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같은 쪽지를 세 번 쓴 종이를 찾았다고 상상해 보세요. 한 번은 비밀 그림 암호로, 한 번은 꼬불꼬불한 필기체로, 한 번은 내가 읽을 수 있는 말로요. 셋이 모두 같은 내용이라면, 아는 글을 이용해 나머지 두 글을 풀 수 있겠지요. 로제타석이 바로 그런 돌이에요.
2,200여 년 전 이집트는 조상이 그리스에서 온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다스렸어요. 기원전 196년 이집트의 사제들이 옛 수도 멤피스에 모여 어린 왕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칭찬하는 긴 글을 지었어요. 그리고 그 글을 세 가지 글자로 돌에 새기라고 했어요. 신들을 위한 그림 글자인 상형문자, 이집트 사람들이 평소 쓰던 필기체인 민중문자, 그리고 정부가 쓰던 그리스 문자였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상형문자를 읽는 법을 잊어버렸어요. 돌은 깨지고 옮겨지다가, 마침내 지중해 가까운 로제타(라시드)라는 마을 근처 요새의 벽돌로 쓰였어요.
1799년 나폴레옹과 함께 이집트에 쳐들어온 프랑스 병사들이 요새를 고치다가 이 돌을 찾아냈어요. 학자들은 이것이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걸 곧바로 알아챘지요. 뒤에 영국이 돌을 런던으로 가져갔고, 1802년부터 대영박물관에 있어요.
여러 사람이 20년 넘게 매달린 끝에, 1822년 프랑스의 젊은 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이 상형문자의 원리를 밝혀냈어요. 어떤 그림은 글자처럼 소리를 나타내고, 어떤 그림은 뜻을 나타낸다는 것이었지요. 그 뒤로 사람들은 약 1,400년 만에 처음으로 고대 이집트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한눈에 보기
- 연대
- 기원전 196년 3월 27일 칙령 반포(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재위 9년)
- 반포 주체
- 멤피스에 모인 이집트 사제 회의(시노드)
- 문자
- 상형문자(위, 남은 14행), 민중문자(가운데, 32행), 그리스 문자(아래, 54행)
- 재질과 크기
- 아스완 지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화강섬록암. 112.3×75.7×28.4cm, 약 760kg. 더 큰 비석의 일부
- 원래 자리
- 신전. 나일강 삼각주의 사이스였을 가능성이 있다(불확실)
- 발견
- 1799년 7월, 로제타(라시드) 근처 쥘리앵 요새의 벽 속에서 피에르프랑수아 부샤르가 이끈 프랑스군이 발견
- 소장
- 1802년부터 런던 대영박물관(소장 번호 EA 24)
- 의의
- 토머스 영, 장프랑수아 샹폴리옹 등이 이집트 문자를 해독하는 데 필요한 병기(竝記) 텍스트를 제공했다(1822년 돌파구 발표)
쉬움
로제타석이란?
로제타석은 짙은 회색 화강섬록암으로 만든 비석의 커다란 조각이다. 비석(스텔레)은 공식 문서를 새겨 세워 둔 돌판을 말한다. 높이는 약 1.1m, 무게는 약 760kg이다. 잘 다듬은 앞면에 세 덩어리의 글이 위아래로 새겨져 있다.
세 덩어리의 글은 모두 기원전 196년 이집트 사제들이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기려 반포한 같은 칙령이다. 맨 위는 상형문자, 가운데는 이집트어를 일상적으로 적던 흘림 문자인 민중문자(데모틱), 맨 아래는 고대 그리스어다. 세 판본이 낱말 하나하나까지 똑같지는 않지만 내용은 사실상 같다.
칙령 자체는 비교적 평범한 왕실·종교 정치의 산물이다. 이 돌이 유명해진 것은 발견된 시점 때문이다. 1799년 발견 당시 상형문자나 민중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리스어를 읽는 학자는 많았다. 로제타석은 아는 언어에서 모르는 두 문자로 옮긴 번역문처럼 보였다.
