타내므로 수천 가지 글자가 필요하다. 활자로 인쇄하려면 한 쪽에 나오는 글자마다 작은 쇠붙이를 하나씩 따로 만들어야 했고, 자주 쓰는 글자는 여러 벌 만들어야 했다.

초기 고려 활자를 만든 방법으로 흔히 밀랍 주조법이 거론된다. 밀랍에 글자를 새기고 고운 흙으로 감싼 뒤 열을 가하면 밀랍이 녹아 빠지면서 글자 모양의 빈 틀이 생긴다. 여기에 녹인 쇠붙이를 부어 식힌 다음 틀을 깨면, 글자가 거꾸로 도드라진 작은 금속 도장이 나온다.

인쇄공은 이 활자들을 원고에 맞춰 판 틀 안에 한 줄씩 벌여 놓고 움직이지 않게 고정한 다음, 붓으로 먹을 바르고 얇은 종이를 얹어 뒤에서 살살 문질렀다. 훗날 구텐베르크가 쓴 나사식 압착기 같은 것은 쓰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 찍고 나면 판을 풀어 같은 활자로 다음 쪽을 짰다.

『직지』를 보면 절의 작업장에서 이 일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줄이 삐뚤어진 곳이 있고, 먹색이 진한 곳과 옅은 곳이 섞여 있으며, 몇몇 글자는 거꾸로 찍히거나 덜 찍혔다. 이런 작은 실수가 오히려 중요한 증거가 된다. 통판에 새긴 목판이 아니라 낱낱의 활자로 찍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5][3][6]

쉬움

책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

『직지』는 수행을 위한 교과서다. 엮은이 백운 화상은 과거 일곱 부처(과거칠불)에서 시작해 인도와 중국 선종의 조사(祖師)들에 이르기까지, 앞선 스승들의 행적과 말씀 가운데 요긴한 대목을 가려 뽑았다. 많은 대목은 제자와 스승이 만나 문답하는 짧은 이야기로, 스승의 뜻밖의 대답이 제자를 문득 깨닫게 한다.

중심 사상은 부처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선종은 사람의 마음이 본래 맑고 깨끗하며, 자기 성품을 밝게 보면 자기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고 가르친다. ‘마음의 본체를 곧바로 가리킨다’는 책 이름이 이 가르침을 한마디로 담고 있다.

이 책을 흔히 ‘직지심경(直指心經)’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잘못된 이름이라고 지적한다. 경(經)은 부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을 가리키는데, 『직지』는 후대 승려가 요긴한 구절을 가려 엮은 요절(要節)이기 때문이다.

[2][5]

중급

백운 화상과 고려 불교

백운 화상 경한(1298–1374)은 고려 말의 선승이다. 1351년 몽골의 원나라가 다스리던 중국에 건너가 임제종의 석옥 청공(石屋淸珙) 선사에게 배웠다. 국내 기록에 따르면 석옥에게서 선사들의 어록을 모은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받아 왔고, 뒤에 이를 크게 보태 상·하 두 권으로 엮었다. 1372년, 일흔다섯 살 무렵 엮기를 마쳤고, 2년 뒤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했다.

불교는 고려의 중심 종교로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절은 학문의 중심이었고 인쇄 경험도 풍부했다. 고려는 불교 경전 전체를 두 번이나 목판에 새겼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몽골 침입기인 13세기에 새긴 팔만대장경이다. 불경을 찍어 퍼뜨리는 일은 시주한 사람과 이웃에게 복을 가져오는 공덕으로 여겨졌다.

『직지』 끝의 간기에는 흥덕사에서의 인쇄를 백운의 제자 석찬(釋璨)과 달잠(達湛)이 맡았고, 비구니 묘덕(妙德)이 시주했다고 적혀 있다. 비구니가 후원자로 나선 것은 고려의 여성이 신앙생활과 책의 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보여 준다.

