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길가메시 서사시

Ša naqba īmuru(“깊은 곳을 본 자”) / 고판본 Šūtur eli šarrī(“모든 왕들을 뛰어넘는 자”)

약 기원전 1800–1700년 · 바빌로니아

한 문장으로

『길가메시 서사시』는 옛날 이라크 땅에서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이야기로, 잘난 척하던 왕이 가장 친한 친구를 잃고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먼 길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길가메시 서사시
이미지: Unknown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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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거의 4천 년 전, 두 개의 큰 강 사이에 있는 땅(지금의 이라크)에서 사람들은 젖은 진흙판에 뾰족한 갈대 끝으로 쐐기 모양 자국을 꾹꾹 눌러 글을 썼어요. 그렇게 쓰인 이야기 가운데 길가메시라는 왕의 이야기가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긴 이야기 중 하나랍니다.

길가메시는 우루크라는 도시의 왕이었어요. 힘은 엄청 셌지만 사람들을 괴롭히는 골목대장 같은 왕이라 백성들이 힘들어했지요. 그래서 신들은 들판에서 동물들과 함께 사는 야생의 사나이 엔키두를 만들었어요. 엔키두가 도시에 오자 둘은 어마어마한 씨름을 벌였는데, 아무도 이기지 못했어요. 싸움이 끝나고 둘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답니다.

두 친구는 함께 모험을 떠났어요. 멀리 거대한 삼나무 숲에 가서 무시무시한 숲지기 훔바바와 싸우고,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황소와도 싸웠지요. 그런데 신들은 엔키두가 죽어야 한다고 정했고, 길가메시는 너무 슬펐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 무서워졌어요.

그래서 길가메시는 세상 끝까지 걸어갔어요. 캄캄한 굴을 지나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 옛날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할아버지 우트나피쉬팀을 만났지요. 길가메시는 늙은이를 다시 젊게 만드는 신기한 풀을 찾아냈지만, 목욕을 하는 사이에 뱀이 스르르 와서 그 풀을 먹어 버렸어요!

결국 길가메시는 영원히 사는 법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자기 도시의 튼튼한 성벽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아요.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없지만, 사람이 만든 좋은 것들과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 남을 수 있다는 것을요. 그 증거로, 우리는 지금도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한눈에 보기

형식
서사시(이야기를 담은 긴 시),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기록
언어
아카드어(셈어족). 그보다 앞선 개별 시들은 수메르어
최초의 통합 서사시
고바빌로니아 시대, 기원전 1800~1700년경
가장 잘 알려진 판본
12개 점토판의 표준 바빌로니아어판, 기원전 1200~1000년경, 신-레케-운닌니가 정리한 것으로 전해짐
지역
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아시리아, 지금의 이라크). 시리아·튀르키예·이스라엘에서도 사본 출토
주요 인물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 엔키두, 샴하트, 훔바바, 이슈타르, 우트나피쉬팀, 시두리, 우르샤나비
결정적 발견
니네베의 아슈르바니팔 도서관 점토판(기원전 7세기), 1849~1853년 발굴
의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 우정·죽음·인간의 한계를 성찰하며, 『창세기』와 매우 비슷한 홍수 이야기를 담고 있음

쉬움

『길가메시 서사시』란 무엇인가

『길가메시 서사시』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오늘날 이라크 일대에 해당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진 장편 서사시입니다. 도시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가 야생의 사나이 엔키두와 우정을 맺고, 함께 영웅적인 모험을 하다가 엔키두를 잃은 뒤, 스스로 죽음을 피할 길을 절박하게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세계 최초의 위대한 문학 작품’이라 불리지만, 그보다 앞선 짧은 문학 텍스트들도 있습니다. 여사제 엔헤두안나의 찬가나 『슈루파크의 교훈』 같은 지혜 문학이 그 예입니다.

