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커다란 말굽처럼 휘어 도는 강과, 그 옆으로 높이 솟은 바위 절벽을 떠올려 보세요. 먼 옛날 인도의 불교 스님들과 장인들은 지금의 아잔타라는 곳에서 이런 절벽을 골라, 단단한 바위 속으로 방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벽돌로 짓지 않았어요. 망치와 끌로 돌을 조금씩 깎아 냈지요.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 내려가다 보면 절벽 안에 넓은 방과 기둥, 불상, 스님들이 자는 작은 방이 생겨났어요. 산 하나를 통째로 조각해서 건물을 만드는 것과 같았어요.
어떤 굴은 기도하는 법당이었어요. 천장이 둥글고 높아서 뒤집어 놓은 배의 속처럼 생겼어요. 법당 끝에는 둥근 지붕 모양의 탑인 스투파가 서 있었어요. 다른 굴은 승원이었어요. 스님들이 큰 네모난 방 둘레의 작은 방에서 살며 공부하고 명상했어요.
그다음 화가들이 벽과 천장을 그림으로 가득 채웠어요. 왕자와 공주, 코끼리와 원숭이, 춤꾼과 악사, 그리고 부처님이 동물이나 왕으로 태어났던 전생 이야기를 많이 그렸어요. 이야기 속 부처님은 언제나 친절하고 너그러우려고 애썼어요.
몇백 년이 지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이 굴을 쓰지 않았고, 숲이 천천히 굴을 덮어 버렸어요. 1819년 호랑이를 사냥하던 영국 장교가 강 건너편에서 굴 입구 하나를 보았어요. 곧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왔고, 지금 아잔타 석굴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랍니다.
한눈에 보기
- 위치
- 인도 마하라슈트라주 차트라파티 삼바지나가르(아우랑가바드) 지구, 와고라(와구르)강의 말굽 모양 협곡
- 수
- 약 30개의 석굴(1~29번과 15A번. 번호는 시대가 아니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놓인 위치 순서)
- 1기
- 기원전 2~1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초기까지, 사타바하나 시대(제9·10·12·13·15A굴)
- 2기
- 기원후 5세기 바카타카 왕조 때. 월터 스핑크는 대부분을 460~480년 무렵으로 보고, 6세기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음
- 종류
- 예배용 차이티야굴(제9·10·19·26굴, 제29굴은 미완성)과 승원인 비하라굴
- 미술
- 벽화(특히 제1·2·16·17굴), 부조와 불상. 본생담(자타카) 장면이 많음
- 종교
- 불교. 초기 굴에는 불상이 없고, 후기 굴에는 불당에 불상을 모셔 대승의 영향을 받은 신앙을 반영
- 지정
- 유네스코 세계유산(1983). 인도 고고조사국(ASI)이 관리
쉬움
아잔타 석굴이란
아잔타 석굴은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주 북부 구릉의 현무암 절벽을 파서 만든 약 서른 개의 불교 유적이다. 와고라강이 깊은 말굽 모양으로 휘어 도는 바깥쪽 굽이를 따라 늘어서 있다. 한때 도시에서는 멀었지만 데칸 고원을 가로지르는 중요한 교역로와는 가까운 조용한 골짜기였다.
석굴은 크게 두 시기에 만들어졌다. 첫 시기는 기원전 2세기나 1세기 무렵에 시작되었고, 훨씬 규모가 큰 둘째 시기는 기원후 5세기 바카타카 왕조 때였다. 석굴은 저마다 예배당(차이티야) 아니면 승원(비하라)이며, 이들이 모여 승려들이 살고 기도하며 순례자와 후원자를 맞이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아잔타는 무엇보다 벽화로 세계에 이름났다. 제1·2·16·17굴의 벽화는 현존하는 고대 인도 벽화 가운데 가장 큰 무리다. 우아한 인물, 풍부한 색채, 빽빽한 이야기 전개 때문에 흔히 인도 미술의 정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석굴에는 거대한 불상부터 장식적인 기둥과 문틀까지 뛰어난 조각도 있다.
쉬움
석굴을 ‘읽는’ 법
차이티야굴은 끝이 둥근 길고 높은 방으로, 교회의 앱스(반원형 후진)와 비슷하다. 기둥 열이 가운데 신랑(身廊)과 좁은 양쪽 측랑을 나눈다. 천장은 높은 원통형 궁륭이며, 초기 굴에서는 예전 목조 건물을 본떠 나무 서까래 모양을 새겼다. 둥근 끝에는 부처의 마지막 열반을 나타내는 둥근 지붕 모양의 스투파가 선다. 예배자들은 측랑을 따라 시계 방향으로 스투파를 돌았다. 바깥 입구 위의 거대한 말굽 모양 창은 스투파에 빛을 떨어뜨린다.
