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거의 천 년 전, 이란 북동부의 도시 니샤푸르에서 오마르라는 아이가 태어났어요. 그의 성 ‘하이얌’은 ‘천막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라서, 어쩌면 조상이 천막을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오마르는 자라서 그 시대의 가장 똑똑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어요.
그는 수학을 무척 좋아했어요. 어떤 수를 세 번 곱하는 ‘3차방정식’이라는 아주 어려운 문제를 풀었지요. 보통 계산으로는 풀 수 없어서, 던진 공이 그리는 길 같은 곡선을 썼어요. 두 곡선이 만나는 점을 찾으면 그곳이 바로 답이었어요.
힘센 술탄이 오마르에게 하늘을 관찰하는 곳, 곧 천문대를 세우는 일을 맡겼어요. 그는 다른 학자들과 함께 1년이 정확히 얼마나 긴지 아주아주 정밀하게 쟀어요. 그리고 이것으로 해마다 봄의 첫날에 시작하는 새 달력을 만들었지요. 오늘날 이란의 달력도 그 작업에서 나왔어요.
오마르는 ‘루바이’라는 네 줄짜리 짧은 시로도 유명해요. 포도주, 장미, 흙으로 빚은 항아리, 흘러가는 시간, 오늘을 즐기는 일에 관한 시들이에요. 1859년 에드워드 피츠제럴드라는 영국 사람이 그중 일부를 영어 시로 옮겼고, 이 시들은 온 세상에 알려졌어요.
그런데 수수께끼가 하나 있어요. 이 시들 가운데 어느 것을 오마르가 정말 썼는지 아무도 확실히 몰라요. 많은 시가 그가 죽고 한참 뒤에 그의 이름으로 덧붙여졌거든요. 그러니 ‘오마르 하이얌의 시’를 읽으면, 그의 목소리와 다른 시인들의 목소리,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상상이 섞인 것을 읽는 셈이에요.
한눈에 보기
- 생애
- 가장 흔한 계산으로 1048~1131년(출생일은 별자리 기록으로 1048년 5월 18일로 복원. 사망을 1124~1129년 사이로 보는 학자도 있다)
- 출생·사망지
- 호라산의 니샤푸르(이란 북동부)
- 활동지
- 니샤푸르, 부하라, 사마르칸트, 이스파한, 메르브(카라한 왕조와 셀주크 왕조의 후원)
- 언어
- 아랍어(과학 저작과 대부분의 철학 저작), 페르시아어(철학 논고 한 편, 그의 것으로 전하는 4행시)
- 분야
-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과 역법 개혁, 철학, 음악 이론. 시는 귀속 전승
- 주요 저작
- 『대수학 문제의 증명에 관한 논고』(1070년대), 『에우클레이데스 공준의 난점에 관한 주해』(1077), 『사분원의 분할에 관하여』, 『존재에 관하여』 등 철학 논고, 잘랄리력(1079년 시행)
- 무덤
- 니샤푸르의 오마르 하이얌 영묘(1963년 완공된 현대 건축물)
쉬움
오마르 하이얌은 누구인가
오마르 하이얌(페르시아어로 오마레 하이얌)은 1048년 이란 북동부 호라산의 대도시 니샤푸르에서 태어나, 노년에 같은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은 1131년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전체 이름 ‘기야스 앗딘 아불파트흐 우마르 이븐 이브라힘’에는 ‘신앙의 도움’이라는 존칭과 아버지 이름 이브라힘이 들어 있다. ‘하이얌’은 아랍어로 ‘천막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집안의 생업을 가리킬 수 있다.
생전에 그는 수학자·천문학자·철학자로 존경받았다. 3차방정식에 관한 획기적인 책, 에우클레이데스에 대한 주해, 이븐 시나 전통의 철학 논고를 썼고, 셀주크 술탄 말리크샤를 위해 새 태양력을 만든 천문학자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시인으로 안다. 삶의 짧음, 포도주, 존재의 신비를 노래한 4행시(루바이야트)가 후대에 그의 이름으로 전해졌다. 영국 시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자유롭게 옮긴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1859)는 ‘오마르’를 페르시아 문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름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그가 이 시들 가운데 몇 편을 실제로 썼는지는 문학사의 큰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다.
