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앙코르 와트

អង្គរវត្ត

약 1113–1150년 · 앙코르 (크메르 제국)

한 문장으로

앙코르 와트는 약 900년 전 캄보디아 크메르 제국의 왕이 비슈누 신을 모시려고 지은 거대한 돌 사원으로, 나중에는 불교 사원이 되어 지금도 스님들이 기도하는 곳이에요.

앙코르 와트
이미지: Bjørn Christian Tørrissen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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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사람이 손으로 쌓아 만든 돌산을 떠올려 보세요.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처럼 생긴 탑이 다섯 개 있고, 긴 복도 벽에는 그림이 빼곡히 새겨져 있고, 둘레에는 성처럼 넓은 물길(해자)이 빙 둘러 있어요. 이것이 동남아시아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 와트예요.

약 900년 전, 수리야바르만 2세라는 왕이 이 사원을 짓게 했어요. 수천 명의 일꾼이 40킬로미터쯤 떨어진 산에서 커다란 사암 덩어리를 잘라 와서,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았어요. 얼마나 잘 쌓았는지 지금도 대부분 그대로 서 있답니다.

벽은 마치 커다란 돌 만화책 같아요. 바깥 복도를 따라 걸으면 원숭이 군대가 영웅을 도와 공주를 구하는 장면, 신들과 악마들이 거대한 뱀을 밧줄처럼 잡아당겨 바다를 휘젓는 장면, 코끼리를 탄 왕의 행차가 나와요. 춤추는 여신 조각도 천 개가 넘는데, 머리 모양과 장신구가 저마다 달라요.

처음에는 힌두교의 신 비슈누를 위한 사원이었어요. 그 뒤 캄보디아 사람들이 불교를 믿게 되면서 스님들이 이곳에 살며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한 번도 완전히 떠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앙코르 와트는 수백 년 동안 ‘살아 있는’ 예배 장소예요.

오늘날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앙코르 와트는 너무나 소중해서 나라의 국기에도 그려져 있어요. 매일 새벽 많은 사람이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가 탑 뒤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본답니다.

한눈에 보기

건립 시기
12세기 전반, 수리야바르만 2세 재위기(1113~1150년경). 일부 부조는 미완성으로 남음
위치
캄보디아 북서부 시엠레아프 인근 앙코르
건립 주체
크메르 제국(앙코르 시대, 9~15세기경)
처음 모신 신
힌두교의 비슈누. 대략 14~16세기에 걸쳐 점차 상좌부 불교 사원으로 바뀜
재료
쿨렌 산지(약 40km 거리)에서 캐 온 사암, 속채움과 기초는 라테라이트와 흙
규모
폭 약 190m의 해자가 약 1.5 × 1.3km 구역을 둘러쌈. 중앙탑은 지면에서 약 65m
유네스코
세계유산 ‘앙코르’의 일부로 1992년 등재(1992~2004년 위험에 처한 유산)
의의
세계 최대의 종교 건축물이자 고전기 크메르 건축·부조 예술의 절정

쉬움

앙코르 와트는 어떤 곳인가

앙코르 와트는 캄보디아 북서부, 오늘날의 시엠레아프 시내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원 단지다. 수백 년 동안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큰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크메르 제국의 수도권, 앙코르 지역 안에 자리한다. ‘앙코르 와트’라는 이름은 후대에 붙은 것으로 ‘도시(앙코르)의 사원(와트)’이라는 뜻이며, 두 낱말 모두 산스크리트어·팔리어(나가라 ‘도시’, 바타 ‘울타리 친 곳’)에서 왔다.

12세기 전반 수리야바르만 2세가 자신의 국가 사원으로 짓고 힌두교의 신 비슈누에게 바쳤다. 창건 당시의 이름을 알려 주는 정초 비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비슈누의 신성한 세계’라는 뜻의 브라 비슈누로카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왕의 사후 칭호인 파라마비슈누로카(‘비슈누의 지고한 세계로 가신 분’)와도 통한다.

앙코르 와트는 다른 앙코르 사원들과 달리 완전히 버려진 적이 없다. 대략 14세기 무렵부터 상좌부 불교의 사원이자 순례지가 되었고, 지금도 승려들이 머물며 예불을 올린다. 끊임없이 사용된 덕분에 숲에 삼켜진 주변 사원들보다 훨씬 좋은 상태로 살아남았다.

