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어요.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좁은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었지요. 천 년이 넘도록 옛 로마 제국을 동쪽에서 이어 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였고, 거대한 성벽이 수많은 군대를 막아 냈어요.
그런데 1453년 무렵 제국은 아주 작아져서 거의 도시 하나만 남아 있었어요. 그 둘레는 점점 커지는 오스만 제국이 에워싸고 있었지요. 새 술탄 메흐메트 2세는 겨우 스물한 살이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자기 수도로 삼고 싶어 했어요.
메흐메트는 엄청난 군대와 많은 배, 그리고 작은 자동차만큼 무거운 돌 포탄을 쏘는 거대한 대포를 끌고 왔어요.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이끄는 방어군은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 온 사람들까지 합쳐도 몇천 명뿐이었어요. 그들은 적의 배가 항구로 들어오지 못하게 커다란 쇠사슬을 바다에 걸어 두었어요.
메흐메트는 놀라운 꾀를 냈어요. 기름칠한 나무 굴림대 위로 배를 끌어 언덕을 넘긴 다음, 쇠사슬 안쪽 항구에 띄운 거예요. 일곱 주쯤 대포가 성벽을 두들겼고,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병사들이 마침내 도시 안으로 들어왔어요. 황제는 싸우다 목숨을 잃었어요.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날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죽고, 수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어요. 그 뒤 메흐메트는 이 도시를 수도로 삼고, 커다란 성당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바꾸고, 새 주민을 데려와 살게 했어요. 이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이스탄불이에요.
한눈에 보기
- 시기
- 1453년 4월 초(2일 또는 6일)부터 5월 29일까지 포위
- 기간
- 7~8주 정도(시작일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약 53~57일)
- 장소
- 콘스탄티노폴리스(지금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 참가 세력
-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제국 대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의 비잔티움 제국(제노바·베네치아 등 동맹 포함)
- 병력
- 현대 추정: 오스만군 약 5만~8만 명 이상, 방어군 약 7천~1만 명. 스프란체스는 싸울 수 있는 그리스인 4,773명과 외국인 약 200명을 헤아렸다
- 결과
- 오스만의 도시 점령, 마지막 비잔티움 황제의 전사, 비잔티움 제국의 종말
- 인명 피해
- 방어군과 주민 수천 명 사망, 주민 수만 명이 노예가 되거나 삶터를 잃음
- 그 뒤
-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하기아 소피아는 모스크로 바뀜
쉬움
두 대륙이 만나는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마르마라해, 보스포루스 해협, 그리고 ‘금각만(골든혼)’이라 불리는 긴 천연 항구 사이의 세모꼴 반도에 자리 잡았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30년 옛 그리스 도시 비잔티온을 새 수도로 다시 세웠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동로마 제국은 천 년을 더 이어 갔다. 역사가들은 이를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지만, 그 사람들은 스스로를 로마인(로마이오이)이라 불렀다.
도시의 육지 쪽은 5세기에 쌓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지켰다. 해자, 바깥 성벽, 탑이 늘어선 거대한 안쪽 성벽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약 6km에 걸쳐 이어졌고, 나머지 쪽은 해안 성벽이 막았다. 이 방어 시설은 수백 년 동안 아바르, 페르시아, 아랍, 불가리아, 루스의 공격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 도시가 함락된 적이 한 번 있었다. 1204년 성지로 가던 제4차 십자군 기사들이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비잔티움은 1261년 도시를 되찾았지만 옛 힘을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쉬움
배경: 줄어드는 제국과 떠오르는 강국
14세기 아나톨리아 북서부에서 일어난 튀르크계 무슬림 왕조 오스만은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로 빠르게 뻗어 나갔다. 15세기 초 비잔티움에 남은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 몇몇 섬, 그리스 남부의 모레아(펠로폰네소스) 정도였다. 황제들은 오스만 술탄에게 공물을 바치며 서유럽에 도움을 청했다.
오스만은 이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적이 있다. 1390년대 바예지드 1세, 1422년 무라드 2세 때였지만 함락하지는 못했다. 바예지드의 봉쇄는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하면서 끝났고, 덕분에 비잔티움은 반세기를 더 버텼다.
