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보로부두르는 인도네시아 자와섬에 있어요. 약 1,200년 전, 화산에서 나온 돌 약 200만 개를 쌓아 만들었어요. 안에는 방이 하나도 없어요. 대신 계단과 단이 층층이 올라가는 커다란 돌산 같은 모습이에요.
보로부두르에 가면 한 층을 한 바퀴 다 돈 다음에 다음 층으로 올라가요. 아래층 벽에는 돌에 새긴 그림이 2,600개가 넘어요. 왕자로 태어난 부처님이 처음 가르침을 펴기까지의 이야기도 있고, 부처님이 전생에 동물이나 사람으로 태어나 착하고 용감한 일을 한 이야기도 있어요. 수다나라는 젊은이가 지혜를 찾아 여러 스승을 만나러 떠나는 이야기도 있지요.
위로 올라갈수록 그림은 사라져요. 꼭대기는 둥글고 탁 트여 있고, 종처럼 생긴 돌탑 72개가 늘어서 있어요. 탑마다 창살처럼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안에 돌부처님이 앉아 계세요.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탑이 하나 있어요. 꼭대기까지 오르는 길은 바쁜 일상의 세계에서 고요와 지혜로 나아가는 여행을 뜻해요.
수백 년 동안 보로부두르는 화산재와 밀림에 덮여 있었고, 근처 사람들도 더는 찾지 않았어요. 1814년에 흙과 나무를 걷어 내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어요. 나중에는 기술자들이 돌을 하나하나 뜯어내 깨끗이 씻고 다시 맞춰 쌓았어요. 거대한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요.
지금 보로부두르는 세계유산이고, 인도네시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가운데 하나예요. 해마다 베삭(부처님오신날) 축제가 되면 불교 신자들이 가까운 작은 사원 두 곳에서 보로부두르까지 행렬을 지어 걸으며 부처님의 탄생과 깨달음, 열반을 기려요.
한눈에 보기
- 건립
- 약 780~830년대, 여러 단계에 걸쳐 건립. 830년대 무렵 공사가 끝난 것으로 추정
- 위치
- 인도네시아 중부 자와 마겔랑 부근 크두 평원. 족자카르타에서 북서쪽으로 약 40km
- 건립 주체
- 대승불교를 후원한 마타람(메당) 왕국의 샤일렌드라 왕조
- 형태
- 계단식 탑-산. 사각 기단 6층 위에 원형 단 3층과 중앙 대탑. 내부 공간 없음
- 규모
- 기단 약 123×123m, 현재 높이 약 35m, 안산암 약 55,000㎥
- 장식
- 부조 2,672판(설화 1,460, 장식 1,212), 본래 불상 504구, 투각 소탑 72기
- 재발견과 복원
- 1814년부터 발굴·정리. 테오도르 반 에르프의 복원(1907~1911), 인도네시아·유네스코 복원(1975~1982)
- 지정
- 유네스코 세계유산 ‘보로부두르 사원 단지’(믄둣·파원 포함), 1991년 등재
쉬움
보로부두르는 어떤 곳인가
보로부두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 유적이다. 화산에 둘러싸이고 프로고강과 엘로강 사이에 자리한 중부 자와의 기름진 크두 평원, 그 가운데 낮은 언덕 위에 서 있다.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 샤일렌드라 왕조 시기에 세워졌다.
흔히 사원이라 부르지만 보로부두르에는 사람이 모이는 전당이나 방이 없다. 자연 언덕 위에 돌을 쌓아 올린 속이 찬 구조물이다. 전체 모양이 부처와 그 깨달음을 상징하는 불교 기념물인 스투파(탑)이면서, 방문자가 걸어 오르는 성스러운 산으로 설계되었다.
보로부두르는 회랑의 벽과 난간을 뒤덮은 부조로 유명하다. 불교 부조 가운데 세계에서 손꼽히게 크고 온전한 모음이며, 동시에 9세기 자와 사람들의 삶, 곧 집과 배, 옷차림, 악기, 식물과 동물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쉬움
보로부두르 ‘읽는’ 법: 위로 오르는 길
보로부두르는 걸으면서 경험하도록 만들어졌다. 순례자는 동쪽으로 들어가 유적을 오른쪽에 두고 시계 방향으로 각 층을 돈다. 이렇게 경의를 표하며 도는 것을 프라닥시나(우요, 右繞)라 한다. 한 층을 다 돌아야 계단을 올라 다음 층으로 간다. 네 개의 사각 회랑 벽과 난간에 설화 부조가 11개 연작으로, 모두 약 3km 길이에 걸쳐 배치되어 있다.
