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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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3층 건물만큼 높은 담장이 거대한 돌뱀처럼 굽이굽이 휘어져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납작한 회색 돌 수만 개를 시멘트 하나 없이 차곡차곡 쌓아 만들었어요. 이 담장이 바로 남부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언덕에 있는 옛 도시,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일부예요.
약 700~900년 전, 이곳은 힘센 왕들이 살던 곳이자 수천 명이 북적이던 도시였어요. 대부분의 가족은 흙으로 벽을 쌓고 풀로 지붕을 얹은 둥근 집에 살았어요. 왕과 높은 사람들은 높은 돌담 안쪽에 살았는데, 그 담장은 ‘우리가 이만큼 강하다’고 보여 주는 표시이기도 했어요.
그레이트 짐바브웨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소를 길렀지만, 장사도 잘했어요. 금과 상아를 인도양 바닷가로 보내고, 그 대가로 유리구슬과 옷감, 멀리 중국에서 건너온 도자기까지 받았어요.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중국 그릇 조각을 찾아냈답니다.
도시 위 언덕에서는 부드러운 녹회색 돌로 깎은 멋진 새 여덟 마리가 발견되었어요. 새마다 키 큰 돌기둥 꼭대기에 앉아 있었지요. 오늘날 그중 한 마리가 짐바브웨 국기에 그려져 있어요.
오랫동안 일부 유럽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이 이렇게 대단한 도시를 지었을 리 없다며, 먼 나라 사람들이 지었다는 이야기를 지어냈어요. 하지만 고고학자들이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밝혀냈어요.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지금도 그곳에 사는 쇼나족의 조상들이 지은 도시예요.
한눈에 보기
- 시기
- 1000년 무렵부터 거주, 석조 건축은 주로 12~15세기, 전성기 1300~1450년경, 15~16세기에 쇠퇴
- 위치
- 짐바브웨 남동부 마싱고 인근, 짐바브웨 고원 남쪽 가장자리
- 건설 주체
- 반투어를 쓰는 쇼나족의 조상(짐바브웨 왕국)
- 재료
- 현지 화강암을 쪼갠 돌로 모르타르 없이 쌓은 건식 석축. 집은 다가(흙)로 지음
- 주요 구역
- 언덕 유적(힐 콤플렉스), 대외곽(그레이트 인클로저), 계곡 유적. 전체 약 7km²
- 대외곽
- 바깥 담장 길이 약 250m, 높이 최대 약 11m. 사하라 이남에서 식민지 이전 최대의 석조 구조물
- 유네스코
- ‘그레이트 짐바브웨 국가기념물’, 1986년 세계유산 등재
- 의의
- 인도양 교역과 이어진 남부 아프리카 대국의 수도이자 짐바브웨의 국가 상징
쉬움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어떤 곳인가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남부 아프리카의 한 왕국이 남긴 수도 유적으로, 짐바브웨의 마싱고 시에서 남동쪽으로 약 25km 떨어져 있다. 다듬은 화강암을 모르타르 없이 쌓아 언덕과 계곡을 따라 굽이치게 한 거대한 담장으로 유명하다. 잠베지강과 림포포강 사이에 흩어진 수백 곳의 비슷한 석벽 유적(흔히 ‘짐바브웨’라 부른다) 가운데 가장 크다.
‘짐바브웨’는 오늘날 이 나라 사람 대다수가 쓰는 쇼나어에서 온 말이다. 흔히 ‘돌로 지은 집들(dzimba dza mabwe)’ 또는 추장의 집이나 무덤을 가리키는 ‘존귀한 집들(dzimba woye)’에서 왔다고 설명한다. 포르투갈인은 이미 1531년에 이 이름을 ‘심바오에(Symbaoe)’로 기록하며 왕의 궁정이라는 뜻이라고 적었다. ‘그레이트(Great)’는 더 작은 유적과 구별하려고 붙인 말이다.
이 도시는 11세기 무렵의 농경 마을에서 출발해 14세기에는 인구 1만 명 안팎 또는 그 이상의 수도로 성장했다. 소와 농업, 그리고 스와힐리 해안을 거쳐 인도양 너머로 흘러가던 금과 상아 교역을 장악한 데서 부를 얻은 나라의 중심이었다. 16세기 무렵에는 중심 역할을 잃었고, 지역의 권력은 북쪽과 서쪽으로 옮겨 갔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짐바브웨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기념물이다. 1980년 독립한 이 나라는 유적의 이름을 따서 국호를 정했다. 지금도 많은 현지 공동체에게 신성한 장소다.
