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카랄 (카랄-수페 신성 도시)

Ciudad Sagrada de Caral

약 기원전 2600–2000년 · 수페 골짜기 (카랄-수페·노르테치코 문명)

한 문장으로

카랄은 약 5,000년 전 페루의 사막 골짜기에 사람들이 돌 피라미드와 둥글게 파인 광장을 세운 도시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다.

카랄 (카랄-수페 신성 도시)
이미지: Håkan Svensson Xauxa · CC BY 2.5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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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페루의 메마른 모래 골짜기를 떠올려 보자. 강을 따라 초록 밭이 이어지고, 둘레에는 갈색 산이 솟아 있다. 약 5,000년 전 이곳 사람들은 돌로 윗부분이 평평한 커다란 피라미드를 쌓고, 넓은 광장과 땅을 커다란 그릇처럼 둥글게 파낸 광장을 만들었다. 이곳이 바로 카랄이다.

카랄은 아주아주 오래되었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 유명한 피라미드를 짓던 무렵에 카랄도 세워지고 있었다. 마야나 잉카보다 훨씬 앞선 때다. 지금까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발견된 도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축에 든다.

카랄을 지은 사람들에게는 영리한 방법이 있었다. 식물 섬유로 짠 자루에 돌을 가득 채워 벽 안쪽에 차곡차곡 쌓은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자루를 ‘시크라’라고 부른다.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면 자루가 조금씩 움직였다가 다시 자리를 잡아서 건물 전체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푹 꺼졌다가 다시 모양을 찾는 빈백 의자를 생각하면 된다.

카랄 사람들은 흙을 구워 그릇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다른 일에 뛰어났다. 목화를 길러 옷감과 고기잡이 그물을 짰고, 바닷가 어부들과 물건을 바꿔 멸치와 조개를 얻었다. 음악도 즐겼다. 고고학자들은 펠리컨과 콘도르의 뼈로 만든 피리를 찾아냈다.

카랄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없는 것’이다. 적을 막는 성벽도, 무기 더미도, 큰 전투의 흔적도 없다. 그래서 많은 고고학자는 카랄 사람들이 군대보다는 종교와 축제, 교역으로 사회를 하나로 묶었다고 생각한다.

한눈에 보기

시기
주요 건설 기원전 2600~2000년경(후기 아르카익기, 토기 이전 시기). 더 넓은 카랄-수페(노르테치코) 문화는 기원전 3000~1800년경
위치
페루 리마주 바랑카 지방 수페강 골짜기. 태평양에서 내륙으로 약 23km, 리마에서 북쪽으로 약 180km
규모
기념비적 중심부 약 65~66헥타르. 큰 피라미드 6기와 여러 작은 기단, 광장, 주거 구역
가장 큰 건물
대피라미드(Pirámide Mayor). 밑변 약 150×110m의 계단식 기단(높이는 자료마다 다름)
사회
카랄-수페(노르테치코) 문명의 중심지.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문명이 시작된 요람 가운데 하나
주요 연구자
루스 샤디 솔리스와 카랄 고고학 프로젝트(1994년부터)
지위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카랄-수페 신성 도시’
특징
아주 이른 시기의 기념비 건축, 둥글게 파인 광장, 뼈 피리, 초기 키푸로 추정되는 매듭 끈, 전쟁 흔적의 부재

쉬움

카랄은 어떤 곳인가

카랄은 페루 중북부 해안 수페강 골짜기에 있는 고고 유적이다. 초록빛 골짜기 바닥보다 조금 높은 메마른 단구 위, 태평양에서 약 23km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기원전 2600년에서 2000년 무렵 사람들은 이곳에 돌과 흙으로 쌓은 기단, 탁 트인 광장, 둥글게 파낸 원형 광장, 집들을 계획적으로 배치했다. 페루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카랄 신성 도시(Ciudad Sagrada de Caral)’라고 부른다.

카랄이 중요한 까닭은 그 나이에 있다. 카랄의 첫 피라미드가 올라가던 무렵 이집트 고왕국은 기자에 피라미드를 짓고 있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메르 도시들이, 남아시아에서는 인더스 도시들이 커 가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이후 수백 년 동안 이만한 규모의 건축이 나타나지 않았다. 카랄은 멕시코의 올멕 중심지보다 천 년 이상 앞선다. 그래서 흔히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소개된다.

