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네페르티티 흉상

Nofretete-Büste (베를린, ÄM 23100)

약 기원전 1350–1340년 · 아케타텐 / 텔 엘아마르나 (신왕국 이집트), 현재 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

한 문장으로

네페르티티 흉상은 약 3,350년 전 아마르나의 조각가 공방에서 만들어진 이집트 왕비의 채색 석회암 초상으로, 1912년 독일 발굴대가 찾아낸 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많은 논란을 낳은 예술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네페르티티 흉상
이미지: Philip Pikart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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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3,350년 전 이집트에는 아케나톤이라는 왕과 네페르티티라는 왕비가 있었어요. 네페르티티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이가 왔다’라는 뜻이에요. 왕은 나일강 옆 사막에 완전히 새로운 수도를 세웠고, 예술가들도 그곳으로 옮겨 가 왕의 가족을 조각하고 그렸어요.

그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의 공방에는 돌로 된 머리와 석고 얼굴이 가득했어요. 그중에 어깨 위까지만 만든 왕비의 초상이 있었어요. 조각가는 석회암을 깎고, 그 위에 얇은 석고를 덧발라 피부를 매끈하게 만든 다음, 알록달록하게 칠했어요. 높고 파란 왕관, 금빛 띠, 꽃무늬 목걸이, 따뜻한 빛깔의 피부까지요.

도시가 텅 비자 공방은 천천히 무너졌고, 흉상은 3,000년이 넘도록 흙더미 속에 숨어 있었어요. 1912년 12월 독일 발굴대가 이것을 찾아냈지요. 발굴 대장은 일기에 ‘말로 설명해 봐야 소용없다, 직접 봐야 한다’라고 썼어요.

이 흉상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요. 오른쪽 눈에는 반짝이는 눈동자가 박혀 있는데, 왼쪽 눈은 비어 있어요. 왜 그런지는 아무도 확실히 몰라요. 아직 덜 만들었는지, 가르치는 데 쓰던 본보기였는지, 아니면 눈알이 빠져서 잃어버렸는지요.

지금 흉상은 독일 베를린의 박물관에 있고, 해마다 수십만 명이 보러 와요. 그런데 이집트의 많은 사람은 이 흉상이 공정하지 않게 옮겨졌으니 돌려받아야 한다고 말해요. 그래서 이 흉상은 아름다운 얼굴일 뿐 아니라, 옛 보물을 누가 가져야 하느냐는 커다란 질문이기도 해요.

한눈에 보기

제작
기원전 1345~1340년 무렵(신왕국 제18왕조, 아케나톤 치세)
제작지
중부 이집트 아케타텐(텔 엘아마르나)의 공방 P 47.2 — 조각가 투트모세의 작품으로 본다
주인공
아케나톤의 정비(正妃) 네페르티티. 흉상에 글자는 없고, 윗면이 평평한 파란 왕관으로 알아본다
재료
석회암 심, 채색한 스투코(석고) 층, 수정과 밀랍으로 만든 눈 상감
크기
높이 약 47~49cm, 무게 약 20kg
발견
1912년 12월 6일,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이끈 독일 동방학회 발굴대
소장
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이집트 박물관·파피루스 컬렉션, 소장 번호 ÄM 23100)
논란
이집트는 1924년부터 반환을 요구해 왔고, 베를린 박물관 측은 1913년에 서명된 유물 분배 문서를 근거로 든다

쉬움

네페르티티 흉상이란?

네페르티티 흉상은 기원전 14세기 이집트를 다스린 왕 아케나톤의 정비 네페르티티의 머리·목·어깨를 실물 크기로 만든 초상이다. 높이는 50cm 남짓하다. 석회암으로 기본 형태를 깎고 고운 석고(스투코)를 여러 겹 덧바른 뒤 매우 정성껏 채색해, 지금도 색이 막 칠한 듯 선명하다.