1370년대는 어지러운 시대였다. 고려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애썼고, 왜구가 해안을 휩쓸었으며, 1392년 조선 건국으로 이어질 정치적 격동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가장 새로운 기술로 선의 가르침을 찍어 낸 것은 스님들이 자기 전통을 지키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보여 준다.

[2][5]

중급

인쇄의 역사 속 『직지』의 자리

동아시아의 인쇄는 한 쪽 전체를 나무판 하나에 거꾸로 새기는 목판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는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751년 이전에 찍은 것으로 보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있어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활자는 그 뒤에 나왔다. 중국의 학자 심괄(沈括)은 1040년대에 필승(畢昇)이라는 장인이 구운 흙으로 활자를 만들었다고 기록했고, 중국과 위구르에서는 나무 활자도 쓰였다.

고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활자를 쇠로 부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는 13세기 전반에 주조한 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찍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책은 전하지 않는다. 또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1239년의 목판본이 남아 있는데, 그 발문에 금속활자본(주자본)을 바탕으로 다시 새겼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들은 『직지』보다 백 년 이상 앞서 고려에서 금속활자가 쓰였음을 보여 준다. 다만 실물로 남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직지』다.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나라가 금속활자를 대대적으로 만들었다. 1403년 계미자를 주조했고, 1434년 세종 때에는 훨씬 정교한 갑인자를 만들었다. 관청의 활자는 『직지』를 찍은 사찰 활자보다 고르고 정밀했으며, 정부 문서와 유교 경전, 『조선왕조실록』 같은 역사서를 찍는 데 쓰였다.

유럽에서는 15세기 중엽 마인츠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를 발전시켰다. 그의 42행 성서는 1454–1455년 무렵 완성되었으니 『직지』보다 약 78년 늦다. 구텐베르크의 방식은 활자를 빨리 부어 내는 주형, 합금, 기름 성분의 잉크, 나사식 압착기를 결합한 것으로, 몇십 자로 이루어진 알파벳에 잘 맞았다. 이 기술은 빠르게 퍼져 유럽 사회를 바꾸었다.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는 주로 국가와 사찰의 도구로 남아 비교적 적은 부수를 찍었다.

[3][6][5]

중급

『직지』는 어떻게 파리로 갔나

1377년 이후 500여 년 동안 금속활자본 『직지』의 행방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19세기 말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의 수집품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는 1888–1891년, 그리고 1896–1906년에 서울에 머물며 한국의 고서와 도자기를 모았다. 그가 『직지』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가 입수했을 때 이미 상권은 없었고, 하권도 첫 장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플랑시 아래에서 일한 학자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은 한국 고서 목록인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éenne)』를 펴냈는데, 1901년의 보유편에 『직지』를 싣고 1377년에 금속활자로 찍은 책임을 밝혔다. 표지에는 쿠랑이 쓴 것으로 알려진, 연대가 1377년인 가장 오래된 한국 활자본이라는 프랑스어 메모가 남아 있다.

1911년 플랑시가 수집품을 파리 경매에 내놓았을 때, 보석상이자 고서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Henri Vever)가 『직지』를 180프랑에 샀다. 베베르가 세상을 떠난 뒤 1950년 이 책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들어갔고, 지금은 동양 필사본 부서에 보관되어 있다.

[5][4]

중급

다시 찾은 『직지』: 박병선과 흥덕사 터

『직지』는 오랫동안 도서관 서고에 조용히 있었다. 그 가치를 널리 알린 사람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한 역사학자 박병선(1923–2011)이다. 그는 이 책을 연구해 간기의 의미를 확인했고, 1972년 유네스코와 함께 연 ‘세계 도서의 해’ 기념 전시에 『직지』가 출품되어 현존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남은 문제는 흥덕사가 정확히 어디였는가였다. 간기에는 청주목 바깥이라고만 적혀 있었고 절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1985년 청주대학교 발굴단이 청주 운천동의 절터를 발굴해 ‘흥덕사’라는 이름이 새겨진 유물을 찾아내면서 위치가 확인되었다.

