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칼리다사는 아주 오래전, 아마 서기 400년 무렵 인도에 살았다. 그는 인도의 옛 시와 종교, 학문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글을 썼다. 유럽의 라틴어 같은 언어다. 그의 삶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그가 남긴 시와 희곡은 1,500년이 넘도록 사랑받아 왔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희곡 『샤쿤탈라』다. 숲으로 사냥을 나간 왕이 사슴과 꽃에 둘러싸인 수행처에서 자란 소녀 샤쿤탈라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왕은 샤쿤탈라에게 반지를 준다. 그런데 성미 고약한 성자가 저주를 내린다. 왕이 그 반지를 다시 볼 때까지 그녀를 잊어버리리라는 저주다. 게다가 샤쿤탈라는 강물에 반지를 잃어버린다! 마침내 한 어부가 물고기 배 속에서 반지를 찾아내고, 왕은 모든 것을 기억해 내며, 가족은 행복하게 다시 만난다.
또 다른 시 『구름의 사자(메가두타)』에서는 집에서 멀리 쫓겨난 외로운 정령이 비구름에게 아내에게 사랑의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구름이 북쪽으로 가는 길에 지나갈 산과 강, 도시를 하나하나 이야기해 준다. 이 시를 읽으면 구름을 타고 인도를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칼리다사는 무엇을 무엇에 빗대는 ‘비유’를 특히 잘했다. 뜻밖이면서도 아름답게 말이다. 인도에는 ‘비유라면 칼리다사’라는 옛말이 있을 정도다.
그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생겨났다. 어떤 전설에서는 그가 원래 어리석은 젊은이였는데, 속임수로 똑똑한 공주와 결혼한 뒤 여신 칼리에게 기도하고 나서야 위대한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칼리다사’라는 이름은 ‘칼리 여신의 종’이라는 뜻이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전설로 보지만, 사람들이 시 뒤에 숨은 사람을 얼마나 궁금해했는지 보여 준다.
한눈에 보기
- 활동 시기
- 불확실. 대부분의 학자는 4세기 말~5세기, 굽타 시대로 본다
- 장소
- 전통적으로 중부 인도의 우자인과 연결된다. 카슈미르, 벵골, 비디샤 등도 거론된다
- 언어
- 고전 산스크리트어(희곡의 많은 인물은 프라크리트어로 말한다)
- 희곡
- 『샤쿤탈라(아비즈냐나샤쿤탈람)』, 『비크라모르바시얌』, 『말라비카그니미트람』
- 시
- 궁정 서사시 『라구밤샤(라구 왕조의 계보)』와 『쿠마라삼바바』, 서정시 『메가두타(구름의 사자)』, 『리투삼하라』(저자 논란)
- 특징
- 세련된 언어, 생생한 자연 묘사, 뛰어난 비유, 감정의 ‘맛(라사)’을 살린 미학
- 가장 이른 증거
- 634년 아이홀레 비문에 이름난 시인으로 나온다. 473년 만다소르 비문에 그의 시구를 닮은 표현이 보인다
- 영향
- 후대 산스크리트 시인의 본보기. 1789년 영어로 번역된 『샤쿤탈라』는 괴테와 유럽 낭만주의에 영감을 주었다
쉬움
칼리다사는 누구인가
칼리다사는 고전 산스크리트 문학에서 가장 이름 높은 시인이자 극작가다. 보통 희곡 세 편, 긴 서사시 두 편, 유명한 서정시 한 편이 그의 작품으로 인정되며, 이 작품들은 천 년 넘게 인도 작가들에게 완벽한 문체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름은 힌두교 여신 칼리의 ‘종’이라는 뜻이어서 그나 그의 집안이 시바와 그 배우자 여신을 섬겼음을 짐작하게 하지만, 작품에서는 다른 신들도 두루 공경한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스스로에 관해 거의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고, 당대의 믿을 만한 전기도 전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자는 굽타 왕조가 북인도의 넓은 지역을 다스리던 4세기 말이나 5세기에 살았다고 본다. 우자인이라는 도시를 애정 어린 필치로 묘사했기 때문에 많은 이가 그를 이 도시와 연결한다. 우자인은 중요한 왕도이자 문화 중심지였다.