흉상은 1912년 텔 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되었다. 텔 엘아마르나는 아케나톤의 수도 아케타텐(‘아텐의 지평선’)의 폐허를 부르는 오늘날의 이름이다. 흉상은 조각가 공방의 잔해 속에서 여러 석고 얼굴, 미완성 두상과 함께 나왔다. 같은 집에서 ‘조각가’ 투트모세의 이름이 새겨진 상아 유물이 발견되어, 이 공방과 흉상은 대개 그의 것으로 본다.

흉상은 1913년부터 독일에 있다. 지금은 베를린 박물관섬에 있는 노이에스 박물관의 북쪽 돔 전시실에 홀로 서 있으며, 이집트 컬렉션의 대표 유물이다.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과 함께 고대 이집트에서 전해진 가장 유명한 이미지로 꼽힌다.

흉상은 박물관과 과거를 둘러싼 가장 오래된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기도 하다. 이집트는 약 100년 동안 반환을 요구해 왔고, 독일 박물관 당국은 이 흉상이 합법적으로 독일 발굴대의 몫으로 배정되었다고 말한다. 예술과 논쟁이 모두 이 흉상의 이야기다.

[1][6][3]

쉬움

흉상을 보는 법

먼저 왕관을 보자. 네페르티티는 윗면이 평평하고 키가 큰 파란 왕관을 쓰고 있는데, 이집트 미술에서 이런 왕관을 쓴 인물은 그녀뿐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네페르티티 모자 왕관’이라고 부른다. 색색의 장식이 박힌 금빛 띠가 리본처럼 왕관을 두르고 있다. 이마 앞에는 원래 왕권을 상징하는 고개 든 코브라(우라이우스)가 있었지만 부러져 없어졌다. 흉상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왕관 덕분에 주인공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얼굴이다. 정면에서 보면 거의 완벽하게 좌우 대칭이다. 눈썹, 눈매, 입술의 곡선이 서로 거울처럼 마주한다. 눈썹은 가는 털을 엇갈린 빗금으로 하나하나 그렸다. 입술은 붉고 피부는 따뜻한 옅은 갈색이다. 목에는 초록·빨강·파랑·노랑으로 꽃잎과 잎사귀를 그린 넓은 목걸이가 걸려 있다.

옆에서 보면 느낌이 달라진다. 길고 가는 목이 앞으로 기울어 무거운 왕관을 떠받치는 듯하다. 한 미술사 교과서는 이것을 가느다란 줄기 위의 무거운 꽃에 빗댄다. 어깨는 곧게 잘려 있고 옆면은 칠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데, 이것은 흉상의 용도를 둘러싼 논쟁의 단서 가운데 하나다.

마지막으로 눈을 보자. 오른쪽 눈의 홍채와 동공은 검게 물들인 밀랍으로 만들고, 그 위를 얇게 간 수정으로 덮어 진짜 눈처럼 빛을 받는다. 왼쪽 눈구멍은 비어 있고 매끈하다. 이 빈 눈은 1912년 이후 줄곧 사람들을 궁금하게 했다.

[1][8]

쉬움

네페르티티는 누구였나?

네페르티티는 기원전 14세기 사람이다. 이름은 ‘아름다운 이가 왔다’라는 뜻이다. 그녀는 뒤에 이름을 아케나톤으로 바꾼 아멘호테프 4세의 정비, 곧 ‘대왕비’였다. 부모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훗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관리 아이(Ay)의 집안과 연결하는 견해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증거는 빈약하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 사이에는 딸이 여섯 있었다. 그중 안케센파아텐은 뒤에 소년 왕 투탕카멘과 혼인하고 이름을 안케센아멘으로 바꾸었다. 아마르나의 그림에는 왕 부부가 딸들과 함께 햇살 아래 있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햇살 끝마다 작은 손이 달려 생명의 표지를 건넨다.

네페르티티는 대부분의 이집트 왕비보다 훨씬 자주, 그리고 훨씬 힘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왕과 같은 크기로, 태양신을 직접 경배하며, 심지어 파라오만의 장면인 적을 내리치는 모습으로도 나온다. 학자들은 오랫동안 그녀가 아케나톤 재위 12년 무렵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2012년에 발표된 비문은 재위 16년에도 그녀가 대왕비였음을 보여 준다.

