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1392–1865년 · 한성 (조선)

한 문장으로

『조선왕조실록』은 1392년부터 1863년까지 조선 임금들의 치세를 날마다 기록한 나라의 공식 역사책으로, 임금조차 함부로 고칠 수 없게 사관들이 썼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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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누군가 나라의 지도자를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그날 있었던 일을 모두 적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회의를 했는지, 누구와 다투었는지, 잘한 일과 잘못한 일까지요. 조선에는 정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사관’이라는 역사 기록관이에요.

사관은 임금이 나랏일을 볼 때면 늘 곁에 앉아 붓으로 빠르게 적었고, 그 기록을 비밀로 지켰어요. 임금은 그 기록을 볼 수 없었어요. 사관이 겁내지 않고 사실대로 쓸 수 있게 하려는 규칙이었지요.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요. 태종 임금이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졌어요. 창피했던 임금은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사관은 임금이 넘어진 일과 그 말까지 모두 적었고, 우리는 지금도 그 기록을 읽을 수 있어요.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신하들이 기록을 모두 모아 그 임금 시대의 역사책을 만들었어요. 500년 가까이 쌓인 이 책들은 1,800권이 넘어요. 한 왕조가 이렇게 오랫동안 끊이지 않고 남긴 기록은 세계에서도 드물어요.

불이나 전쟁으로 없어지지 않도록 같은 책을 여러 벌 만들어 깊은 산속 특별한 창고에 나누어 두었어요. 지금은 누구나 인터넷으로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을 읽을 수 있어요.

한눈에 보기

수록 기간
태조(1392)부터 철종(1863)까지 25대 472년
분량
1,893권(1,894권으로 세기도 함) 888책, 약 4,900만 자
언어
한문
편찬
임금이 죽은 뒤 설치한 임시 관청 실록청이 사관의 사초와 각종 관청 기록을 바탕으로 편찬
형식
연·월·일 순의 편년체. 초기 3대는 필사본, 이후는 활자로 인쇄
현존본
주로 정족산본·태백산본(서울대 규장각, 국가기록원)과 오대산본 일부
지위
국보(1973년 지정),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열람
국사편찬위원회가 원문과 국역을 온라인으로 공개

쉬움

『조선왕조실록』은 어떤 책인가

『조선왕조실록』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를 다스린 조선 왕조 임금들의 공식 역사다. 임금마다 따로 ‘실록’이 있어 그 치세의 일을 날짜순으로 기록한다. 시조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의 실록을 합치면 472년에 이른다.

분량은 엄청나다. 흔히 1,893권 888책, 약 4,900만 자로 센다. ‘권’은 동양식 책의 내용 단위이고, 여러 권을 한 책으로 묶기도 한다. 실록은 동아시아의 행정과 학문에서 두루 쓰던 한문으로 쓰였다. 한 왕조가 가장 오래 이어서 남긴 공식 기록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실록은 임금의 업적을 늘어놓은 목록이 아니다. 조정의 논쟁, 신하들의 상소, 인사와 형벌, 법령, 명·일본·여진과의 외교, 기근과 홍수, 지진과 혜성까지 기록되어 있다. 14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한국사를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봐야 할 기본 사료다.

[2][5][1]

쉬움

임금을 지켜본 사관들

실록의 출발점은 사관(史官)이었다. 예문관의 하급 관원 여덟 명이 전임 사관으로 일했고, 다른 여러 관원도 본래 직무와 함께 사관 직함을 겸했다. 임금이 신하를 만나거나 보고를 듣거나 경연을 열 때는 적어도 한 명의 사관이 반드시 자리를 지켰다. 조선의 임금은 사관 없이 나랏일을 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사관의 기록을 사초(史草)라 한다. 공식 기록 외에도 사관은 집에 따로 보관하는 가장사초(家藏史草)를 썼는데, 여기에는 자기 논평을 덧붙이기도 했고 다음 실록을 편찬할 때 비로소 제출했다. 사초는 사관만 볼 수 있었고, 그 내용을 누설하거나 고치면 무거운 벌을 받았다.