칼리다사는 남아시아에서 학문과 종교, 궁정 문학의 고전어였던 산스크리트어로 글을 썼다. 그의 희곡에서 왕과 신, 브라만 남성은 산스크리트어로 말하고, 여성과 하인을 비롯한 많은 인물은 당시 입말이던 여러 프라크리트어로 말한다. 이런 언어의 섞임은 그가 작품을 쓴 왕실 궁정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칼리다사의 작품은 지금도 인도 안팎에서 읽히고, 무대에 오르고, 가르쳐진다. 희곡은 산스크리트어 원어와 번역으로 공연되고, 시는 음악과 무용으로 만들어지며, 인도의 예술상 가운데 하나인 ‘칼리다스 삼만(Kalidas Samman)’도 그의 이름을 땄다.
쉬움
그의 삶에 얽힌 전설
알려진 것이 워낙 적다 보니 칼리다사를 둘러싼 전설이 많이 생겨났다. 가장 유명한 전설에 따르면 그는 배우지 못한 순박한 젊은이였다. 한 오만하고 학식 높은 공주가 토론에서 자기를 이기지 못하는 구혼자는 모두 물리쳤다. 공주에게 앙심을 품은 이들이 어리석은 칼리다사의 말 없는 손짓을 깊은 철학인 양 꾸며 공주를 속여 결혼시켰다. 진실을 안 공주가 그를 내치자, 부끄러움에 빠진 칼리다사는 여신 칼리에게 기도했고 여신은 그에게 시의 재능을 내려 주었다.
또 다른 전승은 그를 우자인의 비크라마디티야 왕 궁정에 있던 이름난 학자와 예술가 아홉 명, 곧 ‘아홉 보석(나바라트나)’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그러나 이 목록은 훨씬 후대 문헌의 한 시구에서 나온 것이고,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서로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전설로 본다. 그래도 이 전설에는 실제 가능성이 담겨 있다. 많은 학자는 칼리다사가 ‘비크라마디티야’라는 칭호를 쓴 굽타 왕 찬드라굽타 2세의 궁정과 관련이 있었다고 본다.
지역마다 전하는 다른 이야기들은 그의 여행이나 스리랑카에서의 죽음, 다른 시인들과의 경쟁 따위를 그린다. 이런 이야기는 역사 속 칼리다사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이상적인 시인을 어떻게 상상했는지를 알려 준다.
쉬움
『샤쿤탈라』: 잃어버린 사랑을 알아보다
칼리다사의 대표작은 7막 희곡 『아비즈냐나샤쿤탈람』, 곧 ‘샤쿤탈라를 알아봄’이다. 숲에서 사냥하던 두샨타 왕은 성자 칸바의 수행처에 들어갔다가 칸바의 양녀 샤쿤탈라를 만난다. 샤쿤탈라는 천상의 요정과 왕족 출신 성자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서로의 뜻만으로 맺어지는 ‘간다르바식’ 혼인을 몰래 올린다. 왕은 약속의 표시로 자신의 인장 반지를 남기고 도성으로 돌아간다.
왕 생각에 빠져 있던 샤쿤탈라는 성미 급한 성자 두르바사스를 맞이하지 못하고, 성자는 그녀를 저주한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그녀를 잊으리라는 것이다. 친구들이 애원하자 성자는 알아볼 수 있는 징표를 보면 저주가 풀린다고 덧붙인다. 아이를 가진 샤쿤탈라는 궁으로 가는 길에 성스러운 연못에서 반지를 잃어버린다. 왕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샤쿤탈라는 천상의 어머니에게 이끌려 사라진다.
훗날 한 어부가 물고기 배 속에서 반지를 찾아낸다. 반지를 보는 순간 왕은 기억을 되찾고 깊은 슬픔에 빠진다. 마지막 막에서 왕은 인드라 신을 도와 악마와 싸운 뒤 천상의 수행처에서 샤쿤탈라와 아들 바라타를 만나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된다. 바라타는 위대한 왕가의 조상으로 기억되며, 인도의 공식 국명 ‘바라트’도 전통적으로 그의 이름과 연결된다.