그 뒤의 일은 불확실하다. 오늘날 많은 이집트학자는 그녀가 아케나톤이 죽은 뒤 투탕카멘이 즉위하기 전에 ‘네페르네페루아텐’이라는 이름의 여성 파라오로 잠시 다스렸다고 보지만, 여전히 논쟁 중이다. 그녀의 미라는 아직 확실히 확인되지 않았다.

[2][9]

중급

아케나톤의 혁명과 아마르나라는 도시

흉상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특이한 시기에 속한다. 아멘호테프 4세는 즉위 초(재위 기원전 1351~1334년 무렵) 국가 종교를 태양 원반 아텐, 곧 경배할 만한 유일한 신에게로 돌렸다. 이것이 진정한 유일신교였는지,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한 신만 섬기는 ‘단일신 숭배’였는지는 지금도 논의된다. 그는 이름을 아케나톤으로 바꾸고, 다른 신들, 특히 테베의 아멘 신앙을 닫거나 내버려 두었다.

재위 4~5년째에 왕은 중부 이집트 나일강 동쪽 기슭의 빈 사막을 골라 새 수도 아케타텐을 세웠다. 궁전, 지붕 없는 태양 신전, 관청, 주택가가 빠르게 들어섰고, 예술가·관리·노동자들이 테베와 멤피스에서 옮겨 왔다.

혁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케나톤이 재위 17년에 죽고 몇 해 지나지 않아 궁정은 전통 신앙으로 돌아갔다. 투탕카텐은 이름을 투탕카멘으로 바꾸었고, 수도는 버려졌으며, 뒷날의 왕들은 아케나톤 시대의 기억을 지우려 했다. 고고학자에게는 다행이었다. 아마르나는 짧게 쓰이고 버려졌기 때문에, 집과 공방이 수백 년에 걸친 후대 건축 아래 묻히지 않았다.

투트모세의 공방도 이 도시의 일부였다. 궁정이 떠나자 조각가들은 본보기, 석고 습작, 미완성 작품을 선반과 바닥에 남겨 두었다. 흉상도 그중 하나였다. 시간이 흘러 지붕이 새고 무너지면서 흉상은 창고의 잔해 속에 묻혔고, 1912년까지 그곳에 있었다.

[4][5][7]

중급

아마르나 미술과 흉상의 자리

전통 이집트 미술은 수천 년 동안 아주 느리게 변했다. 그런데 아케나톤 시대에 갑자기 달라졌다. 이른바 아마르나 양식은 왕 가족이 입맞추고, 아이들과 놀고, 식사하는 친밀한 일상 장면을 보여 주고, 몸도 새롭게 그린다. 길쭉한 얼굴과 목, 좁은 어깨, 풍만한 엉덩이와 배, 가는 팔다리가 특징이다. 특히 초기의 아케나톤 초상은 놀라울 만큼 과장되어 보인다.

네페르티티 흉상이 유명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오히려 과장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긴 목과 앞으로 기운 자세에서 아마르나의 영향이 보이지만 얼굴은 균형 잡히고 차분하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치세 후반에 더 고전적이고 이상화된 양식으로 돌아간 증거로 보고, 어떤 학자는 아마르나 미술 자체가 시간이 흐르며 누그러졌다고 강조한다. 어느 쪽이든 흉상은 개인의 생김새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과 전통적 완벽의 이상을 한 거장이 얼마나 잘 결합했는지를 보여 준다.

같은 공방에서 나온 유물을 함께 보면 더 분명해진다. 20여 점의 석고 얼굴 가운데에는 왕족과 이름 모를 사람들의 초상이 있는데, 일부는 주름과 눈 밑 처짐까지 표현했다. 여성을 늘 젊게 그리던 이집트 미술에서는 드문 일이다. 배가 둥글게 나온 나이 든 네페르티티의 작은 조각상도 함께 나왔다. 이들 옆에 두면, 유명한 흉상은 의도적으로 고른 이상적 이미지처럼 보인다.