쉬움
셀주크 시대의 세계
하이얌은 셀주크 왕조 아래에서 살았다. 셀주크는 11세기 중엽 이란과 이라크를 장악하고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의 이름으로 다스린 튀르크계 왕조였다. 셀주크 술탄들은 페르시아인 관료를 통해 통치했고, 페르시아어는 종교와 대부분의 과학 언어였던 아랍어와 나란히 주요 문화 언어가 되었다.
가장 유명한 셀주크 정치가는 재상 니잠 알물크였다. 그는 학자를 기르는 ‘니자미야’라는 학교를 세웠다. 이 시대는 학문이 풍성했지만 위험하기도 했다. 종교적·정치적 갈등이 치열했고, 뒤에 유럽에서 ‘암살단’으로 알려진 이스마일파 운동이 셀주크에 맞섰으며, 니잠 알물크는 1092년 아마도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하이얌의 만년에는 제1차 십자군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이르렀다.
하이얌 같은 학자에게는 부유한 후원자가 꼭 필요했다. 기구·도서관·연구할 시간은 통치자와 관리의 호의에 달려 있었고, 그 호의는 후원자가 죽으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었다.
쉬움
그의 생애
하이얌은 니샤푸르에서 자라며 꾸란, 아랍어, 종교학, 수학, 천문학을 공부했다. 그를 직접 알았던 역사가 알바이하키가 그의 별자리를 기록했고, 현대 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생일을 1048년 5월 18일로 계산했다. 그는 1037년에 죽은 이븐 시나를 지적 스승으로 여겼지만 직접 배울 수는 없었다.
1068년 무렵 부하라로, 1070년 무렵 사마르칸트로 가서 수석 재판관 아부 타히르의 후원을 받으며 유명한 대수학 논고를 썼다. 1074년 무렵에는 니잠 알물크의 초청으로 술탄 말리크샤의 궁정에 들어가 이스파한의 천문 작업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거의 20년 동안 드문 안정을 누렸다.
1092년 말리크샤와 니잠 알물크가 죽자 후원이 끊겼다. 후대 기록에 따르면 하이얌은 메카 순례를 떠났는데, 이단적 견해를 품었다는 의심을 씻으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라 한다. 뒤에 메르브에서 술탄 산자르를 섬겼고, 마침내 니샤푸르로 돌아와 조용히 지낸 듯하다. 제자 니자미 아루지는 스승이 죽은 지 4년 뒤 그곳의 무덤을 찾았을 때, 나무들이 꽃잎을 떨어뜨려 무덤을 덮고 있었다고 적었다.
중급
곡선으로 3차방정식 풀기
하이얌의 가장 중요한 수학 저작은 아랍어로 쓴 『대수학 문제의 증명에 관한 논고』다. 그는 알콰리즈미와 그 후계자들의 대수학을 바탕으로, 수·‘근’(미지수)·‘제곱’·‘세제곱’으로 이루어진 3차 이하의 모든 방정식을 분류하고 풀고자 했다.
앞선 이슬람 수학자들처럼 그는 양의 계수와 양의 해만 인정했으므로, 우리 눈에는 비슷해 보이는 방정식도 그에게는 서로 다른 경우였다. 그는 가능한 모든 형태를 나열하고, 더 간단한 식으로 줄일 수 없는 3차방정식이 열네 가지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이것들은 자와 컴퍼스만으로는 풀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 주장은 19세기에야 증명되었다.
열네 유형마다 그는 기하학적 풀이를 제시했다. 미지수를 선분으로 나타내고, 그 길이를 두 원뿔곡선, 예컨대 포물선과 원 또는 포물선과 쌍곡선의 교점으로 정했다. 또 그런 방정식에 양의 해가 없거나 둘 이상인 경우도 논의했다.
