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800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잘랄 앗딘이라는 아이가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이름난 설교자이자 선생님이었지요. 잘랄 앗딘이 아직 어릴 때, 가족은 서쪽으로 아주 먼 여행을 떠났어요. 큰 도시와 사막을 지나 마침내 오늘날 튀르키예에 있는 코니아라는 도시에 자리 잡았어요.
잘랄 앗딘은 자라서 아버지처럼 이슬람 법과 종교를 가르치는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그를 ‘우리 스승님’이라는 뜻의 ‘마울라나’라고 불렀어요. 오늘날 많은 사람은 그를 ‘룸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의 ‘루미’로 알아요. 룸은 그가 살던 땅의 옛 이름이에요.
서른일곱 살쯤 되었을 때 루미는 떠돌이 성자 샴스를 만났어요. 두 사람은 며칠씩 이야기를 나누며 떨어질 수 없는 친구가 되었어요. 샴스는 루미의 삶을 바꾸어 놓았어요. 루미는 시를 짓고, 음악을 듣고, 기쁨에 겨워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샴스가 사라지자, 루미의 슬픔과 사랑은 수천 편의 시가 되어 흘러나왔어요.
루미의 시에 따르면 사람은 갈대밭에서 잘려 나온 갈대로 만든 피리와 같아요. 피리는 고향이 그리워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요. 루미는 우리 마음도 모든 사랑의 근원인 신에게 돌아가기를 그리워한다고 말해요.
루미가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은 ‘메블레비’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음악에 맞추어 천천히 빙글빙글 돌며 기도하는 ‘세마’ 의식으로 유명해요. 코니아에 있는 루미의 무덤에는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와요.
한눈에 보기
- 이름
- 잘랄 앗딘 무함마드. 마울라나(메블라나), 루미, 이란·아프가니스탄에서는 발히라고도 부름
- 출생
- 1207년, 발흐 지역. 많은 학자는 실제 집이 작은 도시 와흐시(오늘날 타지키스탄)에 있었다고 봄
- 사망
- 1273년 12월 17일, 룸 셀주크 술탄국의 코니아(오늘날 튀르키예)
- 언어
- 주로 페르시아어. 아랍어 시도 일부 있고, 튀르크어·그리스어 낱말과 구절이 드물게 섞임
- 주요 저작
- 『마스나비』(6권, 약 2만 5천 대구), 『샴스 타브리지 시집』(서정시), 『피히 마 피히』(강화록), 서간·설교집
- 종교
- 하나피 학파의 수니 이슬람 학자이자 수피(이슬람 신비주의) 스승
- 전환점
- 1244년 말 코니아에서 떠돌이 신비가 샴스 타브리지와 만남
- 유산
- 메블레비 수피 교단과 세마(‘회전 춤’) 의식.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시인 가운데 하나
쉬움
루미는 누구인가
루미(1207–1273)는 이슬람 학자이자 설교자, 수피 스승, 그리고 시인이었다. 어른이 된 뒤 대부분을 아나톨리아 중부의 도시 코니아에서 보냈는데, 당시 코니아는 룸 셀주크 술탄국의 수도였다. 그래서 ‘룸 사람’이라는 뜻의 루미로 불린다. 이 이름에는 아나톨리아가 오랫동안 (동)로마 세계에 속했다는 기억이 담겨 있다. 튀르키예에서는 ‘우리 스승’이라는 뜻의 메블라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흔히 몰라비 또는 출생지 이름을 딴 발히로 불린다.
루미는 삶의 대부분을 꾸란과 이슬람 법학, 신학을 익힌 존경받는 종교 학자로 살았다. 그러다 서른 후반에 떠돌이 신비가 샴스 타브리지와 맺은 우정이 그를 페르시아어 최고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대표 시집은 두 가지다. 이야기로 가득한 긴 영적 서사시 『마스나비』, 그리고 루미가 친구의 이름으로 서명한 시가 많아 ‘샴스 타브리지 시집(디반 에 샴스 에 타브리지)’이라 불리는 방대한 서정시집이다. 그의 시는 수백 년 동안 페르시아, 튀르크, 아랍, 남아시아 세계에서 사랑받았고, 지난 세기에는 다른 여러 언어권에서도 널리 읽히게 되었다.
