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차빈 데 우안타르

Chavín de Huántar

약 기원전 900–200년 · 앙카시 콘추코스 골짜기 (차빈 문화)

한 문장으로

차빈 데 우안타르는 약 3,000년 전 페루 안데스 고원에 세워진 돌 신전으로, 순례자들은 어두운 지하 통로를 지나 ‘란손’이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돌 신상을 만났다.

차빈 데 우안타르
이미지: Martin St-Amant (S23678) · CC BY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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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페루의 높은 산속, 두 강이 만나는 초록 골짜기에 ‘차빈 데 우안타르’라는 커다란 돌 신전이 있다. 잉카보다 훨씬 전인 약 3,000년 전에 사람들이 지었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돌 단처럼 보이지만, 안쪽은 비밀 통로로 가득하다.

통로는 좁고 구불구불하며 아주 어둡다. 그 한가운데, 두 통로가 엇갈리는 곳에 어른 두 사람 반쯤 되는 키의 길쭉한 돌이 서 있다. 으르렁거리는 입과 커다란 송곳니, 뱀으로 된 머리카락을 가진 이상한 신이 새겨져 있다. 뾰족한 모양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이 돌을 ‘큰 창’이라는 뜻의 ‘란손’이라고 부른다.

신전을 지은 사람들은 소리와 물을 다루는 솜씨가 좋았다. 신전 아래 물길로 물이 세차게 흘렀는데, 어떤 과학자들은 그 소리가 통로에 울려 짐승이 포효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제들은 멀리 북쪽 따뜻한 바다에서 가져온 커다란 소라껍데기로 만든 나팔도 불었다.

신전 바깥벽에는 한때 말뚝처럼 튀어나온 돌 머리들이 박혀 있었다. 어떤 것은 사람 얼굴 같고, 어떤 것은 점점 송곳니 난 재규어를 닮아 간다. 많은 전문가는 의식 중에 사제가 동물 정령으로 변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먼 곳에서 차빈을 찾아왔다. 아주 지혜로운 신탁을 찾아가듯, 신에게 물음을 묻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재규어와 뱀, 맹금, 카이만(악어의 한 종류)이 등장하는 차빈 양식의 미술은 고대 페루의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한눈에 보기

시기
최근 연대관으로는 주요 의례 사용 기원전 1200~500년경. 전통적으로는 기원전 900~200년경(전기 호라이즌)
위치
페루 앙카시주, 코르디예라 블랑카 동쪽 콘추코스 골짜기의 모스나강과 우아체크사강 합류점. 해발 약 3,150~3,180m
성격
기단 신전과 광장, 내부 석조 회랑으로 이루어진 의례 중심지. 순례지이자 신탁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
차빈 문화. 그 미술 양식이 중부 안데스와 해안에 널리 퍼졌다
대표 작품
란손(약 4.5m 화강암 석상, 원위치), 테요 오벨리스크, 라이몬디 석비, 돌 머리 조각(카베사스 클라바스)
첫 본격 발굴
훌리오 C. 테요, 1919년
지위
198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쉬움

차빈 데 우안타르는 어떤 곳인가

차빈 데 우안타르는 페루 북부 고원에 있는 기념비적 종교 중심지다. 눈 덮인 코르디예라 블랑카 산맥 동쪽 콘추코스 골짜기, 모스나강과 우아체크사강이 만나는 해발 약 3,150m 지점에 자리한다. 곁에는 오늘날의 차빈 마을이 있다.

유적은 거대한 돌 기단 건물과 낮게 파인 광장, 그리고 건물 안쪽의 좁은 석조 회랑(통로) 연결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원전 1천년기, 그리고 아마 그보다 이른 시기부터 여러 세기에 걸쳐 세워지고 고쳐 지어졌다. 큰 도시라기보다 신성한 장소였고, 의례에 참여하고 어쩌면 신탁을 구하러 온 순례자들이 찾았다.

차빈은 고고학자들이 하나의 문화와 미술 양식 전체에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돌 조각, 토기, 직물, 금 공예품 등 차빈 양식으로 꾸민 유물은 유적에서 먼 곳, 페루 북부 해안에서 남부 해안까지 발견된다. 그래서 차빈은 안데스의 넓은 지역이 공유한 첫 미술 양식이 되었다.