서방의 군사 원조를 얻으려고 황제 요안네스 8세는 피렌체 공의회(1439)에서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를 교황의 권위 아래 다시 합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많은 비잔티움 성직자와 백성이 이 교회 통합을 거부해 도시는 심하게 갈라졌다. 통합은 포위전을 불과 몇 달 앞둔 1452년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선포되었지만, 서방의 원조는 여전히 적었다.
쉬움
두 군주: 메흐메트 2세와 콘스탄티노스 11세
메흐메트 2세(1432~1481)는 1451년 열아홉 살에 두 번째로 술탄 자리에 올랐다. 교육을 잘 받아 여러 언어를 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의 역사에 매료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하면 견줄 데 없는 수도를 얻고, 유럽과 아시아의 오스만 영토를 잇는 고리를 확보하며, 이 도시의 정복자를 칭송한 하디스에 담긴 오랜 이슬람의 염원도 이룰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1404~1453)는 1449년 황제가 되었다. 모레아를 다스리던 그는 교회 통합을 둘러싼 긴장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않고 미스트라스에서 황제로 선포되었다. 서방의 도움을 바라고 통합을 받아들였으며, 끝까지 도시에 남아 싸웠다.
두 나라의 관계는 빠르게 무너졌다. 비잔티움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던 오스만 왕위 경쟁자 오르한 왕자를 풀어 줄 수도 있다고 암시하자, 메흐메트는 이를 명분 삼아 전쟁 준비에 나섰다.
중급
준비: 요새, 대포, 함대
1452년 메흐메트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가장 좁은 곳, 유럽 쪽 해안에 루멜리 히사르 요새를 세웠다. 맞은편 아시아 쪽에는 오스만의 옛 요새가 있었다. 이 요새의 대포는 흑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배를 막을 수 있었다. 1452년 11월 정선 명령을 거부한 베네치아 배 한 척이 격침되고 선원들이 처형되었는데, 모두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메흐메트는 화약 대포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헝가리 또는 트란실바니아 출신으로 흔히 오르반이라 불리는 주조공은 처음에 비잔티움에 일자리를 청했다가 술탄을 위해 거대한 청동 사석포를 만들었다. 가장 큰 것은 길이가 8m가 넘었고 약 500kg의 돌 포탄을 쏠 수 있었지만 하루에 몇 번밖에 쏘지 못했다. 오스만은 대규모 함대와 함께, 정예 예니체리와 기병, 비정규군, 속국의 그리스도교도 부대로 이루어진 강력한 군대를 모았다.
비잔티움 쪽에서는 콘스탄티노스가 성벽을 고치고 물자를 모았다. 도우러 온 이들 가운데는 1453년 1월 병사 약 700명을 이끌고 와서 육지 성벽 방어를 맡은 제노바 지휘관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롱고, 도시에 살던 베네치아인과 그들의 배, 소규모 병력을 거느린 교황 특사 키예프의 이시도로스 추기경, 카탈루냐·카스티야 등지에서 온 자원병이 있었다. 금각만 건너편의 제노바 거류지 갈라타(페라)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켰다. 금각만 입구에는 거대한 쇠사슬(방재)을 걸었다.
중급
누가 싸웠나: 그리스도교 대 이슬람만이 아니었다
이 포위전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또는 유럽과 아시아의 단순한 충돌로 그리고 싶어지지만, 실제 양편은 훨씬 뒤섞여 있었다. 메흐메트의 군대에는 세르비아 군주가 보낸 부대를 비롯한 발칸 속국의 그리스도교 병사들, 그리고 대포 주조공 오르반 같은 유럽 출신 기술자가 있었다. 예니체리 가운데 상당수도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징집된 사람들이었다.
방어하는 쪽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던 오스만 왕위 경쟁자 오르한 왕자가 튀르크인 추종자들과 함께 싸우다 도시가 함락될 때 죽었다. 방어군은 그리스인, 제노바인, 베네치아인, 카탈루냐인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서로를 늘 믿은 것은 아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치열한 상업 경쟁자였고, 많은 정교회 그리스인은 교회 통합과 1204년의 기억 때문에 라틴 동맹군을 불신했다. 비잔티움 고관 루카스 노타라스가 “도시에서 라틴 주교관을 보느니 튀르크 터번을 보겠다”고 했다는 말이 이 쓰라림을 보여 준다. 다만 이 말은 역사가 두카스가 전한 것이어서 그대로의 발언이 아닐 수도 있다.