쉬움
유적 둘러보기: 언덕, 대외곽, 계곡
유적은 크게 세 무리로 나뉜다. 언덕 유적(힐 콤플렉스)은 계곡에서 약 80m 솟은 가파른 화강암 언덕 위에 있다. 이곳에서는 거대한 자연 바위들 사이와 위에 담을 쌓아 바위와 석축이 하나로 이어진다. 유적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으로 12세기 무렵부터 돌담을 쌓기 시작했으며, 유명한 동석(凍石) 새 조각 대부분이 발견된 ‘동쪽 울타리’를 비롯해 여러 구획이 있다. 많은 학자가 이 언덕을 왕실과 의례의 중심으로 본다.
언덕 아래에는 가장 인상적인 단일 건축물인 대외곽(그레이트 인클로저)이 있다. 길이 약 250m, 높이 최대 약 11m, 밑동 두께 최대 약 5m의 바깥 담장이 둥그스름한 타원을 이룬다. 담장 윗부분 일부에는 돌을 비스듬히 놓아 지그재그(셰브런) 무늬를 낸 띠 장식이 있다. 안쪽에는 더 오래된 안 담장이 있고, 두 담 사이로 높은 벽이 양쪽을 막은 좁은 ‘평행 통로’가 원추형 탑 쪽으로 이어진다.
원추형 탑은 높이 약 9m, 밑지름 5m가 넘는 속이 꽉 찬 돌 원뿔이다. 문도 내부 공간도 없다. 그 의미는 알 수 없다. 통치자의 너그러움과 부를 상징하는 곡식 창고라는 설, 남근 또는 다산의 상징이라는 설, 다른 짐바브웨 유적의 탑과 같은 계열의 기념물이라는 설 등이 있다.
두 주요 구역 사이와 주변에는 주로 14~15세기에 지은 작은 울타리들인 계곡 유적이 흩어져 있다. 돌담 바깥으로도 도시는 넓게 펼쳐져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은 다가(흙과 자갈을 섞은 건축 재료)로 벽을 쌓고 초가지붕을 얹은 둥근 집에 살았다. 오늘날에는 돌로 된 부분만 뚜렷이 남아 있어서, 담장이 훨씬 큰 도시의 엘리트 중심부였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쉬움
담장은 어떻게 쌓았나
건설자들은 주변 언덕의 화강암을 썼다. 이 지역의 화강암 돔은 낮에 달구어지고 밤에 식기를 되풀이하면서 얇고 고른 판으로 저절로 떨어져 나오는데, 이를 박리(剝離, exfoliation)라 한다. 이 판을 벽돌만 한 크기로 깨뜨려 공사장으로 날랐다. 바위를 불로 달군 뒤 물을 끼얹어 쪼개는 방법으로 작업을 앞당겼으리라 보는 학자도 있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많지 않다.
모든 담장은 건식 석축이다. 돌을 가로줄(켜)로 모르타르 없이 쌓아, 돌 자체의 무게와 정교한 맞춤으로 버티게 했다. 켜마다 아래 켜보다 조금씩 안으로 들여 쌓아 담장이 안쪽으로 살짝 기울게 했는데, 이것이 구조를 안정시킨다. 현대적 의미의 기초는 없고 흔히 암반이나 다진 흙 위에 바로 쌓았다. 출입구는 둥글게 처리했고, 일부에는 나무 인방(引枋)과 계단이 있었다.
쌓는 기술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고고학자들은 20세기 중반 앤서니 위티가 제안한 분류를 따라, 거칠게 다듬은 고르지 않은 돌을 쓴 초기 양식, 가지런하고 고른 켜로 쌓은 매우 정연한 후기 양식(대외곽 바깥 담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그보다 뒤의 덜 정연한 양식을 구분한다. 이 양식들은 유적 각 부분의 상대적인 선후를 가늠하는 데 쓰인다.
