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중국 고비 사막 가장자리의 오아시스 도시 둔황 근처에는 문이 잔뜩 뚫린 긴 절벽이 있어요. 그 안에는 약 1,650년 전부터 천 년 가까이 사람들이 손으로 하나하나 파낸 동굴 수백 개가 있어요.
동굴들은 작은 절과 같아요. 벽과 천장은 부처님, 하늘을 나는 악사들, 극락의 궁전, 그리고 농부·상인·낙타·춤추는 사람 같은 일상 모습을 그린 화려한 그림으로 덮여 있어요. 안에는 여러 색으로 칠한 흙 불상들이 있는데, 10층 건물만큼 큰 부처님도 있답니다.
둔황은 비단길의 정거장이었어요. 비단길은 상인, 스님, 여행자들이 중국·인도·중앙아시아·페르시아 사이를 오가던 길의 그물이에요. 부유한 집안과 관리, 평범한 사람들도 복을 빌고 신앙심을 보이려고 돈을 내어 동굴을 만들었어요.
1900년, 동굴을 돌보던 한 도사가 벽 뒤에 숨겨진 비밀 방을 찾아냈어요. 방 안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오래된 두루마리와 그림 수만 점으로 꽉 차 있었는데, 약 900년 전에 봉해 둔 것이었어요. 그 가운데에는 날짜가 적힌 인쇄본 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도 있었어요.
오늘날 막고굴은 세계유산이에요. 사람의 숨결과 빛, 많은 관람객이 오래된 그림을 상하게 할 수 있어서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수를 제한해요. 과학자들은 컴퓨터로 디지털 복제본을 만들어 누구나 인터넷으로 둘러볼 수 있게 하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위치
- 중국 간쑤성 둔황시에서 남동쪽으로 약 25km, 비단길 위
- 조성 기간
- 366년(전통적 창건 연대)부터 14세기까지
- 석굴 수
- 길이 약 1.6–1.7km 절벽에 735개가 남아 있다. 남쪽 구역에 장식된 석굴 492개, 북쪽에 수행·거주용 민굴
- 예술
- 벽화 약 45,000㎡, 채색 소조상 2,000구 이상
- 가장 큰 불상
- 제96굴의 미륵불 좌상, 높이 약 35.5m, 695년 조성
- 장경동
- 제17굴. 11세기 초에 봉해졌다가 1900년 재발견. 5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의 문서 약 5만 점
- 지위
- 유네스코 세계유산(1987). 둔황연구원이 관리
쉬움
막고굴이란 무엇인가
막고굴은 간쑤성의 오아시스 도시 둔황에서 남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마른 강 골짜기 위 절벽의 동쪽 면에 판 불교 석굴 사원군이다. '천 부처의 동굴', 곧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부른다. 막고(莫高)라는 이름은 당나라 때 쓰였으며, 흔히 '더 높은 것이 없다', 곧 '비길 데 없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이곳에서는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약 천 년 동안 석굴을 팠다. 전성기인 당나라 때는 석굴이 천 개가 넘었다. 오늘날 735개가 남아 있다. 장식된 석굴 492개는 절벽 남쪽 구역에 모여 있고, 북쪽 구역의 석굴은 대부분 승려들이 살고 수행하고 묻힌 꾸밈없는 방이다.
장식된 석굴들에는 모두 합쳐 약 45,000㎡의 벽화와 2천 구가 넘는 채색 소조상이 있어, 막고굴은 중국에서 가장 큰 불교 미술의 보고다. 윈강 석굴, 룽먼 석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꼽힌다.
막고굴은 또 장경동(藏經洞)으로도 유명하다. 1000년 무렵 봉해졌다가 1900년에 다시 발견된 이 작은 방에는 인류가 찾아낸 옛 문서 가운데 손꼽히는 규모의 문서가 들어 있었다. 막고굴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쉬움
비단길 교차로의 오아시스
둔황은 중국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뻗은 좁은 길인 하서주랑(河西走廊)이 타림 분지의 사막과 만나는 곳에 있다. 한 무제는 기원전 2세기 말 흉노를 막으려고 이곳에 군사 기지를 두었다. 둔황(敦煌)이라는 이름은 흔히 '크게 빛난다'는 뜻으로 풀이하며, 변경에서 쓰던 봉화를 떠올리게 한다.
