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천 년 전, 인도 남쪽 촐라 왕국에 라자라자라는 힘센 왕이 있었다. 그는 시바 신을 위해 지금까지 누구도 본 적 없는 커다란 사원을 짓기로 했다. 공사는 약 7년이 걸렸고, 1010년에 사원이 완성되었다.
사원은 아주 단단한 돌인 화강암으로 지었다. 가운데 탑은 계단식 피라미드처럼 솟아 있는데, 높이가 20층 건물만 하다. 꼭대기에는 거대한 둥근 돌 덮개가 얹혀 있다. 기중기도 없이 그 무거운 돌을 어떻게 그렇게 높이 올렸는지 사람들은 지금도 궁금해한다. 몇 킬로미터나 되는 흙 비탈길을 만들고 코끼리로 돌을 끌어 올렸다는 옛이야기가 있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탑 아래의 어두운 방에는 시바를 나타내는 둥근 돌기둥, 커다란 링가가 있다. 이 방에는 사제만 들어갈 수 있다. 사원 앞에는 시바의 충실한 동반자인 황소 난디가 커다란 돌 하나를 깎아 만든 모습으로 앉아 있다.
벽에는 타밀어 글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왕은 사원에 바친 금, 보석, 청동상, 땅, 소를 모두 적어 두었다. 한 긴 비문에는 무용수와 악사부터 등불 켜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목수까지 이곳에서 일한 수백 명의 이름과 급여가 적혀 있다.
이 사원은 지금도 예배에 쓰인다. 그래서 ‘위대한 살아 있는 촐라 사원’이라는 세계유산의 일부가 되었다. ‘살아 있는’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지금도 날마다 이곳에서 기도한다는 뜻이다.
한눈에 보기
- 건립
- 1003~1010년 무렵. 라자라자 1세 재위 25년(1010년)에 봉헌
- 건립자
- 촐라 왕조의 황제 라자라자 1세(재위 985~1014)
- 위치
- 인도 타밀나두주 카베리강 삼각주의 촐라 수도 탄자부르(탄조르)
- 본래 이름
- 라자라제슈바람, ‘라자라자의 주(主) 시바’. 페루부다이야르 코빌, 페리야 코빌(‘큰 사원’)이라고도 함
- 종교
- 시바를 모신 힌두교(시바파) 사원. 지금도 예배가 이어짐
- 구조
- 성소 위의 화강암 탑(비마나) 높이는 재는 방식에 따라 약 60~66m. 바깥 경내 약 240×122m
- 비문
- 라자라자 1세, 누이 쿤다바이, 관리들, 후계자 라젠드라 1세의 타밀어 비문 수십 점
- 지위
- 유네스코 세계유산(1987). 2004년 ‘위대한 살아 있는 촐라 사원’으로 확대
쉬움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은 어떤 곳인가
탄자부르의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은 인도에서 가장 크고 이름난 힌두 사원 가운데 하나다. 시바에게 바친 이 사원은 촐라 왕조의 황제 라자라자 1세가 촐라의 세력이 절정에 이른 11세기 초에 세웠다. 건립자는 ‘라자라자의 주(主)의 사원’이라는 뜻으로 라자라제슈바람이라 불렀다. 지역 사람들은 ‘큰 사원’, 곧 페리야 코빌이라 부르고, ‘위대한 주’라는 뜻의 브리하디스와라라는 이름은 뒤에 붙은 신의 이름에서 왔다.
이 사원은 거대한 규모, 화강암 구조, 우뚝 솟은 피라미드형 비마나(성소 위의 탑), 조각, 벽화, 긴 비문으로 유명하다. 탑은 힌두 우주론에서 우주 한가운데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남쪽의 메루’, 곧 닥시나 메루라고도 불린다.
1987년 유네스코는 이 사원을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다. 2004년에는 강가이콘다촐라푸람과 다라수람에 있는 뒤 시대의 촐라 사원 두 곳을 더해 ‘위대한 살아 있는 촐라 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등재 범위를 넓혔다. ‘살아 있는’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많은 고대 유적과 달리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은 지금도 날마다 예배와 축제, 순례가 이어지는 곳이다.
역사가들에게 이 사원은 돌로 된 기록 보관소이기도 하다. 벽에는 왕실의 기증, 토지 하사, 사원 인력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새겨져 있어 11세기 남인도의 국가와 사회를 유난히 풍부하게 보여 준다.
