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주 먼 옛날,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 이집트 나일강가에 살던 사람들은 납작한 돌 위에서 색깔 있는 광물을 갈아 눈 화장품을 만들었어요. 이런 납작한 돌을 ‘팔레트’라고 해요. 화가가 물감을 섞는 팔레트처럼요.
나르메르 팔레트도 그런 돌처럼 생겼지만 훨씬 커요. 어린이 팔 길이만큼 높고, 매일 쓰기에는 너무 무겁고 귀했어요. 아마 매의 신 호루스의 신전에 바친 특별한 선물이었을 거예요.
한쪽 면에서는 키 큰 흰 왕관을 쓴 나르메르 왕이 적의 머리채를 잡고 무거운 곤봉을 번쩍 들고 있어요. 다른 면에서는 빨간 왕관을 쓰고, 쓰러진 적들이 줄지어 있는 곳으로 행진해요. 옛 이집트에서 흰 왕관은 남쪽, 빨간 왕관은 북쪽을 뜻했으니, 이 팔레트는 “이 왕이 두 땅을 모두 다스린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왕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어요. 왕이 거인이어서가 아니에요. 이집트 화가들은 가장 중요한 사람을 가장 크게 그렸어요. 여러분이 그림에서 자기 자신을 크게, 집을 작게 그리는 것과 비슷해요.
양쪽 면 맨 위에는 작은 네모 안에 왕의 이름이 메기와 끌, 두 그림으로 쓰여 있어요.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그림 문자인 상형문자 가운데 아주 이른 것이에요. 여러분 이름과 소리가 비슷한 물건 그림으로 이름을 쓴다고 상상해 보세요!
이 팔레트는 1897~98년 오늘날 히에라콘폴리스라고 부르는 옛 도시에서 발굴되었고, 지금은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 있어요. 학자들은 이것이 이집트를 하나로 만든 진짜 전쟁을 보여 주는지, 아니면 왕이 얼마나 힘센지 보여 주는 포스터 같은 것인지 아직도 토론하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 연대
- 기원전 3100년 무렵(나카다 3기 말~제1왕조 초). 추정 범위는 약 기원전 3200~3000년
- 발견
- 상이집트 히에라콘폴리스(고대 네켄) 호루스 신전의 ‘주 매납처’ 안 또는 그 부근, 1897~98년, 제임스 퀴벨과 프레더릭 그린
- 재료
- 와디 함마마트에서 난 것으로 보이는 결 고운 암회녹색 실트암(그레이와케) 한 덩이. 예전에는 흔히 점판암·편암으로 잘못 불렸다
- 크기
- 높이 약 63cm, 너비 약 42cm, 양면에 얕은 부조
- 소장
-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JE 32169, 옛 번호 CG 14716)
- 종류
- 의례용·봉헌용 화장 팔레트. 선왕조 시대 장식 팔레트 가운데 가장 늦고 가장 정교한 것의 하나
- 의의
- 흰 왕관과 붉은 왕관을 모두 쓴 왕의 가장 이른 모습, 초기 상형문자, 이미 자리 잡은 이집트 미술의 여러 규범
쉬움
나르메르 팔레트란 무엇인가
나르메르 팔레트는 높이 약 63센티미터의 납작한 방패 모양 암회녹색 돌판으로, 양면에 그림이 새겨져 있다. 나일강을 따라 흩어져 있던 공동체들이 한 왕이 다스리는 하나의 왕국이 되어 가던 기원전 4천년기 맨 끝, 기원전 3100년 무렵 이집트에서 만들어졌다.
그림 속 왕의 이름은 메기와 끌을 뜻하는 기호로 쓰여 ‘나르메르’로 읽힌다. 한쪽 면에서 그는 훗날 상(남)이집트를 상징하게 되는 키 큰 흰 왕관을, 다른 면에서는 하(북)이집트의 붉은 왕관을 쓰고 있다. 두 왕관을 모두 쓴 왕의 모습으로는 가장 이른 것이어서, 이 팔레트는 흔히 이집트 통일의 기록으로 여겨져 왔다.
팔레트는 문자와 미술의 역사에서도 중요하다. 읽을 수 있는 가장 이른 상형문자 몇 개가 있고, 왕을 크게 그리고, 인물을 가로 띠에 배치하고, 몸을 여러 시점을 조합해 나타내는 양식은 이후 거의 3,000년 동안 이집트 미술가들이 따르는 틀이 되었다.
