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기린보다 키가 큰 돌들이 둥글게 서 있고, 그 위에 다른 돌이 문틀 뚜껑처럼 가로로 얹혀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게 스톤헨지예요. 잉글랜드 남부의 넓은 풀밭 위에 서 있고,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이 돌들의 정체를 궁금해했어요.
스톤헨지를 지은 사람들에게는 처음에는 쇠 도구도, 무거운 짐을 싣는 바퀴도, 글자도 없었어요. 소와 돼지를 기르고 곡식을 기르던 농부들이었지요. 이들은 밧줄과 나무 썰매, 사슴뿔 곡괭이, 망치돌로 코끼리 네다섯 마리만큼 무거운 돌을 옮기고 다듬었어요.
스톤헨지에는 두 종류의 돌이 있어요. 큰 회색 돌은 ‘사르센석’이라고 하는데 약 25km 떨어진 곳에서 왔어요. 작은 돌은 ‘블루스톤’이라고 하는데, 200km도 넘게 떨어진 웨일스의 언덕에서 왔어요. 작은 자동차를 나라 하나를 가로질러 끌고 오는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 셈이에요.
스톤헨지는 한 해 중 낮이 가장 긴 하짓날에는 입구 쪽 특별한 돌 위로 해가 떠오르고, 낮이 가장 짧은 동짓날에는 한가운데 줄을 따라 해가 지도록 지어졌어요. 지금도 하지 때면 해돋이를 보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요.
이곳은 죽은 사람을 위한 장소이기도 했어요. 처음 몇백 년 동안 여러 사람의 불에 탄 뼈가 이곳에 묻혔어요. 근처에서는 커다란 마을도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이 한겨울에 모여 돼지고기를 잔뜩 먹으며 큰 잔치를 벌인 것 같아요.
스톤헨지가 무엇에 쓰였는지 적어 둔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과학자들은 탐정처럼 돌과 뼈, 흙을 조사해서 어떻게, 왜 지었는지 알아내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조성 시기
- 기원전 약 3000년부터 약 1500년까지 여러 단계. 거대한 돌 구조는 기원전 약 2500년
- 위치
- 잉글랜드 남부 윌트셔주 에임즈베리 근처 솔즈베리 평원
- 건설자
- 브리튼섬의 신석기 시대와 초기 청동기 시대 공동체
- 돌
- 말버러 근처 웨스트 우즈에서 온 큰 사르센석(규질 사암, 평균 약 25톤), 웨일스 프레셀리 언덕에서 온 작은 블루스톤, 스코틀랜드 북동부에서 온 제단석
- 배치
- 지름 약 110m의 원형 도랑과 둑 안에, 인방돌을 얹은 사르센 원, 트릴리톤 다섯 기의 말굽형 배치, 블루스톤의 원과 타원
- 방위
- 주축이 북동쪽의 하지 해돋이와 남서쪽의 동지 해넘이를 가리킴
- 지위
- 에이브버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1986).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관리
쉬움
스톤헨지란 무엇인가
스톤헨지는 잉글랜드 남부 윌트셔주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선사 시대 기념물이다. 한가운데에는 ‘인방돌’이라는 가로 돌을 얹은 거대한 선돌의 원이 있고, 그 안에 더 큰 돌 문들이 말굽 모양으로 서 있다. 돌들 둘레로는 원형의 도랑과 둑이 돈다. 그 너머 풍경에는 무덤 봉분, 토루, ‘애비뉴’라는 긴 길 같은 옛 기념물들이 가득하다.
스톤헨지는 한 번에 지어지지 않았다. 기원전 3000년 무렵 흙으로 두른 울타리로 시작했고, 기원전 2500년 무렵 거대한 돌들이 세워지며 모습이 바뀌었으며, 그 뒤로도 여러 세기 동안 배치가 바뀌고 더해졌다. 지은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 이어서 초기 청동기 시대의 농경 공동체였다. 이들은 글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고고학에서 나온다.
‘헨지’라는 말은 스톤헨지에서 나왔다. 아마 ‘매달린 돌’이라는 뜻으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방돌을 묘사한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지금 이 말을 도랑 바깥에 둑을 두른 원형 토루를 가리키는 데 쓴다. 그런데 스톤헨지는 주된 둑이 도랑 안쪽에 있어서, 엄밀히 말하면 전형적인 헨지가 아니다.