이 시는 쐐기문자(설형문자)로 쓰였습니다. 쐐기문자는 비스듬히 자른 갈대 끝을 축축한 점토에 눌러 쐐기 모양 자국을 내는 문자입니다. 언어는 아카드어로, 훗날의 히브리어·아람어·아랍어와 같은 셈어족에 속하며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일상어이자 외교 언어였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판본은 점토판 열두 장에 나뉘어 있고, 한 장에 대략 200~300행의 시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서사시는 한꺼번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길가메시에 관한 여러 편의 수메르어 시로, 다음에는 고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1800~1700년경)의 아카드어 서사시로, 마지막에는 후대 서기관들이 베껴 쓴 12개 점토판의 ‘표준 바빌로니아어판’으로, 천 년 넘게 자라났습니다. 오늘날 ‘길가메시 서사시’라고 하면 보통 이 마지막 판본을 가리키며, 점토판이 깨진 부분은 더 오래된 판본으로 메워 읽습니다.

[2][9]

쉬움

줄거리: 점토판을 따라 읽기

제1~2토판: 시는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인 길가메시와 우루크의 웅장한 성벽을 찬양하며 시작합니다. 독자에게 성벽에 올라 그의 이야기가 담긴 점토판 상자를 열어 보라고 권하지요. 길가메시가 백성을 억누르자 신들은 여신 아루루에게 진흙으로 엔키두를 빚게 합니다. 가젤과 함께 들판을 누비던 엔키두는 사냥꾼의 계책으로 신전 여인 샴하트를 만나고, 그녀와 일주일을 보낸 뒤 달라집니다. 짐승들은 그를 피하고, 그는 빵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사람으로 사는 법을 배웁니다. 우루크에 온 엔키두는 길가메시의 앞을 가로막고, 둘은 격렬하게 씨름한 끝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가 됩니다.

제3~6토판: 영원한 명성을 얻고자 두 친구는 신 엔릴이 지키게 한 괴물 훔바바(후와와)가 있는 삼나무 숲으로 떠납니다. 태양신 샤마시의 도움으로 훔바바를 쓰러뜨리고 삼나무를 벱니다. 우루크로 돌아오자 여신 이슈타르가 길가메시에게 청혼하는데, 길가메시는 그녀의 옛 연인들이 맞은 끔찍한 운명을 늘어놓으며 모욕합니다. 격노한 이슈타르는 아버지 아누에게서 ‘하늘의 황소’를 얻어 내려보내지만, 두 영웅은 황소를 죽이고 엔키두는 황소의 넓적다리를 이슈타르에게 던집니다.

제7~8토판: 신들은 이 일로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고 결정하고, 엔키두가 병에 걸립니다. 그는 저승을 ‘먼지의 집’으로 보는 꿈을 꾸고, 샴하트를 저주했다가 다시 축복한 뒤 숨을 거둡니다. 길가메시는 친구의 코에서 구더기가 떨어질 때까지 이레 밤낮을 곁에서 울다가, 성대한 장례를 치러 줍니다.

제9~11토판: 죽음이 두려워진 길가메시는 광야를 헤맵니다. 쌍둥이 산 마슈를 지키는 전갈 인간들을 지나 태양이 다니는 캄캄한 굴을 달려 빠져나옵니다. 바닷가에서 술집 여주인 시두리를 만나고, 뱃사공 우르샤나비의 도움으로 ‘죽음의 물’을 건너 대홍수의 생존자 우트나피쉬팀에게 이릅니다. 우트나피쉬팀은 에아 신이 배를 지으라고 귀띔해 준 일, 폭풍이 인류를 쓸어버린 일, 비둘기·제비·까마귀를 날려 보낸 일, 그리고 신들이 자신에게 영생을 준 일을 들려줍니다. 그는 길가메시에게 이레 동안 잠들지 말아 보라고 하지만, 길가메시는 곧바로 잠에 빠집니다. 헤어질 때 그는 늙은이를 젊게 하는 풀이 있다는 비밀을 듣고 물속 깊이 들어가 그 풀을 얻지만, 샘에서 목욕하는 사이 뱀이 풀을 훔쳐 가며 허물을 벗습니다. 길가메시는 우루크로 돌아와 우르샤나비에게 성벽을 보여 줍니다. 시의 첫머리와 똑같은 장면입니다.

