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700년 전, 지금의 나이지리아에 있는 이페라는 번화한 도시에서 예술가들이 금속과 구운 흙으로 사람 머리를 만들었어요. 얼마나 진짜 같은지 금방이라도 눈을 깜빡일 것 같아요. 차분한 얼굴에 가느다란 줄이 피부를 따라 흘러내리고, 도톰한 입술과 정성껏 빚은 귀가 있어요.
금속 두상을 만들 때는 먼저 흙으로 만든 속심 위에 밀랍을 입혀 얼굴을 빚었어요. 그 위를 다시 흙으로 덮고 불에 달구면 밀랍이 녹아 흘러나가고 속이 빈 틀이 남아요. 여기에 뜨거운 쇳물을 부어요. 식은 뒤 틀을 깨면 안에서 금속 두상이 나와요. 이것을 ‘밀랍 주조법’이라고 해요.
많은 사람은 이 두상들이 ‘우니’라고 부르는 왕이나 궁정의 중요한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생각해요. 어떤 두상에는 이마와 턱 둘레에 작은 구멍이 있어요. 아마 옛날에는 그곳에 왕관이나 구슬, 머리카락을 달았을 거예요.
1938년 이페에서 집터를 파던 일꾼들이 땅속에 묻혀 있던 금속 두상 여러 개를 발견했어요. 세계 사람들이 깜짝 놀랐지요. 그때 일부 유럽인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없다고 잘못 믿었어요. 그들이 틀렸어요. 두상은 요루바 예술가들이 만든 것이에요.
오늘날 두상 대부분은 나이지리아 박물관에 있고, 몇 점은 런던의 영국박물관처럼 다른 나라 박물관에 있어요. 요루바 사람들에게 이페는 그들의 전통 속에서 세상과 첫 사람들이 만들어진 거룩한 도시예요.
한눈에 보기
- 제작지
- 일레이페(이페). 오늘날 나이지리아 남서부 오순주에 있는 요루바 도시
- 연대
- 주로 1200~1400년 무렵, 이페의 ‘고전기’. 15세기로 보는 작품도 있고, 금속 두상을 1300년 무렵에 집중시키는 학자도 있음
- 재료
- 구리 합금(대개 납이 많이 든 아연 황동), 거의 순수한 구리, 테라코타(구운 흙), 일부 돌
- 기법
- 금속 작품은 밀랍 주조법, 테라코타는 손으로 빚어 구움
- 주요 발견
- 1910년 레오 프로베니우스가 수집한 두상과 조각, 1938년 운모니제(Wunmonije) 구역에서 우연히 발견된 구리 합금 작품 18점
- 양식
- 이상화된 사실주의. 차분하고 좌우가 균형 잡힌 얼굴, 흔히 세로로 난 가는 줄무늬, 머리선과 턱의 작은 구멍, 정교한 구슬 왕관
- 소장처
- 대부분 나이지리아 국립박물관(이페 박물관 포함). ‘이페의 청동 두상’ 등 몇 점은 영국박물관 등 해외 소장
- 관련 군주
- 구전은 많은 황동 작품을 우니 오발루폰 2세(오발루폰 알라예모레)와 연결함. 그는 뒤에 주물과 직조의 수호신으로 추앙됨
쉬움
이페 두상이란
이페 두상은 나이지리아 남서부의 도시 일레이페, 흔히 ‘이페’라고 부르는 곳에서 만든 사람 머리 조각입니다. 일부는 주로 구리 합금으로 주조했고, 훨씬 많은 수는 손으로 빚어 구운 흙, 곧 테라코타로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역사가들이 이페의 고전기라 부르는 1200~1400년 무렵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두상들이 유명한 까닭은 사실성에 있습니다. 얼굴이 실제 사람처럼 보입니다. 뺨, 입술, 눈꺼풀, 귀가 정성껏 빚어졌고 비례는 균형 있고 차분합니다. 그렇다고 스냅 사진 같지는 않습니다. 많은 두상이 이상화된 평온한 표정을 공유하는데, 주름과 흠 하나하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주려 한 듯합니다.
