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푸에블로 보니토

Pueblo Bonito (스페인어, ‘아름다운 마을’)

약 850–1150년 · 차코 캐니언 (선조 푸에블로인 · 차코 세계)

한 문장으로

푸에블로 보니토는 미국 뉴멕시코주 차코 캐니언에 있는, 방이 수백 개인 거대한 D자형 돌 건물로, 오늘날 푸에블로 사람들의 조상이 약 300년에 걸쳐 지었으며 그 후손들은 지금도 차코를 신성하고 살아 있는 곳으로 여긴다.

푸에블로 보니토
이미지: See below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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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뉴멕시코의 메마른 협곡에 알파벳 D 모양의 커다란 돌 건물이 서 있다. 방이 수백 개나 되고, 어떤 부분은 한때 4~5층 높이였다. 사람들은 이곳을 스페인어로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의 ‘푸에블로 보니토’라고 부른다. 지금도 뉴멕시코와 애리조나에 사는 푸에블로 사람들의 조상이 지은 건물이다.

건물을 지은 사람들에게는 쇠 도구도, 바퀴도, 말도 없었다. 그들은 사암을 얇은 판으로 쪼개 무늬가 있는 가지런한 벽을 쌓았다. 지붕을 얹으려고 수 킬로미터 떨어진 숲에서 커다란 통나무 수만 개를 걸어서 날라 왔다.

D자의 둥근 안쪽에는 땅을 파서 만든 둥근 방들이 있었는데, 이를 ‘키바’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대키바’는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을 만큼 컸다. 오늘날에도 많은 푸에블로 사람들이 키바에서 기도하고 의식을 치른다.

몇몇 방에서 고고학자들은 놀라운 물건들을 찾았다. 청록색 터키석 구슬 수천 개, 바다에서 온 조개, 멀리 멕시코에서 자란 카카오로 만든 초콜릿 음료를 담았던 키 큰 채색 항아리, 그리고 ‘마코앵무’라는 화려한 열대 앵무새의 깃털과 뼈다. 차코가 아주 먼 곳과 이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푸에블로 사람들은 차코가 그냥 버려진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조상들은 지식을 품고 새 보금자리로 옮겨 갔을 뿐이고, 조상의 영혼은 지금도 그곳에 머문다고 믿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방문객에게 차코를 깊이 존중해 달라고 부탁한다.

한눈에 보기

건설
서기 850~1150년경 여러 단계에 걸쳐, 약 300년 동안(가장 이른 나이테 연대는 800년대)
위치
미국 뉴멕시코주 샌환 카운티, 차코 문화 국립역사공원, 차코 캐니언 북쪽
건설자
선조 푸에블로인. 호피, 주니, 아코마, 라구나, 리오그란데 푸에블로 등 오늘날 푸에블로 사람들의 조상
규모
약 1~1.2헥타르(2~3에이커). 방 650~800개로 추정, 최대 4~5층, 대키바 2기를 포함한 수십 개의 키바
평면
D자형 대가옥. 중앙 광장을 가로지르는 남북 방향 벽으로 나뉜다
주요 발견
터키석·조개 장신구 수천 점이 나온 33호실의 풍부한 매장, 원통형 항아리 100여 점(일부에서 카카오 잔여물), 마코앵무 유해
지위
‘차코 문화’의 일부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많은 푸에블로 부족과 원주민 부족에게 신성한 곳

쉬움

푸에블로 보니토는 어떤 곳인가

푸에블로 보니토는 뉴멕시코주 북서부 차코 캐니언의 ‘대가옥(great house)’ 가운데 가장 크고 잘 알려진 건물이다. 이런 거대한 여러 층 석조 건물들은 800년대 중반부터 1100년대 중반 사이 선조 푸에블로인이 지었다. 이 무렵 차코는 오늘날 뉴멕시코·애리조나·콜로라도·유타가 만나는 포코너스 지역 곳곳에 퍼진 공동체 연결망의 중심이 되었다.

