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주 먼 옛날, 한반도와 그 북쪽 땅에는 세 나라가 있었어요. 북쪽의 고구려, 서남쪽의 백제, 동남쪽의 신라예요. 세 나라는 약 700년 동안 이웃이자 경쟁자로 지내다가 마침내 신라가 가장 강해졌어요.
그로부터 수백 년 뒤 고려라는 새 나라에서, 임금이 지혜롭고 힘 있는 신하 김부식에게 옛 세 나라의 역사를 써 달라고 했어요. 김부식은 일흔 살쯤 되었는데, 모두 열한 명이 함께 일했어요. 그리고 1145년, '세 나라의 역사 기록'이라는 뜻의 『삼국사기』 50권을 완성했어요.
이 책은 세 나라의 커다란 가족 앨범 같아요. 한 부분에는 임금들이 해마다 한 일이 적혀 있어요. 다른 부분은 연표예요. 또 다른 부분은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음악을 연주했는지, 나라 살림을 어떻게 꾸렸는지 설명해요. 마지막 부분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어요. 김유신 같은 장군, 수나라의 큰 군대를 물리친 꾀 많은 을지문덕 장군, 충성스러운 백제 장군 계백, 어머니를 정성껏 모신 효녀 지은 같은 사람들이에요.
김부식이 읽은 더 오래된 책들은 그 뒤 거의 다 사라졌어요. 그래서 『삼국사기』는 지금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된 한국 역사책이에요. 이 책이 없었다면 우리는 옛 한국에 대해 훨씬 적게 알았을 거예요.
사람들은 지금도 이 책을 두고 토론해요. 김부식이 중국을 너무 높이고 신라만 챙겼다는 사람도 있고, 우리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겨 사람들이 더 잘 알기를 바랐다는 사람도 있어요. 탐정처럼 꼼꼼히 읽어 보는 것, 그게 역사 공부의 재미예요.
한눈에 보기
- 완성
- 1145년(고려 인종 23년)
- 편찬자
- 김부식(1075~1151)을 편찬 책임자로, 참고 8명과 관구 2명
- 장소
- 고려의 수도 개경(오늘날 개성)
- 언어
- 한문
- 형식
- 중국 정사를 본뜬 기전체 역사서
- 분량
- 50권: 본기 28권,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 범위
- 고구려·백제·신라. 신라 건국 전승 연대인 기원전 57년부터 신라가 끝나는 935년까지
- 의의
- 현존 최고(最古)의 한국 역사서이자 삼국·통일신라사 연구의 기본 사료
쉬움
『삼국사기』란 무엇인가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와, 신라가 한반도 대부분을 통일한 뒤의 시기까지 다룬 역사서다. 고려 인종의 명으로 김부식을 책임자로 한 편찬진이 엮어 1145년 왕에게 바쳤다.
온전히 전하는 한국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이다. 이보다 앞선 역사서들도 분명히 있었고 편찬자들도 그것을 활용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당시 동아시아의 공통 문어인 한문으로 쓰인 『삼국사기』는 그래서 한국 고대사 연구의 거의 모든 출발점이 된다.
이 책은 고려 국가의 공식 사업이었다. 따라서 조정과 유학자 관료의 시각과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고, 오늘의 독자는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어디에도 없는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쉬움
책이 다루는 세 나라
『삼국사기』의 연대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동명왕)이,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가 세웠다. 많은 역사가는 이 전승 건국 연대, 특히 신라의 이른 연대가 글자 그대로 정확하지는 않다고 보지만, 세 나라가 자기 시작을 어떻게 기억했는지를 보여 준다.
북쪽과 오늘날 중국 동북 지방에 자리 잡은 고구려는 수·당 같은 중국 왕조와 맞서 싸운 강국으로 자랐다. 서남쪽의 백제는 세련된 문화와 일본·중국 남조와의 교류로 이름났다. 동남쪽의 신라는 처음에는 가장 작고 외진 나라였지만 점점 강해졌다.
660년대에 신라는 당과 손잡고 백제(660)와 고구려(668)를 무너뜨린 뒤, 676년까지 당 군대를 한반도 대부분에서 몰아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커진 신라의 역사를 마지막 왕이 935년 고려에 나라를 넘길 때까지 이어 간다.