로제타석은 1802년부터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으며, 흔히 이 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는 단일 유물로 꼽힌다. 이름은 일상어가 되기도 했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결정적 열쇠를 ‘로제타석’이라고 부른다.
쉬움
돌을 보는 법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돌이 깨져 있다는 점이다. 원래는 더 높은 비석의 아랫부분이었고, 윗부분은 왕과 신들을 그린 둥근 머리였을 것으로 본다. 맨 위 상형문자 부분이 가장 많이 손상되어 마지막 14행만 남았고 모두 오른쪽이 깨졌다. 가운데 민중문자 부분이 가장 잘 남아 32행이 있다. 맨 아래 그리스어 부분은 54행인데, 아래쪽 줄은 대각선으로 깨진 자리에서 잘려 나갔다.
세 문자를 자세히 보자. 상형문자는 새·뱀·손·갈대 잎 같은 작은 그림들이 줄지어 있는 모양이다. 일부는 카르투슈라는 타원형 테두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왕의 이름을 표시하는 것이다. 민중문자는 빠르게 이어 쓴 필기체 같아서 초보자는 위의 그림과 연결하기 어렵다. 그리스어는 그리스 알파벳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대문자로 쓰여 있다.
돌의 색도 시간이 지나며 달라졌다. 런던에 온 뒤 오랫동안 글자를 읽기 쉽게 하려고 흰 분필로 메우고 표면에 왁스를 발라, 돌이 검게 보였고 현무암으로 잘못 불리기도 했다. 1999년 세척으로 이런 덧칠이 벗겨지자 원래의 짙은 회색 돌과 왼쪽 위 모서리를 가로지르는 분홍색 결이 드러났다.
옆면에는 런던에서 페인트로 써 넣은 영어 글귀가 지금도 남아 있다. 한쪽에는 ‘1801년 영국군이 이집트에서 노획’, 다른 쪽에는 ‘국왕 조지 3세 기증’이라고 적혀 있다. 이 글귀도 유물의 근대사의 일부다.
쉬움
칙령에는 무엇이 적혀 있나?
이 글은 왕이 대관식을 치르던 옛 수도 멤피스에서 열린 이집트 사제들의 큰 회의, 곧 시노드의 칙령이다. 날짜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 재위 9년으로, 기원전 196년 3월 27일에 해당한다. 어린 왕이 멤피스에서 파라오로 대관한 바로 다음 날이다.
사제들은 왕의 선행을 늘어놓는다. 왕은 신전에 은과 곡식을 주었고, 신전이 내야 할 여러 세금을 면제했으며, 재위 8년에 나일강이 유난히 높이 범람하자 넘친 물을 둑으로 막아 농민을 도왔다. 또 삼각주의 도시 리코폴리스에서 반란군을 무찌르고 질서를 되찾은 일을, 새로운 호루스라는 전통적 표현으로 찬양한다.
그 대가로 사제들은 새로운 예우를 약속했다. 왕의 생일과 대관일을 해마다 기념하고, 이집트 전역의 사제들이 다른 신들과 함께 왕을 섬기기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왕을 모든 신전에서 숭배하는 신으로 삼은 것이다.
마지막 줄에는 이 칙령을 ‘신들의 언어’(상형문자), ‘문서의 언어’(민중문자), ‘그리스인의 언어’로 새겨 모든 신전에 세우라는 명령이 있다. 로제타석에 세 문자가 있는 까닭이 바로 이 명령이고, 같은 칙령의 다른 사본이 뒤에 여럿 발견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중급
역사적 배경: 분열된 이집트의 소년 왕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그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가 왕조를 세워 새 그리스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300년 가까이 이집트를 다스렸다. 정부는 그리스어로 일했지만, 주민 대부분은 이집트어를 쓰고 강력한 사제 집단이 운영하는 신전에서 전통 신들을 섬겼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는 부모가 수상한 정황 속에 죽은 뒤 기원전 204년 다섯 살 무렵 왕위에 올랐다. 궁정 세력은 섭정 자리를 두고 다투었고, 미움받던 섭정 하나는 알렉산드리아의 군중에게 살해되었다. 나라 밖에서는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3세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를 빼앗았고, 제5차 시리아 전쟁에서 이집트는 레반트와 소아시아의 땅을 잃었다.