건물은 거대한 알파벳 D 모양이다. 굽은 뒷벽은 북쪽 절벽을, 곧은 앞면은 남쪽으로 협곡을 마주한다. 담장 안에는 뒤쪽으로 4~5층까지 쌓인 직사각형 방 수백 개와, ‘키바’라고 부르는 반쯤 땅속에 있는 둥근 방 수십 개가 탁 트인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은 이곳을 차코 캐니언에서 가장 철저히 조사된 문화 유적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조상들이 붙인 이름이 아니다. 1849년 제임스 H. 심프슨 중위가 이끈 미국 육군 탐험대를 뉴멕시코 샌이시드로 출신의 안내인 카라바할이 협곡으로 이끌었는데, 그가 여러 폐허에 스페인어 이름을 붙였고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의 푸에블로 보니토도 그중 하나였다. 푸에블로 사람들에게는 차코와 그 장소들에 대한 그들만의 이름과 이야기가 있고, 그 일부는 공동체 안에서만 전해진다.

많은 원주민 부족에게 푸에블로 보니토는 폐허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조상의 풍경의 일부다. 공원은 차코와 전통적 유대를 지닌 부족과 푸에블로를 스무 곳 넘게 인정하며, 방문객에게 존중하는 마음으로 찾아 달라고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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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대가옥을 ‘읽는’ 법: 방, 키바, 광장

푸에블로 보니토의 방은 대부분 직사각형이고 작고 어두우며, 바깥으로 열리기보다 문으로 서로 이어진다. 안쪽의 많은 방에는 화덕이 없어, 가족이 사는 집이라기보다 저장이나 특별한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차코 건축의 독특한 특징인 T자형 문도 있다. 뒤쪽 방들은 절벽을 향해 계단식으로 높아져, 건물이 광장 쪽으로 층층이 내려간다.

키바는 대개 반쯤 땅속에 만든 둥근 방으로, 지붕을 통해 들어가며 긴 의자와 화덕, 환기 통로를 갖추었다. 푸에블로 보니토에는 작은 키바 수십 개와, 훨씬 커서 공동체 의식에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던 대키바 2기가 있다. 오늘날 푸에블로 사람들에게도 키바는 기도와 의식의 중요한 장소이므로, 살아 있는 전통으로 알려진 내용을 공유할지 말지는 공동체가 판단한다.

곧은 벽 하나가 중앙 광장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건물을 거의 대칭인 두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에 대키바가 하나씩 있다. 일부 연구자는 이 구분을 마을이 서로 보완하는 두 집단으로 나뉘는 오늘날 몇몇 푸에블로 공동체의 이원적 사회 조직과 연결하지만, 9세기를 건너뛰는 이런 연결은 해석의 영역이다.

건물은 놀랍도록 정밀하게 배치되었다. 남북 벽은 진북에 가깝고, 곧은 남쪽 벽은 거의 정동서로 뻗어 춘분과 추분의 해돋이·해넘이와 나란하다. 차코의 다른 요소들은 하지·동지와 18.6년의 달 주기와도 관련되어, 하늘을 오랫동안 꼼꼼히 관찰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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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어떻게 지었나

푸에블로 보니토는 몇 차례의 큰 단계에 걸쳐 계획되고 지어졌다. 800년대에 방들이 이루는 작은 호(弧)로 시작해 3세기에 걸쳐 커졌고, 11세기와 12세기 초에 가장 크게 확장되어 D자형이 완성되고 건물이 가장 높아졌다. 나무 들보는 나이테를 세어 연대를 매길 수 있기 때문에(연륜연대학), 고고학자들은 여러 건설 단계의 연대를 드물게 정확히 알고 있다.