공사 규모는 엄청났다. 대외곽의 바깥 담장 하나에만 약 1만 5천 톤의 돌이 들어갔다는 추정이 흔히 인용된다. 작업을 어떻게 조직했는지 알려 주는 기록은 없지만, 많은 인력이 오랜 기간 동원되었을 것이며, 후대 쇼나 국가들처럼 통치자의 권위와 공동체의 노역 의무를 통해 조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급
사람과 나라: 소, 금, 그리고 왕권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남부 아프리카에서 반투어를 쓰는 농경민들이 이어 온 긴 역사 속에 있다. 쇠를 다루고 수수와 기장 같은 작물을 기르던 농민들이 1천년기부터 이 지역에 살았다. 11세기 무렵 고고학자들이 ‘구만예(Gumanye)’라 부르는 공동체가 이곳에 자리 잡았고, 그들의 토기와 생활 방식이 곧바로 그레이트 짐바브웨 문화로 이어진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직접적인 선배는 마풍구브웨 왕국이다.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림포포강 유역, 보츠와나·짐바브웨와 국경이 맞닿는 곳에 중심을 둔 이 왕국은 13세기에 번성했다가 1300년 무렵 버려졌다. 마풍구브웨에서도 이미 지배층이 평민 위쪽 언덕 꼭대기에 살았고, 해안과 금·상아를 거래했다. 마풍구브웨가 쇠퇴할 무렵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떠오른 것은 권력과 교역의 중심이 북쪽으로 옮겨 갔음을 시사한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부의 기준은 무엇보다 소였다. 유적에서 나온 동물 뼈를 보면 지배층은 쇠고기를 많이 먹었고, 소는 동맹을 맺고 신부값을 치르고 추종자에게 상을 주는 데 쓰였다. 통치자들은 원거리 교역도 장악했다. 금은 주로 서쪽의 짐바브웨 고원에서 캐어 중개인을 거쳐 소팔라, 킬와 같은 해안의 스와힐리 도시로 상아와 함께 보내졌다. 들어온 물건으로는 유리구슬, 옷감, 페르시아 도기, 13~15세기 중국 청자 등이 있다.
전성기 인구는 약 1만에서 1만 8천 명으로 추정되며, 대부분은 돌담 바깥에 살았다. 큰 울타리 안에 산 지배층은 수백 명 정도로 본다. 이 도시를 중심으로 한 나라는 수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을 수 있으나, 경계와 구조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서아프리카의 말리 제국(만사 무사의 유명한 메카 순례가 1324년), 동아프리카 해안의 스와힐리 도시국가들, 중국의 원·명 초, 그리고 중세 말 유럽과 같은 시대에 있었다. 아프리카, 아라비아, 인도, 중국을 잇는 인도양 교역 세계의 일부였던 것이다.
중급
종교·문화적 의미와 짐바브웨 새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정치의 중심일 뿐 아니라 신성한 장소였다. 후대 쇼나 전통에서 왕(맘보)은 왕실 조상과 신 음와리(Mwari)와의 연결을 통해 권위를 얻었고, 영매들은 땅의 조상들을 대신해 말했다. 동굴과 바위, 울타리가 있는 언덕 유적이 기우제를 포함한 이런 의례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학자가 많지만, 이는 직접 증거가 아니라 후대 민족지에 기댄 해석이다.
유적에서 나온 가장 유명한 유물은 동석(凍石, 스테아타이트라고도 하는 무르고 푸르스름한 돌)으로 깎은 새 여덟 점이다. 새마다 높이 40cm 안팎이며 1m 남짓한 돌기둥 꼭대기에 얹혀 있었다. 대부분 언덕 유적의 동쪽 울타리에서 발견되었다. 특정한 종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흰죽지수리(바텔러수리)나 물수리 같은 맹금의 특징에 발톱 대신 사람 발가락 같은 요소를 섞었다. 흔히 왕실 조상, 또는 산 자와 조상과 신 사이를 오가는 전령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이 새들은 근대에 험난한 길을 걸었다. 1889년 한 사냥꾼이 한 점을 떼어 내 세실 로즈에게 팔았고, 이 새는 지금도 케이프타운의 옛 로즈 저택 흐로터 스휘르에 있다. 다른 새들은 남아프리카와 독일로 옮겨졌다. 남아프리카는 1981년 네 점을 돌려주었고, 베를린에 있던 새 한 점의 아랫부분은 2000년대 초에 반환되었다. 이 새는 로디지아의 문장이 되었다가 독립 짐바브웨의 상징이 되어 국기와 국장, 화폐에 새겨졌다.
