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크노소스

Κνωσός(크노소스), 선문자 B ko-no-so

약 기원전 1900–1375년 · 크레타섬 크노소스

한 문장으로

크레타섬의 크노소스는 청동기 시대 미노아 문명의 가장 큰 중심지로, 약 4,000년 전 안뜰과 계단과 그림 그린 방들이 미로처럼 이어지도록 지은 궁전이 있던 곳이며, 뒷날 그리스인들은 이곳을 미노스 왕과 라비린토스(미궁)의 고향으로 기억했어요.

크노소스
이미지: Bernard Gagnon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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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주 먼 옛날, 그리스의 큰 섬 크레타에 사람들이 방이 천 개도 넘는 거대한 건물을 지었어요. 여러 층으로 되어 있었고, 넓은 계단, 욕실, 커다란 항아리가 가득한 창고가 있었고, 벽에는 돌고래와 꽃, 황소 위를 뛰어넘는 젊은이들이 그려져 있었어요. 우리는 이곳을 크노소스라고 부르고, 여기 살던 사람들을 미노아인이라고 불러요.

건물이 워낙 크고 복도가 많아서 길을 잃기 쉬웠어요. 수천 년 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곳에 관한 이야기를 지어냈어요. 크레타의 미노스 왕이 반은 사람, 반은 황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라비린토스라는 미로 속에 가두어 두었다는 거예요. 영웅 테세우스는 공주 아리아드네가 준 실타래 덕분에 미로에서 빠져나왔대요.

진짜 미노아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남긴 것은 아니에요. 그들은 선문자 A라는 글자로 글을 썼는데, 아직 아무도 읽지 못해요.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탐정처럼 건물, 그릇, 그림, 도구를 살펴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내요.

미노아 사람들은 훌륭한 뱃사람이자 장사꾼이었어요. 배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 아름다운 도자기를 싣고 바다 건너 이집트와 여러 나라로 가서, 구리와 주석과 금을 싣고 돌아왔어요. 이집트의 그림에는 크레타 사람들이 선물을 가져오는 모습도 그려져 있어요.

약 125년 전, 아서 에번스라는 영국 고고학자가 크노소스를 발굴했어요. 그는 콘크리트로 방 일부를 다시 짓고 벽화를 본떠 그려 놓아서, 방문객이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다시 지은 것 가운데 일부는 짐작이어서,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그것을 두고 토론해요.

한눈에 보기

시기
기원전 7000년 무렵부터 사람이 삶. 궁전은 기원전 1900년 무렵 건립, 기원전 1700년 무렵 이후 재건, 기원전 14세기 또는 그 뒤까지 사용
위치
그리스 크레타섬 이라클리온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약 5km, 케팔라 언덕
문화
미노아 문명(청동기 시대 크레타). 뒤에 미케네 그리스인의 행정 중심지
규모
넓은 직사각형 중앙 안뜰을 둘러싼 약 2만㎡의 궁전 복합체. 그 둘레에 훨씬 큰 도시가 있었음
문자
크레타 상형문자와 선문자 A(미해독). 미케네 그리스어로 쓴 선문자 B 점토판
발굴
미노스 칼로케리노스(1878~79), 아서 에번스(1900년부터). 20세기 초에 대규모 부분 복원
지정
‘미노아 궁전 중심지’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2025)
출토품
벽화, 인장, 도자기, 조각상 등. 대부분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소장

쉬움

크노소스는 어떤 곳인가

크노소스는 크레타섬의 현대 도시 이라클리온 바로 바깥에 있는 고고학 유적이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흔히 ‘미노스 궁전’이라 불리는 청동기 시대의 거대한 건물 복합체로, 크레타에 있는 비슷한 복합체들 가운데 가장 크다. 이를 지은 사람들을 미노아인이라 부르는데, 이는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가 전설의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서 만든 현대의 이름이다.

