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4,500년 전, 이집트에서 대피라미드를 쌓던 무렵에 세워진 도시를 떠올려 보세요. 그 도시에는 길고 곧은 길, 구운 벽돌로 지은 집, 욕실, 그리고 더러운 물을 흘려보내는 길 밑 하수도까지 있었어요. 그 도시가 바로 지금의 파키스탄에 있는 모헨조다로예요.
그곳에는 수만 명이 살았을 거예요. 농부, 상인, 도공, 구슬 만드는 사람, 금속 장인들이었지요. 아이들은 작은 수레나 머리를 끄덕이는 동물 같은 흙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어요.
도시의 높은 곳 한가운데에는 ‘대욕장’이라는 커다란 수영장 같은 곳이 있어요. 천연 타르를 발라 물이 새지 않게 만들었어요. 무엇에 썼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많은 고고학자는 사람들이 특별한, 어쩌면 종교적인 방법으로 몸을 씻는 곳이었다고 생각해요.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인장’이라는 작은 돌 도장에 작은 그림과 기호를 새겨 글을 썼어요. 하지만 오늘날 아무도 그 글을 읽지 못해요. 그래서 이 도시를 뭐라고 불렀는지, 누가 다스렸는지, 어떤 말을 썼는지 아직 몰라요.
약 700년이 지나자 도시는 서서히 비었고, 모래와 흙에 묻혔어요. 지금 이름은 ‘죽은 자의 언덕’이라는 뜻이에요. 고고학자들은 약 100년 전부터 이곳을 발굴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세계유산이 되어 사람들이 열심히 지키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시기
- 기원전 2500년 무렵 건설(하라파 성숙기, 기원전 약 2600~1900년). 기원전 1700년 무렵 대부분 버려짐
- 위치
- 파키스탄 신드주 라르카나 지구, 인더스강 서안
- 문명
- 남아시아의 청동기 문명인 인더스(하라파) 문명
- 규모
- 면적 약 250~300헥타르로 추정. 인구는 흔히 약 4만 명으로 추정(대략적 수치)
- 구조
- 서쪽의 높은 언덕(‘성채’)과 격자형 거리를 갖춘 더 넓은 아랫마을
- 대표 유물
- 대욕장, ‘사제왕’ 조각, 청동 ‘춤추는 소녀’, 문자가 새겨진 인장, 표준 추
- 발굴
- 1920년대부터 인도 고고조사국이 발굴. 1965년까지 대규모 발굴
- 지위
- 유네스코 세계유산(1980), 등재명 ‘모헨조다로 고고 유적’
쉬움
모헨조다로는 어떤 곳인가
모헨조다로는 파키스탄 신드주 인더스강 근처에 있는 고고 유적이다. 약 4,500년 전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인더스 문명, 또는 처음 연구된 도시 하라파의 이름을 따 하라파 문명이라 부르는 문명에 속한다.
인더스 문명은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시기에 존재한 가장 이른 문명 가운데 하나다. 전성기에는 그 두 문명보다 넓은 지역, 곧 오늘날 파키스탄 대부분과 인도 서북부에 걸쳐 있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가 가장 큰 도시였고, 돌라비라, 가네리왈라, 라키가리 같은 도시도 있었다.
이 도시의 옛 이름은 알 수 없다. ‘모헨조다로’는 현대 신드어 이름으로, 보통 ‘죽은 자의 언덕’으로 풀이한다. 인더스 문자가 해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도시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그들이 남긴 기록이 아니라 건물과 유물에서 나온 것이다.
도시는 인더스강 하류의 평평하고 기름진 범람원 위 둔덕에 자리 잡았고, 현대 도시 라르카나에서 약 2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강은 농사에 필요한 물과 비옥한 흙을 날라 주었고, 배로 물건을 계곡 위아래와 아라비아해 쪽으로 실어 나르는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강이 위험하기도 했다. 홍수는 거셌고, 수천 년 동안 물길이 여러 번 바뀌었다. 모헨조다로의 삶은 늘 인더스강을 이용하는 일과 강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일 사이의 균형이었다.
쉬움
계획도시를 걸어 보기
도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서쪽에는 높이 약 12미터의 인공 언덕이 솟아 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를 ‘성채’라고 부른다. 동쪽에는 훨씬 넓은 ‘아랫마을’이 펼쳐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여기서 살고 일했다. 두 구역 모두 인더스강의 홍수를 피하려고 진흙 벽돌과 흙으로 쌓은 거대한 기단 위에 세워졌다.