두상은 전신상, 동물, 그릇, 의례용 물건을 아우르는 훨씬 큰 이페 미술의 일부입니다. 이들은 함께 이페를 세계 조각사의 큰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고, 나이지리아와 아프리카 창조성 전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쉬움
이페 두상을 보는 법
먼저 얼굴의 표면을 보세요. 많은 이페 두상에는 이마에서 뺨과 턱으로 가는 평행선이 흘러내립니다. 입술은 대개 매끈하게 남겨 둡니다. 이 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흉터 문신이나 얼굴 표시일 수도, 구슬 베일일 수도, 피부에 닿는 빛을 표현한 예술적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선이 전혀 없는 두상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가장자리를 보세요. 많은 금속 두상에는 머리선, 입 둘레, 턱에 작은 구멍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달았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진짜 머리카락이나 수염, 구슬 베일, 왕관이었을 수 있습니다. 목에 더 큰 구멍이 난 두상도 있어, 나무 몸체나 받침 같은 다른 것에 고정했으리라 짐작하게 합니다.
이어서 두상 전체를 보세요. 어떤 두상은 여러 줄의 구슬로 만든 정교한 왕관을 쓰고 있고, 술 장식과 꼭대기의 볏이 달려 있습니다. 영국박물관의 유명한 ‘이페의 청동 두상’도 이런 왕관을 썼는데, 꼭대기에 장미 모양 장식과 깃털이 있고 붉은색과 검은색 칠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크기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 두상은 높이 약 35cm로 실물의 4분의 3쯤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페 전신상에서 머리가 크게 표현된다는 점에 주목하세요. 요루바 사상에서 머리(오리, orí)는 사람의 내적 본질과 운명을 담습니다. 머리를 크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 내적 힘을 기리는 방법이었습니다.
쉬움
어떻게 만들었나
금속 두상은 금속 조각을 만드는 가장 오래되고 까다로운 방법 가운데 하나인 밀랍 주조법으로 만들었습니다. 먼저 흙으로 대략 머리 모양의 속심을 만들고, 그 위에 밀랍을 입혀 얼굴의 세부를 모두 새기고 빚었습니다. 그런 다음 밀랍 모형을 다시 흙으로 덮되 작은 통로를 남겼습니다. 틀을 가열하면 밀랍이 녹아 흘러나가고, 조각 모양의 얇은 빈 공간이 남습니다.
이 공간에 녹인 금속을 부었습니다. 식으면 바깥 틀을 깨어 내고 금속 두상을 다듬고 닦았습니다. 틀을 매번 깨뜨리기 때문에 밀랍 주조 작품은 모두 하나뿐입니다. 실물 크기 두상에 얇고 고른 금속 벽을 주조하려면 대단한 솜씨가 필요한데, 이페의 주물 장인들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흔히 ‘청동’이라 부르지만, 대부분은 사실 구리에 아연과 납을 섞은 것으로 황동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박물관들은 요즘 더 정확한 ‘구리 합금’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유명한 실물 크기 가면을 비롯한 몇몇 이페 작품은 거의 순수한 구리로 되어 있는데, 이는 주조하기가 특히 어렵습니다.
테라코타 두상은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흙을 손으로, 흔히 아주 섬세하게 빚은 뒤 말려서 구웠습니다. 이 지역에는 금속 두상 이전부터 테라코타 조각의 오랜 역사가 있었고, 금속 작품은 테라코타 원형을 본떠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중급
두상을 만든 도시
요루바 사람들은 일레이페를 세상과 인류가 창조된 곳으로 여깁니다. 널리 전해지는 한 전승에서 최고신 올로두마레는 오바탈라를 보내 땅을 만들게 했고, 오두두와가 그 일을 이어받아 이페와 다른 요루바 왕조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페의 군주인 ‘우니’는 지금도 요루바 군주들 사이에서 특별한 영적 지위를 지닙니다.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은 긴 성장 과정을 그립니다. 기원전 1천년기에 정착이 시작되었고, 1천년기 후반에는 큰 가문들이 연합을 이루었으며, 10~11세기 무렵에는 오두두와로 기억되는 지도자가 큰 성벽을 쌓은 것과 연결됩니다. 대략 1000~1420년을 흔히 이페의 고전기라 부릅니다. 14세기 중엽 도시 인구는 7만~10만 5천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며, 두 번째 성벽과 포장도로도 있었습니다.