둔황에서 대상(隊商)의 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과 남쪽으로 갈라졌다. 상인들은 비단·종이·도자기를 서쪽으로, 말·유리그릇·향료·귀금속을 동쪽으로 날랐다. 물건과 함께 사람과 생각도 오갔다.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불교 승려, 소그드 상인, 마니교도, 동방교회의 그리스도교도, 그리고 나중에는 무슬림도 이 길을 지났다.
불교는 이 길을 따라 중국에 들어왔고, 둔황은 불교가 가장 먼저 뿌리내린 곳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석굴은 여행자들이 사막을 무사히 건너게 해 달라고 빌고 무사히 도착한 것에 감사하는 곳이었으며, 지역 주민들이 대대로 예배하는 곳이었다.
쉬움
막고굴의 석굴을 '읽는' 법
절벽은 자갈과 모래가 굳어 생긴 무른 역암(礫巖)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기는 쉽지만 너무 잘 부스러져 섬세한 조각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윈강이나 룽먼처럼 바위를 깎아 불상을 만드는 대신, 방을 파낸 뒤 거친 벽에 진흙을 여러 겹 바르고 그림을 그렸다. 불상은 나무 뼈대에 갈대를 감고 흙을 붙여 빚은 뒤 채색했다.
초기 석굴 가운데 상당수는 가운데에 불상을 모신 감실이 있는 네모난 기둥을 두었다. 이 기둥은 불탑(스투파)을 상징하며, 예배자는 인도 아잔타 석굴 같은 석굴 사원에서처럼 그 둘레를 돌며 기도했다. 후대의 석굴은 대개 하나의 넓은 방으로, 천장은 엎어 놓은 깔때기 모양(복두형)이며 때로 차일이나 천막처럼 칠했고, 입구를 마주한 벽에 불상 무리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그림에는 일정한 틀이 있다. 천장은 흔히 스텐실로 찍어 되풀이한 작은 부처들로 덮여 있는데, 이 '천불(千佛)'이 천불동이라는 이름을 낳았다. 벽 위쪽에는 하늘을 나는 비천(飛天)이 떠다닌다. 주벽에는 부처와 보살, 큰 이야기 그림이 그려진다. 벽 아래쪽에는 석굴을 만드는 데 돈을 낸 남녀 공양자들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줄지어 서 있으며, 이름이 적혀 있는 경우가 많다.
석굴을 볼 때는 가운데 불상 무리에서 시작해 옆벽의 큰 그림으로 눈을 돌리고, 바닥 가까이의 공양자들로 마무리하면 좋다. 이들은 함께 후원자들이 바란 신앙의 세계와 그들이 실제로 살던 사회를 동시에 보여 준다.
중급
천 년에 걸친 조성
측천무후 치세인 698년의 비문에 따르면, 366년 낙준(樂尊)이라는 승려가 절벽 위로 금빛에 휩싸인 천 부처의 환영을 보고 명상을 위한 첫 석굴을 팠으며, 곧이어 법량(法良)이라는 승려가 뒤따랐다. 이 최초의 석굴들은 오늘날 찾아낼 수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식 석굴(제268·272·275굴)은 420–439년 무렵 북량(北涼) 때의 것으로, 중앙아시아 키질 석굴과 특징을 공유한다.
북위·서위·북주(5–6세기) 때는 지배층 가문 사람들이 석굴을 후원했고, 인도·중앙아시아·중국 요소가 뒤섞인 둔황 특유의 양식이 자라났다. 수(581–618)는 4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약 70개의 석굴을 만들 만큼 조성이 활발했고, 당(618–907)은 막고굴 미술의 황금기였다.
780년대(자료에 따라 781년에서 787년 사이로 다르다)에 둔황은 토번(티베트 제국)에 넘어가 848년까지 그 지배를 받았다. 당의 통제 밖에 있었던 덕분에 845년 무종(武宗)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회창폐불)을 피했다. 848년 지역 지도자 장의조(張議潮)가 토번을 몰아내고 귀의군(歸義軍) 정권을 세웠으며, 이 정권은 뒤에 조(曹)씨 가문이 이어받아 거의 두 세기 동안 둔황을 반독립적으로 다스리며 큰 석굴을 많이 후원했다.