하이얌은 자신이 3차방정식의 산술적 공식을 찾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는 아마 자기 뒤에 올 누군가가 그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썼다. 실제로 그런 공식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피오네 델 페로, 니콜로 타르탈리아, 지롤라모 카르다노가 찾아냈다. 그가 대수와 기하를 체계적으로 연결했기 때문에, 일부 역사가는 그를 데카르트 해석기하학의 선구자로 본다.
중급
에우클레이데스, 평행선, 그리고 수의 개념
1077년에 완성한 『에우클레이데스 공준의 난점에 관한 주해』에서 하이얌은 에우클레이데스의 제5공준, 곧 ‘평행선 공준’을 검토했다. 많은 수학자는 이 공준이 다른 공리들로부터 증명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이븐 알하이삼의 시도를 포함한 앞선 시도들이 증명하려는 것을 몰래 가정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부한 ‘운동’을 기하학에 끌어들였다고 비판했다.
하이얌은 이 공준을 수렴하는 직선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져온 원리로 대신하고, 밑변에 수직인 같은 길이의 두 변을 가진 사각형을 연구했다. 그는 이 사각형의 위쪽 두 각이 직각인지 예각인지 둔각인지를 따져, 직각인 경우만 모순이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 도형이 18세기 지롤라모 사케리의 작업에도 나타나서 ‘하이얌-사케리 사각형’이라 불리기도 한다. 예각과 둔각의 경우는 오늘날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논고는 비와 비례도 다룬다. 하이얌은 같은 비에 대한 에우클레이데스의 정의가 연분수와 비슷한 과정에 기초한 다른 정의와 동치임을 보였고, 무리수를 포함한 크기의 비를 수처럼 다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역사가는 여기서 현대의 실수 개념으로 가는 한 걸음을 본다.
그는 짧은 과학 저작도 남겼다. 하나는 합금을 공기 중과 물속에서 달아 금과 은의 비율을 알아내는 데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음정과 음계를 수의 비로 분류한 음악 이론서다. 대수학 책에서 그는 임의 차수의 근을 구하는 법에 관한, 지금은 사라진 책을 언급하는데, 이는 그가 이항식 거듭제곱을 전개하는 일반 규칙을 알았음을 시사한다. 그 계수의 배열은 이란에서 ‘하이얌의 삼각형’, 유럽에서 파스칼의 삼각형이라 불리며, 앞선 수학자 알카라지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중급
이스파한 천문대와 잘랄리력
1074년 무렵 술탄 말리크샤는 이스파한에 천문대를 세우게 했고, 하이얌은 약 여덟 명의 학자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었다. 목표는 천문표를 고치고 역법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천문대의 결과는 『말리크샤 지즈』라는 천문 편람에 모였다.
술탄의 칭호 가운데 하나를 따 ‘잘랄리력’이라 이름 붙인 새 달력은 1079년에 시행되었다. 이는 진정한 태양력이었다. 한 해는 춘분인 노루즈에 시작했고, 각 달은 해가 황도 12궁을 지나는 기간을 따랐다. 하이얌의 팀은 1년의 길이를 365.24219858156일로 보고했는데, 현대 값에 매우 가깝다.
후대 사료는 33년 주기에 윤년 여덟 번을 두는 방식을 전한다. 이런 달력은 수천 년에 겨우 하루 정도 어긋나므로, 1582년 유럽에서 도입된 그레고리력보다 정확하다. 잘랄리력은 여러 세기 동안 이란에서 쓰였고, 1925년 채택된 현대 이란 태양력의 바탕이 되었다.