오늘날에는 캄보디아의 국가 상징으로 국기와 지폐, 수많은 상표에 등장하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앙코르’의 중심을 이룬다.

[1][2]

쉬움

배치를 ‘읽는’ 법: 신들의 산

앙코르 와트는 돌로 만든 우주 지도다. 힌두교와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는 신들이 사는 수미산(메루산)이 있고, 그 둘레를 여러 겹의 산맥과 바다가 에워싼다. 사원은 이 그림을 그대로 옮겼다. 해자는 우주의 바다, 담장은 둘레의 산맥, 가운데 다섯 탑은 수미산의 다섯 봉우리를 뜻한다. 크메르 건축에서는 이런 건물을 ‘사원산(temple-mountain)’이라 부르는데, 꼭대기에 성소를 올린 계단식 피라미드를 말한다.

방문객은 보통 서쪽에서 들어온다. 머리가 여럿 달린 뱀 신 나가(물과 문턱을 지키는 수호신) 모양의 난간이 늘어선 긴 돌 둑길을 건너 해자를 지나면, 바깥 담장의 거대한 문루(고푸라, 기념비적인 출입 누각)가 나온다. 그 안으로 약 350m 길이의 둑길이 다시 이어지고, 양옆에 흔히 ‘도서관’이라 불리는 작은 건물 두 채와 후대에 판 연못 두 개가 있다.

본전은 세 겹의 네모난 회랑이 한 단씩 높아지며 솟아 있다. 가장 바깥 회랑(약 187 × 215m)에 유명한 부조가 있고, 십자형 회랑인 프레아 포안이 둘째 단과 이어진다. 둘째 단 벽면은 여신 조각으로 가득하다. 가장 안쪽의 셋째 단 ‘바칸’은 몹시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신들의 세계에 오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으로 풀이되곤 한다. 꼭대기에서는 네 모서리 탑이 중앙탑을 둘러싸는데, 주사위의 5 눈처럼 놓인 이 배치를 ‘퀸컹스(quincunx)’라 한다.

건물을 따라 걷는 일은 곧 안으로, 위로 나아가는 일이다. 해자 바깥의 일상 세계에서 출발해 점점 좁고 제한된 공간을 지나, 한때 비슈누상이 모셔져 있던 어두운 중앙 성소에 이른다. 일반인은 바깥 구역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고, 위쪽 단은 사제와 왕실의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2][7]

쉬움

부조 회랑과 춤추는 여신들

바깥 회랑의 벽에는 수백 미터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긴 부조 가운데 하나가 새겨져 있다. 부조(浮彫, 얕은 돋을새김)란 평평한 바탕에서 형상이 살짝 도드라지게 새긴 조각을 말한다. 부조는 북서쪽 모서리에서 시작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읽는데, 이는 흔치 않은 방식이어서 아래에서 다룰 학술 논쟁의 대상이 된다.

서쪽 회랑에는 『라마야나』의 랑카 전투(라마와 원숭이 군대가 마왕 라바나와 싸우는 장면)와 『마하바라타』의 쿠룩셰트라 전투(판다바 형제와 카우라바 형제의 대전쟁)가 있다. 남쪽 회랑에는 유일한 역사 장면인 수리야바르만 2세의 행차가 새겨져 있는데, 왕은 열다섯 개의 일산(日傘) 아래 앉아 있고, 이어서 죽은 이들이 심판받는 천국과 지옥의 장면이 펼쳐진다.

동쪽 회랑에는 가장 유명한 ‘우유 바다 휘젓기’가 있다. 신들(데바)과 아수라들이 비슈누의 화신인 거북 위에 얹힌 산에 감긴 뱀 바수키의 몸을 양쪽에서 잡아당긴다. 바다를 휘젓자 불사의 감로 암리타와 천상의 무희 압사라 등 온갖 보물이 솟아난다. 북쪽과 동쪽 회랑 일부는 처음 공방이 비워 둔 곳을 16세기에 새로 새겨 넣은 것이다.