제12토판: 마지막 토판은 더 오래된 수메르어 시의 뒷부분을 아카드어로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는 살아 있는 엔키두가 길가메시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저승에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의 혼령이 올라와 죽은 이들의 처지를 들려줍니다. 제1~11토판의 줄거리와 맞지 않아 많은 학자들이 부록으로 봅니다.

[9][2]

중급

길가메시는 실존한 왕이었을까

길가메시(수메르어로는 빌가메스)는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의 통치자를 나열한 후대의 고대 문서 『수메르 왕명록』에 등장합니다. 이 문서는 그를 우루크 제1왕조의 다섯 번째 왕으로 적고 126년 동안 다스렸다고 합니다. 전설적인 숫자지만, 초기 왕조 시대(대략 기원전 2900~2350년)의 실제 통치자를 반영했을 수도 있는 이름들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기원전 2700년경 길가메시라는 우루크의 왕이 실제로 있었을 것이라고 보지만, 그가 살던 당대의 비문에서 그의 이름이 확인된 적은 없습니다. 수메르어 시 「길가메시와 아가」는 그를 키시의 왕 아가(악카)와 엮는데, 아가의 아버지 엔메바라게시는 아주 이른 시기의 비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사하는 바는 있지만 증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길가메시의 실존은 ‘있을 법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영웅이 되었고, 나중에는 메소포타미아 종교에서 저승의 신으로도 숭배되었다는 점입니다. 기원전 2100년경 우르 제3왕조의 왕들, 특히 슐기는 길가메시를 ‘형제’라 부르며 그의 명성을 자기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 썼습니다. 수메르어 길가메시 시들이 이 무렵 지어지거나 기록된 것도 이러한 왕실의 관심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3][4]

중급

서사시를 낳은 세계

메소포타미아에는 세계 최초의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우루크는 기원전 3000년 무렵 수만 명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자도 기원전 3300~3100년경 이곳에서 처음 회계용으로 발명되었습니다. 길가메시 이야기가 지어질 무렵 서기관들은 ‘에두바(점토판의 집)’라는 학교에서 수메르 문학을 베껴 쓰며 글을 익혔습니다. 수메르어 시들이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학습용 사본으로 많이 남은 까닭입니다.

고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2000~1600년경)에 수메르어는 더 이상 입말이 아니었지만, 중세 유럽의 라틴어처럼 계속 공부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언어는 아카드어였고, 바빌론의 함무라비(재위 기원전 1792~1750년경) 시대에 아카드어 문학이 꽃피었습니다. 최초의 통합 길가메시 서사시는 바로 이 창조적인 시기의 산물이며,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도 나오는 메소포타미아의 오랜 홍수 이야기를 끌어왔습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화는 교역과 외교망을 따라 고대 근동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600~1200년경)에는 아카드어가 국제 외교어였고,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수도 하투샤, 시리아의 에마르와 우가리트, 레반트의 므깃도에서도 서기관들이 길가메시를 베끼거나 번역했습니다. 기원전 1천년기에는 아시리아 제국이 거대한 궁정·신전 도서관에 이 텍스트들을 모았습니다.

[2][10]

중급

주제: 우정, 명성, 죽음, 그리고 지혜

우정은 이 시의 감정적 중심입니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도시와 들판, 왕과 야인이라는 정반대의 존재로 만나 대등한 벗이 됩니다. 샴하트와 음식·술·옷을 통해 엔키두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은 문명이란 무엇이며 그로써 무엇을 얻고 잃는지에 대한 성찰로 읽혀 왔습니다. 실제로 엔키두는 훗날 들판을 떠난 것을 후회합니다.