이후 둔황은 탕구트족의 서하(1036년부터)와 몽골의 원나라로 넘어갔다. 이 시기에는 옛 석굴을 다시 칠하는 일이 많았고, 원대의 밀교 석굴처럼 새 석굴도 일부 만들어졌다. 14세기 이후 바닷길이 육상 비단길을 대신하고 명나라가 변경을 동쪽으로 물리면서 이곳은 쇠퇴했지만, 지역 주민들은 계속 이곳에서 예배했다.
중급
벽화와 조각: 한곳에 담긴 불교 미술의 역사
석굴들이 천 년에 걸쳐 있기 때문에, 막고굴은 중국 불교 미술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 주는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초기 벽화는 양식·복식·기법에서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영향이 강하며, 몸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음영법도 쓰였다. 이 음영 부분의 상당수는 납 성분 안료가 산화하면서 검게 변해, 초기 인물들에게 화가들이 의도하지 않은 굵고 검은 윤곽을 남겼다.
초기 벽화는 흔히 부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譚, 자타카)을 그린다. 수·당 시대에는 경전 전체를 거대한 파노라마 그림으로 옮긴 '경변상(經變相)'이 널리 퍼졌다. 가장 유명한 것은 궁전과 연못, 악사와 무희가 가득한 아미타불의 정토 그림으로, 640년대의 제220굴 서방정토변상은 가장 잘 남아 있는 예에 속한다.
조각도 비슷하게 발전해, 부처와 두 보살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성에서 제자와 천왕을 포함한 7구·9구의 큰 무리로 나아갔다. 당나라 때 거대한 미륵불 좌상 두 구가 만들어졌다. 북쪽의 제96굴 대불은 높이 약 35.5m로 측천무후의 칙령에 따라 695년에 완성되었고, 남쪽 대불은 높이 약 27m로 8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북대불을 감싼 여러 층의 목조 전각은 여러 차례 다시 지어져 지금은 9층이다. 토번 시기의 제158굴에는 슬퍼하는 이들의 그림에 둘러싸인 길이 15.6m의 열반상이 누워 있다.
공양자 초상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귀의군 시기에는 장의조 같은 후원자들이 거대한 행렬도로 등장하고, 조씨 가문은 동맹이었던 호탄과 위구르 왕실 사람들과 나란히 그려진다. 이 그림들은 복식, 음악, 춤, 건축, 일상생활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다.
중급
장경동과 그 보물
오늘날 장경동이라 부르는 제17굴은 제16굴 통로 옆의 작은 방이다. 본래 862년 무렵 세상을 떠난 둔황 불교계의 고승 홍변(洪辯)을 기리는 기념 굴로, 그의 초상 조각이 있었다. 11세기 초 어느 때인가 이 방은 문서·그림·직물로 채워졌고, 입구는 흙으로 막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 보이지 않게 했다.
1900년 6월 25일, 스스로 석굴의 관리인이 되어 제16굴의 모래를 치우던 도사 왕원록(王圓籙)이 숨겨진 문을 발견했다.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에 따르면 안에는 문서 뭉치가 3미터 가까이 층층이 쌓여 있어 두 사람이 겨우 설 자리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나온 약 5만 점의 자료는 5세기 초부터 1002년까지의 것이다. 대부분 한문 불교 경전이지만, 티베트어·산스크리트어·호탄어·소그드어·고대 위구르어 등으로 쓴 문서와 유교·도교·마니교·동방교회의 문헌, 히브리어 기도문도 있다. 경전과 함께 계약서, 편지, 호적과 세금 기록, 학습 연습장, 시, 민간 이야기, 달력, 의학서, 악보와 춤 기보, 성도(星圖), 바둑 교본까지 나왔다.
가장 유명한 한 점은 868년의 날짜가 적힌 『금강경』 인쇄본으로, 연대가 적힌 인쇄본 책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널리 인정된다. 간기(刊記)에는 왕개(王玠)라는 사람이 부모를 위해 '널리 무상으로 나누어 주려고'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장경동에서는 비단과 종이에 그린 그림 천여 점과 많은 직물도 나왔는데, 다른 곳에는 원작이 거의 남지 않은 당나라 회화에 대한 지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중급
탐험가들, 흩어진 문서, 논란의 유산
왕원록은 발견 사실을 지방 관리들에게 알렸지만 그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1904년에는 동굴을 다시 봉하라고 명했다. 1907년 영국과 인도 정부를 위해 일하던 헝가리 태생의 영국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은 왕원록의 복원 사업에 기부하는 대가로 완전한 문서 약 7천 점과 조각 약 6천 점, 많은 그림과 직물을 가져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스타인은 한문을 읽지 못해 거의 무작위로 골랐다.
