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흑사병

黑死病 · 라틴어 magna mortalitas, pestis, pestilentia(‘대사망’, ‘역병’) — ‘검은 죽음’이라는 이름은 몇 세기 뒤에 붙었다

1346–1353년 · 시칠리아 메시나 (시칠리아 왕국) — 서유럽 첫 주요 상륙지

한 문장으로

흑사병은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 일으킨 페스트 범유행으로, 1346년부터 1353년까지 서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를 휩쓸어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가량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흑사병
이미지: Pierart dou Tielt (fl. 1340-1360)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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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680년 전, 무서운 병이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에 퍼졌어요. 사람들은 나중에 이 병을 ‘흑사병’, 곧 ‘검은 죽음’이라고 불렀어요. 몇 년 사이에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답니다.

이 병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세균 때문에 생겼어요. 세균은 벼룩 몸속에 살았고, 벼룩은 쥐 같은 동물에게 붙어 살았어요. 병든 벼룩이 사람을 물면 세균이 몸속으로 들어갔지요. 아픈 사람이 기침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옮기기도 했어요.

그때 의사들은 세균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어떤 사람은 나쁜 공기 탓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별자리 탓, 또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생기는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몹시 무서워했어요.

병은 상인들이 다니던 길과 뱃길을 따라 퍼졌어요. 배는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물건을 날랐는데, 쥐와 벼룩과 아픈 선원도 함께 실어 날랐어요. 그래서 병이 흑해에서 이탈리아로, 다시 프랑스와 영국, 그보다 더 먼 곳까지 번졌어요.

어떤 마을에서는 사람들의 절반이 죽었어요. 겁에 질린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와 다른 이웃, 특히 유대인을 탓하며 공격했어요. 정말 잔인하고 잘못된 일이었어요. 유대인은 아무 잘못이 없었거든요.

병이 지나간 뒤에는 농사짓고 일할 사람이 모자라서, 일꾼들이 품삯을 더 달라고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오늘날 과학자들은 옛 뼈에서 이 세균의 유전자를 찾아냈고, 지금은 빨리 치료하면 항생제로 페스트를 고칠 수 있어요.

한눈에 보기

시기
대유행 1346~1353년. 이후 18~19세기까지 되풀이해 재발
지역
서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 흑해·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탈리아·프랑스·이베리아·잉글랜드·스칸디나비아·러시아까지, 그리고 이집트·레반트·아라비아·마그레브
원인
페스트균(Yersinia pestis). 집단 매장지 유골의 고대 DNA로 확인(2010~2011)
병의 형태
선페스트(림프절이 붓고 주로 벼룩이 옮김), 폐페스트(폐 감염, 비말로 전파), 패혈성 페스트(혈액 감염)
사망자
정확한 수치는 없다. 유럽 인구의 약 25~60%로 추정이 갈리며, 카이로와 이집트에서는 약 3분의 1~40%
당대의 이름
‘대사망’, ‘역병’, ‘큰 죽음’. ‘검은 죽음’이라는 이름은 스칸디나비아 연대기 작가들에게서 퍼졌고 영어에서는 1755년에 처음 확인된다
주요 증언자
조반니 보카치오(피렌체), 아뇰로 디 투라(시에나),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콘스탄티노폴리스), 알마크리지(카이로), 이븐 바투타(시리아)
남긴 영향
노동력 부족과 임금 갈등, 잉글랜드 노동자 조례(1351), 유대인 박해, 새로운 종교 운동, 검역 제도의 기원

쉬움

흑사병이란 무엇인가

흑사병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범유행 가운데 하나다. 범유행(팬데믹)은 전염병이 여러 나라에 걸쳐 아주 넓은 지역으로 동시에 퍼지는 것을 말한다. 1346년부터 1353년까지 오늘날 페스트라고 부르는 병이 흑해 일대와 지중해,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를 휩쓸었다. 사망자 추정치는 크게 엇갈리지만, 흔히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죽었고 어떤 지역은 절반 넘게 잃었다고 본다.