쉬움
화장용 돌판에서 왕의 기념물로
나르메르보다 천 년 넘게 앞서부터 이집트 사람들은 작은 돌 팔레트에 초록색 공작석이나 검은 방연석 같은 광물을 갈아 눈 화장용 가루를 만들었다. 기름이나 수지에 섞은 이 화장품은 얼굴을 꾸미고, 햇빛과 벌레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구실도 했을 것이다. 팔레트는 흔한 껴묻거리였고, 물고기·거북·새 같은 동물 모양으로 깎은 것이 많았다.
선왕조 시대 끝 무렵, 고고학자들이 나카다 3기라고 부르는 시기에 몇몇 팔레트는 매우 커지고 사냥·전투·동물 장면이 정교하게 새겨졌다. 사냥꾼 팔레트, 전장 팔레트, 황소 팔레트, 이른바 리비아 팔레트 등이 그 예이다. 이런 유물에는 일상적으로 쓴 흔적이 없어 의례용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강력한 통치자의 등장과 관련된다.
나르메르 팔레트는 이런 의례용 팔레트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늦은 것의 하나이다. 두 환상 동물의 목이 감싸는 둥근 갈이 홈이 여전히 있지만, 개인 화장용으로 쓰기에는 너무 크고 정교하다. 학자들은 신전에 바친 봉헌물로 보며, 신상을 꾸미는 화장품을 만드는 데 썼다는 견해도 있다. 나르메르 시대 뒤 곧 장식 팔레트는 사라졌다.
쉬움
첫째 면 읽기: 적을 내리치는 왕
양쪽 면 맨 위에는 휘어진 뿔을 가진 암소의 얼굴 둘이 정면을 바라본다. 아마 여신 바트(뒤에 하토르와 합쳐진다)일 것이다. 그 사이에는 궁전의 정면을 나타내는 ‘세레크’라는 네모 틀이 있고, 그 안에 왕의 이름을 적은 메기와 끌 기호가 들어 있다.
흔히 앞면(렉토)이라 부르는 쪽의 가장 큰 장면에서 나르메르는 흰 왕관을 쓰고 있다. 무릎 꿇은 포로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배 모양 곤봉을 들어 내리치려 한다. 왕 뒤에는 작은 인물이 왕의 샌들을 들고 따른다. 포로의 머리 옆에 있는 두 기호는 그의 이름이나 출신지를 나타내는 듯하며, ‘와시’로 읽기도 한다.
포로 위에는 호루스 신이자 왕을 상징하는 매가 파피루스 덤불 위에 앉아, 덤불에서 솟은 사람 머리의 코에 묶인 밧줄을 쥐고 있다. 일종의 그림 문장이다. 매인 왕이 흔히 습지인 나일 삼각주로 보는 ‘파피루스의 땅’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뜻이다. 왕 아래에는 두 명의 적이 쓰러지거나 달아나고 있다.
무릎 꿇은 적을 내리치는 왕의 자세는 이집트 미술에서 가장 오래 이어진 도상의 하나가 되었다. 파라오들은 로마 시대까지 수천 년 동안 신전 벽에 바로 이 자세로 새겨졌다.
중급
둘째 면 읽기: 행렬, 괴수, 황소
다른 면(베르소)은 세 개의 띠, 곧 ‘레지스터’로 나뉜다. 맨 위 띠에서 붉은 왕관을 쓰고 곤봉과 도리깨를 든 나르메르가 짐승 가죽·개·매 두 마리의 표장을 든 네 기수 뒤를 따라 걷는다. 뒤에는 샌들 든 시종이, 앞에는 이름이나 직함을 ‘체트’로 읽기도 하는 긴 머리의 관리가 걷는다. 오른쪽에는 머리가 잘려 다리 사이에 놓인 시신 열 구가 있고, 그 위의 배·작살 든 매·문 기호는 어떤 장소나 사건의 이름일 수 있다.
가운데 띠는 갈이 부분이다. 두 사람이 표범의 몸에 뱀처럼 긴 목을 가진 상상의 동물 ‘서포파드’ 두 마리를 밧줄로 붙잡고 있고, 서로 휘감긴 목이 둥근 홈을 감싼다. 얽힌 목이 두 땅의 결합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으며, 비슷한 시기 메소포타미아 유물에도 비슷한 동물이 보여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접촉을 시사한다.