쉬움
기념물 ‘읽기’
바깥에서 시작하자. 지름 약 110m의 원형 도랑과 둑이 기념물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이다. 둑 바로 안쪽에는 ‘오브리 구덩이’라 불리는 56개의 구덩이가 원을 이루는데, 17세기에 그 일부를 처음 알아본 존 오브리의 이름을 땄다. 입구는 북동쪽과 남쪽에 있었다.
한가운데에는 사르센 원이 있었다. 땅 위로 약 4m 높이의 선돌 30개 위에 인방돌 30개를 이어 얹어, 지름 약 33m의 끊김 없는 고리를 만들었다. 그 안에는 커다란 기둥돌 두 개 위에 인방돌 하나를 얹은 ‘트릴리톤’ 다섯 기가 북동쪽으로 열린 말굽 모양으로 섰다. 트릴리톤은 말굽 안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며, 가장 높은 것은 땅 위로 7m가 넘었다.
작은 블루스톤들은 사르센석 사이에 원과 타원으로 세워졌고, 여러 차례 다시 배치되었다. 한가운데 가까이에는 커다랗고 납작한 사암인 ‘제단석’이 지금은 쓰러져 일부 묻혀 있다. 원 바깥 북동쪽 입구 근처에는 ‘힐 스톤’이 서 있고, 두 줄의 둑과 도랑 사이로 난 길인 애비뉴가 입구에서 약 2.8km 떨어진 에이번강까지 이어진다.
이 모든 부분은 하나의 축을 공유한다. 하짓날 한가운데 서면 북동쪽 힐 스톤 근처, 애비뉴의 선을 따라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짓날 몸을 돌리면 남서쪽으로 지는 해가 가장 큰 트릴리톤 사이에 들어온다. 많은 고고학자는 건설자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순간이 동지의 해넘이였다고 본다.
쉬움
돌은 어디서 왔나
사르센석은 백악 구릉 위에서 자연적으로 생긴 규질 사암(실크리트)이라는 아주 단단한 돌이다. 하나가 평균 약 25톤이고 가장 큰 것은 그보다 더 무겁다. 2020년 한 돌에서 뚫어 낸 시료를 지구화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사르센석 대부분이 스톤헨지에서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말버러 근처 웨스트 우즈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블루스톤은 하나에 약 2~5톤으로 더 작고, 갓 깨뜨리면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여러 종류의 암석, 주로 조립현무암(돌레라이트)과 유문암으로 되어 있다. 지질학자와 고고학자들은 그 상당수를 200km 넘게 떨어진 웨일스 남서부 프레셀리 언덕의 특정 노두까지 추적했고, 칸 고에도그와 크라이그 로스이벨린 같은 채석 유적이 발굴되었다. 약 80개의 블루스톤이 옮겨 왔을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43개가 남아 있다.
6톤짜리 사암 판인 제단석도 오랫동안 웨일스에서 왔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2024년 이 돌 속 미세한 광물 입자를 연구한 결과, 700km 넘게 떨어진 스코틀랜드 북동부 오카디아 분지의 암석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육로로 왔는지 바닷길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무거운 짐을 끌 바퀴나 가축 없이 이렇게 먼 거리를 옮기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식물 섬유로 꼰 밧줄과 많은 사람을 동원해, 나무 썰매에 싣고 어쩌면 통나무 궤도 위로 끌었다고 본다. 실험을 통해 이런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중급
단계별로 지어진 기념물
기념물이 생기기 훨씬 전인 기원전 8000년 무렵, 중석기 시대의 수렵채집인들이 근처에 커다란 소나무 기둥을 한 줄로 세웠다. 1960년대 옛 주차장 자리에서 발견되었다. 뒤의 기념물과 관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장소가 아주 일찍부터 주목받았음을 보여 준다.
1단계(기원전 약 3000년). 사슴뿔 곡괭이로 원형 도랑과 둑을 파고 56개의 오브리 구덩이를 만들었다. 지금은 많은 고고학자가 오브리 구덩이에 원래 블루스톤이 서 있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웨일스의 돌 일부는 맨 처음부터 이곳에 왔던 셈이다. 구덩이와 도랑에는 화장한 유골이 묻혀, 스톤헨지는 당시 브리튼섬에서 가장 큰 묘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단계(기원전 약 2500년). 거대한 사르센 원과 트릴리톤이 세워졌고, 블루스톤이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돌은 망치돌로 다듬었고, 목공에서 빌려 온 이음새가 새겨졌다. 인방돌을 기둥돌에 고정하는 장부 이음, 인방돌끼리 잇는 제혀 이음이다. 사르센석의 안쪽 면은 바깥쪽 면보다 더 정성 들여 다듬어져, 마치 안쪽이나 축을 따라 보도록 설계된 듯하다.
