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2,500년 전, 키루스라는 페르시아의 왕이 지금의 이라크에 있던 거대한 도시 바빌론을 정복했어요. 얼마 뒤 서기관들이 작은 통처럼 생긴 점토 덩어리에 그에 관한 글을 새겼어요. 크기는 연필보다 조금 긴 정도예요.
글은 메소포타미아의 오래된 쐐기 모양 글자인 쐐기 문자로, 바빌로니아 말로 쓰였어요. 바빌론의 마지막 왕이 사람들과 신들을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마르두크 신이 키루스를 골라 모든 것을 바로잡게 했다는 내용이에요.
원통에는 키루스가 평화롭게 바빌론에 들어와 신전을 고치고, 다른 곳으로 끌려왔던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도시 성벽을 수리했다고 적혀 있어요. 그런 다음 이 점토 통은 신들과 미래의 왕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건물 기초에 묻혔어요.
원통은 2,400년 넘게 땅속에 있다가 1879년 한 고고학자가 파냈어요. 지금은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최초의 인권 헌장’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역사가들은 사실 왕이 자기 업적을 자랑하는 건축 기념 비문이라고 말해요. 그래도 고대 페르시아와 바빌론, 그리고 옛 왕들이 자기 권력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알려 주는 아주 중요한 유물이랍니다.
한눈에 보기
- 무엇
- 페르시아 키루스 2세(대왕)의 이름으로 된 왕실 비문을 새긴 구운 점토 기초 원통
- 연대
- 기원전 539년 10월 페르시아의 바빌론 정복 이후. 대영박물관은 기원전 539~530년으로 봄
- 언어와 문자
- 아카드어(후기 바빌로니아어), 쐐기 문자. 남은 45행 가운데 일부는 심하게 손상됨
- 크기
- 길이 약 22.5cm, 최대 지름 약 10cm
- 발견
- 1879년 3월 바빌론(지금의 이라크)에서 대영박물관을 위해 발굴하던 호르무즈드 라삼이 발견
- 현재 소장
- 영국 대영박물관(BM 90920 / 1880,0617.1941). 예일 대학교 소유의 작은 조각을 대여받아 함께 전시
- 장르
- 메소포타미아의 오랜 전통을 따라 건물 기초에 묻은 바빌로니아 왕실 건축 비문
- 현대의 명성
- 이란 마지막 샤가 ‘최초의 인권 헌장’으로 선전. 1971년부터 유엔 본부에 복제품 전시
쉬움
키루스 원통은 무엇인가
키루스 원통은 길이 약 22.5cm의 통 모양 구운 점토 유물로, 표면에 쐐기 문자가 여러 줄 새겨져 있다. 키루스 대왕으로 알려진 페르시아 왕 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해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무너뜨린 뒤 바빌론에서 만들어졌다. 글은 페르시아어가 아니라 바빌로니아의 언어인 아카드어로 쓰였다.
이 원통은 기초 봉납물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신전, 궁전, 성벽의 기초에 글을 새긴 물건을 묻어 건축 공사를 기록하고, 신들을 기리고, 언젠가 건물을 고치다 비문을 발견할 미래의 왕들에게 말을 걸었다. 키루스 원통도 마지막 몇 줄에 적힌 바빌론 성벽 보수와 관련해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이 원통은 대영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 가운데 하나다. 페르시아 제국 건국의 핵심 문서로 평가받고, 이란에서는 국가 정체성의 상징으로 쓰이며, 종교적 관용과 인권 논의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전통적인 바빌로니아 왕실 비문이다.
쉬움
무엇이 적혀 있나
글의 앞부분은 깨져 있지만, 남은 부분은 바빌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를 비난한다. 바빌론의 최고신 마르두크에 대한 숭배를 소홀히 하고, 신전 의례를 어지럽히고, 백성에게 강제 노역을 지웠다는 것이다. 글에 따르면 신들은 도시를 떠났고, 마르두크는 모든 나라를 살피며 정의로운 왕을 찾았다.
