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세계의 동굴 절은 대부분 절벽을 파서 만들었어요. 그런데 석굴암은 달라요. 신라 사람들은 돌로 이글루를 짓듯이 바깥에서부터 동굴을 ‘지었어요’. 화강암 돌 수백 개를 깎아 둥근 방을 만들고 지붕은 둥근 돔으로 덮은 다음, 그 위에 흙을 덮어서 마치 산속 동굴처럼 보이게 했지요.
안에는 어른 두 명보다 더 큰 돌 부처님이 앉아 계세요. 얼굴은 평화롭고, 눈을 반쯤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아요. 오른손은 땅을 짚고 있어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을 때 땅을 짚어 ‘땅이여, 증인이 되어 다오’ 하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담은 손 모양이에요.
부처님 둘레의 벽에는 여러 도우미가 새겨져 있어요. 입구에는 근육이 울퉁불퉁한 힘센 수호신들과 갑옷 입은 네 명의 하늘 임금님(사천왕)이 지키고 있고, 안쪽에는 온화한 보살들과 얼굴이 저마다 다른 부처님의 제자 열 명이 서 있어요. 부처님 바로 뒤에는 얼굴이 열한 개인 관음보살이 있는데,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두루 살피기 위해서래요.
옛 책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라는 사람이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돔 꼭대기에 올릴 둥근 돌을 깎다가 그만 세 조각으로 갈라져 버렸는데, 밤사이 하늘의 신들이 내려와 다시 붙여 놓았대요.
석굴암은 옛 신라의 수도 경주 가까이, 토함산 높은 곳에 있어요. 부처님은 동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서,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 산에 올라 해돋이를 본답니다.
한눈에 보기
- 건립 시기
-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전통적으로 751년 창건 시작, 774년 이후 완공(740년대에 계획이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동쪽 중턱
- 창건 주체
- 전통적으로 신라 재상 김대성(?~774). 그의 사후 나라에서 완성
- 본래 이름
- 석불사(石佛寺)
- 구조
-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인공 석굴. 네모난 전실, 통로(비도), 돔 천장을 얹은 원형 주실(지름 약 6.6~6.8m)로 이루어지고 흙으로 덮음
- 조각
- 현재 38구. 항마촉지인을 한 본존불좌상이 중심
- 지정
- 국보(1962년 지정, 옛 지정번호 제24호).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의의
- 동아시아 불교 조각의 정점이자 신라 건축 공학과 기하학의 걸작
쉬움
석굴암은 어떤 곳인가
석굴암은 신라의 수도 경주 동쪽에 솟은 토함산의 동쪽 중턱에 자리한 불교 석굴 사원이다. ‘돌로 된 굴의 암자’라는 뜻이며, 『삼국유사』에 기록된 본래 이름은 ‘돌부처의 절’이라는 뜻의 석불사다. 같은 산 서쪽 기슭의 큰 절 불국사와 역사적으로, 또 행정적으로 짝을 이루며, 지금은 불국사에 딸린 석굴이다.
석굴암이 특별한 까닭은 인공 석굴이라는 데 있다.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의 석굴 사원은 대개 무른 암벽을 직접 파서 만들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산은 대부분 파내기 어려운 단단한 화강암이다. 그래서 신라의 장인들은 다듬은 화강암 부재와 판석으로 ‘굴’을 짓고, 돌로 돔 천장을 얹은 뒤 그 위에 흙을 덮어 산속 동굴처럼 보이게 했다.
안에는 거대한 본존불좌상이 앉아 있고, 그 둘레를 수호신, 천신, 보살, 제자의 부조가 엄격한 위계에 따라 에워싼다. 건축과 조각이 하나로 어우러진 이 공간은 아시아 불교 미술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석굴암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지금은 조각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벽 너머로만 내부를 볼 수 있다.
쉬움
석굴을 ‘읽는’ 법: 세속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
석굴은 동서로 뻗은 하나의 축을 따라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네모난 전실(前室)이 있는데, 지금은 1960년대에 세운 목조 건물로 덮여 있다. 이어 짧고 좁은 통로(비도)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반구형 돔 아래 지름 약 6.6~6.8m의 원형 주실(主室)에 이른다. 네모난 공간에서 둥근 공간으로 나아가는 이 흐름은 흔히 인간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으로 풀이된다. 동아시아 사상에서 네모는 땅, 원은 하늘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조각은 계위(階位)에 따라 배치되었다. 전실에는 인도 신화에서 온 불법의 수호신 팔부중(八部衆)이 양쪽 벽에 4구씩 서 있다. 통로 입구 양쪽에는 근육질의 금강역사(金剛力士) 2구가 팔을 치켜들고 악을 위협한다. 통로 안에는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밟은 사천왕(四天王)이 동서남북을 지킨다.