오늘날 현지 공동체에게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조상의 땅이며 지금도 의례가 열린다. 전통 지도자와 영매들은 출입, 의례, 유적 관리자로서의 권리를 두고 유산 관리 당국과 때때로 긴장을 빚었고, 이웃 씨족들 사이에도 서로 다른 주장이 있다. 이런 살아 있는 관계를 존중하는 일이 이제 유적 관리의 한 부분이 되었다.
중급
쇠퇴와 그 뒤의 역사
15세기부터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중심 역할을 잃어 갔고, 1550년 무렵에는 더 이상 주요 수도가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은 계속 이곳에 살았다. 원인을 두고는 논쟁이 있다. 많은 인구가 주변의 목초지, 농지, 땔감을 고갈시켰을 가능성, 금 교역의 중심이 북쪽 잠베지강 유역으로 옮겨 간 것, 왕족 내부의 권력 다툼 등이 거론된다.
쇼나 구전은 네야침바 무토타라는 왕자가 소금을 찾아 북쪽으로 떠나 훗날의 무타파 왕국을 세웠다고 전한다. 구전을 역사 증거로 쓸 때는 조심해야 하지만, 이 이야기는 권력이 북쪽의 무타파 왕국(16세기 포르투갈인이 만난 나라)과 서쪽의 카미(역시 세계유산)를 중심으로 한 토르와 왕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로즈위로 옮겨 갔다는 고고학적 그림과 들어맞는다.
해안에 자리 잡은 포르투갈인들은 16세기 초에 이 석조 건물에 관한 정보를 기록했다. 소팔라의 수비대장 비센트 페가두는 1531년 모르타르 없이 ‘놀라운 크기의 돌로 쌓은’ 요새가 있으며 현지인들이 이를 심바오에라 부른다고 적었다. 역사가 주앙 드 바로스도 16세기 중엽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직접 유적을 찾아가지 않았으며, 정보는 아프리카인과 스와힐리인 전언자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중급
‘짐바브웨 논쟁’: 식민주의의 부정과 고고학의 증명
1871년 독일의 지질학자 카를 마우흐는 사냥꾼 애덤 렌더가 먼저 찾아낸 유적에 안내받아 가서는, 이것이 아프리카인의 작품일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유적이 시바 여왕의 궁전을 본뜬 것이며 나무 인방은 페니키아인이 가져온 레바논 삼나무라고 추측했다. 성서 속 오빌 땅에 관한 옛 포르투갈 전설을 되풀이한 이런 생각은 곧 이 지역을 점령하려던 유럽 식민 세력의 필요에 딱 맞았다.
세실 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가 1890년 이 땅을 장악한 뒤, 로즈는 1891년 제임스 시어도어 벤트의 발굴을 후원했다. 고고학 훈련을 받지 않은 벤트는 건설자가 페니키아인이나 아랍인이라고 결론짓고, 원추형 탑 주변을 파괴적으로 팠다. 1895년부터 1901년 무렵까지 ‘로디지아 고대 유적 회사’는 탐광꾼들에게 유적 안에서 금을 캘 권리를 주었고, 1902~1904년 관리인으로 임명된 리처드 니클린 홀은 이른바 ‘원주민’의 생활 쓰레기를 치운다며 대외곽에서 몇 미터 두께의 고고학 퇴적층을 걷어 냈다. 유적의 연대를 밝혀 줄 증거 상당수가 이때 사라졌다.
처음으로 이곳을 조사한 전문 고고학자 데이비드 랜들매키버는 1905년 발굴 후 『중세 로디지아』(1906)에서 건물이 중세에 아프리카인이 지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929년에는 거트루드 케이턴 톰프슨이 영국 과학진흥협회의 의뢰로 발굴을 이끌어, 정밀한 층위 조사로 그의 결론을 확인했다. 연대를 알 수 있는 모든 유물이 반투어 사용자 건설자와 중세라는 연대를 가리켰다. 많은 정착민은 그녀의 결론을 거부했고 그녀 자신도 건물을 낮잡아 묘사했지만, 과학적 결론은 분명했다.
1950년대 이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으로 중세 연대가 확인되었고, 이 무렵 아프리카 기원은 고고학계의 합의가 되었다. 그러나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정부는, 특히 1965년 일방적 독립 선언 이후 박물관과 안내서가 기원을 불확실하거나 외래의 것으로 소개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한 고고학자들은 검열을 받았고, 정부의 유적 감독관이던 피터 갈레이크는 1970년 나라를 떠났으며 국립박물관의 로저 서머스도 떠났다. 이 논쟁은 오늘날 인종주의와 정치가 과거 해석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중급
오늘의 보존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짐바브웨 국립박물관·기념물청이 관리하며, 198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담장은 여러 위협에 놓여 있다. 초기 도굴꾼들이 받쳐 주던 퇴적층을 걷어 내는 바람에 생긴 붕괴, 나무와 뿌리의 성장, 물과 침식, 지의류, 그리고 담장에 오르는 방문객들이다.