쉬움
사원 ‘읽기’: 문에서 성소까지
사원은 동쪽을 바라보며 하나의 축 위에 엄격하게 배치되어 있다. 방문자는 두 개의 문탑(고푸람)을 지나 들어간다. 바깥 문은 라자라자의 칭호 가운데 하나인 ‘케랄라를 멸한 자’를 따서 케랄란타칸 티루바살이라 부른다. 약 100m 안쪽에는 힌두 신화의 장면을 새긴 안쪽 문, 라자라잔 티루바살이 있다. 남인도 사원으로서는 드물게 이 문탑들이 중앙 탑보다 훨씬 작아서 시선이 자연스럽게 성소로 향한다.
안에는 정사각형 두 개를 잇대어 놓은 듯한, 길이 약 240m, 너비 약 122m의 넓은 직사각형 안뜰이 있고, 기둥이 늘어선 회랑이 이를 둘러싼다. 축을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시바의 황소 난디의 전각, 모임과 의례를 위한 여러 홀(만다파), 앞방, 그리고 마지막으로 큰 탑 아래의 성소가 놓여 있다.
타밀어로 ‘자궁의 방’이라는 뜻의 카루바라이라 부르는 성소에는 형상 없이 시바를 나타내는 거대한 돌 링가가 두 층 높이로 서 있다. 성소 둘레에는 안벽과 바깥벽 사이로 신을 돌며 예배하는 어두운 통로가 있는데, 촐라 시대의 벽화가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안뜰 둘레에는 시바의 배우자, 아들 가네샤와 무루간, 성자 찬데슈바라 등을 모신 작은 사당들이 있다. 이 가운데 다수는 몇 세기 뒤 탄자부르의 나야카와 마라타 통치자들이 더한 것이지만, 원래의 배치와 대칭을 존중했다.
쉬움
거대한 탑
비마나는 한 변이 약 30m인 정사각형 기단에서 솟는다. 2층으로 된 아랫부분 위로 열세 단이 점점 좁아지며 가파르고 곧은 피라미드를 이룬다. 모든 면이 벽기둥, 감실, 작은 전각 모양으로 짜여 있어서 탑은 마치 작은 사원들로 쌓아 올린 산처럼 보인다.
꼭대기에는 네 모서리에 난디 황소 한 쌍씩을 올린 둥근 지붕 모양의 거대한 덮개돌이 있고, 그 위에 한때 금으로 덮였던 정상 장식(스투피)이 있다. 대중적인 설명에서는 덮개돌이 약 80톤짜리 화강암 한 덩어리라고 한다. 정말 한 덩어리인지, 어떻게 들어 올렸는지는 논쟁이 있으며 증거는 결정적이지 않다.
탑의 높이는 기단과 정상 장식을 넣느냐에 따라 약 60m에서 66m까지 다르게 발표된다. 정확한 수치가 무엇이든, 앞선 어떤 힌두 사원보다 훨씬 높았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가운데 하나였다. 탑은 촐라의 수도를 압도했고, 평평한 삼각주 멀리에서도 보였다.
정오에는 탑의 그림자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등 탑에 얽힌 몇몇 대중적인 주장은 속설이다. 다른 높은 건물처럼 그림자는 땅에 떨어지며, 방문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중급
조각, 춤, 그림
성소 바깥벽에는 여러 모습의 시바가 크게 새겨져 있다. 불기둥에서 나타나는 링고드바바, 떠돌이 걸식자 빅샤타나, 춤의 왕 나타라자, 스승 닥시나무르티, 반은 시바이고 반은 비슈누인 하리하라, 반은 시바이고 반은 파르바티인 아르다나리슈바라 등이다. 위층에는 악마들의 세 도시를 무너뜨린 트리푸란타카의 모습으로 시바가 나타나는데, 정복 군주의 마음을 끌었을 법한 주제다.
위층의 한 회랑에는 고대 산스크리트 연극·무용 이론서 『나티야샤스트라』가 서술한 108가지 춤 동작(카라나) 가운데 81가지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 나머지 27개 돌은 까닭을 알 수 없이 비어 있다. 이 부조들은 사원 의례에서 춤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 주며, 타밀나두의 고전 무용 바라타나티얌이 자라 나온 전통을 담은 이른 시각 기록이다.
