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마풍구브웨

Mapungubwe(“자칼의 곳”); K2는 밤반디아날로(Bambandyanalo)라고도 부른다

약 1000–1300년 · 림포포강·샤시강 합류점(남아프리카공화국 림포포주)

AI 작성 · AI 사실 검수

Claude가 쓰고 Codex(gpt-6.1-sol)가 공개 출처와 대조해 사실·연대·인용과 영어·한국어판을 독립 검수했습니다. 사람 전문가의 검토는 거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AI 검수: 2026-10-03. 찾아서 고친 문제 26건.

한 문장으로

마풍구브웨는 아프리카 남부 림포포강과 샤시강이 만나는 곳 가까이에 있는 꼭대기가 평평한 사암 언덕으로, 약 1000년부터 1300년 무렵까지 농민과 상인들이 이 지역에서 가장 이른 왕국 가운데 하나를 세운 곳이다. 지배층은 언덕 위에 살며 아래의 사람들과 떨어져 지냈고, 금과 상아를 인도양 세계와 교역했다.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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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덥고 메마른 골짜기를 떠올려 보세요.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보츠와나·짐바브웨 세 나라가 만나는 곳이에요. 림포포강과 샤시강이라는 두 강이 여기서 합쳐져요. 그 근처에 꼭대기가 평평하고 비탈이 가파른 사암 언덕이 서 있어요. 높이는 10층 건물쯤 돼요. 이 언덕의 이름이 마풍구브웨인데, 보통 “자칼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풀이해요.

약 800년 전, 이 지역의 지도자와 그 가족은 이 언덕 꼭대기에 살았어요. 수천 명의 보통 사람들은 언덕 아래 넓은 땅에 흩어진 집에서 살았지요. 많은 고고학자들은 사람들이 지도자에게 비를 내리게 하는 것 같은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지도자가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높은 곳에 살았다고 생각해요.

마풍구브웨 사람들은 수수와 기장을 기르고, 소·양·염소를 치고, 쇠로 도구를 만들었어요. 교역도 했어요. 이 지역의 금과 코끼리 상아는 인도양 바닷가까지 옮겨졌고, 그 대신 유리구슬과 중국 도자기 그릇까지 들어왔어요. 그 그릇은 지금 깨진 조각 몇 개로만 남아 있어요. 그 구슬 가운데에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만든 것도 있었어요.

1933년, 사람들이 언덕 꼭대기에서 아름다운 금 유물이 묻힌 무덤을 찾아냈어요. 가장 유명한 것은 작은 코뿔소예요. 나무로 깎은 코뿔소에 얇은 금판을 씌우고 아주 작은 금못으로 고정한 것이지요. 나무는 썩어 없어졌지만 금은 남았어요.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작아요.

1300년 무렵 사람들은 마풍구브웨를 떠났고, 더 북쪽에 있는 그레이트짐바브웨가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어요. 그 일이 정확히 언제, 왜 일어났는지는 지금도 전문가들이 토론하고 있어요. 오늘날 이 언덕은 마풍구브웨 국립공원의 일부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누구나 이 아프리카 왕국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보호되고 있어요.

한눈에 보기

무엇
초기 남부 아프리카 왕국이 차례로 세운 중심지 슈로다·K2(밤반디아날로)·마풍구브웨 언덕의 유적을 포함한 문화경관
장소
림포포강과 샤시강의 합류점 부근,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 림포포주. 보츠와나·짐바브웨와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
주요 시기
통설 연대로 슈로다 약 900–1000/1020년, K2 약 1000/1030–1220년, 마풍구브웨 언덕 약 1220–1290년. 새 방사성탄소 연대는 마풍구브웨기 사람들이 1320년 무렵까지 골짜기에 머물렀음을 시사한다
사회
농경과 목축을 하는 사회. 언덕 시기에는 지배층이 평민과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위쪽에 살았다
교역
금과 상아를 인도양 해안으로 보내고, 유리구슬과 중국 청자 등을 들여왔다
대표 유물
나무 심에 금판을 씌운 황금 코뿔소. 1933년 1월에 파헤쳐진 왕족 무덤에서 나왔다
인구
전성기 중심지에는 약 5,000명, 주변 농가까지 합치면 약 9,000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위
유네스코 세계유산(2003), 마풍구브웨 국립공원(2004년 개원)과 그레이터 마풍구브웨 접경보전지역의 중심

쉬움

마풍구브웨는 어떤 곳인가

마풍구브웨는 사암 언덕의 이름이자, 그 위에 살던 지배자들의 왕국, 그리고 둘레의 넓은 경관을 함께 가리키는 이름이다. 언덕은 주변 평지에서 약 30m 솟아 있고 길이는 약 300m이며, 깎아지른 비탈과 평평한 꼭대기를 지녔다. 샤시강이 림포포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에서 조금 남쪽,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북단에 있으며 보츠와나·짐바브웨 국경과 가깝다.