위쪽 단 곳곳에는 실물 크기에 가까운 여신 데바타가 홀로 또는 무리 지어 서 있다. 지금까지 1,700구가 넘게 조사되었다. 관(冠), 머리 모양, 장신구, 옷차림이 저마다 달라서, 1920년대에 이를 연구한 프랑스 화가 사포 마르샬은 앙코르 궁정의 실제 복식을 바탕으로 했다고 결론지었다. 오늘날 캄보디아 고전 무용에도 영감을 주고 있다.

[2][10]

중급

어떻게 지었나: 돌, 물, 그리고 노동

12세기에 이르러 크메르 건축가들은 가장 중요한 건물을 벽돌 대신 사암으로 지었다. 앙코르 와트의 겉면은 북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쿨렌 산지(프놈 쿨렌)에서 캐 온 결 고운 사암이다. 보이지 않는 구조부와 기초, 바깥 담장에는 라테라이트를 썼다. 라테라이트는 철분이 많은 붉은 흙으로, 젖었을 때 벽돌 모양으로 잘라 두면 공기에 닿아 단단해진다. 건물 전체는 모래와 흙을 다져 쌓은 거대한 기단 위에 서 있다.

사암 블록의 수는 수백만 개로 추정되며, 1톤이 넘는 것도 많다. 돌은 주로 물길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위성 사진 분석으로 쿨렌 채석장과 앙코르를 잇는 옛 운하가 확인되어, 뗏목으로 상당 구간을 운반했으리라 본다. 여러 블록에 보이는 작은 구멍은 돌을 들어 올리고 맞출 때 쓴 쐐기나 말뚝 자리로 여겨진다.

크메르 건축에는 진정한 아치가 없다. 회랑 지붕은 돌을 한 단씩 조금씩 안쪽으로 내밀어 양쪽이 맞닿게 하는 내쌓기(持送) 볼트로 덮었다. 블록은 대부분 모르타르 없이 매우 촘촘하게 맞추었고, 일부는 쇠 꺾쇠로 연결했다. 조각은 돌을 쌓은 뒤에 새겼기 때문에 부조가 이음매를 가로질러 끊김 없이 흐른다.

몇 명이 일했는지 알려 주는 기록은 없지만, 돌의 양과 공사 기간을 따져 보면 수십 년에 걸쳐 수천에서 수만 명이 동원되었으리라 계산된다. 채석공, 뱃사공, 석공, 그리고 고도로 숙련된 조각가들이 있었다. 다른 사원의 앙코르 비문에는 사원에 노동력과 쌀, 물품을 바치도록 지정된 마을과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므로, 건설과 유지도 공동체가 사원과 국가에 지는 이런 의무 체계를 통해 조직되었을 것이다.

물은 장식이 아니라 설계의 핵심이었다. 폭 약 190m, 둘레 5km가 넘는 해자는 지하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해 모래 기초를 안정시켰고, 앙코르 일대의 몬순 강우를 관리하던 운하와 저수지(바라이) 체계와 사원을 연결했다.

[2][11]

중급

역사적 배경: 크메르 제국과 12세기의 세계

크메르 제국은 전통적으로 802년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훨씬 뒤의 비문에 따르면 이해에 자야바르만 2세가 쿨렌 산에서 ‘전륜성왕(세계의 군주)’으로 즉위 의례를 치렀다. 그 뒤 여러 왕이 앙코르 지역에 도성과 저수지, 사원산을 차례로 세웠다. 전성기의 영향력은 오늘날의 캄보디아, 타이, 라오스, 베트남 남부 상당 부분에 미쳤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왕위를 다투는 혼란기를 거쳐 1113년 무렵 즉위했다. 비문은 그를 다이비엣(베트남 북부)과 참파(베트남 중부)를 공격한 전사 군주로 그리며, 그는 중국 송나라에 사절을 보내기도 했다. 즉위 의례를 집전한 브라만 사제 디바카라판디타가 그의 곁에서 큰 힘을 가졌다. 국가 사원 앙코르 와트는 그의 치세에서 가장 야심 찬 사업이었고, 1150년경 왕이 죽자 공사가 멈추어 일부 부조가 미완성으로 남았다.