쉬움
길 위의 어린 시절
루미는 1207년 동부 페르시아어권,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발흐 지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저술을 연구한 결과, 가족이 실제로 살던 곳은 아무다리야(옥수스)강 북쪽, 오늘날 타지키스탄의 작은 도시 와흐시였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다만 전통적인 출생지는 발흐다. 아버지 바하 앗딘 왈라드는 설교자이자 학자로, 그의 영적 성찰을 모은 『마아리프』는 훗날 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210년대에 가족은 중앙아시아를 떠났다. 후대 전기 작가들은 이 떠남을 몽골의 위협과 연결하지만, 현지 군주나 학자들과의 갈등도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가족은 사마르칸트, 니샤푸르, 바그다드를 거쳐 메카 순례를 마치고, 한동안 아나톨리아의 라렌데(카라만)에 머물렀다. 루미는 이곳에서 혼인했고 아들 술탄 왈라드가 태어났다. 니샤푸르에서 늙은 시인 아타르가 소년 루미를 만나 그의 위대함을 예언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를 경건한 전설로 본다.
1228년 무렵 가족은 코니아에 정착했다. 전통에 따르면 셀주크 술탄 카이쿠바드 1세가 초청했다고 한다. 1231년 바하 앗딘이 죽자 젊은 루미가 아버지의 교직을 이어받았다. 아버지의 옛 제자 부르한 앗딘 무하키크 티르미디가 그의 신비주의 수행을 이끌었고, 루미는 시리아의 큰 학문 중심지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에서도 공부했다.
쉬움
샴스 타브리지와의 만남
1244년 말, 타브리즈 출신의 떠돌이 데르비시 샴스 앗딘이 코니아에 왔다. 예순 살쯤 된 그는 말이 날카로웠고, 명성이나 평범한 종교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지만, 그 만남이 루미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는 점에서는 모두 일치한다. 두 사람은 몇 달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대화와 영적 교제로 보냈다.
루미의 제자와 가족은 낯선 사람이 스승을 빼앗아 갔다며 질투하고 적대했다. 1246년 샴스는 다마스쿠스로 떠났다. 상심한 루미는 아들 술탄 왈라드를 보내 그를 데려오게 했다. 그러나 갈등이 되살아났고, 1247년 또는 1248년에 샴스는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후대에는 루미의 아들 알라 앗딘이 연루된 살해설이 나왔지만 초기 사료로는 확인되지 않으며, 많은 역사학자는 샴스가 그냥 떠났을 가능성도 본다.
루미는 친구를 찾아 다마스쿠스까지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샴스를 자기 안에서 찾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 우정의 슬픔과 그리움과 기쁨이 『샴스 타브리지 시집』 서정시의 큰 주제다. 샴스 자신의 말도 제자들이 기록해 『마칼라트(담화록)』로 전한다.
중급
작품: 시집, 『마스나비』, 산문
『샴스 타브리지 시집』(『대시집(디반 에 카비르)』이라고도 한다)에는 한 운으로 이어지는 짧은 서정시 가잘이 약 3만 5천 대구, 4행시 루바이가 약 2천 편 실려 있다. 전통에 따르면 많은 시가 음악을 듣거나 춤추며 돌 때 즉흥으로 지어졌다. 시에는 연인, 술, 주막, 달, 정원 같은 페르시아 연애시의 이미지가 가득한데, 루미는 이를 빌려 신을 향한 영혼의 사랑을, 흔히 샴스라는 인물을 통해 노래했다.
샴스 이후 루미는 먼저 소박한 금세공인 살라흐 앗딘 자르쿠브, 이어 제자 후삼 앗딘 첼레비와 영적 동반 관계를 맺었다. 전통에 따르면 제자들을 위한 긴 교훈시를 지어 달라고 청한 사람이 후삼 앗딘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깊은 뜻을 담은 대구시’라는 뜻의 『마스나비 에 마나비』다. 1250년대 후반 무렵부터 루미가 죽을 때까지 여러 해에 걸쳐 구술하고 후삼 앗딘이 받아 적었다. 모두 6권, 약 2만 5천 대구이며, 제6권은 끝맺지 못한 채 끊긴다.
