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하노이 문묘

Văn Miếu – Quốc Tử Giám (文廟 – 國子監)

1070–1076년 · 탕롱 (다이비엣)

한 문장으로

하노이 문묘는 1070년 공자를 모시려고 처음 세운 담장 두른 사당 정원으로, 베트남 최초의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이 수백 년 동안 학자를 길러 낸 곳이며, 지금도 돌거북들이 나라 최고 시험 합격자들의 이름을 등에 지고 서 있어요.

하노이 문묘
이미지: The original uploader was Chuoibk at English Wikipedia.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거의 천 년이나 된 학교를 상상해 보세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기다란 정원이 있어요. 안에는 연못과 커다란 나무, 붉은 문과 조용한 건물들이 있지요. 이곳의 이름은 반미에우(Văn Miếu), 우리말로 ‘문묘’예요.

문묘는 옛날 중국의 선생님 공자를 기리려고 지었어요. 공자는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어진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사당을 짓고 몇 년 뒤, 임금님은 그 옆에 학교를 열었어요. 처음에는 왕자와 높은 집안 아이들만 공부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평범한 집안의 똑똑한 학생들도 올 수 있게 되었어요.

문묘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 다섯 개를 차례로 지나가요. 상자 안에 상자가 들어 있는 것처럼 문을 하나씩 열고 들어가는 셈이지요. 가운데에는 별빛처럼 생긴 둥근 창이 달린 작은 빨간 누각이 서 있고, 그 앞에는 ‘천광정(天光井)’이라는 네모난 연못이 있어서 물 위에 하늘이 비쳐요.

연못 양옆에는 커다란 돌거북 82마리가 있어요. 거북마다 등에 키 큰 돌판을 지고 있지요. 돌판에는 임금님이 직접 문제를 낸 나라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에 붙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거북은 아주 오래 산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이름들도 영원히 기억되라는 뜻으로 거북을 골랐대요.

지금도 베트남 학생들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이곳에 와서 합격을 빌고, 설날이 되면 붓글씨 쓰는 사람들이 문 앞에 앉아 방문객에게 멋진 글자를 써 준답니다.

한눈에 보기

창건
1070년 리(Lý) 왕조 리타인똥(Lý Thánh Tông) 때. 1076년 리년똥(Lý Nhân Tông) 때 국자감(Quốc Tử Giám) 설립
위치
베트남 하노이 꾸옥뜨지암(Quốc Tử Giám) 거리 58번지, 옛 탕롱 성의 남쪽
배향
공자와 그 주요 제자, 후대 유학자들. 베트남의 스승 쭈반안(Chu Văn An)도 모심
배치
반 호수와 지암 공원을 포함해 약 54,000㎡. 남북 축을 따라 다섯 겹의 마당이 이어짐
진사비
거북 받침 위에 세운 비석 82기 현존(1484~1780년 건립). 1442~1779년 정시(殿試) 합격자 기록
상징
규문각(奎文閣, Khuê Văn Các). 1805년 건립, 하노이시의 공식 상징
지정
베트남 특별국가유적(2012). 진사비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 2010년, 국제 목록 2011년)

쉬움

하노이 문묘는 어떤 곳인가

하노이 문묘, 베트남어로 반미에우(Văn Miếu, 文廟)는 하노이 도심에 있는 공자 사당이다. 1070년, 하노이가 ‘탕롱(昇龍)’이라 불리며 다이비엣(大越) 리 왕조의 수도였던 시절에 처음 세워졌다. 베트남의 다른 지방은 물론 중국·한국·일본에도 ‘문묘’라는 이름의 공자 사당이 많지만, 하노이 문묘는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이름난 곳이다.

이곳은 두 가지 정체성을 함께 지니며, 이는 베트남에서 흔히 쓰는 이름 ‘반미에우–꾸옥뜨지암(文廟–國子監)’에 그대로 드러난다. 문묘는 공자와 성현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고, 국자감은 1076년 그 곁에 세운 왕립 교육기관이다. 베트남에서는 국자감을 흔히 ‘나라 최초의 대학’이라 부르며, 이곳은 중간중간 끊기기도 했지만 약 700년 동안 관료와 학자를 길러 냈다.

