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아소카

अशोक (Aśoka). 비문에서는 데바남피야 피야다시

약 기원전 268–232년 · 파탈리푸트라 (마가다)

한 문장으로

아소카는 끔찍한 전쟁을 치른 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살고 정직하며 모든 종교를 존중하라는 말을 제국 곳곳의 바위와 돌기둥에 새긴 고대 인도의 황제예요.

아소카
이미지: Photo Dharma from Sadao, Thailand · CC BY 2.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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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부터 약 2,250년 전, 아소카라는 임금님이 오늘날 인도 땅의 대부분을 다스렸어요.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지대부터 동쪽으로는 벵골까지였지요. 수도는 파탈리푸트라라는 큰 도시로, 지금의 파트나가 있는 곳이에요.

아소카는 왕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인도 동쪽 바닷가의 칼링가라는 나라를 공격했어요. 전쟁에서 이겼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거나 고향에서 끌려가는 것을 보고 깊이 슬퍼했어요. 나중에 그는 그 전쟁을 후회한다고 글로 남겼지요.

그 뒤 아소카는 가장 좋은 승리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르게 살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이런 삶의 방식을 ‘담마’라고 불렀어요. 부모님과 친구에게 잘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동물을 해치지 않고,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이든 존중하는 것이에요.

아소카는 자기 생각을 알리려고 제국 곳곳의 큰 바위와 반짝이는 높은 돌기둥에 글을 새기게 했어요. 사람들이 직접 읽거나, 누군가 읽어 주는 것을 들을 수 있게요. 이 글 가운데 많은 것이 지금도 남아 있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인도의 가장 오래된 글에 속해요.

아소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랐어요. 불교 이야기에서는 그를 탑을 많이 세우고 불교를 널리 퍼뜨린 훌륭한 임금님으로 기억해요. 오늘날 그의 돌기둥 꼭대기에 있던 사자 조각은 인도의 국가 문장이고, 돌기둥에 새겨진 바퀴 무늬는 인도 국기 한가운데에 있답니다.

한눈에 보기

생애
기원전 304년 무렵~232년 무렵(출생 연도는 불확실)
재위
기원전 268년 무렵~232년 무렵,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황제(연대는 대략적)
수도
마가다 왕국의 파탈리푸트라(지금의 인도 비하르주 파트나)
가계
빈두사라의 아들, 왕조를 세운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손자
전환점
즉위(관정) 8년째인 기원전 261~260년 무렵 칼링가(지금의 오디샤) 정복
비문
바위와 돌기둥에 새긴 30여 개의 칙령. 대부분 프라크리트어(브라흐미·카로슈티 문자), 일부는 그리스어와 아람어
종교
불교 재가 신자이면서 여러 종교 집단을 두루 후원
유산
아시아 불교 전통의 이상적 군주. 사르나트 사자 주두는 인도의 국가 문장

쉬움

아소카는 누구인가

아소카는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아우른 첫 제국을 세운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군주다. 갠지스강가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에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부터 북인도를 가로질러 벵골까지, 남쪽으로는 데칸고원까지 다스렸다. 반도의 최남단만이 그의 지배 밖에 있었다.

그가 무엇보다 기억되는 까닭은 비문이다. 아소카는 비문에서 자신을 ‘신들의 사랑을 받는 자, 자애로운 모습을 지닌 자’라는 뜻의 데바남피야 피야다시라고 부르며 백성에게 1인칭으로 말한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후회하고, ‘담마’(바른 행실)라는 자기 생각을 설명하며, 관리들에게 통치 방법을 지시한다. 고대 인도의 어떤 군주도 이처럼 직접적인 개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아소카는 불교 전통의 영웅이기도 하다.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한문을 비롯한 여러 언어의 전설이 그를 탑을 세우고 스승들을 외국에 보낸 이상적인 불교 군주로 기린다. 한국에서도 그는 『아육왕경』 등을 통해 ‘아육왕’으로 알려졌다. 이 전설들은 그가 죽고 한참 뒤에 쓰였으므로, 역사학자들은 비문이 보여 주는 것과 후대 이야기꾼들이 덧붙인 것을 가려내려 한다.