고전기 이페의 두드러진 특징은 바닥 포장입니다. 바닥과 안뜰을 깨진 토기 조각을 모로 세워 대개 청어뼈 무늬로 깔았고, 때로 장식용 도자 원반을 넣었습니다. 미술사가들은 이 포장을 기준으로 이페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는데, 약 1200~1400년의 ‘후기 포장 시대’가 조각 제작의 절정기와 겹칩니다.
이페가 부유했던 것은 교역과 공예 덕분이었습니다. 이페는 올로쿤 숲 같은 작업장에서 독자적인 제법으로 유리구슬을 만들었고, 이 구슬은 11~14세기 서아프리카 곳곳의 유적에서 발견됩니다. 이페는 구슬과 상아 같은 열대우림의 산물을 북쪽에서 오는 구리, 소금, 직물과 바꾸었습니다. 두상에 쓴 구리와 황동은 한때 유럽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왔다고 여겨졌지만, 일부 분석은 나이지리아 광석을 가리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습니다.
중급
왕, 조상, 그리고 오발루폰
대부분의 학자는 금속 두상이 우니나 궁정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가볍게 만든 초상이 아니었습니다. 재료는 드물고 귀했으며 주조에 드는 노력은 엄청났습니다. 두상은 왕권, 의례, 조상 공경의 세계에 속했습니다.
구전은 이페 황동 주조의 전성기를 우니 오발루폰 2세, 곧 오발루폰 알라예모레와 연결합니다. 그는 혼란기 뒤에 질서를 되찾고 니제르강 쪽으로 이페의 영향력을 넓혔으며, 유리구슬 생산과 구리 수입이 급증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이끈 군주로 기억됩니다. 왕실 조상의 황동상을 만들게 했다고 전하며, 왕관을 권위의 상징으로 쓴 첫 이페 군주였다고도 합니다.
그는 죽은 뒤 신격화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는 황동 주조, 직조, 왕권 상징물, 선정(善政)과 관련된 오리샤(신)로 공경받습니다. 오랫동안 궁전의 즉위식 관련 방에 보관되어 온 실물 크기의 구리 가면, 이른바 ‘오발루폰 가면’은 그와 연결되며 영국박물관 두상과 양식적 특징을 공유합니다.
전승은 이페의 주조 기술이 다른 왕국으로 퍼졌다고도 말합니다. 특히 베냉은 자기 궁정 미술을 이페 장인에게서 배웠다고 기억했고, 이페의 왕자 오랑미얀은 13세기 무렵 베냉의 현 왕조 창건과 연결됩니다. 역사가들은 이런 전승을 신중하게 다루지만, 이페가 정통성과 기술의 원천으로 여겨졌음을 보여 줍니다.
중급
발견: 프로베니우스와 운모니제 출토품
유럽인은 독일 민족학자 레오 프로베니우스를 통해 이페 조각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의 탐험대는 1910년 11월 29일 이페에 도착해 3주가량 머물며 발굴하고, 테라코타 두상들과 올로쿤 숲의 구리 합금 두상을 수집했습니다. 그는 허가 없이 많은 유물을 반출했고, 나이지리아 법정에서 밀반출 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가 가져간 테라코타 여러 점은 베를린에 있으며, 영국박물관은 1927년 그중 여섯 점의 복제 주형을 입수했습니다.