궁전은 한꺼번에 지은 단일 건물이 아니다. 수백 년에 걸쳐 커다란 안뜰을 중심으로 자라났고, 사방으로 두세 층 높이의 건물 날개가 들어섰다. 그 안에는 창고, 공방, 성소, 의례용 홀, 생활 공간이 있었고, 배수로와 채광정(採光井)이 정교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궁전 둘레에는 집과 길, 무덤이 있는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크노소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7000년 무렵 처음 사람이 언덕에 살기 시작했고, 첫 궁전이 서기 전까지 집터의 층이 여러 미터 높이로 쌓였다.

크노소스가 중요한 까닭은 두 가지다. 에게해 최초의 복잡한 도시 문명인 미노아 문명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유적이라는 점, 그리고 그리스 신화를 통해 거의 3,000년 동안 미노스, 다이달로스, 미노타우로스, 라비린토스의 고향으로서 유럽인의 상상력을 빚어 왔다는 점이다.

[1][2][6][7]

쉬움

궁전을 ‘읽는’ 법

궁전의 한가운데는 중앙 안뜰이다. 길이 약 50m의 돌 깔린 직사각형 마당으로, 대략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다. 미노아 궁전에는 모두 이런 안뜰이 있으며, 모임과 의식에 쓰였을 것이다. 주요 건물 날개는 모두 이 안뜰을 향해 열려 있다.

서쪽 날개에는 저장과 의례를 위한 방들이 있었다. 긴 복도를 따라 좁은 창고들이 늘어서 있고, 그 안에 피토스라 부르는 거대한 항아리가 올리브기름, 포도주, 곡식을 담고 있었다. 바닥의 돌로 짠 구덩이에는 귀중품을 두었을 수도 있다. 안뜰 옆에는 이른바 ‘옥좌의 방’이 있는데, 벽에 기대 놓인 돌 의자 양옆에 그리핀이 그려져 있고, 돌 벤치와 에번스가 ‘정화의 수조’라 부른 움푹 꺼진 공간이 있다. 그 근처의 작은 성소들에서 에번스는 뱀을 든 여인 조각상을 찾아냈다.

동쪽 날개는 비탈에 기대어 지은 이른바 ‘주거 구역’이다. ‘대계단’이 채광정, 곧 아래층 방에 햇빛과 바람을 들이는 수직 통로를 따라 여러 층 아래로 내려간다. 에번스는 이곳에서 ‘왕의 메가론’과 ‘왕비의 메가론’을 가려냈고, 욕조로 해석한 것이 있는 방과 배수 시설로 물을 내리는 변소도 찾았다. 이런 이름은 모두 에번스의 해석이지 고대의 이름이 아니다.

그 밖에 눈여겨볼 것으로는 큰 마름돌로 쌓은 서쪽 정면, 벽화로 장식된 긴 복도가 딸린 의례용 입구, 황소 뿔 한 쌍 모양의 신성한 상징인 ‘봉헌의 뿔’, 그리고 돌 부재에 기호로 새긴 양날 도끼(라브리스)가 있다. 오늘날 방문객이 보는 것 가운데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붉은 기둥을 비롯한 상당 부분은 복원한 것이지만, 원래의 기둥 받침과 미노아인이 그린 건물 그림에 근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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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삶, 예술, 그리고 바다

미노아의 화가들은 젖은 석회 회반죽 위에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으로 벽을 장식했다. 크노소스의 유명한 장면으로는 젊은이들이 달려드는 황소의 뿔을 잡고 등 위로 재주넘기를 하는 ‘황소 뛰어넘기 벽화’, 선물을 든 사람들이 줄지어 가는 ‘행렬 벽화’, ‘잔을 든 사람’, ‘돌고래 벽화’, 그리고 이른바 ‘백합의 왕자’가 있다. 색으로 인물을 구분하는 관습이 있어서, 남자는 대개 적갈색, 여자는 흰색으로 그렸다.

미노아의 장인들은 작은 공예품에도 뛰어났다. 단단한 돌에 작은 장면을 새긴 인장, 바다 생물과 식물을 그린 얇고 섬세한 도자기, 파이앙스·상아·금으로 만든 물건들을 만들었다. 크노소스의 ‘작은 궁전’에서 나온 황소 머리 모양의 돌 그릇은 눈이 수정으로 되어 있고, 뿔은 한때 금으로 덮여 있었다.

