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베냉 청동상

베냉 왕국(에도)의 왕실 미술. 부조판은 에도어로 ‘아마(ama)’

약 1300–1897년 · 베냉 시 (베냉 왕국)

한 문장으로

베냉 청동상은 오늘날 나이지리아 남부에 있던 베냉 왕국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오바(왕)의 궁정을 위해 만든 수천 점의 황동 부조판, 두상, 조각 등 왕실 미술품으로, 대부분 1897년 영국군이 약탈해 갔으며 그 반환은 오늘날 박물관과 식민 역사를 둘러싼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베냉 청동상
이미지: en:User:Warofdreams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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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주 오래전, 지금의 나이지리아에 베냉이라는 강한 아프리카 왕국이 있었어요. 그 나라의 왕은 ‘오바’라고 불렸어요. 왕의 궁전은 아주 커서 안뜰이 여러 개 있고 높은 나무 기둥이 많았어요.

왕을 위해서만 일하는 특별한 예술가들이 궁전 기둥에 걸 반짝이는 금속 그림, 곧 ‘부조판’을 만들었어요. 부조판에는 오바와 군인, 족장, 악사, 표범과 물고기 같은 동물, 그리고 배를 타고 온 포르투갈 상인까지 나와요. 모두 모으면 금속으로 만든 역사책 같았지요.

예술가들은 옛 왕들과 왕의 어머니인 ‘왕모’의 금속 두상도 만들었어요. 이 두상은 새 왕이 조상을 기리는 특별한 제단에 놓였어요. 예술가들은 ‘밀랍 주조법’을 썼어요. 밀랍으로 모양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뒤, 밀랍을 녹여 내고 뜨거운 쇳물을 부었어요.

1897년 영국 군대가 베냉 시를 공격해 궁전을 불태우고 수천 점의 작품을 가져갔어요. 많은 작품이 팔려서 영국, 독일, 미국 등 여러 나라의 박물관으로 흩어졌어요.

오늘날 나이지리아의 많은 사람은 작품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요. 이미 작품을 돌려준 박물관도 있지만, 영국박물관처럼 아직 많은 작품을 가진 곳도 있어요. 어떻게, 언제, 누구에게 돌려줘야 하는지를 두고 사람들의 생각이 서로 달라요. 그사이에도 베냉 시의 주물 장인들은 옛 전통을 이어 지금도 금속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만든 이
에도 사람들의 예술가, 특히 오바를 위해 일한 왕실 황동 주물 장인 조합(이군 에론몬)
장소
베냉 왕국의 수도 베냉 시(오늘날 나이지리아 에도주)의 왕궁. 현대의 베냉 공화국과는 다른 곳
시기
13~14세기 무렵부터 1897년까지. 대부분 15~16세기 작품이며, 오바 에시기에(16세기)와 오바 에레소옌(18세기) 때를 ‘황금기’로 봄
종류
직사각형 부조판(수백 점), 오바와 왕모의 기념 두상, 인물상, 종, 제단용 물건, 장신구, 그리고 관련 상아·목조 조각
재료
대부분 황동(구리·아연·납의 비율이 다양함). 밀랍 주조법으로 제작. 금속의 상당 부분은 유럽의 마닐라(팔찌 모양 화폐)에서 옴
약탈
1897년 2월 영국의 ‘징벌 원정’ 때. 공식 수치로 약 2,500점이 영국으로 보내졌고, 약탈품 전체를 1만 점까지 보는 추정도 있음
현재 소장
약 20개국 130여 기관. 가장 큰 소장처는 영국박물관(약 900점)과 베를린 민족학박물관이며, 나이지리아에도 주요 소장품이 있음
반환
2021~2022년부터 독일, 네덜란드, 영국·미국의 여러 기관 등이 소유권을 넘김. 영국박물관 소장품은 의회법으로 처분이 제한됨

쉬움

베냉 청동상이란

베냉 청동상은 오늘날 나이지리아 남부 에도주의 베냉 시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서아프리카 국가, 베냉 왕국의 왕실 미술입니다. 이름이 조금 헷갈립니다. 이웃 나라인 현대의 베냉 공화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청동이 아니라 황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아, 나무, 산호, 쇠 같은 다른 재료로 만든 물건도 함께 포함됩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한때 오바 궁전의 나무 기둥에 못으로 박혀 있던 수백 점의 직사각형 금속 부조판과, 왕실 조상 제단에 놓였던 기념 두상입니다. 궁정 관리와 악사의 조각상, 표범과 수탉 조각, 종, 의례용 칼, 팔찌 등 다른 물건도 많습니다. 대략 13~14세기부터 1897년까지 만들어졌지만, 유명한 작품 대부분은 15~16세기의 것입니다.