나라 안에서는 남부 테베 일대에서 파라오를 자칭한 이집트인 호르웬네페르와 안크웬네페르가 이끄는 대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기원전 206년 무렵부터 186년까지 이어져 상이집트의 많은 지역을 왕조의 통제에서 떼어 냈다. 삼각주에서도 다른 반란 세력이 리코폴리스를 점거했는데, 포위 끝에 붙잡힌 지도자들은 멤피스로 끌려가 기원전 196년 3월 대관 축제 중, 칙령 전날 처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 사제층의 지지는 절실했다. 칙령이 왕조의 수도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옛 종교 수도 멤피스에서 반포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가 그곳에서 이집트 전통 방식으로 대관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칙령은 일종의 거래였다. 왕실은 신전에 특권과 선물을 주고, 사제들은 권위를 빌려 그리스어를 쓰는 어린 왕을 정통 파라오로 내세웠다.
중급
세 문자, 두 언어, 하나의 칙령
문자는 셋이지만 언어는 둘뿐이다. 상형문자와 민중문자는 모두 이집트어를 적는 방식이고, 그리스어는 다른 언어다. 이 무렵 상형문자는 주로 신성한 글과 기념비에 쓰였으며, 상형문자 판본은 천 년도 더 전의 고전 이집트어를 흉내 낸, 일부러 예스럽게 쓴 이른바 ‘신(新)중기 이집트어’로 되어 있다. 민중문자 판본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실제로 쓰던 이집트어에 더 가깝다.
이집트 문자는 알파벳이 아니었다. 상형문자, 흘림체인 신관문자, 민중문자 세 가지 모두 자음 하나·둘·셋을 나타내는 소리 글자와, 낱말 전체를 나타내는 표어 글자, 그리고 낱말의 종류를 알려 주는 소리 없는 한정사 같은 뜻 글자를 섞어 썼다. 이 혼합이 해독을 어렵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다언어 사제 칙령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특징이다. 조금 앞선 예로 알렉산드리아 칙령(기원전 243년), 카노푸스 칙령(기원전 238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 때의 멤피스 칙령(기원전 218년 무렵)이 알려져 있고, 로제타석 칙령의 다른 사본도 누바이라 비석과 필라이 신전의 비문 등 여럿 발견되었다. 로제타석은 근대에 처음 발견된 것일 뿐 유일한 것은 아니다.
어느 판본이 먼저였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1841년 앙투안장 르트론은 정부가 만든 그리스어 판본이 원본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학자들은 세 판본이 함께 작성되었다고 보거나, ‘신들이 읽도록’ 새긴 상형문자 판본의 특별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 판본이 낱말 단위로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을 기대한 초기 해독자들은 예상보다 큰 어려움을 겪었다.
중급
신전에서 요새로: 돌의 긴 여정
이 돌은 거의 확실히 로제타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아마 더 내륙의 신전, 어쩌면 서부 삼각주의 왕도 사이스에 서 있었을 것이다. 이후 이집트 종교사가 돌의 운명을 바꾸었다. 이집트가 그리스도교화하면서 신전 사제단이 사라지고 4세기 말에는 신전이 문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알려진 상형문자 비문은 394년 필라이에서, 마지막 민중문자 글은 452년 같은 곳에서 쓰였다.