오늘날 이 일대는 앞쪽의 반 호수와 옆의 지암 공원을 포함해 5만 4천㎡ 남짓에 이른다. 안쪽 사당 구역은 오래된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섯 개의 마당으로 나뉜다. 방문객은 번잡한 하노이 거리에서 문과 정원, 연못을 차례로 지나 가장 안쪽의 제례 건물에 이르는데, 이 길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배움으로 이끌도록 설계되었다.

문묘는 하노이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명소 가운데 하나다. 10만 동 지폐 뒷면에 실려 있고, 규문각은 하노이시의 공식 상징이다. 또한 지금도 살아 있는 장소여서, 학생들은 시험을 앞두고 합격을 빌러 오고, 학교는 이곳에서 시상식을 열며, 음력 설에는 시인과 서예가들이 모여든다.

[1][2][8][10]

쉬움

배치 읽기: 배움으로 가는 다섯 겹의 마당

정문 앞에는 벽돌 기둥 네 개와, 말에서 내리라고 명하는 작은 하마비(下馬碑) 두 기가 서 있다.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도 문묘 앞은 걸어서 지나가야 했다. 정문인 문묘문(文廟門)에는 출입구가 셋 있는데, 전통적으로 가운데 길은 임금만 다니고 관리들은 양옆 길을 썼다고 한다. 전체 배치는 남북으로 곧게 뻗어 있어 공자의 고향인 중국 곡부(曲阜)의 공자묘와 자주 비교되지만, 하노이 문묘는 규모가 작고 소박하며 목구조와 장식은 베트남 전통을 따른다.

첫째와 둘째 마당은 고목과 잔디, 네모난 연못이 있는 정원으로, 바깥세상과 신성한 구역을 갈라 놓는다. 첫째 마당은 대중문(大中門)에서 끝나고, 그 양옆에는 ‘재주에 이른다’는 달재문(達材門)과 ‘덕을 이룬다’는 성덕문(成德門)이 있다. 둘째 마당 끝에는 1805년에 세운 규문각이 있다. 흰 벽돌 기둥 네 개 위에 작은 목조 누각을 얹은 모양인데, 사방에 둥근 창이 나 있고 창의 나무살은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 규성(奎星)의 빛줄기를 나타낸다. 옛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뛰어난 글을 읽고 품평했다고 전한다.

규문각 뒤 셋째 마당 한가운데에는 천광정(天光井, Thiên Quang Tỉnh), 곧 ‘하늘빛을 비추는 우물’이라는 네모난 연못이 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네모난 연못은 땅을, 규문각의 둥근 창은 하늘을 뜻하여, 이 마당은 하늘과 땅의 정수를 배움의 장소에 모아 놓은 셈이다. 연못 양쪽 비각 줄에는 진사비가 서 있다. 돌거북 위에 세운 비석 82기가 한쪽에 41기씩, 모두 연못을 바라보고 있다.

대성문(大成門)을 지나면 문묘의 제례 중심인 넷째 마당이다. 벽돌 깔린 뜰 건너편에 앞뒤가 트인 대배당(大拜堂)이 있고, 그 뒤에는 어둡고 닫힌 상전(上殿)이 있다. 상전에는 공자와 사배(四配), 곧 안회·증자·자사·맹자, 그리고 십철(十哲)의 위패와 제단이 있다. 양옆의 긴 건물에는 예전에 다른 성현과 유학자의 위패를 모셨다.

마지막 다섯째 마당은 ‘태학(太學, Thái Học)’이라 불리며 옛 국자감 터에 자리한다. 지금 건물은 1999~2000년에 지은 것이다. 뒤쪽 건물 2층에는 이곳과 가장 인연이 깊은 세 임금, 리타인똥·리년똥·레타인똥(Lê Thánh Tông)을 모시고, 1층에는 스승 쭈반안을 기리며 베트남 유학 교육의 역사를 전시한다.

