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

أبو الوليد محمد بن أحمد بن رشد (Abū al-Walīd Muḥammad ibn Aḥmad ibn Rushd)

1160–1198년 · 코르도바 (알안달루스)

한 문장으로

이븐 루시드는 약 850년 전 이슬람 시대 에스파냐의 코르도바에서 활동한 재판관이자 의사이자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아주 꼼꼼하게 풀이해서 유럽 학자들이 그를 그냥 '주석가'라고 불렀어요.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
이미지: Saleemzohaib · CC BY 3.0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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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부터 약 900년 전, 에스파냐의 도시 코르도바에서 재판관 집안에 이븐 루시드라는 아이가 태어났어요. 그때 에스파냐의 많은 땅은 무슬림이 다스렸고 '알안달루스'라고 불렸어요. 아름다운 모스크와 정원과 도서관이 있었고, 무슬림과 기독교인과 유대인이 함께 살았어요.

이븐 루시드는 자라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재판관이 되었어요. 의학에 관한 큰 책을 쓴 의사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의 철학이었어요. '세상은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무엇이 참인지 우리는 어떻게 알까?' 같은 큰 질문을 던지는 일이지요.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를 나라의 임금인 칼리프에게 소개했어요. 칼리프는 고대 그리스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 너무 어렵다고 했어요. 누가 좀 풀어 줄 수 없을까? 이븐 루시드는 해 보겠다고 했고, 그 뒤 평생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거의 모든 책의 풀이를 썼어요. 어려운 교과서 옆에 놓고 보는 친절한 해설서를 쓴 선생님 같다고 생각하면 돼요.

철학이 종교에 위험하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븐 루시드는 그렇지 않다고 했어요. 참은 참과 싸울 수 없다, 거룩한 경전과 꼼꼼한 추론이 둘 다 참이라면 서로 맞아야 한다고요. 말년에는 새 임금이 한동안 그를 멀리해서 책 몇 권이 불태워지고 그는 도시에서 쫓겨났어요. 곧 용서받았지만 얼마 뒤인 1198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책은 그 자신보다 훨씬 멀리 여행했어요.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번역되어, 수백 년 동안 파리와 옥스퍼드와 파도바의 학생들이 이븐 루시드의 풀이를 곁에 두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어요. 그곳 사람들은 그를 '아베로에스'라고 불렀어요.

한눈에 보기

이름
아불왈리드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이븐 루시드. 라틴어 이름 아베로에스
생애
1126년 4월 14일 코르도바 출생, 1198년 12월 10/11일 마라케시에서 사망
활동 지역
무와히드 왕조 치하의 알안달루스(코르도바, 세비야)와 모로코(마라케시)
역할
철학자, 말리크 학파 법학자이자 재판관(카디), 궁정 의사
언어
아랍어. 여러 저작이 히브리어·라틴어 번역으로만 전함
주요 저작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결정적 논고』, 『부조리의 부조리』, 『비다야트 알무즈타히드』(법학), 『의학총론』(라틴어 『콜리제트』)
별칭
중세 라틴어·히브리어 학계의 '주석가'
영향
유대 철학과 라틴 스콜라 철학을 빚었고 '아베로에스주의'라는 이름을 남김

쉬움

이븐 루시드는 누구인가

이븐 루시드(1126~1198), 유럽 이름 아베로에스는 중세 세계의 위대한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이자 이슬람 에스파냐(알안달루스)의 옛 수도였던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 재판관과 의사로 일했지만, 무엇보다 철학자로, 그리고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철저하게 해석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는 놀랄 만큼 넓은 분야에 걸쳐 글을 썼다. 철학, 논리학, 자연학, 천문학, 심리학, 이슬람법, 신학, 의학이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현존 저작을 약 49편으로 헤아리며, 옛 기록은 100편이 넘는 저술을 그의 것으로 꼽는다.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몇 편은 아랍어 원본이 사라져 중세 히브리어·라틴어 번역으로만 남아 있다.

그의 사상은 사후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계에서는 비교적 오래 영향을 남기지 못했지만, 유대교·기독교 유럽에서는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자'였듯 그는 그냥 '주석가'로 불렸다. 근대에 들어 아랍 세계는 그를 이성과 열린 태도의 상징으로 다시 발견했다.