무엇보다 임금은 사초도, 자기 치세의 실록도 볼 수 없었다. 임금이 자기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없으면 정직하게 쓴 사관을 처벌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1404년 말에서 떨어진 태종이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사관이 그 명령까지 적었다는 이야기는 이 원칙을 보여 주는 예로 자주 인용된다.

[5][2][4]

쉬움

실록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임금의 실록은 그가 죽은 뒤, 다음 임금 때 편찬했다. 조정은 임시로 실록청(實錄廳)을 두고 대개 영의정이나 좌·우의정 가운데 한 사람을 총재관으로 삼았으며, 대제학 등 글 잘하는 학자들을 편찬관으로 뽑았다. 실록청은 여러 방(房)으로 나뉘어 해마다 맡을 연도를 나누었다.

각 방은 모을 수 있는 자료를 모두 모았다. 사관의 사초, 춘추관이 작성한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의 일기, 경연 기록, 각 관청의 등록 등이다. 이를 연·월·일 순으로 정리해 첫 원고인 초초(初草)를 썼다.

도청(都廳)은 초초를 다듬어 잘못을 고치고 빠진 것을 보태고 불필요한 것을 빼서 중초(中草)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문장과 체제를 통일해 정초(正草)를 완성했다. 실록을 인쇄하거나 베껴 사고에 봉안한 뒤에는 사초와 원고를 물에 씻어 글씨를 지웠는데, 이를 세초(洗草)라 한다. 기밀을 지키고 귀한 종이를 다시 쓰기 위해서였다.

[2][5]

중급

산속의 사고: 역사를 지킨 창고

첫 실록인 『태조실록』은 1413년에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두 벌을 만들어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 사고에 두었다. 1445년 세종은 이것만으로는 불안하다며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새로 두어 네 벌을 보관하게 했다. 세종 이후의 실록은 손으로 베끼지 않고 활자로 인쇄해 여러 벌을 만들기 쉬워졌다.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이 정책이 옳았음과 동시에 그 한계도 보여 주었다. 춘추관·충주·성주의 사고가 모두 불탔고, 전주 사고의 실록만 살아남았다. 일본군이 이르기 전에 안의와 손홍록 등 지역 선비들이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숨겼기 때문이다. 조정은 뒤에 이를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전쟁이 끝난 뒤 조정은 1603년부터 1606년까지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의 실록을 다시 인쇄했다. 살아남은 전주본과 교정본을 합쳐 다섯 벌이 되자, 한 벌은 춘추관에 두고 나머지 네 벌은 강화도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의 깊은 산과 섬에 나누어 보관했다. 사고 근처의 절들이 이를 지키는 일을 도왔다.

춘추관의 실록은 1624년 이괄의 난 때 불타 다시 복구되지 못했다. 묘향산 실록은 후금과의 관계가 나빠지자 1633년 무주 적상산으로 옮겼고, 병자호란 때 훼손된 마니산 실록은 뒤에 같은 강화도의 정족산으로 옮겼다. 이후로는 네 벌을 유지하며 새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네 사고에 함께 보관했다.

[5][2][4]

중급

실록이 들려주는 것

실록은 수많은 자료를 합쳐 만들었기 때문에 나라가 한 거의 모든 일을 담고 있다. 정치, 법률, 조세, 군사, 외교, 의례, 교육과 과거 제도, 그리고 자연 현상까지다. 가뭄·홍수·전염병과 진휼 기사는 나라가 재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보여 주고, 일식·혜성·유성·이상 기후 기록은 오늘날 과학자들이 하늘과 기후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쓰인다.

실록에는 “사신(史臣)은 논한다”로 시작하는 사관의 논평도 많이 남아 있다. 사관은 여기서 관리의 인품을 평가하고 정책을 비판했다. 그래서 실록은 사실의 기록이면서 도덕적·정치적 목소리를 지닌 책이기도 하다.

이름이 ‘실록’이 아닌 것도 있다.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기록은 ‘일기(日記)’로 낮추어 부른다. 『광해군일기』는 끝내 인쇄되지 않고 필사본으로 전하는데, 편찬자들이 고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편찬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

실록은 동아시아사 전체에도 중요한 사료다. 조선은 사신의 왕래, 외교 문서, 이웃 나라의 정보를 자세히 적었기 때문에 명·청, 일본, 류큐, 여진에 관한 연구에도 널리 쓰인다.