옛 신전은 흔히 채석장으로 쓰였다. 어느 때인가 비석이 깨졌고, 가장 큰 조각이 결국 나일강 지류를 지키던 라시드(로제타) 근처 요새의 기초에 들어갔다. 이 요새는 보통 15세기 후반 맘루크 술탄 카이트바이가 지은 것으로 본다. 돌은 그곳에서 적어도 300년을 보냈다.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50명이 넘는 학자·기술자·화가를 거느린 군대로 이집트를 침공했다. 1799년 7월 중순, 프랑스군이 쥘리앵 요새라고 이름을 바꾼 이 요새를 보강하던 병사들이 벽을 헐다가 석판을 찾아냈다. 피에르프랑수아 부샤르 중위가 그 중요성을 알아보았다. 카이로에 새로 세운 이집트 학사원에 보낸 보고서는 세 글이 한 칙령의 판본들이라고 정확히 짐작했다.
프랑스 학자들은 곧 사본을 만들었다. 인쇄공이자 언어학자인 장조제프 마르셀은 가운데 문자가 민중문자임을 알아냈고, 화가이자 발명가인 니콜라자크 콩테는 돌 자체를 인쇄판처럼 써서 먹물 탁본을 떴다. 이 탁본이 파리에 전해져, 돌이 이집트를 떠나기도 전에 유럽 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중급
노획, 런던, 대영박물관
1801년 영국·오스만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알렉산드리아 항복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원정대가 모은 유물을 넘겨야 했다. 므누 장군은 돌을 개인 재산이라고 주장했고, 돌이 정확히 어떻게 영국 손에 넘어갔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영국 장교 톰킨스 힐그로브 터너는 뒷날 자신이 직접 빼앗아 포차에 싣고 갔다고 말했다.
터너는 1802년 2월 돌을 영국에 가져왔다. 런던 고미술협회에서 공개된 뒤, 협회는 석고 모형 넷을 떠서 옥스퍼드·케임브리지·에든버러 대학과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 보내고 탁본을 배포했다. 돌은 그해 대영박물관에 들어갔고, EA 24라는 번호를 받았다.
로제타석은 1802년 이후 거의 쉬지 않고 전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에는 안전을 위해 우편 철도의 지하 역으로 옮겨져 2년을 보냈다. 평시에 박물관을 떠난 것은 단 한 번, 1972년 10월 샹폴리옹의 유명한 편지 발표 150주년을 맞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한 달 동안 전시되었을 때뿐이다. 2004년부터는 이집트 조각 전시실 한가운데의 특별 진열장에 있고, 왕의 도서관 전시실에는 만져 볼 수 있는 복제품이 있다.
돌의 여정은 더 큰 역사를 비춘다. 이집트의 기념비가 중세 이슬람 국가에 의해 건축 자재로 재사용되고, 침략 중이던 유럽 제국 하나가 찾아내어 다른 제국이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옆면에 칠해진 ‘1801년 영국군이 이집트에서 노획’이라는 글귀는 이 내력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중급
암호 풀기: 1799년에서 1822년까지
1799년 이전까지 상형문자는 수백 년 동안 오해받았다. 5세기 그리스 저술가 호라폴론은 상형문자를 숨은 뜻을 지닌 상징 그림으로 풀이했고, 이 생각이 후대 독자들을 잘못 이끌었다. 이븐 와흐시야 같은 중세 아랍 학자들은 이집트어의 마지막 단계인 콥트어와 상형문자를 견주었고, 17세기 예수회 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비록 상형문자 번역은 공상에 가까웠지만 콥트어가 고대 이집트어에서 나왔다는 점은 옳게 주장했다.
연구는 그리스어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역이 1803년에 출판되었다. 1802년에는 앙투안이자크 실베스트르 드 사시와 스웨덴 외교관 요한 다비드 오케르블라드가 그리스어 이름을 실마리로 민중문자 속 대응어를 찾았다. 드 사시는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드로스 등 이름 몇 개를 찾아냈고, 오케르블라드는 절반쯤 맞은 29자의 민중문자 자모표를 만들었다. 하지만 둘 다 민중문자가 순수한 알파벳이라고 생각했기에 더 나아가지 못했다.