금각만 건너 갈라타의 제노바인들은 양쪽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일부는 성벽에서 싸웠지만, 거류지는 포위군과 거래를 계속했다. 함락 뒤 갈라타는 평화롭게 항복해 주민의 재산과 신앙을 보장하는 메흐메트의 칙허장을 받았지만, 성벽 일부는 헐렸다.
중급
포위전: 1453년 4~5월
오스만군은 4월 초에 도착해 몇 주에 걸친 포격을 시작했다. 대포는 특히 성 로마노스 문 근처 리코스강 골짜기의 육지 성벽을 부수었지만, 방어군은 밤마다 흙과 목재, 통으로 틈을 메웠다. 초기의 오스만 공격은 격퇴되었다.
4월 20일 제노바 배 세 척과 보급품을 실은 비잔티움 수송선 한 척이 오스만 함대를 뚫고 금각만에 들어와 방어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이틀 뒤인 4월 22일 메흐메트는 가장 유명한 작전으로 응수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70척가량의 배를 기름칠한 굴림대 위로 갈라타 뒤편 언덕을 넘겨 금각만 안쪽에 띄운 것이다. 이제 방어군은 항구 쪽 성벽까지 지켜야 했고, 가뜩이나 적은 병력은 더 얇게 흩어졌다.
5월에는 노보브르도 출신 세르비아 광부를 비롯한 오스만 공병들이 성벽 밑으로 굴을 팠다. 방어군은 요하네스 그란트라는 기술자의 지휘로 맞굴을 파 적의 굴을 무너뜨렸다. 협상도 시도되었다. 메흐메트는 도시가 항복하면 주민을 살려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하며, 콘스탄티노스는 도시를 내주기를 거부했다. 월식, 하기아 소피아 둘레의 이상한 빛 같은 징조는 방어군의 두려움을 키웠다.
마지막 총공격은 5월 29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비정규군, 아나톨리아 병사, 그리고 예니체리가 차례로 육지 성벽에 밀려왔다. 주스티니아니가 중상을 입고 성벽에서 실려 나가자 방어군은 혼란에 빠졌다. 역사가 두카스에 따르면 케르코포르타라는 작은 문이 열려 있어 일부 공격군이 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오스만군은 성벽을 돌파했고, 도시는 그날 아침 함락되었다.
중급
약탈과 희생자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전투 중에 죽었고, 그의 시신은 끝내 확실히 확인되지 않았다. 많은 방어군이 죽었고, 일부 베네치아·제노바 배는 피란민을 태우고 빠져나갔다. 강습으로 함락한 도시에 대한 당시 전쟁 관습에 따라 병사들에게 약탈이 허용되었다. 동시대 그리스인·이탈리아인 목격자들은 살육과 강간, 교회 모독,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 등에 피신한 가족들이 노예로 끌려간 일을 전한다.
숫자는 불확실하다. 동시대 기록을 바탕으로 한 현대 추정에 따르면 약 4천 명이 죽고, 수만 명, 어쩌면 5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렸다. 일부는 나중에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전통적으로 약탈 기간은 사흘이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메흐메트는 하루가 채 안 되어 약탈을 멈추게 했다. 6월 초 도시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정교회를 믿던 주민들에게 함락은 수백 년 동안 애가와 민요로 기억된 참극이었다. 이들을 제국 종말의 상징으로만이 아니라, 목숨과 가족과 자유를 잃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중급
정복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제 ‘파티흐’(정복자)라 불리게 된 메흐메트는 5월 29일 도시에 들어가 하기아 소피아로 향했고, 하기아 소피아는 모스크로 바뀌어 6월 1일 첫 금요 예배가 열렸다. 그는 이 도시를 수도로 삼았다. 오스만의 공식 이름은 코스탄티니예였고, ‘도시로’라는 그리스어 표현에서 온 이스탄불이라는 이름도 널리 쓰이다가 튀르키예 공화국에서 공식 명칭이 되었다.