[1][2]

쉬움

진사비: 돌에 새긴 이름

천광정 옆의 비석들은 문묘의 가장 큰 보물이다. 비석 하나는 정시(廷試, thi Đình) 한 차례를 기록한다. 정시는 과거의 최고 단계로, 합격자는 진사(進士, tiến sĩ) 칭호를 받았다. 비석에는 시험 연도, 시험을 주관한 관리, 합격자의 이름과 등급, 고향 마을이 적혀 있고, 배움과 인재를 구한 임금을 기리는 글이 함께 새겨져 있다.

최초의 비석은 1484년 레타인똥 임금이 1442년 이후 치른 시험들을 기념하여 세우게 했다.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비석이 더해졌는데, 특히 1653년과 1717년의 두 차례 대규모 건립이 있었고, 그 뒤로는 대개 시험이 끝날 때마다 세웠다. 현존하는 마지막 비석은 1779년 시험을 위해 1780년에 세운 것이다. 남아 있는 82기는 30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약 1,300명의 합격자를 기록하는데, 정확한 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달라 1,304명, 1,307명 같은 숫자가 흔히 쓰인다.

가장 널리 인용되는 구절은 1442년 시험 비석에 있는데, 1484년 문신 턴년쭝(Thân Nhân Trung)이 지은 글이다. “賢才者國家之元氣”, 곧 “어진 인재는 나라의 원기(元氣)다.” 글은 이어서 원기가 왕성하면 나라가 흥하고, 원기가 약하면 나라가 쇠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오늘날 베트남에서도 널리 인용된다.

왜 거북일까? 베트남 전통에서 거북은 용·기린(lân)·봉황과 함께 네 가지 신령한 동물(사령) 가운데 하나로, 장수와 지혜를 상징한다. 비석을 거북 등에 올린 것은 학자들의 이름이 오래오래 남으라는 뜻이었다. 거북의 모양과 비석의 장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에, 진사비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베트남 석조 조각의 변화를 보여 주는 독보적인 자료이기도 하다.

[3][4][1]

중급

짓고 또 고쳐 지은 역사: 지금 보는 것은 얼마나 오래되었나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따르면 1070년 리타인똥은 문묘를 짓고 공자·주공·사배의 상을 만들고 72현의 상을 그려 사철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황태자가 그곳에서 공부했다. 1888년 대수리 때 대성문에 건 현판에도 신무(神武) 2년(1070)에 창건했다고 적혀 있다. 다만 창건한 달은 자료에 따라 음력 8월 또는 10월로 서로 다르다.

11세기 문묘의 모습은 오늘날 거의 확인할 수 없다. 사서는 리·쩐 왕조 시기 건물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아 그 규모와 정확한 배치를 알 수 없다. 문묘는 1156년에 수리되었고, 1483년 레타인똥 때 크게 다시 지어졌다. 이때 사서에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 선현을 모시는 동무·서무, 태학당, 강당, 책판을 보관하는 창고, 한 줄에 25칸씩 늘어선 학생 기숙사가 적혀 있다. 1770년대에 학자 레뀌돈(Lê Quý Đôn)이 남긴 기록에도 기와 건물과 비각, 강학 건물이 나온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 대부분은 레 왕조 후기에서 응우옌 왕조 초기(17~19세기)의 것이며, 그 뒤로도 수리를 거쳤다. 둘레의 벽돌담은 대체로 레 왕조 때 것으로 본다. 규문각은 1805년 새 응우옌 왕조 아래 북부 지역(북성, 北城)의 총진(總鎭) 응우옌반타인(Nguyễn Văn Thành)이 세웠다. 비각은 1863년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 고쳤고, 태학 마당은 1999~2000년에 재건한 것이다.

건물은 베트남 북부 전통 건축의 재료로 지어졌다. 돌 초석 위에 철목(lim) 기둥과 지붕틀을 세우고, 곡선 기와지붕을 얹었으며, 하노이 근교 도자기 마을 밧짱(Bát Tràng)의 벽돌을 깔고, 한자 글귀를 새겨 옻칠한 현판과 주련을 걸었다. 비석은 청회색 돌로 만들었다. 베트남 건축사가들은 건물 이름이 곡부와 같더라도 목구조와 공포, 비례는 분명히 베트남식이라고 강조한다.