죽음과 인간의 한계는 후반부를 이끄는 힘입니다. 처음에 길가메시는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오직 신만이 영원히 사니, 사람은 오래 남을 이름을 얻으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엔키두의 죽음은 이 추상적인 생각을 개인적인 공포로 바꿉니다. 고바빌로니아판에서 시두리는 유명한 충고를 건넵니다. 배를 채우고, 춤추고, 몸을 씻고, 손잡은 아이를 아끼고 품에 안긴 아내를 기쁘게 하라, 그것이 인간의 몫이라고요. 이 대목은 표준판에는 없고, 표준판에서는 우트나피쉬팀이 죽음의 불가피함에 대해 더 긴 말을 합니다.

지혜와 앎은 후대 판본의 틀을 이룹니다. 첫 행 ‘깊은 곳을 본 자’는 길가메시를 대홍수 이전의 비밀스러운 지식을 얻어 돌아온 사람으로 그립니다. 우루크 성벽으로 시작해 성벽으로 끝나는 ‘고리 구조’는 그가 이룬 진정한 업적이 도시와 이야기 그 자체임을 암시합니다. 죽음은 받아들이되, 의미는 인간이 남긴 일과 기억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신들은 강하지만 종잡을 수 없습니다. 이슈타르의 분노, 홍수로 인류를 없애려 한 엔릴의 결정, 우트나피쉬팀의 제물 주위로 파리처럼 몰려드는 신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신적 존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기 힘이 닿지 않는 존재들이 정한 한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9][2]

중급

홍수 이야기와 그 닮은꼴들

제11토판에는 고대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 가운데 하나인 우트나피쉬팀의 홍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아 신은 그의 집 갈대 벽을 향해 말하는 방식으로 경고를 전합니다. 우트나피쉬팀은 집을 헐어 큰 배를 짓고 가족과 장인, 짐승과 재산을 싣고서, 엿새 낮 이레 밤 동안 이어진 폭풍에서 살아남습니다. 배가 니무시 산에 멈추자 그는 새들을 날려 마른 땅을 찾고 제물을 바칩니다.

『창세기』의 노아 이야기와의 유사점은 놀랍습니다. 신의 경고, 치수가 정해진 배와 역청 칠, 구조된 짐승들, 산 위에 닿은 배, 날려 보낸 새들, 그리고 신에게 닿는 향기로운 제물까지. 1872년 런던에서 이 구절이 소개되었을 때 대중은 크게 술렁였습니다.

학자들은 대체로 이 유사성을 두 텍스트보다 오래된 메소포타미아 공통의 홍수 전승으로 설명합니다. 홍수 이야기는 그보다 앞선 아카드어 『아트라하시스』 서사시(길가메시 일부 구절에서도 홍수 영웅을 아트라하시스라고 부릅니다)와 지우수드라가 등장하는 수메르어 홍수 이야기에도 나옵니다. 표준판의 편찬자는 『아트라하시스』의 홍수 이야기를 제11토판에 맞게 고쳐 넣은 것으로 보이며, 고바빌로니아판에는 홍수 이야기 전체가 들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5][10]

중급

서사시의 성장: 수메르어 시에서 표준판까지

빌가메스에 관한 수메르어 시는 다섯 편이 전하며, 대부분 고바빌로니아 시대의 사본입니다. 「길가메시와 아가」, 「길가메시와 후와와」(두 가지 판본), 「길가메시와 하늘의 황소」, 「길가메시, 엔키두, 그리고 저승」, 「길가메시의 죽음」이 그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로 이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각각 독립된 일화이며, 여기서 엔키두는 대등한 친구가 아니라 길가메시의 종으로 나옵니다.

기원전 1800~1700년경 한 아카드어 시인이 이 재료로 하나의 서사시를 만들며, 우정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 고바빌로니아판은 펜실베이니아 점토판, 예일 점토판, 시파르 출토로 여겨지는 점토판 등 조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첫 구절은 ‘모든 왕들을 뛰어넘는 자(Šūtur eli šarrī)’였습니다.