1919년 이곳을 발굴한 페루 고고학자 훌리오 C. 테요는 차빈을 안데스 문명의 ‘어머니 문화’라고 불렀다. 지금은 카랄 같은 복합 사회가 해안에 훨씬 먼저 있었음이 알려졌지만, 차빈은 여전히 안데스 역사의 큰 전환점 가운데 하나다. 유네스코는 1985년 이 유적을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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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신전을 ‘읽는’ 법: 탁 트인 광장에서 숨은 회랑으로

유적에는 크게 두 건축 단계가 있어 흔히 구신전과 신신전이라고 부른다. 구신전은 U자형 기단 복합체로, 두 팔이 지름 약 20~21m의 낮게 파인 원형 광장을 감싸 안는다. 이런 U자형 배치는 당시 안데스 의례 중심지에 흔한 설계였다. 원형 광장은 공들여 포장되었고, 구신전의 석판에는 재규어와 카이만, 사람의 특징을 지닌 여러 존재가 부조로 새겨졌다.

뒤에 구신전의 남쪽 날개가 크게 확장되어 신신전이 되었다. ‘엘 카스티요(성)’라고도 부르는 한 변 약 70m의 거대한 기단이다. 정문인 ‘매의 문(Portada de las Falcónidas)’은 ‘흑백의 문’이라고도 하는데, 한쪽은 검은 석회암, 다른 쪽은 흰 화강암으로 두 빛깔의 돌을 썼다. 기둥에 새긴 맹금은 균형 잡힌 대립의 관념을 나타냈을지도 모른다.

신신전 앞에는 한 변 약 50m의 크고 네모난 광장(플라사 마요르)이 낮게 파여 있어 많은 군중이 모일 수 있었다. 방문자는 많은 사람이 모이던 이 밝고 탁 트인 공간에서, 소수만 들어갈 수 있는 기단 안쪽의 어둡고 좁은 회랑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회랑은 통로와 작은 방, 계단이 얽힌 미로로, 작은 구멍으로만 빛이 든다. 어떤 방에는 토기와 여러 물건이 제물로 놓여 있었다. 구신전의 중심, 두 통로가 엇갈리는 곳에는 약 3천 년 전 세워진 자리에 란손이 지금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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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란손과 다른 대표 조각

란손은 높이 약 4.5m의 화강암 석상으로, 네 면 모두에 얕은 부조가 새겨져 있다. 사람의 몸에 사나운 고양잇과 동물의 얼굴을 한 존재다. 긴 송곳니가 드러난 으르렁거리는 입, 손발의 발톱, 뱀으로 된 머리카락과 허리띠를 가졌고, 한 팔은 들고 다른 팔은 내렸다. 돌은 회랑 바닥에서 천장을 뚫고 올라가, 마치 지하 세계와 땅과 하늘을 잇는 듯하다. 많은 학자는 이를 세계의 중심축(악시스 문디)이자 구신전의 주신으로 본다.

테요 오벨리스크는 1908년 발견되어 테요가 연구한 높이 약 2.5m의 화강암 기둥으로, 아마존 저지의 악어류인 커다란 카이만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그 몸속은 다른 생물과 식물, 곧 카사바(마니오크)와 고추 같은 열대 숲의 작물로 채워져 있다. 재배 식물의 기원에 관한 신화나, 하늘과 땅과 물을 잇는 우주관을 나타냈을 수 있다. 지금은 유적 근처의 국립 차빈 박물관에 있다.

라이몬디 석비는 높이 약 2m의 매끈한 화강암 판으로, 송곳니 난 얼굴을 한 인물이 양손에 지팡이를 쥐고 서 있다. 이후 2천 년 동안 안데스 미술에 거듭 나타나는 ‘지팡이 신’의 가장 이른 대표적 모습이다. 1873년 박물학자 안토니오 라이몬디가 한 농민의 집에서 기록했다. 거꾸로 뒤집으면 그림이 바뀌어, 높이 솟은 머리 장식이 이를 드러낸 얼굴들의 탑이 된다. 지금은 리마의 국립 박물관에 있다.

신전 바깥벽은 한때 돌 머리 조각(카베사스 클라바스)으로 꾸며져 있었다. 뒤쪽에 긴 돌 촉이 달린 커다란 머리를 석축에 끼워 얼굴이 벽에서 튀어나오게 한 것이다. 쉰 개 남짓이 알려져 있지만 원래 자리에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거의 사람에 가까운 얼굴부터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고양잇과 얼굴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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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차빈 짓기: 돌, 물, 소리

신전은 화강암, 사암, 석회암 등을 다듬어 맞춘 돌로 지었고, 일부는 상당히 먼 곳에서 가져왔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고고학자 존 릭 연구팀의 레이저 스캔 연구는 건설자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일관된 배치·시공 규칙을 따르며, 기단을 다시 쌓고 넓히면서도 안쪽의 옛 회랑은 보존했음을 보여 준다.