같은 시기 세계를 보면, 송나라는 1127년 금나라에 북쪽 수도를 빼앗기고 남쪽에서 나라를 다시 세웠고, 미얀마에서는 바간 왕조가 사원을 짓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김부식이 『삼국사기』(1145)를 편찬했고, 레반트에는 십자군 국가들이 들어섰으며, 프랑스에서는 초기 고딕 건축이 시작되었다. 앙코르 와트는 유라시아 곳곳에서 거대한 종교 건축이 일어나던 시대에 속하지만, 무엇보다 남아시아·동남아시아의 전통 위에 서 있다.

그 전통은 인도 아대륙과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교역과 교류를 통해 캄보디아에 들어왔다. 예전 학계는 이를 ‘인도화’라 부르며 인도 문화가 그대로 옮겨 심어진 것처럼 설명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역사가가 현지 주체성을 강조한다. 크메르의 왕과 사제들은 산스크리트 문헌, 힌두교·불교의 신들, 인도의 건축 관념을 골라 받아들이고 크메르어, 조상 숭배, 고유한 왕권 관념과 결합해 독자적인 문명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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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종교적 의미: 비슈누에서 부처로

그 이전 크메르의 국가 사원은 대개 시바 신을, 흔히 링가(신을 상징하는 기둥 모양의 성물) 형태로 모셨다. 앙코르 와트를 비슈누에게 바친 것은 수리야바르만 2세의 비슈누 신앙을 보여 준다. 지금 서쪽 문루에서 ‘타 리치’라는 이름으로 숭배되는 팔이 여덟 개 달린 커다란 비슈누 석상이 원래 중앙 성소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크메르 왕권은 신과 긴밀히 얽혀 있었다. 왕은 나라의 중심에 사원산을 세우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 사원의 신과 자신을 결부했다. ‘신왕(데바라자)’ 숭배라는 개념은 한때 왕이 신으로 숭배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되었으나, 오늘날 많은 학자는 이 말이 왕국의 수호신을 가리켰으며 왕과 신의 관계가 단순한 신격화보다 복잡했다고 본다.

1177년 참파 군대가 앙코르를 약탈한 뒤, 자야바르만 7세가 나라를 되살리고 대승 불교를 왕실 종교의 중심에 두었다. 그는 새 성곽 도시 앙코르 톰과 그 국가 사원 바욘을 세웠다.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대륙부에서 믿던 상좌부 불교가 크메르 사람 대다수의 종교가 되었다.

앙코르 와트는 버려지지 않고 새 용도에 맞게 바뀌었다. 중앙 성소의 열린 출입구는 막히고 그 자리에 선 부처상이 새겨졌으며, 순례자들은 프레아 포안 회랑에 수천 점의 불상을 봉안했다. 현지 전승은 사원을 불교 이야기 속에서 새롭게 해석했고, 17세기 일본인 방문객들은 이곳을 부처가 머물던 인도의 기원정사로 여기기까지 했다. 오늘날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앙코르 와트는 공덕을 쌓고 순례하는 불교 성지이면서, 힌두교의 도상을 그대로 간직한 기념물이다.

[2][11]

중급

그 뒤의 역사: ‘잃어버린’ 적 없는 사원

원나라 사신 주달관(周達觀)은 1296~1297년 앙코르에 머물며 전성기 후반 도시의 모습을 전하는 유일한 목격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남겼다. 그는 왕의 행차, 시장, 축제, 여러 종교인을 묘사했고, 도성 남쪽의 무덤 같은 거대한 석조 건물을 언급했는데 흔히 앙코르 와트로 본다.

14~15세기 앙코르는 타이의 아유타야 왕국과 전쟁을 치렀다. 타이 연대기는 1431년(정확한 연도는 불확실) 아유타야가 앙코르를 점령했다고 전하며, 그 뒤 크메르 왕실의 중심은 남쪽 프놈펜 일대로 옮겨 갔다. 이 이동이 전쟁 때문인지, 메콩강 지역에 유리해진 해상 교역의 변화 때문인지, 불안정한 몬순기에 앙코르의 물 관리 체계가 흔들렸기 때문인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앙코르 와트 자체는 계속 쓰였다. 16세기에는 한 크메르 왕이 미완성 부조를 마저 새기게 했다. 포르투갈 사람들도 이 사원에 대해 들었는데, 카푸친회 수사 안토니우 다 마달레나는 1586년 무렵 방문해 ‘세상 어떤 건물과도 다른’ 사원이라고 전했다. 17세기에는 일본인 순례자들이 찾아와 기둥에 먹으로 글을 남겼고, 그 가운데 1632년 모리모토 우콘다유 가즈후사의 묵서가 유명하다.