대부분은 1897년 영국군이 베냉 시를 정복하면서 가져갔습니다. 그 뒤 이 작품들은 아프리카 예술의 천재성을 보여 주는 상징이자 식민 폭력의 상징이 되었고, 그 앞날은 다른 민족의 유산을 누가 소유해야 하느냐는 국제 논쟁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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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왕국과 왕

베냉 왕국은 유럽인이 오기 전부터 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에도 전승에 따르면 ‘오기소’라 불린 앞선 통치자 계보 뒤에 ‘오바’ 칭호를 쓰는 새 왕조가 들어섰습니다. 전승은 첫 오바 에웨카를 13세기 무렵 요루바 도시 이페의 왕자 오랑미얀과 연결합니다. 지금의 왕실은 이 왕조에서 이어져 왔다고 여깁니다.

15세기 ‘대왕’으로 기억되는 오바 에와레는 왕국을 넓히고 깊은 해자와 흙 성벽으로 베냉 시를 다시 세웠습니다. 16세기 초 오바 에시기에는 베냉의 힘을 더 넓혔고, 어머니 이디아에게 ‘이요바’, 곧 왕모라는 새 칭호를 주었습니다. 포르투갈 선원들이 1485년 베냉에 도착했고, 후추, 상아, 옷감, 노예가 된 사람들의 거래가 왕국의 폭넓은 아프리카 내 교역과 함께 늘었습니다.

오바는 신성한 통치자였습니다. 왕국의 안녕이 그의 지혜와 영적 힘에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황동과 상아로 된 물건은 오직 오바만 가질 수 있었고, 그는 높은 족장에게 그 사용을 허락할 수 있었습니다. 산호 구슬도 왕실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궁정 미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오바의 권위를 드러내고 굳히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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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부조판을 ‘읽는’ 법

전형적인 베냉 부조판은 두께 약 3mm의 직사각형 황동판에 인물이 높게 돋을새김된 것입니다. 먼저 가운데를 보세요. 가장 중요한 인물은 대개 가운데에 다른 인물보다 크게 놓입니다. 흔히 오바이며, 양쪽에서 두 시종이 그의 팔을 받쳐 줍니다. 이 ‘왕실 삼인상’은 왕이 믿는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다스린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음으로 옷과 물건을 보세요. 지위와 역할은 옷, 산호 구슬, 무기, 상징물로 드러났기 때문에 궁정 사람들은 전쟁 족장, 악사, 사제, 외국 상인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사람은 긴 머리와 모자, 때로는 총과 함께 나옵니다. 개인의 이름을 밝히기는 거의 불가능하며, 부조판을 특정 역사 인물과 연결하려는 현대의 시도는 추측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다음 배경을 보세요. 대부분의 부조판은 ‘에베아메’, 곧 ‘강의 잎’이라 불리는 작은 잎 무늬로 덮여 있는데, 바다의 신 올로쿤의 여사제들이 치유 의례에 쓰던 잎과 관련됩니다. 물고기, 악어 같은 물의 생물도 나와 오바를 올로쿤의 영역과 이어 줍니다. 힘세고 위험한 동물인 표범은 오바의 상징으로 거듭 등장합니다.

마지막으로 부조판이 어떻게 걸려 있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부조판은 궁전 기둥에 못으로 박혀 있었고, 아마 방문객이 지나가며 볼 수 있도록 무리와 무늬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16세기 확장 전쟁의 전투를 묘사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궁정 의식을 보여 줍니다. 모두 합쳐 왕국의 역사와 위계를 담은 시각 기록이었습니다.