카랄은 홀로 있지 않았다. 수페 골짜기와 이웃한 파티빌카·포르탈레사 골짜기에는 초기 유적이 무리 지어 있고, 카랄은 그 가운데 가장 크다. 고고학자들은 이 유적 무리를 노르테치코(‘작은 북쪽’) 문명이라 부르고, 페루 학자들은 카랄-수페 문명이라는 이름을 점점 더 많이 쓴다. 이들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글을 남기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또 자기 도시를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2009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카랄-수페 신성 도시’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다. 아메리카에서 복합 사회가 나타난 매우 이르고 잘 보존된 사례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1][2][3]

쉬움

도시를 ‘읽는’ 법: 피라미드, 광장, 집

유적은 보통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위쪽 구역(카랄 알토)에는 가장 큰 건물들이 있다. 대피라미드, 중앙 피라미드, 채석장 피라미드(라 칸테라), 회랑 피라미드(라 갈레리아), 작은 피라미드, 우안카 피라미드다. 아래쪽 구역(카랄 바호)에는 원형극장 신전과 작은 기단, 많은 집이 있다. 기념비적 중심부는 약 65헥타르이고 공공건물은 서른 채 남짓이다.

카랄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처럼 뾰족하지 않다. 계단 모양으로 층을 이루며 꼭대기가 평평한 거대한 기단이고, 가운데 계단으로 오른다. 꼭대기에는 방과 안뜰, 제단이 있었고, 어떤 방에는 제물을 태우던 작은 화덕이 가운데 놓여 있었다. 가장 큰 대피라미드는 밑변이 대략 150×110m다. 자연 경사면 위에 솟아 있어 어디서 재느냐에 따라 높이가 약 18m에서 약 28m까지 다르게 발표되었다.

여러 피라미드 앞에는 둥글게 파낸 원형 광장이 있다. 땅을 둥글게 파고 돌로 벽을 두른 뒤 계단으로 내려가게 한 마당이다. 아래쪽 구역의 원형극장 신전에는 지름 약 29m의 특히 큰 원형 광장이 있다. 이런 둥근 공간은 아마 음악과 춤이 곁들여진 모임과 의례에 쓰였을 것이다. 둥글게 파인 광장은 이후 안데스 종교 건축에 되풀이해 나타난다.

공공건물 둘레에는 주거 구역이 있었다. 피라미드 가까이에는 크고 잘 지은 집터가, 조금 떨어진 곳에는 갈대와 진흙으로 지은 소박한 집들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차이를 신분의 차이로 읽는다. 어떤 가족은 신전 곁에 살며 더 좋은 음식을 먹었고, 다른 이들은 소박한 집에 살았다. 한 피라미드 근처에는 높이 약 2m의 선돌 ‘우안카’가 서 있는데, 신성한 표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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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카랄의 삶: 목화, 물고기, 음악

카랄은 고고학에서 후기 아르카익기 또는 토기 이전 시기라고 부르는 때에 속한다. 사람들은 아직 불에 구운 토기를 만들지 않았고, 대신 조롱박과 바구니, 직물, 돌과 뼈로 만든 도구를 썼다. 가장 중요한 작물은 아마 목화였을 것이다. 수페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간단한 수로의 도움을 받아 길렀다. 목화는 옷과 자루를 만드는 천이 되었고, 무엇보다 고기잡이 그물을 짜는 실이 되었다.

먹을거리는 농사와 바다 양쪽에서 왔다. 호박, 콩, 고구마, 구아바, 루쿠마, 아보카도 같은 작물을 길렀고, 해안에서 가져온 물고기와 조개, 특히 멸치와 정어리를 많이 먹었다. 수페강 하구, 카랄에서 강을 따라 약 25km 내려간 곳의 해안 유적 아스페로는 카랄과 긴밀히 이어진 어촌이었다. 흔히 이런 교환을 떠올린다. 내륙 농민은 그물용 목화와 식물성 식량을 보내고, 해안 어부는 말린 생선과 조개를 보냈다.

