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사람이 만든 돌산을 떠올려 보세요. 프람바난이 바로 그런 모습이에요. 자와섬 한가운데의 푸른 논 위로 뾰족한 탑들이 옹기종기 솟아 있지요. 가장 높은 탑은 47미터로, 15층 건물만큼 높아요.
이 사원은 1,100여 년 전 자와섬의 마타람이라는 나라 임금들이 지었어요. 힌두교 신들이 사는 집으로 만든 거예요. 가장 큰 사원은 시바 신의 집이고, 그 양옆의 조금 작은 사원은 비슈누와 브라마 신의 집이에요. 시바 사원 안에는 키가 3미터나 되는 시바 신상이 서 있어요.
사원 바깥 회랑에는 돌에 새긴 그림이 수백 장이나 이어져 있어요. 마치 만화책처럼요. 라마 왕자의 아내 시타가 악마 왕 라와나에게 붙잡혀 가고, 원숭이 영웅 하누만이 시타를 구하러 가는 유명한 이야기예요. 이야기를 순서대로 읽으려면 사원이 늘 오른쪽에 오도록 빙 돌며 걸어야 해요.
이 근처 사람들은 옛날이야기를 하나 전해요. 한 왕자가 라라 종그랑이라는 공주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공주는 싫었어요. 그래서 하룻밤 사이에 사원 천 개를 지으라고 했지요. 왕자는 정령들의 도움으로 거의 다 지었지만, 공주가 해가 뜨는 것처럼 꾸며 속였어요. 화가 난 왕자는 공주를 돌로 만들어 버렸고, 사람들은 공주가 지금도 큰 사원 안에 서 있다고 말해요.
그 뒤 지진과 화산 때문에 사원 대부분이 무너졌어요. 사람들은 100년 가까이 돌을 하나하나 제자리에 맞추며 거대한 퍼즐처럼 사원을 다시 세우고 있어요. 이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답니다.
한눈에 보기
- 건립 시기
- 9세기 중엽. 시바그리하 비문에 따르면 시바 사원은 856년에 봉헌되었고, 10세기 초까지 증축되었다
- 위치
-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북동쪽 약 17km, 욕야카르타 특별구와 중부 자와주 경계의 프람바난 평원
- 건립자
- 마타람(메당) 왕국의 왕들. 라카이 피카탄 때 시작, 디아 로카팔라 때 봉헌, 발리퉁 등 후대 왕들이 증축
- 봉헌 대상
- 힌두교 삼신(트리무르티: 시바·비슈누·브라마). 그중 시바가 주신
- 규모
- 원래 사원 240기. 중심 구역 16기와 네 겹으로 둘러선 소사당(페르와라) 224기. 주탑 높이 47m
- 부조
- 『라마야나』(시바·브라마 사원)와 『바가바타 푸라나』 계통의 크리슈나 이야기(비슈누 사원)
- 지위
- 유네스코 세계유산 ‘프람바난 사원군’(1991년 등재). 인근의 세우·룸붕·부브라 사원 포함
- 의의
- 고대 자와 최대의 힌두 사원군이자 인도네시아 고전기 건축·부조의 걸작
쉬움
프람바난은 어떤 곳인가
프람바난은 오늘날 인도네시아 자와섬에 있는 9세기 힌두 사원군이다. 북쪽의 므라피 화산과 남쪽의 낮은 석회암 구릉 사이, 비옥한 평원에 자리하며 욕야카르타 시에서 북동쪽으로 약 17km 떨어져 있다. 인도네시아어로는 근처 마을 이름을 따 ‘찬디 프람바난’이라 부르는데, 찬디(candi)는 고대 사원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자와 사람들은 지역 전설의 여주인공 이름을 따 ‘라라(로로) 종그랑’이라고도 부른다.
사원군은 힌두교의 대표적인 삼신 조합인 트리무르티, 곧 창조의 신 브라마,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와 재생의 신 시바에게 바쳐졌다. 이곳에서는 시바가 으뜸이다. 대부분의 역사가가 프람바난과 연결하는 856년 비문은 이 성소를 ‘시바의 집’이라는 뜻의 시바그리하(Śiwagṛha)라고 부른다.