절터는 1990년대 초에 정비되었고, 1992년 바로 옆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박물관은 2000년부터 『직지』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청주는 ‘직지의 도시’를 내세워 축제를 열고 잃어버린 활자를 복원하는 사업을 지원해 왔다.

박병선은 같은 도서관에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가져간 의궤도 찾아냈다. 그의 연구는 이 의궤들이 2011년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이어진 긴 반환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5][4][7]

중급

오늘의 『직지』: 기억과 자부심, 그리고 세계의 상

2001년 9월 4일 『직지』 하권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기록물을 올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2004년 유네스코는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유네스코 직지 세계기록유산상’을 만들어, 기록유산을 보존하고 널리 쓸 수 있게 한 기관에 수여하고 있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직지』를 팔만대장경, 15세기 훈민정음 창제와 함께 우리 과학기술과 문화의 이른 성취를 보여 주는 상징으로 가르친다. 박물관에는 복제본과 디지털 영인본이 전시되고, 『직지』의 글자꼴을 바탕으로 한 서체도 공개되었다.

청주시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상·하권의 금속활자를 되살리는 사업을 벌였다. 장인들은 밀랍 주조법을 쓰고, 빠진 부분은 1378년 목판본을 참고해 수만 자를 재현했다. 이런 복원은 스님들이 어떻게 작업했을지를 시험하는 실험이지만, 사라진 상권의 실제 모습을 확정해 주지는 못한다.

『직지』는 세계사를 둘러싼 논의에도 등장한다. 활자 인쇄가 오직 유럽의 발명이라는 생각에 의문을 던지고, 기술이 여러 중심에서 서로 이어지며 발전했다는 그림을 보여 주는 사례로 자주 쓰인다.

[1][5][4]

심화

『직지』는 누가 가져야 하나: 소유권 논쟁

『직지』는 오랜 논쟁의 한가운데 있다. 많은 한국 단체는 이 책이 한국 문화유산의 핵심이므로 만들어진 나라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국가 소장품의 양도를 금지하는 프랑스 법에 근거해, 『직지』가 합법적으로 들어왔고 이제 인류 공동의 유산이며 파리에서 잘 보존되고 공개되고 있다는 입장을 지킨다.

이는 외규장각 의궤의 경우와 다르다. 의궤는 1866년 프랑스군이 군사 원정 중에 약탈해 간 것으로, 오랜 협상 끝에 2011년 5년마다 갱신하는 대여 형식으로 돌아왔다. 반면 『직지』는 외교관이 사들인 뒤 공개 경매로 팔린 것으로 보여, 법적으로 반환을 요구할 근거가 훨씬 약하다. 그래서 국내 논의는 법적 반환보다 전시를 위한 대여, 연구 접근, 디지털 공유 쪽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

이 논쟁은 세계의 박물관이 마주한 더 큰 물음과 이어진다. 법적 소유권과 원산지 공동체의 문화적 유대를 어떻게 저울질할 것인가, 한 나라가 보관하는 물건이 ‘인류의 유산’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디지털 공개가 실물 반환의 필요를 줄일 수 있는가. 정해진 답은 없으며, 양쪽 모두에 진지하고 합리적인 주장이 있다.

[5][4]

심화

‘최초’가 아니라 ‘현존 최고’: 학자들의 물음

전문가들은 『직지』를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고 조심스럽게 부른다. 문헌 기록으로 보면 고려는 몽골 전쟁기의 강화도 시대인 1230년대에는 이미 주조 활자를 썼고, 그보다 이를 가능성도 있다. 『상정고금예문』은 이규보의 기록으로만 알려져 있고, 1239년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목판본은 금속활자본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려 줄 뿐이다. 『직지』의 가치는 자기 간기에 정확한 연대와 장소가 적힌 실물 증거라는 데 있다.

