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수코타이 역사공원

อุทยาน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สุโขทัย (수코타이, ‘행복의 새벽’)

약 1238–1438년 · 옛 수코타이 (수코타이 왕국)

한 문장으로

수코타이 역사공원은 약 700~800년 전 타이족 왕국의 수도였던 태국 북부의 성곽 도시 수코타이의 폐허를 지키는 곳으로, 벽돌 사원과 연꽃 봉오리 모양 탑, 우아한 불상으로 가득해요.

수코타이 역사공원
이미지: Vyacheslav Argenberg · CC BY 4.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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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약 750년 전, 지금의 태국 한가운데에 수코타이라는 도시가 있었어요. ‘행복의 새벽’이라는 뜻이에요. 도시에는 튼튼한 성벽과 물이 가득한 깊은 해자가 있었고, 동화 속 성처럼 네 벽 한가운데마다 문이 있었어요.

성벽 안에 사람들은 벽돌로 불교 사원을 많이 짓고 겉에 회반죽을 발랐어요. 가장 큰 사원인 왓 마하탓은 도시 한가운데에 있었지요. 가운데 탑 꼭대기는 아직 피지 않은 연꽃 봉오리처럼 생겼어요. 탑 아래에는 회반죽으로 만든 작은 스님들이 두 손을 모으고 줄지어 걸어가요.

수코타이의 예술가들은 둥글고 부드러운 얼굴에 살짝 미소 짓는, 고요하고 온화한 불상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아주 특별한 것도 만들었어요. 한 발뒤꿈치를 들고 한 팔을 살며시 흔들며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듯한 ‘걷는 부처’예요.

수코타이는 람캄행이라는 임금으로 기억돼요. 글이 새겨진 유명한 옛 돌에는 그 시절 ‘물에는 물고기가 있고 논에는 벼가 있다’고, 또 억울한 사람은 누구나 궁궐 문에 달린 종을 치면 임금이 나와 들어 주었다고 적혀 있어요. 그 돌이 정말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두고 학자들이 다투기도 했는데, 그 다툼도 역사의 일부랍니다.

나중에 이 왕국은 아유타야라는 다른 태국 왕국에 합쳐졌고, 옛 도시는 비게 되었어요. 지금 그 폐허는 연못과 나무 사이에 서 있는 넓은 공원이 되어 누구나 자전거를 타고 둘러볼 수 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해요.

한눈에 보기

시기
도시는 그 전부터 있었고, 1238년(전통적 연대)의 사건부터 아유타야에 흡수가 마무리된 1438년 무렵까지 수코타이 왕국의 수도
위치
태국 북부 하단 수코타이주, 현재 주도 수코타이타니에서 서쪽으로 약 12km
도시 구조
동서 약 2km, 남북 약 1.6km의 직사각형 성곽. 네 벽마다 문이 있고 토성과 해자가 세 겹
유적
왕궁 터, 성 안 사원 26곳과 성 밖의 많은 사원. 공원 안 약 70km²에 유적 193곳
주요 유적
왓 마하탓, 왓 시춤, 왓 시사와이, 왓 프라파이루앙, 왓 사시, 왓 사판힌, 투리앙 가마터
미술
‘수코타이 양식’: 연꽃 봉오리형 탑, 회반죽(스투코) 장식, ‘걷는 부처’를 비롯한 이상화된 불상
보호
1961년부터 태국 예술청이 복원, 1988년 역사공원 개원
세계유산
시사차날라이·깜팽펫과 함께 ‘수코타이 역사 도시와 관련 역사 도시들’로 1991년 등재

쉬움

수코타이 역사공원은 어떤 곳인가

수코타이 역사공원은 태국 북부 하단에 있는 옛 도시 수코타이의 폐허를 보존하는 곳이다. 13~14세기에 수코타이는 같은 이름의 왕국의 수도였고, 이 왕국은 당시 동남아시아 대륙부에 일어난 여러 타이어 사용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산스크리트어·팔리어에서 온 이름으로, 흔히 ‘행복의 새벽’이라고 옮긴다.