프람바난은 가늘고 높이 솟은 탑으로 유명하다. 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넓게 층을 쌓아 올린 불교 기념물 보로부두르와는 사뭇 다르다. 중앙의 시바 사원은 높이가 47m에 이른다. 원래 이곳에는 240기의 사원이 있었고, 그 대부분은 세 주탑 둘레에 가지런히 줄지어 선 작은 사당이었다.
유네스코는 1991년 ‘프람바난 사원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등재 범위에는 프람바난뿐 아니라 인근의 불교 사원인 세우·룸붕·부브라도 들어 있다. 유네스코는 이 사원군을 고전기 시바 미술의 걸작이자, 고대 자와에서 힌두교도와 불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평가한다.
쉬움
배치를 ‘읽는’ 법: 세 겹의 사각형, 세 개의 세계
위에서 보면 프람바난은 사각형 세 개가 겹겹이 들어앉은 모양이다. 한 변이 약 390m인 가장 바깥 담장은 거의 사라졌고, 그 용도도 분명하지 않다. 나무와 초가로 지은 사제들의 건물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 안쪽에 한 변 약 225m의 두 번째 담장이 있고, 그 안에 ‘찬디 페르와라’(부속 사당 또는 수호 사당)라 불리는 작은 사당 224기가 44·52·60·68기씩 네 겹으로 늘어서 있었다. 안쪽 줄로 갈수록 조금씩 높아진다. 한가운데 높은 돌 기단 위에 가장 신성한 구역이 있다.
중심 구역에는 건물 16기가 있다. 서쪽 줄에는 세 주전이 서 있는데 가운데가 시바, 북쪽이 비슈누, 남쪽이 브라마다. 그 맞은편 동쪽 줄에는 신들이 타는 동물(바하나)을 모신 작은 사원 세 기가 있다. 시바의 황소 난디, 비슈누의 신조 가루다, 브라마의 신성한 거위 함사다. 구역의 남북 끝에는 ‘곁’ 사원(찬디 아핏) 두 기가 서 있고, 네 문과 네 모서리에 아주 작은 사당 여덟 기가 있다.
이 배치에는 힌두교의 우주관이 담겨 있다. 바깥뜰·가운데뜰·안뜰은 흔히 세 층위의 세계, 곧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부르로카), 성자와 수행자의 중간 세계(부와르로카), 신들의 가장 높은 세계(스와르로카)로 풀이된다. 같은 세 층위가 사원 하나하나에도 위아래로 되풀이된다. 기단, 방이 있는 몸체, 그리고 보석 모양 꼭대기 장식(라트나)으로 솟아오르는 지붕이다. 그러므로 사원군 전체가 우주의 모형이고, 탑 하나하나는 신들이 사는 세계의 중심산 메루산의 형상이다.
참배자는 동쪽에서 다가가 시바 사원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성소를 오른쪽에 두고 회랑을 시계 방향으로 돈다. 이 의례적 걸음을 프라닥쉬나라고 한다. 걸음은 이야기 부조를 지나 한 걸음씩 중심의 신에게로 이어진다.
쉬움
탑 안의 신들
높이 47m, 너비 34m의 시바 사원에는 방이 다섯 개 있다. 중앙의 큰 방과 네 방위를 향한 작은 방 넷이다. 동쪽에서 들어가는 중앙 방에는 ‘위대한 신’ 시바 마하데와 상이 연꽃 위, 대좌 위에 서 있다. 높이는 약 3m다. 팔이 넷이며 염주·불자(파리채)·삼지창 같은 전통 지물을 들고, 머리 관에는 초승달과 해골을, 이마에는 제3의 눈을 지녔다.
나머지 세 방에는 시바와 가까운 신들이 있다. 남쪽 방에는 자와에서 시바 신앙을 전한 스승으로 공경받는 성자 아가스티야가, 서쪽 방에는 시바의 아들이자 장애를 없애 주는 코끼리 머리의 가네샤가 있다. 북쪽 방에는 물소 악마를 무찌르는 여신 두르가(두르가 마히샤수라마르디니)가 있다. 지역 전통은 바로 이 두르가 상을 라라 종그랑 공주라고 여겨, 북쪽 방을 라라 종그랑 사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비슈누 사원과 브라마 사원은 각각 높이 약 33m로, 방 하나에 자기 신의 상을 모셨다. 바하나 사원 가운데 지금도 동물 상이 남은 곳은 시바를 마주한 난디 사원뿐이다. 커다란 황소 난디 상 곁에 수레를 탄 태양신 수리야와 달의 신 찬드라 상이 함께 있다. 가루다와 함사 사원은 지금 비어 있다.