사료는 하이얌과 동료들을 ‘별의 학문(일름 알누줌)’의 전문가로 부르는데, 이 말은 수리천문학과 점성술을 모두 포함했다. 제자 니자미 아루지는 하이얌이 점성술 예언을 그다지 믿지 않는 것 같았다고 적었고, 과학사가 조지 살리바는 이 말을 그냥 ‘점성술’로 옮기면 천문학자들의 작업을 왜곡한다고 경고했다. 그래도 후대 기록에 따르면 산자르의 궁정에서 그는 날씨 같은 일을 예측하도록 요구받았다.
중급
철학자 하이얌
하이얌은 몇 편의 철학 논고를 남겼는데, 대부분 아랍어이고 한 편은 페르시아어다. 그는 이븐 시나가 형성한 아리스토텔레스-신플라톤주의 전통 안에서 작업했다. 신의 단일성에 관한 이븐 시나의 담론 한 편을 번역·주해했고, 알바이하키에 따르면 죽던 날에도 이븐 시나의 형이상학을 읽고 있었다.
이 저작들에서 그는 ‘필연적 존재자’로서 신의 존재를 옹호하고, 존재·본질·보편자를 논하며, 존재는 실재에서 본질에 덧붙는 무엇이 아니라 마음속의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세계 속 대립의 필연성에 관한 논고에서는 악의 문제를 다룬다. 신은 그 자체로 선한 존재들을 창조하며, 악은 그들 사이의 대립 관계에서 우연적으로만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결정론도 논하는데, 우주적 필연의 틀 안에서 인간의 행위 능력을 인정하는 듯하다.
한 논고에서 그는 지식을 구하는 여러 길, 곧 신학자·철학자·이스마일파·수피의 길을 살피고 수피의 정화의 길에 특별한 가치를 두는 듯하다. 이것이 4행시의 회의적인 목소리와 어떻게 맞물리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그의 철학 저작은 오랫동안 무시되었다가 최근 수십 년 사이에야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중급
4행시와 피츠제럴드의 『루바이야트』
루바이(복수형 루바이야트)는 네 줄로 된 페르시아 시로, 보통 aaba로 운을 맞추고 날카롭거나 뜻밖의 생각으로 끝맺는다. 하이얌과 연결된 4행시들은 흘러가는 시간,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의 신비, 흙을 빚는 도공(창조의 이미지), 포도주와 우정, 지금 이 순간을 누리는 지혜를 노래한다.
에드워드 피츠제럴드(1809~1883)는 벗 에드워드 카우얼에게서 페르시아어를 배웠다. 카우얼은 그에게 1460년 시라즈에서 필사되어 옥스퍼드 보들리언 도서관에 있는, 4행시 158편이 담긴 사본의 사본을 주었고, 뒤에 콜카타의 다른 사본도 전해 주었다. 1859년 피츠제럴드의 초판에는 75연이 실렸다. 그는 자기 작업을 번역이 아니라 ‘옮겨 짓기’라 불렀다. 어떤 연은 한 페르시아 4행시를 충실히 따르지만, 다른 연은 여러 편을 합치거나 자유롭게 새로 지었다.
처음에 이 소책자는 팔리지 않았지만 1860년대부터 라파엘 전파 시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영어권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피츠제럴드는 여러 번 고쳐 펴냈고, ‘오마르 하이얌 클럽’들이 생겼으며, 1929년까지 300개가 넘는 판본이 나왔다. “움직이는 손가락은 쓰고, 다 쓰고 나면 / 나아간다” 같은 구절은 영어의 일부가 되었다. 이 시의 성공은 ‘동양’을 이국적이고 관능적인 곳으로 보는 빅토리아 시대의 이미지를 만들기도 했다.
심화
하이얌은 『루바이야트』를 썼는가: 진위 문제
생전의 하이얌은 시인이 아니라 과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시에 대한 가장 이른 언급은 그가 죽고 40년이 넘은 1174년 알이스파하니의 기록으로, 아랍어 시에 관한 것이다. 페르시아어 4행시는 파흐르 앗딘 알라지(1160년대), 나즘 앗딘 다야(1230년경), 주바이니, 그리고 1340년 13편을 실은 선집 편찬자 자자르미가 그의 이름으로 한 편씩 인용한다. 뒤에 그의 것으로 돌려지는 4행시 다섯 편은 1160년 이전의 자히리 사마르칸디 『신드바드나메』에 작자 표시 없이 이미 나온다.