[1][3]

쉬움

두상, 제단, 그리고 왕모

새 오바가 즉위하면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선왕을 위한 제단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단에는 죽은 왕의 황동 두상을 놓았고, 후대의 두상에는 꼭대기에 조각한 상아를 꽂는 구멍이 있었습니다. 18세기 무렵부터로 보이는 조각 상아에는 죽은 왕의 치세 장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축제에서 살아 있는 오바는 이 제단에 제물을 바쳐 자신의 치세를 굳건히 했습니다.

두상은 오늘날 말하는 초상이 아닙니다. 산호 구슬 목걸이와 머리 장식을 한, 이상화되었지만 알아볼 수 있는 왕실 인물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양식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 목 장식과 머리 장식이 점점 정교해졌습니다. 이 변화가 순서를 따르기 때문에 미술사가들은 두상으로 베냉 미술의 연대를 세웁니다.

왕모(이요바)의 기념 두상도 있었습니다. 첫 이요바 이디아와 흔히 연결되는 유명한 상아 펜던트 가면들은 16세기 초에 조각되었는데, 거의 똑같은 두 점이 영국박물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습니다. 영국박물관 가면의 복제품은 1977년 라고스에서 열린 대규모 범아프리카 축제 FESTAC 77의 상징이 되었고, 지금도 나이지리아 문화적 자긍심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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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주물 장인 조합과 밀랍 주조법

베냉의 황동 주조는 오바의 직접 통제 아래 도시의 특별한 구역에 살던 왕실 조합이 맡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후손들이 베냉 시의 이군 거리(이군 에론몬)에서 일하며, 주조술을 왕국에 들여온 인물로 이구에이가를 공경합니다. 에도 전승은 13세기에 오바의 요청으로 이페의 우니가 이 기술을 보내왔다고 말합니다.

작품은 밀랍 주조법으로 만들었습니다. 흙 속심 위에 밀랍으로 인물을 빚고 세부를 새긴 뒤, 모형을 흙으로 덮고 가열해 밀랍을 녹여 냈습니다. 그렇게 생긴 빈 공간에 녹인 금속을 부었습니다. 베냉 장인들은 두께가 3mm 남짓한 부조판을 만들 수 있었고, 이는 유럽 관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오바의 힘이 강해 많은 전문가를 거느릴 수 있을 때 작품의 질도 가장 높았습니다.

화학 분석에 따르면 ‘청동상’ 대부분은 구리에 아연과 납을 여러 비율로 섞은 황동입니다. 15세기 말부터는 포르투갈, 뒤에는 네덜란드 상인이 화폐로 대량으로 들여온 말굽 모양의 황동·구리 팔찌 ‘마닐라’가 금속의 큰 원천이 되었습니다. 동위원소 연구는 이 황동의 상당 부분이 독일 라인란트에서 왔음을 시사합니다. 이렇게 베냉 미술은 마닐라가 쓰이던 노예 무역을 포함한 대서양 경제와 얽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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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베냉, 이페, 그리고 포르투갈

19세기 말 찰스 허큘리스 리드와 O. M. 돌턴 같은 영국 학자들은 베냉이 포르투갈인에게서 금속 가공을 배웠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는 틀렸습니다. 베냉의 주조는 포르투갈과의 접촉보다 앞서며, 에도 전승과 학계 모두 이를 더 오래된 이페의 조각 전통과 연결합니다. 1938~1939년 이페에서 사실적인 두상이 발견되면서 베냉 미술이 깊은 서아프리카의 뿌리를 지녔다는 견해가 힘을 얻었습니다.

동시에 포르투갈과의 접촉은 분명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많은 부조판에 포르투갈 사람이 나오고, 그들의 교역은 많은 양의 금속을 가져왔습니다. 일부 학자는 유럽의 삽화 책, 인도의 상아 상자 같은 수입품이 직사각형 부조판 형식이나 몇몇 무늬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미술사가 바바툰데 라왈 같은 다른 학자들은 나이지리아 남부 전통의 부조 조각을 근거로 부조판이 토착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방문자들도 베냉 시를 묘사했습니다. 1500년 무렵 두아르트 파셰쿠 페레이라는 도시의 흙 성벽을 언급했고, 1600년 무렵 네덜란드인 디르크 라위터르스도 도시의 방어 시설을 묘사했습니다. 17세기 초부터 유럽의 인쇄본에 도시와 궁전의 그림이 실렸습니다. 이런 기록은 베냉이 1897년 훨씬 전부터 유럽에 큰 도시로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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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1897년: 영국 원정과 약탈