사원 바깥벽 아래쪽에는 학자들이 ‘프람바난 패널’이라 부르는 무늬가 되풀이된다. 작은 감실 속 사자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칼파타루)를 새겼으며, 나무 좌우에는 짐승이나 천상의 존재가 한 쌍씩 있다. 밝고 질서 정연한 이 무늬가 여러 번 반복되어 벽 아랫부분 특유의 리듬을 만든다.
중급
돌에 새긴 이야기: 『라마야나』와 크리슈나 부조
세 주전의 회랑 난간 안쪽 벽에는 이야기 부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시바 사원에서 시작해 브라마 사원으로 이어지는 부조는 『라마야나』를 들려준다. 라마 왕자의 추방, 랑카의 왕 라와나가 왕자의 아내 시타를 납치한 일, 하누만과 수그리와가 이끄는 원숭이 군대의 도움으로 시타를 찾는 과정, 뒤이은 전쟁이다. 비슈누 사원의 부조는 비슈누의 또 다른 모습인 크리슈나의 이야기를 『바가바타 푸라나』 전통과 관련지어 보여 준다.
부조는 시계 방향으로 걸으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기둥 위에 지은 집, 동물, 악사, 궁정 장면 같은 생활 묘사가 풍부해서 미술사가들은 이를 9세기 자와의 물질문화를 알려 주는 자료로 써 왔다. 보로부두르 불교 부조의 차분하고 이상화된 인물과 견주어, 프람바난 부조는 극적인 움직임과 빽빽한 화면 구성으로 자주 칭송받는다.
프람바난의 『라마야나』는 발미키의 산스크리트 서사시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학자들은 그 장면들을 고대 자와어 서사시 『카카윈 라마야나』와 비교해 왔다. 이 작품은 산스크리트 운율을 따른 긴 시로, 9세기 중엽에서 10세기 초 사이, 곧 사원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장면은 다른 인도 판본이나 지역 전승에 더 가까워 보이며, 부조와 문헌이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여전히 연구 과제다.
이야기 부조 맞은편 벽에는 시바 사원의 경우 방위를 지키는 신(로카팔라)이, 브라마 사원에는 베다와 관련된 성자들이, 비슈누 사원에는 천상의 무희(압사라)를 거느린 남신들이 새겨져 있다. 한쪽의 이야기와 다른 쪽의 신성한 무리가 어우러져, 사원을 도는 걸음은 성스러운 역사를 지나는 여정이 된다.
중급
어떻게 지었나: 돌, 물, 그리고 왕실의 노동
중부 자와의 다른 고전기 사원처럼 프람바난도 화산암(안산암) 덩어리를 다듬어 짜 맞춰 쌓았고, 조각은 돌을 쌓은 뒤에 새겼다. 돌을 내준 화산 지형은 동시에 건물을 위협했다.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므라피 화산은 거듭 화산 이류(라하르)를 쏟아냈고, 이 지역에서는 지진도 잦다.
시바그리하 비문은 사원이 완공될 때 이루어진 놀라운 토목 공사를 기록한다. 강줄기를 바꾸어 사원 경내를 따라 흐르게 했다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 강을 지금 사원군 서쪽을 남북으로 곧게 흐르는 오팍강으로 본다. 굽이치던 옛 물길은 메우고 평평하게 다져 작은 사당들이 늘어설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 보이며, 새 물길은 홍수와 화산 퇴적물에서 사원을 지키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비문은 ‘평범한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이의 노동과 ‘수백 명씩’ 일한 측량사들을 언급한다. 모두 같은 설계로 지은 작은 페르와라 사당은 지방 영주와 귀족들이 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바친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건물에서 발견된 짧은 붓글씨 명문, 그중 시바 사원 난간 꼭대기 장식에 쓰인 ‘피카탄’이라는 이름은 건설 과정을 엿보게 하는 드문 단서다.
복원 과정에서 시바 사원 중심 아래 깊이 5.75m의 수직갱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 숯·흙·불탄 동물 뼈 위에 놓인 돌함(프리피)이 있었다. 돌함에는 구리판, 동전, 보석, 금박과 은박 조각, 조개껍데기, 그리고 거북·뱀(나가)·연꽃 같은 모양으로 오린 작은 금판들이 들어 있었고, 일부에는 바루나·파르와타 같은 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지진구(地鎭具)는 땅을 정화하고 건물에 신성한 힘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었다.