음악도 중요했던 것 같다. 카랄에서는 펠리컨과 콘도르의 날개뼈를 깎아 만든 가로피리 32개와, 사슴·라마 뼈로 만든 뿔피리 모양의 악기 서른여 개가 나왔다. 피리 한 묶음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으로 기원전 2170년 무렵의 것으로 나타났다. 이 악기들은 광장에서 열린 공공 의례를 짐작하게 한다.

카랄 사람들은 골짜기 너머 먼 곳과도 교류했다. 샤디는 열대 숲의 동물인 원숭이 그림이 안데스 동쪽 아마존 쪽 공동체와의 교류를 보여 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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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카랄 짓기: 시크라, 노동, 다시 쌓기

기단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단계적으로 쌓였다. 건설자들은 진흙 모르타르로 돌을 쌓아 옹벽을 세우고 그 안을 잡석으로 채웠다. 이 채움재의 독특한 요소가 시크라다. 식물 섬유로 짠 그물 자루에 돌을 채워 한 덩어리째 놓은 것으로, 기단 안에서 수천 개가 발견되었다. 이 자루의 갈대로 대피라미드의 건설 연대를 방사성 탄소로 측정했는데, 기원전 2600년 무렵 공사가 이루어졌음을 가리켰다.

시크라에는 실용적 장점이 있었다. 한 사람이나 작은 무리가 채석장에서 자루를 채워 공사장까지 나를 수 있었으니, 일을 규격화된 단위로 나눌 수 있었다. 루스 샤디 연구팀은 이 자루가 페루 해안의 끊임없는 위험인 지진에도 건물을 버티게 했다고 주장한다. 돌이 든 자루가 금 가지 않고 움직였다가 다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이 ‘내진’ 해석은 널리 인용되지만, 고대 지진을 직접 관찰한 결과가 아니라 공학적 추론에 바탕을 둔 가설이다.

기단은 주기적으로 고쳐 지어졌다. 옛 방과 계단을 메워 묻고 그 위에 더 큰 구조물을 올렸다. 이를 건물의 의례적 매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새로 지을 때마다 대규모로 조직된 노동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카랄에 공동 작업을 계획하고 조율할 수 있는 어떤 형태의 중앙 지도층이 있었다고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계획성은 배치에서도 드러난다. 큰 피라미드들이 넓게 트인 공간을 둘러싸고 있고, 많은 건물이 같은 방향을 향한다. 일부 연구자의 말처럼 천문 정렬을 반영한 것인지, 단순히 공유된 설계 전통인지는 아직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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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누가 카랄을 다스렸나: 종교, 교역, 그리고 전쟁의 부재

카랄은 위계가 있는 사회였다. 집과 음식, 매장의 차이는 피라미드 곁에 살며 바다사자 고기 같은 음식을 즐긴 엘리트와 소박한 집에 산 보통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샤디는 정치와 종교의 역할을 함께 맡은 지도자, 건축가와 음악가 같은 전문가, 노동을 제공한 농민과 어부로 이루어진 사회를 그린다.

눈에 띄게도 유적에는 조직된 전쟁의 뚜렷한 흔적이 없다. 방어 성벽도, 무기 창고도, 전투에서 죽은 이들의 집단 매장도 없다. 인류학자 조너선 하스는 지배자가 보통 경제적 통제, 종교 이념, 물리적 힘이라는 세 원천에서 권력을 얻는다고 지적했다. 카랄에서는 힘의 역할이 작았던 것 같다. 목화와 관개, 교환에 대한 통제, 종교적 권위와 큰 잔치 모임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뜻으로 평화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카랄과 아스페로에서는 일부 고고학자가 희생 제물로 해석하는 의례 맥락의 인골이 나왔고, 건물 아래 묻힌 아기도 있다. 이런 발견은 드물고 해석도 갈리지만, 초기 복합 사회의 종교는 전쟁이 없어도 폭력을 동반할 수 있었음을 일깨운다.