공원은 현재의 주도에서 서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다. 중심은 동서 약 2km, 남북 약 1.6km의 직사각형 성곽 도시로, 네 벽 한가운데마다 문이 있다. 성 안에는 왕궁 터와 스무 곳 남짓한 사원이 있고, 성 밖 평원과 서쪽 구릉에도 사원이 훨씬 더 많다. 공원 전체로는 약 70km²에 유적 193곳이 있다.

공원은 태국 예술청(Fine Arts Department)이 관리한다. 예술청은 1961년부터 유적을 복원했고 1988년 역사공원으로 개원했다. 1991년 유네스코는 북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시사차날라이, 남서쪽의 깜팽펫과 함께 ‘수코타이 역사 도시와 관련 역사 도시들’이라는 연속 유산으로 이곳을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다.

유네스코는 세 도시를 시암 미술과 건축, 언어와 문학, 종교와 법의 첫 시기가 펼쳐진 무대로 평가한다. 수코타이 유적은 특히 미술사가들이 ‘수코타이 양식’이라 부르는 불교 건축과 조각으로 사랑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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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도시를 ‘읽는’ 법: 성벽, 물, 그리고 한가운데의 사리

수코타이는 질서 잡힌 세계의 모습으로 설계되었다. 도시는 거의 정사각형이며 흙으로 쌓은 성벽 세 겹과 그 사이의 해자로 둘러싸였고, 가장 중요한 사원 왓 마하탓이 왕궁 터 곁 중심부에 있다. 성곽 도시 한가운데 거대한 사리탑을 두고 성 밖에 저수지를 둔 배치를, 역사가 크리스 베이커와 파숙 퐁파이칫은 앙코르의 영향을 받은 이 지역 도시들과 비교한다.

도시 생활의 열쇠는 물이었다. 수코타이는 큰 강가의 범람원이 아니라 더 건조한 땅에 자리했기 때문에 빗물을 모아 두어야 했다. 남서쪽 구릉의 흙 제방, 오늘날 사릿퐁 댐 또는 탐놉 프라루앙이라 부르는 둑이 물을 가두었고, 그 물은 수로를 따라 도시로 흘러 트라팡통, 트라팡응언 같은 연못과 저수지를 채웠다. 많은 사원이 이 연못 속 섬 위에 서 있어서, 물에 비친 탑 그림자까지 풍경의 일부가 된다.

큰길은 네 문에서 중심으로 뻗었다. 성 밖에는 사방으로 사원이 들어섰고, 서쪽 숲이 우거진 구릉에는 슬레이트 돌길로 오르는 ‘숲의 승려’들의 사원이 있었다. 성 안의 왕궁 언덕 넌쁘라삿은 1833년 훗날의 몽꿋 왕이 유명한 비석과 돌 옥좌를 발견한 곳이다.

오늘날 공원을 걷거나 자전거로 돌면, 왕실과 국가 의례가 벌어지던 번잡한 중심에서 섬 위의 사원들을 지나 고요한 언덕 사원으로 이어진다. 옛 도시에서 종교·정치·경제 생활이 어떻게 한데 얽혀 있었는지 잘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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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꼭 알아 둘 유적

왓 마하탓(‘큰 사리의 사원’)은 도시와 왕국의 중심 사원이었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중앙 탑은 수코타이 특유의 연꽃 봉오리 모양이다. 탑 기단에는 부처의 제자 168명이 두 손을 모은 채 행렬을 이루어 걷는 회반죽 상이 둘러 있다. 작은 탑 여덟 기가 중앙 탑을 에워싸고, 곁에는 프라 앗타롯이라 부르는 높은 입불상 둘이 서 있다. 경내에는 법당, 계단(戒壇)이 있는 우보솟, 작은 탑 약 200기도 있었다.