따라서 1860년 프랑스 탐험가 앙리 무오가 밀림 속 잃어버린 사원을 ‘발견’했다는 흔한 이야기는 오해를 부른다. 1864년 사후에 출간된 무오의 여행기가 앙코르를 유럽에 널리 알린 것은 사실이지만, 현지 주민과 승려들은 늘 이곳을 알고 있었고 그 전에도 유럽인 방문객이 있었다. 프랑스는 1863년 캄보디아를 보호국으로 삼았고, 앙코르가 있는 북서부 지방은 1907년 시암에서 프랑스령 캄보디아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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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복원, 전쟁, 그리고 오늘의 보존

1908년 프랑스 극동학원(EFEO)은 ‘앙코르 보존국’을 세워 식물을 걷어 내고 유적을 조사·수리했다. 1930년대부터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개발된 아나스틸로시스 기법을 도입했다. 건물을 돌 하나하나 해체해 기초를 보강한 뒤 원래 부재를 제자리에 다시 쌓고, 꼭 필요한 곳에만 구별 가능한 새 재료를 보태는 방식이다. 앙코르 와트의 대규모 수리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내전과 크메르 루주 정권(1975~1979)으로 보존 작업은 중단되었다. 앙코르 와트가 직접 입은 전쟁 피해는 비교적 적었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도굴꾼들이 여러 앙코르 사원에서 불상의 머리와 조각을 잘라 국제 미술 시장에 팔았다. 1986~1992년 인도 고고조사국이 앙코르 와트를 세척·수리했는데, 당시 쓴 일부 화학 약품이 돌 표면을 해쳤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 이전의 시멘트 사용도 비판 대상이 되었다.

1992년 유네스코는 앙코르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동시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고, 2004년 이 목록에서 해제했다. 1993년부터는 프랑스와 일본이 공동 의장을 맡은 국제조정위원회(ICC-Angkor)가 여러 나라의 작업을 조율하고, 1995년 설립된 캄보디아의 압사라 국가기구가 유적을 관리한다. 예컨대 독일 압사라 보존 프로젝트는 염분과 미생물막, 물 때문에 풍화되는 데바타 부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오늘날의 과제로는 대규모 관광(코로나19 이전 연 200만 명 이상), 시엠레아프 호텔들의 지하수 사용 압박, 유산 공원 안에 사는 주민 문제가 있다. 2022~2023년 당국은 앙코르 구역 안에 살던 수천 가구를 새 정착지로 이주시켰는데, 정부는 보존에 필요한 조치라고 밝혔지만 국제앰네스티 등 인권 단체는 강제 퇴거라고 비판했다. 삶과 신앙이 얽혀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기념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1][2][4]

중급

영향과 유산

미술사에서는 크메르 건축의 고전기를 ‘앙코르 와트 양식’이라 부른다. 연꽃 봉오리 모양의 탑, 축선을 따라 이어지는 회랑, 십자형 테라스, 빽빽하면서도 절제된 장식이 그 특징이다. 사원산을 여러 겹의 회랑이 감싸는 이 구성은 이후 크메르 사원에, 그리고 느슨하게는 이웃 타이·라오 왕국의 종교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식민지 시기에 앙코르 와트는 캄보디아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제국의 상징이 되었다. 프랑스는 1889년부터 1937년까지 파리와 마르세유의 식민지 박람회·만국 박람회에서 석고 모형과 실물 크기 전시관으로 앙코르 와트를 재현하며, 프랑스 통치를 몰락한 문명의 구원자로 내세웠다. 캄보디아 민족주의자들은 반대로 이 사원을 자신들의 역사와 독립의 표상으로 삼았다.

19세기 중엽 이후 캄보디아의 국기에는 정권이 바뀌어도 늘 사원, 대개 앙코르 와트가 그려졌다.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앙코르 와트는 오늘의 정체성을 앙코르 시대와 잇는 고리이고, 불교 공동체에게는 살아 있는 성소다. 동시에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유적 가운데 하나로, 수입과 자부심을 가져다주는 한편 앞서 말한 압력도 안겨 준다.