당시 사람들은 이 병을 ‘흑사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라틴어로 글을 쓴 이들은 페스티스·페스틸렌티아(역병), 에피데미아, 모르탈리타스, 곧 ‘사망’이나 ‘큰 죽음’이라고 적었다. ‘검은 죽음’이라는 이름은 15~16세기 스웨덴·덴마크 연대기 작가들을 거쳐 널리 쓰였고, 영어에는 18세기에야 들어갔다. 여기서 ‘검다’는 말은 피부색보다 ‘끔찍한’, ‘치명적인’이라는 뜻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흑사병은 한 번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었다. 역사가들이 ‘제2차 페스트 범유행’이라 부르는 긴 흐름의 첫 번째이자 가장 파괴적인 물결이었다. 1353년 이후에도 페스트는 400년 넘게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 거듭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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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세균, 벼룩, 그리고 설치류

페스트는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라는 세균이 일으킨다. 이 이름은 흑사병보다 500여 년 뒤인 1894년 홍콩에서 이 세균을 찾아낸 과학자 알렉상드르 예르생에게서 왔다. 페스트균은 본래 마멋이나 몇몇 쥐 같은 야생 설치류와, 그 피를 빠는 벼룩 사이에서 산다.

벼룩이 감염된 동물의 피를 빨면 세균이 벼룩의 장 속에서 불어나 장을 막아 버린다. 굶주린 벼룩은 자꾸만 물고, 물 때마다 세균을 상처에 토해 낸다. 설치류가 죽으면 벼룩은 새 숙주를 찾는데, 그 가운데 사람도 있다. 페스트는 이렇게 동물에서 사람으로 건너온다.

페스트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가장 흔한 선페스트는 사타구니·겨드랑이·목의 림프절이 부어올라 ‘가래톳(bubo)’이라는 아픈 멍울이 생긴다. 폐페스트는 폐가 감염되어 기침으로 다른 사람에게 옮을 수 있다. 패혈성 페스트는 세균이 혈액을 타고 퍼지는 것으로, 당시에는 거의 모두 죽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오늘날 페스트가 일찍 발견하면 흔한 항생제로 치료되지만, 치료하지 않은 폐페스트는 하루 안에도 목숨을 앗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1][9][10]

쉬움

병은 어떻게 퍼졌나

14세기 상인들은 비단·곡물·향신료·모피, 그리고 노예로 팔린 사람들을 싣고 흑해와 지중해를 오갔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흑해 북쪽 해안에 무역항을 두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 크림반도의 페오도시야인 카파다. 전통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1346~1347년 무렵 킵차크 칸국(금장 칸국)의 자니베크 칸이 카파를 포위하고 있을 때 이곳에서 페스트가 유럽으로 넘어왔다.

배는 흑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병을 옮겼고, 병은 1347년 여름 그곳에 닿았다. 1347년 10월에는 제노바 갤리선들이 시칠리아에 병을 가져왔다. 1348년 1월에는 제노바·베네치아·마르세유에 이르렀고, 곧 피사를 거쳐 북이탈리아로 번졌다. 1348년 6월까지 프랑스·에스파냐·포르투갈·잉글랜드가 차례로 덮쳤다. 1348~1350년에는 독일·스코틀랜드·스칸디나비아로 퍼졌고(1349년 배 한 척이 노르웨이에 병을 들여왔다), 1352년 북러시아, 1353년 모스크바에 이르렀다.

같은 시기 페스트는 남쪽과 동쪽으로도 퍼졌다. 1347년 가을까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1348년에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카이로에 닿았다. 가자·다마스쿠스·알레포를 거쳤고, 시칠리아에서 온 배를 타고 튀니스에 들어왔으며, 순례자들을 따라 메카에까지 갔다. 교역이 드문 알프스 외딴 마을 같은 일부 지역은 최악의 피해를 비켜 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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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사람들이 보고 겪은 것

목격자들은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에 ‘사과만 한’, 또는 ‘달걀만 한’ 멍울이 솟고, 이어 피부에 검은 반점이 나타나며, 고열과 피를 토하는 증상이 뒤따랐다고 적었다. 피렌체의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는 『데카메론』 첫머리에서 이런 증상을 묘사했다. 병에 걸린 사람은 대부분 며칠 만에 죽었다.