미노아인은 농사, 목축, 교역으로 살았다. 크레타는 올리브기름, 포도주, 양모와 직물을 생산했지만 금속이 없었기 때문에, 배를 타고 에게해 건너 키프로스, 레반트, 이집트까지 오갔다. 이집트 문헌은 대개 크레타로 보는 ‘케프티우’라는 땅을 언급하며, 기원전 15세기 이집트 무덤 벽화에는 케프티우 사람들이 그릇을 선물로 가져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황소는 미노아의 예술과 종교 어디에나 등장한다. 황소 뛰어넘기, 봉헌의 뿔, 황소 모양 그릇이 그렇다. 뒷날 그리스인들이 크레타를 황소 머리 괴물과 연결한 까닭도 여기서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다.

[1][2]

중급

건설, 파괴, 재건

고고학자들은 미노아 청동기 시대를 전기·중기·후기 미노아로 나눈다. 에번스와 그의 조수 덩컨 매켄지가 토기 양식을 바탕으로 만든 체계다. 크노소스의 첫 궁전은 중기 미노아 시대인 기원전 1900년 무렵, 파이스토스와 말리아의 궁전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이 ‘구궁전’ 시대에는 크레타 상형문자가 쓰였고, 카마레스 양식이라 불리는 화려하고 섬세한 토기가 만들어졌다.

기원전 1700년 무렵 궁전들은 아마도 지진으로 크게 부서졌다. 궁전은 더 웅장한 규모로 다시 지어졌고, 미노아 문명의 절정인 ‘신궁전’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크노소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이 시기의 것이다. 이제 선문자 A가 주된 행정 문자가 되었다.

이 시기, 아마도 기원전 16세기에 크레타에서 북쪽으로 약 110km 떨어진 테라섬(산토리니)의 화산이 엄청난 규모로 분화했다. 이 분화로 테라의 미노아 도시 아크로티리가 묻혔고, 크레타에는 쓰나미와 화산재가 덮쳤다. 정확한 연대는 논쟁 중이며, 분화가 곧바로 미노아 문명을 끝낸 것은 아니었다. 크노소스는 그 뒤에도 이어졌고 오히려 번성하기까지 했다.

기원전 1450년 무렵 크레타 곳곳의 유적이 불에 타 파괴되었다. 크노소스는 피해가 덜해 섬의 중심지로 살아남았지만, 이제 행정에는 그리스어를 적도록 고친 문자인 선문자 B가 쓰였다. 이는 본토의 미케네 그리스인이 권력을 잡았거나, 적어도 그리스어를 쓰는 지배층이 궁전을 운영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궁전의 마지막 파괴는 관례적으로 기원전 14세기, 약 기원전 1375~1350년으로 보지만 더 늦게 보는 학자도 있다. 그 뒤에도 사람들은 크노소스에 계속 살았고, 기원전 1천년기에는 크레타의 주요 그리스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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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누가 다스렸나? 사회와 종교

선문자 A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미노아의 정치에 관해 직접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에번스는 크노소스에서 사제왕이 평화로운 섬 제국을 다스렸다고 상상하며 이를 ‘미노아의 평화(팍스 미노이카)’라 불렀고, 미노스가 처음으로 해군을 만들었다는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말을 좇아 바다를 지배하는 해상 제국을 떠올리기도 했다.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더 신중하다. 크레타가 크노소스 아래 통일되어 있었는지, 궁전들이 독립된 중심지였는지, 권력이 어떻게 나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청동기 시대 미술로서는 드물게, 미노아의 그림에는 왕이나 전투, 적을 내려치는 통치자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행렬, 의식, 자연, 그리고 흔히 여사제나 여신으로 보이는 여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때문에 여성이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가졌으리라는 견해가 있지만, 모계 사회였다는 옛 주장은 뚜렷한 증거가 없다.