[2][7]

심화

학술 논쟁과 열린 질문

왜 서쪽을 향하는가? 앙코르 사원은 거의 모두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한다. 앙코르 와트가 서향이고 부조를 시계 반대 방향(프라사비야, 보통의 오른쪽 돌기와 반대)으로 읽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조르주 세데스와 모리스 글레즈 같은 학자들은 이곳이 수리야바르만 2세의 장례 사원이었다고 보았다. 역순은 장례 의례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반면 서향 사원이 몇 곳 더 있고 서쪽이 비슈누와 관련된 방위라는 점을 들어, 방향은 장례 목적보다 봉헌 대상을 나타낸다는 견해도 있다. 두 해석이 꼭 배타적인 것은 아니어서, 비슈누 사원이면서 죽은 왕을 기리는 곳이었을 수도 있다.

천문과 척도. 건축사가 엘리너 매니카는 1990년대에 사원의 치수를 크메르의 길이 단위(핫)로 재면 역법과 우주론의 주기가 담겨 있고, 시선축이 동지·하지와 춘·추분의 일출 지점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춘분과 추분에 서쪽 입구에서 보면 해가 중앙탑 위로 떠오르도록 주축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더 세밀한 수치 해석은 관심과 함께 회의도 불렀는데, 측정값이 많으면 우연히 들어맞는 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앙코르를 별자리나 ‘잃어버린 문명’과 잇는 대중적 주장은 전문가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원인가, 마을인가? 예전 연구는 해자 안쪽을 텅 빈 신성 구역으로 상상했다. 2012년 이후 항공 라이다(식생 아래 지표면을 레이저로 측량하는 기술)와 발굴 조사에서 로랜드 플레처, 데이미언 에번스, 미리엄 스타크 등의 연구진은 담장 안에서 흙둔덕과 연못, 도로가 격자로 배치된 흔적을 찾아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사원 종사자와 가족이 지금은 사라진 나무·초가집에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라이다는 공사 도중 세웠다가 허문 초기 구조물의 흔적도 드러냈다.

‘수리 도시’와 앙코르의 쇠퇴. 20세기 중반 베르나르필리프 그롤리에는 앙코르를 거대한 저수지로 논에 물을 대어 왕권을 떠받친 ‘수리 도시’로 설명했다. 비판자들은 바라이가 넓은 땅을 관개하기에는 작거나 연결이 부족했고 주로 종교적 기능을 했다고 반박했다. 최근 연구는 물 관리망이 실재했고 광범위했지만 주로 홍수 조절과 배분을 위한 것이었다고 보며, 나이테 연구로 확인된 14~15세기의 수십 년에 걸친 가뭄과 폭우가 그 붕괴와 관련 있다고 본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는 수도 이전을 한 번의 파국이 아니라 여러 원인이 얽힌 결과로 설명한다.

[2][4][10][11]

심화

증거와 방법: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비문. 앙코르 역사는 주로 천 점이 넘는 석비 비문으로 재구성된다. 산스크리트어 비문은 대개 왕과 신을 찬양하는 운문이고, 고대 크메르어 비문은 대개 기부, 토지, 인력을 기록한 산문이다. 조르주 세데스가 여러 권의 『캄보디아 비문집(Inscriptions du Cambodge)』으로 이들을 해독·출간하면서 지금도 쓰이는 왕들의 연대가 세워졌다. 그러나 앙코르 와트에는 정초 비문이 없다. 건립 연대는 간접 증거에 기댄다. 남쪽 회랑 부조의 짧은 명문이 수리야바르만 2세를 사후 칭호로 부른다는 점(즉 명문이 왕의 사후에 쓰였다는 점), 다른 곳에 남은 그의 치세 관련 비문, 그리고 건축과 조각 양식이 그것이다.

외부 문헌. 주달관의 『진랍풍토기』(1296~1297)는 앙코르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매우 귀중하지만 중국 독자를 위해 쓴 외국 사신의 글이라는 점을 감안해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16~17세기의 포르투갈·에스파냐·일본 자료와 사원에 남은 후대 크메르어 명문은 사원이 계속 쓰였음을 보여 준다.