물은 설계의 핵심이었다. 석축 물길 연결망이 신전과 광장 아래로 뻗어 고원의 큰비를 빼내고, 어쩌면 강물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일부 연구자는 이 물길을 세차게 흐르는 물이 회랑 안에 크게 울리는 포효 같은 소리를 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의도된 효과였는지는 논쟁거리다.

소리는 분명 차빈 의례의 일부였다. 2001년 발굴자들은 커다란 스트롬부스 소라껍데기로 만든 나팔(푸투투) 스무 개를 찾아냈다. 약 3천 년 된 것이다. 이 조개는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에콰도르 앞바다의 따뜻한 태평양에서 온다. 악기와 회랑에 대한 음향 연구는 소라 나팔 소리가 좁은 돌 통로를 따라 어떻게 퍼지고 울렸을지 탐구해 왔다.

빛도 소리만큼 세심하게 다루었다. 회랑은 대부분 어둡고 좁은 구멍으로만 빛이 든다. 어떤 구멍은 공기나 소리를 나르기도 했을 것이다. 밝은 햇빛에서 거의 완전한 어둠으로 들어가, 어쩌면 약물의 영향 속에서 사방의 낯선 소리에 둘러싸이는 것은 강렬하고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경험이었을 테고, 그 끝에 갑자기 란손이 나타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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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종교: 신탁, 순례, 변신

차빈은 무엇보다 종교 중심지였다. 그 도상은 여러 환경에서 온 힘센 동물들이 지배한다. 숲의 재규어, 하늘의 부채머리수리와 맹금, 아마존 강의 카이만, 그리고 뱀이다. 이 동물들은 사람의 특징과 합쳐져 초자연적 합성 존재가 된다.

많은 학자는 차빈의 사제들이 환각성 물질을 썼다고 본다. 라이몬디 석비의 인물이 쥔 지팡이는 메스칼린을 품은 산페드로 선인장에 견주어지고, 유적에서는 코로 들이마시는 가루를 빻고 흡입하는 데 쓴 돌 절구와 뼈 대롱 같은 의례 도구가 나왔다. 사람 얼굴에서 동물 얼굴로 이어지는 돌 머리 조각은 흔히 이런 물질의 영향 아래 사제가 재규어 같은 정령으로 변하는 모습으로 읽힌다. 널리 퍼진 해석이지만 어디까지나 해석이다.

신전 깊숙이 있는 란손은 사제를 통해 물음에 답하는 신탁이었을 수 있다. 중부 해안의 파차카막 같은 후대 안데스 신탁소가 이렇게 운영되며 먼 곳의 순례자를 불러 모았다. 차빈은 이 전통의 이른 사례였을지 모르며, 순례자들은 여러 지역에서 토기와 조개, 음식 같은 제물을 가져왔을 것이다.

미술 자체가 종교적 암호처럼 작동했다. 많은 그림은 여러 방식으로 읽힌다. 입이 눈이 되기도 하고, 머리카락이 뱀이 되며, 거꾸로 돌리면 그림 전체가 바뀌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도안은 읽는 법을 배운 입문자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 사제의 특별한 지식과 권위를 강화했다.

이원성은 차빈 도상 전체에 흐른다. 란손은 한 팔을 위로, 다른 팔을 아래로 향해 흔히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으로 읽히고, 매의 문은 검은 돌과 흰 돌을 짝지었으며, 많은 형상은 사람과 동물, 또는 숲과 하늘과 강의 생물을 합친다. 학자들은 이를 세계가 서로 보완하는 대립물로 이루어지고 그 만남(케추아어로 ‘틴쿠’)이 새로운 것을 낳는다는 오랜 안데스 관념과 연결한다. 3천 년 된 유적에 훨씬 후대의 케추아어 낱말을 쓰는 것은 해석상의 선택이지만, 어떤 주제가 안데스 사유 속에 오래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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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세계 속의 차빈: 교역, 목축, 양식의 확산