이 이야기는 『마하바라타』에서 왔지만 칼리다사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서사시에서 왕은 샤쿤탈라를 똑똑히 기억하면서도 추문이 두려워 모른 척한다. 희곡에서는 저주와 잃어버린 반지 덕분에 왕이 허물을 벗고, 이야기는 기억과 사랑, 상실에 관한 깊은 성찰이 된다. 샤쿤탈라가 수행처를 떠나고 풀과 짐승과 양아버지가 이별을 슬퍼하는 4막의 작별 장면은 산스크리트 문학에서 가장 사랑받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중급
『구름의 사자』: 인도를 가로지르는 여행
『메가두타(구름의 사자)』는 사본 전통에 따라 약 110~120연으로 이루어진 서정시로, 전체가 느리고 장중한 만다크란타 운율로 되어 있다. 재물의 신 쿠베라를 섬기는 반신적 존재 약샤가 임무를 게을리한 벌로 1년 동안 중부 인도의 라마기리 언덕으로 쫓겨난다. 우기가 시작될 무렵 히말라야의 도시 알라카에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던 그는 지나가는 구름에게 아내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시의 전반부는 구름이 북쪽으로 가는 길을 그린다. 산과 강, 숲과 도시가 이어지며, 특히 우자인과 그곳의 시바 마하칼라 사원을 길고 다정하게 묘사한다. 모든 장소가 연인의 눈으로 그려져 풍경 자체가 그리움으로 가득한 듯하다. 후반부는 신비로운 도시 알라카와 약샤의 집, 그리움에 창백하고 여윈 아내를 묘사한 뒤, 유배가 끝나면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담은 편지 내용을 전한다.
『메가두타』는 연인이 구름이나 새, 바람 같은 전령을 통해 소식을 보내는 ‘산데샤 카비야(전령시)’라는 장르를 하나 만들어 냈다. 산스크리트어와 남아시아의 여러 언어로 수많은 시인이 이를 본떴다. 1813년 호러스 헤이먼 윌슨이 영어로 옮긴 뒤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구스타브 홀스트는 이 시를 바탕으로 합창곡을 지었다.
중급
궁정 서사시: 『라구밤샤』와 『쿠마라삼바바』
칼리다사는 여러 장으로 된 긴 궁정 서사시인 ‘마하카비야’도 두 편 지었다. 후대 산스크리트 비평가들은 이 장르를 시의 최고 형식으로 여겼다. 『라구밤샤(라구 왕조의 계보)』는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가 속한 태양 왕조의 역사를 노래한다. 19장에 걸쳐 성스러운 암소를 극진히 섬긴 딜리파 왕에서 시작해 라구의 세계 정복과 라마의 이야기를 거쳐, 방탕한 마지막 왕 아그니바르나의 치세로 끝난다.
『라구밤샤』는 왕권을 찬양하는 동시에 성찰하는 작품이다. 좋은 왕은 백성을 지키고 질서를 세우며 너그럽게 베풀지만, 마지막의 몰락은 의무를 저버린 통치자의 위험을 보여 준다. 일부 학자는 라구의 세계 정복을 굽타 왕들의 원정을 시로 옮긴 것으로 읽는다.
『쿠마라삼바바(쿠마라의 탄생)』는 히말라야산의 딸인 여신 파르바티가 스스로 고행하여 금욕하는 신 시바의 사랑을 얻고, 그리하여 악마를 무찌를 아들 쿠마라(스칸다)가 태어나는 이야기다. 히말라야와 파르바티의 아름다움과 고행, 시바의 제3의 눈에 사랑의 신 카마가 불타 재가 되는 장면이 유명하다. 대부분의 학자는 칼리다사가 처음 8장만 썼다고 본다. 쿠마라의 탄생과 승리를 다루는 뒷부분은 대개 다른 사람이 덧붙인 것으로 여긴다.
8장에서 칼리다사는 시바와 파르바티의 사랑을 거리낌 없이 관능적으로 묘사한다. 후대 비평가들은 우주의 신성한 부모를 이렇게 그려도 되는지를 두고 논쟁했는데, 이 논쟁 자체가 그의 작품이 얼마나 높이 평가되고 꼼꼼히 읽혔는지를 보여 준다.