빛 연구로도 유명한 영국의 박식가 토머스 영이 1814년부터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카르투슈 속 이름은 소리대로 적혔으리라는 힌트를 따라, 그는 상형문자 판본에서 프톨레마이오스를 적은 기호들을 찾아냈다. 또 상형문자와 민중문자 사이의 닮은 기호를 수십 개 찾아내, 민중문자가 상형문자에서 나온 소리 글자와 뜻 글자를 섞어 쓴다는 올바른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이 결과를 1819년 백과사전 항목으로 발표했다.
결정적 돌파구는 콥트어에 능통했던 그르노블 출신 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이 열었다. 그는 로제타석의 프톨레마이오스 카르투슈와 필라이에서 온 오벨리스크의 클레오파트라 카르투슈를 이용해 소리 글자 목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1822년 9월 아부심벨 비문의 사본을 보다가 토착 파라오 람세스와 투트모세의 이름을 읽어 냈다. 소리 글자가 그리스 지배 훨씬 이전부터 쓰였음을 증명한 것이다. 1822년 9월 27일 그는 『다시에 씨에게 보내는 편지』로 파리에서 결과를 발표했고, 1824년 『상형문자 체계 개요』에서 상형문자가 ‘상형적이고 상징적이며 동시에 표음적인’ 문자라고 설명했다.
중급
유산: 이집트학의 탄생과 일상어가 된 이름
1824년 무렵 로제타석의 짧은 상형문자 부분은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었다. 샹폴리옹은 수백 점의 다른 비문과 파피루스로 나아갔다. 그는 1832년 문법서와 사전을 미완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후대 학자들이 그의 체계를 바로잡았다. 카를 리하르트 렙시우스는 1837년 자음 둘·셋을 나타내는 기호를 설명했고, 하인리히 브루크슈는 민중문자 연구를 발전시켰으며, 에마뉘엘 드 루제는 1850년대에 이집트 문학을 처음 번역해 출판했다.
최종 확인은 1866년에 왔다. 렙시우스가 또 다른 3언어 사제 칙령인 카노푸스 칙령의 보존 상태 좋은 사본을 찾아낸 것이다. 상형문자를 그리스어와 곧바로 대조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해독 방법이 옳았음을 의심의 여지 없이 보여 주었다. 이때 이집트 문자는 읽을 수 있는 언어가 되었고, 3천 년이 넘는 역사·종교·문학이 열렸다.
같은 세기의 쐐기문자 해독과 더불어, 이집트 문자 해독은 인류 초기 역사 연구를 완전히 바꾸었다. 피라미드 텍스트, 사자의 서, 이집트의 이야기와 편지를 그리스·로마인의 전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말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로제타석’이라는 말은 결정적 열쇠를 뜻하는 비유가 되었다. 쐐기문자 해독의 실마리가 된 베히스툰 비문 같은 다른 다언어 비문도 ‘로제타석’이라 불린다. 과학자들은 물리학의 수소 스펙트럼, 유전학의 모델 식물 등에 이 표현을 썼고, 유럽우주국은 혜성 탐사선에 로제타라는 이름을 붙였다.
심화
공적과 방법을 둘러싼 논쟁: 영, 샹폴리옹, 그리고 다른 이들
해독의 공적을 누구에게 돌릴지는 1820년대부터 논쟁거리였다. 샹폴리옹의 편지는 민중문자에 대한 영의 연구는 언급했지만, 영의 프톨레마이오스 카르투슈 분석이나 여성 이름 어미의 발견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샹폴리옹의 진전을 가능하게 했다고 믿은 영은, 샹폴리옹이 영국의 열쇠를 빌렸다 해도 ‘자물쇠가 지독히 녹슬어’ 보통 팔 힘으로는 돌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사적으로 썼다. 1820년대 영국 평론가들은 샹폴리옹을 표절로 비난했고, 1904년 E. A. 월리스 버지도 영의 역할을 다시 강조했다.