[1][2][7]

쉬움

칼링가 전쟁과 한 왕의 뉘우침

칼링가는 인도 동해안, 대략 지금의 오디샤주에 있던 독립 지역이었다. 관정(즉위 의식) 후 8년째인 기원전 261~260년 무렵 아소카는 이곳을 정복했다. 그 결과를 아소카 자신의 마애 칙령 제13장이 전한다. 15만 명이 끌려가고, 10만 명이 죽임을 당했으며, 그 몇 배가 뒤이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는 왕이 말한 어림수여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정복자가 자신이 일으킨 고통을 스스로 인정한 드문 기록이다.

같은 칙령에서 아소카는 깊이 뉘우쳤다고 말한다. 나라를 정복하면 살육과 죽음과 사람들의 강제 이주가 따르고, 살아남은 이들도 가족과 벗이 해를 입으면 함께 고통받기 때문이다. 그는 무력이 아닌 ‘담마에 의한 정복’이 가장 좋은 정복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뉘우침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 칙령은 변경의 숲 부족들에게, 왕이 뉘우치고 있지만 여전히 힘이 있으며 잘못을 벌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 칼링가 현지에 새긴 칙령에는 후회의 구절이 빠져 있고, 대신 공정하고 온화한 통치를 당부하는 현지 관리용 특별 칙령 두 편이 들어 있다. 이것이 정치적 신중함인지, 정복당한 사람들을 위한 다른 메시지인지, 혹은 둘 다인지를 두고 역사학자들의 해석이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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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담마란 무엇인가

담마(산스크리트어 다르마, 한자로는 법(法))는 인도 전통에서 법, 의무, 진리, 부처의 가르침 등 여러 뜻을 지닌 말이다. 아소카의 비문에서는 누구나 함께 따를 수 있는 도덕적 삶의 방식에 가깝다. 그는 담마를 “허물은 적고 선행은 많으며, 자비, 베풂, 진실, 청정”이라고 설명한다.

칙령들은 구체적으로 부모와 어른에게 순종하고, 하인과 노예를 제대로 대하고, 브라만과 수행자에게 너그럽고, 적게 쓰고 적게 모으며, 말을 삼가라고 권한다. 특히 종교 집단들 사이의 존중을 강조해, 자기 종파만 칭찬하고 남의 종파를 헐뜯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 종파를 해친다고 경고한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관용의 호소였다.

아소카는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도 옮겼다. 그는 왕실 부엌에서 동물 도살을 줄이고, 일부 동물 희생 제의를 금하고 몇몇 동물을 보호했으며, 사람과 동물을 위한 의료를 베풀고, 길가에 그늘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팠으며, 관리들에게 관할 지역을 순회하게 했다고 적었다. 또 여러 종교 공동체와 집단의 복지를 돌보는 새 관직 ‘담마 마하마타’를 두었다.

담마가 형벌이나 국가 권력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사형은 계속되었다. 다만 석주 칙령 제4장은 사형수에게 사흘의 유예를 주었고, 아소카는 즉위 기념일마다 죄수를 풀어 주었다고 적었다. 담마는 통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통치의 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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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칙령 읽기: 바위, 돌기둥, 여러 언어

아소카의 비문은 보통 네 갈래로 나뉜다. 가장 이른 축에 드는 소마애 칙령은 개인적이고 분명히 불교적이며, 그중 하나에서 아소카는 자신을 부처의 재가 신자(우바새)라고 부른다. 주로 제국의 변경 가까운 바위에 새긴 대마애 칙령 14장은 담마와 행정 명령을 펼친다. 소석주 칙령은 불교에 관한 관심과 순례를 기록하는데, 즉위 20년째 무렵 부처의 탄생지 룸비니를 찾은 일이 그 예다. 대석주 칙령 7장은 재위 26~27년째에 새긴 것으로 통치 말기의 정책을 정리한다.