맨 아래 띠에서는 왕의 힘을 상징하는 황소가 뿔로 요새 도시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쓰러진 사람을 짓밟는다. 후대 이집트에서 왕은 흔히 ‘강한 황소’라 불렸고 왕의 복장에는 황소 꼬리가 들어갔는데, 팔레트의 나르메르도 허리띠에 황소 꼬리를 달고 있다.
중급
이미 자리 잡은 이집트 미술의 규칙
팔레트는 기원전 3100년 무렵 이미 이집트 미술의 여러 규칙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왕은 누구보다 훨씬 크게 그려지는데, 이를 ‘위계적 크기’라 한다. 크기가 실제 키가 아니라 중요도를 나타낸다. 장면은 바닥선 위에 선 가로 띠로 배열되어, 글줄처럼 이야기를 정리한다.
나르메르의 몸은 이집트 미술 특유의 ‘복합 시점’으로 그려졌다. 머리·다리·발은 옆모습, 어깨는 정면, 눈은 정면에서 본 모양이다. 한 지점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베끼려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각 부분을 가장 알아보기 쉬운 모습으로 보여 주려는 것이다.
왕의 비례도 후대 이집트 미술가들이 서 있는 인물의 키를 일정한 단위로 재던 체계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반면 포로·시신·서포파드를 붙잡은 사람 같은 작은 인물들은 더 다양한 자세로 자유롭게 새겨졌다. 질서 정연한 왕과 혼란스러운 적의 대비는 이집트 왕실 미술의 기본 주제가 되었다.
중급
팔레트 위의 초기 문자
팔레트는 이집트 상형문자를 읽을 수 있는 가장 이른 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왕의 이름은 그림으로 소리를 나타내는 ‘레부스(수수께끼 그림) 원리’를 쓴다. 메기 그림은 nꜥr, 끌 그림은 mr 소리를 나타내 합쳐서 ‘나르메르’가 된다. 이름의 뜻은 확실하지 않아 ‘사나운 메기’, ‘아픈 메기’, ‘쏘는 메기’ 등이 제안되었다.
다른 작은 기호 무리는 사람과 장소를 표시한다. 샌들 든 시종, 왕 앞의 관리, 포로의 이름이나 직함, 시신 위와 달아나는 적 옆의 지명 등이다. 일부는 후대 상형문자의 음가로 읽을 수 있지만, 문자가 아직 새로웠기 때문에 학자들은 하나하나의 독법에 신중하다.
팔레트는 초기 이집트 문자와 그림이 어떻게 함께 작동했는지도 보여 준다. 파피루스 위에서 밧줄을 쥔 매는 그림과 문장의 중간쯤에 있다. 이 단계의 문자는 주로 이름·직함·표식에 쓰였고, 이어지는 문장은 몇 세기 뒤에야 나타난다.
중급
나르메르는 누구였고, 이집트는 어떻게 통일되었나
나르메르는 기원전 3100년 무렵 다스린 왕이다. 많은 이집트학자는 그를 제1왕조의 첫 왕으로 보고, 후대 이집트 왕명표와 그리스어로 역사를 쓴 사제 마네토가 통일 이집트의 첫 왕으로 꼽은 메네스와 같은 인물로 본다. 메네스가 나르메르의 후계자 호르아하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아비도스 왕실 묘지에서 나온, 제1왕조 왕들을 차례로 적은 인장 자국은 나르메르로 시작한다.
이집트의 통일은 한 번의 전투가 아니라 긴 과정이었다. 고고학은 기원전 4천년기 동안 히에라콘폴리스·나카다·아비도스 같은 상이집트 중심지가 강해지고, 상이집트의 물질문화가 북쪽 삼각주로 퍼졌으며, 이리호르와 카 같은 나르메르 이전의 왕들도 하이집트에 어느 정도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나르메르의 이름은 선왕들보다 훨씬 많은 하이집트와 남부 가나안 유적에서 발견된다.
나르메르는 아비도스 근처 움므 엘카압에 두 방이 이어진 무덤에 묻혔다. 그의 이름이 있는 다른 유물로는 역시 히에라콘폴리스에서 나온 나르메르 곤봉 머리, 인장 자국, 꼬리표, 토기 명문 등이 있다.