1890년대 베냉은 이 지역에 몇 남지 않은 독립 왕국이었습니다. 오바는 자기 영토의 교역을 통제했는데, 영국 상인과 니제르 해안 보호령 관리들은 이를 특히 야자유 교역의 걸림돌로 여겼습니다. 1892년 오바 오본람웬과 맺은 조약을 영국은 자유무역 허용으로 해석했지만, 오바는 계속 관세를 요구했고 1896년에는 일부 중개상에게 야자 산물 공급을 끊었습니다.

1896년 12월 말 총영사 대리 제임스 필립스는 런던의 승인을 받기도 전에 대부분 아프리카인 짐꾼으로 이루어진 약 250명을 이끌고 베냉 시로 향했습니다. 오바는 이구에 축제 기간에는 손님을 맞을 수 없으니 기다려 달라는 전갈을 보냈지만, 필립스는 계속 나아갔습니다. 1897년 1월 4일 일행은 우그비네 근처에서 공격을 받아 영국 관리 대부분과 많은 짐꾼이 죽고 유럽인은 두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필립스의 의도는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영국 측은 평화적 사절이었다고 했지만, 나이지리아 역사가 필립 이그바페 등은 그가 이미 주장해 온 침공을 위한 사실상의 정찰이었다고 봅니다.

영국은 이른바 ‘징벌 원정’으로 대응했습니다. 해군 소장 해리 로슨이 이끄는 해병, 수병, 보호령 군대 약 1,200명이 1897년 2월 침공해 2월 18일 베냉 시를 점령했습니다. 영국군 전사자는 8명으로 기록되었고, 베냉 측 사상자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매우 많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궁전과 도시 상당 부분이 불탔습니다. 오바 오본람웬은 붙잡혀 폐위되고 칼라바르로 유배되어 1914년 그곳에서 죽었으며, 족장 여섯 명이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베냉은 영국 보호령에 편입되었습니다.

영국 장교와 기자들은 도시에서 인신 공양의 광경을 보았다고 보고했고, 이를 정복을 정당화하는 데 썼습니다. 역사가들은 베냉에서 인신 공양이 행해졌다는 데 동의하지만, 로빈 로 등이 지적하듯 이 주제는 매우 민감하며 유럽의 기록은 개입을 정당화하려고 그 규모를 과장했을 수 있습니다.

[2][1][3]

중급

궁전에서 세계의 박물관으로

원정대는 궁전과 족장들의 집에서 수백 년 동안 쌓인 부조판, 두상, 상아, 종, 조각상 등을 가져갔습니다. 공식 수치는 약 2,500점이 영국으로 보내졌다고 하며, 고고학자 댄 힉스는 모두 1만 점까지 약탈되었을 수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해군성은 원정 비용을 대려고 1897년 5월 런던에서부터 약탈품 상당수를 경매에 부쳤고, 장교들은 기념품으로 일부를 챙겼으며, 외무부는 수백 점의 부조판을 영국박물관에 넘겼습니다.

많은 작품을 독일 박물관들이 사들여 큰 소장품을 이루었고, 다른 작품은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미국 등으로 갔습니다. 1988년의 한 집계는 나이지리아에 약 50점만 남고 약 2,400점이 유럽과 미국 소장품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1950년부터 1972년까지 영국박물관은 중복품으로 여긴 부조판 30여 점을 나이지리아 정부에 팔았는데, 뒤의 한 큐레이터는 이 정책을 후회한다고 말했습니다.

유럽에서 이 작품들은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 솜씨는 많은 사람이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인종주의적 가정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고, 베냉 조각은 수집가와 모더니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시에 박물관들은 흔히 이들을 전리품이나 민족지적 진기품으로 전시하며 반출의 폭력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베냉 시에서는 1914년 즉위한 오바 에웨카 2세가 궁전을 다시 짓고 공예 조합을 되살렸으며, 빼앗긴 물건을 대신할 새 작품을 주문했습니다. 주조 전통은 지금도 살아 있어, 오늘날의 베냉 장인들은 옛 방식과 새 양식으로 작품을 계속 만듭니다.