반면 후대 사본들은 수백 편의 4행시를 그에게 돌리고, 현대의 모음집들은 천 편을 훌쩍 넘게 싣기도 했다. 시들은 언어가 고르지 않고 세계관도 서로 모순되며, 많은 ‘떠돌이 4행시’가 다른 시인들의 것으로도 전한다. 1934년 한스 하인리히 셰더는 하이얌의 이름을 페르시아 문학사에서 지워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이란학자 프랑수아 드 블루아는 그 뒤로도 별 진전이 없었다고 본다.
학자들은 진짜 시의 핵심을 가려내려고 여러 방법을 써 왔다. 아르투르 크리스텐센은 121편을 어느 정도 진본으로 인정했고, 모함마드알리 포루기는 178편, 알리 다시티는 36편, 작가 사데크 헤다야트는 14편만 인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아주 이른 시기의 것이라며 큰 관심 속에 공개된 사본 두 점이 위작으로 드러났다. ‘원래의 하이얌’을 찾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는 경고다. 대부분의 학자는 그가 아마 몇 편의 4행시를 썼겠지만, 어떤 특정한 시가 그의 것이라고 증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심화
회의주의자인가, 수피인가, 철학자인가: 시 읽기
피츠제럴드는 오마르를 에피쿠로스적 회의주의자로 그리며, 그의 포도주는 “진짜 포도즙”이라고 했다. 아르투르 크리스텐센과 뒤의 이란 작가 사데크 헤다야트 등 많은 학자는 4행시가 종교 교리·내세·신의 정의에 대한 의심을 표현한다고 읽었다. 중세 증거도 자유사상가라는 평판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13세기의 알키프티는 그 시들이 겉으로만 수피풍이라고 했고, 나즘 앗딘 다야와 아타르 같은 유명한 수피 저자들은 하이얌을 적대적으로 언급했다.
소수의 해석자, 예컨대 19세기의 J. B. 니콜라와 뒤의 이드리스 샤는 포도주·주막·연인을 신비적 황홀의 수피 상징으로 읽었다. 메흐디 아민라자비 같은 비판자는 수피적 해석은 시를 고전 수피 교리에 맞게 억지로 늘여야만 가능하다고 답한다. 세예드 호세인 나스르 같은 이들은 진위가 불확실한 시로 하이얌의 철학을 세우는 것은 환원적이라며 그의 정통적인 철학 산문을 가리킨다.
최근 연구는 산문과 시를 함께 읽으려 한다. 아민라자비 등이 쓴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항목은 논고의 합리적 유신론과 4행시의 당혹스러운 항변 사이의 긴장이 서로 다른 두 저자를 뜻한다기보다, 추상적 추론과 고통이라는 삶의 경험 사이의 갈등을 반영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결론을 내리든 세 층위를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다. 역사 속 하이얌, 중세 페르시아의 4행시 전통,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빅토리아 시대 시다.
심화
유산과 현대 연구
하이얌의 수학은 이슬람 세계에서 계속 연구되었다. 하이얌을 출처로 밝힌, 알투시 전통의 13세기 평행선 공준 논의는 옥스퍼드의 존 월리스가 라틴어로 옮겨 사케리에게 알려졌다. 유럽에서 그의 대수학은 1851년 프란츠 뵈프케가 아랍어 원문과 프랑스어 번역을 펴낸 뒤에야 널리 알려졌다.
이란에서 그는 국민적 인물이다. 니샤푸르에 있는 그의 흰 대리석 영묘는 1963년에 완공되어 묘석 위에 서 있으며 많은 이가 찾는다. 레자 샤 때 발주되고 후샹 세이훈이 설계한 이 건물은 도시의 상징이다. 오늘날 이란 태양력에도 그와 연관된 역법 개혁이 여전히 남아 있다.