『마스나비』는 동물 우화, 민담, 꾸란의 일화, 예언자의 언행을 비롯한 수백 편의 이야기를 해설과 여담으로 엮어,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로 열리곤 한다. 첫머리는 유명한 ‘갈대의 노래’다. “갈대 피리 소리를 들어라, 이별을 하소연하며 들려주는 그 이야기를.” 페르시아어권에서는 『마스나비』를 ‘페르시아어로 된 꾸란’이라 부르기도 했다. 시인 자미가 한 말로 전하는 이 표현은, 이 작품이 이슬람의 내면적 의미로 이끄는 안내서로 얼마나 깊이 존중받았는지를 보여 준다.
산문으로는 제자와 방문객에게 한 격식 없는 이야기를 기록한 『피히 마 피히』(‘그 안에 있는 것이 그 안에 있다’), 설교를 모은 『마잘레스 에 사바』(‘일곱 번의 모임’), 그리고 사람들의 실제 어려움을 도우려고 쓴 편지가 많은 서간집이 있다. 이 글들은 시인일 뿐 아니라 스승이자 공동체 지도자인 루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중급
핵심 사상: 사랑, 이별, 변화
루미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전통인 수피즘에 속했다. 수피즘은 사랑과 헌신, 수행, 영적 스승의 인도를 통해 신을 직접 체험하려 한다. 루미 사상의 중심은 사랑(에쉬크)이다. 영혼을 이기심에서 끌어내 신에게로 이끄는, 불타오르며 사람을 바꾸는 힘이다.
이별과 귀환이 그의 세계관의 핵심이다. 갈대 피리는 갈대밭에서 잘려 나왔기에 운다. 인간의 영혼도 신적인 근원에서 떨어져 나왔기에 그리워한다. 이 그리움은 아프지만 소중하다. 영혼을 돌아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루미는 자아를 떨쳐 버려 신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죽기 전에 죽으라’는 말로 자주 표현한다.
루미의 시에는 역설과 대담한 이미지가 가득하고, 때로는 종교의 겉모습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신앙을 실천하는 이슬람 학자였고, 『마스나비』에는 꾸란과 하디스 인용이 넘쳐 난다. 학자들은 그의 보편적 호소력이 이슬람 신앙에서 벗어나서가 아니라 그 신앙에서 자라났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겉의 실천과 속의 의미가 함께 가야 한다고 가르쳤고, 교만과 탐욕과 분노가 마음을 가로막는 모습을 일상의 이야기로 보여 주었다.
음악과 움직임도 그의 영적 삶의 일부였다. 루미는 참가자들이 음악과 시를 듣고 때로 황홀경 속에 돌며 춤추는 모임 사마에 참여했다. 당시 일부 종교 학자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루미가 이를 옹호한 것은 그의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
중급
루미의 세계: 몽골 시대의 코니아
루미는 서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세기를 살았다. 1219년부터 몽골의 침입이 중앙아시아와 이란을 휩쓸자, 학자와 신비가와 장인을 포함한 피란민의 물결이 서쪽 아나톨리아로 밀려들었다. 1243년 몽골은 쾨세다으 전투에서 셀주크를 격파했고, 룸 술탄국은 몽골 일 칸국의 속국이 되었다. 1258년에는 몽골이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 코니아는 문화 중심지로 번성했다. 셀주크 궁정과 고급 문학의 언어는 페르시아어, 종교 학문의 언어는 아랍어, 많은 평민의 언어는 튀르크어였고, 그리스계와 아르메니아계 그리스도교도, 유대인도 함께 살았다. 루미의 주변에는 상인, 장인, 관리가 있었고, 그가 드물게 쓴 그리스어·튀르크어 구절은 이런 섞인 사회를 반영한다.
코니아에는 다른 주요 수피들도 있었다. 특히 철학적 신비가 이븐 아라비의 수제자 사드르 앗딘 쿠나위가 대표적이다. 루미의 사랑의 시와 이븐 아라비 학파의 체계적인 형이상학은 같은 수피 문화에서 흘러나온 두 물줄기였지만, 서로 얼마나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중급
루미 이후: 메블레비 교단과 세마 의식
루미는 1273년 12월 17일 코니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무슬림, 그리스도교도, 유대인 등 도시의 모든 공동체가 장례 행렬에 함께했다. 제자들은 그의 기일을 ‘혼례의 밤(셰비 아루스)’이라 부른다. 죽음을 영혼이 사랑하는 이와 하나 되는 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녹색 타일 돔 아래 있는 그의 무덤은 지금 메블라나 박물관이다.