1931년 안나말라이 대학의 S. K. 고빈다사미는 성소를 도는 통로에 그려진 나야카 시대의 그림 아래에 더 이른 촐라 시대의 그림층이 있음을 발견했다. 천연 안료로 석회 바탕에 그린 이 11세기 벽화에는 성자 순다라르의 이야기와 트리푸란타카로서의 시바를 비롯한 시바 신화의 장면, 그리고 왕실과 궁정 인물들이 담겨 있다. 인도 고고조사국(ASI)은 뒤의 그림을 떼어 내 둘 다 보존하면서 촐라 층을 드러내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사원은 촐라 청동상의 역사에서도 한몫을 했다. 라자라자의 비문은 나타라자를 비롯한 여러 시바 금속상을 바쳤다고 기록하며, 크기와 장신구까지 자세히 적었다. 이 기록은 뛰어난 촐라 청동상 전통의 연대를 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중급
어떻게 지었나
사원은 거의 전부 화강암으로 지었다. 화강암은 캐고 다듬기 어려운 단단한 돌이다. 카베리강 삼각주의 충적 평야에 자리한 탄자부르 바로 근처에는 화강암 채석장이 없어서 돌을 어느 정도 먼 곳에서 날라 와야 했다. 수만 톤의 돌을 옮기고 들어 올리는 일은 조직력의 큰 성취였다.
가장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올렸는지는 기록에 없다. 널리 퍼진 지역 전승은 사라팔람이라는 마을에서 몇 킬로미터 길이의 흙 비탈길을 쌓고 코끼리와 일꾼 무리가 덮개돌을 끌어 올렸다고 한다. 비계와 들어 올리는 장치를 썼다는 설명도 있다. 어느 것도 입증되지 않았다.
탑은 비교적 촘촘한 기단 위에 서서 천 년 동안 몬순과 작은 지진을 견뎌 왔다. 성소 위 탑 내부가 비어 있어 무게를 줄이며, 돌들은 회반죽보다 주로 자체 무게와 정교한 짜 맞춤으로 고정되어 있다.
비문은 공사를 맡은 사람들의 이름도 전한다. 한 비문은 ‘라자라자의 위대한 목수’라는 뜻의 라자라자 페룬타찬이라는 칭호를 가진 수석 건축가를 쿤자라 말란이라 적는다. 석공과 조각가부터 청동 주조공, 화가, 회계원까지 수많은 전문가가 참여했다는 사실은 강력한 국가의 자원을 보여 준다.
중급
라자라자 1세와 촐라 국가
촐라는 오래된 타밀 왕조로,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남인도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본명이 아룬모지 바르만인 라자라자 1세는 985년부터 1014년까지 다스렸다. 그는 판디야와 체라 왕국을 무찌르고, 아누라다푸라를 도읍으로 한 스리랑카 북부를 정복했으며, 몰디브까지 촐라의 세력을 넓혔다. 아들 라젠드라 1세는 원정을 이어 갠지스강에 이르렀고, 동남아시아의 스리위자야로 해군 원정대를 보냈다.
라자라자는 통치 체제도 개편했다. 1000년 무렵 토지 측량과 세액 사정을 명하고, 영토를 ‘발라나두’라는 단위로 재편했으며, 마을 회의는 그대로 두면서 지방 영주에 대한 왕권을 강화했다. 그의 치세에는 타밀 시바파 찬가들을 모은 『티루무라이』도 편찬되었다.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은 이 제국 사업의 중심이었다. 왕 자신과 긴밀히 묶인 왕실 사원으로, 신은 왕의 이름을 지녔고 왕의 비문에는 그가 바친 재물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전쟁에서 얻은 것이었다. 사원은 시바에 대한 왕의 신심과 타밀 땅 전체와 그 너머를 다스린다는 그의 주장을 선포했다.
라자라자의 후계자들도 저마다 큰 사원을 지었다. 라젠드라 1세는 새 수도 강가이콘다촐라푸람을 세우고 1035년 무렵 그곳의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을 완성했다. 라자라자 2세는 12세기에 다라수람의 아이라바테슈바라 사원을 지었다. 이 사원들이 탄자부르와 함께 ‘위대한 살아 있는 촐라 사원’을 이룬다.