텅 빈 도시를 되살리려고 메흐메트는 제국 곳곳에서 무슬림, 그리스도교도, 유대인을 때로는 강제로 이주시키고, 떠난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권했다. 1454년에는 교회 통합에 반대한 학자 겐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를 정교회 총대주교로 임명해, 교회가 정교회 신자를 다스리는 공인된 역할을 맡게 했다. 새 궁전(뒤의 톱카프 궁전), 파티흐 모스크 복합 단지, 지붕 덮인 시장도 지었다.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이스탄불은 다시 세계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메흐메트의 정책은 실용적이었다. 그는 폐허가 아니라 부유하고 사람이 많은 수도를 원했고, 그리스도교도와 유대인이 특별세를 내고 무슬림의 통치를 받아들이면 신앙을 지킬 수 있게 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많은 교회가 모스크로 바뀌었지만, 총대주교 교회를 비롯한 다른 교회들은 계속 기능했다. 그리스어를 쓰는 학자와 관리도 그의 궁정에서 일했고, 그는 그리스어·라틴어 필사본을 모았으며 1480년 베네치아 화가 젠틸레 벨리니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남은 비잔티움 영토도 곧 무너졌다. 모레아는 1460년, 트라페주스 제국은 1461년에 함락되었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오스만 국가는 이후 수백 년 동안 지중해 세계의 강대국이 되었다.
중급
왜 중요한가
함락은 기원전 1세기부터 이런저런 모습으로 이어져 온 로마 제국의 정치적 연속성을 끝냈다. 많은 교과서가 유럽의 인쇄술 발명(구텐베르크 성서가 바로 이 무렵 마인츠에서 인쇄되었다) 같은 사건과 함께 1453년을 중세와 근세의 경계로 삼는다.
군사사에서 이 포위전은 중세 성벽에 맞선 화약 대포의 위력이 커졌음을 보여 주는 예로 자주 거론된다. 다만 역사가들은 오스만의 승리가 대포만이 아니라 병력, 해전, 보급, 방어군의 고립에도 달려 있었다고 지적한다.
유럽에서는 소식이 큰 충격을 주었고 십자군을 일으키자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흐지부지되었다. 러시아의 성직자와 군주들은 훗날 정교회의 중심 세력인 모스크바가 비잔티움의 역할을 이어받았다는 생각, 이른바 ‘제3의 로마’론을 발전시켰다.
심화
기억과 국가별 서사
이 사건은 나라마다 매우 다르게 기억된다. 튀르키예에서는 ‘이스탄불 정복(페티흐)’이라 부르며 해마다 5월 29일 새 시대를 연 승리로 기념한다. 메흐메트는 국민적 영웅이고, 정복은 대중 영화와 이스탄불의 대형 파노라마 박물관의 주제가 되었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이 도시의 정복자를 칭송한 하디스와도 연결된다.
그리스의 기억 속에서 이 사건은 ‘함락(알로시스)’, 곧 ‘도시의 점령’이라 불리는 민족적 비극이다. 돌로 변해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는 ‘대리석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전설, 성체를 든 채 하기아 소피아 벽 속으로 사라져 도시가 다시 그리스도교의 것이 되면 나타난다는 사제의 전설이 전해진다. 도시가 함락된 요일인 화요일은 지금도 많은 그리스인이 불길하게 여긴다.
하기아 소피아는 이 기억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 준다. 1453년부터 모스크였던 이 건물은 튀르키예 공화국 아래 1934년 박물관이 되었다가 2020년 다시 모스크로 바뀌었다. 이 결정은 튀르키예에서 많은 환영을 받았지만 그리스, 유네스코, 여러 그리스도교 단체의 비판을 받았다. 역사가들은 오스만 국가의 성취와 도시 주민의 고통을 함께 인정하는 방식으로 정복을 서술하려 한다.