[2][1][9]

중급

문묘를 세운 사회: 리 왕조에서 레 왕조까지

다이비엣은 10세기에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리 왕조(1009~1225)는 1010년 수도를 탕롱으로 옮기고 안정된 국가를 세웠다. 당시 궁정에서는 불교가 주된 종교였지만, 리 왕조의 임금들은 문서를 쓰고 세금을 관리하고 중국과 외교를 맡을 글 아는 관리가 필요했다. 1075년 리년똥은 처음으로 과거를 치렀고, 1076년에는 문묘 곁에 국자감을 세워 학문 있는 문신들을 배치했다. 처음에 국자감은 주로 왕족과 고관의 자제를 위한 곳이었다.

쩐 왕조(1225~1400) 때 과거는 더 정기적으로 치러졌고, 1253년 쩐타이똥(Trần Thái Tông)은 국자감을 국학원(國學院)으로 고치고 전국의 유학자를 불러 경전을 강의하게 했다. 가장 이름난 스승은 쭈반안(1292~1370년경)으로, 쩐민똥(Trần Minh Tông) 때 국자감에서 가르쳤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부패한 신하 일곱 명을 베라는 상소(칠참소, 七斬疏)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렸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문묘에 모셔졌고, 베트남 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참된 스승의 본보기로 기억한다.

국자감의 전성기는 약 20년에 걸친 명나라의 점령에서 벗어난 뒤 세워진 후(後)레 왕조(1428~1789) 때였다. 레타인똥(재위 1460~1497)은 3년마다 정시를 열고 국자감을 다시 짓고 진사비를 세우기 시작했다. 감생(監生, giám sinh)은 대개 향시에 합격한 뒤 들어와 사서오경과 역사, 작문을 공부했고, 매달과 철마다 시험을 보며 회시(會試, thi Hội)와 정시를 준비했다. 정시에서는 임금이 직접 책문(策問)을 내고 합격자의 등급을 매겼다.

1527년 왕위를 차지한 막(Mạc) 왕조도 과거를 계속 치렀지만, 하노이에 남아 있는 막 왕조 비석은 한 기뿐이다. 레 왕조가 복귀한 뒤 북부의 실권은 찐(Trịnh) 씨 가문이 쥐고 레 황제는 이름만 남았는데, 과거와 비석 건립은 두 세력의 권위 아래 1779년까지 이어졌다. 1762년에는 기관의 이름이 다시 공식적으로 국자감으로 정해졌다.

[1][2][5][6]

중급

종교·문화적 의미: 베트남의 유학

유교(베트남어 Nho giáo)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윤리와 정치의 전통으로, 배움을 통한 수신(修身), 부모와 스승에 대한 공경, 올바른 예(禮), 도덕적으로 교육받은 관리에 의한 정치를 중시한다. 문묘에서 공자는 기적을 내리는 신이 아니라 ‘지성선사(至聖先師)’, 곧 가장 뛰어난 성인이자 으뜸가는 스승으로 모셔지며, 그 위패는 중앙 제단에 놓인다. 봄가을 제향 때 제물을 올렸고, 선비들은 감사와 다짐의 뜻으로 제단 앞에 절했다.

문묘는 정치적 선언이기도 했다. 공자를 기리고 국자감과 과거를 그와 연결함으로써, 베트남의 임금들은 독립 왕국을 다스리면서도 중국과 같은 고전 문명에 따라 통치한다고 내세웠다. 진사비는 이런 생각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인재를 구한 임금을 찬양하고, 합격자를 학문으로 나라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그린다. 가문과 마을에게 비석에 이름이 새겨지는 것은 길이 남을 영예였고, 지금도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합격자 가운데 조상의 이름을 찾으러 온다.

유교가 다른 신앙을 밀어낸 것은 아니었다. 리·쩐 시대에는 불교·도교와 함께 존재했고, 초기에는 ‘삼교(三敎)’에 대한 지식을 시험한 과거도 있었다. 송나라 학자 주희(朱熹)가 체계화한 성리학이 국가 이념의 중심이 된 것은 15세기에 들어서였다. 주희 자신도 상전에 모셔진 십철 가운데 하나다.