중급
히에라콘폴리스에서의 발견
팔레트는 1897~98년 발굴 시즌에 영국 고고학자 제임스 E. 퀴벨과 프레더릭 W. 그린이 히에라콘폴리스에서 찾아냈다. 히에라콘폴리스는 고대 네켄의 그리스어 이름(‘매의 도시’)으로, 오늘날 룩소르에서 남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네켄은 선왕조 시대 상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호루스 숭배의 중심지로 남았다.
퀴벨과 그린은 신전 구역에서 의례용 유물 한 무더기를 찾아 ‘주 매납처’라 불렀다. 여기에는 나르메르 곤봉 머리와 그보다 이른 왕을 보여 주는 스콜피온 곤봉 머리도 들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발굴자들은 유물의 정확한 위치를 분명히 기록하지 않았고, 그린의 기록은 팔레트를 매납처에서 1~2미터 떨어진 다른 층에 둔다. 이 유물들은 아마 신전에 바친 옛 왕실 봉헌물로, 뒤에 한데 묻혔을 것이다.
팔레트는 거의 완벽한 상태로 남아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가장 유명한 전시품의 하나가 되었다. 1960년대에 시작되어 마이클 호프먼, 바버라 애덤스, 르네 프리드먼이 이어 간 히에라콘폴리스의 현대 발굴은 선왕조 시대 마을과 묘지, 초기 신전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 주었다.
심화
역사 기록인가 왕권 이데올로기인가
발견 이후 팔레트는 초기 이미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지금도 널리 퍼진 전통적 견해는 이것이 실제 사건, 곧 상이집트 왕의 하이집트 정복, 또는 적어도 통일을 마무리한 북쪽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리비아인에 대한 승리나 부토를 중심으로 한 삼각주 왕국에 대한 승리의 기록으로 읽는 견해도 있었다.
다른 학자들은 팔레트의 주된 목적이 역사 기록이 아니라 왕권 이데올로기의 표현이었다고 본다. 니컬러스 밀럿은 팔레트와 관련 유물의 장면이 유일한 통일 행위가 아니라 봉헌한 해의 이름이 된 사건을 기념한다고 제안했다. 휘트니 데이비스는 『타격을 감추기』에서 내리치는 장면을 치명적 일격 직전의 순간을 멈춰 세운 시각적 은유로 분석했다. 존 베인스는 이 유물의 주된 목적이 사건 기록이 아니라, 왕이 신들의 이름으로 질서 있는 세계를 지배하며 무질서의 세력을 물리쳤음을 선언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1993년 독일 이집트학자 귄터 드라이어는 아비도스에서 팔레트와 같은 사건을 보여 주는 듯한 나르메르의 ‘연도 꼬리표’를 찾았다. 제1왕조에서는 해마다 주목할 사건의 이름을 붙였으므로, 드라이어와 토비 윌킨슨 등 많은 학자는 이 꼬리표를 팔레트가 실제 역사적 사건, 아마 북서 삼각주 원정을 가리킨다는 증거로 본다. 베인스와 데이비드 웬그로 등은 여전히 더 신중하다. 오늘날에는 팔레트가 실제 사건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그것을 시간을 초월한 상징의 언어로 보여 줄 수 있다는 견해가 많다.
심화
재료, 공방, 외래 요소
팔레트의 돌은 동부 사막 와디 함마마트에서 난 단단하고 결 고운 실트암(흔히 그레이와케라 부른다)으로, 선왕조 시대부터 쓰였고 뒤에는 왕의 조각상에도 쓰였다. 예전 설명은 점판암이나 편암이라 했지만, 그런 암석은 실트암과 달리 잘 쪼개지고 떨어져 나간다. 이런 돌을 구해 깎으려면 조직된 노동과 숙련 장인이 필요했고, 아마 왕실에 속한 이들이었을 것이다.
목이 얽힌 서포파드, 게벨 엘아라크 칼자루의 ‘동물 사이의 영웅’, 특정한 배 모양 등 선왕조 말 유물의 몇몇 모티프는 우루크기 메소포타미아나 엘람의 도상과 닮았다. 이것이 직접 접촉인지, 레반트를 통한 교역인지, 원통 인장 같은 위세품의 유통인지는 논쟁 중이다. 팔레트는 이집트 초기 왕실 미술이 외래 모티프를 빌려 변형하며 고유한 언어를 만들어 갔음을 보여 준다.