칙령은 대부분 당시의 구어인 프라크리트어로, 지역에 따라 방언 차이가 있다. 제국 대부분에서는 남아시아·동남아시아 여러 문자의 조상인 브라흐미 문자로, 지금의 파키스탄인 서북부에서는 카로슈티 문자로 썼다.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에서는 그 지역의 헬레니즘 행정과 옛 페르시아 행정의 언어였던 그리스어와 아람어로 새겼다. 언어 선택은 아소카가 실제로 이해되기를 바랐음을 보여 준다.

돌기둥은 윤이 나게 간 사암 한 덩어리로 만든 기둥으로, 높이가 12미터가 넘는 것도 많으며, 꼭대기에는 사자, 황소, 코끼리 같은 동물을 새긴 주두가 얹혀 있다. 가장 뛰어난 것은 부처가 처음 설법한 사르나트에서 나온 것으로, 네 마리 사자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고 그 아래 띠에 바퀴와 네 동물이 새겨져 있다. 특유의 반들반들한 ‘마우리아 광택’은 지금도 감탄을 자아낸다. 일부 돌기둥은 아소카가 글을 새기기 전부터 있었을 가능성도 있어, 돌기둥의 연대는 논쟁거리다.

칙령은 관리들에게 축제일마다 백성 앞에서 소리 내어 읽으라고 자주 지시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사회에서 일종의 공공 소통 수단이었던 셈이다. 한때 인더스강까지 뻗었던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실 비문을 부분적으로 본보기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3][4]

중급

생애와 시대: 왕자에서 황제로

아소카의 할아버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기원전 320년 무렵 마가다의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알렉산드로스 원정 뒤의 서북부 땅까지 차지하며 왕조를 세웠다. 그는 헬레니즘 왕 셀레우코스 1세와 조약을 맺었고, 그리스 사절 메가스테네스는 파탈리푸트라의 마우리아 궁정을 기록했다.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는 제국을 남쪽으로 넓혔다.

아소카의 비문은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불교 연대기들은 그가 왕자 시절 중부 인도의 웃자인에서 총독을 지냈다거나 서북부 탁실라의 반란을 진압했다고 전하는데, 중부 인도 사루 마루의 작은 비문은 실제로 그가 왕자로서 그곳을 찾았다고 적고 있다. 연대기들은 또 빈두사라가 죽은 뒤 그가 형제들과 왕위를 다투었고, 권력을 잡은 지 4년 뒤에야 관정식을 치렀다고 전한다. 형제 99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전설적 과장이지만, 왕위 계승 분쟁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불교 문헌은 아산디미타, 티샤라크시타, 파드마바티 등 여러 왕비와 쿠날라, 마힌다, 상가미타 등의 자녀를 전한다. 비문 가운데서는 ‘왕비 칙령’이 카루바키라는 왕비와 그 아들 티바라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전설 속 가족 가운데 누가 실존 인물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스리랑카 전승에 따르면 아소카는 약 37년 동안 다스리고 기원전 232년 무렵 죽었다. 연대가 적힌 마지막 비문은 재위 27년째의 것이다. 그가 죽은 뒤 제국은 약해져 후계자들 사이에 나뉘었고, 마지막 마우리아 왕은 기원전 185년 무렵 장군 푸샤미트라 슝가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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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제국을 다스리는 일

마우리아 제국은 도시, 농촌, 유목민, 숲의 부족들이 여러 언어를 쓰며 살아가는 넓고 다양한 나라였다. 아소카 비문의 분포는 갠지스강 유역의 중심부, 왕자들이 다스린 탁실라·웃자인·토살리(칼링가)·수바르나기리(남부) 같은 지방 거점, 그리고 변경 지대로 이루어진 구조를 짐작하게 한다.