1908년에는 한문에 능통한 프랑스 중국학자 폴 펠리오가 몇 주 동안 남은 문서를 살펴보고 희귀한 세속 문서를 포함해 1만 점 가까이 골라 갔다. 일본(오타니 탐험대, 1911–1912)과 러시아(세르게이 올덴부르크, 1914–1915) 탐험대도 문서를 더 가져갔다. 1909년 베이징에서 펠리오가 가져온 견본을 본 뤄전위(羅振玉) 같은 중국 학자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았고, 1910년 정부는 나머지를 수도로 옮기라고 명했지만 도중에 많은 자료가 도난당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1921년에는 내전을 피해 온 러시아 병사들이 일부 석굴에 수용되어 벽화를 훼손했다. 1924년에는 미국인 랭던 워너가 벽화 조각 몇 점과 조각상 하나를 떼어 갔는데, 지금 하버드에 있다. 오늘날 둔황 자료의 가장 큰 소장처는 베이징·런던·파리·상트페테르부르크이며, 일본·인도 등에도 흩어져 있다.
이 유출은 지금도 아픈 주제다. 중국에서는 흔히 약한 시대에 겪은 민족의 손실이자 외세 수탈의 상징으로 이야기된다. 왕원록은 '추앙받으면서 동시에 비난받는' 인물이다. 서고를 찾아내고 힘닿는 대로 석굴을 지켰지만, 문서를 헐값에 팔았기 때문이다. 서구 기관들은 이 자료들이 그렇지 않았다면 사라졌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보존되고 연구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1994년부터는 영국도서관이 중국 등 여러 나라 기관과 함께 이끄는 국제둔황프로젝트(현 국제둔황프로그램)가 흩어진 자료를 디지털화해 온라인에서 다시 모으고 있다.
중급
오늘날 석굴 보호
현대적 보호는 1940년대에 시작되었다. 화가 장다첸(張大千)은 1941년부터 2년 넘게 벽화를 모사했고, 그의 전시로 둔황 미술이 중국에 널리 알려졌다. 다만 그는 옛 층에 닿으려고 후대의 칠을 벗겨 냈다는 비판을 뒤에 받았다. 1944년 막고굴에 국립둔황예술연구소가 세워졌고, 이것이 둔황연구원이 되었다. 1961년 막고굴은 중국의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60년대에 절벽면이 보강되었다.
주된 위협은 자연과 사람에게서 온다. 바람에 날린 모래가 절벽을 깎고 석굴을 메운다. 바위와 흙벽 속 염분이 습기를 따라 움직이며 물감을 들뜨고 벗겨지게 한다. 많은 관람객이 내뿜는 습기와 이산화탄소는 이 손상을 앞당긴다. 1989년부터 둔황연구원은 게티 보존연구소와 함께 모래 막이, 환경 관측, 제85굴 벽화 보존, 지속 가능한 관람 정책을 연구했다.
막고굴에는 지금 매우 많은 관람객이 찾아오므로 관람을 세심하게 관리한다. 한 번에 일부 석굴만 공개하고, 시간을 정한 입장권으로 들어가며, 관람객은 먼저 방문자 센터에서 영상을 본다. 둔황연구원은 1990년대부터 석굴 디지털화도 이끌어, 고해상도 사진과 파노라마 모형을 만들어 더 이상의 손상 없이 미술을 연구하고 즐길 수 있게 하고 있다.
심화
논쟁: 장경동은 왜 봉해졌나
장경동을 왜 채우고 봉했는지 설명하는 문서는 없다. 게다가 과학적 기록 없이 열렸고, 누군가 꼼꼼히 기록하기 전에 왕원록·스타인·펠리오가 안을 흩트려 놓았기 때문에 많은 증거가 사라졌다. 가장 늦은 연대의 문서가 1002년의 것이므로, 대부분의 학자는 그 직후에 봉했다고 본다. 수전 헌팅턴처럼 더 늦은 시기를 주장한 학자도 소수 있다.