시에나의 연대기 작가 아뇰로 디 투라는 병이 ‘숨결과 눈길로’ 옮는 것 같아 아버지가 자식을, 아내가 남편을 버렸다고 썼다. 죽은 이들을 묻으려고 큰 구덩이를 팠고, 자신도 다섯 자녀를 제 손으로 묻었다고 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 모두가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고 한다.

병자를 돌보고 종부성사를 베풀던 수도사·수녀·사제들이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많은 곳에서 무덤 파는 사람이 모자라 시신을 집단 매장지에 묻었다. 런던 이스트스미스필드 같은 매장지는 고고학자들이 발굴했고, 그곳의 유골은 과학자들에게 이 병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1][8]

중급

배경: 이미 흔들리던 세계

흑사병은 건강하고 안정된 세계를 덮친 것이 아니었다. 유럽은 이미 1315~1317년 대기근을 겪었고, 많은 사람이 제대로 먹지 못했다. ‘중세 후기의 위기’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기후 변화, 흉작,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 같은 전쟁, 경제적 압박이 겹쳤다고 본다. 영양 부족이 사람들의 저항력을 떨어뜨렸을 수 있다.

13세기부터 14세기 초는 먼 지역 사이의 연결이 유난히 촘촘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몽골 제국과 흑해 북쪽 초원을 다스린 킵차크 칸국 같은 후계 국가들은 중앙아시아 초원과 지중해 교역을 이어 주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은 카파와 타나 같은 항구를 차지했다. 이 교역망은 물건과 사람과 동물을, 그리고 아마도 페스트균을 먼 곳까지 실어 날랐다.

카파 포위전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되었다. 이탈리아 공증인 가브리엘레 데 무시는 페스트에 시달리던 포위군이 시신을 투석기로 성벽 너머에 던졌고, 달아난 제노바인들이 병을 퍼뜨렸다고 기록했다. 이 이야기는 흔히 초기 생물학전의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데 무시가 현장에 없었고 그의 이야기가 흑해 지역의 다른 증거와 어긋나며, 포위선을 넘나든 쥐와 벼룩, 또는 전쟁 뒤 재개된 곡물 수송으로도 전파를 설명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6]

중급

얼마나 죽었나

정확한 수치는 없다. 예컨대 잉글랜드에서는 1086년 둠스데이 북과 1377년 인두세 사이에 인구 조사가 없었고, 유럽의 추정치 대부분은 성직자 명부·세금 대장·유언장 같은 부분 기록에서 끌어낸 것이다. 그래서 유럽 사망률 추정은 약 25%에서 60%까지 벌어진다. 역사가 올레 요르겐 베네딕토우는 유럽 전체 사망률을 60% 안팎으로 보았고, 다른 학자들은 3분의 1에서 절반 사이를 선호한다.

지역 수치는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1338년 11만~12만 명이던 피렌체 인구는 1351년 약 5만 명이 되었다. 약 10만 명이던 파리 인구의 절반이 죽었다고 전한다. 함부르크와 브레멘에서는 적어도 60%가 목숨을 잃었다. 카이로에서는 여덟 달 사이에 주민의 3분의 1에서 40%가 죽었을 수 있고, 이집트 전체로는 약 40%를 잃었다.

피해는 고르지 않았다. 2022년 유럽 각지의 꽃가루 기록으로 농업 변화를 추적해 인구 감소를 가늠한 연구는 스칸디나비아·프랑스·서부 독일·그리스·중부 이탈리아에서 심각한 감소의 흔적을 찾았지만, 중·동부 유럽 일부와 이베리아, 아일랜드에서는 농업이 계속 성장했음을 보여 주었다. 이런 연구는 모든 지역이 똑같이 당했다고 가정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1][12]

중급

공포와 희생양: 채찍질 고행단과 유대인 학살

병을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유럽인은 의미를, 그리고 탓할 누군가를 찾았다. 파리 대학 의학부는 행성들의 합(合)이 공기를 오염시켰다고 보았다. 많은 사람이 페스트를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로 여겼다. 1349년에는 채찍질 고행단이 마을에서 마을로 행진하며 공개적으로 제 몸을 채찍질해 회개를 드러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1349년 10월 20일 칙서로 이 운동을 단죄했다.

