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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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북아메리카에 아직 자동차도 말도 쇠 연장도 없던 시절에 미시시피강 가의 한 도시에 수천 명이 모여 살았어요. 오늘날 우리는 이 도시를 카호키아라고 불러요. 지금의 미국 일리노이주, 세인트루이스시에서 강 건너편에 있었지요.
카호키아 사람들은 흙으로 거대한 언덕을 쌓았어요. 손수레도, 짐을 나를 큰 동물도 없었어요. 돌과 나무, 조개껍데기로 만든 도구로 흙을 파서 바구니에 담고, 등에 지고 날랐어요. 그렇게 몇 년이고 되풀이했지요. 가장 큰 언덕인 ‘몽크스 마운드’는 10층 건물만큼 높고, 밑바닥 넓이는 이집트의 대피라미드보다 넓어요.
몽크스 마운드 앞에는 축구장 서른다섯 개쯤 되는 넓고 평평한 광장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여기 모여 축제를 열고 ‘청키’라는 놀이를 했어요. 한 사람이 둥근 돌을 굴리면 다른 사람들이 긴 막대를 던져 돌이 멈출 자리를 맞히는 놀이예요.
카호키아 사람들은 농부였어요. 옥수수와 호박 같은 작물을 기르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고, 야생 먹을거리도 모았어요. 상인들은 북쪽 오대호에서 반짝이는 구리를, 멀리 남쪽 멕시코만에서 조개껍데기를 가져왔어요.
이 사람들은 하늘을 꼼꼼히 관찰했어요. 거대한 나무 기둥을 동그랗게 세웠는데,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우드헨지’라고 불러요. 계절이 바뀌는 날을 알아내는 데 쓰였을지도 몰라요.
삼백 년쯤 지나자 사람들은 조금씩 떠났고, 1350년 무렵에는 도시가 거의 비었어요. 왜 떠났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몰라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에요. 오늘날 오세이지족, 퐁카족 같은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 카호키아를 자기 역사의 일부로 기억하고, 지금도 이곳을 성스러운 곳으로 찾아와요.
한눈에 보기
- 시기
- 도시 번성기 1050~1350년경. 그 이전 600년경부터 마을이 있었고 1350~1400년경 대부분 버려짐
- 위치
- 미국 일리노이주 콜린스빌 근처,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맞은편 미시시피강 범람원 ‘아메리칸 보텀’
- 문화
- 미시시피 문화 — 그 가운데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중심지
- 규모
- 고대 도시는 약 16km², 보호 구역인 주립 사적지는 약 890ha(2,200에이커)
- 둔덕
- 전성기에는 120기에 이르렀을 수 있음. 약 80기가 남아 있고 그중 72기가 주립 사적지 안에 있음
- 인구
- 전성기(1100년경) 추정치는 약 6,000~40,000명으로 폭이 넓음. 최근에는 1만~2만 명 안팎이 많이 제시됨
- 가장 큰 구조물
- 몽크스 마운드, 높이 약 30m — 멕시코 이북에서 가장 큰 흙 둔덕
- 지위
- 미국 국가사적지(1964), 유네스코 세계유산(1982). 일리노이주 자연자원부가 관리
쉬움
카호키아는 어떤 곳이었나
카호키아는 미시시피 문화에 속한 아메리카 원주민이 미시시피강의 넓고 기름진 범람원, 이른바 ‘아메리칸 보텀’에 세운 도시다. 미시시피강·미주리강·일리노이강 세 큰 강이 만나는 곳 가까이, 오늘날 일리노이주 남서부에 있었다. 전성기인 1100년 무렵에는 멕시코 이북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정착지였다.
도시의 중심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고, 그 북쪽 끝에 거대한 기단형 둔덕인 몽크스 마운드가 솟아 있었다. 그 둘레로 백 기가 넘는 흙 둔덕과 집들이 줄지어 섰고, 야외 작업장과 밭, 흙을 파낸 구덩이가 있었으며, 한동안은 높은 나무 성벽도 둘러쳐져 있었다. 도시 권역은 강 건너 오늘날 이스트세인트루이스와 세인트루이스 도심의 작은 둔덕군까지 이어졌다.