팔레트는 네켄 신전이라는 의례의 맥락에서도 읽어야 한다. 봉헌물로서 그것은 왕의 승리를 호루스 신 앞에 바치고, 통치자를 왕권의 화신으로 믿어진 신과 이어 주었다. 화장 팔레트, 신전 봉헌물, 정치적 메시지가 한데 결합된 모습은 이집트 국가가 태어날 때 종교·과시·권력이 얼마나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심화
유산과 현대적 의미
고대 이집트인에게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통일된 땅의 첫 왕과 함께 시작되었다. 후대 왕명표는 메네스로 시작했고, ‘두 땅’을 하나로 묶고 혼돈을 물리치는 왕이라는 이상은 이집트 왕권의 중심에 남았다. 흰 왕관과 붉은 왕관을 합친 이중관, ‘상하 이집트의 왕’ 같은 칭호가 파라오 문명의 끝까지 이 생각을 표현했다.
현대 학자들에게 팔레트는 아비도스의 묘지·주거지·초기 문자 같은 고고학 증거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이른 영역 국가 가운데 하나가 형성된 과정을 보여 주는 핵심 자료이다. 우루크의 와르카 항아리 같은 같은 시기 메소포타미아의 서사 부조와 자주 비교된다.
팔레트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발굴과 해석의 우연에 얼마나 좌우되는지도 일깨운다. 기록이 부실한 매납처에서 나온 유물 하나가 역사 과정 전체를 대표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것은 전쟁의 증거로서만이 아니라, 초기 통치자들이 이미지·문자·종교적 봉헌을 통해 통일 왕국이라는 관념을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 보여 주는 증거로 연구된다.
핵심 개념
- 두 땅의 통일
-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한 왕 아래 합쳐진 일로, 이집트인은 이를 역사의 시작으로 여겼다. 팔레트는 두 왕관을 모두 쓴 왕의 가장 이른 모습이다.
- 적을 내리치는 왕
- 곤봉으로 무릎 꿇은 적을 내리치는 왕의 모습. 3,000년 동안 왕의 승리를 상징하는 표준 도상이 되었다.
- 위계적 크기
- 가장 중요한 인물을 가장 크게 그려, 크기가 실제 키가 아니라 지위를 나타낸다.
- 질서와 혼돈
- 침착하고 질서 정연한 왕과 흩어진 패배자들의 대비로, 우주와 정치 질서의 수호자라는 왕의 역할을 표현한다.
- 레부스 문자
- 그림이 소리를 나타낸다. 메기(nꜥr)와 끌(mr)이 왕의 이름을 적는다.
- 봉헌물
- 신전의 신에게 바친 물건. 팔레트는 아마 네켄의 호루스에게 바친 선물이었다.
- 역사와 상징
- 팔레트는 실제 사건을 가리키면서도 그것을 시간을 초월한 의례의 형식으로 보여 줄 수 있다. 해석의 핵심에 있는 긴장이다.
기록
- 약 기원전 3900년 — 나카다 1기 시작. 작은 화장용 돌 팔레트가 무덤에 흔히 묻히다.
- 약 기원전 3500년 — 히에라콘폴리스가 상이집트의 주요 선왕조 중심지로 번성하다.
- 약 기원전 3200년 — 나카다 3기. 큰 장식 의례용 팔레트가 나타나고 초기 왕들(제0왕조)이 상이집트를 다스리다.
- 약 기원전 3100년 — 나르메르 재위. 팔레트가 깎여 네켄 신전에 봉헌되다.
- 약 기원전 3000년 — 제1왕조 초. 장식 팔레트가 쓰이지 않게 되다.
- 1897년 — 1897~98년 시즌에 퀴벨과 그린이 히에라콘폴리스에서 팔레트를 발견하다.
- 1964년 — 베르너 카이저가 아비도스의 B17·B18 무덤을 나르메르의 것으로 확인하다.
- 1993년 — 귄터 드라이어가 아비도스에서 팔레트와 같은 사건을 보여 주는 듯한 나르메르의 연도 꼬리표를 찾다.
용어 풀이
- 팔레트
- 광물을 갈아 화장용 가루를 만드는 납작한 돌. 의례용은 부조 장면으로 장식되었다.