큰길은 대략 남북과 동서로 뻗어 아랫마을을 큰 구획으로 나누었고, 거기서 작은 골목이 갈라졌다. 집 대부분은 가운데 안뜰을 두고 둘레에 방을 배치했으며, 문은 번잡한 큰길이 아니라 옆 골목 쪽으로 냈다. 계단으로 오르는 2층이 있는 집도 있었다.
물은 어디에나 있었다. 쐐기 모양 벽돌로 둘레를 쌓은 우물이 700개 넘게 발견되어, 많은 집이 가까이에 우물을 두고 있었다. 많은 집에 바닥이 기울어진 목욕 공간과 화장실이 있었다. 더러운 물은 토관을 따라 거리의 벽돌 하수도로 흘러갔는데, 하수도는 벽돌이나 돌판으로 덮었고 청소할 수 있는 구멍도 있었다. 이후 수천 년 동안 이런 시설을 갖춘 도시는 드물었다.
아랫마을에는 여러 종류의 건물이 섞여 있었다. 방이 많은 큰 집 옆에 작은 집이 있었고, 구슬·조개·도자기 작업장이 집들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양쪽으로 벽돌 하수도가 난 넓은 길이 있는가 하면, 집 사이로 좁은 골목이 구불구불 이어지기도 했다. 바둑판처럼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았고 시간이 흐르며 변했지만, 여러 세대 동안 사람들이 지켜 온 계획이 분명히 있었다.
쉬움
대욕장과 큰 건물들
가장 유명한 건물은 성채 위의 대욕장이다. 길이 약 12미터, 너비 약 7미터, 깊이 약 2.4미터의 직사각형 수조로, 양 끝에 계단이 있다. 꼼꼼히 맞춘 벽돌을 석고 모르타르로 붙이고 그 뒤에 천연 타르인 역청을 발라 물이 새지 않게 했다. 둘레에는 열주 회랑과 작은 방들이 있었고, 큰 배수로로 물을 뺄 수 있었다.
후대 남아시아 종교들이 목욕과 정결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많은 고고학자는 대욕장이 의례적 목욕에 쓰였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은 해석일 뿐이고, 이를 설명하는 글은 없다.
그 옆에는 벽돌 기초가 격자 모양으로 놓인 거대한 건물이 있다. 모티머 휠러는 수레가 곡식을 부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를 ‘대곡물창고’라 불렀다. 뒤에 조너선 마크 케노이어 같은 고고학자들은 곡식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대강당’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 밖에 집회 장소였을지 모르는 ‘주랑 홀’, 방이 많은 이른바 ‘학원(College)’ 등이 있다. 이 이름들은 모두 발굴자가 붙인 것으로, 실제 쓰임과 다를 수 있다.
중급
어떻게 지었나
모헨조다로는 주로 구운 벽돌로 지었다. 구운 벽돌은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보다 단단하고 물에 강하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인더스 유적들의 벽돌은 두께·너비·길이가 대략 1 : 2 : 4로 비슷한데, 공통된 건축 기준이 있었다는 증거다. 건축가들은 벽이 튼튼해지도록 벽돌을 일정한 방식으로 쌓았고, 기단과 채움에는 진흙 벽돌을 썼다.
도시는 이른 단계부터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우물과 하수도는 거리와 함께 계획되었고, 뒤에 다시 지을 때도 대개 옛 선을 따랐다. 수백 년 동안 홍수가 흙을 쌓고 집을 거듭 새로 지으면서 도시는 자기 잔해 위로 높아졌다. 휠러는 도시가 여러 차례 홍수를 겪고 재건되었다고 보았다.
도시의 상당 부분은 지금의 지하수면 아래에 있다. 가장 이른 층까지는 아직 제대로 파 내려가지 못했기 때문에, 정착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2015년 시추 조사는 옛 도시가 발굴된 구역보다 더 넓었음을 시사했다.
수백만 개의 벽돌을 굽고, 배수 시설을 설계하고, 노동력을 조직하는 능력은 강한 공동체 조직을 보여 준다. 그런데 궁전이나 왕릉, 웅장한 신전은 뚜렷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 모헨조다로는 같은 시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도시와 매우 다르다.