‘카호키아’는 도시를 세운 사람들이 쓴 이름이 아니다. 도시가 비고 한참 뒤인 17~18세기에 이 일대에 살던 일리노이 연맹의 한 집단인 카호키아족의 이름으로, 프랑스 식민자들이 근처 마을에 이 이름을 붙였다. 도시의 본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퐁카족 구전은 조상들이 머문 곳을 ‘붉은 언덕’이라는 뜻의 P'ahé'žíde로 기억한다.
오늘날 유적의 핵심부는 카호키아 마운드 주립 사적지로 보호되고 있다. 유네스코는 1982년 이곳을 미시시피 문화권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중심지로 인정해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다.
쉬움
도시를 ‘읽는’ 법: 둔덕, 광장, 기둥
카호키아의 둔덕은 모양이 여러 가지였고, 모양마다 쓰임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가 평평한 기단형 둔덕 위에는 신전이나 회의소, 지도자의 집 같은 중요한 건물이 섰다. 원뿔형 둔덕과 길쭉하게 등마루가 진 둔덕은 흔히 무덤으로 쓰였다. 오늘날 유적을 걸으면 세 가지를 모두 볼 수 있다.
몽크스 마운드 남쪽의 대광장은 약 20ha(50에이커)에 이르렀다. 원래부터 평평한 땅처럼 보이지만, 토양 조사 결과 본래는 낮은 둔덕과 골이 번갈아 이어진 지형이었다. 도시 초기에 주민들이 일부러 땅을 고르고 메운 것으로, 가장 이른 대규모 공사 가운데 하나였다. 광장은 의례와 잔치, 시장, 그리고 청키 놀이의 무대였다.
도시는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1050년 무렵 동서남북에 대체로 맞춘 격자가 옛 마을들 위에 새로 놓였다. 대광장에서 남쪽으로 돋운 둑길과 둔덕의 줄이 뻗어 오늘날 ‘래틀스네이크 마운드’라 부르는 큰 무덤 둔덕까지 이어져, 도시를 남북으로 꿰는 축을 이루었다. 집과 작은 광장들은 이 중심부 둘레에 구역을 이루며 배치되었다.
몽크스 마운드 서쪽에서 고고학자들은 거대한 나무 기둥 원형 구조물 여러 개의 기둥 구멍을 찾아냈고, 영국의 유명한 유적에 빗대 ‘우드헨지’라는 별명을 붙였다. 약 900~1100년 사이에 여러 번 다시 세워졌는데, 새로 세울 때마다 원이 더 커졌다. 지금 유적에는 가운데 기둥 하나를 48개의 기둥이 둘러싼 원이 복원되어 있어, 카호키아 사람들이 한 해 동안 해 뜨는 위치를 어떻게 살폈을지 연구하는 데 쓰인다.
쉬움
몽크스 마운드: 손으로 쌓은 산
몽크스 마운드는 멕시코 이북에서 사람이 쌓은 가장 큰 흙 둔덕이다. 높이는 약 30m이고, 밑면은 길이 약 290m, 너비는 재는 방식에 따라 약 236~255m로, 넓이가 5~6ha에 이른다. 기자의 대피라미드 밑면보다 넓다. 여러 단의 테라스로 올라가며, 남쪽에는 대광장을 향한 경사로가 있다.
수십만 세제곱미터에 이르는 이 흙은 모두 파서 바구니로 날랐다. 공사는 아마 10세기에 시작되어 둔덕을 높이고 넓히며 최대 열 단계에 걸쳐 이어졌다. 최근 연구 중에는 공사의 상당 부분이 수백 년이 아니라 집중적인 수십 년 동안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쌓는 사람들은 흙·점토·모래를 가려 층층이 다져 넣었고, 이 덕분에 둔덕은 물이 잘 빠지고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꼭대기에는 길이 30m가 넘는 아주 큰 건물이 서 있어 도시 어디서나 보였다. 신전이었거나 최고 지도자의 거처였거나, 둘 다였을 수 있다. 1971년 발굴에서 그 근처에서 거대한 나무 기둥을 세웠던 구멍이 나왔고, 같은 해 둔덕 동쪽에서는 ‘새 인간’ 모습을 새긴 사암 판이 발견되었다.