이전의 재건 작업도 비판을 받았다. 20세기에는 무너진 구간을 꼼꼼한 기록 없이 다시 쌓은 경우가 있어, 원래 석축과 후대 작업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오늘날의 보존은 상시 점검, 최소 개입, 모든 수리의 기록, 훈련받은 현지 석공이 전통 건식 석축 기법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공동체 참여는 핵심 과제다. 독립 뒤 유적이 국가기념물이자 관광지로 관리되면서 이곳을 신성하게 여기는 현지 주민의 출입이 제한되기도 했다. 짐바브웨의 고고학자 웨버 은도로 같은 유산 전문가들은 보존이 돌만 지킬 것이 아니라 유적의 영적 의미를 인정하고 현지 공동체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중급
유산: 한 나라의 이름이 되다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지배에 맞서 싸운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에게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아프리카인의 성취와 자치를 상징하는 강력한 표상이 되었다. 1980년 독립하면서 나라는 짐바브웨라는 이름을 택했고, 동석 새는 새 국기에 올랐다. 고고학 유적이 현대 국가의 정체성에 이토록 직접적인 역할을 한 예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독립 뒤에도 유적은 그때그때 정부가 선호하는 국가사의 서사를 뒷받침하는 데 정치적으로 쓰였다. 역사가들은 식민주의자와 민족주의자 모두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자기 현재관을 정당화하는 데 썼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유산이 언제나 해석을 거친다는 점을 일깨운다.
학문적으로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아프리카 과거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외부 정복자의 영향 없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복잡한 국가와 도시가 발전했다는 점, 그리고 유럽 식민주의보다 수백 년 앞서 아프리카가 아시아까지 잇는 교역망에 참여했다는 점을 보여 주는 핵심 사례다.
심화
학술 논쟁과 열린 질문
연대. 표준 편년은 언덕 유적이 가장 먼저(11~12세기 무렵부터), 대외곽이 13~15세기, 계곡 유적이 14~15세기라고 본다. 이는 방사성 탄소 연대, 수입품, 담장 양식을 근거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초기 도굴로 층위가 크게 파괴되어 근거가 제한적이다. 2010년대에 섀드렉 치리쿠레와 동료들은 방사성 탄소 연대를 베이즈 통계 모형으로 다시 분석해, ‘언덕 → 대외곽 → 계곡’이라는 단순한 순서보다 여러 구역이 더 동시에 쓰였다고 주장했다.
대외곽은 무엇에 쓰였나? 두 해석이 크게 맞서 왔다. 역사가 데이비드 비치 등과 연결되는 한 해석은 각 구역이 시대에 따라 거처를 옮긴 역대 통치자들을 반영한다고 본다. 고고학자 토머스 허프먼이 후대 쇼나·벤다 민족지를 바탕으로 세운 ‘구조주의’ 해석은 각 구역이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기능을 했다고 본다. 언덕은 왕의 거처이자 의례 중심, 대외곽은 왕비들의 거처이자 성인식 장소라는 것이다. 비판자들은 현대 민족지를 몇 세기 전에 투영하는 것은 위험하며 연대 자료도 이를 뚜렷이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건설자는 정확히 누구인가? 고고학자들은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반투어를 쓰는 아프리카인이 지었고 그 문화가 쇼나족에게 이어진다는 데 동의한다. 더 구체적인 귀속은 논쟁 중이다. 대부분은 쇼나의 한 갈래인 카랑가의 조상과 연결하지만, 벤다어 사용 공동체와의 관련을 주장하는 전승도 있고, 렘바족도 자신들을 유적과 연결하는 구전을 가지고 있다. 이는 현대의 정체성과 옛 주민 집단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지, 아프리카 기원 여부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왜 쇠퇴했고, 얼마나 컸나? 인구 추정은 발굴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담장 바깥에 집이 몇 채 있었다고 보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모형은 최대 1만 8천 명이라는 옛 추정보다 낮은 수치(약 1만 명 이하)를 내놓았다. 쇠퇴에서 환경 압박, 교역 변화, 정치적 분열이 각각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여전히 열린 문제다.