비하라굴은 승원이다. 대개 가운데 네모난 큰 방 둘레에 작은 방들이 있고, 방마다 돌 침상이 있어 승려 한두 명이 잤다. 앞에는 기둥이 선 현관이 있다. 후기 비하라에서는 입구 맞은편 뒷벽에 불당을 파고 커다란 좌불을 모셔, 승원이 예배 공간도 되었다.
그림은 벽, 기둥, 천장 등 거의 모든 면을 덮었다. 벽에는 대개 긴 이야기가 틀 없이 장면에서 장면으로 흘러가듯 그려져 있어, 보는 사람이 벽을 따라 인물들을 좇아가야 한다. 천장은 꽃, 동물, 새, 기하학 무늬로 채운 그림 닫집 같다.
석굴 번호는 동쪽 끝의 1번부터 서쪽 끝의 29번까지이고, 15A번은 나중에 붙었다. 번호는 나이가 아니라 절벽에서의 위치를 따르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제9·10·12·13굴은 줄의 한가운데에 있다.
쉬움
벽에 그려진 이야기
많은 그림이 부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자타카)을 그린다. 이야기 속에서 미래의 부처, 곧 보살은 왕자, 상인, 코끼리, 사슴, 원숭이로 태어나 그때마다 너그러움, 인내, 자비 같은 덕을 보인다. 예컨대 제17굴의 「비슈반타라 본생」에서 왕자는 극단적인 보시로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 가족까지 내준다. 다른 장면들은 역사적 부처의 생애, 곧 탄생, 출가, 깨달음, 설법을 보여 준다.
가장 유명한 단독 인물은 제1굴 불당 문 양옆에 그린 보살들이다. 흔히 연화수보살(파드마파니, ‘손에 연꽃을 든 이’)로 보는 한 보살은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고 푸른 연꽃을 든 채, 고요한 자비 속에 눈을 내리깔고 서 있다. 다른 하나는 금강수보살(바즈라파니)이다. 실물보다 큰 이 두 인물은 인도 미술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미지에 속한다.
그림은 일상생활도 아주 자세히 보여 준다. 궁전과 도시의 거리, 왕과 신하, 화려한 장신구를 한 여인들, 악사와 무희, 병사, 배, 말과 코끼리, 낯선 옷을 입은 외국인, 숲속 동물들이 나온다. 흔히 ‘죽어 가는 공주’라 불리는 제16굴의 유명한 장면은 부처의 이복동생 난다가 출가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 순다리로 보는 여인이 슬퍼하는 모습이다. 역사가들에게 이 그림들은 5세기 인도 궁정 문화를 들여다보는 창이다.
중급
1기: 초기 불교 석굴
가장 이른 석굴들은 바자, 카를라, 피탈코라 같은 유적을 포함하는 서데칸의 폭넓은 불교 석굴 건축 전통에 속한다. 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사타바하나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하던 때에 만들어졌다. 제9굴과 제10굴은 차이티야굴이고, 제12·13·15A굴은 작은 승원이다.
이 초기 석굴은 무불상(無佛像) 표현을 따른다. 부처를 사람 모습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예배는 스투파에 집중되었고, 필요하면 상징으로 부처를 나타냈다. 비문은 개인 기증자들의 보시를 기록하여, 승려뿐 아니라 상인과 가족 같은 재가 신자들이 석굴을 후원했음을 보여 준다.
아마도 아잔타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티야인 제10굴에는 성스러운 나무로 향하는 왕의 행렬 같은 장면이 담긴 가장 오래된 벽화의 조각들이 남아 있다. 풍만한 인물과 생기 넘치는 군중을 그린 양식은 산치 같은 초기 스투파의 조각과 통한다. 이 첫 시기 뒤로 아잔타의 활동은 몇 세기 동안 멈추거나 느려진 것으로 보인다.
중급
2기: 바카타카의 황금기
기원후 5세기 바카타카 왕조는 인도 중부와 데칸의 넓은 지역을 다스렸다. 하리셰나 황제(재위 460~477년 무렵) 때 그의 조정 사람들이 아잔타에서 새로운 굴착을 폭발적으로 후원했다. 하리셰나 자신은 힌두교 군주였고 바카타카 왕실은 시바를 섬겼다. 그러나 그의 대신과 봉신 가운데는 독실한 불교도가 있었고, 이 시기 왕가는 흔히 여러 종교를 함께 후원했다.