‘몽크스(수도사들의) 마운드’라는 이름은 1809년부터 1813년 무렵까지 둔덕 위와 근처에 살며 테라스에서 채소를 기른 프랑스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에게서 왔다. 원래 쌓은 사람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중급
농사, 수공업, 교역
카호키아는 농업 위에 서 있었다. 미시시피 문화 사람들은 옥수수를 대규모로 재배했고, 명아주·마디풀·리틀보리·해바라기처럼 ‘동부 농업 복합’이라 부르는 오래된 토착 작물과 호박도 길렀다. 범람원 습지에서 물고기를 잡고 사슴과 물새를 사냥했으며, 견과와 야생 식물도 모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카호키아 사람들은 밭을 저지대와 고지대에 나누어 두어 한 번의 홍수로 수확 전체를 잃지 않도록 했다.
전문 장인들은 조개껍데기 가루를 섞은 토기를 만들었는데, 상징 문양을 새긴 우아한 ‘레이미 새김무늬’ 항아리가 유명하다. 석기, 바다 조개 구슬, 구리 장신구도 만들었다. 붉은 점토석으로 깎은 조각상 가운데에는 바구니나 괭이, 식물을 든 여성을 표현한 것이 있어, 풍요와 대지, 재생을 중시한 종교를 짐작하게 한다.
물건은 강을 따라 먼 거리를 오갔다. 구리는 오대호 지역에서, 번개고둥 껍데기와 상어 이빨은 멕시코만 연안에서, 귀하게 여긴 밀크리크 처트(규질암)는 일리노이 남부에서 왔다. 거꾸로 카호키아식 토기와 건축, 도상은 위스콘신부터 미시시피강 하류까지 먼 공동체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도랑에 나무 기둥을 박아 벽을 세우고 풀로 지붕을 인 네모난 집에서 살았다. 1050년 무렵에는 많은 가구가 옛 기둥집 양식에서 이 새로운 형태로 거의 동시에 바꾸었는데, 도시가 일상생활까지 얼마나 빠르게 재편했는지 보여 주는 표지다.
중급
도시의 탄생: 마을에서 ‘빅뱅’으로
아메리칸 보텀에는 수천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600년 무렵 후기 우드랜드 시기에는 농경 마을들이 카호키아 일대에 자리 잡았고, 이른바 로먼 단계(대략 900~1050년)에 이 마을들은 더 커지고 한데 모였다. 이곳의 둔덕 쌓기는 9~10세기 미시시피 문화가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050년 무렵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한두 세대 만에 정착지는 대광장과 둑길, 수십 기의 둔덕을 갖춘 새 계획에 따라 다시 지어졌고, 중심 구역 인구는 약 1,400~2,800명에서 1만~1만 5천 명가량으로 늘었다. 티머시 파우커탯을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카호키아의 ‘빅뱅’이라고 불렀다.
이 성장의 상당 부분은 이주에서 왔다. 이 무렵 오하이오강 하류, 미시시피강 하류, 미국 중서부 북부, 남중부 평원의 캐도 지역 양식 토기가 부쩍 늘어나며, 치아 화학 분석은 카호키아에 묻힌 많은 사람이 다른 곳에서 자랐음을 보여 준다. 도시는 강력한 종교·정치 중심지라는 매력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것 같다.
전성기는 스털링 단계(약 1100~1200년)였다. 가장 높은 인구 추정치가 맞다면, 훗날 미국이 된 땅에서 1780년대 필라델피아가 인구 4만을 넘기 전까지 카호키아보다 큰 도시는 없었다. 조심스러운 추정치를 따르더라도 카호키아는 당대 유럽의 많은 도시에 견줄 만한 진짜 도시였다.
중급
종교, 권력, 그리고 하늘
카호키아는 사는 곳일 뿐 아니라 성스러운 경관이었다. 도시 배치는 땅과 물과 하늘을 하나로 묶었다. 둔덕들은 동서남북에 맞추어졌고, 곳에 따라 해와 달의 움직임에도 맞추어졌다. 도시 동쪽 고지대의 에메랄드 유적에서는 둔덕들이 18.6년 주기의 달의 운행에 맞추어져 있어,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달·물·여성성·풍요와 관련된 성소로 본다.