[1][3][6]

쉬움

생애: 코르도바에서 마라케시까지

이븐 루시드는 이슬람법 말리크 학파의 이름난 법학자 집안 출신이다. 같은 이름 아불왈리드 이븐 루시드를 쓴 할아버지는 코르도바의 대법관이자 유명한 법학자였다. 그래서 둘을 구분하려고 철학자를 '손자' 이븐 루시드(알하피드)라 부르기도 한다. 그는 꾸란과 하디스, 법학과 신학, 그리고 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난 안달루스 철학자 이븐 바자(아벰파체)의 저작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가 젊었을 때, 알안달루스와 북아프리카를 다스리던 무라비트 왕조가 아틀라스산맥에서 일어난 베르베르계 개혁 운동 세력인 무와히드 왕조에게 무너졌다. 마라케시에서 다스린 무와히드 칼리프들은 학문을 열심히 후원했다. 1168~1169년 무렵 철학자이자 궁정 의사인 이븐 투파일이 이븐 루시드를 칼리프 아부 야쿠브 유수프에게 소개했다. 이븐 루시드 자신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화에 따르면, 칼리프는 먼저 철학자들이 하늘을 영원하다고 보는지 창조되었다고 보는지 물었다. 겁이 난 이븐 루시드가 답을 피하자, 칼리프가 직접 그 문제를 논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 뒤 칼리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려운 책을 알기 쉽게 풀어 달라고 하자, 이븐 투파일이 그 일을 이븐 루시드에게 넘겼다.

그의 경력은 순조로웠다. 1169년 세비야의 재판관(카디)이 되었고, 뒤에 코르도바에서 일했으며, 1182년 이븐 투파일의 뒤를 이어 칼리프의 주치의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맡았던 코르도바 대법관 자리에도 올랐다. 그는 에스파냐와 마라케시를 자주 오갔다.

1195년, 칼리프 아부 유수프 야쿠브 알만수르 치하에서 그는 갑자기 총애를 잃었다. 코르도바의 한 모임에서 그의 가르침이 단죄되고 책 일부가 불태워졌으며, 그는 가까운 도시 루세나로 추방되었다.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 이유를 정치에서 찾는다. 칼리프는 기독교 왕국들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보수적인 종교 학자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이븐 루시드는 약 2년 뒤 복권되었고 1198년 12월 마라케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뒤에 코르도바로 옮겨 묻혔다. 그 행렬을 본 젊은 신비주의자 이븐 아라비는, 노새 한쪽에는 관이, 다른 쪽에는 그의 책들이 실려 균형을 이루었다고 기록했다.

[3][2][1]

쉬움

아리스토텔레스 풀이: 세 가지 주석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논리학, 자연, 영혼, 윤리, 형이상학에 관한 저작을 남긴 그리스 철학자로, 그의 책들은 8~10세기에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파라비와 이븐 시나(아비센나) 같은 무슬림 철학자들이 그 위에 사상을 쌓았지만, 이븐 루시드는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다른 학설을 섞었다고 보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말로 뜻한 바를 되찾고 싶어 했다.

그는 세 종류의 주석을 썼다. 소주석 또는 요약(자와미)은 한 저작의 요지를 간추린다. 중주석(탈히스)은 본문을 단락별로 풀어 쓴다. 주로 말년에 쓴 대주석(타프시르·샤르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문을 한 대목씩 인용한 뒤 줄마다 설명하고, 앞선 그리스·아랍 해석자들도 논한다. 대주석은 『자연학』, 『천체론』, 『영혼론』, 『형이상학』, 『분석론 후서』 같은 몇몇 핵심 저작에만 썼다.

구할 수 없는 책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손에 넣지 못한 그는 대신 플라톤의 『국가』에 주석을 달아 그 사상을 자기가 아는 사회에 적용했다. 이 주석은 히브리어 번역으로만 남아 있다. 현대 학자들은 이 깔끔한 세 갈래 구분이, 특정 문제를 다룬 독립 논고까지 포함하는 더 다양한 저작 세계를 단순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1][2]

중급

신앙과 이성: 『결정적 논고』

1178~1180년 무렵 이븐 루시드는 『결정적 논고(파슬 알마칼)』를 썼다. 이슬람법은 철학 공부를 허용하는가, 금하는가, 명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짧은 법적 견해다. 재판관으로서 그의 답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법이 오히려 철학을 명한다는 것이다. 꾸란이 믿는 이들에게 창조 세계를 성찰하라고 거듭 촉구하고, 가장 좋은 성찰 방법은 논증적 추론이기 때문이다.