미노아의 종교 행위는 궁전, 집 안의 성소, 동굴, 그리고 산꼭대기 성소에서 이루어졌다. 산꼭대기 성소에는 참배자들이 흙으로 빚은 작은 상을 바쳤다. 중요한 상징으로는 양날 도끼, 봉헌의 뿔, 신성한 나무와 기둥이 있다. 1903년 크노소스에서 발견된 ‘뱀의 여신’ 조각상은 미노아 유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에 속하지만, 그 정확한 뜻은 논쟁 중이다.

평화로운 미노아인이라는 그림은 무기, 몇몇 유적의 방어 시설, 인신 공양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증거로 도전받아 왔다. 크노소스에서는 1980년 무렵 후기 미노아 시대의 한 건물에서 칼자국이 있는 어린이 뼈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의례의 흔적으로 보는 이도 있고 달리 설명하는 이도 있다. 이 논쟁은 에번스가 일찍이 그린 상이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던지는 질문까지 얼마나 규정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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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크노소스의 문자: 상형문자, 선문자 A, 선문자 B

크노소스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문자 세 가지가 모두 나왔다. 주로 인장에 쓰인 크레타 상형문자는 구궁전 시대에 나타난다. 점토판, 봉인, 돌 제단, 금속 물건에 적힌 음절 문자인 선문자 A는 신궁전 시대에 크레타 전역에서 쓰였다. 두 문자 모두 해독되지 않았으며, 그 밑에 깔린 미노아어도 알려져 있지 않다.

에번스는 세 번째 문자로 쓴 점토판과 조각도 수천 점 찾아내고 이를 선문자 B라 이름 붙였다. 이 점토판은 굽지 않은 흙으로 만든 것이어서, 궁전을 무너뜨린 불에 단단히 구워진 덕분에 남을 수 있었다. 1952년 건축가 마이클 벤트리스는 앨리스 코버의 분석을 바탕으로, 언어학자 존 채드윅과 함께 선문자 B가 초기 그리스어, 곧 오늘날 미케네 그리스어라 부르는 언어를 적은 것임을 밝혀냈다.

해독은 크노소스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점토판은 행정 기록이다. 사람 명단, 양과 양모, 직물, 전차와 갑옷, 토지, 신들에게 바친 제물이 적혀 있다. 제우스와 아테나처럼 뒷날 그리스 종교에서 익숙한 신의 이름도 보인다. 크노소스의 한 점토판에는 ‘라비린토스의 여주인’(da-pu2-ri-to-jo po-ti-ni-ja)에게 꿀을 바친 기록이 있어, ‘라비린토스’라는 말이 이미 청동기 시대에 크노소스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선문자 B는 마지막 궁전 시기의 크노소스가 그리스어로 운영되었음을 증명한다. 동시에 어려운 연대 문제를 낳는다. 선문자 B 점토판은 정확히 언제 쓰였고 궁전은 언제 무너졌는가? 이 문제는 뒤에서 다룬다.

[3][1][2]

중급

궁전에서 신화로: 미노스와 라비린토스

그리스 신화는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아들이자 크레타의 강력한 왕인 미노스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아내 파시파에는 황소 머리를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고, 미노스는 이 괴물을 장인 다이달로스가 지은 미로 라비린토스에 가두었다. 아테네는 괴물의 먹이로 젊은 남녀를 바쳐야 했는데,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괴물을 죽였다.

호메로스도 이미 크노소스를 알고 있었다. 『오디세이아』는 크레타를 도시가 많은 땅으로 묘사하며, 그 가운데 미노스가 다스린 크노소스를 든다. 『일리아스』에서는 미노스의 손자 이도메네우스가 크레타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로 간다. 이 서사시들은 궁전이 무너지고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지어졌지만, 청동기 시대 크레타의 위상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신화를 유적과 곧바로 잇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방이 많은 복잡한 궁전을 라비린토스로, 황소 뛰어넘기를 미노타우로스 이야기의 기원으로, 양날 도끼(라브리스)를 ‘라비린토스’라는 낱말의 어원으로 보는 식이다. 매력적인 연결이지만 확실하지는 않으며, 특히 라브리스 어원설은 언어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크노소스를 옛 강대국과 연결했고, 그 연상이 최초의 발굴자들을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 신화는 오비디우스와 중세 지도에서 피카소의 미노타우로스, 현대 소설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긴 생명을 누렸고, 크노소스를 유럽에서 상상력이 가장 짙게 깃든 장소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1][7]

