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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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앞바다에는 고깃배와 야자나무, 그리고 천 명쯤 되는 사람이 사는 조용한 섬이 있어요. 나무 사이를 걷다 보면 아치, 둥근 지붕, 벽, 심지어 팔각형 수영장까지 있는 거대한 돌 유적이 나타나요. 한때 인도양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킬와의 흔적이에요.
킬와는 무역으로 부자가 되었어요. 해마다 계절풍이 아라비아·페르시아·인도의 배를 아프리카로 실어 왔다가, 방향을 바꿔 다시 고향으로 데려다주었지요. 아주 먼 내륙, 그레이트짐바브웨 땅에서 캔 금이 해안으로 옮겨졌고, 킬와는 그 금을 모아 천, 구슬, 향신료, 아름다운 중국 도자기와 바꾸었어요.
킬와 사람들은 아프리카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쓰는 무슬림이었어요. 바다에서 캐낸 산호석으로 집을 지었고, 자기들만의 구리 동전도 만들었어요. 1331년 모로코의 유명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찾아와 킬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잘 지은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했어요.
모두가 부자였던 것은 아니에요. 많은 사람은 진흙과 풀로 지은 소박한 집에 살았고, 노예로 붙잡힌 사람도 있었어요. 킬와의 통치자들도 사람을 붙잡아 파는 일에 가담했는데, 이것은 킬와 이야기의 슬픈 부분이에요.
1505년 포르투갈 군인들이 군함을 이끌고 와서 도시를 공격하고 약탈했어요. 킬와는 다시는 옛 힘을 되찾지 못했고, 1800년대에 옛 도시는 버려졌어요. 지금 이 유적은 세계유산이고, 고고학자들이 여전히 연구하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위치
- 탄자니아 남부 린디주 킬와군의 킬와 키시와니섬(면적 약 12km²)
- 시기
- 9세기 무렵부터 사람이 살았고, 13~15세기에 도시국가·술탄국으로 전성기. 1505년 약탈, 1840년대에 옛 도시가 버려짐
- 사람들
-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페르시아·아라비아·인도와 이어진 스와힐리 무슬림 사회
- 부의 원천
- 소팔라와 짐바브웨 고원에서 오는 금 교역 장악. 상아·직물·구슬·중국 도자기 교역, 자체 화폐
- 주요 유적
- 대모스크, 후수니 쿠브와 궁전, 후수니 은도고, 마쿠타니 궁전, 게레자 요새, 여러 작은 모스크와 무덤
- 건축 재료
- 산호석(거친 산호 덩어리와 다듬은 산호)과 석회 모르타르·회반죽
- 문헌 자료
- 이븐 바투타(1331년 방문), 『킬와 연대기』(아랍어·포르투갈어 판본), 포르투갈 측 기록
- 지위
- 1981년 송고 음나라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2004~2014년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쉬움
킬와 키시와니란?
킬와 키시와니, 곧 ‘섬의 킬와’는 적도에서 남쪽으로 약 9도, 탄자니아 남부 해안 바로 앞에 있는 둘레 약 23km의 낮은 산호섬이다. 지금은 천 명 남짓한 주민이 고기잡이와 농사, 관광으로 살아간다. 도로도 강도 없고, 천 년 넘게 쓴 우물도 있는 섬의 우물들이 여전히 물을 댄다.
중세에 이 섬에는 인도양의 대도시 가운데 하나가 있었다. 킬와는 13~15세기 전성기에 동아프리카 해안의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떨친 술탄국의 수도였다. 주민이 1만 명을 넘었을 수도 있으며, 스와힐리 해안 남부에서 으뜸가는 무역항이었다.
남은 것은 산호석으로 지은 유적이다. 대모스크, 절벽 위의 거대한 후수니 쿠브와 궁전, 후수니 은도고라는 성벽 두른 구역, 게레자라는 후대의 요새, 그리고 집·작은 모스크·무덤의 흔적이 있다. 유적의 상당 부분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1981년부터 킬와 키시와니 유적은 이웃 송고 음나라섬의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이곳은 아프리카 내륙과 아라비아·페르시아·인도·중국을 이어 준 아프리카 해안 문화, 곧 스와힐리 문명을 이해하기 가장 좋은 곳 가운데 하나다.