많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문묘는 배움을 사랑하는 민족 전통(hiếu học)과 스승을 공경하는 마음(tôn sư trọng đạo)의 상징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곳의 풍습에는 추모와 바람이 섞여 있다. 학생들은 시험을 앞두고 제물을 올리거나 기도하고, 음력 설에는 서예가에게 ‘덕(德)’이나 ‘인(忍)’ 같은 글자를 받아 간다. 이런 풍습은 살아 있는 전통의 일부이며, 오래된 제례와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

[1][2][5][3]

중급

이후의 역사: 후에 천도, 프랑스 식민 시기, 전쟁

18세기 후반 떠이선(Tây Sơn) 봉기가 레 왕조와 찐 씨를 모두 무너뜨렸고, 그 싸움 속에서 문묘도 피해를 입었다. 1802년 나라를 통일한 응우옌 왕조는 후에(Huế)를 수도로 삼고 1803년 그곳에 새 교육기관을 세웠으며, 이것이 뒤에 후에 국자감이 되었다. 하노이 문묘는 지방 문묘가 되었고, 국자감은 부(府)의 학당으로 바뀌었다. 옛 국자감 터에는 공자의 부모를 모시는 계성사(啓聖祠, Khải Thánh)가 세워졌다. 새 진사비는 1820년대부터 후에 문묘에 세워졌다.

그렇다고 응우옌 왕조가 하노이 문묘를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05년 규문각을 더했고, 1863년에는 지방관들이 비각을 다시 짓고 쓰러진 비석을 바로 세우며 닳은 글자를 다시 새겼는데, 이 공사를 기록한 비석이 지금도 남아 있다. 1888년 동카인(Đồng Khánh) 황제 때에는 대대적인 수리가 있었다.

프랑스가 통킹을 보호령으로 삼은 뒤, 문묘는 1906년 역사기념물로 등록되었다. 프랑스 극동학원(EFEO)이 조사와 수리를 맡았고, 1951년 베트남 학자 쩐함떤(Trần Hàm Tấn)이 극동학원 학보에 문묘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발표했다. 당시 사진에는 예복을 갖춘 관리들이 문묘에 선 모습이 남아 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큰 피해를 남겼다. 1946~47년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옛 국자감 터의 계성사 건물이 무너져 기단과 초석, 돌 벼루만 남았고, 문묘 부지 일부는 근처 생폴 병원을 넓히는 데 쓰였다. 1954년 이후 하노이의 새 정부가 수리를 시작했고, 1962년 문묘는 국가 역사유적으로 지정되었다. 풀이 무성하던 비석 정원도 차츰 복원되었다.

[1][2][7][9]

중급

복원과 인정, 그리고 거북 머리 만지기 문제

1988년 유적의 관리와 복원을 맡는 센터가 세워졌고, 1990년대에 대대적인 공사가 이어졌다. 대성전과 배수 시설을 고치고 연못을 준설했으며, 1994년에는 비각을 다시 짓고 비석을 줄지어 재배치하면서 가장 이른 두 비석(1442년·1448년)을 가운데 비정에 두었다. 1999~2000년에는 탕롱–하노이 990주년을 기념해 옛 국자감 터에 태학 마당을 재건했고, 2000년 10월 준공식을 열었다.

나라 안팎의 인정도 뒤따랐다. 진사비 82기는 2010년 3월 9일 마카오 회의에서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지역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먼저 오르고, 2011년 국제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참고 자료마다 두 연도가 함께 보이는 까닭이다. 응우옌 왕조 목판에 이은 베트남의 두 번째 세계기록유산이었다. 2012년에는 문묘 전체가 특별국가유적으로 지정되었고, 규문각이 하노이의 상징으로 선정되었다.