뒤 단계(기원전 약 2400~1500년). 블루스톤이 새로운 원과 타원으로 다시 배치되었고, 애비뉴가 만들어졌다. 기원전 약 1800~1500년에는 ‘Y 구덩이’와 ‘Z 구덩이’라 불리는 두 줄의 구덩이가 돌 둘레에 파였는데,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재배치를 위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후 큰 공사는 멈췄지만 기념물은 여전히 이정표였고, 주변 봉분에 무덤을 쓰는 중심이 되었다.
중급
누가 스톤헨지를 지었나
첫 건설자들은 신석기 농민이었다. 고대 DNA 연구에 따르면, 조상이 아나톨리아(오늘날 튀르키예)에서 유럽 대륙을 거쳐 온 농경 집단이 기원전 4000년 무렵 브리튼섬에 들어와 이전의 수렵채집인을 대부분 대체했다. 이 농경 공동체들이 도랑을 파고 거대한 돌을 세웠다.
스톤헨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는 거대한 헨지인 더링턴 월스가 있다. 스톤헨지 리버사이드 프로젝트의 발굴에서 기원전 약 2500년의 집터가 여럿 나왔는데, 건설자들이나 축제에 모인 사람들의 거처였을 수 있다. 엄청난 양의 돼지 뼈(상당수가 한겨울에 도축된 것)와 음식 찌꺼기가 남은 토기는 계절마다 큰 잔치가 열렸음을 시사한다. 동물 뼈의 화학 분석은 일부 가축이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처럼 먼 곳에서 왔음을 보여 준다.
기원전 약 2450년부터는 독특한 토기에서 이름을 딴 ‘비커 문화’와 관련된 사람들이 대륙에서 브리튼섬으로 들어왔다. 고대 DNA 연구는 이 이주로 몇 세기 만에 이전 신석기 주민의 유전적 계통 대부분이 대체되었음을 시사한다. 비커 시대 사람들도 스톤헨지를 쓰고 고쳤다. 기원전 약 2300년 스톤헨지에서 약 5km 떨어진 곳에 화살촉, 구리 칼, 금 장신구와 함께 묻힌 ‘에임즈베리 궁수’는 치아의 동위원소 분석에 따르면 중부 유럽, 아마도 알프스 지역에서 자랐다.
그러니 스톤헨지는 한 민족이나 한 세대의 작품이 아니다. 천 년이 넘는 동안, 그사이 계통과 생활 방식이 바뀐 여러 집단을 포함한 공동체들이 짓고 쓰고 고쳐 나간 결과물이다.
중급
무엇에 쓰였나
문자 기록이 없으므로 스톤헨지의 쓰임새는 추론할 수밖에 없다. 몇 가지 기능은 분명해 보인다. 화장묘가 많은 죽은 이들의 기념물이었고, 한 해의 중요한 전환점인 하지와 동지에 맞춰져 있었으며, 먼 곳에서 사람과 물자를 끌어들여 브리튼섬 여러 공동체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마이크 파커 피어슨이 이끈 스톤헨지 리버사이드 프로젝트는 스톤헨지와 더링턴 월스가 한 쌍을 이루었다고 제안했다. 더링턴 월스의 나무 기둥 원은 산 사람의 것, 스톤헨지의 돌 원은 조상의 영역이며, 둘이 에이번강과 애비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한겨울 모임은 잔치를 벌이고 죽은 이를 기리는 때였다.