칙령에는 관리의 직함이 나온다. 고위 관리인 마하마타, 사법 업무도 맡은 농촌 행정관 라주카, 5년마다 관할 지역을 순회해야 하는 프라데시카 등이다. 아소카는 몸소 순행하며 백성을 만났고, 식사 중이든 내전에 있든 언제라도 공무를 보고하라고 명했다고 적는다. 칙령들은 관리들이 공정하고 일관되게 행동하기를 바라는 왕의 조바심을 보여 준다.

찬드라굽타의 재상 카우틸랴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스크리트 통치론 『아르타샤스트라』는 첩자, 세금, 강력한 관료제를 갖춘 마우리아 행정을 그릴 때 자주 쓰인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가 이 책의 상당 부분을 후대에 쓰인 것으로 보므로, 마우리아 시대 자료로 쓸 때는 조심해야 한다.

[6][2][7]

중급

아소카와 불교

비문을 보면 아소카가 불교도가 되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마애 칙령 제1장에서 그는 재가 신자가 된 지 2년 반이 넘었지만 1년 동안은 별 진전이 없다가, ‘상가(승가)에 나아간’ 뒤 더 열심을 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와 탄생지 룸비니를 찾았고, 비구·비구니들에게 교단 분열을 경고했으며, 교단에 특정 불교 경전을 권했다.

그러나 그의 공적인 담마는 좁은 의미의 불교 프로그램이 아니다. 대마애 칙령과 대석주 칙령은 부처, 열반, 사성제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아소카는 불교도뿐 아니라 브라만, 자이나교도, 아지비카교도도 후원했고, 바라바르 언덕의 석굴을 아지비카 수행자들에게 기증했다. 역사학자들은 그의 태도를 개인적인 불교 신앙과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적 윤리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불교 전통은 아소카에게 훨씬 큰 역할을 준다. 스리랑카 연대기들은 그가 파탈리푸트라에서 고승 목갈리풋타 팃사가 주재한 제3차 결집을 후원해 승가를 정화했고, 이후 여러 나라에 전법사가 파견되었으며, 아들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이어 딸 상가미타가 보리수 가지를 들고 건너갔다고 전한다. 북인도 전승은 이 결집을 언급하지 않고 아소카의 비문도 침묵하므로 그 역사성은 논란이 있다. 마힌다의 전법은 스리랑카 불교사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두 전승 모두 그가 탑이나 사원 8만 4천 곳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상징적인 숫자다. 산치 대탑의 초기 단계처럼 일부 불교 유적에서 마우리아 시대의 건축이 확인되지만, 그런 규모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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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아소카와 더 넓은 세계

아소카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으로 생겨난 헬레니즘 세계와 인도가 맞닿은 시대에 살았다. 마애 칙령 제13장에서 그는 담마의 사절을 보낸 그리스 왕 다섯을 이름으로 든다. 안티오코스(셀레우코스 왕조의 2세),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의 2세), 안티고노스(마케도니아의 고나타스), 마가스(키레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에페이로스 또는 코린토스)다. 이 이름들 덕분에 역사학자들은 이 칙령을 대략 기원전 250년대로 추정할 수 있고, 이는 아소카 재위 연대를 정하는 열쇠가 된다.

1958년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그리스어·아람어 이중 언어 비문이, 뒤이어 대마애 칙령 일부의 그리스어 판이 발견되었다. 그리스어 본문은 담마를 그리스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인 에우세베이아(‘경건’)로 옮겼다. 이 비문들은 아소카의 제국 안에 그리스어를 쓰는 공동체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라틴 사료에는 아소카의 사절이 지중해의 왕들에게 닿았다거나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가 없다. 그러나 아시아 안에서 그의 영향은 불교의 기억을 통해 오랫동안 막대했다. 정의로운 ‘전륜성왕’(차크라바르틴)으로서의 이미지는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의 왕권 관념에 영향을 주었다.