중급
다른 희곡들과 계절의 시
『말라비카그니미트람(말라비카와 아그니미트라)』은 보통 칼리다사의 첫 희곡으로 본다. 기원전 2세기 슝가 왕조의 실존 인물인 아그니미트라 왕이 왕비를 시중드는 무희 말라비카와 사랑에 빠지는데, 알고 보니 그녀가 공주였다는 가벼운 궁정 희극이다. 서막에서 옛 대가들이 아무리 유명해도 새 시인의 작품을 공정하게 봐 달라고 관객에게 청하는 대목이 유명하다.
『비크라모르바시얌(용맹으로 얻은 우르바시)』은 멀리 『리그베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이야기, 곧 인간 왕 푸루라바스와 천상의 요정 우르바시의 사랑을 다시 쓴 작품이다. 우르바시를 잃고 넋이 나간 왕이 숲을 헤매며 풀과 짐승에게 그녀의 행방을 묻는 4막에는 프라크리트어 노래가 들어 있어, 일찍이 서정적인 극의 본보기로 꼽혀 왔다.
『리투삼하라(계절의 화환)』는 불타는 여름에서 우기를 거쳐 봄에 이르는 인도의 여섯 계절을 사랑과 엮어 노래한다. 전통적으로 칼리다사가 젊은 시절에 쓴 작품이라 하지만, 다른 시보다 문체가 단순하고 초기 비평가들이 거의 인용하지 않아 그의 작품인지 의심하는 학자가 많다.
운율이나 점성술 안내서를 비롯한 다른 많은 작품도 후대에 칼리다사의 이름을 달게 되었다. 그의 이름이 품질 보증의 표시처럼 쓰였다는 뜻이다. 학자들은 대개 위에서 말한 예닐곱 편만 그의 작품으로 인정한다.
중급
시대 배경: 굽타 시대와 산스크리트 궁정 문화
통설이 맞다면 칼리다사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북인도의 넓은 지역을 다스린 굽타 왕조 시대에 살았다. ‘비크라마디티야’라는 칭호를 쓰고 우자인을 영토에 넣은 찬드라굽타 2세(재위 약 380~415)가 그의 후원자로 가장 자주 거론되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굽타 시대는 흔히 인도 문화의 ‘고전 시대’라 불리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런 이름이 다른 시대와 지역의 성취를 가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시기에는 산스크리트 문학과 힌두교 사원 건축·조각, 수학과 천문학, 불교 학문의 중심지가 꽃피었다. 5세기에 굽타와 가까운 왕조 아래 그려진 아잔타 석굴 벽화 일부는 칼리다사와 마찬가지로 우아함과 사랑이 넘치는 궁정 세계를 보여 준다.
산스크리트어는 이미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곳곳의 통치자들이 비문부터 궁정 시까지 두루 쓰는 정치적 권위의 언어가 되어 있었다. 칼리다사 같은 궁정 시인은 문법과 운율, 수사학, 서사시, 종교 지식, 사랑의 기술, 통치학에 두루 통달해야 했다. 그들의 작품은 미묘한 암시와 감정을 알아듣는 감식가, 곧 ‘사흐리다야(마음이 통하는 이)’ 앞에서 공연되고 낭송되었다.
칼리다사의 작품에는 그 시대의 종교 세계가 담겨 있다. 시바와 비슈누에 대한 신앙, 브라만 성자와 수행처에 대한 존경, 업(카르마)과 삶의 단계마다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또 왕을 도덕 질서(다르마)의 수호자로 이상화하는데, 이는 왕실의 후원과 잘 맞아떨어지는 관점이었다.
중급
문체와 사상: 라사, 비유, 자연
인도 미학은 극과 시의 목표를 ‘라사’, 글자 그대로 ‘맛’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이나 용맹, 연민 같은 감정 경험을 감수성 있는 관객이 예술을 통해 음미하는 것을 말한다. 칼리다사의 작품은 연애의 정서인 ‘슈링가라 라사’의 고전적 본보기로 꼽히며, 함께하는 사랑과 헤어진 사랑이라는 두 모습을 모두 보여 준다. 샤쿤탈라가 버림받는 장면이나 약샤의 유배처럼 이별의 정서가 그의 시에 깊은 울림을 준다.