[5][2]

중급

실록 기사 읽는 법

기사는 날짜로 시작한다. 해는 이어지는 연호가 아니라 임금의 재위 연수로 세고, 달은 음력을 따르며, 날은 60갑자로 적는다. 조선에서는 선왕을 존중하는 뜻에서 새 임금이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삼는 것이 원칙이었고(유년칭원법), 즉위한 해는 ‘즉위년’이라 했다. 이를 서양력으로 바꾸려면 주의가 필요하며, 오늘날 온라인판은 환산 날짜를 함께 보여 준다.

날짜 아래에는 짧은 기사가 하나 이상 이어진다. 임금이 경연을 열었다, 어느 신하가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이렇고 임금의 답은 이러했다, 어느 도에서 가뭄을 보고했다는 식이다. 긴 상소를 통째로 싣는 경우가 많아 실록의 분량이 커졌다.

한국사의 유명한 장면도 이렇게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종실록』 세종 25년 12월 기사에는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오늘날의 한글이다. 이런 기사를 일상적인 나랏일 사이에서 읽으면 조정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였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3][5]

중급

유교의 역사관

실록 편찬은 중국에서 온 전통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임금마다 실록을 편찬했고, 이것이 뒤에 정사(正史)의 바탕이 되었다. 고려도 실록을 편찬했지만 전하지 않는다. 조선은 이 전통을 유난히 진지하게 이어 갔다.

조선은 성리학을 신봉한 관료와 학자들이 세운 나라다. 성리학에서 역사는 임금이 비추어 보는 거울이었다. 좋은 정치와 나쁜 정치를 사실대로 적으면 덕을 기리고 잘못을 드러내 후대 임금을 이끌 수 있다고 보았다. 실록을 ‘만세(萬世)에 전한다’는 말에는 실록이 지금의 임금이 아니라 후세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이 이상은 사관에게 실제 힘을 주었지만 위험도 안겼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의 사초에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 연산군에게 알려졌다. 연산군은 이를 왕실의 정통성을 비난한 글로 보았고, 학자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는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정직한 역사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었는지, 그래서 왜 비밀 유지가 중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다.

[5][2]

중급

식민지 시기의 수난에서 온라인 공개까지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한 뒤 실록은 식민 당국의 손에 넘어갔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서울로 옮겨졌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넘어갔고, 적상산본은 이왕직 장서각으로 갔다. 오대산본은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는데,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고 일부만 1932년 경성으로 돌아왔다.

1945년 광복 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경성제국대학을 이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남았고, 태백산본은 뒤에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으로 옮겨졌다.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때 북으로 옮겨져 평양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에는 도쿄대학에 남아 있던 오대산본 47책이 돌아왔다.

실록은 식민지 시기에 처음 사진 영인되었고, 1950년대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축쇄 영인본을 펴냈다. 북한은 20세기 후반 현대어 번역본 전권을 냈고, 남한에서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회가 1968년부터 1993년까지 413책의 국역본을 완간했다. 1995년 CD-ROM판이 나왔고, 2006년부터는 원문·번역·원본 이미지를 누구나 온라인으로 볼 수 있다. 201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장기 영어 번역 계획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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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문화유산, 자부심, 그리고 대중문화

아래에서 다룰 마지막 두 임금의 실록을 뺀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기록의 긴 기간, 다양한 주제, 사관의 독립성을 지키려 한 세심한 제도를 높이 평가했다.

실록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사극, 영화, 소설, 웹툰의 바탕이다. 작가들은 실록에서 줄거리와 대사와 인물을 찾고, 온라인 공개 이후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드라마가 기록과 얼마나 다른지 ‘실록을 찾아보는’ 일이 유행이 되었다.

한국인에게 실록은 『승정원일기』, 의궤 등과 함께 기록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실록의 가치가 민족적 자부심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증거로서의 쓸모에 있다고 강조한다.