미시시피 문화의 종교 미술에는 사람과 매의 특징을 합친 ‘새 인간’이 자주 등장한다. 전쟁, 하늘 세계, 생명의 재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이 도상을 훗날 수(Sioux)어족 부족들이 전하는 ‘샛별’이나 ‘붉은 뿔’ 같은 영웅 이야기와 연결하곤 하지만, 수백 년의 간격을 건너는 이런 연결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카호키아의 지도권은 아마 종교적 권위와 함께 노동과 물자를 통제한 유력 가문들이 쥐었을 것이다. 이것이 ‘족장 사회’였는지, 초기 국가였는지, 둘 다 들어맞지 않는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학자들의 논쟁이 이어진다. 둔덕의 규모는 지도자들이 수천 명의 노동을 조직할 수 있었음을 보여 주지만,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의무 때문에, 자부심 때문에, 혹은 강요 때문에 — 또는 이 모두 때문에 — 일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카호키아에서 생겨났거나 퍼져 나갔을 수 있는 청키 놀이도 사회적·종교적 역할을 했다. 큰 공개 경기에는 군중이 모였고, 청키 선수는 미시시피 문화 미술에도 등장한다. 운동 경기와 잔치, 의례가 함께 다양한 주민을 한 공동체로 묶었다.
중급
72호 둔덕: 매장, 희생, 그리고 바뀌는 해석
72호 둔덕은 몽크스 마운드 남쪽의 작은 등마루형 둔덕으로, 고고학자 멜빈 파울러의 조사단이 1967~1972년에 발굴했고 1990년대에 추가 조사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약 한 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묻힌 약 270명의 유해가 나왔다. 둔덕 속 나무의 방사성 탄소 연대는 950~1050년 무렵에 모인다.
가장 유명한 무덤은 이른바 ‘구슬 매장’이다. 지위가 높은 두 사람이 위아래로 놓였고, 그 사이에 바다 조개로 만든 원반 구슬 약 1만 개가 새 모양으로 깔려 있었다. 근처에서는 여러 지역 양식의 정교한 화살촉 무더기, 말아 놓은 구리, 운모, 청키 돌이 나왔는데, 카호키아의 폭넓은 교류를 보여 준다.
72호 둔덕에는 인신 희생의 끔찍한 증거도 있다. 학자들은 여기 묻힌 사람의 절반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본다. 머리와 손이 없는 남성 네 명, 여러 층으로 포개진 수십 명의 젊은 여성 집단 매장이 있고, 한 구덩이에서는 일부가 산 채로 묻힌 것으로 보인다. 일부 화학·골격 연구는 젊은 여성들 가운데 상당수가 도시 바깥 출신이고 엘리트보다 식생활이 빈약했음을 시사해, 권력과 불평등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수십 년 동안 구슬 매장은 흔히 ‘버드맨(새 인간)’이라 불린 남성 통치자의 무덤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토머스 에머슨이 이끈 2016년 뼈 재분석은 중심 매장에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고해, 이 무덤을 남녀가 짝을 이룬 매장으로 다시 보게 했다. 이후 학자들은 72호 둔덕을 한 전사 왕의 기념물이라기보다 풍요와 재생, 세계의 질서를 연출한 우주론적 장면으로 읽기 시작했다.
중급
성벽, 쇠퇴, 떠남
1175년 무렵 카호키아 사람들은 중심 구역 둘레에 길이 약 3km의 나무 목책을 세우고 일정한 간격으로 망루(치)를 두었다. 목책은 여러 번 다시 지어졌는데, 그때마다 둘러싸는 범위가 줄었다. 성스러운 공간과 엘리트 공간을 도시의 나머지와 구분하는 뜻도 있었겠지만, 망루를 갖춘 목책은 대개 공격에 대한 두려움을 뜻하며, 일리노이강 유역에서 발견된 13세기의 불탄 마을들은 지역의 갈등이 커졌음을 가리킨다.
1200년 무렵부터 인구가 줄기 시작해 1350년 무렵에는 도시가 대부분 버려졌다. 사람들은 카호키아뿐 아니라 미시시피강 중류와 오하이오강 하류의 넓은 지역을 떠났고,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빈 구역(Vacant Quarter)’이라 부른다. 다만 최근 연구는 이 일대가 완전히 빈 적은 없었으며 1400년 이후 지역 인구가 다시 늘었음을 보여 준다.