[2][3]

중급

잊혔다가 다시 발견되다

정작 인도에서 아소카는 역사 인물로서 거의 잊혔다. 브라흐미 문자가 쓰이지 않게 되면서 몇백 년 만에 칙령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졌다. 후대의 통치자들은 그의 돌기둥을 다시 쓰기도 했다. 14세기 델리 술탄 피루즈 샤 투글루크는 돌기둥 두 개를 델리로 옮겼지만, 궁정 학자들은 글을 읽지 못했다. 아소카는 주로 『아소카바다나』와 스리랑카 연대기 같은 불교 전설 속에서만 살아 있었다.

근대의 재발견은 1830년대에 시작되었다. 캘커타의 영국 동인도회사 관리 제임스 프린셉이 크리스티안 라센 등의 앞선 연구를 바탕으로 브라흐미 문자 해독을 완성했다. 프린셉은 비문의 주인 ‘피야다시’가 왕이라는 것을 밝혔고, 그가 아소카라는 사실은 1915년 남인도 마스키에서 왕을 ‘데바남피야 아소카’라고 부른 칙령이 발견되면서 확실해졌다.

20세기에 아소카는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1947년 인도 국기 한가운데에 사르나트 주두의 바퀴, 곧 ‘아소카 차크라’가 들어갔고, 1950년 헌법이 시행되면서 사르나트 사자 주두가 국가 문장으로 채택되었다. 자와할랄 네루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아소카를 관용과 윤리의 통치자로 칭송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런 찬미가 복잡한 제국 군주를 현대적 이상형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고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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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계의 논쟁

개종과 칼링가. 예전 작가들은 전쟁터에서의 극적인 개종을 상상했다. 그러나 비문은 점진적인 과정을 시사한다. 아소카는 소마애 칙령 무렵보다 2년 반쯤 전에 재가 신자가 되었고, 1년 뒤에 더 깊이 귀의했다고 말한다. 스리랑카 전승은 오히려 칼링가 전쟁 이전에 개종했다고 하며 전쟁은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역사학자는 마애 칙령 제13장을 갑작스러운 변화의 일기가 아니라 숙고된 공적 성명으로 읽는다.

담마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로밀라 타파르는 담마가 개인적 신념의 표현이면서도, 상당 부분 다양한 제국을 하나로 묶기 위한 정책, 곧 종파의 차이를 넘어선 공동의 윤리였다는 영향력 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다른 학자들은 불교적 영감을 강조하며 칙령을 진지한 도덕적 가르침으로 본다. 패트릭 올리벨의 연구처럼 칙령 자체를 하나의 정치철학으로 분석하는 최근 연구도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개인의 신앙과 통치술을 대립이 아니라 서로 얽힌 것으로 본다.

연대. 절대 연대는 마애 칙령 제13장의 그리스 왕들, 스리랑카 연대기, 그리고 연대기가 기준점으로 삼는 부처 입멸 연도에 달려 있는데, 부처의 입멸 연도 자체가 논쟁거리다. 아소카의 즉위 연도는 기원전 270~265년 무렵에서 몇 해씩 차이가 난다. 개별 칙령과 돌기둥의 순서와 연대도 여전히 논의 중이다.