쉬움
계절풍이 만든 도시
킬와의 부는 바람에서 나왔다. 서인도양에서는 계절에 따라 계절풍의 방향이 바뀐다. 한때는 북동풍이 불어 아라비아와 인도의 범선을 아프리카로 실어 오고, 뒤에는 남서풍이 불어 다시 돌려보낸다. 상인들은 대양을 가로지르는 정기 항해를 계획할 수 있었고, 배가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곳에 해안 도시들이 자라났다.
킬와의 큰 강점은 금이었다. 그레이트짐바브웨가 있던 짐바브웨 고원에서 캔 금은 지금의 모잠비크에 있는 항구 소팔라로 옮겨졌다. 북쪽에서 온 배들은 그렇게 남쪽까지 거의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킬와가 소팔라를 장악하고 중개자가 되어 금을 모아 북쪽으로 실어 보냈다. 또 항구를 지나는 금에 관세를 매겼다.
킬와는 금, 상아, 거북 등딱지, 향신료, 유향, 면직물을 수출하고 직물, 유리구슬, 장신구, 고급 도자기를 들여왔다. 발굴에서는 페르시아만의 유약 도기와 많은 양의 중국 자기·청자가 나왔다. 부유한 집안은 이런 수입 그릇을 집 벽에 만든 벽감에 진열했다.
킬와는 사하라 이남에서 동전을 찍은 몇 안 되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수백 년 동안 주로 술탄의 이름을 아랍어로 새긴 구리 동전을 발행했다. 킬와 동전은 그레이트짐바브웨를 비롯한 주변 지역 곳곳에서 발견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앞바다의 섬들에서도 몇 닢이 나왔는데,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쉬움
킬와 사람들은 누구였나?
킬와 사람들은 소말리아 남부에서 모잠비크까지 해안을 따라 퍼진 스와힐리 문화에 속했다. 이들은 아랍어 낱말을 많이 받아들인 아프리카 기원의 반투어인 스와힐리어를 썼고, 대부분 무슬림이었다. ‘스와힐리’라는 이름은 ‘해안’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왔으니, 스와힐리인은 ‘해안의 사람들’이다.
킬와 자신의 역사서인 『킬와 연대기』는 페르시아 시라즈의 왕자 알리 이븐 알하산이 현지 아프리카 왕에게서 섬을 사들여 왕가를 세웠다고 전한다. 많은 스와힐리 가문은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시라지’라고 불렀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인지, 실제 이주를 반영하는지 아니면 뒷날 위신을 내세우는 방식이었는지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고고학은 그런 왕자가 올 수 있었던 때보다 훨씬 전부터 킬와가 아프리카의 마을이었음을 보여 준다. 가장 이른 정착은 9세기 무렵이고, 첫 집들은 다른 해안·내륙 공동체처럼 나무 뼈대에 진흙을 바른 흙벽집이었다. 돌집은 도시가 부유해진 13세기 무렵부터 주로 나타난다.
킬와는 매우 불평등한 도시였다. 부자들은 회반죽 벽, 실내 욕실, 수입 도자기를 갖춘 돌집에 살았고, 많은 사람은 진흙과 초가로 된 집에 살았다. 노예가 된 사람들도 있었고, 도시의 통치자들은 약탈과 포로 매매에 가담했다. 이 모든 사람이 함께 오늘 우리가 보는 유적의 사회를 이루었다.
중급
유적 읽기: 모스크, 궁전, 집
대모스크는 동아프리카 해안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모스크 가운데 하나다. 11~12세기(전승상 1131~1170년)의 것으로 보이는 북쪽 예배당은 직사각형 공간으로, 평평한 지붕을 처음에는 산호, 뒤에는 나무로 된 기둥 아홉 개가 받쳤다. 다른 지역의 많은 모스크와 달리 열린 안뜰이 없다. 14세기 초 술탄 알하산 이븐 술라이만이 궁륭과 돔, 그리고 커다란 돔을 갖춘 넓은 남쪽 증축부를 더했는데, 1331년 이븐 바투타가 이것을 보았을 수 있다.