흉상이라는 형식 자체도 이집트에서는 드물었다. 이집트인은 온전한 형상을 중시했기에, 가슴에서 잘린 형상은 불완전해 보일 수 있었다. 그래도 주로 집안의 조상 숭배와 관련해 흉상이 만들어졌고, 아마르나 시대부터 더 흔해진다. 같은 방에서 나온 짝을 이루는 아케나톤 흉상은 고대에 이미 부서진 상태였다.

[5][3][8]

중급

만드는 법: 돌, 석고, 물감, 수정

조각가는 먼저 석회암으로 기본 형태를 깎았다. 그 위에 석고로 만든 스투코를 두께를 달리해 여러 겹 바르고, 더 무른 이 재료로 섬세한 마무리를 했다. 1992년, 특히 2006년의 CT 촬영으로 이 과정이 처음으로 안쪽에서부터 드러났다.

베를린 영상과학연구소에서 실시해 2009년 학술지 『Radiology』에 발표된 2006년 촬영은, 안쪽에 깎인 석회암 얼굴이 겉의 채색된 얼굴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안쪽 얼굴에는 입가와 뺨에 주름이 있고 코에 작은 혹이 있는데, 바깥 석고층이 이를 매끈하게 덮는다. 연구자들은 이것이 당시의 미적 이상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조각가가 자연을 완벽 쪽으로 고친 것이다.

물감은 이집트의 익숙한 안료들이다. 보르하르트가 의뢰해 1923년에 발표된 분석과, 2009년 베를린 국립박물관 라트겐 연구소의 비파괴 조사에서 구리를 이용한 파랑·초록 프릿(인공 안료 ‘이집션 블루’ 포함), 붉은 황토 등 철 계열의 빨강, 비소 광물인 노란 웅황, 탄소 검정, 흰 백악이 확인되었다.

마무리의 정도가 고르지 않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얼굴에는 가장 큰 정성을 들였지만 목걸이는 비교적 빠르게 칠했고 어깨 옆면은 비워 두었다. 이 완벽함과 미완성의 공존이, 흉상이 완성작인지 본보기인지를 둘러싼 오랜 논쟁의 핵심이다.

[1][8]

중급

1912년의 발견과 유물 분배

1900년 무렵 아마르나 유물이 미술 시장에 나오면서 독일의 관심이 커졌다. 1907년 시굴을 거쳐 이집트학자이자 건축사가인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독일 동방학회(Deutsche Orient-Gesellschaft)를 위해 장기 발굴을 시작했다. 비용은 베를린의 사업가이자 후원자 제임스 지몬이 혼자 댔다. 당시 관례대로 발굴 허가는 프랑스 학자들이 이끌던 이집트 유물청이 내주었다.

1912년 12월 6일 발굴대는 P 47.2 집을 파고 있었다. 보르하르트가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 왕자 일행을 맞으러 나간 사이, 동료 헤르만 랑케가 ‘좋은 것이 나오고 있다’는 쪽지를 보냈다. 흉상은 그날 오후에 들어 올려졌다. 왕자가 직접 찍은 사진에는 이집트인 현장 감독 무함마드 에스세누시가 흉상을 안고 있다. 그날 저녁 보르하르트는 유명한 일기 구절 ‘설명은 소용없다, 봐야 한다’를 썼다.

발굴 시즌이 끝나면 유물을 발굴단과 이집트가 나누는 ‘파르타주(분배)’가 이루어졌다. 1913년 1월 20일 감독관 귀스타브 르페브르가 아마르나 유물을 같은 가치의 두 몫으로 나누었다. 아케나톤·네페르티티와 딸들을 새긴 채색 제단이 이집트 쪽 목록 맨 위에, 흉상이 독일 쪽 목록 맨 위에 올랐다. 르페브르와 보르하르트가 서명한 공식 기록이 베를린에 남아 있다.