루미가 죽은 뒤 후삼 앗딘 첼레비가 제자들을 이끌었고, 이어 아들 술탄 왈라드(1312년 사망)와 손자 울루 아리프 첼레비가 이들을 수피 교단 메블레비야(메블레비 교단)로 조직했다. 교단의 수도장은 아나톨리아 전역으로, 나중에는 오스만 제국 곳곳으로 퍼졌고, 시와 음악과 서예의 큰 후원자가 되었다.
교단은 세마 의식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높은 펠트 모자와 흰옷을 입은 데르비시들이 네이(갈대 피리)와 북 소리에 맞추어 천천히 도는데, 한 손은 위로 들어 은총을 받고 다른 손은 아래로 내려 땅에 전한다. 1925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모든 수피 수도장을 폐쇄하자 의식은 한동안 사적으로 이어졌고, 뒤에는 공연 형태로 되살아났다. 유네스코는 2005년 메블레비 세마 의식을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포했고, 2008년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올렸다.
중급
세계 속의 루미
수백 년 동안 『마스나비』는 발칸에서 벵골까지 연구되고 필사되고 주석되었다. 페르시아어, 오스만 튀르크어, 우르두어, 아랍어로 주석서가 쓰였고, 헤라트의 자미나 20세기 남아시아의 무함마드 이크발 같은 시인들이 루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페르시아어권에서는 『마스나비』의 구절이 속담이 되었다.
근대 서양의 관심은 19세기 번역에서 시작해, 1925년부터 1940년까지 『마스나비』의 교정본과 번역, 주석을 펴낸 레이놀드 A. 니컬슨과 그의 제자 A. J. 아버리의 학문적 작업으로 커졌다. 20세기 후반에는 미국 시인 콜먼 바크스의 자유로운 영어 번안이 루미를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시인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이런 대중적 번안은 루미의 시를 이슬람과 페르시아의 맥락에서 떼어 내 때로 종교 없는 영성 스승처럼 그린다는 비판을 많은 학자에게서 받았다. 반대로 수백만 명의 독자에게 그의 세계를 소개했다는 옹호도 있다. 이 논쟁은 번역과 문화적 전유, 그리고 종교 시인이 문화를 건너 말하는 방식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루미는 여러 나라가 자기 사람으로 여긴다. 튀르키예는 그가 살고 가르치고 묻힌 아나톨리아의 인물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은 동부 페르시아어권에서 태어난 페르시아어 시인으로, 타지키스탄은 출생지의 인물로 기린다. 탄생 800주년인 2007년에는 유네스코가 국제 기념 행사를 지원했다. 많은 애호가는 루미가 이 모든 전통에 함께 속한다고 강조한다.
심화
전기 자료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루미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거의 모든 것은 가족과 제자들이 쓴 자료에서 나온다. 가장 이른 것은 아들 술탄 왈라드의 운문 서사 『엡테다 나메』(『왈라드 나메』라고도 한다)와, 40년 동안 루미의 제자였다는 파리둔 세파살라르의 『레살라』다. 가장 자세한 것은 샴스 앗딘 아플라키가 1318년 무렵부터 1353년 사이에 쓴 『마나케브 알아레핀』(‘신을 아는 이들의 행적’)이다.
아플라키의 저작은 성인전이다. 루미와 메블레비 가문을 기리려고 교훈적 일화와 기적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전설과 시대착오도 섞여 있고, 루미 사후 두세 세대 뒤에 쓰였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그 이야기를 루미 자신의 저술, 아버지의 『마아리프』, 샴스의 『마칼라트』, 루미의 편지, 메블레비 밖의 사료와 대조해 검증한다.
영어로 된 가장 철저한 현대 비판적 전기는 프랭클린 D. 루이스의 Rumi: Past and Present, East and West(Oneworld, 2000)로, 전설과 증거를 가려내고 오늘날까지의 수용사를 개관한다. 그 앞에는 이란의 바디 알자만 포루잔파르, 튀르키예의 압뒬바키 괼프나를르, 독일의 아네마리 쉼멜의 연구가 토대를 놓았고, 프리츠 마이어의 바하 앗딘 왈라드 연구는 가족의 출신지가 와흐시였음을 밝혔다.