심화
증거와 방법
문자가 없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사람들은 문자를 쓰지 않았으므로 도시 자체의 비문이나 연대기는 없다. 지식은 고고학, 외부 문헌(내륙의 금과 왕국을 언급한 스와힐리 해안·아랍·포르투갈 기록), 나중에 채록된 구전, 후대 쇼나 사회와의 비교에서 나온다. 증거마다 한계가 있으므로 좋은 해석은 이들을 신중하게 엮는다.
연대 측정법.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은 숯이나 나무 같은 유기물 속 탄소-14가 붕괴한 정도를 재는 방법이다. 이 유적에서는 스무 개가 넘는 연대가 측정되었으나, 1950년대 초기 측정값은 지금은 믿기 어렵다고 본다. 14~15세기 중국 도자기와 형식이 알려진 유리구슬처럼 연대를 아는 수입품이 교차 검증 자료가 된다. 상대 연대는 층위(퇴적층의 쌓인 순서)와 담장 양식으로 가늠한다.
훼손된 기록. 1890~1900년대 보물 사냥꾼과 초기 발굴자들이 남긴 파괴는 방법론상 가장 큰 문제다. 고고학자들은 교란된 퇴적층을 다루고, 옛 발굴 기록을 다시 해석하며, 수도를 이해하기 위해 덜 훼손된 인근 유적과 다른 짐바브웨 유적을 연구해야 한다.
연구사. 그레이트 짐바브웨 연구의 역사는 학문적 질문이 정치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모양 지어지는지를 보여 준다. 초기 이론은 식민 이데올로기가 이끌었고, 과학적 반박은 정착민 정치 때문에 늦게 받아들여졌으며, 독립 뒤의 서사도 때로 국가적 목적을 위해 과거를 단순화했다. 오늘날 연구자들, 그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짐바브웨 학자들은 증거에 충실하면서 아프리카의 관점에서 유적의 역사를 쓰려 한다.
핵심 개념
- 건식 석축
- 모르타르 없이 돌을 정교하게 맞추어 쌓는 건축.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기념비적 규모와 높은 완성도에 이르렀다.
- 짐바브웨 문화
- 마풍구브웨에서 그레이트 짐바브웨, 카미 등으로 이어지는 짐바브웨 고원의 석벽 엘리트 중심지 전통을 가리키는 고고학 용어.
- 소와 금의 부
- 지배층의 권력은 소 떼와 인도양 해안으로 가는 금·상아 교역의 장악에 기반했다.
- 신성 왕권
- 통치자의 권위는 조상과 신에 연결되었고, 담장은 지배층을 구분하고 과시하는 장치였다.
- 짐바브웨 논쟁
- 아프리카인이 유적을 지었다는 사실을 부정한 식민 시대의 주장. 고고학으로 반박되었으나 로디지아에서는 1980년까지 정치적으로 유지되었다.
- 유산과 정체성
- 유적은 현대 짐바브웨에 이름과 상징을 주었으며, 지금도 현지 공동체에게 신성한 장소다.
- 인도양 연결망
- 중국·페르시아 도자기와 유리구슬은 남부 아프리카 내륙이 아시아까지 뻗은 교역망의 일부였음을 보여 준다.
기록
- 약 300년 — 쇠를 다루는 초기 농경 공동체가 이 지역에 거주.
- 약 1000년 — 그레이트 짐바브웨 언덕과 주변에 농경 취락이 들어섬.
- 약 1150년 — 언덕 유적에 첫 돌담이 세워짐.
- 약 1300년 — 마풍구브웨가 버려지고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지역의 중심지로 떠오름.
- 약 1350년 — 이 무렵 대외곽의 바깥 담장과 원추형 탑이 세워짐.
- 약 1450년 — 권력이 북쪽(무타파)과 서쪽(토르와, 카미)으로 옮겨 가며 쇠퇴 시작.
- 1531년 — 소팔라의 포르투갈 수비대장 비센트 페가두가 ‘심바오에’에 관한 기록을 남김.
- 1871년 — 카를 마우흐가 방문해 외래 건설자설을 주장, ‘짐바브웨 논쟁’의 시작.
- 1891년 — J. 시어도어 벤트가 세실 로즈의 후원으로 발굴하고 페니키아인·아랍인 건설설을 주장.