차빈 데 우안타르는 교차로에 있었다. 그 골짜기는 코르디예라 블랑카를 넘어 태평양 해안과, 아마존 저지로 이어지는 안데스 동쪽 사면을 잇는다. 흑요석, 에콰도르의 바다 조개, 열대 숲 동식물의 그림 등 유적에서 나온 물건은 차빈이 이 세 지대와 모두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고원의 농민은 감자와 퀴노아, 옥수수를 기르고 라마를 쳤다. 라마는 털과 고기를 주고 산길로 짐을 날랐다. 라마 대상이 차빈과 다른 지역 사이에서 물자와 생각을 옮기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기원전 900년에서 200년 무렵 차빈 양식은 널리 퍼졌다. 송곳니 난 신, 고양잇과 존재, 지팡이 든 인물 같은 비슷한 도상이 해안과 고원 곳곳의 직물, 토기, 돌 조각, 금제품에 나타난다. 고고학자들은 한때 이를 안데스의 첫 통합으로 보고 ‘전기 호라이즌’이라 불렀다. 오늘날 대부분은 이를 제국이 아니라 한 종교 의례와 그 미술의 확산으로 보며, 순례와 교역, 연계된 성소의 건립을 통해 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빈만이 당대의 중요한 중심지는 아니었다. 북부 고원의 쿤투르 와시와 파코팜파 같은 큰 신전, 남부 해안의 파라카스 같은 문화는 저마다의 전통을 지키면서 이 양식의 요소를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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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쇠퇴, 이후의 역사, 재발견

기원전 500~400년 무렵 신전의 종교적 역할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중부 안데스 전역에서 사회적 격변 속에 많은 큰 의례 중심지가 버려졌고, 일부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차빈에서는 원형 광장을 비롯한 신전 일부 위에 평범한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이 생겨났다. 유적이 완전히 잊힌 적은 없으며,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그 주변과 위에서 살았다.

식민지 시기부터 유럽의 여행자와 학자들이 폐허를 기록했다. 1873년 이탈리아 태생의 박물학자 안토니오 라이몬디가 자기 이름이 붙은 석비를 기록했다. 1919년에는 케추아어를 쓰는 원주민 집안 출신의 페루 고고학자 훌리오 C. 테요가 첫 본격 발굴을 했다. 테요는 일부 외국 학자들의 주장처럼 안데스 문명이 메소아메리카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아마존에 뿌리를 두고 안데스 안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1945년 1월 17일 골짜기 위 호수에서 터진 빙하 홍수(알루비온)가 차빈을 휩쓸어, 유적의 상당 부분을 수 미터 깊이의 진흙과 잔해로 덮고 마을의 많은 부분을 파괴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마리노 곤살레스 등의 정리·발굴 작업으로 매의 문 같은 구조물이 드러났다. 루이스 룸브레라스가 1960~70년대에 회랑을 발굴했고, 1970년대 리처드 버거의 토기 층위 연구가 자세한 편년을 세웠다.

1990년대부터는 존 릭이 이끄는 스탠퍼드 주도 프로젝트가 페루 동료들과 함께 회랑을 자세히 발굴하고 측량해 왔다. 2018년 연구팀은 작은 로봇으로 좁은 통로를 탐사해 알려지지 않은 터널과 매장을 찾아냈다. 2008년에는 일본의 지원으로 유적 근처에 국립 차빈 박물관이 문을 열었고, 테요 오벨리스크가 리마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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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계의 논쟁: 편년, ‘어머니 문화’, 권력

편년. 마을 발굴에 바탕을 둔 버거의 토기 편년은 차빈을 우라바리우, 차키나니, 하나바리우 단계로 나누고 유적의 전성기를 기원전 900~200년 무렵으로 잡았으며, 신신전과 양식의 최대 확산을 그 후반에 두었다. 특히 릭의 프로젝트와 관련된 최근의 방사성 탄소 연대는 주요 건설을 더 앞당겨, 대규모 건축 대부분이 기원전 750년 무렵 이전에 이루어졌고 신전의 핵심 종교 기능은 기원전 400년 이전에 끝났다고 본다. 두 편년은 서로 다른 역사를 함축한다. 하나에서는 차빈이 영향력을 넓히며 절정에 이르렀고, 다른 하나에서는 영향력 있는 차빈 양식의 일부가 신전의 최대 건축기보다 뒤에 온다.

어머니 문화인가, 동료 중심지인가. 테요는 차빈을 안데스 문명의 원천으로 보았다. 그러나 카랄, 세친 바호, 코토시 같은 더 이른 기념비 유적이 발견되면서, 기단과 낮게 파인 광장, 신전의 갱신처럼 차빈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던 많은 요소가 이미 수백~수천 년 전부터 있었음이 드러났다. 버거 등은 이제 차빈을 해안과 고원의 오랜 전통을 종합해 새롭고 강력한 형태로 퍼뜨린 중심지로 설명한다.