다른 해석은 다른 면을 강조한다. 티머시 다빌과 제프리 웨인라이트는 사람들이 블루스톤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었다고 보고, 근처에 묻힌 다치거나 병든 사람들을 근거로 들었다. 통합을 강조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돌을 윌트셔로 가져온 일이 멀리 떨어진 공동체들의 결합을 상징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르센 원이 태양력을 담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고고천문학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런 설명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스톤헨지는 쓰인 수백 년 동안 세대마다 다른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중급
전설에서 고고학으로
중세 작가들은 이야기로 스톤헨지를 설명하려 했다. 1136년 무렵 몬머스의 제프리는 마법사 멀린이 색슨인에게 죽은 브리튼인을 기리기 위해 아일랜드에서 돌을 옮겨 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7세기 건축가 이니고 존스는 이것이 로마 신전이라고 주장했고, 존 오브리는 로마 이전 브리튼인의 사제인 드루이드가 지었다고 보았다. 18세기의 윌리엄 스터클리는 드루이드설을 발전시켰고, 기념물이 하지 해돋이에 맞춰져 있음을 처음 기록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뒤에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은 스톤헨지가 철기 시대 드루이드보다 훨씬 오래되었음을 보여 주었지만, 드루이드라는 생각은 스톤헨지의 현대적 이미지를 만들었다. 20세기 초부터 현대 드루이드 단체들이 이곳에서 의식을 치러 왔고, 오늘날에도 하지와 동지는 이교도를 비롯한 여러 공동체에게 중요한 날이다.
기념물은 시간이 흐르며 변했다. 1797년과 1900년 마지막 날에 돌 몇 개가 쓰러졌다. 1915년 스톤헨지가 딸린 땅이 경매에 나와 세실 첩이 샀고, 그는 1918년 이를 나라에 기증했다. 1920년대 윌리엄 홀리의 발굴, 1950년대 리처드 앳킨슨 등의 발굴, 그리고 20세기에 여러 돌을 바로 세우고 다시 세우며 일부를 콘크리트로 고정한 복원 때문에, 오늘날의 기념물은 부분적으로 현대의 개입이 만든 결과이기도 하다.
중급
오늘의 스톤헨지 — 유산, 접근, 도로
1986년 스톤헨지와 에이브버리, 그리고 관련 유적들은 신석기·청동기 시대 의례 경관의 뛰어난 사례로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스톤헨지는 국가 소유로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관리하며, 주변 땅의 상당 부분은 내셔널 트러스트가 관리한다.
돌에 다가가는 문제는 갈등을 빚어 왔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돌 근처에서 열린 무료 축제가 금지되었고, 1985년에는 유적으로 향하던 여행자들과 경찰이 충돌한 이른바 ‘빈필드 전투’가 일어났다. 2000년부터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하지와 동지에 돌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는 관리된 개방을 허용하고 있으며, 이때 수천 명이 모인다.
도로는 오랜 문제였다. 2013년 돌 바로 옆을 지나던 도로가 폐쇄되고 새 방문자 센터가 더 먼 곳에 문을 열었다. 근처의 A303 간선 도로를 터널로 넣는 계획은 수십 년 동안 의견을 갈랐다. 찬성하는 쪽은 경관을 되살린다고 했고, 고고학자들과 유네스코 자문 기관을 비롯한 비판자들은 땅속 유적이 훼손될 것을 경고했다. 영국 정부는 2024년 이 계획을 취소했다.
심화
학술 논쟁과 열린 질문
연대. 건설 단계의 순서는 여러 번 수정되었다. 스톤헨지 I·II·III이라는 고전적 구분은 1990년대 대규모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사업에 근거한 순서로 바뀌었고, 2012년 다시 다섯 단계로 수정되었다. 블루스톤이 처음 도착한 때처럼 특정 사건의 연대는 여전히 논쟁 중인데, 초기 발굴 상당수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탓도 있다.
블루스톤의 운반. 20세기에 일부 지질학자는 빙하가 블루스톤을 솔즈베리 평원까지 날라 왔다고 주장했다. 지금 대부분의 연구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프레셀리 언덕의 채석 유적에 사람이 돌을 떼어 낸 흔적이 있고, 스톤헨지 근처에서 비슷한 빙하 퇴적물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블루스톤이 옮겨지기 전 웨일스의 와운 마운에서 먼저 원을 이루고 있었다는 가설도 제기되었으나 논란이 있다.
천문학. 하지·동지 방위는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더 정교한 주장들은 논란을 빚었다. 1960년대 천문학자 제럴드 호킨스는 스톤헨지가 일식·월식을 예측하는 ‘컴퓨터’였다고 주장했고, 리처드 앳킨슨 등이 이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사르센 원이 정밀한 달력을 나타낸다는 최근의 주장도 반박을 받았다. 이 논쟁은 의도된 방위와 우연의 일치를 가려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 준다.