‘큰 궁전’이라는 뜻의 후수니 쿠브와는 옛 시가 밖 바다 위 절벽에 서 있다. 주로 같은 술탄이 14세기 초에 지은 것으로, 약 2에이커에 걸쳐 물건을 저장하고 거래했을 상업용 안뜰, 방이 백 개가 넘는 주거 구역, 접견용 정자, 해안으로 내려가는 거대한 계단, 팔각형 수영장을 갖추었다. 이상하게도 아주 짧게만 쓰였고 완공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연대기에도 이와 비슷한 건물은 나오지 않는다.
근처의 후수니 은도고(‘작은 궁전’)는 모서리마다 탑이 있는 직사각형 성벽 구역이다. 용도는 분명하지 않아, 요새처럼 보이지만 한때 모스크로 쓰였을 수도 있다. 시가 중심의 게레자(‘감옥’)는 1505년 포르투갈인이 세운 요새를 오만 지배기에 지금 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이며, 가까이에 마쿠타니 궁전 유적이 있다.
집들은 일상을 보여 준다. 부유한 집은 거친 산호석을 석회 모르타르로 쌓았고, 나무나 맹그로브 장대와 산호 판으로 지붕을 얹은 길고 좁은 방, 회반죽 바닥, 도자기를 진열하는 벽감을 갖추었다. 무덤은 시가 가장자리에 있고, 열린 공간은 모임에 쓰였을 것이다. 발굴에서 나온 가락바퀴는 적어도 12세기부터 현지에서 면화를 자았음을 보여 준다.
중급
산호로 짓기
킬와의 건축가들은 바다의 재료를 썼다. 섬은 화석 산호 석회암 위에 있고, 산호초에서는 살아 있는 산호를 얻을 수 있었다. 거친 화석 산호 덩어리는 모르타르로 쌓아 벽을 만들었고, 산호초에서 막 잘라 내 아직 무른 고운 산호는 공기 중에서 굳기 전에 정확한 모양으로 깎아 문틀, 아치, 장식판을 만들었다.
모르타르와 회반죽에 쓸 석회는 산호를 가마에서 구워 얻었다. 여기에는 많은 연료가 필요했는데, 상당 부분이 해안 습지의 맹그로브 나무였다. 곧고 벌레에 강한 맹그로브 장대는 지붕 들보로도 쓰였다. 그래서 건축의 규모는 도시의 부에 달려 있었다. 14세기 후반 교역이 기울자 석회와 건축용 돌의 수요가 줄고 건설이 뜸해졌다.
항구에는 높이 1m 가까운 산호초 덩어리로 둑길과 단을 쌓았다. 이것은 방파제이자 배를 대는 곳 구실을 했다. 그 위로 맹그로브가 자라, 지금도 멀리서 이런 구조물을 알아볼 수 있다.
물도 세심하게 다루었다. 대모스크에는 구운 흙으로 만든 수로망을 갖춘 세정 공간이 있었고, 부유한 집에는 배수 시설이 있는 욕실이 있었다. 후대의 방문자와 역사가들을 놀라게 한 ‘실내 배관’이다.
중급
킬와 술탄국의 성장과 전성기
『킬와 연대기』에 따르면 첫 시라지 통치자 알리 이븐 알하산이 10세기에 왕조를 열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은 킬와에서 알려진 가장 이른 동전에 속하지만, 왕조가 연대기의 주장만큼 일찍 시작되었는지는 고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연대기는 이어서 긴 통치자 계보를 적는데, 킬와 주민들에게 폐위되거나 경쟁자에게 살해된 이들도 있어, 도시의 상인과 주민이 실질적인 정치적 힘을 지녔음을 시사한다.
결정적 전환점은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 킬와가 북쪽의 경쟁자 모가디슈에게서 소팔라 금 교역의 주도권을 빼앗은 일이었다. 연대기는 이것과 도시 건설의 많은 부분을 술탄 술라이만 이븐 알하산의 공으로 돌린다. 그 이익이 킬와의 해안 확장을 뒷받침했다.
13세기 말 무렵 예멘의 사이이드(예언자의 후손) 가문을 자처한 새 왕조 마흐달리, 곧 아부 알마와히브 가문이 권력을 잡았다. 14세기 초 술탄 알하산 이븐 술라이만 때 킬와는 화려함의 정점에 이르러, 대모스크가 확장되고 후수니 쿠브와가 지어졌다. 15세기 최전성기에 킬와는 말린디·몸바사에서 잔지바르·마피아·코모로·소팔라에 이르는 도시들과 마다가스카르의 교역 거점들에 대한 권위를 주장했다.