권력은 어떻게 행사되었나. 릭이 발전시킨 영향력 있는 견해는 차빈을 종교 엘리트가 경험을 조작하며 차츰 권위를 쌓은 곳으로 본다. 빛과 소리, 물, 출입을 통제하고 신과의 극적인 만남을 연출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서 건축 자체는 믿음과 사회적 불평등을 만들어 내는 도구였다. 비판자들은 음향 같은 특징에 지나친 의도를 읽어 내지 말라고 경고하고, 차빈 뒤에 있던 정치 조직이 신정 체제였는지, 경쟁하는 혈통 집단들이었는지, 순례 공동체였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고 지적한다.

미술 읽기. 미술사가 존 H. 로는 차빈 미술이 한 신체 부위를 다른 형태로 바꿔 그리는 시각적 은유, 곧 그가 ‘케닝’이라 부른 기법을 쓴다고 설명했다. 머리카락을 뱀으로 그리는 식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여러 방식으로 읽히는 ‘윤곽 경합’을 강조했다. 이런 분석은 의도된 시각 언어가 있었음을 보여 주지만, 로와 도널드 래스랩이 논의한 테요 오벨리스크의 카이만과 식물을 재배 식물이나 우주에 관한 신화로 읽는 것처럼 특정 신화를 끌어내는 일은 여전히 추측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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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증거와 방법

기록 보관소로서의 건축. 겹겹이 쌓인 기단의 건축 단계와 그 안에 보존된 회랑이 차빈 역사의 핵심 증거다. 레이저 스캔과 정밀 측량으로 연구자들은 건축 순서와, 후대 구조물 안에 감춰진 공간의 원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제물과 유물. 회랑에서 나온 토기와 제물 가운데에는 다른 지역 양식의 것도 있어, 방문자나 연계된 공동체가 먼 곳에서 선물을 가져왔음을 시사한다. 이런 유물과 흑요석, 바다 조개의 화학·양식 분석은 교환망을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된다. 2001년 푸투투 발견은 발굴이 의례의 소리 풍경까지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도상. 차빈은 글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종교 해석은 란손, 테요 오벨리스크, 라이몬디 석비, 원형 광장의 부조, 돌 머리 조각 같은 도상에 크게 기댄다. 16세기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이 기록한 후대 안데스 종교와의 비교는 쓸모 있지만, 2천 년의 간격을 건너뛰는 위험이 있다.

교란과 보존. 1945년 홍수, 여러 세기에 걸친 후대 거주, 조각의 박물관 반출이 기록을 복잡하게 만든다. 큰비와 지진 활동, 관람객의 발길이 회랑을 위협하며, 2000년대부터 일부 국제 유산 단체의 지원을 받은 보존 작업은 구조물을 안정시키고 배수 체계를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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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순례 중심지
차빈은 큰 도시가 아니라, 의례와 제물 봉헌, 어쩌면 신탁을 위해 먼 지역의 방문자를 불러 모은 곳이었다.
숨은 회랑
움직임과 빛, 소리를 통제하며 신전 중심의 란손으로 이끄는 어두운 내부 통로.
합성 존재
차빈 미술은 재규어, 독수리, 카이만, 뱀, 사람의 특징을 합쳐 초자연적 형상을 만든다.
변신
돌 머리 조각 같은 도상은 흔히 사제가 환각성 식물의 힘을 빌려 동물 정령으로 변하는 모습으로 읽힌다.
시각적 수수께끼
케닝과 윤곽 경합은 그림을 여러 방식으로 읽히게 하는, 입문자를 위한 암호였다.
호라이즌 양식
차빈 도상이 안데스 전역에 널리 퍼진 현상. 정복보다는 종교와 교환을 통해 퍼졌을 것이다.
전통의 종합
차빈은 U자형 배치와 낮게 파인 광장 같은 해안과 고원의 오랜 신전 형식을 새로운 종교 체계로 합쳤다.