비문은 몇몇 후원자의 이름을 전한다. 하리셰나의 대신 바라하데바는 바카타카 왕들을 기리는 긴 비문과 함께 제16굴을 봉헌했다. 하리셰나 아래의 지방 군주 우펜드라굽타는 제17~20굴을 후원했다. 붓다바드라라는 승려는 이웃 아슈마카 왕의 대신과 함께 큰 차이티야인 제26굴을 봉헌했는데, 그 비문은 이 굴을 ‘달과 해가 이어지는 한 오래갈 산 위의 기념물’이라고 말한다.
이 시기의 석굴은 1기보다 크고 화려하다. 이제 불상이 곳곳에 나타난다. 비하라 뒤쪽 불당에 앉아 있고, 새로 판 차이티야인 제19굴과 제26굴에서는 스투파 앞에 서 있으며, 파사드 곳곳에 부조로 새겨졌다. 제26굴에는 부처의 반열반(마지막 입멸)을 나타낸 거대한 와불과, 마왕 마라의 공격과 그 딸들의 유혹을 그린 극적인 부조가 있다.
역사가 월터 스핑크에 따르면 작업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460~462년 무렵 시작되어 468년 무렵 아슈마카의 위협으로 흔들렸고, 477년 하리셰나가 죽은 뒤 갑자기 끝나, 많은 굴이 미완성으로 남고 서둘러 마무리한 불당들이 덧붙었다는 것이다. 더 긴 연대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이는 아래에서 다룬다.
중급
석굴을 파고 그림을 그린 방법
석굴은 위에서 아래로 팠다. 일꾼들은 먼저 천장 높이에서 좁은 굴을 뚫은 뒤, 아래와 바깥으로 넓혀 가며 바위를 단계별로 걷어 내고, 계획한 자리에 기둥과 조각과 벽을 남겼다. 아잔타의 미완성 굴에는 거친 덩어리에서 완성된 조각까지 이 과정의 모든 단계가 남아 있어, 유적 자체가 석굴 기술의 교과서다.
벽화는 이탈리아에서처럼 젖은 석회 반죽에 그리는 진정한 프레스코가 아니라, 마른 면에 그린 것이다. 이를 템페라 또는 세코 기법이라 부르기도 한다. 거친 바위 위에 식물 섬유 같은 유기물을 섞은 진흙층을 바르고, 그 위에 얇은 석회층을 입힌 다음, 아교로 갠 안료로 그렸다. 색은 주로 붉은 오커와 노란 오커 같은 현지의 흙에서 얻었고, 흰색, 그을음으로 만든 검정, 녹색 광물도 썼다. 파란색에는 수입한 청금석(라피스라줄리)이 들어갔다고 흔히 말한다.
화가들의 솜씨는 매우 뛰어났다. 명암으로 얼굴과 몸의 입체감을 살리고, 힘찬 윤곽선으로 움직임을 주었으며, 자세와 손짓의 약속된 표현으로 감정을 나타냈다. 학자들은 이들의 작품에서 굽타·바카타카 시대 산스크리트 회화론과 시론이 말하는 세련된 미학, 곧 예술이 감상자에게 불러일으켜야 할 정서적 맛인 ‘라사’의 이상을 읽는다.
중급
버려짐, 재발견, 모사
5세기나 6세기 뒤 석굴은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후에도 알던 이들이 있었을 수 있다. 7세기 중국 순례승 현장은 마하라슈트라 지역의 한 사원을 묘사했는데, 많은 학자가 이를 아잔타로 보지만 현장이 직접 가 보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가까이 사는 지역 사람들은 늘 석굴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초목과 흙더미가 많은 입구를 덮어 바깥 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1819년 4월 28일, 호랑이를 사냥하던 영국 기병 장교 존 스미스가 지역의 어린 목동의 안내로 제10굴에 이르렀다. 그는 그림이 그려진 기둥에 자기 이름과 날짜를 긁어 새겼는데, 지금도 볼 수 있다. 재발견이 훼손도 함께 가져왔다는 증거다. 소식은 빠르게 퍼져 아잔타는 곧 식민지 관리, 학자, 화가들 사이에 유명해졌다.