주실 벽에는 키 큰 화강암 판석 15매가 둘러서 있다. 입구 가까이에 범천과 제석천, 그다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이어 좌우 5구씩 석가모니의 십대제자가 저마다 다른 얼굴과 자세로 새겨져 있다. 본존불 바로 뒤, 가장 높은 자리에는 자비의 보살 십일면관음보살이 서 있다. 여러 얼굴은 모든 중생을 두루 살피고 구제하는 능력을 상징한다.
판석 위쪽 돔 둘레에는 작은 감실 10개가 있고, 그 가운데 8곳에 보살과 재가 신자의 대표인 유마거사의 좌상이 남아 있다. 돔 한가운데는 커다란 연꽃무늬 천개석(天蓋石)으로 마감했다. 모든 부조상이 본존불을 향하고 있어서, 방 전체가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부처에게로 모은다.
쉬움
본존불
본존불은 커다란 화강암 한 덩어리를 깎아 만들었으며, 석굴 안에서 앞뒤 사방 어디서 보아도 완전한 입체 조각(환조)은 이것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부조다. 높이 3m가 넘는 불상이 높이 약 1.6m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이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땅을 짚는다. 이것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마왕 마라를 물리치고 땅을 증인으로 불렀던 순간을 나타낸다.
본존불은 힘과 고요함의 조화로 사랑받는다. 넓은 어깨와 당당한 가슴, 부드럽게 다듬은 얼굴에 길게 휜 눈썹, 아래로 내리뜬 눈,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그리고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얇은 옷 주름이 특징이다. 여기에는 중국 성당(盛唐) 조각 양식의 영향이 보이지만, 신라 특유의 절제로 새롭게 해석되었다.
시각적 설계도 뛰어나다. 광배(光背)는 불상에 붙어 있지 않고, 연꽃잎을 새긴 둥근 돌이 주실 뒷벽 높은 곳에 따로 붙어 있다. 예배자가 입구에서 불상을 바라보면 이 두광이 머리를 정확히 감싸는 것처럼 보인다. 대좌도 주실 한가운데가 아니라 조금 뒤쪽에 놓여 있어, 입구에서 보면 오히려 불상이 한가운데 앉은 것처럼 느껴진다.
본존불은 동남동쪽, 곧 동해를 바라본다. 석굴의 축이 동짓날 해돋이 방향과 맞는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고, 동해 쪽 전망을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7세기 문무왕의 수중릉 대왕암과 연결하는 견해도 있다. 다만 이러한 방위 해석은 아직 논쟁 중이다.
중급
공학: 기하학, 화강암, 그리고 돌 돔
석굴암을 짓는 데는 고도의 수학적 설계가 필요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사 요네다 미요지가 시작하고 한국 건축사학자들이 이어 온 연구에 따르면, 평면은 당척(唐尺, 당나라에서 쓰던 약 30cm 길이의 자)을 바탕으로 한 모듈로 짜였고, 특히 본존불 대좌의 지름과 같은 12당척이 기본 단위다. 전실과 주실, 돔, 불상의 여러 치수가 1 : √2 같은 단순한 비례로 서로 연결된다고 본다. 이런 지식이 『구장산술(九章算術)』 같은 중국 수학서를 통해 들어왔다는 견해도 있다. 다만 일부 비례가 얼마나 정확하고 의도적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돔은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 고리 모양으로 휘어진 판석을 쌓아 올렸다. 판석 사이사이에는 ‘돌못’이라 불리는 긴 돌이 바퀴살처럼 바깥 흙더미 속으로 박혀 있다. 이 돌못을 누르는 흙의 무게가 돔을 제자리에 단단히 고정해 주는데, 다른 곳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운 기법이다. 돔 꼭대기는 수십 톤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연꽃무늬 천개석으로 닫았다.