가장 어두운 반응은 유대인에 대한 폭력이었다. 유대인들은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누명을 썼고, 고문 끝에 거짓 ‘자백’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페스트와 관련된 첫 학살은 1348년 4월 툴롱에서 일어났고, 이어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여러 도시에서 폭력이 터졌다. 134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전역과 그 너머로 학살이 번졌다. 스트라스부르에서는 1349년 2월 14일 약 2,000명의 유대인이 불태워졌는데, 이때는 페스트가 아직 그 도시에 닿지도 않았다. 프랑크푸르트·마인츠·쾰른·보름스·슈파이어를 비롯한 수많은 도시의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한 추정에 따르면 1351년까지 큰 공동체 60곳과 작은 공동체 150곳이 사라졌다.

클레멘스 6세는 1348년 두 차례 칙서를 내어, 페스트가 유대인도 죽이고 유대인이 살지 않는 곳도 덮치므로 유대인이 원인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의 주치의 기 드 숄리아크도 같은 견해였다. 그러나 아비뇽 밖에서 교황의 보호는 힘이 약했고, 살해된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해 이익을 본 통치자들도 있었다. 살아남은 많은 이들은 동쪽으로 피신했고,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3세가 이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이후 여섯 세기 동안 동유럽이 유대인 삶의 큰 중심지가 된 까닭 가운데 하나다. 곳에 따라 한센병 환자·외국인·걸인 등도 표적이 되었다.

[4][5][1]

중급

유럽 너머: 이슬람 세계

흑사병은 흔히 유럽의 이야기로 전해지지만, 이집트·시리아의 맘루크 술탄국과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도 똑같이 큰 타격을 입었다. 카이로에서는 어린 술탄 안나시르 하산이 도시를 떠났고, 나일강이 시신으로 막혔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가 알마크리지는 뒷날 끝없이 일하던 무덤 파는 이들과 염습하는 이들을 묘사했다. 페스트는 그 뒤 150년 동안 쉰 번 넘게 카이로에 돌아왔다.

무슬림 학자와 의사들은 대응을 두고 논쟁했다. 어떤 이들은 신이 내린 병을 피하거나 고치려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고, 다른 이들은 예방책과 치료법을 권했으며 유럽 의사들처럼 고대 그리스 의학서에 기댔다. 이븐 알와르디와 알마크리지 같은 아랍 역사가들은 역병이 동쪽 몽골의 땅에서 왔다고 믿었다.

북아프리카의 이름난 두 저술가가 이 시기를 살아 냈다.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1348년 페스트가 번지던 시리아에 있었고, 귀향길에 거의 텅 빈 마라케시를 보았다. 당시 튀니스의 십 대 소년이던 역사가 이븐 할둔은 부모와 많은 스승을 잃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경험이 훗날 『무캇디마』에서 사회와 도시의 흥망을 성찰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1][3]

중급

페스트 이후: 땅, 임금, 반란

너무 많은 사람이 죽자 일손은 귀해지고 땅은 남아돌았다.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었고, 어떤 곳에서는 지대가 폭락했다. 지주들은 소작인을 붙잡아 두려고 노동 부역을 화폐 지대로 바꾸었다. 그러나 물가도 올라 많은 임금 노동자의 살림이 곧바로 나아지지는 않았고, 실질 임금이 얼마나 빨리 올랐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통치자들은 법으로 옛 질서를 붙잡으려 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1349년 노동자 칙령을 내렸고, 의회는 1351년 노동자 조례로 이를 뒷받침했다. 이 법들은 임금을 페스트 이전 수준에 묶고,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노동을 강제하며, 더 나은 품삯을 찾아 옮겨 다니는 것을 제한하려 했다. 이 법이 낳은 갈등은 전쟁 세금과 겹쳐 1381년 잉글랜드 농민 반란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많은 역사가는 흑사병이 서유럽의 농노제를 약화하고 영주와 농민의 관계를 새로 짜는 데 한몫했다고 보지만, 결과는 지역마다 달랐다. 교회도 달라졌다. 많은 교구가 사제를 잃었고 작은 수도원들은 문을 닫았다. 길게 보면 유럽 인구는 16세기에야 14세기 초 수준을 되찾았다.