- 1905년 — 데이비드 랜들매키버가 발굴 후 중세 아프리카인의 유적이라고 결론.
- 1929년 — 거트루드 케이턴 톰프슨의 발굴로 아프리카인 건설과 중세 연대가 확인됨.
- 1986년 — 그레이트 짐바브웨 국가기념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짐바브웨 독립 6년 뒤).
용어 풀이
- 쇼나족
- 짐바브웨에서 가장 큰 언어·민족 집단으로, 그레이트 짐바브웨 건설자들의 후손이다.
- 반투어
- 중앙·동부·남부 아프리카 전역에서 쓰이는 커다란 친족 언어 집단. 쇼나어도 여기에 속한다.
- 건식 석축
- 모르타르 없이 돌을 맞추어 쌓은 담이나 벽.
- 박리(exfoliation)
- 바위가 달구어졌다 식기를 되풀이하며 얇은 판으로 떨어져 나오는 현상. 건설자들에게 납작한 돌을 제공했다.
- 다가
- 흙에 자갈을 섞은 건축 재료. 집, 바닥, 단을 만드는 데 쓰였다.
- 셰브런 무늬
- 돌을 비스듬히 놓아 만든 지그재그 장식. 대외곽 담장 일부에 보인다.
- 동석(스테아타이트)
- 깎기 쉬운 무른 돌. 짐바브웨 새를 만드는 데 쓰였다.
- 청자(셀라돈)
- 푸른 유약을 입힌 중국 자기.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그 조각이 발견되었다.
- 맘보
- 왕이나 통치자를 뜻하는 쇼나어 칭호.
- 층위
- 흙과 퇴적물이 쌓인 층. 대개 아래층이 더 오래되어 유물의 연대를 가늠하는 데 쓰인다.
-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 유기물 속 탄소-14의 붕괴 정도를 재어 연대를 알아내는 방법.
묻고 답하기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누가 지었나요?
오늘날 짐바브웨 쇼나족의 조상인, 반투어를 쓰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지었습니다. 고고학이 이를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했습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나요?
1000년 무렵부터 사람이 살았고, 돌담 대부분은 12~15세기에 지어졌으니 약 600~900년 되었습니다.
왜 담장에 시멘트나 모르타르가 없나요?
건식 석축 기법을 썼기 때문입니다. 납작한 화강암을 촘촘히 맞추고 켜마다 조금씩 들여 쌓아, 돌 자체의 무게로 버티게 했습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무엇에 쓰였나요?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왕의 거처이자 종교 중심지이며 도시였지요. 어느 구역이 어떤 용도였는지는 아직 논쟁 중입니다.
왜 외국인이 지었다는 주장이 나왔나요?
19세기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아프리카인이 이런 기념물을 지을 수 없다는 인종주의적 믿음을 가졌고, 그 주장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쓰였습니다. 고고학자들은 1905년부터 이를 반박했습니다.
짐바브웨 새는 무엇인가요?
유적에서 발견된, 높은 돌기둥 위에 얹힌 동석 새 조각 여덟 점입니다. 왕실과 조상에 관련된 상징으로 보이며, 그중 하나가 짐바브웨 국기에 그려져 있습니다.
왜 버려졌나요?
한 가지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주변 자원의 고갈, 금 교역로의 변화, 정치적 분열 등이 겹쳐 권력이 무타파와 토르와 왕국으로 옮겨 간 것으로 봅니다.
짐바브웨라는 나라 이름이 여기서 왔나요?
네. 1980년 독립할 때 옛 로디지아가 이 유적의 이름을 따서 짐바브웨가 되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Great Zimbabwe National Monument.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Great Zimbabwe. Wikipedia
- 그레이트짐바브웨. 위키백과
- Kingdom of Zimbabwe. Wikipedia
- Kingdom of Mapungubwe. Wikipedia
- Zimbabwe Bird. Wikipedia
- Gertrude Caton Thompson. Wikipedia
- Department of the Arts of Africa, Oceania, and the Americas, Great Zimbabwe (11th–15th Century).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Heilbrunn Timeline of Art History, 2001
- Peter Garlake, Great Zimbabwe. Thames and Hudson, 1973
- Innocent Pikirayi, The Zimbabwe Culture: Origins and Decline of Southern Zambezian States. AltaMira Press, 2001
- Gertrude Caton-Thompson, The Zimbabwe Culture: Ruins and Reactions. Clarendon Press, 1931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