사회와 권력. 누가 이런 사업을 조직했을까? 떠오르는 엘리트나 족장 사회의 증거를 보는 고고학자도 있고, 중앙 집권적 지배자 없이 여러 공동체가 협력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 사람과 동물, 돌이 브리튼섬 곳곳에서 왔다는 발견은 섬 전체의 연결망이 낳은 산물로서의 스톤헨지에 관심을 돌려놓았다.
심화
증거와 방법
발굴 기록이 기초다. 20세기 초에 내부의 절반가량이 발굴되었는데, 맥락을 파괴하는 방법이 쓰인 경우가 많았다. 1995년 잉글리시 헤리티지의 대규모 보고서는 20세기 발굴 기록을 새로운 방사성 탄소 연대들과 함께 묶었다. 스톤헨지 리버사이드 프로젝트(2003~2009)와 이후 블루스톤 채석장 연구 같은 현대 사업은 꼼꼼히 기록된 증거를 더했다.
과학적 분석이 이해를 바꾸고 있다. 사슴뿔 곡괭이와 뼈의 방사성 탄소 연대는 건설 단계를 고정한다. 지구화학과 암석학은 돌을 산지와 잇는다. 치아와 뼈의 동위원소 분석은 사람과 동물이 어디서 자랐는지 추적한다. 고대 DNA는 인구 이동을 드러낸다. 돌의 레이저 스캔은 도구 자국과 선사 시대의 도끼·단검 새김을 밝혀냈다.
경관 고고학은 스톤헨지를 따로 떼어 보지 않고 더 넓은 의례 경관의 일부로 본다. ‘스톤헨지 숨은 경관 프로젝트’ 같은 수 제곱킬로미터에 걸친 지구물리 탐사는 땅속의 구덩이, 도랑, 기념물을 지도로 그렸다. 핵심 교훈은 스톤헨지를 그 주변, 건설자들, 그리고 긴 사후의 역사와 함께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핵심 개념
- 하지·동지 방위
- 기념물의 축은 하지 해돋이와 동지 해넘이를 담아, 한 해의 전환점을 표시한다.
- 죽은 이들의 기념물
- 스톤헨지는 처음부터 매장지였고, 화장묘가 많다.
- 오랜 기간의 건설
- 변해 가는 공동체들이 천 년 넘게 짓고 고쳐 지었다.
- 먼 거리의 연결
-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돌, 브리튼섬 곳곳에서 온 동물은 섬 전체의 연결망을 보여 준다.
- 돌로 한 목공
- 장부 이음과 제혀 이음은 목공 기술을 돌에 적용한 것이다.
- 의례 경관
- 스톤헨지는 더링턴 월스, 애비뉴, 에이번강, 수백 기의 봉분과 이어져 있다.
- 현대의 의미
- 전설, 드루이드 부흥, 국가 유산, 접근을 둘러싼 갈등이 오늘날 스톤헨지 이해를 형성한다.
기록
- 약 기원전 8000년 — 중석기 수렵채집인들이 유적 근처에 커다란 소나무 기둥을 세운다.
- 약 기원전 3000년 — 원형 도랑과 둑, 오브리 구덩이가 만들어지고 화장묘가 시작된다.
- 약 기원전 2500년 — 사르센 원과 트릴리톤이 세워지고, 한가운데에 블루스톤이 놓인다.
- 약 기원전 2300년 — 근처에 에임즈베리 궁수가 묻힌다. 이 시기에 블루스톤이 재배치되고 애비뉴가 만들어진다.
- 약 기원전 1700년 — 돌 둘레에 Y·Z 구덩이가 파인다. 기원전 약 1500년 무렵 큰 공사가 끝난다.
- 약 1136년 — 몬머스의 제프리가 멀린이 아일랜드에서 돌을 옮겨 왔다는 전설을 기록한다.
- 1740년 — 윌리엄 스터클리가 스톤헨지를 드루이드와 연결하고 하지 방위를 기술한 연구를 출판한다.
- 1915년 — 세실 첩이 경매에서 스톤헨지를 사들이고, 1918년 나라에 기증한다.
- 1986년 — ‘스톤헨지, 에이브버리와 관련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다.
- 2013년 — 돌 옆 도로가 폐쇄되고 새 방문자 센터가 문을 연다.
- 2020년 — 과학자들이 사르센석 대부분의 산지로 웨스트 우즈를 밝혀낸다.