그의 핵심 원리는 흔히 '참은 참과 어긋나지 않는다'로 요약된다. 논증과 계시가 모두 참이니 서로 맞아야 한다. 논증된 결론이 경전의 문자적 의미와 충돌하는 듯하면, 아랍어의 규칙에 따라 그 구절을 비유적으로 해석(타윌)해야 한다. 다만 그런 해석은 전문가의 몫이며, 혼란을 줄 수 있으므로 일반 대중에게 퍼뜨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세 부류의 사람과 세 종류의 논증을 구분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수사로 설득되고, 신학자는 변증적 논증을 쓰며, 엄밀한 논증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철학자뿐이다. 경전은 이 셋 모두에게 한꺼번에 말한다. 이 이론으로 그는 철학을 옹호하면서 공동체 전체를 이끄는 종교법도 옹호할 수 있었다. 짝을 이루는 저작 『증명 방법의 해명(알카시프 안 마나히지 알아딜라)』에서는 아샤리파 등 신학자들의 방법이 평범한 신자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비판했다.

[1][2][7]

중급

가잘리에 대한 응답: 『부조리의 부조리』

약 80년 앞서 위대한 신학자 가잘리(1111년 사망)는 『철학자들의 부조리』를 써서 이븐 시나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학설 20가지를 공격했다. 그는 그 가운데 세 가지, 곧 세계가 영원하다는 것, 신은 보편만 알고 개별자는 모른다는 것, 육체의 부활은 없다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판정했다.

1180년 무렵 이븐 루시드는 『부조리의 부조리(타하풋 알타하풋)』로 응답했다. 그는 가잘리의 글을 한 단락씩 인용하고 반박했다. 이븐 시나의 논증이 약하다는 데는 자주 동의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입장은 더 굳건하며 가잘리가 그것을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세계의 영원성은 제대로 이해하면 영원한 원인인 신에게 세계가 의존한다는 것과 양립하며, 신의 앎은 인간적 의미의 보편도 개별도 아니고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논했다.

인과에 관해 가잘리는 불과 타는 것 사이에 필연적 연결이 없으며 신이 매번 직접 타는 것을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이븐 루시드는 사물에 실제 원인이 있음을 부정하면 앎 자체가 불가능해진다고 응수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 원인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5][2][8]

중급

재판관이자 의사

이븐 루시드의 법학 대표작 『비다야트 알무즈타히드 와 니하야트 알무크타시드』('독자적 판단을 하려는 이의 시작이자 만족하는 이의 끝')는 비교 법학서다. 자기가 속한 말리크 학파의 규정만 늘어놓지 않고, 각 문제에 대한 수니파 여러 학파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그들이 갈라지는 문헌적·논리적 이유를 설명한다. 오늘날에도 이슬람법 공부에 쓰인다.

의학에서는 『의학총론(알쿨리야트 피 알티브)』을 썼고, 라틴어로는 『콜리제트』로 알려졌다. 해부학, 건강, 질병, 증상, 약물, 식이, 건강 유지를 일반 원리에 따라 정리했다. 그는 개별 질병의 상세한 치료는 친구 아부 마르완 이븐 주르(아벤조아르)에게 맡겼다고 하며, 이븐 주르의 실용 의학서가 그의 책을 보완했다. 『콜리제트』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의학 교육에 쓰였다.

이븐 루시드는 천문학에 관해서도 썼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에 맞지 않는 주전원과 이심원에 기댄다고 비판했다. 그는 자연철학과 맞는 새 천문학을 바랐지만 스스로 내놓지는 못했다.

[3][2]

중급

영혼과 지성

그의 철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생각은 인간의 정신에 관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에서 모든 것이 되는 지성(질료 지성, 가능 지성)과 모든 것을 만드는 지성(능동 지성)을 짧고 모호하게 언급했다. 앞선 해석자들은 이 지성들이 개인마다 따로 있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주로 라틴어로 전하는 『영혼론 대주석』에서 이븐 루시드는 능동 지성과 질료 지성이 모두 하나이고 영원하며 몸과 분리되어 있어 모든 인간이 공유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은 몸에 속한 개인적 상상력을 이 하나의 지성과 연결함으로써 사고한다. 이 이론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보편적 진리를 파악하는지를 설명하지만, 죽은 뒤 살아남는 개인의 지성은 없다는 뜻으로 보였다.