고고학과 과학. 발굴, 숯과 목재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저수지 퇴적물 분석, 과거 기후를 알려 주는 나이테 기록, 원격 탐사(위성 영상, 지표 투과 레이더, 라이다)가 1990년대 이후 이 분야를 바꾸어 놓았다. 관심의 초점도 사원과 왕에서 도시 경관 전체, 농업, 물 관리로 옮겨 갔다.

방법상의 주의점. 오늘 방문객이 보는 모습의 상당 부분은 20세기 복원의 결과이므로, 건축 세부를 원형으로 다루기 전에 옛 사진과 발굴 보고서로 확인해야 한다. 부조 해석도 학자가 어떤 문헌을 가져오느냐에 좌우된다. 크메르판 라마야나인 『림케』는 인도판과 다르므로, 장면을 산스크리트 전통뿐 아니라 크메르 전통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끝으로 앙코르를 유럽인이 재발견한 ‘잃어버린 문명’으로 보는 식민지적 틀은 아직도 대중 서술에 남아 있으며, 최근 학계는 이를 의식적으로 연속성의 역사로 바꾸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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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사원산
크메르 국가 사원의 표준 형식. 꼭대기에 성소를 올린 계단식 피라미드로, 우주의 중심 수미산을 나타낸다.
수미산(메루산)
힌두교·불교 우주관에서 세계 한가운데 있는 신들의 산. 둘레를 바다와 산맥이 감싼다. 앙코르 와트의 해자, 담장, 다섯 탑이 이를 재현한다.
왕실 후원과 신성 왕권
크메르 왕들은 사원을 지어 통치를 신성한 질서에 뿌리내리게 했다. 왕은 생전과 사후에 사원의 신과 결부되었으나, 그 의미를 얼마나 문자 그대로 볼지는 논쟁 중이다.
예배의 연속성
앙코르 와트는 버려지지 않은 채 힌두교 비슈누 사원에서 상좌부 불교 성소로 바뀌었고, 그 덕분에 다른 사원보다 잘 보존되었다.
물과 도시
해자, 운하, 저수지는 앙코르 도시의 핵심으로 홍수 조절, 물 저장, 상징의 역할을 했다. 그 관리와 붕괴는 앙코르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다.
현지 주체성
크메르 사람들은 인도의 종교·예술 관념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골라서 고쳐 독자적인 문명을 만들었다.
유산과 사람
앙코르 보존에는 국제 전문가, 캄보디아 정부, 승려, 주민, 관광객이 얽혀 있고 그 이해관계가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기록

  1. 802년 — 자야바르만 2세가 쿨렌 산에서 세계의 군주로 즉위 의례를 치름. 크메르 제국의 전통적 기점.
  2. 약 1113년 — 수리야바르만 2세 즉위. 치세 초에 앙코르 와트 공사 시작.
  3. 약 1150년 — 수리야바르만 2세 사망. 공사가 멈추고 일부 부조가 미완성으로 남음.
  4. 1177년 — 참파 군대가 앙코르를 약탈.
  5. 1181년 — 자야바르만 7세 즉위. 대승 불교를 왕실 종교의 중심에 두고 앙코르 톰과 바욘을 건립.
  6. 1296년 — 원나라 사신 주달관이 앙코르에 도착(1297년까지 체류). 뒤에 『진랍풍토기』를 씀.
  7. 약 1431년 — 타이 연대기에 따르면 아유타야가 앙코르를 점령. 이후 크메르 왕실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
  8. 약 1586년 — 포르투갈 수사 안토니우 다 마달레나가 앙코르 와트 방문. 기록상 최초의 유럽인 방문객 가운데 하나.
  9. 1632년 — 일본인 모리모토 우콘다유 가즈후사가 사원에 묵서를 남김.
  10. 1860년 — 앙리 무오가 앙코르 방문. 1864년 출간된 여행기로 유럽에 널리 알려짐.
  11. 1908년 — 프랑스 극동학원이 앙코르 보존국을 설립.
  12. 1992년 — 앙코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2004년까지 위험에 처한 유산 목록에도 오름).