중급
누가 지었나: 9세기의 마타람 왕국
프람바난을 세운 것은 역사가들이 마타람 또는 메당이라 부르는 왕국의 통치자들이다. 이 왕국은 8세기부터 중부 자와를 지배했다.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까지 샤일렌드라 가문의 왕들은 대승불교의 큰 후원자였다. 이들은 같은 평원과 서쪽 크두 분지에 세우(본래 이름은 만주스리그리하로 보이며 792년 봉헌), 보로부두르를 비롯한 많은 불교 기념물을 지었다.
기념비적인 힌두 건축으로의 전환은 라카이 피카탄(본명 디아 살라두)과 연결된다. 그는 약 847년부터 856년 이후까지 다스린 시바파 왕으로, 샤일렌드라 왕 사마라퉁가의 불교도 딸 프라모다와르다니와 혼인했다. 856년의 시바그리하 비문은 ‘왕비와 달리’ 시바파였던 왕, 적이 돌을 쌓은 요새로 피신한 왕위 계승 전쟁, 그리고 디아 로카팔라에게 왕위가 넘어간 일을 서술하며, 그 치세에 시바 성소가 봉헌되었다고 적는다.
그 뒤의 왕들, 특히 발리퉁(재위 약 899~911년)과 그 후계자 닥사·툴로동은 사원군을 넓혔고, 무엇보다 작은 사당들의 줄을 더했다. 수십 년 동안 프람바난은 왕국의 국가 사원으로서 주요 국가 의례가 열리는 곳이었고, 왕궁도 아마 프람바난 평원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프람바난이 불교를 밀어낸 것은 아니다. 가까운 대형 불교 사원들은 계속 쓰였고, 세우는 같은 시기에 증축된 것으로 보인다. 불과 수백 미터 거리에 힌두 사원과 불교 사원이 나란히 선 모습은 프람바난 평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며, 유네스코가 이곳을 종교 공존의 증거라 부르는 근거다.
중급
종교적 의미: 시바의 산과 신격화된 왕
프람바난은 시바를 최고신으로, 트리무르티를 그 세 가지 모습으로 섬기는 힌두교 시바파 전통에 속한다. 시바그리하 비문은 신의 거처와 그 문과 수호신, ‘신이 내려오는 곳’인 동쪽의 신성한 나무, 수행처로 쓰인 많은 작은 건물을 묘사한다. 또 매일의 예배가 ‘영원히’ 이어지도록 논을 면세 봉토(시마)로 사원에 바쳤다고 기록한다.
인도 사원과 마찬가지로 자와 사원에서도 주탑은 메루산의 형상이고, 어두운 내실(가르바그리하, ‘자궁의 방’)은 신이 신상 속에 현존하는 자리다. 참배자는 트이고 번잡한 바깥뜰에서 이 응축된 중심을 향해, 점점 더 신성해지는 공간들을 차례로 지나 나아간다.
일부 고고학자는 거대한 시바 상이 신격화된 왕, 아마도 발리퉁을 함께 나타낸다고 보았다. 왕이 죽은 뒤 신과 하나가 된다는 생각은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신상에 그렇게 적힌 명문이 없어 신중한 학자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사원이 왕권을 신의 질서에 묶었다는 점이다. 시바의 집을 지은 왕은 사원이 본뜬 세계의 수호자로 자신을 내세웠다.
프람바난은 살아 있는 종교 공간이기도 하다. 주전이 재건된 뒤, 무슬림이 다수인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소수를 이루는 자와와 발리의 힌두 공동체가 다시 이곳에서 큰 의례를 연다. 발리의 침묵의 날 녀피와 관련된 의식, 밤새 이어지는 시와라트리(시바의 밤) 기도 등이다. 2019년 11월에는 사원을 정화하는 대규모 봉헌 의식(아비셰카)이 열려, 이곳이 기념물일 뿐 아니라 예배 장소로 돌아왔음을 알렸다.