몇 가지 문제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정확한 출생지, 가족이 이주한 이유와 그것이 몽골의 진격 전이었는지 그 때문이었는지, 샴스가 오고 사라진 정확한 날짜, 그리고 샴스의 운명이다. 루미의 전기를 신중하게 읽는 사람은 사료가 전하는 것, 사료가 가르치려는 것,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운다.
심화
텍스트, 필사본, 해석
루미의 저작은 유난히 이른 시기의 필사본으로 전한다. 『마스나비』는 그가 죽고 몇 해 안에 코니아에서 필사되었고, 메블라나 박물관에 있는 677년(히즈라력, 서기 1278년)자 필사본은 본문의 핵심 증거로 꼽힌다. 니컬슨의 교정본도 이른 필사본에 기댔고, 이란의 모함마드 에스테알라미, 타우피크 소브하니 등의 후대 교정본은 가장 오래된 사본을 바탕으로 후삼 앗딘이 받아 적은 모습에 더 가까운 본문을 세우려 했다.
시집은 더 까다롭다. 수백 년 동안 다른 시인들의 시가 루미의 이름으로 돌던 모음집에 많이 끼어들었다. 포루잔파르가 1957년부터 1967년까지 테헤란에서 펴낸 『대시집』 교정본은 이른 필사본을 이용해 진작과 후대 첨가를 가려냈고, 지금도 표준 본문이다. 인터넷에서 루미의 말로 돌아다니는 인기 구절 가운데에는 그의 저작에 전혀 없는 것도 있다.
해석도 논쟁거리다. 고전 주석가들은 흔히 ‘존재의 단일성’ 같은 이븐 아라비 학파의 형이상학으로 『마스나비』를 읽었다. 일부 현대 학자는 루미의 사상이 그보다 덜 체계적이며, 아버지와 사나이, 아타르 같은 선배 페르시아 시인들의 윤리적·헌신적 수피즘에 더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샴스의 역할을 두고도 논쟁이 있다. 교리를 가르친 스승으로 볼지, 체험을 일으킨 촉매로 볼지, 루미가 신적인 연인을 투영한 문학적 인물로 볼지의 문제다.
마지막으로 학자들은 『마스나비』를 문학으로 분석한다. 액자식 구조, 화자와 등장인물과 해설 사이를 오가는 목소리의 전환, 구술로 전한 가르침이라는 기원이 그 대상이다. 이런 특징은 이 작품이 영적 수행의 교본이면서 동시에 세계 문학의 위대한 이야기 모음집으로 읽힐 수 있는 까닭을 설명해 준다.
핵심 개념
- 사랑(에쉬크)
- 루미 사상의 중심. 영혼을 이기심에서 끌어내 신에게로 이끄는, 사람을 바꾸는 열정이다.
- 이별과 귀환
- 갈대밭에서 잘려 나온 갈대처럼 영혼은 신적인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그리워한다. 그 그리움 자체가 선물이다.
- 영적 동반
- 샴스, 살라흐 앗딘, 후삼 앗딘과의 관계는 친구이자 안내자를 통해 신을 만난다는 수피의 믿음을 보여 준다.
- 죽기 전에 죽기
- 자아를 떨쳐 버려 새로 태어나는 것. 루미가 여러 이미지로 표현한 수피 전통의 생각이다.
- 이야기로 가르치기
- 『마스나비』는 우화와 민담, 꾸란의 이야기로 내면의 의미를 평범한 청중도 알아듣게 가르친다.
- 사마
- 음악과 시를 듣고 때로 돌며 춤추는 영적 수행. 메블레비 세마 의식의 뿌리다.
- 이슬람의 뿌리와 보편적 울림
- 루미의 보편적 호소력은 이슬람 신앙과 페르시아 문화에서 자라났다. 맥락을 지운 읽기에 맞서 학자들이 강조하는 점이다.
기록
- 1207년 — 잘랄 앗딘 무함마드가 발흐 지역, 아마도 와흐시에서 태어난다.
- 약 1216년 — 가족이 중앙아시아를 떠나 사마르칸트, 니샤푸르, 바그다드, 메카를 거쳐 서쪽으로 간다.
- 약 1228년 — 가족이 룸 셀주크 술탄국의 수도 코니아에 정착한다.
- 1231년 — 아버지 바하 앗딘 왈라드가 죽고, 루미가 교직을 잇는다.
- 1243년 — 몽골이 쾨세다으에서 셀주크를 격파하고, 룸은 몽골의 속국이 된다.