카랄의 힘은 아마 수페 골짜기 전체에 미쳤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골짜기에서 기념비 건축을 갖춘 같은 시기의 큰 취락을 열여덟 곳 이상, 노르테치코 지역 전체에서는 서른 곳가량 확인했다. 이들이 카랄을 수도로 한 하나의 국가였는지, 느슨하게 연합한 중심지들의 연결망이었는지, 문화를 공유하며 경쟁한 공동체들이었는지는 안데스 고고학의 핵심 질문 가운데 하나다.

[1][3][5][4]

중급

종교와 의례

카랄 사람들은 글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종교는 건물과 유물로 되짚어야 한다. 피라미드가 의례의 장소였음은 분명하다. 꼭대기에는 제단과 화덕이 있는 방이 있었고, 음식과 목화, 조개, 작은 인형 같은 제물을 그곳에서 태웠다. 여러 건물에는 땅속 환기 통로로 불에 바람을 넣는 화덕이 있었는데, 다른 초기 안데스 신전과도 공통된 특징이다.

피라미드와 원형 광장이 짝을 이룬다는 점은 의례의 동선을 짐작하게 한다. 사람들은 땅보다 낮은 둥근 마당에 모였다가 계단을 올라 위쪽의 신성한 방으로 향했을 것이다. 같은 기본 구성이 뒷날 고원 지대의 차빈 데 우안타르를 비롯한 많은 안데스 유적에 나타나, 오래 이어진 종교 전통을 짐작하게 한다.

2003년 이웃 파티빌카 골짜기의 노르테치코 유적에서 발견된 조롱박 조각에는 지팡이를 든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기원전 2250년 무렵의 것으로 측정되었다. 일부 학자는 이를 차빈에서 티와나쿠에 이르는 훨씬 뒤 안데스 종교의 중심 인물인 ‘지팡이 신’과 연결한다. 이 연결이 맞다면 안데스 종교 관념의 일부는 카랄-수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지만, 거의 2천 년을 사이에 둔 그림 한 점의 해석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2000년에는 카랄 서쪽 사막 표면을 긁어 만든 큰 지상화가 발견되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벌린 입을 가진 얼굴이다. 그 연대와 의미는 불확실하다.

[3][1][2]

중급

발견과 발굴

카랄의 언덕들은 숨겨져 있던 적이 없다. 지역 주민은 이를 알고 있었고, 독일 고고학자 막스 울레는 1905년 이 일대를 지나갔지만 그 중요성을 알아보지 못했다. 1948년에는 페루 해안의 고대 관개를 연구한 미국의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 폴 코속이 유적을 찾아 기록했다. 그러나 토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비교적 늦은 시기의 유적이라 여기고 더 조사하지 않았다.

1994년 산마르코스 국립대학교의 페루 고고학자 루스 샤디 솔리스가 수페 골짜기 조사를 시작해 큰 유적 열여덟 곳을 다시 확인했다. 1996년부터 연구팀은 카랄을 발굴했다. 2001년 샤디는 미국 고고학자 조너선 하스, 위니프리드 크리머와 함께 학술지 『사이언스』에 방사성 탄소 연대를 발표해, 카랄의 기념비 건축이 이 지역에 토기가 나타나기 수백 년 전인 후기 아르카익기에 지어졌음을 보였다. 이 논문으로 카랄은 세계에 알려졌다.

샤디의 연구는 국가가 지원하는 큰 사업으로 자라나, 지금은 ‘카랄 고고학 지구(Zona Arqueológica Caral)’가 카랄과 아스페로, 해안 가까운 후대 유적 비차마 등 수페 골짜기의 여러 유적을 연구하고 보존한다. 이 사업은 피라미드 일부를 복원하고 유적을 방문객에게 열었으며, 샤디는 페루에서 가장 이름난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샤디와 하스·크리머 연구팀의 협력은 뒤에 깨졌다. 발견의 공로와 해석, 특히 카랄 사회가 얼마나 크고 중앙집권적이었는지를 두고 이견이 생겼다. 샤디는 카랄을 국가의 수도로 강조하고, 이웃 파티빌카·포르탈레사 골짜기에서 연구한 하스와 크리머는 더 넓은 노르테치코 지역의 규모를 강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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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쇠퇴와 유산, 그리고 오늘의 위협