벽은 거친 돌과 진흙 모르타르로 속을 채우고 양쪽 겉면에 사암을 정성껏 쌓았다. 후기 단계의 석공들은 큰 돌과 얇은 판석 띠를 번갈아 쌓아 아름다운 질감의 무늬를 만들었다. 원래 이 벽에는 회반죽이 발려 있었으므로 무늬가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정성은 솜씨에 대한 자부심이나 우리가 온전히 알지 못하는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차코 캐니언에는 나무가 드문데도 대가옥에는 들보와 지붕을 위한 엄청난 목재가 필요했다. 목재 연구에 따르면 많은 통나무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산림에서 베어져 협곡으로 옮겨졌다. 짐을 끄는 동물이 없었으니 아마 사람의 어깨로 날랐을 것이다. 돌을 캐고 모르타르를 만들고 목재를 나르는 데 든 노동은 이 사회가 크고 오래가는 사업을 조직할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푸에블로 보니토 뒤의 절벽은 위험했다. ‘위협하는 바위(Threatening Rock)’, 나바호어로 ‘체 비야 아니아히(기울어진 바위 틈)’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판이 절벽에서 기울어져 있었다. 차코 사람들은 그 밑동에 받침을 쌓았다. 1941년 1월 이 바위가 마침내 무너져 뒷벽 일부와 여러 방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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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차코의 세계: 길, 대가옥, 교환

푸에블로 보니토는 체트로 케틀, 푸에블로 알토, 페냐스코 블랑코, 우나 비다 등 협곡 중심부와 그 주변의 대가옥 열다섯 곳 남짓 가운데 하나였고, 작은 취락들도 함께 있었다. 1050년 무렵 차코는 흔히 ‘외곽 유적(아웃라이어)’이라 부르는, 같은 양식으로 지은 지역 곳곳의 대가옥 150곳 이상과 이어져 있었다.

공들여 만든 곧은 길이 협곡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어떤 길은 먼 거리를 가로질렀고 절벽에는 경사로와 계단을 깎았다. 정확한 용도는 논쟁 중이다. 여행과 운송에 쓰였을 수도 있지만, 실용적이지 않은 곳에서도 곧게 뻗은 모습은 중요한 장소들을 잇는 의례적·상징적 의미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차코는 교환의 중심지였다. 차코 유적에서 약 20만 점의 터키석이 나왔고, 그 상당수가 협곡에서 가공되었다. 조개는 태평양 해안과 캘리포니아만에서 왔다. 푸에블로 보니토에서는 멀리 남쪽 메소아메리카에서 온 물건들, 곧 구리 방울, 붉은마코앵무의 유해, 카카오 흔적이 남은 원통형 항아리도 나왔다. 차코가 1,900km 넘게 뻗은 연결망의 일부였다는 증거다.

기후가 차코의 역사를 빚었다. 협곡은 메마르고, 작물이 자라는 철이 짧으며 비가 들쭉날쭉하다. 차코 사람들은 절벽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모으는 물 관리 시설로 옥수수와 콩, 호박을 길렀다. 11세기의 비교적 비가 넉넉했던 시기가 가장 활발한 건설기와 겹치고, 1130년대에 시작된 극심한 가뭄이 대규모 건설의 끝과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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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누가 살았고, 왜 지었나

초기 방문자들은 푸에블로 보니토를 천 명 넘게 북적이며 사는 공동주택으로 상상했다. 지금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일 년 내내 산 사람이 훨씬 적었다고 본다. 화덕과 생활 공간의 수로 보면 수십 가구, 약 50~100명 정도였을 것이다. 다만 의식이나 잔치, 교역을 위해 특정 시기에는 훨씬 많은 사람이 모였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는 푸에블로 보니토와 다른 대가옥을 평범한 마을이 아니라 의례·정치·저장의 중심지로 본다. 주변 공동체의 순례자들이 계절마다 차코에 모여 물자와 노동을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푸에블로 보니토 앞에 있는 깨진 토기 등이 쌓인 큰 둔덕은 쓰레기 더미로도, 의례적 잔치와 의도적 퇴적의 흔적으로도 해석된다.