그날 흉상이 어떻게 제시되었는가가 논쟁의 핵심이다. 박물관 측에 따르면 르페브르는 사진을 보고 유물을 직접 살폈다. 비판하는 쪽은 보르하르트가 흉상을 돋보이지 않게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고, 재료를 석회암이 아닌 석고라고 적었으며, 흉상이 이미 어두운 방의 상자 속에 포장되어 있었다는 증언을 든다. 학회 기록 보관소의 1924년 문서에는 보르하르트가 ‘흉상을 우리 몫으로 지키고 싶어 했다’는 기록이 있다.

[7][1]

중급

독일에서의 한 세기: 비공개, 전쟁, 박물관섬으로의 귀환

흉상은 1913년 베를린에 도착해 제임스 지몬의 소유가 되었고, 그의 저택에서 황제 빌헬름 2세도 이를 보았다. 1913년 말 다른 아마르나 유물이 노이에스 박물관에서 전시될 때 흉상은 보르하르트의 요청으로 빠졌다. 지몬은 1920년 7월 11일 흉상을 포함한 아마르나 유물을 박물관에 기증했다. 보르하르트가 1923년 흉상을 출판했고, 1924년 새로 지붕을 얹은 노이에스 박물관의 ‘아마르나 안뜰’에서 처음 공개되어 큰 화제가 되었다.

1939년 박물관이 문을 닫고 소장품이 포장되었다. 흉상은 은행 지하 금고, 동물원 방공탑을 거쳐 1945년 3월 튀링겐의 메르커스 소금 광산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미군이 발견했다. 흉상은 비스바덴의 미군 중앙 수집소로 옮겨져 1946년부터 그곳에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전후 정치가 흉상의 거처를 정했다. 동독은 전쟁 전 흉상이 있던 동베를린 박물관섬으로 돌려 달라고 했지만, 흉상은 1956년 서베를린으로 가서 달렘 박물관 단지에, 1967년부터는 샤를로텐부르크 궁 맞은편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1970년대에 흉상은 동서독 모두에게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통일 뒤인 2005년 흉상은 박물관섬의 알테스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2009년 10월 재건된 노이에스 박물관으로 돌아가 북쪽 돔 전시실에 자리 잡았다. 보존 전문가들은 흉상을 ‘운반 불가’로 분류했다. CT 촬영에서 석회암 심과 석고층 사이의 빈 공간이 드러났고, 채색 표면과 수정 상감도 약하기 때문이다.

[10][1][8]

중급

초상에서 아이콘으로

1924년 이후 몇 년 만에 흉상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이미지가 되었다. 긴 목, 아치형 눈썹, 살짝 미소 띤 차분한 입매는 여성미의 이상을 상징하게 되었고, 엽서와 포스터, 1989년 독일 우표에 실렸다. 할리우드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1935)의 여주인공 헤어스타일도 이 흉상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흉상은 국가 정치와도 얽혔다. 1930년 독일 신문들은 흉상을, 군주제를 잃은 나라의 새 왕비처럼 묘사했다. 나치 지도부도 흉상을 보물로 여겼다. 1933년 헤르만 괴링은 외교적 제스처로 이집트 국왕 푸아드 1세에게 돌려주는 것을 검토했지만, 히틀러가 반대하며 흉상을 위한 박물관을 짓겠다고 했다. 흉상이 영국 주도 발굴대가 찾은 투탕카멘 보물에 맞서는 독일의 자랑거리로 여겨졌다는 분석도 있다.

이집트에서도 네페르티티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찬란함을 대표하는 민족의 상징이 되었다. 독일 박물관의 아이콘이자 이집트의 국보라는 이 이중의 위상 때문에, 흉상을 둘러싼 논쟁은 금세 감정적·정치적으로 번지곤 한다.

현대 미술과 기술도 이야기를 이어 간다. 2003년 헝가리의 두 예술가가 베네치아 비엔날레 작업을 위해 흉상을 잠시 청동 몸체 위에 올렸다가 이집트 당국의 강한 반발을 샀다. 2016년에는 정보공개 청구를 계기로 박물관의 3D 스캔이 공개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이 스캔 파일을 무료로 내려받게 하고 있다.