위로 오르는 여정은 흔히 불교 우주론의 ‘삼계(三界)’로 설명된다. 맨 아래는 업보를 새긴 숨은 기단으로 표현된 욕계(카마다투), 그 위는 이야기로 가득한 사각 회랑인 색계(루파다투), 꼭대기의 하늘로 트인 원형 단은 설화 부조가 없는 무색계(아루파다투)다. 널리 알려지고 이해를 돕는 설명이지만, 건립자들이 정확히 이런 틀로 생각했는지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불상도 올라갈수록 달라진다. 사각 단의 감실에 앉은 불상은 방향에 따라 수인이 다르다. 동쪽은 항마촉지인, 남쪽은 여원인, 서쪽은 선정인, 북쪽은 시무외인이고, 가장 높은 사각 단에서는 설법을 뜻하는 수인을 짓는다. 세 겹 원형 단에는 소탑 72기(각 32, 24, 16기)가 있고, 그 안의 불상은 전법륜인을 짓고 있다. 거대한 중앙 대탑이 유적의 정상을 이룬다.
쉬움
돌에 새긴 이야기
부조는 여러 불교 경전을 이야기한다. 첫째 회랑 주벽의 윗줄 120판은 부처의 마지막 생을 다룬 『방광대장엄경(랄리타비스타라)』을 따른다. 하늘에서 내려와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나고, 궁궐에서 살다가 출가해 구도하고, 깨달음을 얻어 사르나트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첫째와 둘째 회랑의 다른 판들은 부처의 전생 이야기인 자타카와, 다른 성인들의 이야기인 아바다나를 보여 준다. 널리 사랑받는 자타카 가운데 하나에서는 토끼로 태어난 미래의 부처가 굶주린 나그네에게 자기 몸을 음식으로 내놓는다. 이런 이야기는 보시와 인내, 자비를 가르친다.
위쪽 회랑은 『화엄경』의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간다뷰하)」이 주를 이룬다. 젊은 구도자 선재동자(수다나)가 승려와 왕부터 밤의 여신에 이르는 수십 명의 스승을 찾아가 완전한 지혜를 구하고, 마침내 보현보살의 경지에 들어가는 이야기다. 회랑을 걷는 순례자는 선재동자의 여정을 몸으로 되밟는다.
중급
어떻게 지었나
보로부두르는 자연 언덕을 다듬고 흙으로 채운 뒤 그 위에 지었다. 건축가들은 이 심부를 둘러싸고 덮으며 인근 강에서 가져온 회색 화산암인 안산암 약 55,000㎥를 쌓았다. 돌은 회반죽 없이 돌기와 홈, 장부 이음으로 맞물리게 한 뒤 제자리에서 조각했다. 배수로와 괴수 머리 모양의 물받이 약 100개가 열대의 폭우를 흘려보냈다.
고고학자들, 특히 자크 뒤마르세(Jacques Dumarçay)는 여러 건축 단계를 구분했다. 공사는 780년 무렵 시작되어 계획이 여러 번 바뀐 듯하다. 예컨대 기단을 넓히면서 맨 아래 부조를 덮었고, 정상부도 처음에는 다르게 계획되었을 수 있다. 공사는 830년대 무렵 끝났을 것으로 본다.
설계는 정교한 비례를 따른 듯하다. 연구자들은 유적의 발·몸·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4:6:9의 비율을 찾아냈는데, 이 비율은 관련 사원인 믄둣과 파원에서도 나타난다. 전승은 건축가를 구나다르마라 부르지만, 이 이름은 비문이 아닌 지역 전설에서 왔고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중급
9세기 자와를 들여다보는 창
부조는 인도 불교 경전을 그리고 있지만, 조각가들은 그 안을 자신들이 아는 세계로 채웠다. 가파른 안장 모양 지붕을 얹은 고상식 집이 서 있고, 배경에는 시장과 부엌, 농장이 보이며, 사람들은 자와식 옷과 장신구를 걸쳤다. 북과 현악기, 피리, 방울을 연주하는 악사, 춤꾼, 사냥꾼, 병사, 물건을 저울에 다는 상인, 아이를 돌보는 부모도 등장한다.