카랄은 기원전 2000~1800년 무렵 차츰 버려졌다. 지진, 엘니뇨 홍수, 밭을 덮은 모래 언덕, 긴 가뭄 등이 원인으로 거론된다. 최근 연구는 쇠퇴를 기원전 2200년 무렵의 건조기인 ‘4.2 킬로이어 사건’이라는 지구 규모의 기후 변화와 연결한다. 많은 고고학자는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옮겨 갔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해안 쪽 비차마로 취락이 옮겨 갔고, 그곳 후대의 부조는 기근과 재생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카랄-수페 전통은 오래 영향을 남겼다. 원형 광장을 갖춘 기단 건축, 신전을 묻고 다시 쌓는 관습, 그리고 어쩌면 종교 도상의 일부가 뒤의 안데스 문화로 이어졌다. 카랄은 안데스 문명이 와리나 잉카 같은 유명한 제국보다 훨씬 전에, 산과 바다의 혜택을 받은 해안 골짜기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유적은 압박을 받고 있다. 농사와 도로 건설, 무허가 정착이 보호 구역을 파고든다. 2021년 초에는 토지 권리를 주장하는 점유자들이 보호 구역 가장자리에 집을 짓기 시작했고, 샤디를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살해 위협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갈등은 페루 사회에서 유산 보호와 빈곤, 땅에 대한 절박한 필요가 부딪치는 깊은 긴장을 드러낸다.

카랄은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카랄 덕분에 페루 사람들이 자기 역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이제 페루 문명의 이야기는 약 5천 년 전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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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계의 논쟁: 해양 기반설, 옥수수, ‘도시’의 뜻

해양 기반설. 1975년 고고학자 마이클 E. 모슬리는 『안데스 문명의 해양적 기초(The Maritime Foundations of Andean Civilization)』에서, 첫 복합 사회를 가능하게 한 잉여는 농업이 아니라 페루 해안의 풍부한 멸치 어장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아스페로가 그의 핵심 사례였다. 그러나 카랄 같은 큰 내륙 유적이 해안 유적과 같은 시기이거나 더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모델은 복잡해졌다. 널리 인용되는 절충안은 내륙의 목화·식물성 식량과 해안의 물고기가 서로 의존하는 경제다. 2022년의 동위원소 연구는 아스페로와 카랄 모두 식물성 식량이 식단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보고해, 해양 단백질이 중요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농업의 비중이 모슬리의 생각보다 컸음을 시사한다.

옥수수 문제. 옥수수가 주식이었는지를 두고도 논쟁이 있다. 초기 보고는 옥수수가 거의 없다며 그 부재를 노르테치코의 특징으로 꼽았다. 이후 하스와 크리머 등이 포르탈레사·파티빌카 골짜기에서 꽃가루, 석기 잔여물, 사람의 분석(糞石)을 분석해 기원전 3000~1800년 내내 옥수수가 중요한 식량이었다고 주장했다. 비판자들은 표본의 대표성을 문제 삼는다. 옥수수는 흔히 아메리카 초기 국가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지기에 이 문제는 중요하다.

카랄은 도시였나, 국가였나. 카랄의 인구 추정은 제각각이다. 도시 자체에 약 3,000명, 골짜기 전체에 2만 명가량이라는 수치가 흔히 인용되지만, 이는 동시에 사람이 산 집이 얼마였는지에 대한 가정에 달려 있다. 샤디는 카랄을 국가의 수도로 해석한다. 다른 연구자들은 ‘족장 사회’ 같은 용어를 선호하거나, 추종자를 끌어모으려 기념물을 짓던 경쟁적 집단들의 연결망으로 본다. 이 논쟁은 증거만큼이나 정의에 달려 있다. 관료제 없이도 기념물을 지을 수 있고, ‘도시’는 상주 인구가 많지 않은 의례 중심지일 수도 있다.