이 '지성 단일성' 이론은 13세기 파리의 기독교 비판자들, 무엇보다 각 사람은 몸의 형상인 자기만의 지성을 지닌다고 주장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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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히브리어와 라틴어 세계에서의 후생

그의 저작을 먼저 받아들인 이들은 유대 사상가였다. 역시 코르도바 태생인 마이모니데스는 1190년 무렵 그의 주석을 알게 되었다. 1230년 무렵부터 히브리어 번역가들이 그의 주석을 거의 다 옮겼고, 1340년 무렵에는 대부분을 히브리어로 읽을 수 있었다. 많은 유대 철학자에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으뜸 권위가 되었다. 게르소니데스는 그의 주석에 다시 주석(초주석)을 달았고, 뒤에 엘리야 델 메디고가 이탈리아에서 이 전통을 이었다.

라틴 유럽에서는 마이클 스콧 등이 1220년대에 그의 주석을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마침 파리와 옥스퍼드의 새 대학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교육의 바탕으로 삼던 때였다. 학자들은 그의 대주석을 본문의 길잡이로 삼았다. 단테는 그를 림보의 덕 있는 비기독교인들 사이에 두고 "큰 주석을 지은 아베로에스"라고 불렀다(『신곡』 「지옥」 4곡).

시제 드 브라방, 다키아의 보에티우스 같은 파리의 인문학부 교수들은 세계의 영원성이나 지성 단일성처럼 기독교 교리와 충돌하는 문제에서도 아베로에스가 읽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다. 1270년 아퀴나스는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을 반박하는 지성 단일성론』을 썼고, 파리 주교 에티엔 탕피에는 1270년과 1277년에 명제 목록을 단죄했다(1277년에는 219개). 반대자들은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이 철학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가 따로 있다는 '이중 진리'를 주장한다고 비난했지만, 이븐 루시드도, 그리고 아마 어떤 라틴 사상가도 실제로 그런 학설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아베로에스식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은 특히 파도바 대학에서 16세기까지 이어졌다. 아베로에스 주석을 곁들인 아리스토텔레스 라틴어 전집이 1550~1552년 베네치아의 준타 출판사에서 나왔다. 1852년 프랑스 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은 『아베로에스와 아베로에스주의』를 펴내 아베로에스주의를 역사적 범주로 정의하고 이븐 루시드를 자유사상의 영웅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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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계의 논쟁

전기 자료. 이븐 시나나 가잘리와 달리 이븐 루시드는 자서전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의 생애는 후대 저자들의 글로 짜 맞춰야 한다. 주요 기록은 13세기 저자들에게서 나온다. 이븐 루시드의 제자가 전한 칼리프와의 첫 만남 이야기를 보존한 모로코 역사가 압드 알와히드 알마라쿠시, 안달루스의 전기 작가 이븐 알압바르, 의학사에서 그의 저작 목록을 제시한 의사이자 역사가 이븐 아비 우사이비아다. 이 기록들은 시기상 비교적 가깝지만 그의 실각에 대한 후대의 평가도 반영하며, 관직 임명 연도 같은 세부는 기록마다 다르다.

합리주의자인가 신앙인인가. 르낭 이래 어떤 독자들은 이븐 루시드를 종교의 언어로 자신을 보호한 숨은 합리주의자, 계몽의 선구자로 그렸다. 다른 이들은 그가 평생 말리크 학파 재판관으로 일했고 『결정적 논고』의 논증이 있다는 점을 들어, 논증 철학과 계시를 하나의 진리의 두 표현으로 믿은 진실한 무슬림으로 본다. 레오 슈트라우스의 '행간 읽기' 착상에 영향을 받은 해석자들은 엘리트와 대중의 구분을 비의적 소통 전략으로 읽지만, 다른 이들은 이를 시대착오로 여긴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그가 철학과 종교를 한쪽에 종속시키지 않고 통합했다고 강조한다.