인기는 문제도 낳았다. 오랫동안 방문객, 특히 시험 합격을 비는 학생들이 돌거북의 머리를 쓰다듬어 돌이 반들반들 닳았다. 이를 막기 위해 지금은 비석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만지거나 올라가지 말라고 안내한다. 작지만 분명한 이 사례는 더 넓은 보존의 딜레마, 곧 연약한 유산을 보호하면서도 그 의미를 살려 온 살아 있는 풍습과 떼어 놓지 않는 방법이라는 문제를 보여 준다.

진정성을 둘러싼 논의도 있다. 태학 마당처럼 옛 기단 위에 전통 양식으로 새로 설계한 건물을 11세기 유적의 일부로 얼마나 소개해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 거듭 제기된다. 대중 관광과 행사, 주변 도시 개발의 압력도 걱정거리다. 이에 대해서는 베트남의 사당은 늘 고치고 다시 지어 왔으며, 쓰임과 의미가 이어지는 것이 목재 하나하나의 나이만큼 중요하다는 답이 흔히 돌아온다.

[2][3][4][1][11]

심화

학술적 쟁점: 연대, 숫자, 그리고 ‘최초의 대학’이라는 표현

1070년이라는 창건 연대는 15세기에 이전 사서들을 바탕으로 편찬된 『대월사기전서』와 1888년 대성문 현판 같은 후대의 글에 근거한다. 리 왕조 때 탕롱에 문묘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11세기 문묘가 정확히 지금 자리에 있었는지, 그 배치가 지금과 어떤 관계인지는 문헌만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 국자감 건물의 연대를 1076년으로 볼지 1077년으로 볼지도 2차 자료마다 달라, 현대의 요약들조차 사서를 고르지 않게 옮기고 있음을 보여 준다.

국자감을 ‘베트남 최초의 대학’이라 부르는 표현은 베트남 문헌과 관광 안내에서 흔하다. 역사가들은 이것이 비유라고 지적한다. 국자감은 경전으로 관리를 기르는 궁정 기관으로, 중세 유럽의 대학보다는 중국의 국자감에 가까웠고, 입학 대상과 교과, 운영의 연속성도 리·쩐·레 시대를 거치며 크게 바뀌었다. 또한 쭈반안이 고향 마을에서 연 서당처럼 사적인 교육과 나란히 존재했다.

시험과 비석의 수도 풀리지 않은 문제다. 1442년부터 레 왕조의 마지막 시험인 1787년까지 모든 정시를 세면 약 124회, 정규 진사과만 세면 약 117회가 된다. 베트남어 위키백과의 진사비 항목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비석을 세운 것으로 확인되는 시험이 91회이고 그 가운데 82기가 남아 있으며, 사서에 비석을 세웠다고 기록된 아홉 차례 시험(1469년·1472년 등)의 비석은 지금 없다고 설명한다. 1976년 4월 경내 연못 바닥에서 비석 없는 돌거북 받침이 발굴되어, 하노이의 역사학자 응우옌빈푹(Nguyễn Vinh Phúc) 등은 ‘83번째 비석’을 거론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합격자 수도 계산 방식에 따라 약 1,303명에서 1,323명까지 차이가 난다.

마지막으로, 비석을 증거로 어떻게 읽을지도 논쟁거리다. 비문은 인재를 아끼는 임금이라는 이상화된 모습을 그린다. 궁정 관리가 지었고, 때로는 기록 대상인 시험보다 수십 년 뒤에 쓰였으며, 1863년 수리처럼 후대에 다시 새기거나 재배치된 비석도 있다. 그러므로 진사비는 1차 사료이면서 동시에 후대의 재구성이기도 해서, 비문 하나하나의 연대를 따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2][4][3][1]

심화

증거와 방법: 사서, 금석문, 건축

문헌 자료. 가장 중요한 서술 자료는 관찬 사서로, 무엇보다 『대월사기전서』와 19세기 관찬 사서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이 문묘와 국자감의 창건, 과거, 수리를 기록한다. 레뀌돈의 『견문소록(見聞小錄)』(1770년대)은 18세기 건물을 묘사한다. 등과록(登科錄) 같은 합격자 명부로 비석 내용을 교차 확인할 수 있다.