중급
버려짐과 무너짐, 그리고 라라 종그랑 전설
929년 무렵 마타람 왕국의 중심은 음푸 신독 때 중부 자와에서 동부 자와로 옮겨졌다. 까닭은 지금도 논쟁 중이다. 화산 폭발, 전염병, 정치 갈등,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 왕국의 위협, 그리고 바다와 향신료 무역으로 이어지는 브란타스강 유역의 경제적 이점 등이 모두 거론된다. 이 이동 뒤 프람바난은 왕실의 후원을 잃고 차츰 쓰이지 않게 되었다.
돌보는 이 없는 사원은 지진과 화산 활동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16세기의 큰 지진으로 사원군 상당 부분이 무너져, 탑들이 풀과 나무로 뒤덮인 돌무더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 폐허를 완전히 잊지 않았다.
누가 지었는지 몰랐던 지역 사람들은 라라 종그랑 전설로 사원을 설명했다. 이야기 속에서 반둥 본도워소 왕자는 보코 왕을 죽이고 그의 딸, ‘날씬한 처녀’ 라라 종그랑에게 청혼한다. 공주는 하룻밤에 사원 천 개라는 불가능한 조건을 내건다. 왕자가 정령들의 도움으로 999개를 짓자, 공주는 마을 여인들에게 절구질을 시키고 동쪽에 불을 피워 새벽이 온 듯 닭이 울게 한다. 정령들은 달아나고, 격노한 왕자는 공주를 천 번째 조각상, 곧 시바 사원의 두르가 상으로 만든다. 완성되지 못한 사원들은 세우(‘천’)가 되었고, 보코 왕의 궁전은 남쪽 언덕 위의 라투 보코 유적으로 여겨진다.
전설은 역사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흥미롭다. 평원의 여러 실제 유적을 한 이야기로 묶었고, 폐허를 지켜 주었을 수도 있다. 정령이 지었다고 믿는 사원에서 마을 사람들이 돌을 가져가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중급
재발견과 한 세기에 걸친 재건
폐허에 관한 유럽인의 첫 기록은 1733년 이곳을 찾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직원 코르넬리스 안토니 론스가 남겼다. 그는 돌산 같은 ‘브라만 사원’을 보았다고 적었다. 1755년 자와의 마타람 술탄국이 나뉜 뒤, 폐허와 오팍강은 욕야카르타와 수라카르타의 경계선이 되었고, 이 선은 지금도 주 경계로 남아 있다.
19세기 초 이곳은 식민 당국의 관심을 끌었다. 1805년 네덜란드 관리 니콜라우스 엥엘하르트가 기술자 H. C. 코르넬리우스에게 유적을 정리하고 측량해 도면을 그리게 했고, 1811년 영국의 짧은 자와 점령기에는 측량가 콜린 매켄지가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를 위해 유적을 찾았다. 그러나 19세기 대부분 동안 유적은 방치되었다. 조각은 정원 장식품으로 실려 갔고, 마을 사람들은 돌을 건축 자재로 썼으며, 1880년대의 허술한 발굴은 오히려 약탈을 부추겼다.
체계적인 재건은 1918년 네덜란드령 동인도 고고학청이 시작했고, 제대로 된 복원은 1930년부터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과 인도네시아 독립 혁명으로 중단되었다가 1949년 재개되었다. 시바 사원은 1953년 완공되어 수카르노 대통령이 준공을 알렸다. 브라마 사원은 1978~87년, 비슈누 사원은 1982~91년에 복원되었고, 1993년까지 바하나 사원들이 완성되어 수하르토 대통령이 중심 구역의 완공을 기념했다.
작은 페르와라 사당은 훨씬 더딘 일이다. 224기 가운데 식민지 시기와 최근 수십 년 동안 다시 세운 것은 몇 기에 불과하다. 한 기를 복원하는 데 여러 달이 걸리니, 모두 복원하려면 매우 긴 세월이 필요하다. 대부분은 지금 기단과 번호를 매긴 돌무더기로만 남아 있다.
중급
오늘의 프람바난: 춤, 재해, 유산 관리
1960년대부터 오팍강 건너 사원 서쪽 야외 무대에서는 불 밝힌 탑을 배경으로 『라마야나』 무용극이 공연되어 왔다. 자와 궁정 무용 전통을 바탕으로 한 이 공연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문화 행사의 하나가 되었고, 부조 속 이야기를 오늘의 관객 앞에 되살린다.