마르두크는 ‘안샨시의 왕’ 키루스를 골라 바빌론으로 진군하게 했다. 글은 키루스의 군대가 싸움 없이 도시에 들어갔고 바빌론 사람들이 기쁘게 그를 맞았다고 주장한다. 중간부터는 키루스가 1인칭으로 말한다. “나는 키루스, 온 세상의 왕, 위대한 왕, 강한 왕, 바빌론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사방 세계의 왕이다.”
이어서 키루스는 자신의 선행을 늘어놓는다. 바빌론에 평화를 가져오고 주민의 짐을 덜어 주었으며, 나보니두스가 바빌론으로 가져온 신상들을 그곳에 살던 사람들과 함께 메소포타미아와 그 동쪽 땅의 본래 도시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는 신들에게 자신과 아들 캄비세스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한다. 마지막 줄들은 바빌론 성벽 수리를 묘사하는데, 그곳에서 앞선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의 비문을 발견했다고 적었다.
학자들은 보통 글을 여섯 부분으로 나눈다. 나보니두스를 규탄하고 마르두크가 새 왕을 찾는 서론(1~19행), 키루스의 칭호와 가계, 평화로운 바빌론 입성(20~22행), 바빌론 복구(22~34행), 키루스와 캄비세스를 위한 마르두크에게의 기도(34~35행), 백성이 평화롭게 살고 신들에 대한 제물이 늘었다는 선언(36~37행), 성벽 공사 기록(38~45행)이다. 처음과 마지막 줄들은 심하게 손상되어 일부는 복원한 것이다.
쉬움
유물 자체
원통은 큰 회색 돌이 섞인 원뿔 모양 점토 심 둘레에 여러 단계에 걸쳐 만들어졌다. 점토를 덧붙여 통 모양을 만들고, 글을 쓸 고운 점토 표면을 입혔다. 남은 비문은 작고 가지런한 쐐기 문자 45행으로, 둥근 표면을 따라 돌아간다.
원통은 고대에 이미 깨져 두 개의 큰 조각으로 남아 있다. 큰 조각 A는 1879년에 발굴되었다. 약 8.6×5.6cm 크기의 작은 조각 B는 골동품상에게서 구입되어 1920년 예일 대학교의 J. B. 니스가 출판했지만, 1970년에야 키루스 원통의 일부로 확인되었다. 예일이 이 조각을 대영박물관에 대여했고, 두 조각은 1972년에 결합되었다. 큰 조각은 그보다 앞선 1961년에 이미 복원 처리를 받았다.
이런 기초 원통은 묻은 뒤에는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그래도 글은 따로 베껴져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2010년 대영박물관은 바빌론 근처 유적에서 나온 점토판 조각 두 점에 같은 글이 새겨져 있음을 확인했는데, 이는 묻힌 원본 밖에서도 사본이 돌았음을 보여 준다.
중급
역사적 배경: 키루스와 바빌론의 함락
키루스 2세는 이란 남서부 페르시스(지금의 파르스) 지역에 있던 안샨 왕가 출신이다. 기원전 550~540년대에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를 물리치고, 아나톨리아 서부의 리디아 왕국과 수도 사르디스를 정복했으며,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넓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이렇게 그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인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이 탄생했다.
바빌론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 번성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였다.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재위 기원전 556~539)는 특이한 군주였다. 달의 신 신(Sin) 숭배를 장려했고, 아들 벨사살에게 바빌론을 맡긴 채 아라비아의 오아시스 테이마에서 약 10년을 보냈다. 그래서 중요한 마르두크의 신년 축제를 정상적으로 치를 수 없었고, 이는 바빌론 사제 엘리트 일부의 반감을 샀다.
기원전 539년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침공했다. 쐐기 문자로 쓰인 바빌로니아 기록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티그리스강 가의 오피스 전투에서 바빌로니아군을 무찌르고 이어 시파르를 차지했다. 바빌론은 기원전 539년 10월 큰 싸움 없이 함락된 것으로 보이며, 키루스는 약 2주 반 뒤 도시에 들어갔다. 나보니두스는 사로잡혔다.
키루스는 바빌론의 제도를 대체로 그대로 두고 자신을 정통 바빌로니아 왕으로 내세웠다. 아들 캄비세스는 신년 의식에 참여했다. 키루스 원통은 바빌로니아 전통과의 연속성을 보여 주려는 이런 노력의 일부다.