[7][1]

중급

문화, 신앙, 기억

페스트는 문학과 예술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1348~1353년 무렵 쓰인 것으로 보이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전염병을 틀로 삼는다. 젊은이 열 명이 페스트가 덮친 피렌체를 떠나 별장으로 피신해 열흘 동안 백 편의 이야기를 나눈다. 많은 벗을 잃은 페트라르카는 ‘행복한 후손’은 자신의 증언을 꾸며 낸 이야기로 여길 것이라고 썼고, 몇 해 뒤에는 보카치오에게 그 재앙이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고 탄식했다.

종교 생활도 바뀌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처음의 ‘종교적 마비’ 뒤에 더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신심이 뒤따랐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신심회와 길드가 생겨났고, 그리스도의 상처와 성모에 대한 공경이 깊어졌으며, 교회에 화려한 봉헌물이 쏟아졌다. 미술사가들은 페스트 시기와 중세 후기 미술에서 죽음과 필멸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을 연결하기도 하지만, 이런 주제에는 페스트 말고도 여러 원인이 있었다.

오래 남은 유산 가운데 하나는 공중보건이다. 1377년 도시국가 라구사(오늘날 두브로브니크)는 페스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30일 동안 격리하도록 했다. 이 기간은 뒤에 40일로 늘어났고, 이탈리아어 ‘콰란타(40)’에서 ‘검역(quarantine)’이라는 말이 나왔다. 도시들은 차츰 보건 위원회, 페스트 병원, 유행기 교역·여행 규칙을 갖추어 갔다.

[8][3][1]

심화

어디서 시작되었나: 기원 논쟁

오랫동안 많은 책은 흑사병이 중국에서 시작해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왔다고 설명했다(한국어 위키백과에도 이런 설명이 남아 있다). 이 견해는 지금 강하게 도전받고 있다. 원·명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1340~1370년 사이 중국 인구가 크게 줄었는데도 14세기 중국에서 페스트 범유행을 가리키는 구체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 감소의 상당 부분은 전쟁과 기근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올레 베네딕토우는 카스피해 부근의 페스트 자연 병소를, 존 노리스는 쿠르디스탄을 기원지로 제안했다. 모니카 그린은 페스트균의 여러 계통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퍼졌다고 보아, 지역마다 증거가 달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최근 가장 중요한 증거는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호수 근처 추이 계곡에서 나왔다. 이곳의 동방교회(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인 묘비에는 시리아 문자로 1338~1339년 ‘역병’으로 인한 죽음이 급증했다고 새겨져 있다. 2022년 마리아 스피루가 이끈 연구진은 카라지가치와 부라나 묘지에 묻힌 일곱 사람의 고대 DNA를 『네이처』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페스트균 유전체를 복원했고, 이 균주가 범유행과 함께 일어난 페스트균 계통 대분화의 가장 가까운 공통 조상이라고 밝혔다. 이는 14세기 초 중앙유라시아, 넓게는 톈산 지역에서 흑사병이 비롯되었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이 발견으로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 1346년 직전 조상 균주가 어디에 돌고 있었는지는 보여 주지만, 페스트균이 언제 어떻게 톈산에서 흑해까지 갔는지, 다른 지역을 먼저 거쳤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이제 논쟁은 유전학에 설치류 병소의 생태 모델, 기후 자료, 라틴어·그리스어·아랍어·페르시아어·시리아어·한문 문헌의 꼼꼼한 읽기를 결합해 이루어진다.

[11][1][2]

심화

증거와 방법: 연대기에서 고대 DNA까지

20세기 상당 기간 일부 학자들은 흑사병이 과연 페스트였는지 의심했다. 놀라운 전파 속도, 추운 북유럽에서의 확산, 쥐가 떼죽음한 고고학적 흔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다른 병이 원인이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대체로 고대 DNA가 매듭지었다. 2010년 헨슈 등은 유럽 여러 집단 매장지 유골의 치아에서 페스트균을 검출했고, 2011년 보스 등은 런던 이스트스미스필드 묘지에서 얻은 초안 유전체를 발표해 흑사병 균주가 오늘날 대부분 균주의 조상임을 보였다.