기원전 2천년기 후반에 서사시는 표준 바빌로니아어판으로 다시 다듬어졌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전승은 이를 우루크의 퇴마 사제 신-레케-운닌니의 작품으로 여겼고, 후대 우루크의 학자 가문들은 그를 조상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는 창작자라기보다 편집자(편찬자)로 보는 편이 적절합니다. 이 판본에서 서문, 새로운 첫 행 ‘깊은 곳을 본 자’, 완전한 홍수 이야기, 그리고 아마도 제12토판이 더해졌습니다.

미국 학자 제프리 티게이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진화』(1982)는 이 과정을 분석한 고전적 연구로, 히브리 성서 일부를 포함한 고대 텍스트가 옛 자료를 편집하고 결합하며 형성되는 방식을 보여 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4][7][10]

중급

잊혔다가 다시 찾다: 니네베, 조지 스미스, 그리고 새 점토판

기원전 612년 니네베가 함락되고 쐐기문자 전통이 서기 초 몇 세기 무렵 끊기면서 서사시는 잊혔습니다. 쿰란에서 발견된 아람어 『거인들의 책』에 거인의 이름으로 길가메시가 나오고, 로마 시대 그리스 작가 아일리아노스가 ‘길가모스’에 관한 뒤틀린 이야기를 전하는 정도의 희미한 메아리만 남았습니다.

1849~1851년 영국 고고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가 쿠윤지크(니네베)의 남서 궁전을 발굴했고, 1853년에는 호르무즈드 라삼이 북쪽 궁전을 찾아냈습니다. 이 발굴에서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재위 기원전 668~631년경)의 도서관에 있던 수만 점의 점토판과 조각이 나와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1872년 대영박물관에서 일하던 독학의 아시리아학자 조지 스미스는 산에 멈춘 배와 날려 보낸 새를 묘사한 제11토판 조각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1872년 12월 3일 성서고고학회에서 이 발견을 발표했고,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후원으로 1873년 니네베에 다시 가서 홍수 이야기의 조각을 더 찾아냈습니다.

복원 작업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앤드루 조지는 2003년 알려진 사본을 집대성한 비판 정본을 펴냈습니다. 2014년에는 조지와 파루크 알라위가 이라크 술라이마니야 박물관에서 새로 확인된 제5토판 조각을 발표했는데, 새와 매미와 원숭이 소리로 시끌벅적한 삼나무 숲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구절이 더해졌습니다. 2021년에는 불법 반출되었던 이른바 ‘길가메시 꿈 점토판’이 미국에서 이라크로 반환되었습니다.

[6][2][8]

중급

영향과 유산

고대에 길가메시는 근동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서사시와 호메로스의 작품, 특히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우정이나 오디세우스의 방랑 사이의 연관성을 논해 왔지만, 그것이 직접 차용인지 공통의 이야기 전통인지는 논쟁 중입니다. 홍수, 잃어버린 생명의 풀, 허물을 벗는 뱀 같은 모티프도 후대 전승에서 되풀이됩니다.

재발견 이후 이 서사시는 세계 고전이 되었습니다.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오페라·소설·연극·시·만화·그림책으로 각색되었으며, 전 세계 학교에서 가르칩니다. 20세기 초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 작품을 열렬히 찬탄했습니다. 한국어로도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날 이라크에게 길가메시는 국가적 유산입니다. 최근 수십 년간 이라크의 박물관과 유적이 파괴되고 약탈당하면서, 점토판이 보존되고 도난당하고 반환되는 과정 자체가 서사시의 현대사가 되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의미 있게 살 것인가라는 중심 질문은 지금도 모든 문화의 독자에게 말을 겁니다.