중급
페르시아의 선언문이 아닌 바빌로니아 왕실 비문
전문가들은 키루스 원통이 메소포타미아 왕실 비문의 오랜 전통에 속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기원전 3천년기부터 왕들은 즉위하면서 질서를 회복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신전을 다시 세운다고 선언했다. 특히 아시리아 왕 사르곤 2세나 칼데아의 마르둑아플라이디나 2세처럼 바빌론을 정복한 왕들도 같은 주제를 썼다. 전임 왕이 신들의 노여움을 샀고, 신들이 새 왕을 골랐으며, 새 왕이 신전과 제의와 도시를 복구했다는 것이다.
원통은 이 틀을 충실히 따르고, 그 언어는 바빌로니아 문학을 떠올리게 한다. 학자들은 이 글을 새 왕을 위해 바빌로니아의 서기관과 마르두크 사제들이 지었다고 본다. 글은 메소포타미아식 왕호와 표현으로 키루스를 찬양하며, 아후라 마즈다 같은 페르시아 신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글은 선전이기도 하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따르면 키루스의 군대가 많은 바빌로니아인을 죽인 오피스 전투를 원통은 언급하지 않는다. 나보니두스를 가장 어두운 색으로 그리지만, 다른 사료는 그의 긴 치세가 대체로 안정적이었고 그가 많은 신전을 후원했음을 보여 준다. 아시리아학자 아멜리 쿠르트가 주장했듯, 원통에는 정통성이 필요한 새 통치자의 사정과 그의 모습을 빚어낸 바빌로니아 엘리트의 영향이 함께 담겨 있다.
한 가지 세부가 본보기의 선택을 드러낸다. 키루스는 성벽에서 발견한 옛 비문을 말하면서, 토착 바빌로니아 왕이 아니라 기원전 7세기에 바빌론을 다스린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의 이름을 든다. 마지막 바빌로니아 군주를 규탄한 글이 그를 건너뛰어 더 오래된 제국의 선왕을 바라보는 셈이다. 일부 역사가는 이를 아케메네스 왕들이 바빌론에서는 바빌로니아 신들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도 제국의 본보기로는 아시리아를 참고했다는 초기 징후로 본다.
원통은 페르시아 왕실 문서 가운데서도 특이하다. 다리우스 1세부터 후대 아케메네스 왕들은 고대 페르시아어·엘람어·바빌로니아어 세 언어로 비문을 세우고 흔히 아후라 마즈다를 부른다. 반면 키루스 원통은 단일 언어이고 종교적 언어도 온전히 바빌로니아식이다. 정복한 땅마다 그곳의 왕권 전통에 맞추던 제국의 가장 초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중급
원통과 성경
히브리 성경은 키루스(고레스)를 매우 긍정적으로 기억한다. 「에스라」는 키루스가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다시 짓도록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다고 전하고, 「이사야」는 키루스를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 부른다. 그래서 원통이 발견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이를 성경 기록의 확증으로 여겼다.
원통은 키루스가 신들과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 나오는 지명은 아슈르, 수사, 아카드, 데르처럼 모두 메소포타미아와 티그리스강 동쪽 땅이다. 유대인, 유다,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 글이 유대인의 귀환을 직접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래도 원통은 키루스가 알려지고 싶어 한 정책의 성격을 보여 준다. 충성을 얻기 위해 지역 제의를 후원하고 흩어진 공동체의 귀환을 허락하는 정책이다. 많은 학자는 「에스라」에 히브리어판과 아람어판으로 전하는 칙령의 정확한 문구는 논쟁적이더라도, 그 안에 이런 페르시아 정책의 일면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중급
발견과 출판
원통은 1879년 3월 대영박물관을 위해 일하던 모술 출신의 아시리아계 고고학자 호르무즈드 라삼이 발견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고, 라삼은 발굴품을 런던으로 보낼 수 있게 한 오스만 술탄의 허가(피르만)를 받아 발굴했다. 그는 바빌론 유적에서 원통을 찾았지만, 정확한 출토 지점에 대한 그의 설명은 서로 어긋난다.