벽화가 약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모사 사업이 벌어졌다. 로버트 길 소령은 1844년부터 1863년까지 현장에서 일하며 큰 모사화를 많이 그렸지만, 대부분 1866년 런던 크리스털 팰리스 화재로 사라졌다. 1872년부터 존 그리피스와 봄베이 미술학교 학생들이 13년 동안 약 300점의 모사화를 만들었으나, 1885년 런던의 또 다른 화재로 백 점 넘게 불탔다. 그리피스 팀은 그림을 잘 보이게 하려고 일부 벽화에 니스를 발랐는데, 이것이 뒤에 어두워지며 벽화를 손상시켰다. 1909~11년에는 크리스티애나 헤링엄이 뒷날 화가가 된 난달랄 보스 등 캘커타 미술학교 학생들과 함께 또 한 벌의 모사화를 만들어 1915년 출간했다.
1920년대 이 지역은 번왕국 하이데라바드에 속했다. 그 군주 니잠 미르 오스만 알리 칸은 이탈리아 복원가 로렌초 체코니와 오르시니 백작을 고용하는 등 보존 사업을 지원하고 유적까지 길을 냈다. 고고학자 굴람 야즈다니는 벽화를 사진으로 기록한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인도 독립 뒤로는 인도 고고조사국이 석굴을 보호하고 있으며, 198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다.
중급
영향과 유산
아잔타는 승려, 상인, 예술가들로 이어진 남아시아와 그 너머의 불교 유적 네트워크의 일부였다. 그 회화 양식은 흔히 스리랑카 시기리야의 5세기 벽화, 중앙아시아와 중국 실크로드의 불교 석굴 벽화, 그리고 1949년 화재로 손상된 일본 호류지 금당의 7세기 벽화와 비교된다. 이런 유사성이 직접적인 영향 때문인지, 아시아 전역에 공통된 불교 양식 때문인지는 논쟁 중이다.
가까운 엘로라에서는 이후 몇 세기 동안 불교·힌두교·자이나교 석굴이 나란히 조성되며 석굴 건축이 이어졌고, 아잔타에서 처음 다듬어진 많은 요소가 그곳에서 더 발전했다.
근대에 아잔타는 인도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헤링엄 팀의 모사와 난달랄 보스 같은 학생들의 참여는 옛 전통에 뿌리를 둔 인도의 근대 미술을 찾으려 한 벵골파에 영감을 주었다. 많은 인도인에게 아잔타는 나라의 고전 유산을 상징하며, 그 그림은 교과서와 우표, 대중문화에 되풀이해 실린다. 한국의 석굴암과 같은 동아시아 석굴 사원을 이해할 때도 인도 석굴 전통의 출발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중급
보존의 과제
아잔타 벽화는 매우 약하다. 바위를 타고 스며드는 습기, 곤충과 미생물, 19~20세기에 바른 옛 니스와 복원 재료, 그리고 많은 방문객이 가져오는 먼지와 습기, 체온 때문에 손상된다. 빛도 안료를 해치기 때문에 석굴 안은 어둡게 유지되고 플래시 촬영은 금지된다.
인도 고고조사국은 때로 국제 협력기관과 함께 세척과 보강 작업을 해 왔으며, 가장 약한 석굴에는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을 제한했다. 스핑크를 비롯한 일부 학자는 최근의 세척 작업이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고 비판했고, 보존 전문가들은 해로운 옛 도막을 걷어 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느 벽화 유적처럼 관람과 보존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2012년 주 관광공사는 원본의 혼잡을 줄이기 위해 입구 근처 방문자 센터에 제1·2·16·17굴의 실물 크기 복제 석굴을 만들 계획을 발표했다. 고해상도 사진을 비롯한 디지털 기록은 이제 더 손상되기 전에 벽화를 기록하는 중요한 도구다.
심화
연대 논쟁
아잔타 2기의 연대는 남아시아 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문제 가운데 하나다. 반세기 넘게 이 유적을 연구한 월터 M. 스핑크는 ‘짧은 연대’를 제안했다. 후기 석굴은 거의 모두 하리셰나와 그의 조정 아래 2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대략 460~480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문틀과 기둥 모양 같은 건축 세부의 변화, 미완성 작업, 서둘러 계획을 바꾼 흔적을 근거로 해마다의 순서를 재구성하고, 이를 아슈마카의 위협과 하리셰나의 죽음 같은 정치적 사건과 연결했다.