오늘날 해독사 연구자들은 대체로 해독을 누적적 성취로 보면서도 결정적 역할은 샹폴리옹에게 돌린다. 영의 통찰은 중요했지만 그는 이름을 넘어서지 못했고, 토착 이집트어 낱말 전반에 소리 글자가 쓰인다는 점을 끝내 파악하지 못했다. 샹폴리옹은 콥트어 지식 덕분에 이름 읽기에서 언어 읽기로 나아갈 수 있었다. 최근의 서술은 1822년의 편지 자체는 영의 성과보다 조금 나아간 정도였고, 진짜 도약은 소리 글자가 왕의 이름만이 아니라 문자 전체에 쓰였음을 보인 1823~1824년에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이 이야기는 ‘열쇠 하나’의 한계도 보여 준다. 로제타석의 상형문자 부분은 심하게 손상되어 기호 수가 비교적 적고, 세 판본은 정확한 번역도 아니다. 결정적 증거의 상당 부분은 다른 곳에서 왔다. 필라이 오벨리스크, 아부심벨 등 신전 비문의 사본, 아비도스 왕명표, 콥트어 어휘다. 샹폴리옹이 몇몇 결론에 정확히 어떻게 이르렀는지는 온전히 재구성할 수 없는데, 당대 기록이 서로 엇갈리고 ‘해냈다!’라는 유명한 외침도 1906년에 쓰인 전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샹폴리옹의 체계에도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 그는 고전 이집트어와 콥트어의 유사성을 과대평가했고, 소리 글자 하나가 소리 하나만 나타낸다고 믿었다. 렙시우스, 에드워드 힝크스, 드 루제 등이 이를 바로잡았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제 해독을 한 천재의 한순간이 아니라, 앞선 아랍·유럽의 콥트어 연구까지 포함해 1799년부터 1860년대까지 여러 학자가 참여한 과정으로 설명한다.
심화
소유권, 식민의 과거, 반환 요구
2003년 7월 당시 이집트 최고유물위원회 사무총장이던 자히 하와스는 로제타석을 ‘이집트 정체성의 상징’이라 부르며 반환을 요구했다. 2005년에는 베를린의 네페르티티 흉상, 루브르의 덴데라 황도대 등과 함께 이집트가 되찾고 싶은 핵심 유물 목록에 로제타석을 올렸다. 그는 뒤에 대이집트 박물관 개관에 맞춘 3개월 대여를 제안하며 한때 영구 반환 요구를 거둘 수 있다고까지 했고, 2022년에도 요구를 되풀이했다.
대영박물관은 2005년 이집트에 실물 크기 복제품을 주었고, 이 복제품은 처음에 발견 장소 근처의 라시드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박물관은 원본을 돌려주지 않았다. 다른 대형 박물관들처럼, 과거에 취득한 유물은 그 시대의 가치관에 비추어 보아야 하며 ‘보편 박물관’은 모든 나라 사람을 위해 봉사한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이는 2002년 30여 개 주요 박물관의 공동 선언에 담긴 주장이다. 비판하는 쪽은 보편 박물관이라는 생각이 주로 옛 제국 수도의 기관에 이롭다고 반박한다.
로제타석의 내력은 특별한 질문도 던진다. 이 돌은 발굴된 것이 아니라 군사 요새에서 떼어 낸 것이고, 이집트 땅에서 전쟁 중이던 두 외국 군대 사이를 오갔으며, 소유를 옮긴 법적 근거인 1801년 항복 조약은 유럽 열강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합의로 이집트인 자신은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많은 이집트인에게 문제는 법적 소유권보다, 자기 역사의 상징을 누가 관리하느냐에 있다.