성 북서쪽의 왓 시춤에는 벽 두께가 3피트(약 90cm)에 이르는 거대한 사각 건물(몬돕)이 있고, 그 안에 너비 약 11m, 높이 약 15m의 거대한 좌불 ‘프라 아차나’가 앉아 있다. 벽 속의 좁은 계단은 한때 지붕으로 이어졌는데, 그 통로에서 부처의 전생 이야기(자타카)를 새긴 슬레이트 판 50여 장이 발견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국 선묘 작품이다.

왓 시사와이와 왓 프라파이루앙은 왕국보다 오래되었다. 두 곳 모두 12세기 말~13세기 초, 도시가 앙코르와 라보(롭부리)의 문화권에 있을 때 라테라이트로 지은 크메르 양식의 탑(쁘랑)을 지니고 있다. 왓 시사와이는 처음에는 힌두 사당이었다가 뒤에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왓 프라파이루앙은 한때 도시의 의례 중심이었고, 그 회반죽 장식은 크메르 미술에서 타이 미술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 밖에도 호수 속 섬에 스리랑카 양식의 종 모양 탑이 선 왓 사시, 탑 기단을 코끼리 조각이 둘러싼 왓 창롬과 왓 창롭, 서쪽 언덕 위에서 한 손을 들고 평원을 내려다보는 12.5m 입불상의 왓 사판힌 등이 있다.

[2]

중급

수코타이 양식: 연꽃 봉오리, 스투코, 걷는 부처

미술사가들은 13세기 말부터 15세기까지 이 왕국에서 만든 건축과 조각을 ‘수코타이 양식’이라 부른다. 이 양식은 라보를 거쳐 들어온 크메르 형식, 몬족과 북부 타이(란나)의 전통, 그리고 점점 더 커진 상좌부 승려들이 가져온 스리랑카 모델을 두루 받아들였다. 수코타이는 이를 녹여 뒷날 태국 미술이 고전으로 여기는 독자적 양식을 만들었다.

가장 알아보기 쉬운 건축 형태는 연꽃 봉오리형 탑으로, 높은 탑 꼭대기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연꽃 모양으로 부풀어 오른다. 사원은 주로 벽돌과 라테라이트로 짓고 겉에 석회 회반죽(스투코)을 입혀 인물과 장식을 빚었다. 정교한 스투코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왓 마하탓의 제자 행렬과 왓 쩨디시홍의 신과 동물 부조가 그 수준을 보여 준다.

청동과 스투코로 만든 수코타이 불상은 이상화되어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몸으로 칭송받는다. 달걀형 얼굴에 활처럼 휜 눈썹과 온화한 미소, 머리 위의 불꽃 모양 장식, 매끈한 팔다리, 몸에 착 붙은 가사가 특징이다. 유네스코는 이런 특징을 불교 경전이 부처의 초인적 몸을 묘사하는 ‘대인상(大人相, 마하푸리사락카나)’과 연결한다.

수코타이의 가장 유명한 창조물은 한 발뒤꿈치를 들고 한 팔을 흔들며 움직이는 ‘걷는 부처’다. 도성 남쪽 왓 쩨뚜폰에는 걷고, 앉고, 서고, 누운 네 자세의 거대한 스투코 불상이 있다. 이전 불교 미술에서는 드물던 걷는 자세는 태국 조각의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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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수코타이 왕국: 일어섬, 전성기, 흡수

수코타이는 왕도가 되기 훨씬 전부터 몬족·타이족·크메르 영향권의 중심지들을 잇는 길목의 교역 도시였다. 왓 시춤 비문에 따르면 1238년 무렵 두 지방 영주 포쿤 방끌랑하오와 포쿤 파므앙이 크메르식 칭호를 지닌 통치자에게서 도시를 빼앗았고, 방끌랑하오가 시인트라팃이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라 흔히 프라루앙 왕조라 부르는 왕가를 열었다. 이 사건이 전통적으로 왕국의 건국으로 여겨진다.