자연도 풍성하게 묘사된다. 코끼리, 원숭이, 공작, 물고기, 거북, 그리고 새와 천인에 둘러싸인 소원을 이루어 주는 나무(칼파타루)를 비롯한 온갖 나무가 있다. 배 부조에는 아우트리거와 여러 개의 돛, 방향타 노를 갖춘 큰 배가 새겨져 있어, 자와를 인도양 세계와 이은 항해 기술을 보여 준다.
숨은 카르마비방가 부조는 특히 귀중하다. 고기잡이와 도살, 험담과 다툼, 보시와 병자 돌보기 같은 선하고 악한 일상의 행위와 그에 따르는 보상과 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남아시아 역사가들에게 보로부두르는 종교 유적일 뿐 아니라 초기 자와 사회와 기술, 물질문화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시각 기록 가운데 하나다.
중급
샤일렌드라 왕조와 9세기의 자와
보로부두르를 세운 것은 8세기 중엽부터 중부 자와 대부분을 다스린 샤일렌드라(‘산의 주인’) 왕조다. 대승불교를 후원한 샤일렌드라는 여러 유적을 세웠는데, 778년의 칼라산 비문은 이 왕조를 분명히 보여 주는 가장 이른 증거다. 기원을 두고는 논란이 있다. 예전에는 인도나 캄보디아의 부남과 연결하는 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와 토착 세력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샤일렌드라는 중부 자와에서 흔히 산자야 왕조라 불리는 힌두교 계열 세력과 권력을 나누었다. 보로부두르가 완성될 무렵 샤일렌드라의 왕은 사마라퉁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딸 프라모다와르다니는 힌두 계열의 라카이 피카탄과 혼인했고,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힌두 사원군 프람바난이 곧이어 세워졌다. 두 종교는 공존했으며, 보로부두르 자체도 이 혼합된 궁정 아래에서 완성되었을 수 있다.
이 시기는 바닷길이 넓게 이어진 시대였다. 자와는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여러 곳과 교역했고, 샤일렌드라는 불교 학문의 중심지였던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와 긴밀했다. 커다란 아우트리거 배를 새긴 부조는 이 해양 세계를 반영한다. 2003~2004년에는 이 배를 재현한 ‘사무드라 락사’호가 인도네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항해했다.
중급
종교적 의미: 산, 탑, 만다라
보로부두르는 여러 불교 관념을 하나로 엮는다. 탑으로서 부처의 몸과 깨달은 마음을 상징한다. 계단식 산으로서는 인도 우주론에서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메루산)을, 또 조상을 기리던 언덕 위 계단식 성소라는 더 오래된 자와의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위에서 보면 사각형과 원으로 이루어진 평면이 밀교(금강승)에서 명상과 의례에 쓰는 성스러운 도형 만다라를 이룬다. 중심을 둘러싸고 네 방향을 향한 불상의 배치도 이런 구도에 들어맞는다. 유적이 특정한 밀교 경전을 어디까지 따랐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보로부두르는 의례 경관의 일부였다.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작은 사원 파원, 믄둣과 일직선 위에 놓여 있다. 믄둣에는 지금도 좌불과 그 양옆의 두 보살, 세 구의 커다란 석상이 남아 있다. 오늘날 베삭 때 인도네시아와 외국의 불교도가 믄둣에서 파원을 거쳐 보로부두르까지 행렬하며 이 연결을 되살린다.
중급
버려짐과 재발견
10세기 초, 자와의 권력 중심은 중부에서 동부 자와로 옮겨 갔다. 929년 무렵 음푸 신독 왕 때의 일로, 므라피산의 화산 폭발도 한 원인이었을 수 있다. 보로부두르는 점차 왕실의 후원을 잃었다.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었다. 14세기 고대 자와어 서사시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부두르’의 불교 성소가 언급되고, 뒷날 자와 연대기에는 이 언덕과 관련된 불길한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유적은 화산재와 초목에 덮였고, 15세기부터 자와에 퍼진 이슬람이 다수의 종교가 되었다.