중급
기관으로서의 사원: 사제, 무용수, 마을
남인도의 큰 사원은 예배 장소일 뿐 아니라 지주, 고용주, 은행, 예술의 중심이었다.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은 촐라 영토 곳곳의 여러 마을 세입을 받았고, 금, 보석, 은그릇, 소, 양, 그리고 마을 회의에 맡겨 둔 돈을 받았다. 마을 회의는 그 돈의 이자를 사원 등불에 쓸 기(버터기름)나 쌀로 바쳤다.
경내 북쪽 벽에 새긴 1011년의 비문은 사원이 부양한 600명이 넘는 사람의 역할과 급여를 나열한다. 사제, 회계원, 등불 켜는 사람, 빨래꾼, 재단사, 보석 세공인, 도공, 목수, 일산(日傘) 드는 사람, 가수, 북 치는 사람과 악사, 무용 스승, 그리고 수백 명의 사원 여성(무용수)이 있다. 대부분은 토지 수확의 몫으로 급여를 받았다.
뒤에 흔히 데바다시라 불린 사원 여성들은 신 앞에서 춤과 노래를 바치는, 촐라 사원 의례의 존중받는 일원이었다. 이 제도의 역사는 복잡하다. 후대에는 착취와 결부되었고, 데바다시 제도는 20세기에 법으로 폐지되었다. 촐라 비문은 이 여성들의 지위와 생계를 보여 주는 이른 증거다.
사원은 음식을 나누고, 고행자를 부양하고, 타밀 찬가의 낭송을 열었다. 라자라자의 스승 카루부르 데바르는 뒤에 『티루무라이』에 실린 찬가를 지었고, 안뜰에는 그를 모신 사당이 있다.
중급
촐라 이후: 나야카, 마라타, 식민지 전쟁
13세기 촐라가 쇠퇴한 뒤 탄자부르는 판디야,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거쳐 16세기부터는 독립 통치자가 된 나야카 총독들의 손에 들어갔다. 나야카는 무루간과 여신의 사당 등을 더하고, 촐라 벽화 위에 새 벽화를 그렸다. 지금의 난디와 그 전각도 이 시기의 것이다.
17세기 후반 탄자부르는 마라타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마라타 왕실은 사원을 유지하며 건물을 더했다. 마라타 왕가의 후손은 지금도 사원의 예배를 관리하는 탄자부르 궁정 데바스타남의 세습 관리인이며, 유적 자체는 인도 고고조사국이 보호한다. 일부 타밀 단체는 이 체제에 이의를 제기해 왔다.
18세기 영국, 프랑스, 지역 세력이 남인도를 두고 싸울 때,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원 단지는 요새와 무기고로 쓰였고 바깥 담장에는 포대를 갖춘 방어 시설이 더해졌다. 이 몇 세기 동안 일부 조각과 신상이 부서지거나 사라졌다.
현대 인도에서 이 사원은 타밀 정체성과 유산의 상징이 되었다. 2010년 9월 타밀나두는 천 명의 바라타나티얌 무용수가 함께한 공연으로 사원 건립 천 년을 기념했고, 인도 정부는 기념우표와 주화를 발행했다.
중급
살아 있는 사원의 보존
지금도 날마다 쓰이는 사원을 보존하는 데는 특별한 어려움이 따른다. 등불과 장뇌를 태운 연기와 그을음이 여러 세기 동안 성소 통로의 벽화를 검게 만들었다. ASI는 이를 세척·복원했고, 자체 개발한 기법으로 나야카 시대 그림 16점을 벽에서 떼어 새 바탕에 붙여 따로 전시함으로써 그 아래의 촐라 벽화를 볼 수 있게 했다.
배수, 식물과 날씨가 돌에 미치는 영향, 대규모 축제 인파의 압력, 현대 편의 시설과 역사적 경관 사이의 균형도 과제다. 세계유산으로서 이 사원은 물리적 구조와 종교 생활을 함께 지키는 방식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유네스코 등재는 ‘위대한 살아 있는 촐라 사원’이 촐라 건축과 이념의 뛰어난 사례이며 지금도 예배에 쓰인다는 점을 강조한다. 유산과 살아 있는 전통의 이런 결합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점점 더 인정받고 있다.