『삼국유사』에는 이 천개석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돌을 다듬던 중 세 조각으로 갈라지자 김대성이 낙심해 잠이 들었는데, 밤사이 천신이 내려와 제자리에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천개석에는 금이 간 자국이 보이므로, 이 이야기가 건물의 실제 모습을 두고 생겨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석굴이 습기를 어떻게 다스렸는지는 큰 수수께끼다. 산속의 화강암 방은 결로(이슬 맺힘)가 생기기 쉽고, 이는 조각을 해친다. 널리 논의되는 가설은 바닥 밑으로 흐르던 샘물이 바닥을 벽보다 차갑게 유지해 습기가 조각이 아닌 바닥에 맺히게 했고, 흙 덮개와 석재 틈이 구조물을 ‘숨 쉬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수리 공사가 이 체계를 제대로 연구하기도 전에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원래의 작동 원리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중급
역사적 배경: 전성기의 신라
660년대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676년까지 당군을 한반도 대부분에서 몰아냈다. 이어지는 통일신라 시기는 경주를 중심으로 정치가 안정되고 문화가 꽃핀 때였다. 6세기에 공인된 불교는 왕실과 귀족의 아낌없는 후원을 받았다.
석굴암은 신라 문화의 절정기로 평가되는 경덕왕(재위 742~765) 때 세워졌다. 고려의 승려 일연이 13세기에 엮은 역사·설화집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대성은 751년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짓기 시작했고, 774년 그가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 사업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많은 학자는 이를 개인의 효행이라기보다 사실상 왕실과 국가의 사업, 곧 왕실의 원찰로 본다.
751년이라는 연대는 최근 다시 검토되고 있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1024년과 1038년의 중수 기록은 판독과 역주가 근래에 완료되었는데, 여기에는 경덕왕이 즉위한 742년에 불국사 두 탑의 공사가 시작되어 혜공왕 대에 끝났다고 적혀 있다. 이 문서들은 석굴암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불국사와 석굴암을 아우르는 사업이 751년보다 이른 시기에 계획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8세기 중엽은 아시아 전역이 활발히 교류하던 시대였다. 신라의 승려와 사신은 당나라를 오갔고 일부는 인도까지 갔다. 신라 승려 혜초는 720년대 인도 순례의 기록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일본에서는 752년 도다이지 대불이 개안했고, 중앙아시아에서는 751년 아바스 왕조와 당나라 군대가 탈라스 전투에서 맞붙었으며, 몇 해 뒤 안사의 난이 당나라를 뒤흔들었다. 석굴암은 이 국제적인 불교 세계를 반영하면서도 뚜렷이 신라다운 작품이다.
중급
종교적 의미: 이 땅에 구현한 불국토
신라 불교도들은 자신들의 땅이 부처가 머무는 불국토(佛國土)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불국사’라는 이름 자체가 ‘불국토의 절’이라는 뜻이다. 석굴암은 이 생각을 눈앞에 구체화한다. 주실에 들어서는 것은 제자와 보살에 둘러싸인 깨달은 부처 앞에 나아가는 일과 같다.
석굴암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친 화엄종(華嚴宗)과 관련이 깊다. 『삼국유사』는 완공 뒤 김대성이 의상의 제자인 화엄승 표훈을 석불사에 머물게 했다고 전한다. 또 토함산은 신라 오악 가운데 동악(東岳)으로 숭상받던 산이자, 왜구가 쳐들어올 수 있는 동해를 내려다보는 자리다. 이 때문에 석굴암은 불교 신앙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도 지녔다고 본다.
주실에는 본존불 둘레를 돌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오른쪽 어깨를 부처 쪽으로 향하고 시계 방향으로 도는 우요(右繞)는 불교 예배의 기본 의례다. 입구의 위엄 있는 수호신부터 중심 가까이의 제자와 보살까지 이어지는 조각의 위계는 불교의 우주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보여 준다.
석굴암은 지금도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에 딸린, 살아 있는 신앙의 공간이다. 많은 방문객에게 이곳은 예술 기념물이면서 동시에 기도하는 곳이다.
중급
그 뒤의 역사: 신라에서 조선까지
고려(918~1392)가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자 경주는 지방 도시가 되었고, 석굴암도 상대적으로 작은 지방 암자가 되었다. 『삼국유사』를 빼면 고려 시대 기록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조선 전기의 관찬 지리지 『동국여지승람』(1481)과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도 석굴암이나 석불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석굴암은 다시 문헌에 나타난다. 이채가 1670년 무렵 석굴암을 찾았고, 정시한은 1688년의 방문을 『산중일기』에 적었다. 그는 전실과 후실의 석상들이 바르고 가지런하며 완전한 모습이고 입구에 무지개 모양의 문이 있다고 썼다. 조선 문인들의 시문을 보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전국의 승려와 선비, 신도가 찾는 이름난 명승이었다.