쉬움
책의 짜임
『삼국사기』는 중국 역사가 사마천이 『사기』에서 만든 기전체를 따른다.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본기(28권)는 왕의 치세를 해마다 기록한다. 신라 12권, 고구려 10권, 백제 6권이다.
연표(3권)는 세 나라 왕들의 재위를 중국 왕조와 나란히 적었다. 지(9권)는 제도를 설명한다. 제사와 음악, 복식·수레·그릇·집, 지명을 포함한 지리, 관직이다.
열전(10권)은 약 69명의 삶을 다룬다. 신라의 통일 전쟁을 이끈 김유신 한 사람의 전기가 세 권을 차지한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백제의 계백 같은 장군, 설총과 최치원 같은 학자, 충신과 효자의 본보기도 있다. 마지막 두 권은 편찬자가 반역자로 본 인물, 곧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신라 말의 궁예·견훤 등을 다룬다.
본기와 열전 곳곳에는 사론(史論) 31편이 있다. 김부식이 서술에서 한 걸음 물러나 유교의 관점에서 사건과 인물을 평가한 글이다.
쉬움
열전 속 이야기들
열전은 『삼국사기』에서 사람들이 가장 잘 기억하는 부분이다. 612년 수나라의 엄청난 대군이 고구려를 쳐들어왔다.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은 적을 나라 깊숙이 끌어들이고 적장에게 놀리는 시를 보낸 뒤, 물러가는 적을 살수에서 들이쳤다. 『삼국사기』는 수나라 군사 가운데 살아 돌아간 사람이 아주 적었다고 전한다.
660년 신라와 당의 군대가 백제로 밀려들자, 백제 장군 계백은 군사 5,000명을 이끌고 황산벌로 나가 마지막 싸움을 벌였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먼저 가족이 노비가 되지 않도록 제 손으로 목숨을 거두고, 훨씬 큰 신라군을 네 번이나 물리친 뒤 전사했다. 신라 쪽에서는 어린 화랑 관창이 홀로 백제 진영에 뛰어들었다가 죽었고, 그 용기가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웠다. 책은 양쪽의 용감한 사람을 모두 기린다.
더 따뜻한 이야기도 있다. 바보처럼 보이던 고구려의 온달은 자기를 찾아 궁궐을 나온 평강공주와 혼인하고, 공주의 도움으로 훌륭한 장군이 된다. 신라의 학자 설총은 왕에게 꽃의 왕이 아름다운 장미와 정직한 늙은 할미꽃(백두옹) 가운데 누구를 곁에 둘지 고르는 우화, 곧 「화왕계」를 들려주며 아첨보다 바른 충고를 들으라고 깨우친다. 효녀 지은은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스스로 남의 집 종이 되고, 왕은 그 효성을 기려 상을 내린다.
이 이야기들은 충성, 용기, 효, 바른 정치를 가르치려고 고른 것이다. 중립적인 보고는 아니지만, 고려의 학자들이 좋은 사람이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를 알려 준다.
중급
김부식과 고려 조정
김부식(1075~1151)은 신라 왕실의 후손을 자처한 경주 김씨 집안 사람이다. 1096년 과거에 급제해 한림원 등 문한직을 거쳤고,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형제들 이름은 송나라 문호 소식(蘇軾)·소철(蘇轍)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전한다.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은 그의 학식과 글솜씨를 높이 평가했다.
1135년 승려 묘청과 그 지지 세력이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여진의 금나라에 더 강경하게 맞서자고 주장하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은 원수가 되어 관군을 이끌고 1136년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후 조정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1142년 관직에서 물러났고, 은퇴한 뒤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 편찬을 이끌었다.
편찬은 김부식 혼자 한 일이 아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편찬 책임자 김부식과 참고 8명, 관구 2명 등 모두 11명을 든다. 그래도 사론과 전체 구상에서 김부식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중급
왜 썼을까: 「진삼국사기표」
김부식은 책과 함께 올린 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서 편찬 목적을 밝혔다. 크게 세 가지다. 우리 학자들이 중국의 경서와 역사에는 밝으면서 제 나라의 지난 일은 잘 모른다는 것, 중국 역사서는 삼국에 대해 너무 간략하게 적었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옛 기록은 거칠고 빠진 것이 많아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후세의 교훈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나라의 기억을 보존하는 동시에 유교 정치 윤리를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앞 시대의 공식 역사를 편찬하는 일은 중국의 관행을 따라 왕조가 스스로를 정통성 있는 문명국으로 내세우는 방법이기도 했다.