연대와 편년. 카랄에서는 백 개가 넘는 방사성 탄소 연대가 발표되어 주요 건설 시기를 기원전 2600~2000년 무렵으로 잡는다. 아스페로와 포르탈레사 골짜기 유적 등 다른 노르테치코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3000년 이전까지 올라간다. 방사성 탄소 연대는 보정하고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 재사용되었거나 오래된 재료에서 얻은 시료는 실제보다 이른 연대를 줄 수 있어, 시크라 갈대처럼 수명이 짧은 식물 재료로 잰 연대가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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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증거와 방법: 글 없는 사회 읽기

건축과 층위. 카랄의 핵심 증거는 발굴로 드러난 기단 내부의 건축 단계다. 새로 지을 때마다 이전의 바닥과 제물, 채움재가 봉인되었기에 고고학자들은 단계별로 연대를 매기고 비교할 수 있다. 유적의 상당 부분이 복원되었으므로 연구자와 방문객은 원래의 석축과 현대의 보강을 구별해야 한다.

유기물 보존. 페루 해안의 극단적인 건조함은 다른 곳이라면 썩어 버릴 식물 유체, 직물, 끈, 조롱박, 음식 찌꺼기를 남겨 둔다. 덕분에 식생활과 공예, 교역을 드물게 자세히 복원할 수 있고,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알맞은 시료도 얻을 수 있다.

키푸 문제. 샤디 연구팀은 카랄에서 나온 매듭 끈을 훨씬 뒤 잉카가 쓴 매듭 기록 장치인 키푸로 해석했다. 이것이 확인되면 안데스 기록 문화의 역사는 수천 년 앞당겨진다. 그러나 이 주장은 충분히 발표되거나 검증되지 않았고, 많은 전문가는 조심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가장 이른 키푸는 와리 시기(서기 600~1000년경)의 것이다. 잉카의 키푸조차 주로 숫자 체계로 이해되며, 키푸가 언어를 기록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비교의 틀. 카랄은 흔히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중국, 메소아메리카와 함께 세계의 독자적 ‘문명의 요람’으로 꼽힌다. 이런 목록은 쓸모 있지만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 카랄에는 기념비 건축과 사회적 위계가 있었지만 토기도, 금속 공예도, 알려진 문자도 없었다. 카랄을 연구하면 초기 문명을 정의하는 특징이 정말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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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토기 이전의 기념비 건축
카랄은 대규모 건축과 사회적 위계가 토기보다 먼저 나타났음을 보여 주어, 문명의 요소가 나타나는 순서에 대한 옛 가정을 뒤집었다.
기단과 원형 광장
꼭대기가 평평한 계단식 피라미드와 둥글게 파인 마당의 짝. 오래 이어진 안데스 의례 건축의 틀이 되었다.
시크라 공법
돌을 채운 섬유 자루를 채움재로 쓴 방법. 노동을 규격화했고 지진에 대한 저항력을 높였을 가능성이 있다.
목화와 물고기의 교환
내륙 농민이 목화와 식물을, 해안 공동체가 물고기와 조개를 공급한 상호 의존 경제.
전쟁 없는 권력
전쟁의 증거가 없다는 점은 종교와 잔치, 자원 통제가 카랄 사회를 묶었음을 시사한다.
독자적 문명의 요람
카랄-수페 전통은 구대륙의 영향 없이 안데스에서 복합 사회를 발전시켰다.
위협받는 유산
무허가 점유와 농경, 고고학자에 대한 위협은 카랄을 지키기 위한 오늘날의 싸움을 보여 준다.