칼리다사는 무엇보다 비유(우파마)로 이름났다. ‘우파마 칼리다사스야’, 곧 ‘비유라면 칼리다사’라는 옛말이 있다. 그는 자연과 신화, 일상에서 비유를 끌어오며, 그 비유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정확하다는 찬사를 받는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등장인물이다. 풀과 짐승, 강과 구름이 사람의 감정을 함께 느낀다. 샤쿤탈라가 떠날 때 수행처의 덩굴이 눈물을 흘리는 듯하고, 구름은 친구이자 전령이 된다. 사람과 자연이 서로 통하는 이 감각, 그리고 계절과 풍경과 동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은 오늘날 독자들이 여전히 그를 신선하게 느끼는 까닭이다.
9세기의 아난다바르다나 같은 후대 산스크리트 문학 이론가들은 시의 가장 깊은 뜻은 간접적으로 전해진다는 ‘드바니(암시)’ 이론을 설명하면서 칼리다사에게서 많은 예를 가져왔다. 그의 작품은 산스크리트 문학의 창작뿐 아니라 이론까지 빚어낸 셈이다.
중급
인도와 세계에 끼친 영향
남아시아에서 칼리다사는 탁월함의 기준이 되었다. 후대 시인들은 그의 서사시와 전령시를 본떴고, 비평가들은 그의 시구를 모범으로 인용했으며, 주석가들은 그의 작품에 학문적 해설을 붙였다. 가장 유명한 주석가 말리나타는 아마 14~15세기 남인도 사람으로, 그의 주석은 지금도 원문과 함께 인쇄된다.
1789년 캘커타에서 일하던 영국인 판사이자 학자 윌리엄 존스가 『샤쿤탈라』를 영어로 번역해 펴냈고, 1791년 이를 바탕으로 게오르크 포르스터의 독일어판이 나왔다. 이 희곡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이 작품을 찬미하는 경구시를 썼고, 그의 『파우스트』 서막이 칼리다사 희곡의 서막을 본떴다는 말도 자주 나온다. 한 세기 안에 유럽 여러 언어로 수십 종의 번역이 나왔고, 『샤쿤탈라』는 유럽 낭만주의가 그린 인도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근대 인도에서 칼리다사는 여러 모습으로 읽혀 왔다. 국민 고전, 자연의 시인, 현대 연극의 본보기, 그리고 비판적 논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그에 관한 에세이와 시를 썼고, 영화감독과 라자 라비 바르마 같은 화가, 무용가와 연출가들이 그의 작품을 각색했다. 우자인에서는 해마다 칼리다사 축제가 열리며, 그의 작품은 학교와 대학 교과 과정에 들어 있다.
서양에서는 그를 ‘인도의 셰익스피어’라고 부르며 칭송하기도 했다. 이 비유는 새로운 독자에게 그를 소개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의 예술은 고유한 목표와 규칙을 지닌 다른 연극·시 전통에 속하므로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
심화
학계의 논쟁: 칼리다사는 언제 살았나
칼리다사의 연대는 2세기가 넘도록 논쟁거리였다. 가장 확실한 한계선은 다음과 같다. 희곡 『말라비카그니미트람』의 주인공이 기원전 2세기 슝가 왕조의 아그니미트라 왕이므로 칼리다사는 그보다 이를 수 없다. 반대쪽으로는 634년에 새긴 찰루키아 왕조 풀라케신 2세의 아이홀레 비문이 칼리다사를 시인 바라비와 함께 시적 명성의 본보기로 들고 있으므로, 그는 그 이전 사람이어야 한다.
인도의 오랜 전통은 그를 기원전 57년에 시작하는 비크라마 기원과 관련된다는 우자인의 비크라마디티야 왕 궁정에 두었다. 대부분의 현대 학자는 이 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무렵 그런 왕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칼리다사의 언어와 문체, 문화적 배경이 굽타 시대에 더 잘 맞기 때문이다.