기록

  1. 약 기원전 1200년 — 최근의 방사성 탄소 편년에 따르면 차빈에서 대규모 신전 건설이 진행된다.
  2. 약 기원전 900년 — 로의 시기 구분에서 전기 호라이즌이 시작된다. 옛 편년에서는 차빈의 시작.
  3. 약 기원전 750년 — 릭의 편년에 따르면 주요 건설이 대부분 끝난다.
  4. 약 기원전 500년 — 중부 안데스 전역의 사회적 격변 속에 신전의 종교적 역할이 줄기 시작한다(옛 편년에서 신신전은 기원전 500~200년경).
  5. 약 기원전 200년 — 전기 호라이즌이 끝나고 차빈 양식의 영향력이 사그라든다.
  6. 1873년 — 안토니오 라이몬디가 라이몬디 석비를 기록한다.
  7. 1908년 — 테요 오벨리스크가 유적에서 발견된다.
  8. 1919년 — 훌리오 C. 테요가 첫 본격 발굴을 한다.
  9. 1945년 — 빙하 홍수가 유적과 마을의 상당 부분을 진흙과 잔해로 덮는다(1월 17일).
  10. 1985년 — 차빈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11. 2001년 — 소라 나팔(푸투투) 스무 개가 발굴된다.
  12. 2008년 — 국립 차빈 박물관이 문을 열고 테요 오벨리스크가 차빈으로 돌아온다.

용어 풀이

전기 호라이즌
차빈 양식이 널리 퍼진 안데스 고고학의 시기(기원전 900~200년경).
회랑
신전 기단 안쪽의 좁은 석조 통로.
란손
구신전 중심에 있는 약 4.5m의 화강암 석상. 송곳니 난 신이 새겨져 있다.
돌 머리 조각(카베사스 클라바스)
뒤에 촉이 달려 벽에 끼우면 얼굴이 튀어나오게 만든 돌 머리.
지팡이 신
양손에 지팡이를 든 정면의 신. 차빈에서 처음 알려졌고 후대 안데스 미술에 흔하다.
푸투투
큰 소라껍데기로 만든 나팔. 안데스 의례에 쓰였다.
산페드로 선인장
메스칼린을 품은 선인장. 안데스의 치유 의례에 쓰였고 차빈 미술에 나타난다고 해석된다.
케닝
로의 차빈 미술 분석에서, 한 형태가 다른 형태를 대신하는 시각적 은유.
윤곽 경합
방향이나 초점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읽히도록 만든 그림.
알루비온
흔히 빙하호가 터져 생기는 진흙과 잔해의 갑작스러운 홍수.
악시스 문디
하늘과 땅과 지하 세계를 잇는, 상상 속 세계의 중심.

묻고 답하기

큰 석상은 왜 ‘란손’이라고 부르나요?

‘란손’은 스페인어로 ‘큰 창’이라는 뜻이다. 길고 좁으며 뾰족한 모양에서 따온 이름이다.

지금도 란손을 볼 수 있나요?

그렇다. 구신전 회랑의 원래 자리에 지금도 서 있고, 방문객은 좁은 통로를 지나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차빈은 제국이었나요?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아니라고 본다. 미술과 종교는 널리 퍼졌지만, 먼 지역을 정복하거나 다스린 중앙 국가의 뚜렷한 증거는 없다.

차빈의 사제들은 약물을 썼나요?

산페드로 선인장으로 해석되는 그림과 코로 흡입하는 가루를 위한 절구·대롱 등의 발견을 근거로 많은 학자가 그렇게 보지만, 직접적인 화학적 증거는 제한적이다.

차빈은 카랄과 비교해 얼마나 오래되었나요?

훨씬 젊다. 카랄은 기원전 2600~2000년 무렵 지어졌고, 차빈의 주요 신전 단계는 대략 기원전 1200~500년이다.

책마다 차빈의 연대가 다른 이유는요?

옛 책은 리처드 버거의 토기 편년(기원전 900~200년경)을 따르고, 최근의 방사성 탄소 연구는 주요 건설을 그보다 이른 기원전 750년 무렵 이전으로 본다.

1945년에 유적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빙하 홍수가 차빈의 상당 부분을 진흙과 잔해로 덮었고,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치워야 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Chavín de Huántar. Wikipedia
  2. Chavín de Huántar. Wikipedia (스페인어)
  3. Chavín culture. Wikipedia
  4. Lanzón. Wikipedia
  5. Tello Obelisk. Wikipedia
  6. Raimondi Stela. Wikipedia
  7. Pututu. Wikipedia
  8. Julio C. Tello. Wikipedia
  9. Periodization of pre-Columbian Peru. Wikipedia
  10. Richard L. Burger, Chavín and the Origins of Andean Civilization. Thames & Hudson, 1992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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