1814년, 영국이 자와를 잠시 점령했을 때 부총독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가 이 지역에 거대한 유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네덜란드인 기술자 H. C. 코르넬리우스를 보내 조사하게 했다. 약 200명의 일꾼이 두 달 동안 나무를 베고 초목을 태우고 흙을 걷어 냈다. 작업은 네덜란드 치하에서 이어져 1835년 무렵 유적이 대부분 드러났다.
드러나자 새로운 위험이 닥쳤다. 방문객들이 불두와 부조 조각을 떼어 갔고, 1896년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자와를 방문한 시암(태국)의 쭐랄롱꼰 왕에게 부조판, 불상, 사자상, 수호신상 등 많은 조각을 선물했다. 이것들은 지금 방콕 국립박물관에 있다. 드러난 구조물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면서 유적은 내려앉기 시작했다.
중급
복원과 위협
1885년 기술자 J. W. 에이제르만(IJzerman)은 기단 속에 업보에 관한 경전 『업보차별경(카르마비방가)』을 새긴 160판의 옛 기단이 숨어 있음을 발견했다. 선행과 악행, 그리고 그것이 이승과 저승에서 낳는 결과를 그린 부조다. 1890~1891년 사진으로 기록한 뒤 다시 덮었고, 지금은 동남쪽 모서리의 몇 판만 드러나 있다.
1907~1911년 네덜란드 육군 기술자 테오도르 반 에르프가 첫 대규모 복원을 했다. 그는 원형 단과 소탑을 다시 쌓았고, 중앙 대탑 꼭대기의 산개(차트라)를 재현했다가 원래 형태를 입증할 수 없어 다시 내렸다. 그러나 배수 문제는 계속되었고, 1960년대에 이르자 회랑이 기울고 돌이 부식되었다.
1975~1982년 인도네시아 정부와 유네스코는 여러 나라의 지원을 받아 고고학자 R. 수크모노의 지휘로 대규모 복원을 벌였다. 돌 약 100만 개를 떼어 내 씻고 목록을 만든 뒤, 현대식 배수 시설을 갖춘 새 콘크리트 기초 위에 다시 쌓았다. 1991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 뒤로도 위협은 이어졌다. 1985년 폭탄 테러로 소탑 9기가 부서졌고, 2010년 므라피산과 2014년 클루드산의 분화로 화산재가 유적을 덮었으며, 늘어난 관광객으로 계단이 닳아 계단에 나무 덮개를 씌우고 정상에 오르는 인원을 제한하게 되었다.
중급
오늘의 보로부두르: 순례, 국가, 관광
오늘날 인도네시아는 무슬림이 다수인 나라지만, 보로부두르는 나라의 긴 역사와 예술적 성취를 상징하는 유산으로 온 국민에게 존중받는다. 동시에 인도네시아의 소수 불교 신자와 외국 불교도가 찾아와 명상하고 탑돌이를 하며 베삭을 기념하는 살아 있는 종교 성지이기도 하다. 신자와 관광객, 보존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끊임없는 과제다.
관광은 197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었다. 수백만 명의 방문객은 지역에 수입을 가져다주었지만, 돌의 마모와 쓰레기, 혼잡도 불러왔다. 계단이 심하게 닳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 당국은 일부 계단을 나무로 덮었고, 최근에는 하루에 유적 위로 오를 수 있는 인원을 제한하고 안내인 동행과 전용 신발 착용을 의무화했다.
둘레의 경관도 유산의 일부다. 마을과 논, 므라피·므르바부·숨빙·신도로 화산의 풍경이 유적을 감싸고 있으며, 계획가들은 구역 지정과 공원 조성으로 이 환경을 지키려 해 왔다. 관광에 기대어 사는 주민들이 유적에 관한 결정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일도 있었는데, 이는 많은 세계유산이 공통으로 겪는 논쟁이다.