[2][9][1]

심화

학계의 논쟁과 열린 질문

연대와 저자: 고바빌로니아 서사시는 사본과 언어를 근거로 보통 기원전 1800~1700년경으로 보지만, 최초 창작 시점을 정확히 못 박을 수는 없습니다. 표준판은 관례적으로 기원전 1200~1000년경으로 보며, 신-레케-운닌니라는 저자 귀속은 기원전 1천년기의 ‘텍스트와 저자 목록’에 근거합니다. 그가 실제로 얼마나 쓰고 고쳤는지는 현재의 증거로 알 수 없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저자’ 개념 자체도 현대와 달랐습니다.

통일성과 제12토판: 제12토판이 서사시의 일부인지는 논쟁거리입니다. 길가메시를 다룬다는 이유로 기계적으로 덧붙인 부록이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사후 세계를 보여 줌으로써 죽음에 대한 탐구를 완성하는 주제적 역할이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줄거리와의 모순(엔키두가 다시 살아 있음)도 분명하지만,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의 연작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해석: 독자들은 이 시를 폭군이 지혜로운 왕으로 성숙하는 이야기, 문명에 대한 비판 또는 찬양, 애도에 대한 성찰, 왕권 이데올로기 등으로 읽어 왔습니다.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관계에 낭만적·성적 차원이 있는지도 오래 논의되었습니다. 텍스트는 곳곳에서 사랑과 혼인의 이미지를 씁니다(길가메시는 운석과 도끼 꿈을 꾸고 그것을 ‘아내처럼’ 사랑합니다). 그러나 고대의 사랑과 성의 범주는 현대의 범주와 깔끔하게 대응하지 않습니다.

다른 문학과의 관계: 히브리 성서(홍수 이야기, 그리고 시두리의 충고와 닮은 『전도서』의 ‘삶을 즐기라’는 대목)와 그리스 서사시에 미친 영향의 정도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근동 공통의 배경을 인정하지만, 직접적인 문학적 의존에 대한 논증은 사례마다 설득력이 다릅니다.

[8][10][2]

심화

1차 자료와 텍스트의 현황

서사시 전체가 온전히 담긴 사본은 하나도 없습니다. 표준판은 수십 점의 사본, 대부분 조각을 모아 복원한 것입니다. 주로 니네베에서, 그리고 아수르·님루드·술탄테페(후지리나)·바빌론·우루크 등지에서 나왔으며, 연대는 대략 기원전 9세기부터 2세기까지입니다. 서기관들은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 어쩌면 파르티아 초기까지도 이 시를 베꼈습니다. 그래도 상당 부분이 깨지거나 사라진 상태이며, 새 조각이 나올 때마다 이해가 바뀝니다.

고바빌로니아·중기 바빌로니아 시대 자료는 더 흩어져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나온 여러 판본의 낱장 점토판, 그리고 후기 청동기 시대의 하투샤(히타이트어·후르리어 번안 포함), 에마르, 우가리트, 므깃도 출토 점토판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의 텍스트가 아니라, 이야기가 여러 형태로 유통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표준 학술 정본은 앤드루 조지의 『바빌로니아 길가메시 서사시(The Babylonian Gilgamesh Epic)』(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2003)로, 쐐기문자 원문·음역·번역과 주석을 담았습니다. 수메르어 시들은 옥스퍼드의 ‘수메르 문학 전자 텍스트 코퍼스(ETCSL)’에서 음역과 번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지의 펭귄판 영어 번역(1999)을 비롯해 믿을 만한 번역이 여럿 있습니다.

[8][9][4]

심화

방법론 노트: 깨지고 겹겹이 쌓인 텍스트 읽기

번역본은 결락 부분을 괄호와 말줄임표로 표시하고, 다른 사본이나 판본으로 빠진 행을 복원하곤 합니다. ‘완역’이라는 현대 번역이 수백 년 떨어진 판본의 구절을 이어 붙인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책임 있는 번역은 각 구절이 어느 판본에서 왔는지 밝히지만, 대중적인 재화(再話)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쐐기문자 기호는 여러 방식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하나의 기호가 음절, 단어, 또는 뜻을 분류하는 한정사가 될 수 있음). 아카드어 시는 각운이 아니라 대구와 행 구조에 기대기 때문에, 번역자는 반복·정형구·말놀이를 어떻게 옮길지 선택해야 하고, 그 결과 번역마다 어조가 크게 달라집니다.