- 세레크
- 궁전 정면을 나타내는 네모 틀로, 초기 왕들의 호루스 이름을 그 안에 적었다.
- 흰 왕관 / 붉은 왕관
- 훗날 각각 상(남)이집트와 하(북)이집트를 상징하게 된 왕관.
- 서포파드
- 표범의 몸에 뱀 같은 긴 목을 가진 상상의 동물을 가리키는 현대의 이름.
- 레지스터
- 바닥선 위에 선 가로 띠 모양의 그림 구획.
- 나카다 3기
- 선왕조 시대의 마지막 단계(약 기원전 3200~3000년)로, ‘제0왕조’ 왕들을 포함한다.
- 히에라콘폴리스(네켄)
- 상이집트의 중요한 선왕조 도시이자 호루스 숭배 중심지로, 팔레트가 발견된 곳.
- 연도 꼬리표
- 왕의 재위 연도를 그해의 주요 사건 이름으로 적어 물품에 단 작은 표.
- 그레이와케 / 실트암
- 와디 함마마트에서 나는 단단하고 결 고운 검은 돌로, 팔레트와 조각상에 쓰였다.
묻고 답하기
팔레트로 화장품을 만들었나요?
일상용 화장 팔레트처럼 갈이 홈이 있지만 개인이 쓰기에는 너무 크고 화려해요. 아마 신전에 바친 선물로, 신상을 위한 의례에 쓰였을지도 몰라요.
왜 왕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크게 그려졌나요?
이집트 화가들은 중요한 정도를 크기로 나타냈어요. 왕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가장 크게 그린 거예요.
팔레트가 나르메르가 이집트를 통일했다는 증거인가요?
그것만으로는 아니다. 두 왕관을 쓰고 북쪽의 적을 무찌르는 모습이 있고, 1993년 발견된 연도 꼬리표가 실제 사건을 뒷받침하지만, 통일은 그 이전부터 시작된 긴 과정이었다.
나르메르와 메네스는 같은 사람인가요?
초기 인장 자국이 제1왕조 왕 목록에서 나르메르를 맨 앞에 두기 때문에 많은 이집트학자가 그렇게 보지만, 메네스가 후계자 호르아하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목이 긴 동물들은 무슨 뜻인가요?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어요. 갈이 부분을 감싸고 있으며, 두 땅의 결합이나 혼돈의 힘을 길들이는 것을 상징할 수 있어요. 비슷한 동물이 메소포타미아 미술에도 나와요.
발견 맥락은 왜 불확실한가요?
1897~98년 발굴자들이 유물 하나하나의 정확한 위치를 기록하지 않았고 보고서끼리도 어긋나서, 팔레트가 어떻게 묻혔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다.
새겨진 상형문자를 읽을 수 있나요?
왕의 이름은 꽤 확실히 읽을 수 있고, 다른 표식 일부도 후대 음가로 조심스럽게 읽을 수 있지만, 문자 체계가 아주 초기여서 불확실한 독법이 많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Narmer Palette. Wikipedia
- Narmer. Wikipedia
- Hierakonpolis. Wikipedia
- Cosmetic palette. Wikipedia
- Joshua J. Mark, Narmer Palette. World History Encyclopedia, 2016
- Toby A. H. Wilkinson, Early Dynastic Egypt. Routledge, 1999
- Whitney Davis, Masking the Blow: The Scene of Representation in Late Prehistoric Egyptian Ar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2
- Barry J. Kemp, Ancient Egypt: Anatomy of a Civilization (2nd ed.). Routledge, 2006
- David Wengrow, The Archaeology of Early Egypt: Social Transformations in North-East Africa, 10,000 to 2650 BC.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함께 보기
- 피라미드 텍스트기원전 2350년 무렵부터 사카라의 왕실 피라미드 안에 새긴 주문으로, 죽은 왕을 하늘의 신들 사이로 올려 보내기 위한 이집트 최고(最古)의 대규모 종교 문헌.
- 기자의 대피라미드이집트 파라오 쿠푸를 위해 세운 왕릉이다. 기자의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크며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금제 장례용 가면이다.
- 쐐기 문자갈대를 젖은 점토에 눌러 쓴 세계 최초의 문자 가운데 하나.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발명되어 3,000년 넘게 여러 언어를 적는 데 쓰였다.
-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8세기 바빌론 왕 함무라비의 이름으로 발표된 법률 조항 모음이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