여러 설명이 나왔다. 홍수, 가뭄, 삼림 벌채, 지력 고갈, 남획, 질병, 식량 부족, 전쟁, 정치·종교 갈등 등이다. 근처 호스슈 호수의 퇴적층에는 약 1100~1260년과 1340~1460년의 큰 홍수가 기록되어 있지만, 새로운 연구들은 카호키아 사람들이 수로와 제방으로 중심부를 지켰고 숲을 베어 침식을 일으켰다는 증거는 없다고 본다. 1200년 무렵 옥수수를 석회에 처리하는 닉스타말화를 그만두었을 가능성처럼 식생활 변화가 영양실조를 불렀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사회적 원인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토머스 에머슨과 크리스틴 헤드먼은 언어와 전통이 다른 이주민이 많았던 탓에 하나의 공통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환경 압박과 사회적 긴장이 겹쳤고,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붕괴를 겪었다기보다 더 작고 독립적인 공동체를 찾아 떠나기를 택했다고 본다.
중급
후손과 살아 있는 연결
카호키아는 흔히 ‘사라진’ 문명으로 불리지만, 그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학자는 데기하 수어를 쓰는 부족 — 오세이지, 오마하, 퐁카, 쿼포, 카우 — 의 조상이 카호키아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고 보며, 퐁카족 구전은 조상들이 그곳에 머문 시절을 이야기한다. 체로키, 촉토, 치카소, 머스코지(크리크) 같은 남동부의 부족들도 미시시피 문화권과 이어진 둔덕 쌓기와 의례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오세이지 네이션은 오늘날 고고학자와 유적 관리자의 주요 협력자다. 미주리주 쪽에 몇 남지 않은 미시시피 문화 둔덕인 세인트루이스의 슈가로프 마운드를 사들여 보호하고 있기도 하다. 원주민들은 지금도 카호키아를 찾아 의식을 치르고 춤을 춘다.
이러한 관계는 유적이 과거를 보여 주는 방식도 바꾸고 있다. 미국 ‘아메리카 원주민 분묘 보호 및 반환법(NAGPRA)’의 개정 규정에 따라, 유적은 성스러운 물건과 문화 유물을 직계 후손이나 관련 부족의 동의가 있을 때만 전시하기 위해 박물관 전시실 일부를 닫았다. 많은 원주민 공동체에게 72호 둔덕 같은 곳에서 나온 유해와 성물은 과학 표본이 아니라 조상이자 친족이다.
구전과 고고학을 함께 듣는다고 해서 둘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을 함께 보면 더 온전한 그림이 드러난다. 카호키아는 지금도 이 땅에 사는 후손을 둔 원주민이 이룬 성취다.
중급
파괴, 재발견, 보호
유럽계 미국인이 이 지역에 정착했을 때, 많은 이가 원주민이 이런 기념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사라진 ‘둔덕 건설 종족’을 상상했는데, 이 신화는 원주민의 땅을 빼앗는 일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의 고고학은 이 생각을 반박하고 둔덕을 쌓은 것이 원주민의 조상임을 밝혔다.
그 사이 많은 둔덕이 파괴되었다. 세인트루이스는 한때 ‘둔덕의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도심의 둔덕은 19세기 중엽 거의 모두 깎여 매립용 흙으로 쓰였다. 카호키아에서도 농사, 도로, 주택, 뒷날의 주간 고속도로가 고대 도시를 가로질렀다. 1950년대 연방 고속도로 건설은 유적을 위협했지만, 새 도로를 따라 이루어진 구제 발굴에서 우드헨지를 비롯한 매우 중요한 발견이 나오기도 했다.
일리노이주는 1920년대에 주 의회가 주립공원 부지 매입을 승인하면서 유적 보호를 시작했다. 1964년 국가사적지, 198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고, 1989년 문을 연 해설 센터에는 해마다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보호 구역은 약 890ha로, 남아 있는 약 80기의 둔덕 가운데 72기를 품고 있다.