이집트학자 존 레이는 언젠가 이 돌이 로제타에 있었던 기간보다 대영박물관에 있은 기간이 더 길어질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 논쟁은 식민 시대에 형성된 소장품을 다시 평가하려는 더 넓은 국제적 흐름 속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여기서 참고한 자료에는 대여나 반환 합의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핵심 개념
- 병기(竝記) 텍스트
- 같은 내용을 둘 이상의 언어나 문자로 적은 글. 아는 판본과 모르는 판본을 비교하는 것이 해독의 고전적 방법이다.
- 소리 글자와 뜻 글자
- 이집트 문자는 소리를 나타내는 기호와 낱말·뜻을 나타내는 기호를 섞어 썼다. 두 종류가 함께 쓰인다는 깨달음이 돌파구의 핵심이었다.
- 카르투슈
- 왕의 이름을 둘러싼 타원형 테두리. 해독자들은 이를 통해 프톨레마이오스, 클레오파트라 같은 이름을 찾아 기호의 소릿값을 알아냈다.
- 콥트어
- 그리스 문자에 바탕을 둔 알파벳으로 적은 이집트어의 마지막 단계. 샹폴리옹은 이 지식으로 이름에서 낱말로 나아갔다.
- 사제 칙령
- 로제타석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실과 이집트 사제층의 거래를 기록한다. 선물과 특권을 주고 종교적 정통성을 얻는 것이다.
- 누적적 해독
- 이집트 문자 해독은 수십 년에 걸친 여러 학자의 작업이었고, 샹폴리옹의 통찰이 그 전환점이었다.
- 논쟁 중인 유산
- 1801년 전리품으로 옮겨진 로제타석은 식민 시대 소장품과 반환을 둘러싼 논쟁의 일부다.
기록
- 기원전 238년 —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 앞선 3언어 사제 칙령인 카노푸스 칙령이 반포된다.
- 기원전 204년 —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다섯 살 무렵 왕위에 오른다.
- 약 기원전 197년 — 기원전 197년 10~11월 무렵 열세 살쯤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년으로 선포된다. 칙령은 뒤에 기원전 197년 11월 27일을 공식 대관 기념일로 적는다.
- 기원전 196년 — 기원전 196년 3월 27일,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멤피스에서 대관한 다음 날 모인 사제들이 로제타석의 칙령을 반포한다.
- 394년 — 필라이에서 마지막으로 알려진 상형문자 비문이 새겨지고, 이후 문자에 대한 지식이 사라진다.
- 1799년 — 7월, 프랑스 병사들이 로제타 근처 쥘리앵 요새의 벽에서 돌을 찾아낸다.
- 1801년 — 프랑스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항복하고 돌이 영국 손에 넘어간다.
- 1802년 — 돌이 영국에 도착해 대영박물관에 들어간다. 드 사시와 오케르블라드가 민중문자 속 이름을 찾아낸다.
- 1814년 — 토머스 영이 상형문자 판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이름의 소리 글자를 찾아낸다.
- 1822년 — 9월 27일, 샹폴리옹이 『다시에 씨에게 보내는 편지』로 해독을 발표한다.
- 1824년 — 샹폴리옹이 『상형문자 체계 개요』를 출판한다.
- 1972년 — 돌이 한 달 동안 루브르에 대여된다. 평시에 대영박물관을 떠난 유일한 여정이다.
용어 풀이
- 비석(스텔레)
- 글이나 그림을 새겨 공공장소나 신전에 세운 돌판.
- 상형문자
- 고대 이집트의 그림 문자. 특히 신성한 글과 기념비에 쓰였다.
- 민중문자(데모틱)
-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일상 문서에 쓰인 이집트의 빠른 흘림 문자. 그 문자로 적힌 이집트어 단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 화강섬록암
- 화강암과 비슷한 단단하고 알갱이가 굵은 화성암. 로제타석의 돌은 아스완 지역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부터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30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린 마케도니아계 그리스 왕가.