심화
사료와 학계의 쟁점
이 포위전은 드물게 기록이 풍부하다. 비잔티움 쪽 사료로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의 가까운 벗으로 목격담을 남긴 게오르기오스 스프란체스의 짧은 연대기(소연대기, Minus), 15세기 후반에 쓴 두카스와 라오니코스 칼코콘딜레스의 역사서, 메흐메트를 섬기며 그를 기리는 역사서를 쓴 그리스인 미카엘 크리토불로스가 있다. 서방 목격자로는 날마다 일기를 쓴 베네치아 외과의 니콜로 바르바로, 교황에게 편지를 보낸 키오스의 레오나르도 대주교가 있다. 오스만 쪽으로는 현장에 있던 투르순 베이의 연대기와 아시크파샤자데의 기록이 있고, 네스토르 이스칸데르의 이름으로 전하는 러시아 기록도 남아 있다.
사료마다 관점이 있다. 레오나르도는 그리스인과 교회 통합 반대파를 탓하고,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필자들은 서로를 탓하며, 크리토불로스는 메흐메트를 정의로운 군주로 그리고, 오스만 연대기 작가들은 정복을 성스러운 승리로 서술한다. 한때 주요 사료로 쓰인 스프란체스 연대기의 긴 판본(대연대기, Maius)은 오늘날 16세기 마카리오스 멜리세노스가 부풀린 것으로 널리 여겨지므로, 역사가들은 되도록 소연대기에 기댄다.
쟁점으로는 양군의 규모(오스만군이 16만~30만 명이었다는 당시 서방의 주장은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케르코포르타 이야기의 진위,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최후(전사인지, 한 베네치아 기록대로 자결인지), 약탈의 기간과 규모, 그리고 함락의 원인이 있다. 오스만의 힘과 계획을 강조하는 역사가도, 비잔티움의 쇠약과 서방의 무관심, 이탈리아 도시들의 경쟁을 강조하는 역사가도 있다. 피란한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일으켰다는 옛 견해는 이제 지나친 단순화로 여겨진다. 비잔티움 학자들은 1453년보다 수십 년 앞서 이미 이탈리아에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복이 동방 무역로를 ‘막아’ 유럽의 대항해를 일으켰다는 주장도 20세기 초부터 반박되어 왔다.
영어권의 표준적인 현대 저작으로는 스티븐 런시먼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1453』(1965)과, 사료 비판에 중점을 둔 마리오스 필리피데스·월터 하낙의 연구(2011)가 있다.
핵심 개념
- 비잔티움의 종말
-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으로 로마 제국을 끊김 없이 이어 온 마지막 나라가 끝났다.
- 화약과 성벽
- 거대한 대포가 천 년을 버틴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 힘을 보탰다. 전쟁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였다.
- 산을 넘은 배
- 메흐메트가 배를 육로로 금각만에 옮기면서 항구의 쇠사슬을 우회하고 방어군을 분산시켰다.
- 교회 통합
- 서방의 도움을 얻으려던 정교회·가톨릭 통합 시도는 도시를 분열시켰을 뿐 원조를 거의 가져오지 못했다.
- 제국의 수도
-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다종교 오스만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 엇갈리는 기억
- 같은 사건이 튀르키예에서는 기념할 정복, 그리스에서는 애도할 함락이다.
- 인간의 대가
- 약탈로 수많은 평범한 주민이 죽거나 노예가 되었고, 그들의 고통도 이 역사의 일부다.
기록
- 330년 —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새 수도로 봉헌하다.
- 1204년 — 제4차 십자군이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하다.
- 1261년 — 비잔티움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다.
- 1402년 — 티무르가 앙카라에서 바예지드 1세를 물리쳐 오스만의 도시 봉쇄가 끝나다.
- 1439년 — 피렌체 공의회가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통합을 선포하다.
- 1449년 —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황제가 되다.
- 1451년 — 메흐메트 2세가 두 번째로 술탄이 되다.
- 1452년 — 루멜리 히사르 요새가 세워지고,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교회 통합이 선포되다.
- 1453년 — 4월 초 포위 시작, 4월 22일 배를 육로로 옮기고, 5월 29일 도시가 함락되다.
- 1454년 — 겐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가 오스만 치하의 정교회 총대주교가 되다.