유적은 자연재해로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 2006년 5월 27일 욕야카르타 부근 지진 때 주전들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조각된 돌들이 땅에 흩어졌고, 사원군은 피해 조사를 위해 문을 닫았다. 2014년에는 동부 자와 끌룻 화산의 화산재 때문에 잠시 폐쇄되었다. 유네스코는 지진과 화산 폭발을 이 유산의 주된 위협으로 꼽는다.
1990년대 초 인도네시아 정부는 사원 주변에 생긴 시장을 정리하고 고고학 공원을 조성했다. 국영 기업이 보로부두르·프람바난·라투 보코의 관광을 맡고, 보존은 정부의 문화유산 기관이 책임진다. 프람바난은 해마다 국내외 방문객 수십만 명이 찾는, 인도네시아에서 손꼽히게 많은 사람이 찾는 유적이다.
문화유산 당국은 세우·플라오산·칼라산·사리·라투 보코 등이 있는 프람바난 평원 전체를 성역 경관으로 보호하고 높은 현대 건물을 제한하자는 안도 내놓았다. 프람바난은 홀로 이해될 수 없다는 인식, 곧 이 사원이 촘촘한 신성·왕실 경관 속의 한 기념물이었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심화
논쟁: 왕조, 연대, 그리고 비문이 정말로 묘사하는 것
프람바난을 856년 비문의 시바그리하와 동일시하는 근거는 문헌과 유적이 잘 들어맞는다는 데 있다. 문과 같은 크기의 작은 사당이 많고, 경내를 따라 강줄기를 돌린 시바 성소라는 점이다. 현재 자카르타 국립박물관에 있는 이 비문은 1950년대에 J. G. 더 카스파리스가 번역했다. 첫 다섯 연은 판독할 수 없고 나머지에도 불확실한 독법이 많다. 대부분의 학자가 동일시를 받아들이지만, 본문이 조각나 있어 계승 전쟁에서 누가 누구와 싸웠는지 같은 세부는 여전히 열려 있다.
오래된 논쟁은 중부 자와의 왕조 문제다. F. D. K. 보스와 더 카스파리스로 대표되는 ‘이중 왕조설’은 힌두교 산자야 왕조와 불교 샤일렌드라 왕조가 권력을 다투었고, 프람바난은 보로부두르에 대한 힌두 측의 응답이었다고 본다. 반면 포르바차라카를 따르는 학자들은 하나의 왕가가 있었고 그 구성원들의 신앙이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시바그리하 비문의 적은 전통적으로 뒤에 스리위자야를 다스린 샤일렌드라 왕자 발라푸트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왕가 혈통을 주장한 지방 영주 라카이 왈라잉 푸 쿰바요니로 보는 해석도 있다.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프람바난은 왕조 경쟁의 기념물로도, 연속성의 기념물로도 읽힌다.
사원군의 연대도 여러 층으로 되어 있다. 중심부는 840~850년대 피카탄 때 시작되어 856년에 봉헌되었을 수 있지만, 페르와라 줄과 다른 증축은 10세기 초까지 이어진 후대 왕들의 치세에 속한다. 유네스코 문서가 8·9·10세기를 번갈아 언급하는 것도 등재 범위에 8세기 불교 사원과 9세기 힌두 사원군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건축 단계는 건축학 연구로 계속 다듬어지고 있다.
페르와라 줄에 대한 해석은 현대인의 가정이 얼마나 쉽게 끼어드는지 보여 준다. 네 줄이 네 계층(바르나)에 대응하고 중심에 가까울수록 사제의 자리였다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지만, 종속 영주들의 헌납물이라는 설, 단지 명상과 예배의 장소였다는 설도 있다. 어느 것도 비문으로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전문가들은 이를 사실이 아닌 가설로 다룬다.
심화
아나스틸로시스와 진정성: 폐허를 다시 세운다는 것
프람바난은 아나스틸로시스, 곧 무너진 건물을 원래의 돌로 원래 자리에 다시 쌓는 복원 방법의 시험장이었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원래 석재가 대략 75% 이상 남아 있을 때만 사당을 다시 세운다는 원칙을 정했다. 빠진 자리에는 새 돌을 끼울 수 있지만, 증거가 없는 형태를 지어내지 않는 것이 목표다.