굽타 시대설은 몇 가지 논거에 기댄다. 『비크라모르바시얌』이라는 제목이 찬드라굽타 2세의 칭호 ‘비크라마디티야’를 암시할 수 있고, 『쿠마라삼바바(쿠마라의 탄생)』는 그의 후계자 쿠마라굽타와 연결되기도 한다. 『라구밤샤』에서 라구가 정복한 민족 가운데 ‘후나’가 나오는데, 일부 학자는 이를 5세기에 인도 변경에 이른 훈족을 가리킨다고 본다. 473년의 만다소르 산스크리트 비문에는 칼리다사의 시구를 닮은 표현이 보인다. 어느 논거도 그것만으로는 결정적이지 않지만, 이를 모두 합쳐 대부분의 학자는 그의 활동 시기를 약 350~475년 사이로 본다.
V. V. 미라시 같은 학자들은 작품 속 지리를 분석해 그의 고향을 우자인이나 비다르바 지역으로 보았고, 히말라야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근거로 카슈미르를 내세운 학자들도 있다. 전문가들의 의견이 갈린다는 사실은 시에서 전기를 읽어 내는 일의 한계를 보여 준다.
심화
증거와 방법: 사본, 이본, 주석
칼리다사 당대의 사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작품은 여러 세기 동안 여러 문자로 야자잎과 자작나무 껍질에 손으로 베껴졌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도 작가보다 수백 년 뒤의 것이다. 그래서 지역별 판본 사이에 차이가 크다. 『샤쿤탈라』는 벵골본, 데바나가리본(북부·서부), 카슈미르본, 남인도본 등 여러 이본(recension)으로 전하며, 길이와 문구가 서로 다르다. 어느 것이 원본에 가장 가까운지는 19세기부터 논쟁되어 왔다.
편집자들은 사본을 비교하고, 이문(異文)을 기록하고, 주석과 선집의 증거를 활용하는 원전 비평의 방법으로 본문을 재구성해 왔다. 주석 자체도 귀중한 증거다. 특정 시대와 지역에서 유통되던 본문과 해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시학서와 선집에 인용된 칼리다사의 시구는 어떤 대목이 가장 유명했는지 알려 준다.
같은 방법으로 저자 문제도 판단한다. 『쿠마라삼바바』의 후대 추가 장, 『리투삼하라』에 대한 의심, 그의 이름을 빌린 수많은 위작은 문체와 운율, 어휘, 그리고 초기 비평가들이 인용했는지 여부로 판별한다.
현대 학계는 칼리다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묻는다. 바버라 스톨러 밀러 같은 번역가·비평가는 유럽의 잣대로 재기보다 인도 전통 안에서 그의 희곡이 지닌 연극적·미학적 논리를 강조했다. 다른 연구자들은 그의 작품에 나타난 젠더와 권력, 자연의 문제, 예컨대 샤쿤탈라의 목소리가 궁정의 여성상에 따라 어떻게 빚어졌는지를 살핀다. 이런 논의 덕분에 칼리다사는 굳어진 기념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연구 대상으로 남아 있다.
핵심 개념
- 카비야(kāvya)
- 다듬어진 언어와 수사, 깊은 감정을 중시하는 고전 산스크리트 문학. 칼리다사는 그 최고의 본보기다.
- 라사(rasa)
- 극과 시가 감수성 있는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려는 감정의 ‘맛’. 칼리다사는 사랑의 정서에서 특히 뛰어나다.
- 이별의 사랑
- 『샤쿤탈라』와 『메가두타』에서처럼 헤어진 연인의 그리움이 그의 시의 중심에 있다.
- 비유(우파마)
- 비유는 칼리다사의 상징과도 같다. ‘비유라면 칼리다사’라는 옛말이 있다.
- 자연과의 교감
- 풀과 짐승, 강과 구름이 사람의 감정을 나누고 이야기에 참여한다.
- 이상적 왕권
- 그의 작품은 왕을 다르마의 수호자로 그리며, 궁정의 이상을 반영하고 또 빚어냈다.
- 기억과 알아봄
- 『샤쿤탈라』는 잊음과 기억함을 축으로 삼아, 알아보는 순간을 도덕적·정서적 진실의 순간으로 만든다.
기록
- 약 기원전 150년 — 슝가 왕조의 아그니미트라 왕 치세. 훗날 『말라비카그니미트람』의 주인공이 된다.
- 약 380년 — 찬드라굽타 2세(비크라마디티야)가 즉위한다. 칼리다사의 후원자로 자주 거론된다.
- 약 400년 — 칼리다사가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시기(불확실. 대부분 약 350~475년으로 본다).