『불국사고금창기』에는 1703년 승려 종황이 석굴암을 중창하고 굴 앞의 돌계단을 쌓았으며, 1718년에 다시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1960년대 공사 중 발견된 목제 현판의 「석굴암중수상동문」은 1891년 울산병사 조순상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중수를 기념한다. 이런 기록은 숭유억불의 조선 시대에도 석굴암이 알려지고 보살핌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이르면 석굴은 천장 일부가 무너져 흙이 쏟아져 들어올 만큼 퇴락한 상태였다.
중급
식민지의 ‘발견’, 수리, 그리고 논란
일본 측은 뒷날 석굴암이 1907~1909년 무렵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며, 그 공을 일본인 우편배달부나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돌렸다. 그러나 한국 연구자들은 이곳이 현지 주민에게 알려져 있었고 조선의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 ‘발견’ 이야기는 일본을 조선 문화유산의 구원자로 내세우는 구실을 했다. 1912년에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석굴암을 통째로 서울로 옮기라고 명령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실행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는 1913~1915년, 1917년, 1920~1923년 세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수리를 벌였다. 1차 수리에서는 석굴을 완전히 해체했다가 다시 쌓고, 당시 최첨단 재료로 여겨지던 콘크리트로 돔 바깥을 두껍게 감쌌다. 콘크리트는 석굴이 ‘숨 쉬는’ 것을 막아 습기를 가두었고, 2년도 지나지 않아 누수와 결로가 나타났다. 뒤이은 수리에서 배수 시설과 석회 모르타르, 아스팔트 방수층을 더했지만 이끼와 곰팡이, 얼룩이 번졌고, 한때는 증기로 조각을 세척하기까지 했다.
광복 뒤 1961~1964년 정부가 주도한 대규모 보수 공사는 습기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돔 둘레에 콘크리트 공사를 더하고, 전실 앞에 기와지붕을 얹은 목조 전실을 세웠으며, 이후 기계식 환기·공조 장치를 들여 온도와 습도를 조절했다. 1970년대에는 관람객과 내부를 나누는 유리벽이 설치되었다. 이런 조치로 상태는 안정되었지만, 석굴은 기계에 기대게 되었다.
1960년대 공사는 석굴암의 원형을 둘러싼 긴 논쟁도 불러일으켰다. 목조 전실은 근거가 부족하고 전망과 통풍을 막는다는 비판, 일직선으로 편 팔부중이 원래는 꺾인 형태로 배치되었다는 주장, 입구 위에 광창(光窓)이 있었다는 주장 등이 대표적이다. 1960년대 공사의 공식 보고서는 1967년에 간행되었다. 어떤 변경이든 사실상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는 또 다른 대규모 개입보다 세심한 관찰과 모니터링을 권한다.
중급
영향과 유산
석굴암 본존불은 한국 불교 조각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를 분명히 본뜬 항마촉지인 불좌상이 신라 하대와 고려 시대에 걸쳐 돌과 쇠로 널리 만들어졌다.
근현대에 석굴암은 한국 문화의 성취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교과서와 우표, 관광 이미지에 자주 등장하고, 토함산 해돋이는 대표적인 한국의 풍경이 되었다. 동시에 일본 학자들이 찬양하고 조선총독부가 수리한 기념물이라는 식민지 시기의 역사 때문에, 식민 지배 아래에서 문화유산이 어떻게 규정되었는지를 되돌아보는 초점이 되기도 했다.
1995년 불국사와 함께한 석굴암의 세계유산 등재는 같은 해 등재된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세계유산이었다.
심화
학술 논쟁과 열린 질문
어떤 부처인가? 항마촉지인은 여러 부처에게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본존불의 존명(尊名)을 두고 논쟁이 있었다. 초기에는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현판이 있었다는 전언과 부석사의 아미타불과 닮았다는 점을 들어 서방 극락의 아미타불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이어 화엄 교학을 근거로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로 보는 견해가 나왔다. 오늘날에는 깨달음의 순간의 석가모니불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일부 학자는 본존불의 자세, 방향, 신체 치수가 당나라 구법승 현장이 『대당서역기』에서 묘사한 인도 보드가야의 정각상과 일치한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석굴암은 불교 최고의 성지를 신라 땅에 재현한 셈이 된다.