이 ‘제국’은 중앙집권 국가라기보다 교역 도시들의 연합에 가까웠다. 각 도시는 현지 엘리트가 운영했고, 술탄이 보낸 총독의 권한도 곳마다 크게 달랐다. 15세기 후반에는 강력한 재상과 에미르들이 술탄을 좌지우지했고, 1500년 무렵의 살벌한 정변 뒤 많은 속국 도시가 킬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바로 그때 포르투갈인이 도착했다.
중급
1331년 이븐 바투타의 방문
모로코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내려가 1331년 무렵 킬와에 닿았다. 그는 여행기에서 킬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잘 지은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적었다. 그는 도시 계획과 통치자 술탄 알하산 이븐 술라이만의 인품에 감탄하며, 그의 관대함과 겸손, 신앙심을 칭송했다.
이븐 바투타의 기록은 어두운 현실도 전한다. 그는 술탄이 자주 본토 내륙으로 원정해 비무슬림에 대한 성전이라 일컫는 약탈을 벌였고, 포로와 전리품을 가져왔다고 적었다. 그의 기록은 킬와의 부가 금과 교역품만이 아니라 본토에서의 폭력과 노예화와도 얽혀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증언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 그는 여러 해 뒤 기억에 의존해 썼고, 도시의 건물이 나무로 지어졌다는 주장 같은 일부 내용은 그의 방문 이전부터 있던 돌벽이라는 고고학 증거와 맞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전성기 킬와를 직접 본 극소수 외부 목격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븐 바투타의 방문은 킬와가 모로코에서 중국까지 이어진 하나의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북아프리카에서 공부한 학자가 동아프리카까지 가서 그곳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궁정에서 환대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곳 엘리트가 종교와 법의 언어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중급
포르투갈의 공격과 긴 쇠퇴
포르투갈인은 1497~1498년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해로 동아프리카 해안에 닿았다. 1500년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킬와의 통치자 에미르 이브라힘과 협상하려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1502년 다가마는 중무장한 함대를 이끌고 돌아와 킬와에 막대한 공물을 바치게 했다.
1505년 7월 포르투갈의 첫 인도 부왕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가 이끈 함대가 병사 약 500명을 상륙시켜 에미르 이브라힘을 몰아내고 도시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포르투갈은 꼭두각시 통치자를 세우고 요새를 지었으며, 주요 해안 도시로의 교역을 포르투갈 배에만 허용하는 규칙을 강요해 많은 킬와 상인을 몰락시켰다. 금 교역은 포르투갈이 장악한 소팔라로 옮겨 갔고, 킬와의 교역은 사실상 무너졌다. 포르투갈은 1512년 요새를 버렸다.
킬와는 번영을 어느 정도 되찾았지만 옛 힘은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18세기에는 노예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776년 킬와의 통치자는 인도양 섬들의 플랜테이션에 쓸 노예를 해마다 1,000명씩 프랑스 상인에게 넘기기로 약정했다. 1784년 잔지바르의 오만 통치자들이 킬와를 정복했고, 게레자 요새가 지금 모습을 갖추었다. 오만 정복 뒤 프랑스인이 섬 북쪽 끝에 요새를 지었지만, 옛 시가는 1840년대에 버려졌다.
1886년부터 1918년까지 이 지역은 독일령 동아프리카에, 이어 영국이 다스린 탕가니카에 속했다. 수풀에 덮인 유적은 20세기에 들어서야 고고학의 관심과 법적 보호를 받게 되었다.
중급
발굴, 위기, 보존
킬와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은 1958년부터 1965년까지 영국 고고학자 네빌 치틱이 영국 동아프리카 연구소를 위해 수행한 것이다. 1974년에 나온 그의 두 권짜리 보고서는 도시와 건물의 편년을 세웠고, 뒤의 연구가 이를 다듬었다. 최근 연구는 기념비와 항구에서 집, 수공업 생산, 주변 배후지로 관심을 넓혔다.
유적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바다의 침식이 후수니 쿠브와가 선 절벽을 깎아 내 궁전 동쪽 부분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빗물은 벽 주변의 흙을 쓸어 가고, 식물은 침식을 늦추는 대신 뿌리로 석조물을 파고들어 부순다. 2004년 유네스코는 킬와 키시와니와 송고 음나라를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다.