1938년 이페의 운모니제 구역에서 집터를 파던 일꾼들이 우연히 구리 합금 조각 한 무리를 찾아냈습니다. 두상 17점과 상반신 조각 1점, 모두 18점이었습니다. 대부분은 훗날 이페 국립박물관이 된 곳으로 갔지만 몇 점은 나이지리아를 떠났습니다. 지금 영국박물관에 있는 ‘이페의 청동 두상’은 『데일리 타임스 오브 나이지리아』의 편집인 헨리 매클리어 베이트가 반출했으며, 파리를 거쳐 런던에 닿아 1939년 국립미술품기금을 통해 박물관에 들어갔습니다. 다른 두 점은 미국으로 갔습니다.
1938년의 발견은 식민 정부가 나이지리아 유물의 반출을 통제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그해 관련 법령이 시행되었습니다. 그 뒤 이타 예모(Ita Yemoo) 같은 이페의 여러 유적 발굴로 출토품이 늘었고, 고고학자들은 조각을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두상은 곧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페 두상은 1973년 라고스 전아프리카 경기대회의 상징이었고, 일레이페의 오바페미 아월로워 대학교 같은 나이지리아 기관의 로고에 쓰이며, 2010년에는 나이지리아 독립 5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순회 전시 ‘이페 왕국: 서아프리카의 조각’이 열렸습니다. 2011년 영국박물관 두상은 라디오 시리즈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에도 포함되었습니다.
중급
편견에 대한 도전
이페 두상이 유럽에 알려진 것은 아프리카에는 위대한 예술의 역사가 없다는 식민주의적 생각이 퍼져 있던 때였습니다. 조각은 이 믿음과 맞지 않았고, 일부 유럽인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프로베니우스 자신도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지만,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조상이 만들었을 리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두상이 지중해에서 온 고대 식민지의 유물이라 추측했고 아틀란티스 전설과 연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1911년 1월 이 ‘발견’을 발표했고,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습니다.
올로쿤 두상에 대한 그의 묘사에는 감탄과 경멸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는 그 ‘놀라운 아름다움’을 칭송하면서도 이페의 살아 있는 사람들을 자격 없는 보관자로 깎아내렸습니다. 아프리카의 물건에 대한 깊은 감탄과 아프리카 사람에 대한 무례가 결합된 이런 태도는 식민지 수집에서 흔했습니다.
뒤이은 연구는 이 조각들이 요루바의 토착적 성취이며, 서아프리카 구상 미술의 오랜 전통의 일부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학자들은 나이지리아 중부 녹 문화의 테라코타(기원전 1천년기)와 나이지리아 남동부 이그보우쿠의 놀라운 구리 합금 주물(9~12세기 무렵) 같은 앞선 전통과의 연결을 봅니다. 오늘날 이페 두상은 외부의 설명이 필요한 수수께끼가 아니라 아프리카 미술사의 정점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집니다.
중급
유산과 소유
이페의 예술적 영향은 고전기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유명한 베냉 청동상을 비롯한 베냉의 궁정 미술은 전승상 이페의 스승들과 연결되며, 오요, 오워 등 여러 요루바 중심지의 미술도 머리, 왕관, 왕의 형상을 계속 특별히 중시했습니다. 요루바 종교에서 오발루폰은 여전히 주물 장인과 직조공의 수호신입니다.
이페 두상의 소유 문제는 베냉 청동상보다 덜 첨예합니다. 대부분 나이지리아에서 발견되어 그곳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로베니우스가 가져간 작품이나 1938~1939년에 반출된 영국박물관 두상처럼 식민지 시대에 해외로 나간 몇 점은, 아프리카 유물이 서구 소장품이 된 경위와 반환 여부를 둘러싼 더 넓은 논쟁에 속합니다. 박물관과 나이지리아 기관은 2010년 ‘이페 왕국’ 전시처럼 전시와 연구에서 협력해 왔으며, 소유를 둘러싼 논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심화
연대, 작업장, 그리고 ‘한 명의 작가’ 문제
이페 조각의 연대를 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많은 작품이 통제된 발굴이 아니라 우연히 발견되었고, 금속은 방사성탄소로 직접 연대를 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연대 추정은 함께 나온 숯, 포장 층서, 테라코타와 주조 속심의 열발광 연대 측정, 양식 비교에 기댑니다. 대부분의 학자는 사실적인 금속·테라코타 작품 대부분을 12~15세기에 둡니다. 헨리 드루얼, 존 펨버턴, 롤런드 아비오둔은 후기 포장 시대를 약 1200~1400년으로 두고 그 뒤에 탈포장 시대를 잇는 시대 구분을 제안했습니다.