보존은 여전히 어렵다. 몽크스 마운드는 서쪽 면의 큰 덩어리가 미끄러져 내리는 침하를 겪어 왔는데, 이 문제는 이미 1200년 무렵에 시작되었다. 기술자들은 2000년대까지 대규모 안정화 공사를 벌였다. 보호 구역 바깥의 둔덕들은 개발과 배수, 침식의 위협을 계속 받고 있다.
심화
학계의 논쟁: 얼마나 컸고, 얼마나 강했으며, 얼마나 ‘도시’였나
가장 오래된 논쟁은 인구다. 전성기 추정치는 약 6,000명에서 4만 명 이상까지 퍼져 있고, 같은 자료라도 집 한 채에 몇 명이 살았는지, 동시에 몇 채가 쓰였는지, ‘도시’를 어디까지로 보는지에 따라 숫자가 달라진다. 1990년대 이후 서쪽과 고지대에서 새로운 주거 구역을 찾아낸 구제·학술 발굴은 일부 추정치를 끌어올렸고, 오늘날 유적 해설은 흔히 전성기 인구를 약 2만 명으로 든다.
이와 이어진 논쟁은 카호키아가 어떤 사회였느냐는 것이다. 흔히 ‘최소주의자’로 불리는 일부 고고학자는 카호키아를 다른 미시시피 문화 중심지와 본질적으로 같은, 크지만 분권적인 족장 사회로 보았다. 티머시 파우커탯을 비롯한 다른 학자들은 1050년 무렵의 갑작스러운 계획적 재건, 노동의 규모, 희생의 증거, 넓은 지역에 미친 영향이 더 중앙집권적이고 국가에 가까운 정치·종교 질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혹은 메소포타미아나 메소아메리카에서 가져온 모델에 억지로 끼워 맞추지 말아야 할, 새로운 형태의 원주민 도시성이라고 보기도 한다.
세 번째 논쟁은 쇠퇴의 원인이다. 삼림 벌채가 홍수와 흉작으로 이어졌다는 예전의 생태적 과부하 모델은 인간이 일으킨 침식의 증거가 거의 없다는 퇴적층 연구로 도전을 받았다. 연구자들은 이제 기후 변화(13세기 가뭄 포함), 홍수, 식생활, 폭력, 사회적 분열을 함께 저울질하며, 카호키아의 끝을 ‘붕괴’보다 의도적 이주와 재편의 과정으로 보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고학 증거를 오늘날 부족들의 신앙과 정체성에 어떻게 잇느냐도 논쟁거리다. 새 인간 도상이나 식물을 든 여성 조각상은 수어족과 남동부 부족의 구전과 비교해 보고 싶게 하지만, 그 사이에는 수백 년의 변화가 있다. 후손 공동체와 함께하는 협력 연구는 윤리적 의무일 뿐 아니라 새로운 통찰의 원천으로 점점 더 인정받고 있다.
심화
증거와 방법
미시시피 문화 사람들은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카호키아에 대한 지식은 고고학·지구과학·구전에 기댄다. 20세기 초부터 이어진 발굴 — 1950~60년대 주간 고속도로를 따라 벌인 구제 발굴을 포함해 — 은 집터, 기둥 구멍, 구덩이, 둔덕을 지도로 그렸다. 방사성 탄소 연대와 토기 형식 분류 덕분에 유적의 역사를 로먼, 스털링, 무어헤드, 샌드프레리 같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토양 시추와 미세 형태 분석은 둔덕을 쌓은 방식을 밝혀냈다. 쌓는 사람들은 성질이 대비되는 흙을 골라 의도적으로 층을 지었고, 때로는 표면을 색깔 있는 점토로 덮었다. 대광장을 인공으로 골랐다는 사실도 이런 연구에서 드러났다. 식물 유체는 공사 연대를 정하고 사람들이 기른 작물을 보여 준다.
인골을 연구하는 생물고고학은 예컨대 치아 법랑질의 스트론튬 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식생활, 건강, 폭력, 이주에 관한 정보를 주었다. 이런 방법은 윤리적 질문을 낳으며, 오늘날 이러한 연구는 NAGPRA와 부족들과의 협의 속에서 이루어진다. 72호 둔덕의 2016년 재분석은 새로운 방법과 질문이 오래된 해석을 뒤집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호수 퇴적층의 환경 기록은 기후와 홍수의 역사를 알려 주며, 호수 시추 코어 속 분변 생체지표 분석 같은 방법은 시간에 따른 인구 변화를 추정하는 데 쓰였다. 저마다 불확실성을 지닌 이처럼 서로 다른 증거들을 엮어 내는 것이 카호키아 연구의 핵심 방법론 과제다.