심화
학술 쟁점: 이름, 연대, 설계
이름. ‘보로부두르’라는 말은 이른 시기 비문에 나오지 않는다. 래플스는 ‘위대한 부처’라는 뜻으로 보았고, ‘부두르’를 ‘옛’을 뜻하는 자와어나 ‘산’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부다라(bhudhara)와 연결하는 견해도 있다. 금석학자 J. G. 드 카스파리스는 824년(카랑턍아)과 842년(트리 트푸산) 비문을 근거로 본래 이름이 ‘보살 십지(十地)의 공덕을 쌓은 산’이라는 뜻의 부미삼바라부다라(Bhumisambhara-bhudhara)였다고 제안했다. 영향력 있는 해석이지만 모두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숨은 기단. 카르마비방가 기단은 왜 덮였을까. 실용적인 설명은 유적이 바깥으로 미끄러질까 두려워 기단 둘레에 돌로 버팀벽을 덧댔다는 것이다. 종교적 설명으로는 욕망과 지옥의 묘사를 감추려 했다거나, 덮는 행위 자체가 봉헌 의례의 일부였다는 견해가 있다. 구조적 설명이 널리 지지받지만 문제는 아직 열려 있다.
처음의 계획. 이 건물이 처음에는 다른 것, 예컨대 힌두교나 토착 신앙의 계단식 구조물로 시작되었다가 불교 탑으로 바뀌었는지, 정상부의 원래 모습은 어땠는지를 두고 학자들의 견해가 엇갈린다. 20세기 초 W. F. 스투터하임이 제안한 삼계(욕계·색계·무색계) 해석도 유적에서 발견된 어떤 문헌에도 근거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심화
증거, 가설, 보존 과학
1931년 네덜란드의 화가이자 연구자 W. O. J. 니우언캄프는 크두 평원이 한때 호수였고 보로부두르가 그 위에 뜬 연꽃을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뒤이은 꽃가루 분석에서는 호수가 남겼을 수생 식물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고, 1980년대 현장 조사도 건립 당시 유적을 둘러싼 호수는 없었다고 결론 내려, 이 가설은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보로부두르 역사의 주된 자료는 유적 자체(구조, 석재의 표시, 부조 양식, 그리고 글자 모양으로 연대를 가늠하게 해 주는 숨은 기단의 짧은 명문), 중부 자와의 몇몇 석비와 동판 비문, 다른 사원과의 비교, 19~20세기 발굴·복원 기록이다. 1870년대 이시도르 반 킨스베르헌의 사진과 숨은 기단을 촬영한 카시안 체파스의 사진은 유적의 예전 모습을 보여 주는 귀중한 증거다.
보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 분야가 되었다. 과학자들은 돌의 염류 결정화, 지의류와 이끼를 관찰하고, 화산재와 산성비가 안산암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관람객 수의 영향을 측정한다. 다른 위대한 유적처럼 1907~1911년과 1975~1982년의 복원 결정도 이제 증거의 일부가 되었고, 학자들은 원래의 작업과 재건한 부분을 가려내야 한다.
핵심 개념
- 탑-산
- 보로부두르는 부처를 상징하는 탑이자 순례자가 오르는 성스러운 산이다.
- 오름이 곧 가르침
- 회랑을 따라 오르는 길은 업보와 전생 이야기에서 고요하고 트인 정상으로, 곧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 만다라
- 위에서 보면 중앙 대탑을 중심으로 사각형과 원이 이루는 성스러운 도형이 된다.
- 설화 부조
- 1,400판이 넘는 설화 부조가 불교 경전을 가르치고 9세기 자와의 일상을 담고 있다.
- 종교의 공존
- 불교의 보로부두르와 힌두교의 프람바난은 서로 연결된 궁정이 수십 년 사이에 세웠다.
- 의례 경관
- 보로부두르, 파원, 믄둣은 한 줄로 놓여 있으며 함께 의례에 쓰였을 것이다.
- 역사가 된 복원
- 식민지 시기의 발굴, 반 에르프의 복원, 유네스코 사업이 지금 우리가 보는 유적의 모습을 만들었다.
기록
- 778년 — 칼라산 비문이 샤일렌드라 왕조의 존재를 분명히 보여 주는 가장 이른 증거가 된다.
- 약 780년 — 보로부두르 건립이 시작된다.
- 824년 — 카랑턍아 비문이 사마라퉁가 왕실 아래 세운 불교 성소를 기록한다.
- 약 833년 — 공사가 끝난 것으로 추정된다.
- 842년 — 트리 트푸산 비문이 부미삼바라라는 성소에 면세 토지를 준다.