미국 남서부에서 발견된 가장 풍부한 매장은 건물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33호실에서 나왔다. 약 330년에 걸쳐 열네 사람이 이곳에 묻혔다. 이른 시기에 묻힌 한 남성 곁에는 목걸이와 발찌, 팔찌를 이루었던 터키석과 조개 구슬·펜던트 수천 점이 있었다. 근처의 다른 방에서는 푸에블로 보니토에서만 거의 나오는 형태인 키 큰 원통형 항아리 100여 점이 나왔는데, 2009년 발표된 화학 분석에서 그 일부에 메소아메리카 식물인 카카오의 잔여물이 확인되어, 의례에서 초콜릿 음료를 마셨음을 짐작하게 한다.

푸에블로 후손들은 흔히 차코를 여러 민족과 씨족이 모여 의식과 지식, 전통을 나누던 특별한 모임의 장소로 설명한다. 계절과 해·달에 관한 지식도 그 가운데 있었다. 이 관점은 협력과 지식의 공유를 강조하며, 주기적 모임을 보여 주는 고고학 증거와도 잘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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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후손 공동체: 살아 있는 장소로서의 차코

푸에블로 보니토를 지은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고학과 구전, 유전학은 그들의 후손이 애리조나의 호피, 주니, 아코마, 라구나, 그리고 케레스어·테와어·티와어·토와어를 쓰는 리오그란데 골짜기의 푸에블로 등 오늘날의 푸에블로 사람들이라는 데 뜻을 같이한다. 호피 씨족의 전승, 그리고 아코마·주니·지아·라구나 등의 전승은 씨족들이 여정 중에 차코를 거쳐 이주했다고 전한다. 호피는 조상을 ‘옛사람들’이라는 뜻의 ‘히사트시놈’이라 부른다.

많은 푸에블로 사람들은 흔히 ‘적의 조상’으로 옮겨지는 나바호어 낱말인 옛 고고학 용어 ‘아나사지’를 거부하고 ‘선조 푸에블로인’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또한 차코가 수수께끼처럼 ‘버려졌다’는 통념도 거부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조상들은 이주 전승이 전하는 대로 스스로 길을 떠났고, 그곳에는 여전히 조상의 영혼이 머문다. 라구나·주니 혈통의 교육자 존 가하테는 차코가 “폐허가 아니다. 공원도 아니다. 우리의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푸에블로 학자들은 외부 지식의 한계도 일깨운다. 호피 연구자 필립 투왈레츠티와는 차코가 “지겹도록 연구되었지만” 그 종교와 통치, 언어, 사회 조직에 대해 실제로 아는 것은 매우 적다고 지적했다. 일부 지식은 공동체 안에 간직되며 공개적으로 나눌 것이 아니므로, 외부 연구자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

오늘날 차코를 둘러싼 땅이 고향인 나바호(디네)도 협곡과 깊은 인연이 있다. 공원 안에서만 스페인 식민 이전부터 20세기까지에 걸친 나바호 고고 유적이 750곳 넘게 알려져 있고, 디네 구전은 디네 조상과 대가옥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전하며, 차코와 관련된 힘센 ‘도박꾼’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다. 협곡에 살던 나바호 가족들은 20세기에 쫓겨났지만 그 후손들은 이곳과의 관계를 이어 가고 있다. 공원은 1991년 설치된 ‘아메리카 원주민 협의 위원회’를 통해 나바호, 호피, 푸에블로 등 여러 부족과 협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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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건설의 끝, 발굴과 보호

푸에블로 보니토의 대규모 건설은 12세기 초에 끝났다. 1130년 무렵 시작된 긴 가뭄 동안 지역 중심지로서 차코의 역할은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북쪽의 애즈텍과 메사버디, 남쪽과 서쪽의 리오그란데, 리오푸에르코, 리틀콜로라도, 호피 지역 등으로 점점 옮겨 갔다. 토기로 보면 푸에블로 보니토는 1200년대까지 드문드문 쓰였다. 삼림 벌채와 밭의 침식 같은 환경 압박이 사회적·종교적 변화와 겹쳤을 것이다.