중급

발굴과 에번스의 복원

1878~79년 이라클리온의 상인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미노스 칼로케리노스가 이곳에 시굴 도랑을 파서 피토스가 가득한 창고를 찾아냈다. 당시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발굴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트로이와 미케네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도 이 땅을 사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크레타가 자치를 얻은 뒤, 땅의 일부를 사 두었던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가 1900년 3월 덩컨 매켄지, 그리고 많은 크레타인 일꾼과 함께 대규모 발굴을 시작했다. 몇 차례의 발굴 철 만에 궁전 대부분이 드러났다. 에번스는 1921년부터 1935년까지 네 권으로 펴낸 『크노소스의 미노스 궁전』에 그 성과를 발표했다.

에번스는 당시 어느 발굴자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발굴한 것을 다시 지었다. 유적을 보호하고 방문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로 1920~30년대에 철근 콘크리트로 벽, 기둥, 계단, 위층을 복원했고, 벽화 모사본을 그려 벽에 걸었다. 스위스 화가 에밀 질리에롱 부자는 작은 조각들을 바탕으로 많은 벽화를 복원했다.

오늘날 이 복원물은 유적 역사의 일부로서 그 자체로 보호받는다. 방문객이 여러 층 건물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에번스의 해석을 콘크리트로 굳혀 놓았다. ‘백합의 왕자’ 같은 일부 복원 벽화는 서로 속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조각들을 합친 것이고, 여러 방 이름에는 왕권과 종교에 관한 에번스의 가정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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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논쟁: 연대, 선문자 B 점토판, 그리고 ‘궁전’이라는 개념

선문자 B 문서의 연대. 에번스는 궁전의 파괴, 곧 선문자 B 점토판의 연대를 기원전 1400년 무렵으로 보았다. 1960년대에 언어학자 레너드 파머는 에번스와 매켄지의 발굴 기록에 이의를 제기하며, 점토판이 훨씬 늦은 파괴층, 곧 본토 필로스의 파괴(기원전 1200년 무렵)에 가까운 시기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파머–보드먼 논쟁’은 발굴 일지를 집중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주요 문서군을 기원전 14세기로 보지만, ‘전차 점토판의 방’에서 나온 점토판은 더 이를 수 있으며, 크노소스의 후대 거주와 행정 문제는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

테라 분화. 테라에 묻힌 올리브 가지를 비롯한 방사성탄소 측정은 기원전 17세기 후반이나 16세기를 가리키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이집트 연대와의 전통적인 고고학적 대응은 16세기 중엽이나 그 뒤를 가리킨다. 최근 방사성탄소 보정 곡선이 개정되면서 차이가 좁혀졌지만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이 논쟁은 신궁전 시대 전체, 곧 크노소스의 가장 유명한 시기의 절대 연대에 영향을 준다.

‘궁전’이란 무엇이었나? 에번스는 왕의 거처라고 전제했다. 오늘날 많은 학자는 그곳에 왕이 살았는지, 이 복합체가 주로 종교적이었는지 행정적이었는지 공동체적이었는지, 서아시아의 궁전 모델이 크레타에 맞기는 한지 묻는다. 어떤 학자들은 ‘안뜰 중심 건물’ 같은 중립적인 용어를 선호한다. 중앙 안뜰은 큰 공동 의식을, 창고는 물자의 수집과 재분배를 짐작하게 하지만, 이 기능들 사이의 관계는 논쟁 중이다.