[2][1][3]

중급

반환 운동

1960년 독립 이후 나이지리아는 여러 차례 청동상의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베냉 왕실도 자기 권리를 주장해 왔습니다. 수십 년 동안 대부분의 박물관은 법적 제약과, 세계 문화를 폭넓은 관람객에게 보여 주는 ‘보편 박물관’의 역할을 들어 거절했습니다. 유럽 박물관들, 베냉 왕실, 에도주 정부, 나이지리아 국립박물관·기념물위원회(NCMM)로 이루어진 베냉 대화 그룹은 2018년 베냉 시에 세울 박물관에 작품을 대여하기로 합의했습니다.

2020~2022년 무렵 상황이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독일은 2021년 약탈된 베냉 유물을 돌려주겠다고 발표했고, 2022년 나이지리아와 협정을 맺어 여러 박물관의 유물 약 1,130점의 소유권을 넘겼습니다. 그 일부는 대여 형식으로 독일에 남아 있습니다. 런던 호니먼 박물관, 애버딘 대학교, 케임브리지 지저스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도 소유권을 넘겼습니다. 미국에서는 스미스소니언 국립아프리카미술관이 2022년 청동상 29점의 소유권을 넘겼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1960년 이후 나이지리아 박물관에서 불법 반출된 부조판 두 점을 돌려주었습니다. 네덜란드는 2025년 6월 119점을 반환했습니다.

약 900점을 가진 영국박물관은 소장품을 반환하지 않았습니다. 박물관을 규정하는 의회법 때문에 소장품을 영구 처분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대신 대여를 논의해 왔습니다. 비판자들은 법은 바뀔 수 있으며 대여란 박물관이 여전히 소유자라는 뜻이라고 반박합니다. 2021년 베냉 왕국의 전통적 재상은 약탈 작품과 맞바꾸자며 영국박물관에 제안할 대형 부조판을 새로 공개했습니다.

2022년 11월에는 온라인 플랫폼 ‘디지털 베냉’이 문을 열어, 약 20개국 130여 기관에 있는 5,000점 넘는 유물의 정보를 한데 모았습니다. 연구자와 베냉 사람들에게 흩어진 규모가 처음으로 눈에 보이게 되었습니다.

[1][3]

심화

소유를 둘러싼 논쟁: 국가, 오바, 후손

반환은 많은 유럽 지지자가 예상하지 못한 물음을 던졌습니다. 정확히 누구에게 돌려주어야 하는가? 2023년 이전의 합의 대부분은 나이지리아 연방 기관인 NCMM과 맺어졌고, 데이비드 아자예가 설계하고 독일이 일부 자금을 댄 새 서아프리카 미술관(MOWAA)이 베냉 시에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나 2023년 3월 퇴임을 앞둔 무함마두 부하리 대통령은 반환된 베냉 유물이 모두 베냉의 오바에게 속한다는 포고령을 내렸고, 오바는 궁전 가까이의 왕실 박물관에 이를 두겠다고 밝혔습니다.

포고령 지지자들은 유물이 궁전에서 빼앗긴 것이고, 이를 주문한 궁정의 계승자인 오바에게 속하며, 상당수가 살아 있는 제도의 신성한 물건이라고 말합니다. 일부 유럽 논평가를 포함한 비판자들은 포고령이 공공 문화재를 사유 재산으로 바꾸었고 반환국들이 기대한 공개 접근의 조건을 무시했다고 봅니다. MOWAA는 베냉 청동상 없이 첫 단계를 열었고, 2025년에는 오바, 에도주 정부, 박물관 사이에 운영권과 명칭을 둘러싼 분쟁 속에서 개관 행사가 시위로 차질을 빚었습니다.