의례도 변해 왔다. 약 한 세기 만인 2015년에 되살아난 사원 수레 행렬과, 마하시바라트리 무렵 해마다 열리는 브리한 나티얀잘리 무용 축제는 사원이 여전히 새로운 문화 생활을 낳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심화
논쟁: 왕권 이념, 치수, 속설
미술사가들은 이 사원이 촐라 왕권 이념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오랫동안 논의해 왔다. 라자라제슈바람이라는 이름은 신과 왕을 잇고, 비문은 사원을 군주와 그 가족의 선물로 내세운다. 비디야 데헤지아 같은 학자들은 촐라 미술이 깊은 신심을 유지하면서도 제국의 목적에 봉사한 방식을 탐구했다. 정복하는 시바의 모습인 트리푸란타카가 두드러진 점은 라자라자의 군사적 업적을 반영한 것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이런 해석은 추측일 수밖에 없다.
조지 미셸 같은 건축사가들은 탄자부르 사원을 앞선 팔라바와 초기 촐라 사원을 바탕으로 하되 전혀 새로운 규모로 남인도 양식, 곧 드라비다 양식을 완성한 건물로 본다. 강가이콘다촐라푸람을 비롯한 뒤의 촐라 사원들은 의식적으로 이 사원을 참조하면서 비례를 바꾸었다. 예컨대 강가이콘다촐라푸람의 탑은 윤곽이 부드럽게 휘지만 탄자부르의 탑은 곧다.
이 사원에 관해 흔히 되풀이되는 수치 가운데 몇몇은 불확실하다. 비마나의 높이는 발표마다 다르고, 덮개돌의 무게와 한 덩어리라는 주장은 입증되기보다 주장되는 경우가 많으며, 사라팔람에서 이어진 비탈길 이야기는 문헌 근거가 없는 전승이다. 라자라자의 초상으로 전시되는 청동상을 비롯해 그림과 조각에 대한 몇몇 대중적인 비정도 근거가 약하다는 지적이 있다.
끝으로 사원의 사회사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 비문은 촐라의 경제, 토지 소유, 카스트, 젠더 연구에 쓰여 왔다. 촐라 비문 속 사원 여성을 연구한 레슬리 오어 같은 역사가들은 데바다시에 대한 후대의 고정관념을 촐라 시대에 거꾸로 투영하는 데 반대했다. 이런 연구는 사원의 기록이 여전히 새로운 연구 질문을 낳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심화
증거: 비문과 그 연구
사원 벽에는 타밀 문자와 그란타 문자로 쓴 타밀어 비문이 많이 새겨져 있고, 그 다수는 왕의 정복을 나열하는 산스크리트어나 타밀어 찬사(메이키르티)로 시작한다. 사원에 관한 위키백과 문서에 요약된 조사에 따르면 라자라자 1세의 비문이 64점, 라젠드라 1세의 비문이 29점이며, 뒤의 촐라, 판디야, 나야카 통치자의 비문도 조금 있다.
이 비문들은 19세기 후반 금석학자 E. 훌치가 『남인도 비문집』(South Indian Inscriptions) 총서로 옮겨 적고 출간했으며, 지금도 촐라 국가에 관한 가장 중요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봉헌 날짜(라자라자 재위 25년 275일째), 왕과 누이 쿤다바이, 왕비들과 관리들의 기증, 마을 기부, 사원 인력의 조직을 기록한다.
라자라자는 기록 보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다른 사원인 티루말라바디의 한 비문은, 성소를 다시 짓기 전에 벽의 비문을 책에 옮겨 적었다가 공사가 끝난 뒤 다시 새기라는 그의 명령을 기록한다. 비문을 보존해야 할 법적 문서로 의식했음을 보여 준다.
물질 증거가 문헌을 보완한다. 건축 자체, 1931년에 드러난 촐라 벽화, 조각 구성, 비문에 적힌 청동상 가운데 박물관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것들이다. 이 모두가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을 중세 인도에서 가장 잘 기록된 기념물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
핵심 개념
- 비마나
- 남인도 사원에서 성소 위에 솟은 탑. 탄자부르에서는 문탑을 압도하는 가장 높은 요소다.
- 왕실 사원
- 왕의 이름을 지니고 그의 신심, 부, 권력을 선포하는, 왕과 긴밀히 묶인 사원.
- 닥시나 메루
- ‘남쪽의 메루’. 탑을 우주 한가운데의 산으로 보는 상징.