언제 지었나? 751년이라는 전통적 연대는 사건보다 약 500년 뒤에 쓰인 『삼국유사』에서 나왔다. 석가탑 발견 문서는 불국사의 시작을 742년으로 끌어올리며, 석굴암의 계획도 740년대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김대성의 역할이 개인 후원자였는지, 왕실 사업을 맡은 관리였는지도 논쟁거리다.
원형은 어떤 모습이었나? 목조 전실, 팔부중의 배치, 광창의 존재, 원래의 통풍·방습 체계에 관한 질문은 모두 제한된 증거에 기댄다. 17~18세기의 몇몇 문헌과 그림, 해체 이전에 찍은 20세기 초 사진, 남아 있는 석재, 공학적 분석이 그것이다. 한때 목조 전실의 근거로 쓰인 정선의 1733년 그림 ‘골굴석굴’은 사실 골굴암의 석굴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기하학은 얼마나 정밀한가? √2 비례설과 모듈설은 여전히 영향력이 크지만, 최근에는 동아시아 전통의 직각삼각형 원리인 구고법(勾股法) 같은 다른 설계 방법을 제시하는 연구도 있다. 손으로 쌓았고 20세기에 다시 쌓은 구조물의 치수에서 정확한 비례를 읽어 내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심화
증거와 방법
문헌 자료. 핵심 문헌은 일연(1206~1289)이 엮은 『삼국유사』, 특히 권5 「대성효이세부모」 조의 김대성 이야기다. 역사와 불교 설화가 섞여 있고 사건보다 한참 뒤에 쓰였으므로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1024년과 1038년의 석가탑 발견 문서는 시기가 훨씬 가깝고 불국사 연대에 관해서는 더 믿을 만하다. 조선 시대의 기행문, 시문, 사찰 기록은 후대의 모습을 알려 준다.
물적 증거. 가장 풍부한 자료는 구조물 자체다. 치수 실측, 석재의 치석 흔적과 결구, 연대를 아는 당·신라 작품과의 양식 비교, 수리 중 수습된 파편(예컨대 1960년대에 땅속에서 발견되어 복원된, 다문천왕이 든 작은 탑의 조각) 등이 있다. 1913~1915년 해체 이전과 도중에 찍은 사진과 도면은 원래 부분과 재구성된 부분을 가려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료다.
식민지 시기의 연구. 초기 연구의 상당 부분은 일본인 학자와 관리가 수행했다. 귀중한 자료를 담고 있지만 식민지적 의도도 반영되어 있다. 강희정의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 일제강점기 석굴암론』(2012) 같은 최근 한국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이 기념물이 어떻게 해석되고 소개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보존 과학. 온도, 습도, 미생물, 구조 변위의 상시 계측과 지진이 석굴에 미칠 영향에 관한 연구가 이제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석굴암이 주는 방법론적 교훈은 복원 결정 자체가 증거의 일부가 된다는 점이다. 미래의 연구자가 어떤 요소가 8세기의 것이고 어떤 요소가 20세기의 것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핵심 개념
- 인공 석굴
- 암벽을 파지 않고 다듬은 돌로 짓고 흙을 덮어 만든 석굴 사원. 석굴암이 그 대표다.
- 불국토
- 신라 땅이 곧 부처가 머무는 신성한 땅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불국사와 석굴암에 구현되었다.
- 항마촉지인
-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으며 땅을 증인으로 부른 순간을 나타내는 손 모양. 본존불이 이 수인을 하고 있다.
- 계위에 따른 배치
- 입구의 수호신부터 부처 둘레의 보살과 제자까지, 조각이 불교적 위계에 따라 놓였다.
- 모듈 기하학
- 당척을 바탕으로 한 단위와 비례로 설계되어 고도의 수학적 계획을 보여 준다.
- 호국불교
- 불교 신앙과 기념물이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 동해를 바라보는 석굴암의 입지가 흔히 이와 연결된다.
- 역사로서의 복원
- 20세기 수리가 석굴암을 크게 바꾸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기념물을 이해하는 데 필수다.
기록
- 676년 — 신라가 당군을 몰아내고 한반도 대부분을 통일.