발견 소식은 쐐기 문자 해독자 가운데 한 사람인 헨리 롤린슨 경이 1879년 11월 왕립 아시아 학회에서 발표했고, 그는 1880년 첫 부분 번역을 출판했다. 이후 특히 조각 B가 확인된 뒤 글은 여러 차례 다시 교감되었다. 대영박물관의 큐레이터 어빙 핀켈은 현대 번역을 내고 관련 조각 연구를 이끌었다.
원통은 20세기 초부터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왔고, 여러 차례 해외에 대여되었다. 1971년과 2010~11년 이란, 2006년 스페인, 2013년 미국 순회전, 2013~14년 인도, 2024년 예일 대학교다.
중급
현대의 상징: 이란, 유엔, 그리고 ‘인권’
20세기에 원통은 정치적 상징이 되었다. 이란의 마지막 군주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샤는 키루스를 이란 왕권의 창시자로 내세우고 원통을 최초의 인권 선언이라 불렀다. 1968년 그는 테헤란에서 열린 제1차 유엔 국제 인권 회의를 이 주장으로 개막했다.
1971년 10월 이란은 원통을 상징으로 삼아 페르시아 왕정 2,500년 기념 축전을 성대하게 열었다. 대영박물관은 원본을 테헤란 전시를 위해 대여했고, 샤의 누이 아슈라프 팔레비 공주는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에게 복제품을 선물했다. 이 복제품은 지금도 뉴욕 유엔 본부에 전시되어 있다.
1979년 혁명 뒤 이슬람 공화국은 처음에는 왕정의 상징과 거리를 두었지만, 원통은 이란인들 사이에서 계속 사랑받았다. 2010년 이란 국립박물관에 대여되었을 때 수십만 명이 보러 왔다. 이란 안팎의 많은 이란인에게 원통은 정의와 관용이라는 오랜 유산을 상징하는 소중한 유물이다.
인터넷에는 원통이 노예제를 폐지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최저 임금을 정했다고 주장하는 가짜 ‘번역’이 널리 퍼져 있고, 때로는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까지 등장한다. 실제 원통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
심화
학술 논쟁: 관용, 선전, 저자
키루스는 예외적으로 관용적이었는가? 성경과 헤로도토스, 크세노폰 같은 그리스 저자들이 만든 예전 관점은 아시리아·바빌로니아와 대조되는 유례없이 인도적인 정복자로 키루스를 보았다. 오늘날 많은 역사가는 그의 정책이 실용적이었다고 본다. 페르시아 제국은 거대하고 다양했기에, 지역 엘리트와 신과 관습을 후원하는 편이 무력만으로 다스리는 것보다 싸고 효과적이었다. 피에르 브리앙, 아멜리 쿠르트 같은 학자들은 아시리아 왕들도 때로 신상을 돌려주고 사람들을 귀환시켰으며, 키루스가 특별하다는 생각은 몇몇 사료에 크게 기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어조의 실제 차이를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기원전 689년 바빌론을 파괴한 일을 기록한 센나케리브의 비문처럼 학살과 파괴를 자랑하는 아시리아 비문과 비교하면, 평화로운 입성과 복구를 말하는 원통의 언어는 눈에 띈다. 따라서 이 논쟁은 키루스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뿐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의 왕실 수사를 어떻게 비교할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인권 헌장이라는 해석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시대착오로 널리 거부된다. 원통에는 개인의 권리라는 개념이 없고, 신들의 은총, 제의의 올바른 질서, 백성을 돌보는 왕을 전통적인 말로 이야기할 뿐이다. 동시에 일부 학자와 박물관 큐레이터는 현대의 쓰임과 고대의 의미를 구별하기만 한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원통의 복구와 공존의 이상에서 영감을 얻는 것은 정당하다고 본다.
저자와 독자도 논의된다. 원통은 나보니두스에게 적대적인 또 다른 바빌로니아 문헌 『나보니두스 운문 기록』과 매우 비슷해서, 두 글 모두 새 정권을 지지한 바빌로니아 사제 집단에서 나왔다고 보인다. 역사가 모턴 스미스의 주장처럼 정복 전에 퍼진 페르시아의 선전을 바탕으로 했는지, 아니면 다른 학자들의 주장처럼 정복 뒤에 전통적 주제로 지어졌는지는 아직 열린 문제다.