시인트라팃의 아들 람캄행은 13세기 말에 다스렸고 왕국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 기억된다. 그의 것으로 전하는 비문에 따르면 그는 수코타이의 영향력을 여러 도시로 넓히고, 남쪽 나콘시탐마랏의 승려들을 통해 상좌부 불교를 장려했으며, 1283년 새로운 타이 문자를 고안했다. 원나라와도 관계를 텄다. 현대 역사가들은 비문 속 지명 목록을 직접 다스린 영토가 아니라 동맹과 조공의 관계망으로 읽는다.

람캄행이 죽은 뒤 조공 도시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의 손자 리타이(마하탐마라차 1세)는 1347년 무렵부터 다스렸으며, 무엇보다 불교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우주론 저술 『트라이품 프라루앙(삼계경)』을 지었다고 전하고, 스리랑카에서 수학한 승려를 숲 사원의 주지로 초빙했으며, 1361년 몸소 출가했다. 그와 후계자들 때 정치 중심은 핏사눌록 쪽으로 옮겨 갔다.

남쪽에서 일어난 아유타야 왕국은 14세기 후반 수코타이를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연대기는 1378년 탐마라차 2세의 복속을 기록한다. 1438년 수코타이 통치자 보롬마판이 죽자 아유타야는 자국 왕세자를 이 지역에 앉혔고, 수코타이의 독자적 존재는 끝났다. 이 과정을 정복으로 볼지, 혼인과 동맹을 통한 점진적 통합으로 볼지는 논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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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종교: 상좌부 승려, 숲 사원, 브라만 의례

수코타이의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법에 따라 다스리는 불교 군주(담마라자)로 내세웠다. 상좌부 불교, 특히 태국어로 ‘랑까웡’이라 부르는 스리랑카 계통이 초빙 승려, 사원 건립, 왕실 출가를 통해 장려되었다. 비문들은 스리랑카에서 수학한 승려가 승려 수천 명을 다시 수계시킨 일, 그리고 파므앙의 손자인 왕자 시삿타가 무기를 버리고 출가해 곳곳을 다니며 성지를 복원한 일을 전한다.

승가는 두 무리로 나뉘었다. ‘마을’ 또는 도시의 승려(까마와시)는 도시 안팎의 사원에 머물며 경전 공부에 힘썼다. ‘숲’의 승려(아란야와시)는 왓 창롭이나 왓 사판힌처럼 도시 서쪽 숲속 구릉의 조용한 사원에 머물며 명상에 힘썼다. 공원의 배치에는 지금도 이 구분이 드러난다.

불교가 옛 의례를 몰아낸 것은 아니었다. 왓 시사와이의 힌두 사당은 뒤에 불교용으로 바뀌었고, 리타이는 왓 빠마무앙에 브라만 사제를 위한 사당을 짓고 커다란 시바·비슈누 청동상을 만들게 했다. 이 상들은 지금 방콕 국립박물관에 있다. 브라만 궁정 의례는 불교 신앙과 나란히 이어졌고, 오늘날 태국 왕실에서도 그렇다.

리타이가 지었다고 전하는 『트라이품 프라루앙』은 천상과 지옥과 인간 세계로 이루어진 불교의 우주, 그리고 그 안에서 업과 공덕이 차지하는 자리를 서술한다. 태국어로 쓰인 이 책은 흔히 태국어로 된 최초의 불교 철학서로 불리며, 여러 세기 동안 태국인의 우주관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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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물, 교역, 그리고 수코타이의 가마

유네스코는 수코타이의 도시들이 물을 막아 저수지·연못·수로를 만들고 홍수를 다스린 뛰어난 수리 기술자들의 터전이었다고 강조한다. 토루와 해자는 서쪽 구릉에서 쏟아지는 몬순 빗물을 늦추었고, 댐과 수로는 모아 둔 물을 도시로 끌어들였다. 주변 농지가 얼마나 비옥했는지, 따라서 왕국의 부가 농업과 숲 산물 교역 가운데 어디서 더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갈린다.