[1][6]

심화

반환 논쟁: 법, 윤리, 엇갈리는 주장

이집트의 요구는 흉상이 공개된 1924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1925년 이집트는 독일의 발굴을 금지하겠다고 압박했고, 1929년에는 다른 유물과의 교환을 제안했지만 독일이 거절했다. 1945년 이후 이집트는 흉상을 관리하던 미국에 인도를 요청했으나, 미국은 독일 당국과 협의하라고 답했다. 요구는 1950년대에, 그리고 2000년대 이후 거듭 제기되었다. 특히 당시 이집트 유물 당국을 이끌던 이집트학자 자히 하와스가 앞장섰고, 그는 2005년 유네스코의 중재를 요청했다.

이집트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1913년 분배가 속임수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분배 문서에는 흉상이 ‘공주의 채색 석고 흉상’으로 적혀 있는데, 보르하르트의 일기는 분명히 왕비라고 쓰고 있으며, 감독관이 유물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09년 베를린 박물관이 관련 문서를 공개하자 하와스는 이것이 보르하르트의 비윤리적 행위를 확인해 준다고 말했다. 둘째, 고고학 유물은 발견된 나라에 있어야 한다는 더 넓은 원칙이다.

박물관과 프로이센 문화유산재단이 밝힌 독일의 입장은, 분배가 당시의 법적 절차를 따랐고, 책임 있는 이집트 측 관리가 기록에 서명했으며, 이집트 당국이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물관 학자들은 흉상이 이집트 쪽 최고 유물에 대응하는 것으로 일부러 독일 목록 맨 위에 놓였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보존 전문가들은 흉상이 너무 약해 이동할 수 없다고 보며, 이 때문에 일시 대여조차 어렵다고 말한다.

이 논쟁은 이제 식민 시대에 반출된 유물을 둘러싼 더 넓은 국제적 논의 속에 놓여 있다. 당시 이집트는 유럽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고 유물청도 외국인이 이끌었다. 일부 논자는 법적 질문(그때 반출이 합법이었는가)과 윤리적 질문(그 제도 자체가 공정했는가)을 구분한다. 입장은 완전 반환에서 공동 소유, 장기 대여까지 다양하다. 여기서 참고한 자료 기준으로 흉상은 베를린에 있고, 이집트의 요구는 유효하다.

[1][7]

심화

학술적 쟁점: 본보기인가 작품인가, 빈 눈, 위작설

보르하르트는 1923년 흉상이 다른 초상을 만들 때 베끼기 위한 조각가의 본보기라고 주장했다. 근거는 곧게 잘린 어깨와 칠하지 않은 옆면, 그리고 오른쪽 눈과 대칭이라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빈 왼쪽 눈이었다. 이 견해는 수십 년 동안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박물관은 지금 이 문제를 열린 질문으로 소개한다. 같은 방(18·19호실)에서 나온 20여 점의 석고 습작은 윤곽선 말고는 칠하지 않은 분명한 본보기인 반면 왕 부부의 흉상은 거의 완성되어 있고, 왕관과 목걸이의 색은 정해진 규범을 따랐으므로 채색 견본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흉상은 오히려 왕 부부를 경배하는 데 쓰였을 수도 있다.

빈 눈에 대해서도 여러 설명이 있다. 보르하르트는 눈구멍이 매끈하고 접착제 흔적이 없으므로 처음부터 상감이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뒷날 박물관장을 지낸 디트리히 빌둥은 제자들에게 눈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데 썼다고 보았고, 자히 하와스는 상감이 있었다가 나중에 부서졌다고 주장했다. 네페르티티가 병으로 한쪽 눈을 잃었다는 옛 추측은 두 눈을 모두 표현한 다른 초상들과 맞지 않는다. 박물관은 상감이 있었다 해도 발견 당시에는 없었다고 적고 있다.