무와히드 왕조라는 맥락. 역사가들은 그의 저작이 무와히드 왕조의 사업에 얼마나 봉사했는지 논쟁한다. 무와히드 왕조는 꾸란과 하디스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말리크 학파 법 실무의 일부와 아샤리파 신학에 반대했고, 궁정에서 철학을 후원했다. 어떤 이들은 이븐 루시드가 신학자들을 공격하고 '참된' 아리스토텔레스를 되찾으려 한 것을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무와히드의 구호와 나란히 놓고 읽으며, 다른 이들은 그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1195년 실각의 이유도 마찬가지로 논쟁거리다.

저작 전체의 일관성. 그는 수십 년에 걸쳐 견해를 고쳤고 목적에 따라 다른 종류의 주석을 썼기 때문에, 예컨대 질료 지성에 관한 초기와 후기 입장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두고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자말 알딘 알알라위처럼 사상의 전체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이도 있고, 뚜렷한 발전을 추적하는 이도 있다.

본문 사정. 많은 저작이 히브리어나 라틴어로만 남아 있고 비판 정본 작업도 진행 중이어서, 이븐 루시드를 읽는 본문의 기반은 고르지 않다. 학자들은 흔히 중세 번역에서 그의 아랍어 용어를 재구해야 하며, 새 필사본이 발견되면 해석이 바뀔 수 있다.

[1][2][4]

심화

이슬람 세계의 이븐 루시드, 그때와 지금

예전에는 가잘리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 철학이 죽었고 이븐 루시드가 그 마지막 대표자라는 이야기가 흔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철학과 철학적 신학은 특히 동부 이슬람 세계에서 계속 번성했지만, 대체로 이븐 루시드가 아니라 이븐 시나가 놓은 노선을 따랐다. 이슬람 지역에서는 '아베로에스주의' 학파가 생기지 않았고,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도 유럽보다 훨씬 덜 읽혔다. 역사가 이븐 할둔은 그의 저작 일부를 알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아랍 개혁가들이 그를 다시 발견했다. 르낭에게 기댄 레바논의 기독교인 작가 파라 안툰은 1900년대 초 이집트의 개혁가 무함마드 압두와 그의 유산을 두고 논쟁했다. 20세기 후반 모로코의 철학자 무함마드 아비드 알자비리는 이븐 루시드의 합리주의를 아랍 사상의 본보기로 내세웠다. 유세프 샤힌의 영화 「운명」(1997)은 그를 광신에 맞선 관용의 상징으로 그렸다.

오늘날 코르도바 옛 성벽 근처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고, 여러 곳에서 그는 이슬람·유대·기독교 지성 전통을 잇는 인물로 기려진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를 현대 자유주의자로 바꾸어 놓는 것을 경계한다. 그의 사상은 이슬람법, 아리스토텔레스 학문, 무와히드 정치라는 12세기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3][4][1]

핵심 개념

참은 참과 어긋나지 않는다
논증 철학과 계시는 모두 참이므로, 겉보기의 충돌은 해석으로 풀어야 한다.
세 가지 논증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수사, 신학자에게는 변증, 철학자에게는 논증. 경전은 셋 모두에게 말한다.
비유적 해석(타윌)
논증이 경전의 문자적 의미와 충돌하면 전문가는 본문을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기
이븐 시나 등이 덧붙인 것을 걷어 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참뜻을 되찾으려는 목표.
지성 단일성
질료 지성과 능동 지성은 하나이며 모든 인간이 공유한다는 논쟁적 주장.
실재적 인과
가잘리에 맞서, 사물에는 실제 인과 능력이 있고 앎은 원인에 대한 앎이라고 보았다.
비교 법학
『비다야트 알무즈타히드』에서 법학파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뿐 아니라 왜 갈라지는지를 설명했다.