그 범위 안에서도 강조점이 다릅니다. 영국박물관 두상은 보통 14~15세기 무렵으로 봅니다. 수전 프레스턴 블라이어는 『고대 요루바의 미술과 위험』(2015)에서 작품군 상당수를 1300년 무렵과 오발루폰 치세의 정치적 상황에 연결하며, 그 시대의 정치적 위기와 위험에 비추어 미술을 읽습니다. 더 넓은 범위를 선호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항목의 연대(약 1200~1400년)는 정확한 연도가 아니라 대략적인 범위로 읽어야 합니다.
운모니제 두상들의 양식적 통일성, 곧 비례와 세부의 공통점 때문에 일부 전문가는 이들이 한정된 기간에 한 명의 작가 또는 하나의 작업장에서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군은 길고 느린 전통이 아니라 집중된 왕실 주문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는 여전히 가설이며, 더 나은 맥락 연대 없이는 검증하기 어렵습니다.
심화
초상인가 이상인가: 의미와 쓰임을 둘러싼 논쟁
두상은 특정 인물의 초상이었을까요? 얼굴 구조, 표시, 머리 장식의 다양성은 일부 학자에게 특정 인물이나 직위를 나타낸다는 인상을 줍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상화를 강조합니다. 대부분 특정 나이의 개인이 아니라 젊고 평온한 얼굴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중간 입장은 이들이 통치자와 직위 보유자를 이상화된 형태로, 곧 닮음과 함께 요루바 미학이 중시하는 평정·위엄·균형의 이상을 결합해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쓰임도 논쟁거리입니다. 머리선과 턱 둘레의 구멍, 목의 구멍은 다른 재료에 붙였음을 오래전부터 시사해 왔습니다. 고고학자 프랭크 윌렛과 연결되는 영향력 있는 가설은 두상을 나무 몸체에 얹고 옷을 입혀 왕실 장례나 추모 의례의 인형으로 썼다는 것입니다. 왕실 조상의 사당이나 즉위·왕권 갱신 의례와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요루바 관습이 시사하는 바가 있지만, 당시의 문자 기록으로 어느 하나의 쓰임이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올로쿤 두상의 역사는 이런 유명한 유물을 둘러싼 진위 문제를 보여 줍니다. 1910년 프로베니우스가 수집했다가 뒤에 이페 궁전으로 돌아간 이 두상은, 1910~1934년 사이에 모래 주형으로 만든 대체품으로 바뀌었다는 의심을 수십 년 동안 받았습니다. 2010년 무렵의 금속학 조사는 밀랍 주조로 만들어졌음을 보여 주었고, 지금은 대체로 원본으로 봅니다. 이 일화는 식민지 시대의 취급, 과학 분석, 전문가 의견이 모두 ‘이페 정전’이 무엇인지를 만든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심화
재료, 교역, 그리고 더 넓은 세계
이페 두상의 금속은 교역에 관한 물음을 던집니다. 이페는 바로 주변에 큰 구리 산지가 알려지지 않은 삼림 지대에 있고, 예전 학자들은 금속이 중부 유럽, 모리타니, 비잔티움 세계, 모로코 남부에서 왔다고 보았습니다. 최근 분석은 나이지리아 현지 광석이 쓰였음을 시사하지만, 납 동위원소와 미량 원소 연구는 아직 다듬어지는 중이며, 여러 산지의 금속이 사하라 횡단 교역과 지역 교역망을 통해 이페에 닿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페의 유리 산업은 원거리 연결을 더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페에서 현지 제법으로 만든 고석회·고알루미나 조성의 유리가 말리, 모리타니에서 부르키나파소, 차드에 이르는 서아프리카 곳곳의 12~14세기 유적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역사가 아킨우미 오군디란은 이 연결망을 ‘구슬 길’이라 불렀습니다. 그를 비롯한 학자들은 1352년 이븐 바투타가 언급한 남쪽의 큰 왕국 ‘유피’가 이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1400~1420년 무렵 이페 고전기의 끝은 여러 요인과 연결됩니다. 1380년 무렵 시작된 가뭄, 말리가 약해지면서 생긴 서수단의 혼란, 내부 갈등, 전염병입니다. 그 뒤 정치·경제의 무게는 베냉과 이후 오요로 옮겨 갔고, 이페는 종교적 위상을 지켰습니다. 두상은 이처럼 부와 왕실의 야망, 예술적 실험이 어우러진 특정한 역사적 순간을 보여 줍니다.