스위스의 미술사가 앙리 스티를랭과 베를린의 작가 에르도안 에르지반은 각각의 책에서 흉상이 1912년 무렵 만든 현대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빈 눈, 늦은 출판, 석회암 심의 연대가 측정된 적이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료가 제18왕조 회화의 안료와 일치하고(1920년대와 1982년의 분석), CT 촬영이 안쪽에 깎인 얼굴이 있는 고대의 작업 과정을 보여 주며, 같은 공방의 다른 네페르티티 초상과도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더 넓은 역사적 질문도 있다. 흉상의 연대는 아마르나 연대기와 양식 분석에 달려 있다. 자료들은 대략 기원전 1351~1334년 사이로 보며, 보통 기원전 1345~1340년 무렵으로 추정한다. 투트모세라는 작가 비정은 공방 단지에서 나온, 그의 이름이 적힌 상아 말 눈가리개에 근거하는데, 설득력은 있지만 간접적이다. 또 네페르티티의 말년 지위 — 왕비였는가, 공동 통치자였는가, 파라오 네페르네페루아텐이었는가 — 는 이집트학에서 가장 활발한 논쟁 가운데 하나이고, 이 논쟁이 여성 권력의 이미지로서 흉상을 해석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8][1][2][3]

핵심 개념

이상화된 초상
흉상은 알아볼 수 있는 한 개인을 보여 주지만 완벽하게 다듬었다. CT 촬영은 조각가가 석회암 심에 새긴 주름을 마지막 석고층으로 매끈하게 덮었음을 보여 준다.
아마르나 양식
친밀한 왕실 장면과 길쭉한 신체 표현이 특징인 아케나톤 시대의 새 미술. 흉상은 그 영향을 절제되고 균형 잡힌 형태로 보여 준다.
공방이라는 맥락
흉상은 조각가의 집에서 석고 습작, 미완성 작품과 함께 나와, 왕실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드물게 엿보게 해 준다.
본보기인가 완성작인가
흉상이 복제를 위한 견본이었는지, 왕 부부를 경배하는 대상이었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파르타주(유물 분배)
20세기 초 외국 발굴단과 이집트가 출토 유물을 나누던 제도. 1913년 분배의 합법성과 공정성이 논쟁의 중심이다.
반환
문화재를 원래의 나라나 공동체로 돌려보내는 일. 이집트는 1924년부터 흉상의 반환을 요구해 왔다.
아름다움의 아이콘
1924년 이후 흉상은 전 세계적인 여성미의 상징이자, 독일과 이집트 양쪽의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기록

  1. 약 기원전 1351년 — 아멘호테프 4세(뒤의 아케나톤)가 즉위하고 네페르티티가 대왕비가 된다.
  2. 약 기원전 1346년 — 아텐을 기리는 새 수도 아케타텐(텔 엘아마르나)을 세운다.
  3. 약 기원전 1345년 — 투트모세의 공방에서 흉상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대략적 연대(기원전 1340년 무렵까지로 보기도 한다).
  4. 약 기원전 1336년 — 데이르 아부 히니스의 재위 16년 비문에 네페르티티가 여전히 대왕비로 나온다.
  5. 약 기원전 1334년 — 아케나톤이 죽는다. 몇 해 안에 아마르나가 버려지고 공방이 무너진다.
  6. 1912년 — 12월 6일,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이끄는 독일 동방학회 발굴대가 P 47.2 집에서 흉상을 발견한다.
  7. 1913년 — 1월 20일 유물 분배에서 흉상이 독일 몫이 되어 베를린으로 옮겨진다.
  8. 1920년 — 제임스 지몬이 흉상을 포함한 아마르나 유물을 베를린 박물관에 기증한다.
  9. 1924년 — 노이에스 박물관에서 흉상이 처음 공개되고, 이집트의 반환 요구가 시작된다.
  10. 1945년 — 미군이 메르커스 소금 광산에서 흉상을 찾아내고, 뒤에 비스바덴에서 전시한다.
  11. 2006년 — 정밀 CT 촬영으로 스투코 아래 깎인 안쪽 얼굴이 드러난다.
  12. 2009년 — 흉상이 재건된 노이에스 박물관으로 돌아간다. 1913년 문서를 본 이집트가 반환 요구를 새로 한다.