- 기관으로서의 사원
- 사원은 땅을 소유하고, 수백 명을 고용하고, 돈을 빌려주고, 예술을 후원했다.
- 살아 있는 유산
- 지금도 예배가 이어지는 곳이므로 보존은 종교 생활을 존중해야 한다.
- 돌로 된 기록 보관소
- 벽의 비문은 기증, 인력, 행정을 기록해 풍부한 역사 증거를 제공한다.
- 춤과 신심
- 새겨진 카라나 동작과 사원의 무용수들은 촐라 예배에서 춤이 차지한 중심적 역할을 보여 준다.
기록
- 985년 — 라자라자 1세가 촐라 왕위에 오른다.
- 약 1000년 — 라자라자가 토지 측량을 명하고 촐라 영토를 재편한다.
- 약 1003년 — 사원 공사가 시작된다.
- 1010년 — 라자라자 재위 25년 275일째에 사원이 봉헌된다.
- 1011년 — 600명이 넘는 사원 인력을 나열한 비문의 연대.
- 1014년 — 라자라자 1세가 죽고 라젠드라 1세가 뒤를 잇는다.
- 약 1035년 — 라젠드라 1세가 강가이콘다촐라푸람의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을 완성한다.
- 약 1550년 — 탄자부르의 나야카 통치자들이 사당을 더하고 성소 통로에 새 그림을 그린다.
- 1931년 — S. K. 고빈다사미가 나야카 그림 아래의 촐라 벽화를 발견한다.
- 1987년 — 사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다.
- 2004년 — 등재 범위가 ‘위대한 살아 있는 촐라 사원’으로 넓어진다.
- 2010년 — 천 명의 바라타나티얌 무용수와 함께 건립 천 년을 기념한다.
용어 풀이
- 고푸람
- 남인도 사원 경내의 기념비적인 문탑.
- 만다파
- 모임, 의례, 음악, 춤에 쓰는 기둥 있는 홀.
- 링가
- 시바를 형상 없이 나타내는 둥근 돌기둥. 성소에서 예배된다.
- 난디
- 시바가 타는 황소이자 헌신자. 성소를 바라보도록 놓인다.
- 카라나
- 『나티야샤스트라』에 서술된 108가지 춤 동작 가운데 하나.
- 프레스코
- 마르지 않은 석회 바탕에 그려 안료가 벽과 결합하게 한 그림.
- 메이키르티
- 촐라 비문 첫머리에서 왕의 업적을 나열하는 찬사.
- 드라비다 양식
- 계단식 피라미드형 탑을 지닌 남인도 사원 건축 양식.
- 데바다시
- 사원에 봉사하도록 바쳐진 여성, 흔히 무용수를 가리키는 후대의 말.
묻고 답하기
사원 탑은 얼마나 높나요?
재는 방식에 따라 약 60~66m입니다. 대략 20층 건물 높이입니다.
탑의 그림자가 땅에 닿지 않는다는 게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속설입니다. 탑도 다른 높은 건물처럼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덮개돌은 어떻게 올렸나요?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긴 흙 비탈길 이야기가 전하지만 방법을 적은 기록은 없습니다.
누가 사원에 들어갈 수 있나요?
방문자는 안뜰과 홀에 들어갈 수 있고, 가장 안쪽의 성소에는 사제만 들어갑니다.
왜 ‘살아 있는’ 사원이라고 하나요?
천 년 동안 예배, 축제, 순례가 계속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비문은 무엇을 알려 주나요?
왕의 기증, 토지 하사, 청동상, 그리고 수백 명의 사원 인력의 이름과 급여를 기록해 사원을 중요한 역사 사료로 만듭니다.
사원에 라자라자의 초상이 있나요?
청동상 하나가 흔히 라자라자로 소개되지만, 역사가들은 의심스럽게 봅니다. 확실한 당대 초상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Brihadisvara Temple. Wikipedia (영어)
- 브리하디스와라 사원. 위키백과
- Great Living Chola Temples. Wikipedia (영어)
- Rajaraja I. Wikipedia (영어)
- Chola dynasty. Wikipedia (영어)
- George Michell, The Hindu Temple: An Introduction to Its Meaning and Forms. Paul Elek, 1977
- Vidya Dehejia, Art of the Imperial Chola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