핵심 개념
- 이상화된 사실주의
- 이페 예술가들은 정확한 닮음 대신 사실적인 세부와 차분하고 균형 잡힌 이상적 얼굴을 결합했다.
- 밀랍 주조법
- 흙 틀 속의 밀랍 모형을 금속으로 바꾸는 기법으로, 하나뿐인 얇은 주물을 만든다.
- 머리(오리)
- 요루바 사상에서 머리는 사람의 본질과 운명을 담으며, 이것이 이페 미술에서 머리가 두드러지는 까닭을 설명해 준다.
- 신성 왕권
- 조각들은 우니, 왕실 조상, 통치자를 신성과 잇는 의례의 세계에 속한다.
- 토착 전통
- 외부 기원을 주장한 식민지 시대의 설은 부정되었다. 이페 미술은 녹, 이그보우쿠 같은 서아프리카 전통에서 자라났다.
- 교역과 부
- 유리구슬과 삼림 산물을 구리 등 수입품과 바꾼 교역이 이페 예술의 꽃을 피웠다.
- 논쟁적인 수집
- 식민지 시대 일부 작품의 반출은 해외 박물관의 아프리카 유산을 둘러싼 더 넓은 논쟁의 일부다.
기록
- 약 1000년 — 성벽 두른 도시 중심과 토기 조각 포장이 나타나며 이페 고전기가 시작된다.
- 약 1200년 — 사실적인 테라코타·구리 합금 조각의 절정기인 후기 포장 시대가 시작된다.
- 약 1300년 — 우니 오발루폰 2세와 황동 주조의 전성기로 흔히 연결되는 시기.
- 1352년 — 이븐 바투타가 말리에서 남쪽의 큰 왕국 ‘유피’(이페로 추정)에 대해 듣는다.
- 약 1420년 — 가뭄, 갈등, 전염병 속에서 이페 고전기가 끝난다.
- 1910년 — 레오 프로베니우스의 탐험대가 11월 29일 이페에 도착해 올로쿤 숲 등에서 조각을 반출한다.
- 1911년 — 프로베니우스가 이페 미술이 아틀란티스의 증거라고 발표한다.
- 1938년 — 운모니제 구역에서 구리 합금 조각 18점이 발견되고, 식민 정부가 유물 반출을 제한한다.
- 1939년 — ‘이페의 청동 두상’이 영국박물관에 들어간다.
- 1973년 — 이페 두상이 라고스 전아프리카 경기대회의 상징이 된다.
- 2010년 — 나이지리아 독립 50주년을 맞아 ‘이페 왕국: 서아프리카의 조각’ 전시가 열린다.
용어 풀이
- 우니(Ooni)
- 이페 왕의 칭호. 요루바 군주들 사이에서 특별한 영적 역할을 지닌다.