금석학. 진사비와 경내의 다른 글들, 곧 1863년 수리 기념비, 문과 건물에 걸린 현판과 주련, 1998년 반 호수를 준설하다 발견한 1942년의 호수 관련 비석 등은 그 자체로 사료다. 20세기 초부터 프랑스 극동학원과 뒤이어 베트남 한놈연구원의 학자들이 이를 판독하고 번역해 왔다. 예를 들어 쩐함떤의 1951년 연구는 비석 두 기의 전문 번역을 싣고 이곳의 행정 소속 변화를 추적했다.

미술사. 거북의 모양과 비석의 장식은 전기 레 왕조, 막 왕조, 복귀한 레 왕조 시기에 따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달라지므로, 양식은 연대가 없거나 다시 새긴 비석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비석은 옮겨지고 다른 거북 위에 다시 세워지고 수리되기도 했으므로, 겉으로 보이는 양식 차이는 비문과 수리 기록으로 확인해야 한다.

건축과 경관. 곡부나 베트남의 다른 문묘와 비교하면 빌려 온 이름과 개념을 현지의 건축 관행과 구별할 수 있다. 목조 가구와 수리 기록을 분석하면 지금 서 있는 건물 대부분은 17~19세기보다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노이 문묘가 주는 방법론적 교훈은, 유적이 내세우는 연대(1070년)와 눈에 보이는 건물의 연대는 서로 다르며 둘 다 그 유적의 역사에 속한다는 것이다.

[9][2][3][5]

핵심 개념

사당과 학교
유교 제례를 올리는 문묘와 관리를 기르는 국자감이 한곳에 있어, 제사와 공부가 하나로 이어졌다.
인재는 나라의 원기
1442년 비석에 새겨진 생각으로, 나라의 힘은 교육받고 덕 있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베트남 사람들이 문묘를 기억하는 중심 개념이다.
과거 국가
1075년부터 1919년까지 베트남 왕조들은 유교 경전 시험으로 관리를 뽑았고, 진사비는 그 최고 단계를 기린다.
하늘과 땅
네모난 천광정과 규문각의 둥근 창은 전통적으로 땅과 하늘이 배움의 자리에서 만나는 것으로 풀이된다.
돌에 새긴 기념
합격자의 이름을 거북 받침 비석에 새겨, 개인의 성취를 가문·마을·나라의 영원한 공적 영예로 만들었다.
살아 있는 유산
문묘는 보호 유적이면서 지금도 풍습이 이어지는 장소여서, 보존과 이용 사이에 긴장이 생긴다.
거듭된 재건의 층위
창건 연대는 1070년이지만 눈에 보이는 건물은 대부분 훨씬 뒤의 것이다. 수리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곧 유적을 이해하는 일이다.

기록

  1. 1070년 — 리타인똥이 탕롱에 문묘를 세우고 공자와 제자들의 상을 모신다.
  2. 1076년 — 리년똥이 문묘 곁에 왕립 교육기관 국자감을 세운다.
  3. 1253년 — 쩐타이똥이 국자감을 국학원으로 고치고 유학자들을 불러 경전을 강의하게 한다.
  4. 약 1370년 — 스승 쭈반안이 세상을 떠나고, 뒤에 문묘에 모셔진다.
  5. 1484년 — 레타인똥이 1442년 이후의 시험을 기리는 첫 진사비를 세우게 한다.
  6. 1653년 — 가장 큰 규모의 비석 건립. 1554년 이후의 시험들을 기록한다.
  7. 1780년 — 1779년 시험을 기록한 현존 마지막 비석이 세워진다.
  8. 1803년 — 후에를 수도로 삼은 응우옌 왕조가 그곳에 새 교육기관을 세우고, 하노이 문묘는 지방 문묘가 된다.
  9. 1805년 — 북성 총진 응우옌반타인이 규문각을 세운다.
  10. 1906년 — 프랑스 식민 당국이 문묘를 역사기념물로 등록한다.
  11. 약 1947년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 프랑스군 포격으로 옛 국자감 터의 건물이 파괴된다(1946~47).
  12. 2010년 — 진사비 82기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지역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오른다(국제 목록 등재는 2011년).