아직 논쟁 중인 것은 전파 방식이다. 1890년대 이후 인도에서 정립된 고전 모델은 검은쥐 → 쥐벼룩 → 사람으로 이어진다. 일부 연구자들은 사람벼룩과 몸니, 또는 폐페스트의 사람 간 직접 전파가 문헌에 기록된 속도와 계절 양상을 더 잘 설명한다고 본다. 쥐만이 아니라 여러 동물이 관여했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연구자도 있다. 어느 대안도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고, 곳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이 우세했을 수 있다.

문헌 사료는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연대기 작가들은 숫자를 부풀리거나 문학적 모델을 빌려 쓰곤 했다.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는 투키디데스의 아테네 역병 서술을 본떠 기록했고, 프루아사르의 ‘세상의 3분의 1이 죽었다’는 말은 요한 묵시록을 되울린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연대기를 세금 기록, 장원 법정 기록, 유언장, 성직자 명부, 고고학, 꽃가루 같은 환경 자료와 교차 검토한다. ‘흑사병’이라는 이름 자체가 후대의 명칭이며, 최근 연구는 이 범유행을 순전히 유럽의 사건이 아니라 여러 지역을 가로지른 사건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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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범유행(팬데믹)
매우 넓은 지역과 여러 집단에 동시에 퍼지는 전염병. 흑사병은 19세기까지 이어진 제2차 페스트 범유행의 첫 물결이었다.
인수공통감염병
동물에서 사람으로 건너오는 병. 페스트는 야생 설치류와 벼룩 사이에 늘 존재하다가 설치류 무리가 무너질 때 사람에게 넘어온다.
교역망과 질병
물건을 나르던 뱃길과 대상로가 쥐·벼룩·병든 여행자도 실어 날랐다. 그래서 항구 도시가 먼저 당했다.
희생양 만들기
재난의 책임을 소수자에게 돌리는 것. 교황이 무죄를 선언했는데도 유대인은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누명을 쓰고 수백 곳의 공동체에서 학살당했다.
노동력 부족
일꾼이 크게 줄자 살아남은 이들의 협상력이 커졌고, 임금 통제법과 사회 갈등이 뒤따랐으며, 길게는 유럽 일부에서 농노제가 약해졌다.
검역
감염 지역에서 온 여행자를 격리하는 제도. 1377년 라구사의 30일 규정이 처음 기록되었고 뒤에 40일로 늘었다.
고대 DNA
옛 유골, 특히 치아에서 얻은 유전 물질. 페스트균이 원인임을 확인하고 균주를 중앙유라시아까지 추적했다.

기록

  1. 1315년 — 대기근(1315~1317)이 시작되어 페스트 수십 년 전부터 유럽이 약해진다.
  2. 1338년 — 이식쿨 호수 근처 묘비들에 1338~1339년 ‘역병’으로 인한 죽음이 기록된다. 훗날 고대 DNA로 페스트균과 연결된다.
  3. 약 1346년 — 크림반도의 제노바 무역항 카파를 포위한 킵차크 칸국 군대에 페스트가 번진다.
  4. 1347년 — 페스트가 여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가을까지 알렉산드리아, 10월에 시칠리아에 이른다.
  5. 1348년 — 1월 제노바·베네치아·마르세유, 6월까지 프랑스·이베리아·잉글랜드, 그해 카이로에 이른다. 클레멘스 6세가 유대인을 변호하는 칙서를 낸다.
  6. 1349년 — 스트라스부르에서 유대인 약 2,000명 학살(2월 14일). 채찍질 고행단이 퍼지고 클레멘스 6세가 이를 단죄한다(10월 20일). 에드워드 3세가 노동자 칙령을 내린다.
  7. 1351년 — 잉글랜드 노동자 조례가 임금을 페스트 이전 수준에 묶으려 한다.
  8. 1353년 — 페스트가 모스크바에 이르고 첫 대유행이 끝난다. 이 무렵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완성한다.
  9. 1377년 — 라구사(두브로브니크)가 페스트 지역에서 온 사람을 30일간 격리하게 한다. 검역의 선구다.
  10. 1381년 — 흑사병 이후의 긴장이 한 원인이 되어 잉글랜드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11. 1894년 — 알렉상드르 예르생이 홍콩에서 페스트균을 찾아낸다.
  12. 2022년 — 키르기스스탄의 고대 DNA로 중앙유라시아에서 흑사병의 조상 균주가 확인된다.