기록

  1. 약 기원전 3000년 — 해안의 아스페로를 비롯한 노르테치코 지역 여러 유적에서 기념비 건축이 시작된다.
  2. 약 기원전 2627년 — 시크라 갈대의 방사성 탄소 연대가 카랄 대피라미드의 건설을 가리킨다.
  3. 약 기원전 2250년 — 파티빌카 골짜기에서 발견된, 지팡이 든 인물을 그린 조롱박이 이 무렵 만들어진다.
  4. 약 기원전 2170년 — 카랄에서 나온 뼈 피리가 이 무렵의 것으로 측정된다.
  5. 약 기원전 2000년 — 카랄이 차츰 버려지고 취락이 골짜기 다른 곳과 해안 쪽으로 옮겨 간다.
  6. 1905년 — 막스 울레가 이 일대를 지나가지만 언덕들을 고대 피라미드로 알아보지 못한다.
  7. 1948년 — 폴 코속이 유적을 찾아 기록한다.
  8. 1994년 — 루스 샤디가 수페 골짜기 조사를 시작하고, 1996년부터 카랄을 발굴한다.
  9. 2001년 — 샤디·하스·크리머가 『사이언스』에 방사성 탄소 연대를 발표해 카랄이 세계에 알려진다.
  10. 2009년 — 카랄-수페 신성 도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11. 2021년 — 무허가 점유와 고고학자에 대한 살해 위협으로 유적의 취약함이 주목받는다.

용어 풀이

노르테치코 / 카랄-수페
기원전 3000~1800년 무렵 페루 해안의 수페·파티빌카·포르탈레사 골짜기에 나타난 초기 복합 사회.
토기 이전 시기
사람들이 불에 구운 토기를 만들기 전의 시기. 안데스에서는 기원전 1800년 무렵 이전의 후기 아르카익기.
기단(플랫폼 마운드)
흙과 돌로 쌓은 꼭대기가 평평한 큰 구조물. 흔히 계단식이며 신전이나 엘리트 건물의 토대로 쓰였다.
원형 광장
땅보다 낮게 둥글게 파낸 마당. 모임과 의례에 쓰였다.
시크라
돌을 채운 식물 섬유 그물 자루. 건축 채움재로 쓰였다.
키푸
안데스에서 숫자와 어쩌면 다른 정보를 기록하는 데 쓴 매듭 끈 장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유기물 속 탄소-14의 붕괴 정도를 재어 연대를 매기는 방법.
우안카
안데스 전통에서 신성하게 여긴 선돌.
지상화
돌을 옮기거나 땅 표면을 긁어 땅 위에 크게 그린 형상.
4.2 킬로이어 사건
기원전 2200년 무렵 널리 나타난 가뭄과 기후 변화의 시기.

묻고 답하기

카랄이 정말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오래되었나요?

카랄의 주요 건물은 기원전 2600년 무렵의 것으로, 기자의 피라미드와 거의 같은 때다. 이집트의 모든 기념물보다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대피라미드 시대와 동시대다.

카랄 사람들은 왜 토기를 만들지 않았나요?

그 지역에서는 아직 토기가 쓰이지 않았다. 대신 조롱박과 바구니, 직물을 썼고, 건조한 기후에서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카랄에 왕이 있었나요?

알 수 없다. 지도자와 엘리트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왕릉이나 옥좌가 있는 궁전, 글로 적힌 지배자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카랄에는 왜 무기가 없나요?

발굴에서 성채나 무기가 나오지 않았다. 지도자들이 전쟁보다 종교와 교역, 잔치로 권력을 유지했다는 뜻일 수 있지만, ‘증거가 없다’는 사실은 늘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

카랄에서 나온 매듭 끈은 키푸였나요?

발굴자들은 초기 키푸로 해석하지만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전문가는 확실한 첫 키푸를 훨씬 뒤인 와리 시기로 본다.

카랄의 인구 추정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그리 확실하지 않다. 도시 인구 3,000명 같은 수치는 동시에 사람이 산 집의 수와 집마다 산 사람의 수에 대한 가정에 달려 있다.

카랄에 가 볼 수 있나요?

그렇다. 유적은 방문객에게 열려 있고 관람로와 전망 지점이 있다. 리마에서 북쪽으로 차로 몇 시간 거리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Caral. Wikipedia
  2. Caral. Wikipedia (스페인어)
  3. Norte Chico civilization. Wikipedia
  4. Aspero. Wikipedia
  5. Ruth Shady. Wikipedia
  6. Quipu. Wikipedia
  7. Ruth Shady Solis, Jonathan Haas, Winifred Creamer, Dating Caral, a Preceramic Site in the Supe Valley on the Central Coast of Peru. Science 292, 2001
  8. Michael E. Moseley, The Maritime Foundations of Andean Civilization. Cummings, 197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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