스타인은 이곳이 '성스러운 폐기물'의 보관소였다고 보았다. 거룩한 말씀이 담겨 있어 버릴 수 없는, 낡거나 불완전하거나 쓸모없어진 문서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인쇄 경전의 보급과 연결해, 손으로 베낀 옛 경전이 필요 없어졌다고 본다. 수많은 조각과 중복본, 재사용한 종이가 이 견해를 뒷받침한다.
펠리오는 반대로 승려들이 비상시에, 아마도 1030년대 탕구트(서하)의 정복을 앞두고 서고를 숨겼다고 보았다. 역사가 룽신장(榮新江)은 이 자료가 인근 삼계사(三界寺)의 장서였으며, 불교 왕국 호탄이 불교 유적을 파괴하던 무슬림 카라한 왕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1006년 무렵 봉했다고 주장했다. 불법이 쇠한다는 말법(末法) 사상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된 신앙 행위였다는 견해도 있다.
이 이론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문제는 여전히 열려 있다.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이 모음이 정리된 서고인지, 버려진 문서의 창고인지, 비상시에 숨긴 보물인지에 따라 역사가들이 이 자료로 둔황 사회를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심화
돈황학: 막고굴이 학문에 가져온 변화
둔황 자료 연구는 '돈황학(敦煌學)'이라는 독자적 분야가 되었다. 이 문서들은 중국 불교 연구를 바꾸어 놓았다. 초기 선종 문헌, 중국에서 지어진 위경(僞經), 그리고 불교 이야기를 산문과 운문으로 풀어 청중 앞에서 공연한 '변문(變文)' 같은 대중 장르를 전해 주었는데, 변문은 중국 백화 문학사에서 중요하다.
사회경제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계약서, 호적, 대차 문서, 결사(結社) 규약, 사원 회계는 당·토번·귀의군 지배 아래의 변경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곡식을 빌리고 품을 사고 장례를 치르고 세금을 냈는지 보여 준다. 티베트어 문서는 토번 제국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방대한 사료에 속하며, 호탄어와 소그드어 문헌은 이 언어들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미술사학자들에게도 저마다의 질문이 있다. 석굴 벽화는 어떻게 기획되었고, 화가들은 밑그림 책을 썼는가? 당나라의 '국제적' 양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수도 장안의 회화와 어떤 관계였나? 학자들은 또 멀리 있는 왕조보다 지역 후원자들이 각 석굴의 도상 구성을 얼마나 좌우했는지, 석굴이 의례에서 실제로 어떻게 쓰였는지를 논한다.
끝으로 막고굴은 문화유산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식민 시대에 흩어진 유물은 누구의 것인가, 관광과 보존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디지털 기술로 연약한 유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막고굴은 이러한 논의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국제둔황프로그램에서 보존 협력에 이르는 국제 협력은 그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핵심 개념
- 석굴 사원
- 절벽을 파서 만든 불교 성소. 예배·수행·순례에 쓰였다.
- 비단길
- 중국과 중앙아시아·인도·페르시아·지중해를 잇던 교역로의 그물. 불교도 이 길로 전해졌다.
- 경변상(經變相)
- 불교 경전 내용을 정토 같은 자세한 장면으로 옮긴 큰 그림.
- 공양자상
- 석굴 조성에 돈을 낸 사람들의 모습. 이름과 가문, 지위를 보여 준다.
- 장경동
- 5–11세기 문서 약 5만 점을 담고 있던 봉해진 방, 제17굴.
- 유물 유출
- 20세기 초 둔황 문서와 미술품이 세계 여러 소장처로 옮겨진 일.
- 예방적 보존
- 손상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환경과 이용을 관리해 유산을 지키는 방식.
기록
- 약 기원전 111년 — 한나라가 둔황에 변경 군사 기지를 둔다.
- 366년 — 전승에 따르면 승려 낙준이 천 부처의 환영을 보고 첫 석굴을 판다.
- 약 420년 — 북량 때 현존 최고(最古)의 장식 석굴(제268·272·275굴)이 만들어진다.
- 695년 — 높이 약 35.5m의 제96굴 미륵대불이 완성된다.
- 약 786년 — 둔황이 토번의 지배를 받게 된다(848년까지).