용어 풀이

크메르
캄보디아의 다수 민족과 그 언어. 앙코르 시대의 제국을 가리킬 때도 쓴다.
부조(浮彫)
평평한 바탕에서 형상이 살짝 도드라지게 새긴 조각. 얕은 돋을새김.
고푸라
사원 담장에 세운 기념비적인 출입 누각, 문루.
데바타·압사라
사원 벽에 새긴 여신(데바타)과 천상의 무희(압사라). 같은 조각을 두 이름으로 섞어 부르기도 한다.
나가
물과 보호를 상징하는 뱀 신. 흔히 머리가 여럿이며 둑길 난간으로 쓰였다.
퀸컹스
네모의 네 귀퉁이와 한가운데에 다섯 점을 놓는 배치. 앙코르 와트의 다섯 탑이 이렇게 놓였다.
라테라이트
철분이 많은 붉은 흙. 잘라 두면 공기 중에서 단단해져 기초와 속채움에 쓰였다.
내쌓기 볼트
돌을 한 단씩 안쪽으로 조금씩 내밀어 양쪽이 맞닿게 만든 지붕. 진정한 아치가 아니다.
바라이
크메르 왕들이 앙코르에 만든 커다란 직사각형 저수지.
아나스틸로시스
건물을 해체한 뒤 원래 부재로 다시 쌓고, 꼭 필요한 곳에만 새 재료를 보태는 복원 기법.
라이다
항공기에서 레이저를 쏘아 식생 아래 지표면을 측량하는 기술. 사라진 도로, 연못, 집터를 찾아낸다.
상좌부 불교
스리랑카, 캄보디아, 타이, 라오스, 미얀마에서 주로 믿는 불교의 한 갈래.

묻고 답하기

앙코르 와트는 몇 년 됐나요?

약 900년 됐어요. 12세기 전반, 수리야바르만 2세가 다스리던 1113~1150년 무렵에 지어졌어요.

앙코르 와트는 누가 지었나요?

크메르 제국의 일꾼과 장인들이 수리야바르만 2세의 명으로 지었습니다. 외부인이나 ‘사라진 민족’이 지은 것이 아니며, 크메르인은 오늘날 캄보디아 사람들의 조상입니다.

힌두교 사원인가요, 불교 사원인가요?

둘 다입니다. 비슈누를 모시는 힌두교 사원으로 지어졌고, 대략 14세기부터 점차 상좌부 불교 사원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불교 예배 장소입니다.

짓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왕의 치세 동안 약 30~40년이 걸린 것으로 봅니다. 왕이 죽자 공사가 멈추어 일부 조각은 16세기에야 완성되었습니다.

앙코르 와트는 정말 밀림 속에서 잊혀 있었나요?

아닙니다. 불교 사원이자 순례지로 계속 쓰였습니다. 19세기 앙리 무오 같은 유럽인이 유럽에 널리 알렸을 뿐, 캄보디아 사람들은 늘 알고 있었습니다.

왜 서쪽을 향하고 있나요?

확실한 답은 없습니다. 서쪽이 죽음과 관련되고 부조가 역순으로 배치된 점에서 왕의 장례 사원이었다고 보는 학자가 많고, 서쪽이 비슈누의 방위이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왜 캄보디아 국기에 앙코르 와트가 있나요?

앙코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기념물이자 19세기부터 캄보디아의 국가 상징으로, 역사의 연속성과 민족 정체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연구의 기본 자료는 무엇인가요?

크메르어·산스크리트어 비문(주로 조르주 세데스가 정리), 13세기 주달관의 『진랍풍토기』, 미술사적 분석, 발굴, 그리고 라이다 같은 원격 탐사 자료입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Angkor.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2. Angkor Wat. Wikipedia
  3. 앙코르 와트. 위키백과
  4. Angkor. Wikipedia
  5. Khmer Empire. Wikipedia
  6. Suryavarman II. Wikipedia
  7. Angkor Wat. Encyclopaedia Britannica
  8. Henri Mouhot. Wikipedia
  9. Zhou Daguan. Wikipedia
  10. Michael D. Coe, Angkor and the Khmer Civilization. Thames & Hudson, 2003
  11. Charles Higham, The Civilization of Angkor. Weidenfeld & Nicolson, 2001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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