중급
일과 교역, 일상생활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밀과 보리를 기르고, 혹소(제부)를 포함한 소를 쳤으며, 면직물을 짰다. 목화로 천을 짠 것으로는 가장 이른 사례 가운데 하나다. 장인들은 고운 토기, 조개 팔찌, 돌·금속 도구, 놀라운 정밀함으로 구멍을 뚫은 긴 홍옥수 구슬을 만들었다. 조개 가공처럼 특정 공예에 특화된 구역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처트로 만든 정육면체 표준 추를 썼는데, 작은 단위에서는 두 배씩 늘고 큰 단위에서는 십진법을 따르는 체계였다. 이 도시에서 나온 조개 자 조각에는 간격을 정확히 맞춘 눈금이 새겨져 있다. 이런 표준 덕분에 넓은 지역에서 공정한 거래가 가능했다.
교역은 인더스 너머 멀리까지 닿았다. 인더스의 인장과 구슬, 추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만,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설형문자 문헌은 홍옥수와 목재 등을 공급한 ‘멜루하’라는 땅을 언급하는데, 대부분의 학자는 멜루하를 인더스 지역으로 본다. 다만 이는 추론이다.
집 크기가 다르니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물과 욕실, 하수도를 폭넓게 누렸다는 점은 많은 고고학자에게 이례적으로 고르다는 인상을 주었다. 아이들의 장난감, 주사위, 동물과 사람 모양 토우는 일상과 놀이의 한 장면을 보여 준다.
중급
인장, 조각, 믿음
인더스 유적에서는 주로 동석(凍石)으로 만든 작은 정사각형 인장이 수천 점 나왔다. 대부분 동물 한 마리와 그 위의 짧은 기호 줄을 새겼는데, 가장 흔한 동물은 고고학자들이 ‘일각수’라 부르는 뿔 하나 달린 소 같은 짐승이다. 물건에 붙인 점토 꼬리표에 찍는 데 썼을 것이며, 소유자나 관리, 집단을 나타냈을 수 있다.
‘사제왕’은 1927년에 발견된 높이 약 17.5센티미터의 동석 흉상이다. 머리띠를 두르고, 한때 붉은 안료를 채웠던 세잎 무늬 옷을 입은 수염 난 남자를 새겼다. 이름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현대의 추측이며, 공동체의 중요한 인물이나 조상을 나타냈을 수도 있다. 지금은 카라치의 파키스탄 국립박물관에 있다.
‘춤추는 소녀’는 1926년에 발견된 높이 약 10.5센티미터의 청동상으로, 밀랍 주조법으로 만들었다. 한쪽 팔에 팔찌를 가득 찬 젊은 여성이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정말 춤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뉴델리의 인도 국립박물관에 있다.
이른바 ‘파슈파티 인장’에는 동물들에 둘러싸여 책상다리로 앉은 인물이 새겨져 있다. 존 마셜은 이를 힌두교 신 시바의 초기 모습이라고 보았고, 요가 자세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는 이런 후대 종교와의 연결은 증명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여성 토우를 모신(母神) 숭배의 흔적으로 읽기도 하지만, 그 의미 역시 논쟁 중이다.
중급
쇠퇴와 버려짐
기원전 1900년 무렵부터 인더스의 대도시들은 쇠퇴했다. 모헨조다로의 후기 층에서는 건축이 조잡해지고, 길 위에 집이 들어서며, 관리가 소홀해진 모습이 보인다. 기원전 1700년 무렵에는 도시가 대부분 버려졌지만, 사람들은 지역 곳곳의 작은 마을에서 계속 살았다.
단 한 번의 재앙은 없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몬순 변화와 건조해진 기후, 강줄기의 이동, 홍수와 토사 퇴적, 농경지의 부담, 메소포타미아와의 원거리 교역 붕괴 같은 여러 원인이 겹쳤다고 본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 포셀은 한 번의 거대한 진흙 홍수보다 잦은 작은 홍수와 토지 과다 이용 같은 점진적 과정을 강조했다.
대도시의 종말이 사람들의 종말은 아니었다. 하라파 후기에 많은 공동체가 동쪽과 남쪽, 곧 갠지스 평원과 구자라트 쪽으로 옮겨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 인장의 문자와 표준 추는 대부분 사라지고 원거리 교역도 줄었지만, 농업과 공예, 일부 전통은 이어졌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이 변화를 인구의 갑작스러운 소멸이 아니라 사회의 변모로 설명한다.
훨씬 뒤인 서기 초 몇 세기에 성채 언덕 위에 불교 스투파가 세워졌다. 20세기에 고고학자들의 눈길을 처음 끈 것도 이 스투파의 폐허였다.