1896년 목장주 리처드 웨더릴과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조지 H. 페퍼가 뉴욕의 수집가 탤벗·프레더릭 하이드 형제의 후원(하이드 탐사대)으로 푸에블로 보니토 발굴을 시작했다. 1900년까지 네 시즌 동안 방 약 190개를 파내고 많은 유물을 뉴욕으로 실어 보냈다. 이런 발굴에 대한 우려가 1906년 미국 유물법 제정과 1907년 차코 캐니언 국가기념물 지정으로 이어지는 데 한몫했다.

1920년대에는 닐 저드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의 지원으로 대규모 발굴을 이끌어 건물 나머지의 상당 부분을 파내고 건축 발전 과정을 연구했다. 1970~80년대 국립공원관리청의 ‘차코 프로젝트’와 최근의 옛 소장품 재분석은 차코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 놓았다. 1980년 기념물은 차코 문화 국립역사공원이 되었고,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차코 보호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주변 샌환 분지의 석유·가스 개발이 공원 밖의 고고 유적과 신성한 경관을 위협해 왔다. 전 푸에블로 총독 협의회와 여러 부족 지도자들은 공원 둘레의 완충 지대를 요구해 왔고, 2023년 미국 내무부는 공원에서 약 10마일 안의 연방 토지를 새 석유·가스 임대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취했다. 원주민 공동체의 견해가 한결같지는 않은데, 일부 나바호 할당지 소유자가 이 지역의 광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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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계의 논쟁: 차코는 어떤 사회였나

위계인가, 공동체 의례인가. 고고학자들은 차코의 사회 조직을 두고 오래 의견이 갈렸다. 어떤 이들은 기념비적 대가옥, 도로망, 터키석과 이국적 물품의 집중, 33호실의 풍부한 매장을 근거로 지배 엘리트가 있는 위계 사회를 본다. 다른 이들은 궁전이나 왕의 도상, 강제의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차코를 순례와 잔치, 공동 노동으로 유지된 의례 중심지로 해석한다. 이는 역사 시대 푸에블로 사회의 비교적 평등한 가치관과도 더 잘 맞는다.

모계 왕조 연구. 2017년 더글러스 케넷과 스티븐 플로그가 이끈 연구팀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33호실 매장자의 고대 DNA를 발표해, 아홉 사람이 약 330년(서기 800~1130년경)에 걸쳐 모계로 물려받는 같은 미토콘드리아 DNA를 공유한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이것이 엘리트 모계 혈통을 보여 주며, 오늘날 많은 푸에블로 사회에서 모계 씨족이 중요하다는 점과도 맞는다고 주장했다. 비판자들은 모계 조상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권력의 세습을 증명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연구 윤리. 같은 연구는 조상 유해 연구를 둘러싼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유해를 소장한 박물관이 연방 반환법(NAGPRA)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발표 전 후손 부족과의 공식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학자 레베카 초시와 고고학자 루스 반 다이크 같은 학자들은 합법이라고 해서 윤리적인 것은 아니라며 이를 비판했고, 연구팀의 한 사람은 뒤에 남서부 공동체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밝혔다. 이 일은 후손 공동체가 연구 질문을 함께 짜고 무엇을 연구해도 되는지 결정하는 협력 연구를 촉진했다.

차코의 더 넓은 영향. 차코의 지역적 의미에 대한 제안은 소박한 것부터 대담한 것까지 다양하다. 스티븐 렉슨의 ‘차코 자오선’ 가설은 차코, 애즈텍, 그리고 후대 치와와의 중심지 파키메가 의도적으로 한 남북선 위에 놓여 정치권력의 연속성을 반영한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고고학자는 이를 입증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마코앵무, 구리 방울, 카카오로 드러나는 메소아메리카의 영향도 논쟁거리다. 직접 접촉의 흔적인지, 여러 중개자를 거친 원거리 교환인지, 먼 곳의 위신을 빌리려던 차코 지도자들의 선택인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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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증거와 방법