람캄행의 것으로 전하는 비문에는 통치자가 통행세를 걷지 않고 백성이 소·말·코끼리·은·금을 자유롭게 사고팔았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역사가들은 이 구절과 비문에 나오는 도시들의 위치를 바탕으로, 동쪽 메콩강, 북쪽 루앙프라방, 서쪽 몬족 항구 마르타반과 페구, 남쪽 타이만으로 뻗은 육상 교역로를 복원해 왔다.

수코타이는 도자기 생산지이기도 했다. 왓 프라파이루앙 해자 옆 투리앙 가마터에서는 벽돌 가마 수십 기가 확인되었고, 방사성탄소 연대는 14세기 중엽부터 15세기 이후까지의 활동을 가리킨다. 흔히 물고기나 꽃, 소용돌이 원을 검은색으로 그린 이곳의 사발과 항아리를 수코타이 도자라고 부른다. 가마 200기 가까이가 확인된 시사차날라이의 훨씬 큰 가마 단지는 ‘사완칼록’ 또는 ‘상칼록’이라는 이름으로 수출된 청자와 여러 도자를 만들었다.

이 도자기들은 멀리까지 퍼졌다. 타이만의 난파선과 자와·수마트라·필리핀·스리랑카·류큐 제도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도자 산업은 수코타이 지역이 아시아 해상 교역망과 이어져 있었음을 보여 주며, 가마의 연대는 발굴로 계속 다듬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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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왕국 이후: 버려짐, 재발견, 공원

수코타이는 아유타야 치하에서도 사람이 살았지만, 특히 버마와의 전쟁 동안 쇠퇴했다. 1583년 이 지역 주민들이 남쪽으로 옮겨졌고, 1760년대의 전쟁을 거치며 옛 도시는 거의 비었다. 1793년 라마 1세는 동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새 수코타이를 세웠는데, 이것이 지금 주도의 전신이다.

초기 방콕 왕들은 폐허가 된 북부 사원들에서 불상을 새 수도로 옮겼다. 가장 유명한 것은 원래 수코타이 왓 마하탓의 본존이었고 지금은 방콕 왓 수탓에 있는 거대한 청동불 ‘프라 시사카무니’다. 유네스코는 라마 1세가 보호를 위해 수코타이에서 불상 2천여 구를 옮겼다고 적는다.

1833년 당시 승려였던 몽꿋 왕자(훗날 라마 4세)가 수코타이를 찾아, 뒤에 ‘수코타이 비문 제1호’라 불리는 비석과 마낭카실라 돌 옥좌를 발견해 방콕으로 가져갔다. 1907년 왕세자 와치라웃(훗날 라마 6세)은 북부 옛 도시들을 답사하고 그 기록을 펴내 수코타이에 대한 역사적·고고학적 관심을 북돋웠다.

예술청의 체계적 복원은 1961년에 시작되었고, 이듬해인 1962년 이 일대가 법적 보호를 받게 되었다. 역사공원은 1988년 7월 공식 개원했고, 1991년 12월 12일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964년 공원 안에 문을 연 람캄행 국립박물관은 수코타이와 이웃 도시들에서 나온 조각·도자기 등 출토품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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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람캄행 비문과 위작 논쟁

수코타이 비문 제1호는 높이 약 1.15m의 네모난 실트암 기둥으로, 1833년 몽꿋이 발견했으며 본문에 따르면 1292년의 것이다. 람캄행의 젊은 시절을 1인칭으로 적은 부분, 번영하는 왕국과 정의로운 왕에 대한 묘사, 그리고 람캄행이 1283년 ‘이 타이 문자’를 고안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문자는 뒷날의 태국 문자와 달리 모든 모음을 자음과 같은 줄에 쓴다. 태국 학자들과 조르주 세데스가 단계적으로 해독했고, 1924년 세데스의 권위 있는 판본이 나오면서 현대 수코타이 상의 토대가 되었다. 유네스코는 2003년 이 비문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다.