미노아인과 미케네인.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어떻게 크노소스를 장악했는지, 곧 정복인지, 점진적 유입인지, 현지 지배층과의 동맹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무덤, 토기, 그리고 최근에는 고대 DNA 연구가 이 질문에 쓰이고 있는데, 이는 고고학적 문화가 언어나 집단과 어떻게 관련되는가라는 더 큰 문제와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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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증거, 방법, 그리고 오늘날의 보존

크노소스에 관한 지식의 상당 부분은 현대적 기록 방법이 나오기 전인 20세기 초의 발굴에 기대고 있다. 에번스와 매켄지는 발굴 일지를 남겼지만 층위 정보가 불완전한 경우가 많았고, 많은 퇴적층이 통째로 제거되었다. 이후 아테네 영국 고고학 연구소와 그리스 고고학청에서 일한 발굴자들은 유적 일부를 다시 조사하고, 바닥 아래와 주변 도시를 발굴하며, 보관된 출토품을 재검토해 왔다.

오늘날에는 과학적 방법이 큰 몫을 한다.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은 연대를 다듬고, 토기와 점토의 암석학·화학 분석은 교역을 추적하며, 동물 뼈와 식물 유체 분석은 식생활과 경제를 밝힌다. 동위원소 연구는 사람의 이동을 따라가고, 크노소스 계곡 전체에 대한 지표 조사는 도시가 어떻게 자랐는지 보여 준다. 벽화는 현미경과 안료 분석으로 연구하여 고대의 채색과 현대의 복원을 가려낸다.

보존에는 특별한 어려움이 있다. 초기의 콘크리트 복원물은 낡았고, 그 속의 철근은 녹슬었다. 보존 전문가들은 연약한 고대 유구와 역사적 복원물을 함께 지키면서 엄청난 수의 방문객도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 당국은 보호 지붕, 관람로, 복원 사업을 도입해 왔다.

2025년 크노소스는 크레타의 다른 다섯 유적(파이스토스, 말리아, 자크로스, 조민토스, 키도니아)과 함께 ‘미노아 궁전 중심지’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다. 이 등재는 궁전들을 한 묶음으로 인정한 것으로, 크노소스를 따로 떼어 보기보다 미노아 중심지들의 연결망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관점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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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미노아 문명
에번스가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 부른 청동기 시대 크레타의 문화. 궁전, 벽화, 항해, 교역으로 이름났다.
안뜰 중심 궁전
미노아 궁전은 큰 중앙 안뜰을 중심으로 저장·의례·작업·생활을 위한 건물 날개가 둘러싼 구조다.
파괴와 재건
크노소스는 지진, 화재, 테라 분화 뒤에 여러 차례 부서지고 다시 지어졌다.
해독되지 않은 문자
크레타 상형문자와 선문자 A는 아직 읽을 수 없어, 미노아 역사는 대부분 고고학에 기댄다.
미케네의 장악
선문자 B 점토판은 마지막 궁전 시기에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크노소스를 운영했음을 보여 준다.
신화와 기억
미노스, 미노타우로스, 라비린토스에 관한 그리스 이야기는 청동기 시대 크레타에 대한 먼 기억을 간직한다.
해석으로서의 복원
에번스의 콘크리트 복원은 방문객이 유적을 보는 방식을 규정하며, 이제 그 자체로 유적 역사의 일부다.

기록

  1. 약 기원전 7000년 — 크노소스의 케팔라 언덕에 첫 신석기 정착지가 생긴다.
  2. 약 기원전 1900년 — 파이스토스·말리아의 궁전과 함께 첫 궁전이 지어진다.
  3. 약 기원전 1700년 — 지진 피해 뒤 궁전이 더 웅장하게 재건된다(신궁전 시대).
  4. 약 기원전 1600년 — 테라(산토리니) 화산이 분화한다. 정확한 연대는 논쟁 중이다.
  5. 약 기원전 1450년 — 크레타 곳곳이 파괴된다. 크노소스는 선문자 B를 쓰는 그리스어 사용(미케네) 행정 아래 살아남는다.
  6. 약 기원전 1375년 — 궁전의 마지막 파괴에 대한 관례적 연대(기원전 1375~1350년 무렵, 더 늦게 보는 견해도 있음).
  7. 1878년 — 미노스 칼로케리노스가 이 유적을 처음 발굴한다.
  8. 1900년 — 아서 에번스가 궁전의 대규모 발굴을 시작한다.
  9. 1921년 — 에번스가 『크노소스의 미노스 궁전』 제1권을 펴낸다(1935년 완간).
  10. 1952년 — 마이클 벤트리스가 선문자 B를 해독해 그리스어임을 밝힌다.
  11. 2025년 — 크노소스가 ‘미노아 궁전 중심지’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용어 풀이