용어 풀이

페스트균(Yersinia pestis)
페스트를 일으키는 세균. 알렉상드르 예르생의 이름을 땄다.
가래톳(bubo)
사타구니·겨드랑이·목의 림프절이 아프게 부어오른 것. 선페스트의 대표 증상이다.
폐페스트
폐에 생기는 페스트. 비말로 사람 사이에 옮을 수 있고 치료하지 않으면 매우 빨리 죽음에 이른다.
패혈성 페스트
세균이 혈액에 퍼지는 페스트. 가장 드물고 가장 치명적인 형태다.
미아스마(나쁜 공기)설
병이 썩은 냄새 나는 오염된 공기에서 생긴다는 중세·근세의 이론.
채찍질 고행단
특히 1349년,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공개 행렬 속에서 제 몸을 채찍질한 참회자들.
킵차크 칸국(금장 칸국)
14세기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 초원을 다스린 몽골 계승 국가.
카파
크림반도의 제노바 무역 식민지. 오늘날 페오도시야로, 전통적으로 페스트가 유럽에 들어온 곳으로 전해진다.
노동자 조례
임금을 페스트 이전 수준으로 묶고 노동을 강제하려 한 1351년 잉글랜드 법.
제2차 페스트 범유행
흑사병으로 시작해 19세기까지 되풀이된 페스트 유행의 긴 흐름.

묻고 답하기

왜 ‘흑사병’이라고 불러요?

당시 사람들은 ‘역병’이나 ‘대사망’이라고 불렀어요. ‘검은 죽음’이라는 이름은 뒤에 스칸디나비아 작가들에게서 퍼졌고, ‘검다’는 ‘무시무시하다’는 뜻이었을 거예요.

쥐가 흑사병을 일으켰나요?

원인은 세균이에요. 쥐와 다른 설치류가 병든 벼룩을 옮겼지만, 쥐벼룩·사람벼룩과 이·사람 사이 기침 가운데 무엇이 얼마나 퍼뜨렸는지는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어요.

흑사병이 다시 올 수 있나요?

페스트는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해마다 환자가 나오지만, 일찍 치료하면 항생제로 나을 수 있어요. 현대 공중보건 덕분에 중세 같은 규모의 범유행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왜 유대인이 누명을 썼나요?

오래된 그리스도교 사회의 편견에 공포가 겹쳤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거짓 혐의를 받고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했다. 교황이 직접 그 혐의가 거짓이라고 선언했지만, 지역의 군중과 당국은 학살을 저질렀다.

흑사병이 르네상스를 낳았나요?

이탈리아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는 경제 변화, 고전 학문의 재발견, 뒷날 그리스 학자들의 유입 등과 함께 작용한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로 본다.

흑사병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나요?

한때 널리 그렇게 믿었지만 14세기 중국에서 페스트 범유행을 가리키는 구체적 증거는 없다. 고대 DNA는 1330년대 톈산 산맥 일대의 중앙유라시아를 가리킨다.

사망자 수치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불완전한 세금 기록, 성직자 명부, 유언장, 연대기, 그리고 새로운 환경 자료로 세운 추정치다. 학자들 사이 차이가 수십 퍼센트포인트에 이르고, 피해는 지역마다 크게 달랐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Black Death. Wikipedia (영어)
  2. 흑사병. 위키백과
  3. Second plague pandemic. Wikipedia (영어)
  4. Persecution of Jews during the Black Death. Wikipedia (영어)
  5. Flagellant. Wikipedia (영어)
  6. Siege of Caffa. Wikipedia (영어)
  7. Statute of Labourers 1351. Wikipedia (영어)
  8. The Decameron. Wikipedia (영어)
  9. Yersinia pestis. Wikipedia (영어)
  10. Plague (fact sheet). 세계보건기구(WHO)
  11. Maria A. Spyrou 외, The source of the Black Death in fourteenth-century central Eurasia. Nature 606, 2022
  12. Ole Jørgen Benedictow, The Black Death 1346–1353: The Complete History. Boydell Press, 2004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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