이 신중한 방식 때문에 작은 사당들이 아직 대부분 폐허로 남아 있다. 수백 년 동안 많은 돌이 실려 나가 마을과 도로, 건물에 다시 쓰였고, 상당수는 추적할 수 없다. 수천 개의 돌을 찾아내고 번호를 매기고 맞춰 보는 일이므로 작업 기간도 길 수밖에 없다.
유네스코의 진정성 평가는 1918년 이래의 복원이 전통적인 돌 짜맞춤 방식과 구조 보강용 콘크리트 같은 현대적 방법을 함께 써 왔으며, 2006년 지진 뒤를 포함해 진정성을 지키려 크게 애썼다고 적는다. 지진대에서의 구조 안전과 원래 공법에 대한 충실성 사이의 균형은 보로부두르나 앙코르 같은 아시아의 다른 대기념물에서도 익숙한 논쟁이며, 전문가들 사이에서 계속 논의되고 있다.
역사가에게는 복원 기록 자체가 사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부가 훼손되거나 사라진 식민지 시기의 사진·도면·보고서, 그리고 1949년 이후 인도네시아의 작업은 프람바난이 무엇이었는지뿐 아니라, 식민 정부와 독립 국가라는 서로 다른 세대가 이 유적을 어떻게 보여 주기로 했는지를 기록한다. 로이 요르단이 엮은 『프람바난 예찬(In Praise of Prambanan)』은 네덜란드어로 된 초기 연구를 소개하며, 유적의 재건과 나란히 해석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보여 준다.
핵심 개념
- 트리무르티(삼신)
- 창조·유지·파괴를 맡은 브라마·비슈누·시바의 조합. 프람바난의 세 주탑이 이를 구현하며, 시바가 으뜸이다.
- 우주산으로서의 사원
- 탑 하나하나가 신들이 사는 메루산을, 전체 배치가 힌두교의 우주를 나타낸다.
- 세 개의 세계
- 바깥뜰·가운데뜰·안뜰(그리고 각 사원의 기단·몸체·지붕)은 인간·성자·신들의 세계를 뜻한다.
- 이야기 부조와 프라닥쉬나
- 『라마야나』와 크리슈나 이야기는 사원을 시계 방향으로 돌며 읽게 되어 있어, 이야기가 의례의 일부가 된다.
- 왕실의 시바 신앙
- 마타람 왕들은 권위를 시바에 결부시켰고, 사원은 왕국의 국가 성소였다.
- 종교 공존
- 힌두 사원 프람바난은 같은 시대에 세워지고 쓰인 불교 사원 세우 등과 같은 평원에 나란히 서 있다.
- 아나스틸로시스
- 원래의 돌을 원래 자리에 다시 쌓는 복원법. 프람바난의 느린 재건을 이끄는 원칙이다.
기록
- 792년 — 만주스리그리하 비문이 프람바난 북쪽 약 800m의 불교 사원군(지금의 세우)을 기록.
- 약 847년 — 불교도 공주 프라모다와르다니와 혼인한 시바파 왕 라카이 피카탄 즉위. 프람바난 건설이 그와 연결된다.
- 856년 — 시바그리하 비문에 따르면 11월 12일 디아 로카팔라 치세에 시바 성소가 봉헌되고 강줄기가 바뀜.
- 약 900년 — 발리퉁 왕과 후계자들이 작은 사당 줄을 더해 사원군을 확장.
- 약 929년 — 음푸 신독이 왕실 중심을 동부 자와로 옮김. 프람바난은 차츰 쓰이지 않게 됨.
- 약 1550년 — 16세기의 큰 지진으로 사원군 상당 부분이 무너진 것으로 추정.
- 1733년 — VOC 직원 코르넬리스 안토니 론스가 폐허에 관한 유럽인 최초의 기록을 남김.
- 1805년 — 니콜라우스 엥엘하르트가 기술자 H. C. 코르넬리우스에게 유적 정리와 도면 작성을 맡김.
- 1918년 — 네덜란드 식민지 고고학청이 재건 착수. 1930년부터 체계적 복원.
- 1953년 — 재건된 시바 사원 준공, 수카르노 대통령이 기념.
- 1991년 — 프람바난 사원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2006년 — 욕야카르타 지진으로 사원 피해, 일시 폐쇄.
용어 풀이
- 찬디(candi)
- 고대 힌두·불교 사원이나 사당을 이르는 인도네시아어.
- 시바
- 힌두교의 주요 신. 시바파에서는 최고신으로 섬기며, 파괴와 재생을 상징한다.