핵심 개념
- 원주민의 도시성
- 카호키아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이 문자, 금속 도구, 바퀴, 짐 끄는 가축 없이도 공공 공간과 주거 구역, 기념비적 건축을 갖춘 계획적이고 인구 밀도 높은 도시를 세웠음을 보여 준다.
- 건축 재료로서의 흙
- 둔덕은 흙더미가 아니다. 쌓는 사람들은 공학적 지식으로 흙을 골라 층을 지어, 손으로 오래가는 기념물을 만들었다.
- 성스러운 경관
- 둔덕·광장·둑길·기둥의 배치는 도시를 방위와 물, 해와 달에 묶어, 도시 자체를 하나의 종교적 선언으로 만들었다.
- 이주와 다양성
- 1050년 무렵의 급성장은 중서부와 남부 곳곳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이는 활력의 원천이자 훗날 긴장의 원인이었을 수 있다.
- 권력과 희생
- 72호 둔덕은 카호키아의 종교와 지도권에 인신 희생이 따랐음을 드러내, 기념비적 성취에 대가가 있었음을 일깨운다.
- 이주로서의 쇠퇴
- 카호키아의 끝은 갑작스러운 붕괴라기보다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기를 택한 점진적 과정으로 점점 더 이해되고 있다.
- 살아 있는 유산
- 오세이지족과 퐁카족 같은 후손 부족들은 카호키아와의 연결을 이어 가며, 그들의 관점이 연구와 전시를 점점 더 바꾸고 있다.
기록
- 약 600년 — 후기 우드랜드 농경 마을들이 카호키아 일대에 자리 잡는다.
- 약 900년 — 로먼 단계 시작: 마을이 커지고 모이며 미시시피 문화의 둔덕 쌓기와 첫 나무 기둥 원이 시작된다.
- 약 1030년 — 72호 둔덕에 구슬 매장과 초기 희생 매장이 이루어진다.
- 약 1050년 — 카호키아의 ‘빅뱅’: 대광장을 중심으로 계획된 격자에 따라 도시가 재건되고, 이주로 인구가 급증한다.
- 약 1100년 — 스털링 단계: 인구가 정점에 이르고 몽크스 마운드가 거의 최종 형태를 갖춘다.
- 약 1175년 — 중심 구역 둘레에 첫 목책이 세워진다.
- 약 1200년 — 무어헤드 단계: 인구가 줄기 시작하고 몽크스 마운드에 침하가 일어난다.
- 약 1350년 — 도시가 대부분 버려지고 넓은 ‘빈 구역’의 인구가 빠져나간다.
- 약 1650년 — 카호키아족을 비롯한 일리노이 연맹 집단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온다.
- 1809년 — 프랑스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이 유적에 정착하고(1813년까지), 몽크스 마운드의 이름이 여기서 비롯된다.
- 1964년 — 카호키아 마운드가 미국 국가사적지로 지정된다.
- 1982년 — 유네스코가 카호키아 마운드 주립 사적지를 세계유산 목록에 올린다.
용어 풀이
- 미시시피 문화
- 미국 중부·남동부의 서로 관련된 원주민 사회들(800/1000~1600년경). 옥수수 농사, 기단형 둔덕, 조개 섞은 토기, 족장 사회로 알려져 있다.
- 기단형 둔덕
- 신전이나 지도자의 집 같은 중요한 건물의 토대로 쌓은, 꼭대기가 평평한 흙 둔덕.
- 아메리칸 보텀
- 세인트루이스 맞은편 일리노이주 쪽의 넓은 미시시피강 범람원. 카호키아가 세워진 곳이다.
- 청키
- 둥근 돌을 굴리고 선수들이 멈출 자리를 겨냥해 막대를 던지는 원주민 놀이.
- 우드헨지
- 카호키아의 거대한 나무 기둥 원형 구조물에 붙은 현대의 별명. 태양의 움직임을 표시했을 수 있다.