정치적 배경도 중요했다. 12세기 초 고려는 1120년대에 화북을 정복한 여진족 금나라의 부상을 마주했고, 묘청의 난과 그 앞의 권력 다툼을 막 겪은 참이었다. 많은 역사가는 『삼국사기』를 이런 위기 뒤에 유교적 질서와 왕권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의 일부로 본다.
중급
편찬자들이 참고한 자료
편찬자들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 우리 기록들을 활용했다. 책 속에서 『고기(古記)』, 『삼한고기』, 『신라고사』, 『해동고기』 같은 이름으로 인용되며, 신라의 김대문과 최치원의 저작도 쓰였다. 흔히 『구삼국사(舊三國史)』라 부르는 앞선 삼국 역사서는 시인 이규보가 1193년 「동명왕편」에서 인용해 알려져 있는데, 『삼국사기』와의 관계는 논쟁거리다.
중국 역사서도 많이 썼다. 『삼국지』, 『후한서』, 『진서』, 『위서』, 『송서』, 『남사』·『북사』, 『구당서』·『신당서』, 『자치통감』 등이다.
우리 기록과 중국 기록이 어긋날 때 편찬자들은 흔히 우리 기록을 따랐고, 다른 전승도 자주 함께 적었다. 하지만 특히 삼국과 수·당의 전쟁 대목에는 중국 사서를 거의 그대로 옮긴 곳도 있다. 본문에서 우리 고유 기록과 중국 자료를 가려내는 일은 현대 연구의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다.
중급
책은 어떻게 전해졌나
1145년 당시의 책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책은 목판으로 찍었는데, 고려 때 찍은 판본 가운데 7권이 든 한 책이 서울 성암고서박물관에 남아 가장 오래된 증거가 되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초 1394년 경주에서 다시 간행되었고, 1512년(중종 7) 경주부윤 이계복이 새로 찍었다. 이 1512년 판을 정덕본이라 하며, 이후 대부분 판본의 바탕이 되었다. 경주 옥산서원과 성암고서박물관에 있는 조선 초기 간본은 201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20세기 들어 『삼국사기』는 여러 차례 교감·주석되고 현대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며, 영어 등 다른 언어로도 부분 번역되었다. 지금은 디지털 판본으로 누구나 원문을 볼 수 있다.
심화
논쟁: 사대주의 역사서인가, 고려의 자주 의식인가
가장 유명한 비판은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인 신채호(1880~1936)에게서 나왔다. 그는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비판했고, 1925년의 글에서 김부식이 진압한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 년래 제일대 사건'이라 부르며 그 실패가 독립적 기상에 대한 유교적·사대적 사고의 승리였다고 주장했다. 비판자들은 삼국을 중국의 예법 기준으로 재단한 사론, 신라 중심의 시각, 그리고 고조선, 본기가 없는 가야, 고구려를 이어 북쪽에 선 발해의 누락 등을 지적했다.
1970년대 이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당 항목을 쓴 신형식 등 많은 역사가는 좀 더 균형 잡힌 평가를 내놓았다. 이들은 중국 역사서에서 황제에게만 쓰던 '본기'라는 말을 삼국 왕의 기록에 붙였다는 점, 세 나라를 대등한 독립국으로 다뤘다는 점, 김부식이 우리 역사를 알게 하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는 점, 고유한 왕호와 전통을 남겼다는 점을 든다. 이 관점에서 『삼국사기』는 단순한 사대가 아니라 12세기 고려의 유교적 자국 의식을 표현한 책이다.
신라 중심이라는 비판도 논쟁적이다. 신라가 가장 오래 지속되고 가장 많은 기록을 남겼으며 고려가 스스로를 일부 신라의 계승자로 여겼으니, 불균형은 편견만큼이나 사료 사정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한편 이 책은 고구려에 본기 10권을 배정했고, 고구려가 수·당에 맞선 일을 분명한 감탄을 담아 서술한다.
심화
초기 기록은 얼마나 믿을 수 있나
각 나라 첫 몇 세기에 대한 본기의 신빙성은 오래된 문제다. 20세기 초 쓰다 소키치 등 일부 일본 학자는 신라·백제의 초기 기록이 대부분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초기 기록 불신론'으로, 식민지 시기 학계에서 영향력이 컸다.