용어 풀이

문묘(文廟, Văn Miếu)
공자를 모시는 사당. 전근대 베트남의 여러 고을에 있었다.
국자감(國子監, Quốc Tử Giám)
학자와 관리를 기르는 왕립 교육기관. 중국의 국자감에서 온 이름으로, 하노이에는 1076년에 세워졌다.
진사(進士, tiến sĩ)
최고 단계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 준 칭호. 영어로는 흔히 ‘박사(doctor)’라고 옮긴다.
정시(廷試, thi Đình)
과거의 마지막 단계인 궁정 시험. 임금이 문제를 내고 합격자의 등급을 매겼다.
비석
글을 새겨 세운 돌판. 하노이 문묘의 진사비는 거북 모양 받침 위에 서 있다.
규문각(奎文閣, Khuê Văn Các)
1805년에 세운 누각으로, 문묘와 하노이시의 상징이다.
천광정(天光井, Thiên Quang Tỉnh)
셋째 마당의 네모난 연못. 양옆에 진사비가 늘어서 있다.
유교(Nho giáo)
공자와 경전에 바탕을 둔 윤리·정치 전통. 배움과 예, 도덕적 정치를 중시한다.
성리학
주희와 연관된 유학의 재해석. 15세기 베트남에서 국가 정통 이념이 되었다.
특별국가유적
베트남의 역사유적 보호 등급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 문묘는 2012년에 지정되었다.

묻고 답하기

하노이 문묘는 정말 대학이었나요?

유교 경전으로 관리를 기르는 왕립 교육기관이었어요. 베트남에서는 나라 최초의 대학이라고 부르지만, 역사가들은 오늘날의 대학이나 유럽의 대학과는 꽤 달랐다고 지적해요.

비석은 왜 거북 위에 있나요?

베트남 전통에서 거북은 장수와 지혜를 뜻하는 신령한 동물이라, 학자들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라는 뜻으로 비석을 거북 등에 올렸어요.

행운을 빌며 거북을 만져도 되나요?

예전에는 많이 만졌지만 쓰다듬다 보니 돌이 닳아서, 지금은 울타리를 치고 만지지 말라고 안내하고 있어요.

1070년에 지은 것이 남아 있나요?

확실히 그때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어요. 창건은 1070년이지만 대부분의 건물은 17~19세기에 다시 지어졌고, 다섯째 마당은 2000년에 지은 것이에요.

비석에는 몇 번의 시험이 기록되어 있나요?

남아 있는 82기가 각각 1442년부터 1779년 사이의 정시 한 번씩을 기록해요. 원래는 비석이 더 있었고 일부는 사라진 것으로 보여요.

진사비는 언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나요?

2010년 3월 9일 마카오 회의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에 먼저 오르고, 2011년에 국제 목록에 올랐어요. 그래서 두 연도가 함께 보여요.

19세기에 국자감의 위상이 떨어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응우옌 왕조가 수도를 후에로 옮기고 1803년 그곳에 새 교육기관을 세웠기 때문에, 하노이 문묘는 지방 문묘가 되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Temple of Literature, Hanoi. Wikipedia
  2. Văn Miếu – Quốc Tử Giám. Wikipedia (베트남어)
  3. Stone stele records of imperial examinations of the Lê and Mạc dynasties. Wikipedia
  4. Bia tiến sĩ Văn Miếu Thăng Long. Wikipedia (베트남어)
  5. Confucian court examination system in Vietnam. Wikipedia
  6. Chu Văn An. Wikipedia
  7. Imperial Academy, Huế. Wikipedia
  8. 문묘 (하노이). 위키백과
  9. Trần Hàm Tấn, Étude sur le Văn-miếu de Hanoi (Temple de la Littérature).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45 (1), 1951
  10. Văn Miếu – Quốc Tử Giám (공식 누리집). Trung tâm Hoạt động Văn hóa Khoa học Văn Miếu – Quốc Tử Giám
  11. Stone Stele Records of Royal Examinations of the Le and Mac Dynasties (1442–1779). UNESCO Memory of the World Committee for Asia and the Pacific (MOWCAP)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 지도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