중급
재발견과 발굴
1919~1920년과 1922년 인도 고고조사국의 R. D. 바네르지는 불교 스투파를 조사하러 이 언덕을 찾았다가 그 아래에서 훨씬 오래된 유적을 발견했다. 1924년 고고조사국장 존 마셜은 하라파와 모헨조다로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고대 문명에 속한다고 세계에 발표했다. 곧 학자들은 비슷한 인장이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덕분에 이 도시들의 연대를 기원전 3천년기로 잡을 수 있었다.
1920~1930년대 K. N. 딕시트, 마셜, 어니스트 매케이가 대규모 발굴을 이끌었다. 모티머 휠러가 1950년 성채를 발굴했고, 조지 데일스가 1964~1965년 마지막 대규모 발굴을 지휘했다. 그 뒤 드러난 벽이 부서져 가자 발굴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1980년대 미하엘 얀센과 마우리치오 토지가 이끈 독일·이탈리아 조사처럼 지표 조사와 기록, 보존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초기 해석은 메소포타미아와의 비교에 크게 기댔다. 마셜은 처음 보고서에서 ‘인도-수메르 문명’이라는 표현까지 썼다가, 인더스 도시들이 독자적인 문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발견은 남아시아 문명사가 베다 시대에서 시작된다는 당시의 통념을 뒤집고, 이 지역의 도시 역사를 천 년 이상 끌어올렸다.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할은 유물까지 나누었다. 모헨조다로는 파키스탄에 속했지만 많은 유물은 델리에 있었다. 소장품은 두 나라가 나누어 가졌는데, 때로는 목걸이 구슬을 한 알씩 나눌 정도였다. 파키스탄은 사제왕을, 인도는 춤추는 소녀를 가졌다. 다만 사제왕이 언제 어떻게 카라치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중급
벽돌 도시를 지키는 일
모헨조다로는 1980년 남아시아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같은 해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국제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가장 큰 위협은 소금이다. 지하수가 벽돌 속으로 스며 올라와 뜨거운 기후에서 증발하면, 벽돌 안에서 소금 결정이 자라 벽돌을 부스러뜨린다.
홍수와 침식도 위험하며, 예전 보수 공사 가운데 일부는 알맞지 않은 재료를 써서 원래 벽을 손상시켰다. 2011년 유적 관리 책임이 신드 주정부로 넘어갔고, 파키스탄 고고학자들은 관리가 나아지지 않으면 유적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2014년에는 유적에서 축제 개막식을 열려는 계획이 고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보존에는 어려운 선택이 따른다. 드러난 구역을 다시 묻어 보호할지, 얼마나 복원할지, 관광과 보존을 어떻게 조화시킬지의 문제다. 대규모 발굴을 멈춘 결정은 고고학 자체가 연약한 유적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유물은 지금 카라치의 파키스탄 국립박물관, 모헨조다로 현지 박물관, 뉴델리의 인도 국립박물관, 그리고 영국박물관을 비롯한 해외의 소규모 소장처에 흩어져 있다. 유적 입구에는 사제왕의 대형 복제품이 서 있어, 이 도시가 파키스탄 고대 유산의 상징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심화
쟁점: 통치자, 침입설, 해독되지 않은 문자
모헨조다로는 누가 다스렸을까. 뚜렷한 궁전과 왕릉, 전쟁 묘사가 없다는 점 때문에 여러 모델이 경쟁한다. 하나의 인더스 국가, 여러 도시국가, 상인이나 사제 엘리트의 지배, 느슨한 협의체 등이다. 표준화된 벽돌과 추는 조정 능력을 보여 주지만 반드시 중앙집권적인 왕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논쟁은 대규모 도시화에 강한 지배 계급이 꼭 필요한가라는 고고학의 더 넓은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초기 발굴자들은 도시가 인도-아리아인의 침입으로 무너졌다고 보았다. 휠러는 위층에서 발견된 유골 무리를 마지막 학살의 희생자로 보고, ‘성채 파괴자’로 불린 베다의 신 인드라와 연결했다. 조지 데일스는 1964년 이 유골들이 서로 다른 시기의 것이며 한 번의 학살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이후 연구에서도 폭력적 공격의 증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침입설로 도시의 종말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인도-아리아어가 남아시아에 들어온 과정은 별개의, 정치적으로 민감한 연구 분야로 남아 있다.