끝으로, 최근 수십 년의 텍스트 자료 상당수는 약탈되었거나 출처가 불분명한 점토판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유물을 출판하면 지식은 늘지만 불법 유물 거래를 부추길 수 있어, 학계에서는 그 윤리를 두고 논쟁합니다. 2021년 꿈 점토판 반환은 길가메시 연구가 문화유산과 소유권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음을 일깨워 줍니다.

[8][2]

핵심 개념

대등한 벗의 우정
경쟁자로 만난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가 되고, 엔키두를 잃는 경험이 길가메시를 바꿔 놓는다.
필멸성
시의 중심 문제. 인간은 죽고 신만이 영원히 산다. 죽음을 피하려는 길가메시의 탐색은 실패로 끝난다.
영원한 명성
초반에 길가메시는 영웅적 업적과 오래 남을 이름으로 죽음에 맞서려 한다. 후반에는 성벽과 이야기 자체가 그 역할을 맡는다.
문명과 야생
야인이 도시인이 되는 엔키두의 변화는 인간이 문명으로 무엇을 얻고 잃는지를 묻는다.
대홍수 이전의 지혜
표준판은 길가메시를 ‘깊은 곳을 본 자’, 곧 우트나피쉬팀에게서 태곳적 지식을 가져온 사람으로 그린다.
고리 구조
우루크 성벽으로 시작해 성벽으로 끝나는 구성이 이야기를 감싸며,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종잡을 수 없는 신들
이슈타르와 엔릴 같은 신들은 분노나 변덕으로 움직이고, 인간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한계 안에서 살아야 한다.

기록

  1. 약 기원전 2700년 — 길가메시라는 우루크의 왕이 이 무렵 다스렸을 수 있다(당대 비문으로는 확인되지 않음).
  2. 약 기원전 2100년 — 우르 제3왕조의 왕들이 길가메시를 기리고, 그에 관한 수메르어 시들이 지어지거나 기록된다.
  3. 약 기원전 1800년 — 고바빌로니아 시대: 한 아카드어 시인이 이야기들을 하나의 서사시로 엮는다(‘모든 왕들을 뛰어넘는 자’).
  4. 약 기원전 1400년 — 후기 청동기 시대: 하투샤·에마르·우가리트·므깃도에서 길가메시가 필사·번역된다.
  5. 약 기원전 1200년 — 신-레케-운닌니의 작업으로 전해지는 표준 바빌로니아어판(‘깊은 곳을 본 자’)이 형성된다.
  6. 기원전 668년 — 아슈르바니팔이 아시리아 왕위에 오른다. 니네베의 그의 도서관이 많은 길가메시 점토판을 보존하게 된다.
  7. 기원전 612년 — 니네베가 파괴되고 도서관의 점토판들이 폐허에 묻힌다.
  8. 1849년 — 레이어드가 쿠윤지크(니네베) 발굴을 시작하고, 1853년 라삼이 북쪽 궁전을 찾아낸다.
  9. 1872년 — 조지 스미스가 런던에서 홍수 점토판의 발견을 발표한다.
  10. 2003년 — 앤드루 조지가 바빌로니아 서사시의 표준 비판 정본을 펴낸다.
  11. 2014년 — 술라이마니야 박물관에서 새로 확인된 제5토판 조각이 발표된다.
  12. 2021년 — ‘길가메시 꿈 점토판’이 미국에서 이라크로 반환된다.