1987년 역사가 마이클 비커리는 이 비문을 필트다운인 날조 사건에 빗댄 논문을 발표하며 문자·어휘·내용에 대한 의문을 한데 모았다. 미술사가 피리야 끄라이릭은 한발 더 나아가 몽꿋 자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태국사의 상당 부분을 다시 써야 함을 뜻했기에 여러 해 동안 치열한 논쟁과 특집 간행물, 학술 대회를 불러왔고, 대중의 반응은 때로 적대적이었다.

1990년 주사전자현미경 분석은 이 비석의 풍화 정도가 비슷한 연대의 다른 수코타이 비문들과 같다는 결과를 냈다. 지금 대부분의 전문가는 비문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진본이라고 보지만, 위작설을 지지하는 일부 학자는 여전히 납득하지 않는다. 특히 문자와 이상 사회를 다룬 대목이 뒷날, 예컨대 리타이가 할아버지를 기리려고 덧붙이거나 지은 것인지를 두고 논의가 이어진다.

논쟁은 훨씬 풍성한 연구를 낳았다. 최근의 독해는 비문을 투명한 사실 기록보다 짜임새 있게 구성된 텍스트로 다룬다. 한 학자는 비문 속 왕의 모습을 팔리 경전의 이상적 전륜성왕상과 대조했고, 다른 학자들은 도시 목록을 왕 개인에 대한 충성 관계로, 자유 교역 구절을 쌀보다 교역이 왕국의 주된 수입원이었다는 증거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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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최초의 타이 수도’? 국가사 속의 수코타이

20세기 초 수코타이는 수코타이–아유타야–톤부리–방콕으로 이어지는 한 줄기 타이 수도 계보의 첫머리에 놓였다. 이 생각은 1907년 답사 뒤 왕세자 와치라웃이 내놓고 1910년대 담롱 라차누팝 왕자가 발전시켰으며, 학교 교과서의 표준 서술이 되었다. 수코타이는 타이인의 자유와 아버지 같은 왕권이 꽃핀 황금기로 그려졌고, 때로는 크메르의 영향을 받았다는 아유타야와 대비되었다.

1238년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크메르 지배로부터의 타이족 해방으로 전해졌다. 최근 연구는 민족적 틀과 크메르 행정 지배라는 가정 모두를 의심한다. 앙코르의 행정 지배가 이렇게 서쪽까지 미쳤다는 증거가 거의 없고, 충돌한 양쪽 모두 앙코르와 연줄이 있는 지방 영주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베이커와 파숙은 이 사건을 민족 봉기가 아니라 앙코르와 연결된 한 영주가 다른 영주를 이긴 일로 읽는다.

수코타이의 정치적 쓰임새는 시대마다 달랐다. 백성과 가까운 아버지 같은 왕의 모습은 1932년 이후 태국 민주주의의 씨앗으로, 냉전기에는 외래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의 본보기로, 급진적 저술가들에게는 앙코르로부터의 해방의 시작으로 인용되었다. 반면 시삭 완리뽀돔 같은 고고학자는 수코타이를 이 지역 여러 초기 국가 가운데 하나로 보며, 예술청의 최근 간행물도 ‘최초의 타이 왕국’이라는 표현에서 물러났다.

축제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보인다. 러이끄라통 축제는 흔히 수코타이의 궁녀 낭 놉파맛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역사가들은 그 이야기가 방콕 시대 초기의 시에서 나왔음을 밝혔다. 베이커와 파숙은 이를 문학적 허구라 부른다. 비문 논쟁과 마찬가지로 이런 발견은 수코타이의 중요성을 줄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유적이 국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어떻게 쓰여 왔는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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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보존과 진정성

유네스코의 평가는 수코타이의 완전성이 각 도시에 서 있는 많은 건조물뿐 아니라, 세 도시를 이은 저수지·수로·도로 같은 경관 공학에도 있다고 강조한다. 또 진행 중인 발굴 사업이 완전성을 위협하고 있으며, 라마 1세가 옮긴 불상과 몽꿋이 가져간 비문과 옥좌처럼 과거에 유물이 반출되었다는 점도 적는다.