- 테라코타
- 흙을 빚어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것.
- 구리 합금
- 구리를 바탕으로 한 금속 혼합물. 청동(주석), 황동(아연) 등.
- 밀랍 주조법
- 흙 틀에서 녹아 나오는 밀랍 모형을 이용해 금속을 주조하는 방법.
- 줄무늬(스트라이에이션)
- 많은 이페 두상의 얼굴에 새겨진 가는 평행선.
- 오리샤(Òrìṣà)
- 요루바 종교의 신 또는 영적 힘.
- 오리(Orí)
- ‘머리’를 뜻하는 요루바어로, 사람의 내면과 운명을 뜻하기도 한다.
- 토기 조각 포장
- 깨진 토기 조각을 모로 세워 깐 바닥. 고전기 이페의 특징.
- 운모니제 구역
- 1938년 구리 합금 조각 18점이 발견된 이페의 장소.
묻고 답하기
이페 두상은 청동으로 만들었나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흔히 청동이라 부르지만 대부분은 구리에 아연과 납을 섞은 것이라 황동에 더 가까워요. 거의 순수한 구리로 된 것도 있고, 테라코타 두상도 많아요.
두상은 누구를 나타내나요?
아마 이페의 통치자(우니)와 궁정 사람들을 이상화해 나타냈을 거예요. 대부분은 누구인지 이름을 알 수 없어요.
왜 구멍이 난 두상이 있나요?
머리선과 턱의 작은 구멍에는 머리카락, 수염, 구슬 베일, 왕관을 달았을 수 있어요. 목의 구멍은 몸체나 받침에 고정했음을 보여 줘요.
얼굴의 줄무늬는 무슨 뜻인가요?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어요. 얼굴 표시일 수도, 구슬 베일일 수도, 예술적 기법일 수도 있어요. 학자들이 아직 논쟁하고 있어요.
프로베니우스는 왜 아틀란티스를 떠올렸나요?
식민주의적 편견 때문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이론은 완전히 부정되었고, 두상은 요루바 사람들의 작품이에요.
두상은 한 사람이 만들었나요?
그럴 수도 있어요. 운모니제 두상들이 아주 비슷해서 한 작가나 한 작업장이 만들었다고 보는 전문가도 있지만, 증명되지는 않았어요.
해외에 있는 두상은 나이지리아로 돌아가야 하나요?
일부는 허가 없이 반출되었거나 식민지 시대에 수출되어 더 넓은 반환 논쟁의 일부가 되었어요. 이페 두상 대부분은 이미 나이지리아 박물관에 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Bronze Head from Ife. Wikipedia
- Ifẹ. Wikipedia
- Ife Empire. Wikipedia
- Obalufon Alayemore. Wikipedia
- Yoruba art. Wikipedia
- Fourth German Inner Africa Research Expedition. Wikipedia
- Art forgery. Wikipedia
- Nok culture. Wikipedia
- Igbo-Ukwu. Wikipedia
- Suzanne Preston Blier, Art and Risk in Ancient Yoruba: Ife History, Politics, and Identity c.13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함께 보기
- 베냉 청동상베냉의 오바를 위해 만든 수천 점의 황동 부조판, 왕실 두상 등 궁정 미술품. 1897년 영국군이 약탈했으며 오늘날 반환 논쟁의 중심에 있다.
- 올멕 거대 두상멕시코만 연안의 올메카 사람들이 만든 거대한 현무암 두상으로, 통치자를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금제 장례용 가면이다.
- 네페르티티 흉상파라오 아케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를 석회암과 석고로 빚고 채색한 초상. 아마르나의 조각가 투트모세 공방에서 만들어졌고 1912년 독일 발굴대가 찾아냈다.
- 이븐 바투타아프리카·아시아와 유럽 일부를 여행한 기록을 남긴 모로코의 여행가다.
- 만사 무사말리 제국의 통치자로, 메카 순례와 이슬람 학문 후원, 제국의 부로 알려져 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