- 473년 — 만다소르 비문에 칼리다사의 시구를 닮은 표현이 나타난다.
- 634년 — 풀라케신 2세의 아이홀레 비문이 칼리다사를 본보기 시인으로 언급한다.
- 약 850년 — 아난다바르다나가 칼리다사를 인용하며 시적 암시(드바니) 이론을 전개한다.
- 약 1400년 — 말리나타가 칼리다사의 시에 영향력 있는 주석을 쓴다.
- 1789년 — 윌리엄 존스가 캘커타에서 『샤쿤탈라』 영어 번역을 펴낸다.
- 1791년 — 게오르크 포르스터의 독일어 번역이 나오고, 괴테가 이 희곡을 찬미하는 경구시를 쓴다.
- 1813년 — 호러스 헤이먼 윌슨이 『메가두타』 영어 번역을 펴낸다.
용어 풀이
- 산스크리트어
- 고대·중세 남아시아의 고전어. 종교와 학문, 문학에 쓰였다.
- 프라크리트어
- 산스크리트어와 가까운 입말들. 희곡에서는 여성과 하인 등 많은 인물이 쓴다.
- 마하카비야
- 여러 장으로 된 긴 궁정 서사시. 산스크리트 시의 최고 장르로 여겨졌다.
- 나타카
- 주로 왕족이나 신적 혈통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산스크리트 극의 대표 형식. 『샤쿤탈라』가 전형이다.
- 굽타 왕조
- 4~6세기에 북인도의 넓은 지역을 다스린 왕조.
- 약샤
- 자연의 정령이나 반신적 존재. 『메가두타』의 주인공은 쿠베라를 섬기는 약샤다.
- 만다크란타
- 『메가두타』 전체에 쓰인 느리고 장중한 산스크리트 운율.
- 산데샤 카비야(전령시)
- 『메가두타』가 만들어 낸, 전령을 통해 소식을 보내는 시의 장르.
- 이본(recension)
- 사본 전승 과정에서 생긴, 흔히 지역과 연결되는 텍스트의 서로 다른 판본.
- 드바니
- ‘암시’. 가장 훌륭한 시적 의미는 간접적으로 전해진다는 이론.
묻고 답하기
칼리다사는 언제 살았나요?
확실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는 대략 350~475년의 굽타 시대로 보지만, 옛 전통은 기원전 1세기까지 올려 잡기도 한다.
『샤쿤탈라』는 어떤 이야기인가요?
왕이 숲속 수행처에서 샤쿤탈라와 결혼하지만 저주 때문에 그녀를 잊고, 물고기 배 속에서 나온 반지를 보고서야 기억해 내어 마침내 가족이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왜 구름이 편지를 전하나요?
『메가두타』에서 유배된 정령은 연인들이 서로 그리워하는 계절인 우기의 첫 비구름을 보고, 북쪽에 있는 아내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칼리다사는 정말 비크라마디티야 왕의 ‘아홉 보석’이었나요?
‘아홉 보석’ 목록은 후대 문헌에서 나왔고 서로 다른 시대 사람들을 담고 있어 역사학자들은 전설로 본다. 다만 그가 굽타 궁정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리투삼하라』는 그가 썼나요?
전통은 그렇다고 하지만, 문체가 더 단순하고 초기 비평가들이 거의 인용하지 않아 의심하는 학자가 많다.
왜 『샤쿤탈라』에는 여러 판본이 있나요?
여러 세기 동안 여러 지역에서 손으로 베껴 전하는 사이에 길이와 문구가 다른 이본이 여럿 생겼기 때문이다.
칼리다사는 유럽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1789년 윌리엄 존스의 영어 번역과 이어진 독일어 번역이 괴테를 비롯한 낭만주의자들을 사로잡았고, 인도 문학에 대한 유럽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Kālidāsa. Wikipedia
- Abhijnanashakuntalam. Wikipedia
- Meghadūta. Wikipedia
- Raghuvaṃśa. Wikipedia
- Kumārasambhava. Wikipedia
- 칼리다사. 위키백과
- 샤쿤탈라. 위키백과
- Barbara Stoler Miller (ed.), Theater of Memory: The Plays of Kālidāsa.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4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