- 742년 — 경덕왕 즉위. 석가탑 발견 문서에 따르면 불국사 탑 공사가 이해에 시작됨.
- 751년 —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 창건을 시작.
- 774년 — 김대성 사망. 신라 조정이 공사를 마무리.
- 약 1281년 — 일연이 석굴암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 『삼국유사』를 편찬.
- 1688년 — 정시한이 석굴암을 찾아 『산중일기』에 그 모습을 기록.
- 1703년 — 승려 종황이 석굴암을 중창하고 돌계단을 쌓음.
- 1891년 — 울산병사 조순상의 후원으로 중수.
- 1913년 — 조선총독부가 석굴을 해체·재조립하는 1차 수리 착수(1915년까지), 돔을 콘크리트로 감쌈.
- 1961년 — 정부 주도의 대규모 보수 공사 시작(1964년까지). 목조 전실을 세우고 뒤에 기계식 공조 장치 설치.
- 1962년 — 국보로 지정.
- 1995년 — 석굴암과 불국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용어 풀이
- 통일신라
-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한반도 대부분을 다스린 시기(668~935). 남북국시대의 남국.
- 석굴
- 자연 또는 인공의 굴. 흔히 불교 사원으로 쓰였다.
- 주실·전실
- 석굴암에서 본존불이 있는 둥근 방(주실)과 그 앞의 네모난 방(전실).
- 수인(手印)
- 불상이나 보살상의 손 모양으로, 특정한 뜻을 나타낸다.
- 보살
- 대승 불교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면서 다른 이들의 깨달음을 돕는 존재.
- 십일면관음보살
- 얼굴이 열한 개인 자비의 보살. 석굴암 본존불 바로 뒤에 있다.
- 사천왕
- 갑옷을 입고 불교 세계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수호신.
- 부조(浮彫)
- 평평한 바탕에서 형상이 도드라지게 새긴 조각.
- 화엄종
- 『화엄경』을 근본으로 하는 동아시아 불교 종파. 의상이 신라에 널리 폈다.
- 천개석(天蓋石)
- 석굴암 돔 꼭대기를 덮은 커다란 연꽃무늬 돌.
- 당척(唐尺)
- 당나라에서 쓰던 약 30cm 길이의 자. 석굴암 설계의 기본 단위로 여겨진다.
묻고 답하기
석굴암은 진짜 동굴인가요?
아니에요. 화강암 돌을 쌓아 만들고 흙을 덮어서 산속 동굴처럼 보이게 한 인공 석굴이에요.
석굴암은 몇 년 됐나요?
약 1,250년 됐어요. 8세기 중엽에 지어졌는데, 전통적으로 751년에 짓기 시작해 774년 이후에 완성했다고 해요.
석굴암은 누가 지었나요?
전통적으로 신라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고 전하며, 774년 그가 죽은 뒤 나라에서 완성했습니다. 규모로 보아 사실상 왕실·국가 사업이었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본존불은 어떤 부처인가요?
오늘날에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석가모니불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아미타불설, 비로자나불설도 제기된 바 있습니다.
왜 안에 들어갈 수 없나요?
수많은 관람객의 입김과 체온, 습기가 조각을 해치기 때문에 1970년대부터 유리벽을 설치하고 공조 장치로 온습도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수리는 무엇이 문제였나요?
1913~1915년 석굴을 해체해 다시 쌓으면서 돔을 콘크리트로 감쌌는데, 이것이 습기를 가두어 누수, 결로, 얼룩을 일으켰습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어떤 관계인가요?
같은 산에 짝을 이루어 세워졌고 전통적으로 모두 김대성이 창건했다고 전합니다. 1995년 함께 세계유산이 되었으며, 석굴암은 불국사에 딸려 있습니다.
본존불은 동짓날 해돋이를 바라보나요?
석굴의 축이 동해 위로 떠오르는 동짓날 해돋이 방향과 맞는다는 연구가 있지만, 이를 비롯한 여러 방위 해석은 아직 논쟁 중입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강희정, 경주 석굴암 석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24
- 국보 경주 석굴암 석굴.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석굴암. 위키백과
- 불국사. 위키백과
- Seokguram. Wikipedia
- Samguk yusa. Wikipedia
- Kim Daeseong. Wikipedia
- 강희정,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 일제강점기 석굴암론.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2
-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67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