전설과 역사. 『아소카바다나』는 개종 전의 아소카를 고문실까지 갖춘 잔혹한 ‘찬다소카’(포악한 아소카)로, 개종 뒤에도 다른 종파 신도들을 학살한 인물로 그린다. 이런 이야기는 대체로 개종의 힘을 부각하기 위한 도덕극으로 여겨지지만, 더 가혹했던 군주에 대한 기억이 남은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소수 있다. 소마애 칙령의 아소카와 대칙령의 피야다시가 서로 다른 왕이라는 주변부 학설은 주류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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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증거와 연구 방법

금석학. 칙령은 아소카 당대의 유일한 문헌이다. 학자들은 방언과 표현이 조금씩 다른 각 칙령의 여러 판본을 비교해 본문을 재구성하고 지역 언어를 연구한다. 『인도 비문 집성』(Corpus Inscriptionum Indicarum)에 실린 훌치의 1925년 판은 수십 년 동안 표준이었고, 그 뒤에도 칸다하르와 인도 여러 곳에서 새 비문이 발견되었다. 칙령은 왕의 관점을 전하므로 중립적인 보고가 아니라 왕의 성명으로 읽어야 한다.

불교 문헌. 북방 전승(산스크리트어와 한문으로 전하는 『아소카바다나』, 한역 『아육왕전』)과 스리랑카 팔리어 전승(『디파밤사』, 『마하밤사』와 주석서)은 수백 년 뒤에 쓰였고 승가 공동체의 관심을 반영한다. 존 스트롱의 『아소카바다나』 연구는 이 문헌이 아소카를 통해 공덕과 왕권을 가르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런 문헌은 아소카가 어떻게 기억되었는지를 알려 주며, 가끔은 교차 검증할 수 있는 역사적 세부도 담고 있다.

고고학과 미술. 돌기둥, 주두, 탑, 파탈리푸트라 유적, 비문의 분포는 제국의 범위와 조직을 재구성하는 데 쓰인다. 미술사학자들은 돌기둥의 광택과 문양, 그리고 페르시아와 헬레니즘의 영향 가능성을 연구하고, 고고학자들은 층위와 유물로 유적의 연대를 정한다. 후대 작가들이 인용한 메가스테네스 같은 그리스·라틴 작가들은 마우리아 국가를 묘사하지만 아소카 자신은 다루지 않는다.

역사학자의 과제는 이 증거들의 차이를 존중하며 함께 엮는 것이다. 칙령은 왕을 대변하고, 전설은 후대의 불교도를 대변하며, 고고학은 어느 쪽도 대변하지 않지만 양쪽을 검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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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담마(법)
자비, 정직, 베풂, 존중을 담은 아소카의 도덕 규범. 칙령을 통해 모든 백성에게 권했다.
담마에 의한 정복
전쟁이 아닌 도덕적 설득이 가장 좋은 승리라는 아소카의 주장. 칼링가 전쟁 뒤에 밝혔다.
종교적 관용
칙령은 종파 간 존중을 촉구하며, 남의 신앙을 공격하면 자기 신앙을 해친다고 경고한다.
복지 군주
통치자가 백성의 안녕을 책임진다는 생각. 의료, 우물, 길, 공정한 행정으로 나타났다.
공공 비문
여러 언어를 쓰는 제국에서 바위와 돌기둥을 통해 백성에게 직접 말하는 방식.
이상적 불교 군주
불교 문헌 속 전설적 아소카. 아시아 여러 나라 왕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전설과 기록
아소카 자신의 말과 수백 년 뒤 그에 관해 전해진 이야기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

기록

  1. 약 기원전 320년 —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마우리아 제국을 세운다(기원전 320년 무렵).
  2. 약 기원전 304년 — 아소카가 태어난다(연도 불확실).
  3. 약 기원전 268년 — 아소카가 왕위에 오른다(기원전 268년 무렵).
  4. 약 기원전 260년 — 관정 8년째에 칼링가를 정복한다(기원전 261~260년 무렵).
  5. 약 기원전 259년 — 재위 10년째 무렵 칸다하르의 그리스어·아람어 비문과 첫 마애 칙령이 나온다.
  6. 약 기원전 249년 — 부처의 탄생지 룸비니를 찾아 돌기둥을 세운다.
  7. 약 기원전 243년 — 재위 26~27년째에 대석주 칙령을 새긴다.
  8. 약 기원전 232년 — 아소카가 죽는다(기원전 232년 무렵).
  9. 약 기원전 185년 — 마지막 마우리아 왕이 푸샤미트라 슝가에게 무너진다(기원전 185년 무렵).
  10. 1837년 — 제임스 프린셉이 브라흐미 문자 해독을 발표하고 칙령을 읽어 낸다.
  11. 1915년 — ‘데바남피야 아소카’라고 적힌 마스키 칙령으로 피야다시가 아소카임이 확인된다.
  12. 1950년 — 사르나트의 아소카 사자 주두가 인도의 국가 문장으로 채택된다.