청동기 시대
청동(구리와 주석의 합금)이 도구와 무기의 주재료였던 시대. 에게해에서는 대략 기원전 3100~1100년.
미노아
청동기 시대 크레타 문명을 가리키는 말. 아서 에번스가 만든 현대 용어.
미케네
미케네의 이름을 딴 청동기 시대 그리스 본토 문명을 가리키는 말.
프레스코
젖은 석회 회반죽 위에 그려 색이 벽과 하나로 굳게 하는 벽화 기법.
피토스
기름, 포도주, 곡식을 담던 아주 큰 토기 항아리. 복수형은 피토이.
채광정
건물 안에 뚫어 아래층 방에 빛과 바람을 들이는 수직 통로.
라브리스
양날 도끼. 미노아의 중요한 종교 상징.
봉헌의 뿔
황소 뿔 한 쌍 모양의 미노아 성스러운 상징. 건물과 제단 위에 두었다.
선문자 A / 선문자 B
서로 관련된 에게해의 음절 문자. 선문자 A(미노아)는 미해독이고, 선문자 B는 미케네 그리스어를 적었다.
신궁전 시대
미노아 크레타의 ‘새 궁전’ 시기. 기원전 1700~1450년 무렵으로 문명의 절정기다.

묻고 답하기

정말 미노타우로스가 사는 미로가 있었나요?

미노타우로스는 신화예요. 하지만 궁전은 거대하고 미로 같았고, 황소는 미노아 종교에서 중요했으며, 크노소스의 청동기 시대 점토판에 ‘라비린토스의 여주인’이 나와요.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먼 기억이 담겨 있을지도 몰라요.

미노아 사람들이 쓴 글을 읽을 수 있나요?

아직은 못 읽어요. 선문자 A와 크레타 상형문자는 해독되지 않았어요. 마지막 시기에 크노소스에서 쓴 선문자 B는 그리스어를 적은 것이라 읽을 수 있어요.

기둥은 왜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요?

미노아의 기둥은 나무줄기로 만들었는데, 아마 거꾸로 세웠던 것 같아요. 복원한 기둥은 원래의 기둥 받침과 미노아 그림에 나오는 모양을 따랐어요.

테라 화산 폭발이 미노아 문명을 무너뜨렸나요?

곧바로 그런 것은 아니에요. 큰 피해를 주었지만 크노소스는 그 뒤로도 오래 이어졌어요. 이후의 쇠퇴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고 지금도 논쟁 중이에요.

방문객이 보는 것 가운데 얼마나 원래 것인가요?

기초, 아래쪽 벽, 바닥, 많은 돌은 원래 것이지만, 위층, 기둥, 채색된 벽, 많은 지붕은 에번스 팀이 20세기에 복원한 것이에요.

크노소스에는 왕이 있었나요?

에번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미노아 미술에는 통치자가 거의 나오지 않아요. 학자들은 크노소스에 왕이 있었는지, 사제 지배층이 있었는지, 더 집단적인 권력 형태였는지 논쟁하고 있어요.

선문자 B 점토판의 연대는 왜 논쟁거리인가요?

초기 발굴 기록이 불완전해서 점토판이 어느 파괴층에서 나왔는지를 두고 학자들이 다투어 왔어요. 오늘날 대부분은 주요 문서군을 기원전 14세기로 봐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Knossos. Wikipedia
  2. Minoan civilization. Wikipedia
  3. Linear B. Wikipedia
  4. Arthur Evans. Wikipedia
  5. Minoan eruption. Wikipedia
  6. Minoan Palatial Centres.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7. 크노소스. 위키백과
  8. Arthur Evans, The Palace of Minos at Knossos (4 vols.). Macmillan, 1921–1935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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