- 1244년 — 루미가 코니아에서 샴스 타브리지를 만난다.
- 약 1247년 — 샴스가 영영 자취를 감춘다(1247년 또는 1248년).
- 약 1258년 — 루미가 후삼 앗딘 첼레비에게 『마스나비』를 구술하기 시작한다.
- 1273년 — 12월 17일, 루미가 코니아에서 세상을 떠난다.
- 1312년 — 루미의 제자들을 메블레비 교단으로 조직한 술탄 왈라드가 죽는다.
- 1925년 — 튀르키예 공화국이 메블레비를 포함한 수피 수도장을 폐쇄한다.
- 2008년 — 메블레비 세마 의식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오른다(2005년 걸작 선포).
용어 풀이
- 수피즘
- 사랑과 헌신, 영적 수행으로 신과의 내면적 가까움을 추구하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전통.
- 데르비시
- 수피 교단의 일원, 또는 샴스 같은 떠돌이 수피 수행자.
- 마스나비
- 대구마다 운을 맞춘 페르시아어 장편시 형식. 루미의 작품이 워낙 유명해 흔히 그냥 ‘마스나비’라 부른다.
- 가잘
- 하나의 운으로 이어지는 짧은 서정시. 주로 사랑을 노래하며, 루미 시집의 중심 형식이다.
- 루바이
- 네 줄로 된 짧은 시(4행시).
- 디반
- 한 시인의 서정시를 모은 시집.
- 네이
- 갈대 피리. 메블레비 음악의 중심 악기이자 그리워하는 영혼의 상징.
- 세마(사마)
- 음악과 시를 듣는 의식. 메블레비 교단에서는 도는 춤 의식을 가리킨다.
- 성인전
- 성인의 삶을 기리고 감화를 주려고 쓴 전기. 기적 이야기가 많이 들어간다.
- 룸 셀주크 술탄국
- 코니아를 수도로 아나톨리아를 다스린 셀주크 튀르크계 국가(1077년 무렵–1308).
묻고 답하기
왜 ‘루미’라고 불러요?
‘루미’는 ‘룸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룸은 그가 살던 아나톨리아(오늘날 튀르키예)의 옛 이름이에요. 그곳 사람들은 ‘우리 스승님’이라는 뜻으로 메블라나라고 불렀어요.
루미는 어떤 언어로 시를 썼어요?
주로 페르시아어로 썼어요. 아랍어로 쓴 시도 조금 있고, 튀르크어와 그리스어 낱말이나 구절도 가끔 섞었어요.
샴스 타브리지는 어떻게 되었어요?
1247년이나 1248년에 코니아에서 사라졌어요. 살해되었다는 후대 전설이 있지만 초기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그냥 떠났을 수도 있어요.
빙글빙글 도는 데르비시는 루미에게서 시작되었나요?
네. 루미는 음악과 춤 모임에 참여했고, 그가 죽은 뒤 아들과 손자가 제자들을 메블레비 교단으로 묶었어요. 이 교단의 도는 의식은 지금도 행해져요.
인터넷의 루미 명언은 모두 루미의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인기 있는 구절 상당수는 느슨한 번안이고, 그의 저작에 아예 없는 것도 있다. 교정본을 바탕으로 한 학술 번역이 가장 믿을 만하다.
아플라키의 루미 전기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귀중하지만 성인전이다. 루미와 메블레비를 기리려고 두세 세대 뒤에 쓴 책이므로, 역사학자들은 루미 자신의 저작, 아버지의 『마아리프』, 샴스의 『마칼라트』와 대조해 검증한다.
루미는 튀르키예인인가, 페르시아인인가, 아프가니스탄인인가?
그 시대에는 이런 근대 국민 범주가 없었다. 동부 페르시아어권에서 태어나 페르시아어로 쓰고 셀주크 아나톨리아에서 살았기에, 아프가니스탄·타지키스탄·이란·튀르키예가 모두 그를 기린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루미. 위키백과
- Rumi. Wikipedia
- Shams Tabrizi. Wikipedia
- Mevlevi Order. Wikipedia
- Mevlevi Sema Ceremony.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 Franklin D. Lewis, Rumi: Past and Present, East and West. The Life, Teachings and Poetry of Jalâl al-Din Rumi. Oneworld, 200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