『직지』보다 앞선 실물 활자가 있다는 주장은 논란을 불렀다. 2010년 ‘증도가자’라 불리는 금속활자들이 『직지』보다 앞선 고려 활자일 수 있다며 공개되었다. 여러 해의 분석 끝에 문화재청은 2017년 출처와 연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며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는 여전히 『직지』를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실물로 본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에게 영향을 주었는가도 자주 나오는 물음이다. 몽골 제국 시대 유라시아의 교역·외교로를 따라 지식이 전해졌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런 전파를 보여 주는 문헌 증거는 없고, 주조 방식·잉크·압착기·문자 체계 등 두 방식의 기술적 차이도 크다. 두 발전이 서로 독립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며, 유라시아 교류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끝으로 학자들은 한국의 금속활자가 왜 근대 초 유럽 같은 ‘인쇄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았는지를 논한다. 한문에 필요한 방대한 글자 수, 작은 서적 시장, 국가와 사찰의 인쇄 통제, 오래 거듭 찍는 책에는 여전히 효율적이던 목판 인쇄 등이 설명으로 제시된다. 인쇄의 사회적 쓰임이 달랐으므로 하나의 ‘혁명’ 모델로 두 사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견해도 있다.

[3][6][5]

심화

증거 읽기: 간기, 종이, 활자

가장 중요한 1차 증거는 마지막 장의 간기다. 여기에는 ‘선광 7년 정사 7월 청주목 외 흥덕사에서 주자(鑄字)로 인쇄했다’는 내용, 곧 우왕 3년(1377) 7월 청주목 바깥 흥덕사에서 주조 활자로 찍었다는 사실과 관여한 승려·시주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간기가 본문과 같은 인쇄의 일부이므로 그 연대는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본다.

책의 물리적 특징도 활자 인쇄를 뒷받침한다. 같은 글자가 서로 다른 장에서는 똑같은 모양으로 되풀이되지만 한 장 안에서는 되풀이되지 않는데, 이는 한정된 활자를 돌려쓸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줄이 약간 기울고, 먹의 농도가 고르지 않으며, 거꾸로 되거나 덜 찍힌 글자, 활자 가장자리의 얼룩이 보인다. 1378년 목판본은 이와 달리 새긴 판 특유의 반듯한 줄을 보인다. 목판본에는 이색(李穡)의 서문이 더해졌고, 간기에는 제자 법린(法麟)이 취암사에서 간행했다고 적혀 있다.

현존 금속활자본은 약 24.6×17cm이며, 얇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엮는 동아시아식 제본이고, 표지는 뒤에 새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보존·촬영 자료와, 같은 시기 흥덕사 활자로 찍은 다른 고려 책들을 비교하면 글자 하나하나의 모양과 크기를 연구할 수 있다. 활자를 밀랍 주조로 만들었는지 주물사(모래) 주조로 만들었는지는 아직 논의 중이며, 청주의 밀랍 주조 복원 같은 작업은 근거 있는 가설로 이해해야 한다.

[2][5][3]

핵심 개념

활자 인쇄
글자마다 낱개로 만든 활자를 짜 맞추어 한 쪽을 찍고, 다시 풀어 다른 쪽에 재사용하는 인쇄 방식.
최초가 아닌 현존 최고
『직지』는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기록상 그 전에도 금속활자가 쓰였지만 그 책들은 전하지 않는다.
선(禪)의 가르침
자기 마음을 밝게 보면 그것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는 가르침. ‘직지인심 견성성불’.
증거로서의 간기
책 끝의 간기가 인쇄 연대·장소·방법을 밝혀 주어, 책 자체가 정확한 역사 문서가 된다.
사찰 인쇄
『직지』는 절의 작업장에서 스님들이 비구니의 시주를 받아 찍었다. 고려 불교 공동체는 기술과 학문의 중심이었다.
여러 중심의 기술사
인쇄술은 한 번에 한 곳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와 유럽 등 여러 곳에서 발전했다.
문화유산과 소유권
전쟁이 아니라 구매로 나라 밖에 나간 문화유산을 누가 가져야 하는가라는 물음.