유적 대부분은 불교 사원이었고, 상당수는 수백 년 동안 전통 재료로 관리·수리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예술청이 모든 보존 작업을 통제하며, 공원 경계가 곧 보호 구역이다. 보호·보존·해설을 위한 것 말고는 어떤 개발도 허용되지 않고 통과 차량도 없다.

벽돌과 스투코로 된 유적의 복원은 까다로운 물음을 던진다. 무너진 벽을 보강하고 탑 첨탑을 다시 세우고 불상을 수리하면 유적을 이해하기 쉽고 안전하게 만들 수 있지만, 현대의 해석을 덧씌울 수도 있다. 공원의 일부 불상은 크게 재구성되었다. 1961년 복원이 시작되기 전에 유적을 떠난 스투코 두상을 연구해 원래 조각의 연대를 가늠하는 연구자들도 있는데, 이는 얼마나 많은 것이 사라지거나 바뀌었는지를 일깨운다.

새로운 과학 연구는 그림을 계속 바꾸고 있다. 가마터의 방사성탄소·열발광 연대, 도시 북서쪽 구릉의 고대 제철로 조사, 경계석에 쓰인 돌의 지질 분석은 수코타이의 경제와 기술이 옛 교과서 이야기보다 더 복잡했고 그 역사도 더 길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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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수코타이 양식
연꽃 봉오리형 탑, 스투코 장식, 이상화된 불상으로 이루어진 이 왕국 고유의 미술·건축. 태국의 고전 양식으로 여겨진다.
걷는 부처
한 발뒤꿈치를 들고 움직이는 모습의 불상. 수코타이 조각을 대표하는 창조물.
담마라자(법왕)
불법(담마)으로 다스리는 정의로운 불교 군주의 이상. 수코타이 왕권 이미지의 핵심.
물의 도시
큰 강이 없는 곳에서 댐·수로·해자·저수지로 물을 모으고 관리했다.
만달라 정치체
고정된 국경보다 중심을 둘러싼 충성 관계망으로 권력을 이해하는 틀. 수코타이 ‘제국’에 대한 현대적 해석.
논쟁의 비문
비문 제1호는 태국사를 빚었지만 일부 또는 전부가 후대 것이라는 논쟁을 겪었고, 그 논쟁이 연구를 풍성하게 했다.
유산과 국가
수코타이는 20세기에 ‘최초의 타이 수도’가 되었고, 역사가들은 이제 그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핀다.

기록

  1. 1191년 — 앙코르 비문이 23개 도시에 불상을 보냈다고 기록. 그 한 유형이 왓 프라파이루앙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2. 1238년 — 시인트라팃의 수코타이 왕국 건국 전통 연대(몇 년 뒤로 보는 역사가도 있다).
  3. 1283년 — 비문 제1호가 전하는 람캄행의 새 타이 문자 창제 연도.
  4. 1292년 — 람캄행의 것으로 전하는 수코타이 비문 제1호의 연대.
  5. 1347년 — 리타이(마하탐마라차 1세) 즉위. 불교의 후원자이자 『트라이품 프라루앙』의 저자.
  6. 1361년 — 리타이 출가. 출가한 것으로 알려진 첫 시암 왕.
  7. 1378년 — 탐마라차 2세가 팽창하는 아유타야 왕국에 복속.
  8. 1438년 — 보롬마판 사후 아유타야가 왕세자를 이 지역에 앉힘. 수코타이의 독자적 존재가 끝남.
  9. 1793년 — 라마 1세가 동쪽 12km에 새 수코타이를 세움. 옛 도시는 버려짐.
  10. 1833년 — 몽꿋 왕자가 왕궁 언덕에서 비문 제1호와 돌 옥좌를 발견.
  11. 1961년 — 예술청이 옛 도시 복원에 착수.
  12. 1988년 — 수코타이 역사공원 공식 개원.
  13. 1991년 — 시사차날라이·깜팽펫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14. 2003년 — 람캄행 비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용어 풀이