용어 풀이

마우리아 왕조
기원전 320년 무렵 찬드라굽타가 세워 기원전 185년 무렵까지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다스린 왕조.
칙령
공식 포고문. 아소카의 칙령은 바위와 돌기둥에 새겨졌다.
브라흐미 문자
아소카 비문 대부분에 쓰인 고대 인도 문자. 오늘날 여러 문자의 조상이다.
카로슈티 문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문자로, 인도 아대륙 서북부에서 쓰였다.
프라크리트어
문어인 산스크리트어와 구별되는 고대 인도의 일상 언어들.
상가(승가)
비구와 비구니로 이루어진 불교 공동체.
스투파(탑)
흔히 사리를 모신 둥근 무덤 모양의 불교 기념물.
우바새(우파사카)
출가하지 않고 부처를 따르는 남성 재가 신자.
마하마타
고위 관리. 아소카는 담마와 복지를 위해 담마 마하마타를 두었다.
주두
기둥머리 장식. 사르나트 주두에는 네 마리 사자가 있다.

묻고 답하기

아소카는 왜 유명한가요?

인도 역사상 가장 큰 제국 가운데 하나를 다스렸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 뒤에 친절과 관용의 도덕을 지금도 남아 있는 비문으로 널리 알렸기 때문이에요.

아소카는 전쟁과 형벌을 모두 없앴나요?

아니에요. 우리가 아는 한 큰 정복 전쟁은 더 벌이지 않았지만, 군대를 유지했고 변경 부족들에게 여전히 벌할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사형도 계속되었어요.

아소카는 불교도였나요?

네. 비문에서 스스로 부처의 재가 신자라고 말해요. 하지만 다른 종교들도 후원했고, 공적인 칙령은 불교 교리보다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윤리를 이야기해요.

아소카가 한 말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의 말은 바위와 돌기둥에 새겨졌어요. 문자가 잊힌 뒤 1830년대에 제임스 프린셉이 이를 해독했고, 그 뒤로 학자들이 본문을 읽고 비교해 왔어요.

아소카의 사자 조각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사르나트 사자 주두는 바라나시 근처 사르나트 박물관에 있고, 그 모습은 인도의 동전, 지폐, 공문서에 쓰입니다.

아소카에 관한 불교 전설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불교의 가치를 가르치려고 수백 년 뒤에 쓰인 것이라, 역사학자들은 조심해서 활용하고 비문과 어긋날 때는 비문을 더 신뢰합니다.

아소카가 정말 형제 99명을 죽였나요?

이 숫자는 스리랑카 연대기에서 나온 것으로 과장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왕위 다툼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아소카. 위키백과
  2. Ashoka. Wikipedia
  3. 아소카의 칙령. 위키백과
  4. Edicts of Ashoka. Wikipedia
  5. 칼링가 전쟁. 위키백과
  6. 마우리아 제국. 위키백과
  7. Romila Thapar, Aśoka and the Decline of the Mauryas. Oxford University Press, 1961
  8. John S. Strong, The Legend of King Aśoka: A Study and Translation of the Aśokāvadāna.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3
  9. E. Hultzsch, Inscriptions of Asoka (Corpus Inscriptionum Indicarum, vol. 1). Clarendon Press, Oxford, 1925
  10. Nayanjot Lahiri, Ashoka in Ancient Indi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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