[1][2][5]

심화

실록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편향, 수정, 침묵

공정한 역사라는 이상이 실록을 중립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16세기 말부터 조선 정치는 붕당이 주도했고, 대개 집권 붕당이 실록청을 장악했다. 뒤에 다른 붕당이 집권하면 실록을 고쳐 다시 편찬하기도 했다. 1657년에 완성된 『선조수정실록』, 현종 대의 『현종개수실록』, 경종·숙종 대의 수정·보궐 기록이 대표적이다. 주목할 점은 원래 실록을 없애지 않고 두 판본을 함께 보관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오늘날 연구자들은 둘을 비교해 해석이 갈린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록에는 구조적 한계도 있다. 조정과 중앙 정부의 시각에서 쓰였기 때문에 지방 사회, 평민, 여성, 노비, 종교적 소수자는 주로 나라의 관심사가 되었을 때만 등장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기사가 짧고 형식적으로 바뀌며, 붕당의 편집은 외교보다 내정 기사에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있다.

고종(재위 1864–1907)과 순종(재위 1907–1910)의 실록은 따로 다룬다. 1927년부터 1935년 사이 일제의 감독 아래 이왕직이 편찬했고, 사초를 바탕으로 하는 전통 편찬 규례를 따르지 않았으며, 식민 당국의 관점이 반영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이를 『조선왕조실록』 본편에서 제외하며, 국보 지정과 유네스코 등재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비판적으로 읽으면 여전히 쓸모 있는 사료다.

그래서 오늘날의 연구는 실록을 다른 자료와 함께 읽는다. 훨씬 자세한 『승정원일기』, 임금의 일기인 『일성록』, 개인의 일기와 문집, 읍지, 중국·일본의 기록 등이다. 디지털화는 이런 연구를 크게 바꾸어, 전체 본문을 검색하고 수백 년에 걸친 용어의 변화를 추적하고 계량적 방법을 쓰는 일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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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남은 물음과 연구 방향

사관이 실제로 얼마나 독립적이었는가는 논쟁거리다. 임금은 실록을 볼 수 없었지만 조정의 의제를 정하고 편찬관을 임명하며 다른 이유로 관리를 처벌할 수 있었다. 1498년과 그 뒤의 사화들은 보호 장치가 무너질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어떤 학자는 이 이상이 놀랍도록 오래 지켜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다른 학자는 사대부가 기록의 저자이자 대상이었던 만큼 실록이 이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 측면을 강조한다.

실록의 물리적 역사도 연구 대상이다. 전주본, 1603–1606년 재인쇄본, 교정본 사이의 관계, 식민지 시기와 한국전쟁 때 흩어진 책들의 행방, 독립적인 정보가 거의 없는 북한 소재 적상산본의 상태 등이 그것이다. 2006년 오대산본 반환은 실록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서울에 함께 모아야 하는지 옛 사고가 있던 지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불렀다.

번역도 학문적 과제다. 기존 국역본은 수십 년에 걸쳐 시간과 예산에 쫓기며 만들어져 오역과 불일치가 지적되어 왔다. 재번역 사업과 장기 영어 번역 계획은 조선 제도의 용어를 어떻게 옮길지, 한문의 결을 잃지 않으면서 세계 연구자들이 쓸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라는 물음을 던진다.

[5][4][2]

핵심 개념

실록(實錄)
한 임금의 치세를 그가 죽은 뒤 사초와 나라의 기록을 바탕으로 편찬한 공식 연대기.
사관의 독립성
사관은 임금 곁에서 기록하고 사초를 비밀로 지켰으며, 임금은 자기 치세의 실록을 볼 수 없었다.
초초·중초·정초와 세초
세 단계의 원고를 거쳐 완성한 뒤, 기밀을 지키고 종이를 재활용하려고 원고를 물에 씻었다.
분산 보관
여러 벌을 산과 섬의 사고에 나누어 두었기에 전쟁과 화재를 견디고 살아남았다.
거울로서의 역사
성리학에서는 좋은 정치와 나쁜 정치를 사실대로 기록하면 후대 임금을 이끌 수 있다고 보았다.
붕당과 수정실록
정권을 잡은 붕당이 실록을 고쳐 편찬하기도 했지만 원본을 함께 남겨 비교할 수 있게 했다.
비판적 읽기
실록은 조정 중심이며 편찬자의 시각이 담겨 있으므로 다른 사료와 함께 읽어야 한다.