이후 한국과 국제 학계는 비판적으로 활용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한반도 초기 국가의 성장을 보여 주는 고고학 증거와 『삼국지』 「동이전」 같은 중국 기록과의 비교는, 초기 본기가 연대는 압축되거나 조정되었더라도 실제 전승을 간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초기 왕대의 재위가 겹친다고 보는 등 연대를 바로잡으려는 여러 제안은 지금도 논쟁 중이다.
방법론적으로 역사가들은 『삼국사기』를 층위별로 분석한다. 우리 고유 기록, 중국 자료, 편찬자의 편집과 평가다. 그리고 고구려 광개토왕릉비(414)와 신라 비석 같은 금석문, 최근 수십 년간 출토된 목간, 일본·중국 문헌과 견주어 본다. 새로운 발굴 하나하나가 이 책이 그리는 그림을 확인하거나 바로잡거나 더 복잡하게 만든다.
심화
연구 자원으로서의 지(志)
지 9권은 중국 정사에 비하면 간략하고, 편찬자들도 고구려와 백제의 제도에 관한 정보가 많이 사라졌다고 인정했다. 그래도 매우 귀중하다. 「직관지」는 골품에 바탕을 둔 신라의 관등 체계를, 「색복지」와 「거기지」는 골품에 따라 달랐던 규제를 전하며, 「악지」는 가야금·거문고 같은 악기의 이름과 유래를 설명한다.
「지리지」는 언어학자에게 특히 중요하다. 757년 신라 경덕왕은 많은 고유 지명을 두 글자 한자식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지리지」는 새 이름과 옛 이름을 함께 적은 경우가 많다. 옛 이름은 한자의 소리나 뜻을 빌려 적은 것이 많아서, 학자들은 이 짝을 이용해 삼국 시대 언어의 낱말, 고구려어의 단편까지 재구해 왔다. 이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고 한반도 언어들의 관계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심화
유산: 『삼국유사』, 그리고 동아시아 역사서술 속의 자리
『삼국사기』는 흔히 한 세기 넘게 뒤인 1281년 무렵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유사』와 함께 읽힌다. 두 책은 성격이 매우 다르다. 『삼국사기』는 유교적 관찬 사서이고, 『삼국유사』는 전설, 불교 영험담, 민간 전승, 노래를 모은 사찬 기록이다.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가 빠뜨린 단군과 고조선의 건국 신화, 가락국(가야)의 역사, 신라 향가 14수 등이 실려 있다. 일연은 관찬 사서가 빠뜨린 것을 채우려는 뜻도 있었다.
『삼국사기』는 한국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역사 편찬 전통을 세웠다. 조선은 뒤에 같은 기전체로 『고려사』를 편찬했고, 방대한 왕조 실록을 남겼다. 18세기 안정복 같은 후대 사가들은 『삼국사기』를 다시 정리하고 비판했으며, 유득공이 『발해고』(1784)에서 발해를 우리 역사에 넣어야 한다고 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그 누락에 대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다.
동아시아 전체에서 보면 『삼국사기』는 역시 한문으로 고유 전승과 중국 모델을 결합한 일본의 더 이른 관찬 사서 『일본서기』(720), 그리고 그 본보기가 된 중국 정사들과 견줄 수 있다. 이 책들을 비교하면 여러 나라가 공통의 역사 서술 형식을 각자의 정치적 필요에 맞게 어떻게 바꾸었는지 드러난다.
오늘날 『삼국사기』는 여전히 없어서는 안 될 책이지만, 독자들은 이 책을 훨씬 오래된 과거에 대한 12세기의 해석으로 다룬다. 온달과 평강공주, 설총, 화랑 이야기는 교과서와 소설과 드라마로 되풀이되며 한국 문화 속에 살아 있다.
핵심 개념
- 관찬 사서
- 왕명에 따라 국가 관료가 편찬한 역사서로, 조정과 유교의 가치를 반영한다.
- 기전체
- 사마천이 만든 형식으로 본기·표·지·열전을 결합한다.
- 교훈으로서의 역사
- 김부식은 임금과 신하의 행적이 후세의 본보기와 경계가 되기를 바랐다.
- 사론(史論)
- 편찬자가 유교적 관점에서 사건과 인물을 평가한 31편의 글.