- 시노드
- 사제들의 공식 회의.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시노드는 왕을 기리는 칙령을 반포했다.
- 카르투슈
- 상형문자에서 왕의 이름 둘레에 그린 타원형 테두리.
- 한정사
- 낱말 뒤에 붙여 그 뜻의 범주를 알려 주는, 읽지 않는 기호.
- 콥트어
- 그리스 문자와 몇 개의 추가 기호로 적은 이집트어의 마지막 단계. 지금도 콥트 교회 전례에 쓰인다.
- 해독
- 모르는 문자 체계가 언어를 어떻게 적는지 밝혀내는 일.
묻고 답하기
로제타석에는 비밀이나 이야기가 적혀 있나요?
아니에요. 사제들이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감사하고 그를 기리는 공식 칙령이에요. 내용 때문이 아니라 세 가지 문자로 쓰였기 때문에 유명해졌어요.
왜 로제타석이라고 부르나요?
유럽 사람들이 로제타라고 부르던, 아랍어로 라시드라는 이집트 지중해 연안 마을 근처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에요.
로제타석 하나로 상형문자를 다 풀었나요?
아니에요. 출발점을 주었을 뿐이고, 해독에는 콥트어, 필라이 오벨리스크 같은 다른 비문, 그리고 여러 학자의 오랜 노력이 필요했어요.
상형문자를 해독한 사람은 영인가요, 샹폴리옹인가요?
둘 다 기여했습니다. 영이 중요한 초기 발견을 했지만, 체계 전체의 원리를 밝히고 이집트어 낱말을 읽어 낸 것은 샹폴리옹이며, 대부분의 역사가는 그에게 결정적 역할을 돌립니다.
세 판본은 왜 조금씩 다른가요?
서로 다른 독자와 전통을 위해 쓰였고, 한 원본을 번역했다기보다 나란히 작성되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판본이 먼저인지, 혹은 먼저인 판본이 있는지는 아직 논쟁 중입니다.
이런 돌이 하나뿐인가요?
아닙니다. 같은 칙령의 다른 사본과, 보존 상태가 더 좋은 카노푸스 칙령 등 앞선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3언어 칙령이 여럿 알려져 있습니다.
로제타석은 이집트로 돌아갈까요?
이집트 당국자들은 반환이나 대여를 요구해 왔습니다. 대영박물관은 세계를 위한 박물관이라는 역할을 내세워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으며,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Rosetta Stone. Wikipedia
- Decipherment of ancient Egyptian scripts. Wikipedia
- Ptolemy V Epiphanes. Wikipedia
- Fort Julien. Wikipedia
- Thomas Young (scientist). Wikipedia
- Decree of Canopus. Wikipedia
- Ptolemaic synodal decrees. Wikipedia
- Richard Parkinson, Cracking Codes: The Rosetta Stone and Decipherment. British Museum Press, 1999
함께 보기
- 쐐기 문자갈대를 젖은 점토에 눌러 쓴 세계 최초의 문자 가운데 하나.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발명되어 3,000년 넘게 여러 언어를 적는 데 쓰였다.
- 네페르티티 흉상파라오 아케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를 석회암과 석고로 빚고 채색한 초상. 아마르나의 조각가 투트모세 공방에서 만들어졌고 1912년 독일 발굴대가 찾아냈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 알렉산드리아에서 문헌을 모으고 연구하던 중심지다.
- 피라미드 텍스트기원전 2350년 무렵부터 사카라의 왕실 피라미드 안에 새긴 주문으로, 죽은 왕을 하늘의 신들 사이로 올려 보내기 위한 이집트 최고(最古)의 대규모 종교 문헌.
- 가우가멜라 전투기원전 331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물리친 전투다.
- 나르메르 팔레트나르메르 왕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왕관을 모두 쓰고 적을 무찌르는 모습을 새긴, 높이 약 63cm의 방패 모양 의례용 실트암 팔레트.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