다른 목소리도 그림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미국의 아프리카계 단체 ‘반환 연구 그룹(Restitution Study Group)’은 왕국이 노예 무역에 가담했고 금속 상당수가 그 무역에 쓰인 마닐라에서 왔으므로 노예가 된 이들의 후손도 청동상에 이해관계가 있다며 미국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스미스소니언의 반환을 막으려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반환 지지자들은 이 논리를 물리치며 유물을 빼앗긴 살아 있는 공동체의 권리를 강조합니다. 이 논쟁들은 반환이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법, 정치, 기억, 공동체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이 얽힌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1][7]

심화

1897년과 유물의 해석: 사학사와 방법론

1897년에 대한 전통적인 영국 측 서술은 원정을 필립스 일행 살해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자 인신 공양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그렸습니다. 1960년대부터 필립 이그바페 같은 역사가들은 경제적 동기, 조약 분쟁, 보호령의 이전 침공 계획을 강조했습니다. 댄 힉스의 『잔혹한 박물관(The Brutish Museums)』(2020)은 더 나아가 원정을 미리 계획된 일련의 식민 공격의 하나로 보고, 약탈품을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이 ‘지속되는 잔혹함’을 연장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부 서평자는 약탈이 폭력적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해석과 어조 일부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침공과 약탈이라는 기본 사실과 달리, 1897년을 어떻게 규정할지는 여전히 논쟁 중임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

유물 자체도 방법론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대부분 원래 놓였던 자리에 대한 기록 없이 한꺼번에 반출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배치, 연대, 의미를 양식, 에도 구전사, 과학 분석으로 재구성해야 합니다. 미술사가들은 왕실 두상의 변화로 연대를 세웠고, 금속학자들은 합금 조성과 납 동위원소로 이른 시기의 작품과 유럽 마닐라 황동으로 만든 작품을 가려냅니다. 이런 방법은 기존 가정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마닐라의 황동은 한때 네덜란드산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주로 라인란트산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청동상은 그동안 붙여진 범주에 도전합니다. ‘원시 미술’, ‘민족지 자료’, ‘세계 미술의 걸작’으로 불려 온 이 작품들은 베냉 왕실에게 왕조사의 기록이자 조상 제의의 신성한 물건입니다. 많은 학자는 이제 작품을 입수한 박물관의 관점만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주물 조합과 궁정 역사가들을 포함한 에도의 지식을 해석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1][2][9]

핵심 개념

궁정 미술
청동상은 판매나 오늘날 같은 전시가 아니라 신성한 오바를 기리고 궁정 생활을 기록하며 왕실 조상 제단에 쓰였다.
왕실 독점
황동, 상아, 산호는 오바가 통제했고, 세습 조합이 왕의 권한 아래에서만 황동을 주조했다.
밀랍 주조의 정점
베냉 장인들은 밀랍 모형과 흙 틀로 얇고 정교한 부조판과 두상을 만들었다.
대서양과의 얽힘
유럽의 마닐라가 황동의 상당 부분을 공급해, 이 미술은 노예 무역을 포함한 대서양 교역과 이어졌다.
식민지 약탈품
1897년 영국의 정복으로 수천 점이 반출되어 세계 곳곳의 박물관과 개인 소장품으로 흩어졌다.
반환
유물 반환은 박물관이 식민지 시대 취득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살아 있는 전통
베냉 시의 주물 조합은 지금도 작업하며, 오바의 궁정은 살아 있는 제도로 남아 있다.

기록

  1. 약 1200년 — 에도 전승이 전하는 오바 왕조의 시작(이페의 오랑미얀과 연결). 뒤이어 이페에서 주조술이 전해졌다고 한다.
  2. 1440년 — ‘대왕’ 오바 에와레가 즉위해 성벽과 해자로 베냉 시를 다시 세운다.
  3. 1485년 — 주앙 아퐁수 드 아베이루가 이끄는 포르투갈 선원들이 베냉에 도착하고, 마닐라 교역이 늘어난다.
  4. 약 1520년 — 오바 에시기에 치세에 궁정 미술이 꽃피고, 왕모 이디아와 연결되는 상아 가면이 조각된다.
  5. 1735년 — 베냉 금속 공예의 두 번째 ‘황금기’인 오바 에레소옌의 치세(1735~1750)가 시작된다.
  6. 1892년 — 오바 오본람웬과 영국 관리 사이에 갤웨이 조약이 맺어진다.
  7. 1897년 — 필립스 일행이 공격받고(1월 4일), 영국군이 베냉 시를 점령·방화하고(2월 18~21일) 궁전을 약탈한다.
  8. 1914년 — 오본람웬이 유배지에서 죽고, 에웨카 2세가 오바가 되어 궁전을 재건하고 조합을 되살린다.
  9. 1977년 — 이디아 상아 가면의 복제품이 라고스 FESTAC 77의 상징이 된다.
  10. 2022년 — 독일이 약 1,130점의 소유권 이전에 합의하고, 호니먼·스미스소니언·케임브리지가 소유권을 넘기며, ‘디지털 베냉’이 문을 연다.
  11. 2023년 — 대통령 포고령으로 반환된 베냉 유물의 소유권이 베냉의 오바에게 귀속된다.
  12. 2025년 — 네덜란드가 119점을 반환하고, 서아프리카 미술관(MOWAA) 개관이 분쟁으로 차질을 빚는다.