- 사라진 사료
- 지금은 전하지 않는 앞선 우리 기록의 내용이 이 책에 남아 있다.
- 사대주의 논쟁
- 이 책이 중국 중심적인가, 고려의 자국 의식을 표현했는가를 둘러싼 현대의 논쟁.
- 사료 비판
- 고유 기록, 중국 자료, 편찬자의 해석을 가려 읽는 현대의 방법.
기록
- 기원전 57년 — 『삼국사기』에 따른 신라의 전승 건국 연대(기원전 57년).
- 기원전 37년 — 고구려의 전승 건국 연대(기원전 37년).
- 기원전 18년 — 백제의 전승 건국 연대(기원전 18년).
- 668년 — 660년 백제에 이어 신라와 당이 고구려를 무너뜨린다.
- 935년 — 신라의 마지막 왕이 고려에 귀부한다. 『삼국사기』의 서술이 끝나는 해다.
- 1075년 — 김부식이 태어난다.
- 1135년 — 묘청의 난이 일어나고, 김부식이 1136년까지 진압한다.
- 1145년 — 김부식과 편찬진이 『삼국사기』를 인종에게 바친다.
- 1151년 — 김부식이 세상을 떠난다.
- 약 1281년 — 승려 일연이 관찬 사서를 보완하는 『삼국유사』를 엮는다.
- 1512년 — 경주에서 정덕본이 간행되어 이후 대부분 판본의 바탕이 된다.
- 2018년 — 조선 초기 간본들이 국보로 지정된다.
용어 풀이
- 삼국
- 고대 한국의 경쟁국이었던 고구려·백제·신라.
- 고려
- 『삼국사기』 편찬을 명한 왕조(918~1392). 영어 이름 'Korea'가 여기서 나왔다.
- 권(卷)
- 옛 동아시아 책의 나눔 단위.
- 본기(本紀)
- 임금의 치세를 해마다 적은 기록.
- 열전(列傳)
- 이름난 인물들의 전기.
- 지(志)
- 제사·지리·관직 같은 제도를 주제별로 다룬 부분.
- 한문
- 전근대 동아시아의 지식인이 함께 쓴 문어.
- 사대주의
- '큰 나라를 섬긴다'는 뜻에서 나온, 중국에 대한 종속적 태도를 비판하는 현대 용어.
- 묘청의 난
- 1135~1136년 승려 묘청이 서경(평양)을 근거로 일으켰다가 김부식에게 진압된 반란.
- 삼국유사
- 1281년 무렵 승려 일연이 엮은 역사와 전설 모음.
묻고 답하기
『삼국사기』가 한국 최초의 역사책인가요?
아니에요. 하지만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됐어요. 더 앞선 역사책들이 있었고 편찬자들도 그것을 참고했지만 지금은 사라졌어요.
왜 한자로 쓰였나요?
1440년대에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고유 문자가 없어서, 배운 사람들은 동아시아 공통 문어인 한문으로 글을 썼어요.
열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누구예요?
아마 김유신 장군일 거예요. 열전 열 권 가운데 세 권이 김유신 전기예요.
김부식은 정말 우리나라를 낮춰 보았나요?
신채호 등은 사대주의라고 비판했지만, 많은 현대 역사가는 김부식이 우리 역사를 알리려 했고 세 나라를 독립국으로 다루었다고 봅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의 실제 특징을 근거로 합니다.
건국 연대는 믿을 수 있나요?
역사가들은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기원전 57·37·18년이라는 연대는 후대 전승을 반영하며, 특히 신라의 초기 연대는 조정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어떻게 달라요?
『삼국사기』는 1145년 왕명으로 만든 유교적 관찬 사서이고, 『삼국유사』는 1281년 무렵 승려 일연이 엮은 전설과 불교 이야기 모음이에요.
발해는 왜 빠졌나요?
편찬자들이 삼국과 신라로 범위를 한정했기 때문입니다. 1784년 유득공 같은 후대 역사가들은 이를 비판하며 발해를 우리 역사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신형식, 삼국사기 (三國史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구복, 김부식 (金富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옥영정, 삼국유사 (三國遺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Samguk sagi. Wikipedia
- Kim Busik. Wikipedia
- 삼국사기. 위키백과
- Samguk yusa. Wikipedia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