왓(wat)
태국의 불교 사원 또는 사원 경내.
스투파(쩨디)
흔히 사리를 모시며 부처와 그 가르침을 나타내는 탑.
쁘랑
크메르 사원 건축에서 온, 옥수수 모양의 높은 탑.
몬돕(만다파)
성상을 모시는 네모난 건물. 왓 시춤의 거대 불상을 둘러싼 건물이 그 예.
스투코
벽돌 위에 인물과 장식을 빚어 붙인 석회 회반죽.
라테라이트
공기에 닿으면 단단해지는 붉은 철분질 돌. 초기 수코타이 탑에 쓰였다.
상좌부 불교
‘장로들의 길’.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대륙부에서 주류를 이루는 불교.
자타카
부처의 전생 이야기. 왓 시춤의 슬레이트 판에 새겨졌다.
청자(셀라돈)
회녹색 유약을 입힌 석기. 수코타이 지역 청자는 널리 수출되었다.
프라 앗타롯
18완척 높이라고 하는 높은 입불상의 한 유형. 수코타이의 여러 사원에 있다.

묻고 답하기

‘수코타이’는 무슨 뜻인가요?

산스크리트어·팔리어에서 온 말로, 보통 ‘행복의 새벽’이라고 옮겨요.

수코타이가 최초의 태국 왕국인가요?

오랫동안 그렇게 가르쳤지만, 지금 역사가들은 수코타이를 여러 초기 타이족 국가 가운데 하나로 봐요. 북부 산지 등에는 그보다 먼저 또는 같은 시기에 다른 타이족 나라들이 있었어요.

걷는 부처는 무엇이 특별한가요?

이전의 불상은 대부분 앉거나 서거나 누워 있어요. 수코타이 조각가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팔을 흔들며 걷는 부처를 만들어 부드러운 움직임을 느끼게 했어요.

도시는 왜 버려졌나요?

수코타이가 아유타야에 합쳐진 뒤 정치 중심이 옮겨 갔어요. 버마와의 전쟁과 주민 이주로 도시가 비었고, 1793년 동쪽에 새 도시가 세워졌어요.

람캄행 비문은 가짜인가요?

1980년대 말 일부 학자는 훨씬 뒤에, 심지어 몽꿋 왕이 만들었다고 주장했어요. 과학 분석과 추가 연구로 대부분의 전문가는 적어도 일부는 진짜라고 보지만, 논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에요.

왜 다른 두 도시와 함께 등재되었나요?

시사차날라이와 깜팽펫은 수코타이와 언어·문자·법·미술·물 관리 체계를 함께했고 큰길로 이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유네스코는 세 도시를 하나의 역사 유산으로 다뤄요.

러이끄라통은 수코타이에서 시작되었나요?

흔히 그렇게 말하지만, 역사가들은 궁녀 놉파맛의 전설이 방콕 시대 초기에 쓰인 것임을 밝혔어요. 축제가 수코타이에서 시작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Historic Town of Sukhothai and Associated Historic Towns (수코타이 역사 도시와 관련 역사 도시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2. Sukhothai Historical Park. Wikipedia
  3. Sukhothai Kingdom. Wikipedia
  4. Ram Khamhaeng Inscription. Wikipedia
  5. Maha Thammaracha I (Li Thai). Wikipedia
  6. Si Satchanalai. Wikipedia
  7. Loy Krathong. Wikipedia
  8. Chris Baker, Pasuk Phongpaichit, A History of Ayutthaya: Siam in the Early Modern Wor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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