카를 칸달라발라, 한스 바커 등 다른 학자들은 활동이 5세기 말이나 6세기까지 이어졌다는 더 긴 연대를 주장했고, 인도 고고조사국도 작업이 6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고 설명한다. 짧은 연대 비판자들은 이 설이 양식 추론과 작업 속도에 대한 가정에 크게 기대며 비문 증거가 제한적이라고 지적한다. 지지자들은 유적 안에 서로 맞물린 증거가 촘촘해 압축된 연대가 설득력 있다고 답한다.
이 논쟁이 중요한 까닭은 아잔타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다른 미술의 연대를 매기는 기준점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벽화가 한 세대가 20년 동안 만든 것이라면 비범한 후원의 한순간을, 한 세기에 걸친 것이라면 양식과 관행의 더 긴 변화를 보여 준다. 스핑크의 여러 권짜리 『아잔타: 역사와 전개(Ajanta: History and Development)』(브릴, 2005년부터)는 그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필수 자료다.
심화
해석: 후원, 종교, 장면 판별
그림이 무엇을 보여 주는지 가려내는 일 자체가 학문적 과제다. 많은 벽화가 손상되었고, 그 이야기들은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로 된 불교 문헌에서 왔는데 문헌끼리도 내용이 다르다. 디터 슐링로프 같은 연구자는 수십 년 동안 장면을 문헌과 대조해 옛 판별을 바로잡았다. ‘죽어 가는 공주’나 연화수보살이라 부르는 인물 같은 유명한 이미지조차 관례에 따른 판별이며, 다른 해석도 있다.
또 다른 문제는 후기 석굴의 종교적 성격이다. 불상, 관음(아발로키테슈바라) 같은 보살, 승원 안의 불당은 흔히 대승불교와 연결된다. 그러나 많은 학자는 아잔타의 승려들이 전통적인 계율을 지키면서 새로운 신앙 실천에 참여했을 수 있으며, ‘소승’과 ‘대승’이라는 이름표가 더 복잡한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고 경고한다.
끝으로 석굴은 종교 미술이 어떻게 재원을 마련했는지 보여 준다. 비문에는 자신과 가족의 공덕을 구한 왕실 대신, 지방 군주, 승려, 재가 기증자들이 나온다. 힌두교 황제의 조정이 인도 최고의 불교 미술 일부를 후원했다는 사실은, 5세기의 종교 정체성이 오늘날의 범주보다 덜 배타적이었으며 예술과 정치, 신앙이 긴밀히 얽혀 있었음을 일깨운다.
핵심 개념
- 석굴 건축
- 블록을 쌓지 않고 단단한 바위를 깎아 내어 만든 건축. 아잔타가 대표적인 예다.
- 차이티야와 비하라
- 두 가지 석굴 유형. 스투파를 모신 예배당과 승려들의 방이 딸린 승원이다.
- 상징에서 불상으로
- 초기 석굴은 스투파로 부처를 기리고, 후기 석굴은 불상으로 가득하다. 불교 실천의 변화를 보여 준다.
- 서사 회화
- 특히 본생담을 담은 길게 이어지는 벽화가 생생한 일상 장면으로 불교의 덕을 가르친다.
- 왕실과 재가의 후원
- 대신, 지방 군주, 승려, 평범한 기증자들이 공덕을 쌓으려고 석굴을 후원했다.
- 짧은 연대 대 긴 연대
- 후기 석굴이 약 20년 만에 만들어졌는지, 한 세기에 걸쳐 만들어졌는지를 두고 학자들이 논쟁한다.
- 보존 대 관람
- 벽화가 약해서, 지키려면 사람들이 찾아와 보는 방식을 제한해야 한다.
기록
- 약 기원전 150년 — 기원전 2세기나 1세기에 첫 석굴들(제9·10굴 등)의 굴착이 시작된다.
- 약 100년 — 1기가 끝나고 아잔타의 활동이 몇 세기 동안 멈춘다.
- 약 460년 — 하리셰나가 바카타카 황제가 되고, 곧 아잔타에서 새로운 굴착이 시작된다.
- 약 468년 — 스핑크에 따르면 아슈마카 왕국의 위협으로 작업 대부분이 중단된다.
- 약 477년 — 하리셰나가 죽는다. 스핑크에 따르면 곧 작업이 멈추고 많은 석굴이 미완성으로 남는다.
- 약 640년 — 현장이 흔히 아잔타로 보는 마하라슈트라의 한 사원을 묘사한다.
- 1819년 — 영국 장교 존 스미스가 호랑이 사냥 중 제10굴에 이른다.