- 바하나
- 힌두 신이 타는 동물. 시바의 황소 난디, 비슈누의 가루다 등.
- 페르와라(부속 사당)
- 주 사원을 둘러싼 작은 사당. 프람바난에는 원래 224기가 있었다.
- 가르바그리하
- 힌두 사원의 내실. 주신상을 모시는 곳.
- 라트나
- 자와 힌두 사원 꼭대기의 보석 모양 장식. 불교 사원의 스투파형 꼭대기에 해당한다.
- 프라닥쉬나
- 성스러운 대상을 오른쪽에 두고 시계 방향으로 도는 예배 행위.
- 『라마야나』
- 라마 왕자와 납치된 시타, 그 구출을 다룬 힌두 서사시. 프람바난 부조의 주제.
- 시마
- 고대 자와에서 종교 시설을 부양하도록 세금을 면제해 준 땅.
- 라하르(화산 이류)
- 화산 퇴적물과 물이 섞여 흘러내리는 흙탕물. 므라피 화산의 반복되는 위험.
- 아나스틸로시스
- 무너진 구조물을 원래의 부재로 다시 조립하는 복원 방법.
묻고 답하기
프람바난은 힌두교 사원인가요, 불교 사원인가요?
프람바난 자체는 주로 시바에게 바친 힌두 사원이에요. 하지만 세계유산 보호 구역에는 같은 시기에 가까이 지어진 세우 같은 불교 사원도 들어 있어요.
프람바난은 얼마나 오래되었나요?
약 1,150년 되었어요. 비문에 따르면 중심의 시바 사원은 856년에 봉헌되었고, 사원군은 10세기 초까지 넓혀졌어요.
정말 누군가 하룻밤에 사원 천 개를 지었나요?
아니에요. 그건 지역 사람들이 폐허를 설명하려고 전한 라라 종그랑 전설이에요. 사원은 마타람 왕들이 수십 년에 걸쳐 지었어요.
왜 사람들은 프람바난을 떠났나요?
10세기에 왕궁이 동부 자와로 옮겨 갔어요. 경제·정치·자연적 이유가 섞였을 것으로 보여요. 왕실의 후원을 잃은 사원은 그 뒤 지진으로 많이 무너졌어요.
지금도 예배하는 곳인가요?
네. 자와와 발리의 힌두 공동체가 이곳에서 의례를 열고, 2019년에는 큰 봉헌 의식도 치렀어요.
작은 사당들은 왜 아직 대부분 무너진 채인가요?
수백 년 동안 많은 돌이 실려 나갔어요. 원래 돌을 대부분 찾았을 때만 다시 세우기 때문에 복원이 아주 느려요.
프람바난이 856년 비문의 시바그리하라는 것은 확실한가요?
강줄기를 돌린 일, 같은 크기의 사당이 많다는 점 등 비문의 묘사가 유적과 잘 맞아 널리 받아들여져요. 다만 비문이 훼손되어 있어서 그 역사 서술의 일부 세부는 여전히 논쟁 중이에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Prambanan Temple Compounds (프람바난 사원군).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 Prambanan. Wikipedia
- Shivagrha inscription. Wikipedia
- Sewu. Wikipedia
- Rakai Pikatan. Wikipedia
- Mataram kingdom. Wikipedia
- Kakawin Ramayana. Wikipedia
- Jacques Dumarçay (Michael Smithies 편역), The Temples of Java. Oxford University Press
- Roy E. Jordaan (편), In Praise of Prambanan: Dutch Essays on the Loro Jonggrang Temple Complex. KITLV Press, 1996
함께 보기
- 보로부두르8~9세기 무렵 중부 자와에 세워진 대규모 불교 유적이다.
- 앙코르 와트크메르 제국의 수리야바르만 2세 때 세워진 거대한 사원 단지다.
- 라마야나라마와 시타의 유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산스크리트어 서사시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여러 판본이 전한다.
- 탄자부르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촐라 왕조의 황제 라자라자 1세가 세워 1010년에 완성한 거대한 화강암 시바 사원으로, 지금도 예배가 이어진다.
- 나가라크르타가마(데사와르나나)1365년 불교 시인 프라판차가 완성한 고대 자와어 카카윈으로, 하얌 우룩 왕을 찬양하며 마자파힛의 궁정과 순행과 영역을 묘사한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