나이테. 차코는 연륜연대학 덕분에 세계에서 연대가 가장 잘 밝혀진 고고학 지역 가운데 하나다. 수천 개의 나무 들보가 벌채 연대를, 때로는 정확한 해까지 알려 주어, 푸에블로 보니토의 건설 순서를 자세히 복원할 수 있다. 목재의 화학 분석(스트론튬 동위원소)은 목재를 벤 먼 산맥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옛 발굴, 새 질문. 푸에블로 보니토의 상당 부분은 1896년에서 1920년대 사이, 오늘날의 고고학보다 맥락을 훨씬 적게 기록한 방법으로 발굴되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보관된 기록과 사진, 박물관 소장품을 다시 살펴 원통형 항아리나 마코앵무, 매장 연대 같은 새 질문에 답한다. 이런 작업은 초기 발굴 기록의 가치와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환경 자료. 꽃가루, 숲쥐 둥지 퇴적물, 퇴적층 시료, 나이테 기후 기록으로 강수량과 식생, 농사 조건을 복원해 가뭄과 환경 변화에 관한 이론을 검증할 수 있다. 이런 자료는 기후와 차코 역사의 상관관계를 보여 주지만, 사람들의 결정을 설명하려면 기후만으로는 부족하다.

원주민 지식. 구전, 씨족 이주사, 차코와 이어지는 지속적 의례 관계는 그 자체로 역사 지식의 원천으로 점점 더 인정받고 있다. 후손 학자들은 과학과 전통 서사가 때로는 일치하고 때로는 갈라지지만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일부 지식은 공유되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해 이 둘을 존중하며 아우르는 일은 오늘날 차코 연구의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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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대가옥
차코 세계의 크고 계획된 여러 층 석조 건물. 평범한 주거만큼이나 의례와 저장, 엘리트 거주에 쓰였다.
키바
흔히 땅속에 만든 둥근 의례 공간. 대키바는 공동체 전체를 위한 곳이었고, 키바는 지금도 푸에블로 생활에서 중요하다.
차코 연결망
길과 외곽 대가옥, 교환이 차코를 포코너스 지역과 그 너머의 공동체들과 이었다.
하늘 관찰
방위, 춘추분, 하지·동지, 달 주기에 맞춘 정밀한 배치는 오랜 천문 지식을 반영한다.
사라짐이 아닌 이주
푸에블로 전승과 고고학은 차코 사람들이 길을 떠났고 그 후손이 오늘날 살아 있다는 데 뜻을 같이한다.
살아 있는 조상의 장소
많은 원주민 부족에게 차코는 폐허가 아니라 신성하며 여전히 조상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다.
연구 윤리
조상 유해와 성지에 대한 연구에는 후손 공동체와의 협의와 협력이 점점 더 요구된다.

기록

  1. 약 828년 — 푸에블로 보니토 첫 단계와 관련된 가장 이른 나이테 연대.
  2. 약 850년 — 방들이 이루는 첫 호(弧)의 건설이 시작된다.
  3. 약 1050년 — 차코가 지역 곳곳의 대가옥 150곳 이상과 이어지고, 푸에블로 보니토가 크게 확장된다.
  4. 약 1130년 — 긴 가뭄이 시작되고 차코의 대규모 건설이 끝나며 사람들이 점점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
  5. 1849년 — 카라바할이 안내한 제임스 H. 심프슨 중위의 탐험대가 차코의 폐허를 기록하고 푸에블로 보니토라는 이름이 붙는다.
  6. 1896년 — 하이드 탐사대(웨더릴과 페퍼)가 푸에블로 보니토 발굴을 시작한다(1900년까지).
  7. 1907년 — 차코 캐니언 국가기념물이 지정된다.
  8. 약 1921년 — 닐 저드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의 푸에블로 보니토 발굴을 시작한다(1920년대 내내).
  9. 1941년 — ‘위협하는 바위’가 무너져 뒷벽 일부와 방들이 파괴된다(1월).
  10. 1980년 — 기념물이 확장되어 차코 문화 국립역사공원이 된다.
  11. 1987년 — 차코 문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12. 2017년 — 33호실 고대 DNA 연구가 발표되어 후손 부족과의 협의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난다.