약 900년부터 1300년 무렵까지 이 골짜기에는 큰 정착지가 잇따라 들어섰다. 고고학자들은 흔히 세 중심지를 차례로 든다. 먼저 슈로다, 다음으로 K2(밤반디아날로라고도 한다)라는 큰 마을, 마지막으로 마풍구브웨 언덕 둘레의 정착지다. 마지막 단계인 1220년 무렵부터는 지배 가문이 언덕 꼭대기에, 대다수 사람들은 그 아래에 살았다. 그래서 마풍구브웨는 흔히 남부 아프리카에서 알려진 가장 이른 계층 사회이자 왕국으로 소개되지만, 뒤에서 보듯 두 주장 모두 논쟁 중이다.

이름은 보통 “자칼의 곳” 또는 “자칼의 언덕”으로 풀이한다. 이 지역의 여러 반투어에서 자칼을 가리키는 낱말에서 왔다는 설명이다. 왕국 사람들이 스스로를, 또 자기네 중심지를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고고학과, 이 지역 후대 사회와의 비교에서 나온다.

2003년 7월 유네스코는 마풍구브웨 문화경관을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다. 그 가치는 전체의 연쇄에 있다. 언덕 위 중심지, 그 둘레 마을들, 더 이른 중심지인 슈로다와 K2가 현대의 훼손을 거의 받지 않고 남아 있어, 한 왕국이 자라고 쇠퇴한 과정을 약 400년에 걸쳐 따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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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경관을 “읽는” 법

마풍구브웨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위를 걸어 본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먼저 언덕에서 남서쪽으로 1km쯤 떨어진 K2에서 출발하자. 지금은 낮은 둔덕처럼 보이지만, 실은 마을 한가운데에서 두 세기 동안 쌓인 거대한 생활 폐기물 퇴적층, 곧 재·깨진 토기·짐승 뼈·생활 쓰레기가 쌓인 더미다. 고고학자들은 이 지층을 책장처럼 넘기며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읽어 낸다.

이제 마풍구브웨 언덕을 보자.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좁으며, 근대에 처음 올라간 사람들은 한 바위틈에서 일부러 깎아 낸 계단을 발견했다. 꼭대기에는 언덕 주민들이 많은 양의 흙을 날라 올려 집 지을 평지를 만들었다. 이곳이 왕족이 살던 곳이며, 금이 풍부한 무덤들이 발견된 묘역도 꼭대기에 있다.

언덕 기슭에는 평민들의 집이 있었다. 돌담이 중요한 구역을 구분하고 지배자를 다른 사람들과 떼어 놓았다. 더 바깥으로는 작은 마을들이 골짜기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이 지역의 몇몇 언덕 꼭대기에는 기우제와 관련된 퇴적층도 있는데, 덥고 메마른 이 땅에서 비가 가장 귀한 자원이었음을 일깨운다.

마지막으로 주변 환경을 보자. 강가 범람원은 비가 넉넉할 때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이 일대에는 코끼리가 많아 상아가 귀한 교역품이 되었다. 유네스코는 유적과 땅을 아울러 골짜기 전체를 하나의 문화경관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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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농민, 목축민, 장인

마풍구브웨 사람들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강가 범람원에서 수수·기장 같은 곡물을 기르고 수확물을 높은 곡식 창고에 저장했다. 소·양·염소도 길렀다. 소는 먹을거리 이상이었다. 재산의 한 형태였고, 때로는 다른 공동체의 땅에 소 떼를 풀어 먹이며 공동체 사이의 유대를 쌓기도 했다.