기록

  1. 1239년 —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금속활자본을 바탕으로 목판에 다시 새김. 고려에서 이미 금속활자를 썼다는 증거.
  2. 1351년 — 백운 화상이 원나라에 건너가 석옥 청공에게 배움.
  3. 1372년 — 백운 화상이 상·하 두 권의 선집을 엮음.
  4. 1377년 — 7월, 제자들이 청주목 바깥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를 찍음.
  5. 1378년 — 여주 취암사에서 이색의 서문을 붙여 목판본을 간행.
  6. 약 1455년 — 마인츠에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완성. 『직지』보다 약 78년 뒤.
  7. 1901년 — 모리스 쿠랑이 『한국서지』 보유편에 『직지』를 수록.
  8. 1911년 — 앙리 베베르가 파리 경매에서 『직지』를 180프랑에 구입.
  9. 1950년 — 『직지』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들어감.
  10. 1972년 — 박병선의 연구를 거쳐 파리 ‘세계 도서의 해’ 전시에 출품.
  11. 1985년 — 발굴로 청주 흥덕사 터의 위치가 확인됨.
  12. 2001년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용어 풀이

고려
918년부터 1392년까지 한반도를 다스린 왕조. 영어 이름 ‘Korea’가 여기서 나왔다.
선종(禪宗)
참선과 직접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불교 종파. 중국에서는 찬(Chan), 일본에서는 젠(Zen)이라 한다.
간기(刊記)
책 끝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가 찍었는지를 적은 기록.
밀랍 주조법
밀랍으로 만든 모형을 흙으로 감싼 뒤 녹여 빼고, 빈 틀에 쇳물을 부어 만드는 방법.
목판 인쇄
한 쪽 전체를 나무판에 거꾸로 새겨 찍는 인쇄 방식.
요절(要節)
요긴한 구절을 가려 뽑아 엮은 것. 부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經)과 구별된다.
의궤(儀軌)
조선 왕실의 행사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책. 1866년 프랑스가 가져간 외규장각 의궤는 2011년 돌아왔다.
세계기록유산
세계적으로 중요한 기록물을 등재해 보존을 돕는 유네스코 사업.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파리에 있는 프랑스의 국립도서관. 『직지』 금속활자본 하권을 소장하고 있다.

묻고 답하기

『직지』는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오래되었나요?

네. 『직지』는 1377년에 찍었고, 구텐베르크 성서는 1454–1455년 무렵 완성되었으니 약 78년 차이가 납니다.

인쇄술은 한국이 발명했나요?

인쇄술을 한 나라가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목판 인쇄와 초기 활자는 중국에서 발전했고, 고려는 금속활자를 앞서 개척했습니다. 『직지』는 그렇게 찍은 책 가운데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왜 한 권만 남았나요?

19세기 말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가 입수했을 때 이미 상권이 없었습니다. 상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직지』를 직접 볼 수 있나요?

원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으로 전시되는 일이 드뭅니다. 도서관이 온라인으로 디지털 사본을 공개하고 있고,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복제본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왜 『직지』를 돌려주지 않나요?

도서관은 합법적으로 입수했고 인류 공동의 유산이라는 입장이며, 프랑스 법도 국가 소장품의 양도를 금지합니다. 많은 한국인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반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직지』보다 오래된 금속활자 실물은 없나요?

‘증도가자’처럼 더 오래된 고려 활자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문화재청은 진위와 연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연대가 확실한 가장 이른 증거는 여전히 『직지』입니다.

목판이 아니라 활자로 찍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나요?

간기에 그렇게 적혀 있고, 같은 글자가 다른 장에서 똑같이 되풀이되며, 줄이 고르지 않고 거꾸로 찍힌 글자가 있는 등 물리적 흔적도 일치합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Baegun hwasang chorok buljo jikji simche yojeol (vol. II), the second volume of “Anthology of Great Buddhist Priests’ Zen Teachings”.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2001
  2.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3. 금속활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4. Jikji. Wikipedia
  5. 직지심체요절. 위키백과
  6. Movable type. Wikipedia
  7. Heungdeoksa. Wikipedia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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