- 약 929년 — 음푸 신독 때 자와 왕실이 동부 자와로 옮겨 간다.
- 1365년 — 『나가라크르타가마』가 ‘부두르’의 불교 성소를 언급한다.
- 1814년 — 래플스가 H. C. 코르넬리우스를 보내 유적을 정리하게 한다.
- 1885년 — J. W. 에이제르만이 카르마비방가 부조가 새겨진 숨은 기단을 발견한다.
- 1907년 — 테오도르 반 에르프가 첫 대규모 복원을 시작한다(~1911).
- 1975년 — 인도네시아·유네스코 복원이 시작된다(~1982).
- 1991년 — 보로부두르 사원 단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용어 풀이
- 스투파(탑)
- 본래 사리를 모신 반구형 불교 기념물. 부처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 찬디(Candi)
- 인도네시아어로 옛 사원이나 성소를 가리키는 말.
- 부조(浮彫)
- 평평한 바탕에서 형상이 도드라지게 새긴 조각.
- 수인(手印)
- 불교·힌두교 미술에서 뜻을 담은 손 모양.
- 만다라
- 우주를 나타내는 성스러운 도형. 의례와 명상에 쓴다.
- 우요(右繞)
- 성스러운 대상을 오른쪽에 두고 시계 방향으로 돌며 예배하는 행위. 산스크리트어로 프라닥시나.
- 자타카(본생담)
- 부처의 전생 이야기. 도덕적 덕목을 가르친다.
- 대승불교
- 보살과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의 큰 갈래.
- 안산암
- 보로부두르와 여러 자와 사원을 지은 회색 화산암.
- 아나스틸로시스
- 원래 부재로 유적을 다시 조립하고, 꼭 필요한 곳에만 새 재료를 쓰는 복원 방식.
- 샤일렌드라
- 보로부두르를 세운 중부 자와의 불교 왕조.
묻고 답하기
보로부두르는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원인가요?
아니에요. 방이 없어요. 언덕 위에 돌을 쌓아 만든 속이 꽉 찬 유적이라, 트인 회랑과 단을 따라 돌면서 올라가요.
불상은 몇 개나 있나요?
처음에는 504구가 있었어요. 재발견된 뒤로 머리를 잃거나 부서지거나 반출된 불상이 많아요.
보로부두르는 왜 버려졌나요?
10세기 초 왕실이 동부 자와로 옮겨 가면서 유적이 점차 후원을 잃었습니다. 화산 폭발도 한 원인이었을 수 있습니다. 뒤에 자와 사람 대부분이 이슬람을 믿게 되었습니다.
보로부두르는 누가 발견했나요?
그 지역 사람들은 늘 그 언덕을 알고 있었어요. 1814년 래플스가 기술자 코르넬리우스를 보내 흙과 나무를 걷어 내면서 세계에 널리 알려졌어요.
지금도 예배하는 곳인가요?
네. 중요한 순례지입니다. 특히 베삭 때 불교 신자들이 믄둣과 파원에서 보로부두르까지 행렬을 지어 걷습니다.
업보 부조가 새겨진 기단은 왜 숨겨져 있나요?
유적을 튼튼히 하고 미끄러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종교적 이유를 드는 학자도 있습니다. 숨은 부조의 사진은 카르마위방가 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보로부두르는 호수 한가운데에 지어졌나요?
1931년에 그런 주장이 나왔지만, 뒤이은 연구에서 건립 당시 유적을 둘러싼 호수가 있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 머리 없는 불상이 그렇게 많나요?
19세기에 유적이 드러난 뒤 많은 불두가 떨어져 나가거나 도난당해 수집가에게 팔리거나 기념품으로 반출되었습니다. 일부는 지금 인도네시아 밖의 박물관에 있고, 행방을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Borobudur Temple Compounds.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Borobudur. Wikipedia
- 보로부두르. 위키백과
- Borobudur Temple Compounds. Wikipedia
- Shailendra dynasty. Wikipedia
- Karmawibhangga Museum. Wikipedia
- Mendut. Wikipedia
- Gandavyuha Sutra. Wikipedia
- Jataka tales. Wikipedia
- John Miksic, Borobudur: Golden Tales of the Buddhas. Periplus Editions, 199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