기록

  1. 1392년 — 이성계(태조)가 조선을 세움.
  2. 1404년 — 태종이 말에서 떨어짐. 사관이 낙마와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함께 기록.
  3. 1413년 — 조선 최초의 실록인 『태조실록』 완성.
  4. 1445년 — 전주·성주에 사고를 더 두어 네 벌을 보관하게 됨.
  5. 1498년 — 『성종실록』 편찬 중 김일손의 사초가 문제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남.
  6. 1592년 — 임진왜란으로 세 사고가 불타고, 전주 사고본만 산속으로 옮겨져 살아남음.
  7. 1606년 — 초기 실록 재인쇄 완료. 춘추관과 네 산중 사고에 다섯 벌을 나누어 보관.
  8. 1657년 — 『선조수정실록』 완성.
  9. 1865년 — 전통 방식으로 편찬된 마지막 실록인 『철종실록』 완성.
  10. 1923년 — 도쿄로 반출된 오대산본 대부분이 간토 대지진으로 불탐.
  11. 1997년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12. 2006년 — 원문과 번역 온라인 공개. 도쿄대학에서 오대산본 47책 반환.

용어 풀이

조선
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를 다스린 왕조(1897년부터는 대한제국).
사관(史官)
임금 곁에서 날마다 기록해 실록의 바탕이 된 사초를 쓴 관리.
사초(史草)
사관이 쓴 기록 원고. 실록의 핵심 자료이며, 가장사초는 편찬 때까지 집에 보관했다.
실록청(實錄廳)
임금이 죽은 뒤 그 실록을 편찬하려고 임시로 설치한 관청.
춘추관(春秋館)
시정기를 작성하고 서울에서 실록 한 벌을 보관한 관청.
사고(史庫)
실록 등 역사 기록을 보관한 창고. 특히 산과 섬에 둔 사고를 가리킨다.
승정원일기
임금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의 날마다의 기록. 실록보다 자세하며 실록 편찬의 주요 자료였다.
권(卷)
동양 서적의 내용 단위. 여러 권을 한 책으로 묶기도 한다.
일기(日記)
폐위된 연산군·광해군의 기록에 실록 대신 붙인 이름.
한문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행정과 학문에 두루 쓴 문어.

묻고 답하기

임금은 사관이 자기에 대해 쓴 글을 읽을 수 있었나요?

아니요. 사관이 정직하게 쓸 수 있도록 임금은 사초와 자기 치세의 실록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실록의 내용은 모두 사실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매우 자세하고 신중하게 만들었지만 편찬한 관리들의 시각이 담겨 있고, 어떤 치세는 다른 붕당이 고쳐 쓰기도 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다른 사료와 대조해 읽습니다.

왜 실록을 산속에 보관했나요?

화재·반란·전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세 사고가 불탔지만 살아남은 한 벌이 이후 모든 실록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실록을 직접 읽을 수 있나요?

네. 국사편찬위원회가 원문, 국역, 원본 이미지를 온라인으로 무료 공개하고 있습니다.

고종·순종실록은 왜 따로 보나요?

1927–1935년 일제의 감독 아래 사초 없이 편찬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조선왕조실록』 본편으로 보지 않습니다.

중국의 실록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실록 편찬은 중국에서 왔습니다. 조선 실록은 500년 가까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 여러 벌이 살아남았다는 점, 사관을 보호하는 규칙이 뚜렷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집니다.

실록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도 알 수 있나요?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실록은 조정과 정부 중심이라 평민은 세금, 재난, 범죄, 상소 등과 관련된 기사에 주로 나옵니다. 사회사 연구자들은 지방 기록과 개인 기록을 함께 씁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The Annals of the Choson Dynasty.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1997
  2.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3. 조선왕조실록 (원문·국역 서비스). 국사편찬위원회
  4.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Wikipedia
  5. 조선왕조실록. 위키백과
  6. Seungjeongwon ilgi. Wikipedia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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