- 848년 — 장의조가 토번을 몰아내고 귀의군 정권을 세운다.
- 868년 — 훗날 장경동에서 발견될 『금강경』이 인쇄된다.
- 1002년 — 장경동 문서 가운데 가장 늦은 연대. 얼마 뒤 동굴이 봉해진다.
- 1900년 — 6월 25일 왕원록이 장경동을 발견한다.
- 1907년 — 오렐 스타인이 문서 수천 점을 가져간다. 이듬해 폴 펠리오가 뒤따른다.
- 1944년 — 국립둔황예술연구소(뒤의 둔황연구원)가 세워진다.
- 1987년 — 막고굴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용어 풀이
- 오아시스
- 사막 가운데 물이 있어 사람이 살고 여행자가 쉬어 가는 푸른 땅.
- 벽화
- 벽에 직접 그린 그림.
- 보살
- 대승불교에서 모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려고 깨달음을 구하는 존재.
- 비천(飛天)
- 하늘을 날며 음악을 연주하거나 꽃을 뿌리는 천상의 존재(압사라).
- 불탑(스투파)
- 본래 사리를 모신 무덤 모양의 불교 기념물. 예배자가 그 둘레를 돈다.
- 미륵
- 먼 미래에 세상에 나타날 것으로 믿어지는 부처.
- 역암
- 자갈과 모래가 굳어서 된 바위. 막고굴에서는 무르고 잘 부스러진다.
- 간기(刊記)
- 책이나 문서 끝에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 적은 기록.
- 둔황연구원
- 1944년부터 석굴을 돌보고 연구해 온 기관.
묻고 답하기
석굴은 몇 개나 있나요?
735개가 남아 있고, 그 가운데 492개가 벽화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어요. 당나라 때는 천 개가 넘었어요.
누가 석굴을 만들었나요?
승려와 장인, 화가들이 만들었고, 왕실과 지역 지배자부터 상인·관리·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모임까지 다양한 후원자가 돈을 댔어요.
왜 '천 부처의 동굴'이라고 부르나요?
천 부처의 환영을 보았다는 창건 전설에서 왔을 수도 있고, 벽에 줄지어 그린 수많은 작은 부처 그림에서 왔을 수도 있어요.
장경동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대 기록 인쇄본인 868년의 『금강경』을 꼽지만, 역사가들은 일상 문서도 그만큼 소중히 여겨요.
왜 둔황 문서가 중국 밖에 그렇게 많나요?
1907년부터 1920년대까지 외국 탐험대가 사거나 가져갔는데, 당시 중국 정부가 이를 거의 막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장경동은 왜 봉해졌나요?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어요. 성스러운 폐기물을 보관했다는 설, 침입자를 피해 서고를 숨겼다는 설, 불교가 쇠퇴한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신앙 행위라는 설 등이 있어요.
석굴을 모두 볼 수 있나요?
아니요. 벽화를 보호하려고 한 번에 일부만 공개하고, 입장 인원과 시간을 제한해요. 많은 석굴은 디지털 관람으로 둘러볼 수 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Mogao Caves. Wikipedia
- Mogao Caves.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Wall Paintings Conservation at Mogao Grottoes. Getty Conservation Institute
- Library Cave. Wikipedia
- Dunhuang manuscripts. Wikipedia
- Diamond Sutra. Wikipedia
- Wang Yuanlu. Wikipedia
- 막고굴. 위키백과
- Roderick Whitfield, Susan Whitfield, Neville Agnew, Cave Temples of Mogao: Art and History on the Silk Road. Getty Conservation Institute, 2000
함께 보기
- 아잔타 석굴인도 서부의 불교 석굴군으로, 승원과 예배 공간, 벽화로 알려져 있다.
- 석굴암경주 인근에 조성된 8세기 불교 석굴로, 화강암 본존불과 여러 조각상으로 알려져 있다.
- 직지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은 선불교 가르침 모음집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불교의 창시자. 갠지스 평원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쳤다. 생몰 연대는 학설이 나뉜다.
- 탈라스 전투751년 중앙아시아에서 아바스 왕조와 당나라 군대가 맞붙은 전투로, 현지 세력도 참전했다.
- 보로부두르8~9세기 무렵 중부 자와에 세워진 대규모 불교 유적이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