심화
증거, 조각, 그리고 위작
원통을 이해하려면 다른 사료와 함께 읽어야 한다. 『나보니두스 연대기』는 오피스 전투와, 바빌론 함락에서 에사길라 신전 구역의 항복까지 두 주 동안의 공백을 포함해 정복 과정을 해마다 간결하게 기록한 바빌로니아 자료다. 『나보니두스 운문 기록』은 옛 왕에 대한 비슷하게 적대적인 초상을 보여 준다. 하란에서 나온 비문 같은 나보니두스 자신의 비문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내세웠는지 알려 준다. 키루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전을 다시 지었다는 직접적 고고학 증거는 아직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2010년 바빌론 근처 다일렘에서 1880년대에 들어온 소장품 가운데 같은 글이 새겨진 점토판 조각이 확인되면서 논의가 달라졌다. 원통의 글이 점토판 형태로도 존재했고, 기록 보관이나 배포를 위해 베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드러났다. 학자들은 이제 묻힌 원통을 더 넓게 퍼진 포고문의 한 판본으로 본다.
원통은 위작도 낳았다. 20세기 중국에서 나타난 글자가 새겨진 말뼈 두 점에는 원통의 글을 베낀 쐐기 문자가 있다. 오랜 논쟁 끝에 어빙 핀켈 등은 이것이 1884년 출판된 원통 텍스트를 베낀 현대의 위작이라고 결론지었고,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받아들인다.
끝으로 원통은 소유와 유산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란의 논자들은 때로 원통을 이란에 반환하라고 요구했지만, 원통은 오스만 제국 통치 아래 지금의 이라크에서 발굴되었고 당시 규정에 따라 합법적으로 취득되었다. 대영박물관은 원통을 이란뿐 아니라 근동 전체, 메소포타미아 왕권,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함께 나누는 역사에 속하는 유물로 소개한다.
핵심 개념
- 기초 봉납물
- 건축을 기념하고 신들과 미래의 왕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건물 기초에 묻은, 글을 새긴 물건.
- 왕권의 정통성
- 원통은 키루스를 마르두크가 고른 정당한 왕으로 그리며 바빌로니아 전통을 잇는다.
- 선전
- 글은 전투를 빼고 전임 왕 나보니두스를 깎아내리며 사건을 키루스에게 유리하게 서술한다.
- 복구
- 중심 주제. 신들을 신전으로, 사람들을 고향으로, 바빌론에 질서를 되돌린다는 것.
- 수용사
- 성경 해석에서 이란의 국가 상징, 유엔의 인권 수사에 이르는 원통의 후대 쓰임.
- 시대착오
- 인권처럼 고대 문헌에 없는 현대의 관념을 그 안에서 읽어 내는 것.
기록
- 기원전 556년 — 나보니두스가 바빌론의 왕이 됨(기원전 556년).
- 약 기원전 550년 — 키루스가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를 무찌르고 제국 건설을 시작.
- 약 기원전 547년 — 키루스가 리디아와 수도 사르디스를 정복.
- 기원전 539년 — 키루스가 오피스에서 바빌로니아군을 격파. 기원전 539년 10월 바빌론이 함락되고 키루스가 입성.
- 약 기원전 539년 — 원통이 제작되어 바빌론에 기초 봉납물로 묻힘(기원전 539~530년).
- 기원전 530년 — 키루스 사망(기원전 530년). 캄비세스가 왕위를 이음.
- 1879년 — 호르무즈드 라삼이 바빌론에서 원통을 발견하고 롤린슨이 런던에서 발표.
- 1970년 — 예일의 조각 B가 원통의 일부로 확인되고 1972년 두 조각이 결합됨.
- 1971년 — 원통이 이란 2,500년 축전의 상징이 되고 복제품이 유엔에 기증됨.
- 2010년 — 같은 글이 적힌 점토판 조각이 확인되고, 원통이 이란 국립박물관에 대여됨.
- 2013년 — 원통이 미국 여러 박물관을 순회.