- 2024년 — 제단석의 산지가 스코틀랜드 북동부로 밝혀진다.
용어 풀이
- 신석기 시대
-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기념물을 세웠지만 아직 금속을 쓰지 않던 시대. 브리튼섬에서는 기원전 약 4000~2500년.
- 청동기 시대
- 구리와 청동 도구를 쓰기 시작한 시대. 브리튼섬에서는 (동기 시대를 거쳐) 기원전 약 2200년부터.
- 헨지
- 대개 도랑 바깥에 둑을 두른 원형 토루 울타리.
- 사르센석
- 잉글랜드 남부 백악 구릉에서 나는 매우 단단한 규질 사암.
- 블루스톤
- 스톤헨지의 작은 돌들을 부르는 이름. 대부분 웨일스 남서부의 화산암이다.
- 트릴리톤(삼석탑)
- 기둥돌 두 개 위에 세 번째 돌을 가로로 얹은 구조. 그리스어로 ‘돌 세 개’라는 뜻.
- 인방돌
- 기둥 위에 가로로 얹은 돌.
- 장부 이음
- 튀어나온 촉(장부)을 구멍(장붓구멍)에 끼우는 이음. 목공에서 빌려 왔다.
- 하지·동지
- 한 해 중 한낮의 해가 가장 높거나 가장 낮은 두 날.
- 봉분(배로)
- 고대의 흙무덤.
- 비커 문화
- 종 모양 잔에서 이름을 딴, 기원전 3천년기에 널리 퍼진 문화.
-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 탄소-14의 붕괴를 측정해 유기물의 연대를 알아내는 과학적 방법.
묻고 답하기
누가 스톤헨지를 지었나요?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브리튼섬의 선사 시대 농경 공동체가 짓기 시작했고, 이후 신석기 후기와 초기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다시 짓고 바꾸었어요. 훨씬 뒤에 살았던 드루이드가 지은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겼나요?
아마 나무 썰매에 싣고 밧줄로 많은 사람이 끌었을 거예요. 통나무 궤도를 썼을 수도 있어요. 실험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정확한 경로는 논쟁 중이에요.
스톤헨지는 달력인가요?
주축이 하지 해돋이와 동지 해넘이에 맞춰져 있어서 한 해의 전환점을 표시했어요. 하지만 정밀한 달력이나 일식 예측 장치였다는 주장은 논란이 있어요.
그곳에 사람이 묻혔나요?
네. 특히 초기 몇백 년 동안 여러 사람의 화장한 유골이 스톤헨지에 묻혔고, 주변에는 수백 기의 봉분이 있어요.
왜 웨일스에서 돌을 가져왔나요?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어요. 웨일스의 돌이 조상, 치유, 또는 돌을 가져온 공동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특별한 의미를 지녔을 수 있어요.
사람 대신 빙하가 블루스톤을 옮긴 건 아닌가요?
한때 일부 지질학자가 그렇게 주장했지만, 프레셀리 언덕에서 사람이 돌을 떼어 낸 흔적이 있는 채석 유적이 발견되어 지금은 대부분 사람이 옮겼다고 봐요.
제단석이 스코틀랜드에서 왔다는 사실이 왜 중요한가요?
건설자들의 연결망이 웨일스뿐 아니라 브리튼섬 북쪽 끝까지 닿았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에요. 6톤짜리 돌판이 700km 넘게 어떻게 이동했는지, 그런 여정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연결망은 무엇이었는지 새로운 질문을 던져요.
돌을 만져 볼 수 있나요?
평소에는 돌 둘레의 길을 따라 걸으며 봐요. 하지·동지를 비롯한 특정한 때에는 원 안으로 들어가는 특별 입장이 허용돼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Stonehenge, Avebury and Associated Sites.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History of Stonehenge. English Heritage
- Building Stonehenge. English Heritage
- Stonehenge. Wikipedia
- Stonehenge, Avebury and Associated Sites. Wikipedia
- Durrington Walls. Wikipedia
- Stonehenge Riverside Project. Wikipedia
- Amesbury Archer. Wikipedia
- Mike Parker Pearson, Stonehenge: Exploring the Greatest Stone Age Mystery. Simon & Schuster, 2012
- Rosamund M. J. Cleal, K. E. Walker, R. Montague, Stonehenge in its Landscape: Twentieth-Century Excavations. English Heritage, 199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