현대 하이얌 연구는 그의 대수학과 기하학을 편집·분석해 온 수학사가, 최근 그의 논고를 편집한 철학자, 여전히 4행시와 씨름하는 문학 연구자로 나뉜다. 그의 경우는 한 역사적 인물이 읽는 사람에 따라 페르시아 과학의 탁월함, 자유사상, 신비적 지혜, 빅토리아 시대의 우수 등 서로 다른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핵심 개념
- 3차방정식의 기하학적 풀이
- 더 줄일 수 없는 3차방정식 열네 유형을 두 원뿔곡선의 교점으로 푼다.
- 방정식의 분류
- 3차 이하의 모든 방정식을 양의 항에 따라 체계적으로 나열한다.
- 평행선 공준 비판
- 위쪽 각이 직각·예각·둔각인 사각형으로 에우클레이데스의 제5공준을 검토한다.
- 수로서의 비
- 무리수를 포함한 크기의 비를 수와 같은 자격으로 다룬다.
- 태양력
- 춘분에 시작하고 달이 해의 운행을 따르며 정밀한 윤년 주기를 둔 한 해.
- 필연적 존재자와 신정론
-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악은 피조물 사이의 대립 관계에서 우연적으로만 생긴다.
- 4행시의 ‘오늘을 즐겨라’
- 그의 것으로 전하는 시들은 죽음과 불확실성 앞에서 지금을 온전히 살라고 권한다.
기록
- 1048년 — 오마르 하이얌이 니샤푸르에서 태어나다(별자리 기록으로 복원한 날짜는 5월 18일).
- 약 1068년 — 부하라로 가다.
- 약 1070년 — 사마르칸트에서 아부 타히르의 후원을 받아 대수학 논고를 쓰다.
- 약 1074년 — 니잠 알물크의 초청으로 말리크샤의 궁정에 들어가 이스파한 천문대에서 일하기 시작하다.
- 1077년 — 에우클레이데스 공준에 관한 주해를 완성하다.
- 1079년 — 잘랄리력이 시행되다.
- 1092년 — 니잠 알물크와 말리크샤가 죽고 천문대 후원이 끊기다.
- 약 1118년 — 메르브에서 술탄 산자르를 위해 일하다.
- 1131년 — 니샤푸르에서 세상을 떠나다(가장 흔한 계산으로 12월 4일. 1124~1129년경으로 보기도 한다).
- 1174년 — 알이스파하니가 하이얌을 시인으로 언급한 가장 이른 기록을 남기다.
- 1460년 — 4행시 158편이 담긴 보들리언 사본이 시라즈에서 필사되다.
- 1851년 — 프란츠 뵈프케가 하이얌의 대수학을 프랑스어 번역과 함께 펴내다.
- 1859년 —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를 펴내다.
용어 풀이
- 루바이(복수 루바이야트)
- 보통 aaba로 운을 맞춘 네 줄짜리 페르시아 시.
- 셀주크 왕조
- 11세기부터 이란·이라크·아나톨리아를 다스린 튀르크계 왕조.
- 3차방정식
- 미지수가 세 번 곱해진 항을 포함하는 방정식.
- 원뿔곡선
- 원뿔을 잘라 생기는 원·타원·포물선·쌍곡선.
- 평행선 공준
- 만나거나 만나지 않는 직선에 관한 에우클레이데스의 제5공준. 그 독립성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온다.
- 잘랄리력
- 1079년 말리크샤 치하에서 시행된 태양력. 현대 이란력의 바탕이다.
- 노루즈
- 춘분에 맞는 페르시아의 새해.
- 필연적 존재자
- 이븐 시나 철학에서 그 자체로 존재가 필연적인 존재. 신과 동일시된다.
- 떠돌이 4행시
- 사본에 따라 여러 시인의 것으로 전하는 4행시.