보존 작업이 뒤따랐다. 2001~2007년 프랑스 문화유산 단체의 자원봉사자들이 유적을 돌보았고, 세계기념물기금은 킬와를 2008년 감시 목록에 올린 뒤 여러 건물의 보존 작업을 지원해 왔다. 2005~2009년에는 자마니 프로젝트가 3D 레이저 스캐닝으로 주요 유적을 기록했다. 2014년 이 유산은 위험 목록에서 빠졌다.
지역 주민은 유적의 미래에 핵심적이다. 방문객은 허가를 받아야 하며, 수백 년 동안 이곳에 살아온 조상을 둔 섬 공동체가 유적과 풍경을 함께 나눈다. 관광과 보존, 작고 고립된 주민의 필요 사이의 균형은 여전히 과제다.
심화
아프리카인가 외래인가: 스와힐리 기원 논쟁
킬와의 역사는 19세기와 20세기 초 오만과 유럽 식민 행정가·학자들이 처음 썼다. 이들 중 다수는 해안의 돌 도시들이 아랍이나 페르시아 이주민이 세운 것이라 여기고, 스와힐리 문명을 아프리카 땅에 옮겨 심은 외래 문명으로 다루었다. 『킬와 연대기』의 시라지 전설이 이를 뒷받침하는 듯 보였다.
1970년대 이후 마크 호턴, 존 미들턴과 많은 동아프리카 학자를 비롯한 고고학자·역사학자들은 스와힐리 사회의 아프리카적 기원을 강조했다. 발굴은 해안 도시들이 앞선 아프리카 농경·어로 마을에서 자라났고, 언어는 반투어였으며, 돌 건축도 수백 년에 걸쳐 현지에서 발전했음을 보여 주었다. 스와힐리인은 이주 식민자가 아니라,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인도양 교역의 노련한 참여자가 된 아프리카 공동체로 이해되었다.
2023년 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고대 DNA 연구(브리엘 외)는 킬와를 포함한 중세·근세 해안 도시의 80명을 분석했다. 많은 사람의 조상 절반 이상이 주로 여성인 아프리카 조상에게서, 큰 몫이 아시아 조상에게서 왔고, 그 아시아계 DNA의 80~90%는 페르시아 남성에게서 왔으며, 혼합은 1000년 무렵에 시작되었다. 1500년 무렵 이전의 아시아계 조상은 주로 페르시아 계통으로, 연구자들은 이것이 『킬와 연대기』의 시라지 서사와 부합한다고 보았다. 그 뒤로는 점점 아라비아 계통이 늘었다.
이 결과는 논쟁을 끝내기보다 틀을 바꾸었다. 많은 학자는 혈통이 곧 문화나 정체성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가문들이 페르시아인, 뒤에는 아랍인 이주자와 통혼했어도 스와힐리의 언어·물질문화·도시는 근본적으로 아프리카적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 결과를 『킬와 연대기』 같은 구전 전승이 실제 역사적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증거로 본다. 이제 질문은 ‘아프리카인가 외래인가’보다,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이 함께 어떻게 새로운 해안 사회를 만들었는가에 가깝다.
심화
사료와 연대: 연대기, 동전, 방사성탄소
『킬와 연대기』는 크게 두 판본으로 전한다. 아랍어 『키타브 알술와』와, 역사가 주앙 드 바후스가 『아시아 10년사』(1552)에 넣은 포르투갈어 요약본이다. 두 판본의 계보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세부는 크게 다르고, 둘 다 사건이 있고 수백 년 뒤에 아마 구전을 바탕으로 엮은 것이다. 그래서 건국을 10세기로 두는 재위 기간과 연대는 신중하게 다룬다.
동전은 독립적인 검증 수단이다. 연대기의 시조 알리 이븐 알하산의 이름이 새겨진 구리 동전 더미가 대모스크의 위쪽 층에서 나와, 모스크 자체가 그의 동전보다 오래되었음을 시사한다. 일부 고고학자는 치틱의 발굴에 따라 동전과 층위를 근거로 시라지 왕조가 연대기의 10세기보다 늦게 일어났다고 주장해 왔다. 한편 방사성탄소 연대는 9세기 무렵부터 섬에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 준다.