- 목책
- 높은 나무 기둥으로 세운 성벽. 카호키아의 목책은 망루를 갖추고 중심 구역을 둘러쌌다.
- 빈 구역(Vacant Quarter)
- 1350년경 이후 인구 대부분이 빠져나간 미시시피강 중류·오하이오강 하류 지역을 가리키는 고고학 용어.
- 닉스타말화
- 옥수수를 석회 같은 알칼리 용액에 불리고 삶아 영양분을 흡수하기 쉽게 만드는 처리법.
- 데기하 수어족
- 오세이지·오마하·퐁카·쿼포·카우 등 서로 관련된 언어와 부족 집단. 상당수가 카호키아와의 조상 연결을 이야기한다.
- NAGPRA
-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분묘 보호 및 반환법’(1990). 원주민 유해와 성물의 취급과 반환을 규정한다.
묻고 답하기
카호키아가 정말 런던보다 컸나요?
그랬을 수 있어요. 유적 측 해설은 카호키아가 1250년 무렵의 런던보다 컸다고 말해요. 인구 추정치가 약 6,000명에서 4만 명까지 넓게 퍼져 있어 어느 숫자를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중간 정도의 추정만으로도 당시로서는 큰 도시였어요.
기계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큰 둔덕을 쌓았나요?
돌·나무·조개로 만든 괭이 같은 도구로 흙을 파서 바구니에 담아 날랐어요. 많은 사람이 몇 년, 몇십 년 동안 한 바구니씩 보태 수백만 세제곱미터의 흙이 쌓였어요.
그 사람들은 사라졌나요? 지금은 누가 사나요?
도시는 버려졌지만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갔어요. 여러 원주민 부족, 특히 오세이지족과 퐁카족 같은 데기하 수어족이 카호키아와의 연결을 이야기하고, 지금도 원주민들이 유적에서 의식을 치러요.
왜 카호키아라고 부르나요?
도시가 버려지고 수백 년 뒤 이 지역에 살던 일리노이 연맹의 카호키아족 이름에서 왔어요. 도시를 세운 사람들이 뭐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어요.
72호 둔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약 270명이 묻혀 있었는데, 조개 구슬을 새 모양으로 깐 엘리트 매장과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2016년 연구는 중심 매장에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있었음을 보여 주었어요.
카호키아는 국가였나?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큰 족장 사회로 보는 이도 있고, 계획성·규모·지역적 영향력으로 보아 더 중앙집권적이고 국가에 가까운 사회, 혹은 독자적인 원주민 도시 형태였다고 보는 이도 있다.
사람들은 왜 떠났나?
합의된 단일 원인은 없다. 홍수, 가뭄, 식생활, 전쟁, 다양한 주민 사이의 사회적 긴장 등이 거론되며, 많은 학자는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고 본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Cahokia. Wikipedia
- Monks Mound. Wikipedia
- Mound 72. Wikipedia
- Mississippian culture. Wikipedia
- 카호키아. 위키백과
- Cahokia Mounds State Historic Site. Cahokia Mounds Museum Society
- About. Cahokia Mounds Museum Society
- Timothy R. Pauketat, Cahokia: Ancient America’s Great City on the Mississippi. Viking, 2009
- Biloine Whiting Young and Melvin L. Fowler, Cahokia: The Great Native American Metropolis.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00
함께 보기
- 푸에블로 보니토차코 캐니언에서 가장 큰 대가옥. 방 650~800개와 수십 개의 키바를 갖춘 D자형 여러 층 석조 건물로, 서기 850~1150년 무렵 오늘날 푸에블로 사람들의 조상이 지었다.
- 테오티우아칸멕시코 중부의 고대 대도시로, 거대한 도로와 피라미드, 넓은 주거 단지가 남아 있다.
- 치첸이차유카탄반도의 주요 마야 도시로, 여러 세기에 걸쳐 건물들이 세워지고 사용되었다.
- 그레이트 짐바브웨쇼나인의 선조들이 세우고 거주한 남부 아프리카의 큰 도시 유적이다.
- 스톤헨지영국 남부의 선사 유적으로, 흙으로 만든 구조물과 선돌이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되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