용어 풀이

쐐기문자(설형문자)
점토에 쐐기 모양 자국을 눌러 쓴 문자 체계. 기원전 3300년경부터 서기 1세기경까지 고대 근동에서 쓰였다.
아카드어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셈어족 언어로, 바빌로니아 방언과 아시리아 방언이 있다. 이 서사시의 언어.
수메르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언어로, 알려진 어떤 언어와도 계통이 연결되지 않는다. 초기 길가메시 시들의 언어.
메소포타미아
그리스어로 ‘강과 강 사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으로, 대부분 지금의 이라크와 시리아·튀르키예 일부.
고바빌로니아 시대
함무라비의 치세를 포함하는 기원전 2000~1600년경. 최초의 길가메시 서사시가 지어진 시기.
표준 바빌로니아어판
기원전 1천년기에 필사된, 12개 점토판으로 된 후대 판본.
토판(점토판)
쐐기문자를 쓴 점토 판. 서사시는 장(章)처럼 ‘토판’ 단위로 나뉜다.
아시리아학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언어·텍스트·문화를 연구하는 학문.
간기(콜로폰)
점토판 끝에 제목, 토판 번호, 필사자나 소유자 등을 적어 둔 기록.
편찬자(편집자)
기존 텍스트를 고치고 결합해 새 판본을 만드는 사람.

묻고 답하기

『길가메시 서사시』는 얼마나 오래되었나요?

길가메시에 관한 수메르어 시는 기원전 2100년경, 처음으로 하나로 엮은 아카드어 서사시는 기원전 1800~1700년경, 가장 잘 알려진 12토판 판본은 기원전 1200~1000년경의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인가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편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이지만, 가장 오래된 글은 아닙니다. 『슈루파크의 교훈』이나 엔헤두안나의 찬가 같은 수메르 문학이 더 오래되었습니다.

길가메시는 실제로 있었던 사람인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기원전 2700년경 우루크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고 많은 역사가가 전설 뒤에 실제 왕이 있었다고 보지만, 그의 생전 비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길가메시의 홍수와 노아의 홍수는 같은 이야기인가요?

세부가 많이 닮았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는 두 이야기 모두 『아트라하시스』와 수메르 홍수 이야기에도 나오는 더 오래된 메소포타미아 홍수 전승에서 비롯했다고 봅니다.

뱀은 왜 풀을 먹었나요?

이야기에서 뱀은 풀 냄새를 맡고 길가메시가 목욕하는 사이 풀을 가져간 뒤 허물을 벗습니다. 뱀은 허물을 벗으며 새로워지는데 인간은 그럴 수 없는 까닭을 설명하는 옛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길가메시는 무엇을 깨닫나요?

시는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길가메시가 우루크의 성벽을 보여 주며 끝나는데, 많은 독자는 이를 죽음을 받아들이고 오래 남는 인간의 업적을 소중히 여기게 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서사시 전체가 남아 있나요?

아닙니다. 수많은 조각을 모아 복원한 것이며, 아직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새 조각이 계속 확인되고 있습니다.

어떤 번역으로 읽으면 좋을까요?

영어로는 앤드루 조지의 펭귄판(1999)이 정확하고 구절마다 출처 판본을 밝혀 널리 신뢰받습니다. 한국어 번역본도 여럿 있으니 판본 표시와 주석이 충실한 책을 고르는 것이 좋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길가메시 서사시. 위키백과
  2. Epic of Gilgamesh. Wikipedia
  3. Gilgamesh. Wikipedia
  4. Gilgamesh, Enkidu, and the Netherworld. Wikipedia
  5. Gilgamesh flood myth. Wikipedia
  6. Library of Ashurbanipal. Wikipedia
  7. Sîn-lēqi-unninni. Wikipedia
  8. Andrew R. George, The Babylonian Gilgamesh Epic: Introduction, Critical Edition and Cuneiform Texts.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9. Andrew George, The Epic of Gilgamesh: A New Translation. Penguin Books, 1999
  10. Jeffrey H. Tigay, The Evolution of the Gilgamesh Epic.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82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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