- 1844년 — 로버트 길이 벽화 모사를 시작한다(1863년까지).
- 1866년 — 길의 모사화 대부분이 런던 크리스털 팰리스 화재로 사라진다.
- 1872년 — 존 그리피스와 학생들이 13년에 걸친 모사 사업을 시작한다.
- 1909년 — 난달랄 보스를 포함한 크리스티애나 헤링엄 팀이 모사를 시작한다(1911년까지).
- 1983년 — 아잔타 석굴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다.
용어 풀이
- 차이티야(차이티야그리하)
- 끝에 스투파를 모신 불교 예배당. 흔히 끝이 둥글고 천장이 궁륭 모양이다.
- 비하라
- 불교 승원. 대개 가운데 큰 방과 둘레의 작은 방들로 이루어진다.
- 스투파
- 본래 사리를 모신 둥근 지붕 모양의 기념물로, 부처의 열반을 나타낸다.
- 본생담(자타카)
- 부처의 전생 가운데 한 삶을 다룬 이야기.
- 보살
- 부처가 되는 길을 가는 존재. 본생담에서는 전생의 부처, 대승에서는 다른 이를 돕는 자비로운 존재다.
- 무불상 표현
- 신성한 인물을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상징으로 나타내는 방식.
- 템페라·세코
- 안료를 매제에 개어 마른 벽면에 그리는 기법. 아잔타 벽화가 이 방식이다.
- 바카타카 왕조
- 기원후 3~5세기 인도 중부와 데칸의 넓은 지역을 다스린 왕조.
- 반열반
- 부처의 마지막 입멸. 아잔타에서는 누운 모습(와불)으로 나타낸다.
- 석굴(암굴)
- 쌓아 지은 것이 아니라 자연 암반을 직접 깎아 만든 것.
묻고 답하기
아잔타 석굴은 자연 동굴이었나요?
아니에요. 사람들이 망치와 끌로 굴마다 위에서 아래로 단단한 바위를 파 내려가 만든 거예요.
그림은 얼마나 오래됐어요?
가장 오래된 조각은 기원전 2세기나 1세기 무렵의 것이고, 유명한 그림 대부분은 기원후 5세기에 그려졌어요.
석굴에는 누가 살았어요?
불교 스님들이 승원의 작은 돌방에서 자고, 큰 방에 모여 기도하고 공부했어요. 기증자들이 이들을 도왔어요.
석굴은 왜 잊혔나요?
5세기나 6세기 이후 사원이 쇠퇴하고 숲이 많은 입구를 덮었어요. 지역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바깥 세계는 1819년 이후에야 알게 되었어요.
왜 힌두교 황제의 조정이 불교 석굴을 후원했는가?
고대 인도에서는 종교 후원이 흔히 겹쳤다. 하리셰나는 힌두교도였지만 불교도인 대신과 봉신들이 석굴을 후원했고, 군주들도 여러 전통을 함께 후원하곤 했다.
후기 석굴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가?
월터 스핑크는 약 460~480년으로 보지만, 다른 학자들과 인도 고고조사국은 작업이 6세기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아직 논쟁 중이다.
아잔타 벽화는 진정한 프레스코인가?
이탈리아식 의미로는 아니다. 진흙 반죽과 석회로 만든 마른 면에 그렸으며, 흔히 템페라 또는 세코 기법이라 부른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Ajanta Caves. Wikipedia
- Ajanta Paintings. Wikipedia
- Harishena. Wikipedia
- Vakataka dynasty. Wikipedia
- Christiana Herringham. Wikipedia
- Ajanta Caves.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아잔타 석굴. 위키백과
- Walter M. Spink, Ajanta: History and Development (여러 권). Brill, 2005–2017
함께 보기
-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불교의 창시자. 갠지스 평원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쳤다. 생몰 연대는 학설이 나뉜다.
- 아소카칼링가 정복의 참상을 겪은 뒤 담마를 중시한다고 비문에 밝힌 마우리아 제국의 황제다.
- 석굴암경주 인근에 조성된 8세기 불교 석굴로, 화강암 본존불과 여러 조각상으로 알려져 있다.
- 보로부두르8~9세기 무렵 중부 자와에 세워진 대규모 불교 유적이다.
- 호류지전승에 따르면 607년에 창건된 일본의 불교 사찰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가운데 일부가 남아 있다.
- 칼리다사고전 인도 문학을 대표하는 산스크리트어 시인이자 극작가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