건물 연대도 논쟁거리다. 대모스크의 단계들은 10세기, 11~12세기, 13~14세기 등 다양하게 추정되며, 비문·동전·건축 양식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주요 단계가 분명히 14세기 초인 후수니 쿠브와에도 더 이른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이븐 바투타의 기록조차 고고학과 모든 점에서 맞지는 않는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킬와는 역사가들이 여러 종류의 증거를 어떻게 결합하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현지 전승, 여행자의 보고, 식민 시대의 저술, 동전, 방사성탄소 연대, 산지로 연대를 알 수 있는 수입 도자기, 그리고 이제는 고대 DNA까지. 저마다 편향과 공백이 있다. 그렇게 드러나는 모습은 수백 년에 걸쳐 성장해 14~15세기에 정점에 이르렀다가 내부 갈등과 포르투갈의 폭력이 겹쳐 무너진 아프리카 무슬림 도시다.
핵심 개념
- 스와힐리 문명
- 반투어를 쓰며 바다를 통해 아라비아·페르시아·인도·중국과 이어진, 동아프리카 해안의 아프리카·이슬람 도시 문화.
- 계절풍 교역
- 계절마다 방향이 바뀌는 바람 덕분에 서인도양 정기 항해가 가능해졌고, 킬와 같은 해안 도시가 생겨났다.
- 금의 중개자
- 킬와의 힘은 짐바브웨 고원에서 소팔라를 거쳐 북쪽 시장으로 가는 금의 흐름을 장악한 데서 나왔다.
- 산호 건축
- 화석 산호와 갓 잘라 낸 산호, 석회 모르타르와 회반죽으로 지은 스와힐리 특유의 건축 전통.
- 도시 연합
- 킬와 술탄국은 중앙집권적 영토 국가라기보다 교역 도시들의 느슨한 연결망이었다.
- 불평등과 노예제
- 킬와의 부는 고르게 나뉘지 않았고, 특히 후기에는 약탈과 노예 무역과 이어져 있었다.
- 여러 겹의 증거
- 연대기, 여행기, 동전, 방사성탄소, 도자기, 고대 DNA를 함께 엮어야 킬와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
기록
- 약 800년 — 방사성탄소 연대로 보아 9세기 초 무렵부터 킬와 키시와니에 사람이 산다.
- 약 957년 — 『킬와 연대기』가 전하는 시라즈의 알리 이븐 알하산의 왕조 창건 연대.
- 약 1100년 — 킬와가 자체 동전을 찍기 시작하고, 11~12세기에 대모스크 북쪽 예배당이 지어진다.
- 약 1200년 — 킬와가 소팔라 금 교역을 장악하고, 시가에 돌 건물이 퍼진다.
- 약 1277년 — 마흐달리(아부 알마와히브) 왕조가 권력을 잡는다.
- 약 1331년 — 이븐 바투타가 방문해 도시와 후수니 쿠브와를 지은 술탄 알하산 이븐 술라이만을 칭송한다.
- 1502년 — 바스쿠 다가마가 킬와에 공물을 바치게 한다.
- 1505년 —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의 포르투갈 함대가 킬와를 약탈하고 요새를 짓는다.
- 1776년 — 킬와의 통치자가 해마다 노예 1,000명을 프랑스 상인에게 넘기기로 약정한다.
- 1784년 — 잔지바르의 오만 통치자들이 킬와를 정복한다.
- 1981년 — 킬와 키시와니와 송고 음나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 2014년 — 보존 작업 끝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서 빠진다(2004년 등재).
용어 풀이
- 스와힐리
- 동아프리카 해안 사람들과 그들의 반투어인 스와힐리어. ‘해안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 계절풍(몬순)
- 계절에 따라 방향이 바뀌는 바람. 인도양에서는 한 계절에 한쪽으로, 다른 계절에 반대쪽으로 항해할 수 있게 했다.
- 술탄국
- 무슬림 군주인 술탄이 다스리는 나라.
- 시라지
- 페르시아 시라즈 출신 이주민의 후손을 자처한 많은 스와힐리 가문이 쓴 이름.
- 거친 산호석(코럴 래그)
- 스와힐리 해안에서 건축용 돌로 쓴 화석 산호 석회암의 거친 덩어리.