- 1461년 — 비잔티움의 마지막 계승국 트라페주스가 메흐메트 2세에게 함락되다.
- 2020년 — 1934년부터 박물관이던 하기아 소피아가 다시 모스크로 바뀌다.
용어 풀이
- 비잔티움 제국
-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스린 동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현대의 이름.
- 오스만 제국
- 1300년 무렵 세워져 대제국으로 성장하고 1922년까지 이어진 튀르크계 무슬림 국가.
- 술탄
- 오스만 군주의 칭호.
- 예니체리
- 주로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해 그리스도교 소년들을 징집해 만든 오스만의 정예 보병.
- 금각만(골든혼)
- 콘스탄티노폴리스 북쪽의 길쭉한 항구.
- 사석포
- 돌 포탄을 쏘던 초기의 대형 대포.
- 테오도시우스 성벽
- 5세기에 쌓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육지 성벽.
- 교회 통합
-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를 다시 합치기로 한 피렌체 공의회(1439)의 합의. 많은 정교회 신자가 거부했다.
- 약탈
- 점령한 도시에서 병사들이 재물을 빼앗는 일.
- 총대주교
- 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의 수장.
묻고 답하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왜 점령하기 어려웠나요?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였고, 육지 쪽은 거대한 삼중 성벽이 지켰으며, 바다로 물자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배가 어떻게 땅 위로 갔나요?
메흐메트의 병사들이 갈라타 뒤편 언덕에 기름칠한 나무 굴림대 길을 깔고 배를 끌어 금각만에 넣었어요.
마지막 황제는 어떻게 되었나요?
콘스탄티노스 11세는 1453년 5월 29일, 아마도 성벽 근처에서 싸우다 죽었을 거예요. 하지만 시신은 끝내 확실히 확인되지 않았어요.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같은 도시인가요?
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도시로’라는 뜻의 그리스어 표현에서 왔고, 20세기에 공식 이름이 되었어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 르네상스를 일으켰나요?
그것만으로는 아닙니다. 그리스 학자들은 1453년 훨씬 전부터 이탈리아에서 가르쳤습니다. 다만 함락으로 피란민과 필사본의 흐름이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병력과 희생자 숫자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그리 믿을 만하지 않습니다. 당시 필자들은 흔히 부풀렸고, 현대 역사가들은 사료를 비교하고 땅과 보급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따져 범위로 제시합니다.
튀르키예와 그리스에서 이 사건을 왜 그렇게 다르게 기억하나요?
튀르키예인에게는 오스만 이스탄불의 출발이자 위대한 승리이고, 그리스인에게는 중세의 수도를 잃고 수백 년 이민족 지배가 시작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서유럽은 왜 도움을 거의 보내지 않았나요?
서방 군주들은 분열되어 제각기 전쟁에 바빴고, 많은 가톨릭 신자가 정교회 그리스인을 불신했으며, 1452년의 교회 통합은 너무 늦고 인기가 없어 제대로 된 십자군을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오스만 영토에 무역 이권도 있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Fall of Constantinople. Wikipedia
- Constantine XI Palaiologos. Wikipedia
- Mehmed II. Wikipedia
- Walls of Constantinople (Theodosian Walls). Wikipedia
- Orban. Wikipedia
- Giovanni Giustiniani. Wikipedia
- Byzantine Empire. Wikipedia
- Mark Cartwright, The Fall of Constantinople in 1453. World History Encyclopedia, 2018
- 스티븐 런시먼(Steven Runciman), 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5
- 마리오스 필리피데스(Marios Philippides)·월터 하낙(Walter K. Hanak), The Siege and the Fall of Constantinople in 1453: Historiography, Topography, and Military Studies. Ashgate, 2011
함께 보기
- 하기아 소피아532년부터 537년까지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지은 대성당이다.
-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물러난 사건은 흔히 서로마 제국의 종말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쓰인다.
- 구텐베르크 성서1450년대 마인츠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한 라틴어 성서다.
- 콜럼버스의 첫 항해1492년 에스파냐 왕실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가 원주민들이 살던 카리브해 섬들에 도달했다.
-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800년 성탄절,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 카롤루스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운 사건이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