용어 풀이
- 아케메네스 제국
- 기원전 6세기 키루스 2세가 세우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까지 그 후계자들이 다스린 페르시아 제국.
- 바빌론
- 지금의 이라크, 유프라테스강 가에 있던 대도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 마르두크
- 바빌론의 최고신. 그의 신전이 에사길라다.
- 아카드어
- 쐐기 문자로 쓴 바빌로니아·아시리아의 셈어.
- 쐐기 문자
- 갈대로 점토에 눌러 쓴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 모양 문자.
- 나보니두스
-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마지막 왕(재위 기원전 556~539). 키루스에게 폐위됨.
- 연대기
- 여기서는 사건을 해마다 적은 바빌로니아 쐐기 문자 기록.
- 피르만
- 발굴 허가처럼 오스만 술탄이 내린 칙령.
묻고 답하기
키루스 원통은 최초의 인권 헌장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20세기에 그렇게 불렸지만, 역사가들은 왕을 찬양하는 전통적인 바빌로니아 건축 비문으로 봐요. 개인의 권리에 관한 내용은 없어요.
왜 페르시아어가 아니라 바빌로니아어로 썼나요?
바빌론에서 바빌로니아 사람들과 바빌론의 신들을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그곳의 전통과 언어를 따랐어요.
원통에 유대인 이야기가 나오나요?
아니요. 메소포타미아와 가까운 땅의 도시로 신과 사람들을 돌려보냈다는 내용은 있지만, 예루살렘이나 유대인은 나오지 않아요. 다만 성경이 키루스와 연결하는 종류의 정책을 보여 줘요.
왜 런던에 있나요?
1879년 대영박물관을 위해 일하던 고고학자가 당시 이라크를 다스리던 오스만 제국의 허가를 받아 발굴했기 때문이에요.
글은 누가 썼는가?
바빌로니아 문학의 주제와 왕호를 쓰는 것으로 보아, 키루스를 위해 일한 바빌로니아 서기관과 마르두크 사제들이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평화로운 정복이라는 서술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부분적으로만 그렇다. 『나보니두스 연대기』는 바빌론 함락 전에 오피스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보여 주며, 원통이 그리는 나보니두스의 모습은 일방적이다.
인터넷의 번역은 정확한가요?
조심해야 해요. 널리 퍼진 ‘번역’ 하나는 노예제 폐지나 종교의 자유 같은 내용을 지어냈어요. 박물관이나 학술 출판물의 번역을 보세요.
키루스 원통을 직접 볼 수 있나요?
네. 보통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란을 비롯한 세계 여러 박물관에서 복제품을 볼 수 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The Cyrus Cylinder (museum number 1880,0617.1941). British Museum
- Cyrus Cylinder. Wikipedia
- 키루스 원통. 한국어 위키백과
- Cyrus Cylinder. Livius.org
- Nabonidus Chronicle. Wikipedia
- Cyrus the Great. Wikipedia
- Irving Finkel (ed.), The Cyrus Cylinder: The King of Persia’s Proclamation from Ancient Babylon. I.B. Tauris, 2013
함께 보기
- 페르세폴리스이란 남서부에 있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의례·행정 중심지로, 다리우스 1세 때 건설이 시작되었다.
- 쐐기 문자갈대를 젖은 점토에 눌러 쓴 세계 최초의 문자 가운데 하나.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발명되어 3,000년 넘게 여러 언어를 적는 데 쓰였다.
- 아베스타조로아스터교의 경전. 고대 아베스타어로 된 기도문·찬가·의례법으로, 글로 적히기 전 여러 세기 동안 사제들이 외워 전했다.
-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8세기 바빌론 왕 함무라비의 이름으로 발표된 법률 조항 모음이다.
- 길가메시 서사시우루크의 왕 길가메시가 친구 엔키두를 잃고 영생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 수메르의 여러 시를 엮어 바빌로니아 서사시로 완성했다.
- 로제타석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기리는 사제 칙령을 상형문자·민중문자·그리스 문자로 새긴 화강섬록암 비석 조각. 세 판본의 대조가 고대 이집트 문자 해독의 열쇠가 되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