용어 풀이

흉상
사람의 머리·목과 가슴 윗부분이나 어깨까지를 표현한 조각.
스투코
석고로 만든 고운 회반죽. 여기서는 석회암 심 위에 발라 세부를 빚고 채색하는 데 썼다.
대왕비
이집트 왕의 첫째 왕비, 곧 정비를 가리키는 칭호.
아텐
태양 원반. 아케나톤은 이를 최고신 또는 유일신으로 섬겼다.
아케타텐
‘아텐의 지평선’이라는 뜻의 아케나톤의 수도. 그 폐허를 텔 엘아마르나라고 부른다.
우라이우스
이집트 왕과 왕비의 이마에 붙이는 고개 든 코브라. 왕권의 상징.
이집션 블루
모래·구리 등을 가열해 만든 인공 파란 안료로, 고대 이집트 전 시기에 쓰였다.
파르타주
‘분배’라는 뜻의 프랑스어. 발굴단과 발굴 국가가 출토 유물을 공식적으로 나누던 일.
CT 촬영
컴퓨터 단층 촬영. 물체를 손상하지 않고 X선으로 단면을 보여 준다.
반환
문화재를 원래의 나라로 돌려보내는 일.

묻고 답하기

왜 한쪽 눈이 없나요?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어요. 발굴자는 본보기로 만든 것이라 처음부터 왼쪽 눈을 넣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가르치는 용도였다거나 눈이 빠져 잃어버렸다고 보는 사람도 있어요. 발견될 때는 이미 없었어요.

이름이 안 쓰여 있는데 어떻게 네페르티티인 줄 아나요?

이름이 적힌 다른 그림에서 네페르티티만 쓰는 윗면이 평평한 파란 왕관 덕분이에요. 또 왕 가족의 다른 초상들과 함께 발견되었어요.

흉상은 금으로 만들었나요, 돌로 만들었나요?

석회암 위에 석고를 바르고 칠한 거예요. 왕관의 띠만 금빛으로 칠해져 있어요.

혹시 가짜일 수도 있나요?

전문가들은 아니라고 봅니다. 안료가 고대의 것과 일치하고, CT 촬영에서 석고 아래 깎인 얼굴이라는 고대의 작업 방식이 보이며, 같은 공방의 다른 작품들과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에요.

흉상은 불법으로 반출되었나요?

논쟁 중입니다. 독일은 1913년에 서명된 유물 분배 문서를 근거로 들고, 이집트는 이집트 측 감독관이 유물의 중요성과 재료에 대해 오도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법적·윤리적 질문 모두 아직 논의되고 있습니다.

베를린은 왜 이집트에 잠시라도 빌려주지 않나요?

박물관은 석회암과 석고 사이의 빈틈 때문에 흉상이 너무 약해 옮길 수 없다고 봅니다. 비판하는 쪽은 대여가 영구 반환 압력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의심합니다.

네페르티티가 직접 이집트를 다스렸나요?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이집트학자가 그녀를 아케나톤 뒤에 잠시 다스린 여성 파라오 네페르네페루아텐과 같은 인물로 보지만, 반대 의견도 있고 증거는 단편적입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Nefertiti Bust. Wikipedia
  2. Nefertiti. Wikipedia
  3. Thutmose (sculptor). Wikipedia
  4. Amarna. Wikipedia
  5. Amarna art. Wikipedia
  6. The Bust of Nefertiti. Staatliche Museen zu Berlin, Ägyptisches Museum und Papyrussammlung
  7. Discovery and Partage. Staatliche Museen zu Berlin, Ägyptisches Museum und Papyrussammlung
  8. The Bust. Staatliche Museen zu Berlin, Ägyptisches Museum und Papyrussammlung
  9. The Queen. Staatliche Museen zu Berlin, Ägyptisches Museum und Papyrussammlung
  10. The Presentation. Staatliche Museen zu Berlin, Ägyptisches Museum und Papyrussammlung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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