용어 풀이

선조 푸에블로인
차코를 비롯한 여러 유적을 지은 오늘날 푸에블로 사람들의 조상. 옛 용어 ‘아나사지’보다 선호되는 말.
푸에블로
스페인어로 ‘마을’. 뉴멕시코와 애리조나의 원주민 부족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대가옥
차코 세계의 특징인 크고 계획된 석조 건물.
키바
흔히 반쯤 땅속에 만든 둥근 의례 공간.
대키바
공동체 전체의 의식에 쓰인 특히 큰 키바.
연륜연대학
해마다 생기는 나이테의 무늬를 맞추어 나무의 연대를 매기는 방법.
외곽 유적(아웃라이어)
차코 캐니언 밖에 차코 양식으로 지어져 협곡과 이어진 대가옥.
모계
혈통과 상속을 어머니 쪽으로 따지는 것.
NAGPRA
1990년 제정된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묘지 보호 및 반환법’.
히사트시놈
조상을 가리키는 호피어. ‘옛사람들’이라는 뜻.
원통형 항아리
주로 푸에블로 보니토에서 나오는 키 크고 좁은 토기. 일부에서 카카오 잔여물이 나왔다.

묻고 답하기

차코 사람들은 사라졌나요?

아니다. 시간을 두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갔고, 그 후손이 호피, 주니, 아코마, 라구나, 리오그란데 푸에블로 등 오늘날의 푸에블로 사람들이다.

푸에블로 보니토에는 몇 명이 살았나요?

예전 생각보다 훨씬 적어, 일 년 내내 산 사람은 50~100명쯤이었을 것이다. 다만 의식 때에는 훨씬 많은 사람이 모였을 수 있다.

키바가 뭐예요?

의식에 쓰는 둥근 방으로, 흔히 땅속에 있다. 지금도 많은 푸에블로 공동체에서 중요하다.

건설자들을 왜 ‘아나사지’라고 부르면 안 되나요?

나바호어에서 온 말로 흔히 ‘적의 조상’으로 옮겨지며, 많은 푸에블로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기고 ‘선조 푸에블로인’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차코 사람들은 초콜릿을 마셨나요?

멀리 남쪽 메소아메리카에서만 자라는 카카오의 잔여물이 푸에블로 보니토의 원통형 항아리에서 나와, 아마 의례에서 마셨을 것으로 보인다.

푸에블로 보니토는 왕이 다스렸나요?

흔히 말하는 왕의 증거는 없다. 풍부한 매장과 DNA는 중요한 모계 가문이 있었음을 시사하지만, 그 가문이 정치권력을 가졌는지는 논쟁 중이다.

2017년 DNA 연구는 왜 논란이 되었나요?

연구와 발표 전에 후손 부족과 협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와 원주민 지도자는 합법이더라도 비윤리적이라고 보았다.

푸에블로 보니토에 가 볼 수 있나요?

그렇다. 차코 문화 국립역사공원 안에 있으며 원래의 방 일부를 걸어서 지나갈 수 있다. 다만 신성한 장소로 존중해 달라는 당부를 받는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Pueblo Bonito. Wikipedia
  2. Pueblo Bonito.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
  3. History & Culture, Chaco Culture National Historical Park.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
  4. Chaco Culture National Historical Park. Wikipedia
  5. Ancestral Puebloans. Wikipedia
  6. Elizabeth Miller, Chaco Canyon’s Impact Continues to Expand. New Mexico Magazine, 2026
  7. Michael Balter, Ancient DNA Yields Unprecedented Insights into Mysterious Chaco Civilization. Scientific American, 2017
  8. Wade Campbell, The Diné History of Chaco Canyon. Archaeology Southwest, 2022
  9. Patricia L. Crown, W. Jeffrey Hurst, Evidence of cacao use in the Prehispanic American Southwest.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06, 2009
  10. Stephen H. Lekson, The Chaco Meridian: Centers of Political Power in the Ancient Southwest. AltaMira Press, 1999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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