기록

  1. 1111년 — 『철학자들의 부조리』를 쓴 가잘리가 세상을 떠난다.
  2. 1126년 — 이븐 루시드가 코르도바에서 태어난다(4월 14일).
  3. 약 1169년 — 이븐 투파일이 그를 칼리프 아부 야쿠브 유수프에게 소개한다. 세비야의 재판관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을 시작한다.
  4. 약 1179년 — 『결정적 논고』 등 종교와 철학에 관한 저작을 쓴다.
  5. 약 1180년 — 가잘리에 응답하는 『부조리의 부조리』를 쓴다.
  6. 1182년 — 이븐 투파일의 뒤를 이어 궁정 의사가 된다.
  7. 1195년 — 실각해 책 일부가 불태워지고 루세나로 추방된다.
  8. 1198년 — 복권된 뒤 마라케시에서 세상을 떠난다(12월).
  9. 약 1217년 — 마이클 스콧이 그의 주석을 라틴어로 옮기기 시작한다(1217년부터 1220년대까지로 전한다).
  10. 1270년 —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을 반박하는 지성 단일성론』을 쓴다.
  11. 1277년 — 파리 주교 탕피에가 급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관련된 명제 219개를 단죄한다.
  12. 1852년 — 에르네스트 르낭이 『아베로에스와 아베로에스주의』를 펴낸다.

용어 풀이

알안달루스
무슬림이 다스린 이베리아반도 지역(711~1492).
무와히드 왕조
12~13세기 북아프리카와 알안달루스를 다스린 베르베르계 개혁 왕조.
카디
이슬람법을 적용하는 재판관.
말리크 학파
수니파 4대 법학파의 하나로 북아프리카와 알안달루스에서 우세했다.
주석
다른 글을 흔히 대목별로 풀이한 저작.
논증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 참되고 확실한 전제로부터 확실한 앎을 끌어내는 증명.
능동 지성
아리스토텔레스 심리학에서 사물을 정신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능동적 원리.
아베로에스주의
아베로에스가 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 중세·르네상스 사상가들을 가리키는 이름.
스콜라 철학
중세 유럽 대학의 교육과 논증 방식.
타윌
경전을 문자적 의미 너머로 해석하는 일.

묻고 답하기

왜 이름이 두 개예요?

이븐 루시드는 아랍어 이름이에요. 중세 유럽 사람들이 이븐 시나를 아비센나로 바꿔 부른 것처럼, 이븐 루시드를 라틴어로 아베로에스라고 불렀어요.

그는 종교가 틀렸다고 생각했나요?

아니에요. 그는 참된 종교와 참된 철학이 일치한다고 주장했어요. 둘의 균형을 어떻게 잡았는지는 논쟁이 있지만, 그가 몰래 이슬람을 거부했다는 생각은 대부분의 역사가가 받아들이지 않아요.

왜 책이 불태워졌나요?

1195년 칼리프가 그를 멀리했는데, 아마 전쟁 중에 보수적인 종교 학자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븐 루시드는 약 2년 뒤 용서받았어요.

'이중 진리'가 뭐예요?

어떤 것이 철학에서는 참이고 신학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는 주장이에요. 반대자들이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을 그렇게 비난했지만, 이븐 루시드도, 그리고 아마 어떤 중세 사상가도 실제로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어요.

왜 이슬람 세계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했나요?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은 유럽 대학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이던 때에 도착했고, 이슬람 세계의 철학은 주로 이븐 시나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에요. 근대 아랍 사상가들이 그에 대한 관심을 되살렸어요.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그가 나오나요?

벽화 속 터번을 쓴 인물을 전통적으로 아베로에스라고 보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지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원숙기 저작에서 그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하나의 질료 지성이 있고, 이것이 상상력을 통해 각 사람과 연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비판자들은 이것이 개인의 불멸을 부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븐 루시드는 마이모니데스를 알았나요?

둘 다 코르도바에서 태어났지만 만났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마이모니데스 집안은 무와히드 정복 뒤 그가 어릴 때 도시를 떠났고, 그는 말년인 1190년 무렵에야 이븐 루시드의 주석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Ibn Rushd [Averroe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 H. Chad Hillier, Ibn Rushd (Averroes) (1126–1198).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3. Averroes. Wikipedia
  4. Averroism. Wikipedia
  5. The Incoherence of the Incoherence. Wikipedia
  6. 이븐 루시드. 위키백과
  7. George F. Hourani 옮김, Averroes on the Harmony of Religion and Philosophy. Luzac, 1961
  8. Simon van den Bergh 옮김, Averroes' Tahafut al-Tahafut (The Incoherence of the Incoherence). Oxford University Press / E. J. W. Gibb Memorial, 1954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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