인더스 문자는 수백 개의 기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 평균 몇 글자에 불과한 아주 짧은 새김글이다. 이중 언어 비문이 없는 상황에서 초기 드라비다어, 인도-아리아어 등과 연결하는 해독 주장이 수없이 나왔고, 이것이 언어를 온전히 적은 문자인지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어느 것도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이름도 논쟁거리다. 일부 인도 저술가들은 말라 버린 가가르-하크라강을 『리그베다』의 사라스바티강과 동일시하며 ‘인더스-사라스바티 문명’이라는 이름을 쓴다. 지질학 연구는 하라파 시대의 가가르-하크라강이 빙하에서 발원한 큰 강이 아니라 몬순에 기대는 하천이었다고 시사하며, 많은 고고학자는 중립적인 ‘인더스’나 ‘하라파’라는 이름을 선호한다.
심화
증거와 방법
우리가 아는 것의 상당 부분은 1920~1930년대 발굴에서 나왔다. 당시에는 많은 흙을 빠르게 걷어 내며 자연 퇴적층이 아니라 깊이를 기준으로 유물을 기록했다. 그래서 건축 단계를 가르거나 개별 유물의 연대를 정확히 잡기가 어렵다. 후대 연구자들은 옛 기록을 다시 분석하고, 아직 서 있는 벽을 재조사하며, 제한적인 신규 발굴과 지표 조사, 건축 실측을 결합해 왔다.
인더스 지역의 방사성탄소 연대와 인더스 유물이 나온 메소포타미아 유적의 맥락이 하라파 성숙기 연대의 뼈대를 이룬다. 동물 뼈와 식물 유체, 치아 동위원소 연구는 식생활과 농업, 지역 간 사람의 이동을 밝히기 시작했다.
가장 큰 과제는 여전히 해석이다. ‘성채’, ‘곡물창고’, ‘학원’, ‘사제왕’ 같은 용어는 인더스를 메소포타미아나 후대 인도 전통과 비교한 초기 발굴자들의 가정을 반영한다. 최근 연구는 먼저 건물의 형태와 함께 나온 유물로 건물을 기술하고, 해석을 증거 전체의 양상에 비추어 검증하려 한다. 표준 개설서로는 조너선 마크 케노이어의 『인더스 문명의 고대 도시들(Ancient Cities of the Indus Valley Civilization)』과 그레고리 포셀의 『인더스 문명: 현대적 관점(The Indus Civilization: A Contemporary Perspective)』이 있다.
핵심 개념
- 도시 계획
- 격자형 거리, 표준화된 벽돌, 계획된 배수 시설은 도시 전체를 하나로 설계하고 유지했음을 보여 준다.
- 물 관리
- 수백 개의 우물과 개인 욕실, 덮개 있는 하수도는 물이 일상과 어쩌면 의례의 중심이었음을 보여 준다.
- 표준화
- 넓은 지역에 걸친 공통의 벽돌 비율, 추, 인장 양식은 공통 규칙과 조정 능력을 시사한다.
- 궁전 없는 권력
- 뚜렷한 궁전이나 왕릉이 발견되지 않아 도시가 어떻게 다스려졌는지 의문을 남긴다.
- 원거리 교역
- 인더스 물품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만에 이르렀고, 메소포타미아 문헌은 이 지역을 ‘멜루하’라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 점진적 쇠퇴
- 한 번의 침입이 아니라 기후 변화, 강줄기 이동, 경제 변화가 도시가 버려진 까닭을 가장 잘 설명한다.
- 침묵하는 문자
- 인더스 문자가 해독되지 않아 도시의 언어와 이름, 믿음은 여전히 알 수 없다.
기록
- 약 기원전 3300년 — 인더스 지역에서 하라파 초기 문화가 발전함.
- 약 기원전 2600년 — 하라파 성숙기 시작. 대도시들이 등장함.
- 약 기원전 2500년 — 모헨조다로가 큰 계획에 따라 건설됨.
- 약 기원전 1900년 — 인더스 대도시들의 쇠퇴가 시작됨.
- 약 기원전 1700년 — 모헨조다로가 대부분 버려짐.
- 약 200년 — 성채 언덕 위에 불교 스투파가 세워짐(연대는 논쟁 중).
- 1922년 — R. D. 바네르지가 언덕을 조사해 스투파 아래의 훨씬 오래된 유적을 발견함.
- 1924년 — 존 마셜이 인더스 문명의 발견을 발표함.
- 1947년 — 인도·파키스탄 분할로 출토 유물이 두 나라로 나뉨.
- 1950년 — 모티머 휠러가 성채를 발굴함.
- 1965년 — 조지 데일스의 발굴이 끝나고, 이후 유적 보호를 위해 대규모 발굴이 중단됨.