용어 풀이

오바
베냉 왕의 칭호. 궁정 생활의 중심에 선 신성한 통치자.
이요바
베냉의 왕모. 16세기 초 이디아에게 처음 주어진 칭호.
에도
베냉 왕국의 사람들과 언어. 베냉 시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부조판(아마)
궁전 기둥에 못으로 박아 둔 직사각형 황동 부조.
밀랍 주조법
흙 틀에서 녹아 나오는 밀랍 모형을 이용해 금속을 주조하는 방법.
마닐라
서아프리카와 유럽의 교역에서 화폐로 쓰인 말굽 모양의 금속 팔찌.
이군 에론몬
왕실 황동 주물 조합이 살며 일하는 베냉 시의 구역(이군 거리).
반환
문화재를 빼앗긴 사람들이나 국가에 돌려주는 일.
징벌 원정
처벌을 명분으로 한 군사 공격을 가리키는 영국 측 용어. 1897년에 이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논쟁거리다.
출처 이력(프로비넌스)
어떤 유물의 소유와 위치가 거쳐 온 기록된 역사.

묻고 답하기

베냉 청동상은 베냉이라는 나라에서 왔나요?

아니에요. 옛 베냉 왕국에서 왔는데, 그 수도 베냉 시는 나이지리아에 있어요. 지금의 베냉 공화국은 바로 옆의 다른 나라예요.

정말 청동으로 만들었나요?

대부분은 아니에요. 구리, 아연, 납을 섞은 황동이 많아요. 상아, 나무, 산호로 만든 물건도 함께 있어요.

영국은 왜 이것들을 가져갔나요?

1897년 1월 영국 일행이 공격을 받은 뒤 영국이 베냉 시를 침공했어요. 군인들이 작품을 전리품으로 가져갔고, 많은 작품이 원정 비용을 대려고 팔렸어요. 이 공격이 단순한 보복이었는지, 왕국을 정복하려는 오랜 계획의 일부였는지는 역사가들이 논쟁하고 있어요.

돌려준 것도 있나요?

네. 2021년부터 독일, 네덜란드, 스미스소니언, 호니먼 박물관, 케임브리지 등이 소유권을 넘겼어요. 영국박물관은 많은 소장품을 아직 돌려주지 않았어요.

돌아온 청동상은 지금 누구 것인가요?

2023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포고령이 반환된 유물의 소유권을 베냉의 오바에게 주었어요. 이를 두고 나이지리아 안팎에서 공개 접근과 박물관 문제로 논쟁이 일었어요.

제단 위의 두상은 무슨 일을 했나요?

돌아가신 왕과 왕모를 기렸어요. 새 오바는 선왕을 위한 제단을 세우고 축제 때 그곳에 제물을 바쳤어요.

베냉의 청동 주조는 지금도 이어지나요?

네. 베냉 시 이군 거리의 주물 조합이 지금도 황동 작품을 만들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Benin Bronzes. Wikipedia
  2. Benin Expedition of 1897. Wikipedia
  3. Kingdom of Benin. Wikipedia
  4. Benin ivory mask. Wikipedia
  5. Idia. Wikipedia
  6. Manilla (money). Wikipedia
  7. Museum of West African Art. Wikipedia
  8. Bronze Head from Ife. Wikipedia
  9. Dan Hicks, The Brutish Museums: The Benin Bronzes, Colonial Violence and Cultural Restitution. Pluto Press, 202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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