- 소팔라
- 지금의 모잠비크에 있던 항구. 짐바브웨 고원의 금이 나가는 주요 출구였다.
- 청자
- 초록빛 유약을 입힌 중국 자기. 인도양 전역에서 거래되었고 킬와에서도 나왔다.
- 미흐라브
- 기도할 때 메카의 방향을 알려 주는 모스크 벽의 벽감.
- 후수니 쿠브와
- ‘큰 궁전(요새)’. 킬와의 14세기 초 거대한 궁전 겸 교역 단지.
- 고대 DNA
- 옛 사람 유해에서 얻은 유전 물질. 조상과 이주를 연구하는 데 쓴다.
묻고 답하기
작은 섬이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되었나요?
중요한 교역로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프리카 내륙의 금이 킬와를 거쳐 아라비아와 인도로 갔고, 계절풍이 해마다 상인들을 실어 왔어요.
킬와는 페르시아 사람들이 세웠나요?
킬와는 페르시아인이 오기 전부터 아프리카의 마을이었고, 사람들은 아프리카 언어를 썼어요. 페르시아 왕자가 왕가를 세웠다는 전승이 있고, DNA 연구도 중세 주민에게 페르시아계 조상이 있음을 보여 주지만, 도시와 문화는 아프리카적이었어요.
이븐 바투타는 킬와에 대해 뭐라고 했나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잘 지은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하며 술탄의 관대함을 칭송했어요. 한편으로 포로를 잡아 오는 약탈 원정도 기록했어요.
무엇이 킬와를 무너뜨렸나요?
내부 권력 다툼으로 약해진 데다, 1505년 포르투갈이 도시를 약탈하고 금 교역을 가져갔습니다. 킬와는 천천히 쇠퇴해 1840년대에 버려졌습니다.
킬와는 노예 무역에 관여했나요?
네. 중세에는 통치자들이 본토에서 포로를 잡아 왔고, 18세기에는 프랑스 플랜테이션에 노예를 공급하는 주요 노예 무역항이 되었습니다.
킬와에는 정말 자기 돈이 있었나요?
네. 수백 년 동안 술탄의 이름을 아랍어로 새긴 주로 구리 동전을 찍었고, 그레이트짐바브웨 같은 먼 곳에서도 발견됩니다.
킬와 키시와니에 가 볼 수 있나요?
네, 현지 관광 안내소에서 허가를 받아 킬와 마소코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습니다. 섬에는 지금도 작은 공동체가 살고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Kilwa Kisiwani. Wikipedia
- Kilwa Sultanate. Wikipedia
- Great Mosque of Kilwa. Wikipedia
- Kilwa Chronicle. Wikipedia
- Swahili coast. Wikipedia
- Songo Mnara. Wikipedia
- Esther S. Brielle et al., Entwined African and Asian genetic roots of medieval peoples of the Swahili coast. Nature, 2023
- H. Neville Chittick, Kilwa: An Islamic Trading City on the East African Coast. British Institute in Eastern Africa, 1974
- Mark Horton and John Middleton, The Swahili: The Social Landscape of a Mercantile Society. Blackwell, 2000
함께 보기
- 이븐 바투타아프리카·아시아와 유럽 일부를 여행한 기록을 남긴 모로코의 여행가다.
- 그레이트 짐바브웨쇼나인의 선조들이 세우고 거주한 남부 아프리카의 큰 도시 유적이다.
- 랄리벨라 암굴 교회군에티오피아 고원의 단단한 화산암을 아래로 파 내려가 만든 교회 열한 채. 전승상 자궤 왕조의 게브레 메스켈 랄리벨라 왕이 ‘새 예루살렘’으로 세웠으며, 지금도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순례 중심지다.
- 팀북투니제르강 가까운 사막 가장자리의 도시로, 사하라 횡단 교역과 이슬람 학문의 서아프리카 중심지가 되었다. 흙으로 지은 모스크와 필사본으로 유명하다.
- 젠네 대모스크전승상 13세기에 세워진 모스크 자리에 1906~1907년 젠네 미장이들이 다시 지은, 세계에서 가장 큰 흙벽돌 건축물.
- 콜럼버스의 첫 항해1492년 에스파냐 왕실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가 원주민들이 살던 카리브해 섬들에 도달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