- 1980년 — 모헨조다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됨.
용어 풀이
- 하라파 문명
- 하라파 유적의 이름을 딴 인더스 문명의 다른 이름.
- 하라파 성숙기
- 인더스 문명의 도시 단계. 기원전 약 2600~1900년.
- 성채
- 모헨조다로 서쪽의 높은 언덕. 발굴자가 붙인 이름으로, 실제 요새였다는 증거는 아니다.
- 구운 벽돌
- 가마에 구운 벽돌. 햇볕에 말린 벽돌보다 단단하고 물에 강하다.
- 역청
- 대욕장의 방수에 쓴 천연 타르.
- 인장
- 점토에 무늬와 기호를 찍는 데 쓴 작은 돌 도장.
- 동석(凍石)
- 무른 돌로, 새긴 뒤 가열하면 단단해진다.
- 밀랍 주조법
- 밀랍 모형을 흙으로 감싸고 밀랍을 녹여 낸 자리에 쇳물을 부어 금속 물건을 만드는 방법.
- 멜루하
- 메소포타미아 문헌에 나오는 먼 나라. 보통 인더스 지역으로 본다.
- 스투파
- 흔히 사리를 모신 불교의 둥근 무덤 모양 기념물.
- 지하수면
- 땅속이 물로 가득 찬 층의 윗면.
묻고 답하기
4,500년 전에 정말 욕실이 있었나요?
네. 많은 집에 목욕 공간이 있었고 화장실이 있는 집도 있었어요. 이 시설들은 관을 통해 거리의 하수도와 이어져 있었어요.
모헨조다로의 왕은 누구였나요?
왕이 있었는지조차 몰라요. 궁전이나 왕릉이 발견되지 않았고, ‘사제왕’ 조각의 이름도 추측일 뿐이에요.
왜 인더스 문자를 못 읽나요?
새김글이 아주 짧고, 긴 글이 없으며, 로제타석 같은 이중 언어 비문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모헨조다로는 침입자에게 파괴되었나?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더 이상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른바 학살 유골은 서로 다른 시기의 것이며, 환경과 경제의 복합적 변화가 쇠퇴를 더 잘 설명한다.
모헨조다로는 후대 인도 문화와 어떤 관계인가?
목욕의 중요성, 일부 장신구와 공예처럼 이어졌을 수 있는 관습이 있지만, 힌두교 같은 후대 종교와의 직접적 연결은 논쟁 중이며 증명하기 어렵다.
고고학자들은 왜 대규모 발굴을 멈췄나?
드러난 구운 벽돌이 소금과 날씨 때문에 빠르게 부서졌기 때문이다. 1965년 이후 연구는 보존과 비파괴 조사에 집중하고 있다.
인구 약 4만 명이라는 추정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도시 면적과 주거 밀도에 대한 가정에서 나온 대략적 수치다. 학자들은 이를 정확한 수가 아니라 규모를 가늠하는 값으로 다룬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Mohenjo-daro. Wikipedia(영어)
- Indus Valley Civilisation. Wikipedia(영어)
- Priest-King (sculpture). Wikipedia(영어)
- Dancing Girl (prehistoric sculpture). Wikipedia(영어)
- Indus script. Wikipedia(영어)
- Archaeological Ruins at Moenjodaro. UNESCO 세계유산센터
- Jonathan Mark Kenoyer, Ancient Cities of the Indus Valley Civiliz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 American Institute of Pakistan Studies, 1998
- Gregory L. Possehl, The Indus Civilization: A Contemporary Perspective. AltaMira Press, 2002
함께 보기
- 기자의 대피라미드이집트 파라오 쿠푸를 위해 세운 왕릉이다. 기자의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크며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 쐐기 문자갈대를 젖은 점토에 눌러 쓴 세계 최초의 문자 가운데 하나.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발명되어 3,000년 넘게 여러 언어를 적는 데 쓰였다.
- 길가메시 서사시우루크의 왕 길가메시가 친구 엔키두를 잃고 영생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 수메르의 여러 시를 엮어 바빌로니아 서사시로 완성했다.
- 리그베다베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가장 오래된 찬가 모음. 글로 적히기 전 수백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 카랄페루 해안에 기원전 2600~2000년 무렵 세워진, 돌 기단 피라미드와 원형 광장을 갖춘 토기 이전 시기의 계획 도시. 흔히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불린다.
- 크노소스크레타섬의 주요 청동기 시대 중심지로, 규모가 큰 미노아 궁전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