- 수피즘
- 이슬람의 신비주의 전통. 그 시는 흔히 포도주와 사랑을 상징으로 쓴다.
묻고 답하기
‘하이얌’은 무슨 뜻인가요?
아랍어로 ‘천막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아버지나 조상이 천막을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이란 달력이 정말 그가 만든 건가요?
현대 이란 태양력은 그의 천문학자 팀이 1079년에 만든 잘랄리력에서 발전했어요. 다만 20세기에 간단하게 다듬어졌어요.
『루바이야트』의 시를 모두 그가 썼나요?
거의 확실히 아니에요. 여러 세기에 걸쳐 수백 편의 4행시가 그의 이름으로 덧붙었고, 피츠제럴드도 시를 자유롭게 바꾸고 합쳤어요. 그의 것은 일부뿐일 수 있어요.
오마르 하이얌은 종교에 반대했나요?
학자들의 의견이 갈려요. 그의 것으로 전하는 4행시는 종교적 확신을 자주 의심하지만, 철학 논고는 이븐 시나 전통에서 신의 존재를 옹호해요. 회의주의자로 보는 이도, 드물게 수피로 보는 이도, 이성과 경험 사이에서 갈등한 철학자로 보는 이도 있어요.
왜 3차방정식을 간단한 공식으로 풀지 못했나요?
3차방정식의 대수 공식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야 발견되었어요. 하이얌은 기하학으로 풀었고, 뒤에 누군가 산술적 풀이를 찾을 것이라고 했어요.
하이얌·니잠 알물크·하산 사바흐가 동문이었다는 이야기는 믿을 만한가?
피츠제럴드의 서문에도 실린 이 유명한 전설은 후대 사료에 기대고 세 사람의 연대와도 잘 맞지 않아 역사가들이 의심한다.
그의 시에 대한 가장 이른 믿을 만한 증거는 무엇인가?
아랍어 시는 알이스파하니(1174), 페르시아어 4행시는 파흐르 앗딘 알라지·나즘 앗딘 다야·주바이니·자자르미의 인용이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Omar Khayyam. Wikipedia
- Seyed N. Mousavian, Suzanne Sumner, Mehdi Aminrazavi and Glen Van Brummelen, Umar Khayyam.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J. J. O'Connor and E. F. Robertson, Omar Khayyam.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Archive, University of St Andrews
- Rubaiyat of Omar Khayyam. Wikipedia
- 오마르 하이얌. 위키백과(한국어)
- Mausoleum of Omar Khayyam. Wikipedia
- Edward FitzGerald (trans.), Rubáiyát of Omar Khayyám, the Astronomer-Poet of Persia. Bernard Quaritch, London, 1859
- Franz Woepcke (ed. and trans.), L'algèbre d'Omar Alkhayyâmî. Benjamin Duprat, Paris, 1851
- Mehdi Aminrazavi, The Wine of Wisdom: The Life, Poetry and Philosophy of Omar Khayyam. Oneworld, Oxford, 2005
함께 보기
- 알콰리즈미9세기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의 수학자·천문학자·지리학자. 그의 책에서 ‘대수학(algebra)’과 ‘알고리즘’이라는 말이 나왔다.
- 이븐 알하이삼(알하젠)바스라에서 태어나 파티마 왕조의 카이로에서 활동한 수학자·물리학자. 『광학의 서』에서 빛이 눈으로 들어와 보게 된다는 것을 기하학과 실험으로 설명했다.
- 이븐 시나이슬람 세계와 유럽의 의학·철학에 오래 영향을 준 의사이자 철학자다.
-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기원전 30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그리스 수학자. 몇 개의 정의와 공준에서 기하학과 수론을 쌓아 올린 『원론』은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수학 교과서가 되었다.
- 루미사랑과 영적 변화를 노래한 페르시아어 시인이자 수피 스승이다.
- 하페즈사랑과 그리움, 영적 의미가 겹치는 가잘로 이름난 페르시아어 시인이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