사람들은 솜씨 좋은 금속 장인이었다. 쇠를 제련하고 단조해 괭이·도끼·창을 만들었고, 구리와 금으로 철사·구슬·팔찌를 만들었다. 언덕 무덤에서 나온 금 발찌 안에 감긴 섬유를 과학적으로 연대 측정한 결과, 이 유물들은 언덕에 사람이 살던 시기에 성숙한 금속 가공 전통을 지닌 현지 장인들이 만든 것이며,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농민이 오기 전, 수렵채집민은 수천 년 동안 이 골짜기에 살며 근처 바위그늘에 바위그림을 남겼다. 캐러더스의 글을 비롯한 이전 서술은 농경 마을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점차 밀려났다고 본다. 팀 포스먼의 최근 연구는 더 다양한 모습을 그린다. 일부 바위그늘의 수렵채집민은 석기 시대의 생활 방식을 지키면서 농민과 교역하고, 구슬 같은 공예품을 만들며, 부와 지역 내 지위까지 얻었다. 수렵채집민은 왕국이 성장하는 내내 이 땅에 있었지만, 그 안에서 그들의 자리는 시간이 흐르며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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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K2에서 언덕 꼭대기로: 계층과 신성한 지도력

900년 무렵, 고고학자들이 지조(Zhizo)라고 부르는 토기를 쓰던 사람들이 샤시–림포포 골짜기에 정착했다. 교역용 상아에 이끌린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주요 정착지 슈로다에는 수백 명이 살았을 것이다. 11세기 초에는 레퍼드코피(Leopard’s Kopje) 토기 전통과 연결되고 더 북쪽 짐바브웨 고원에 뿌리를 둔 다른 집단이 K2를 세웠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K2를 슈로다의 연속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로 보며, 그 연대를 약 1000년 또는 1030년부터 1220년까지로 잡는다.

K2는 아마 천 명 이상이 사는 큰 마을로 자랐다. 지도자들은 소, 상아 세공 같은 수공업, 원거리 교역과의 연결을 통해 부를 쌓았다. 그래도 지배자와 백성은 여전히 같은 정착지에 함께 살았고, 족장의 집안이 그저 가장 클 뿐이었다.

1220년 무렵 이것이 바뀌었다. 지배층은 마풍구브웨 언덕 꼭대기로 옮겨 갔고, 평민들은 언덕 아래와 주변 마을에 자리 잡았다. 돌담이 중요한 구역을 갈랐고, 지배자는 보통 사람들과 격리되었다. 오랫동안 이 분야를 이끈 모델을 세운 고고학자 토머스 허프먼은 이 이동이 계층 구분과 “신성한 지도력”이 굳어진 순간이라고 주장했다. 지배자는 더 이상 공동체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기우와 연결된 의례적 권능을 지닌 존재로서 백성 위에, 백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허프먼을 비롯한 많은 연구자에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 공간적 분리는 초기 국가의 핵심 징표였으며, 이 양식은 뒤에 그레이트짐바브웨와 카미에서 더 큰 규모로 되풀이되었다. 언덕의 금을 연대 측정한 연구는 이 무렵 금의 쓰임도 달라졌음을 보여 준다. 예전에는 주로 해안으로 내보내던 수출품이던 금이 언덕 위에서는 권력과 지위의 상징이 되었다. 다만 마풍구브웨가 이런 변화가 일어난 최초의, 혹은 유일한 곳이라는 데 모든 고고학자가 동의하지는 않으며, 이 논쟁은 아래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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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금, 상아, 유리구슬: 인도양과의 연결

마풍구브웨는 자리 잡은 위치 덕을 보았다. 짐바브웨 고원과 림포포강 남쪽 땅을 잇는 길들이 이 골짜기를 지났고,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해안에 닿았다. 바깥 세계에 이 왕국의 가치를 높인 것은 두 가지 물품이었다. 처음 사람들을 골짜기로 불러들인 코끼리 상아, 그리고 금이다. 둘 다 해안의 다른 곳에서는 구하기 어려웠고 아라비아·인도·중국에서 귀하게 여겨졌다. 이 물품들은 아마 여러 중개자의 손을 거쳐 오늘날 모잠비크 해안의 항구들로 옮겨졌을 것이다. 초기에는 치부에네와 연결되었고, 뒤에는 소팔라 일대가 주된 출구가 되었다.

그곳에서 교역은 스와힐리 해안의 연결망에 합류했다. 스와힐리 상인들과 아라비아·페르시아만·인도에서 온 상인들이 계절풍을 타고 아프리카의 금과 상아 등을 북쪽과 동쪽으로 실어 날랐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걸쳐 섬 도시 킬와가 소팔라 교역을 장악했고, 킬와의 술탄들은 항구를 지나는 금에 세금을 매겨 부유해졌다. 마풍구브웨의 금이 얼마나 킬와까지 갔는지는 잴 수 없지만, 이 왕국은 남부 아프리카 내륙을 넓은 바다와 이어 준 바로 그 사슬의 일부였다.

들어온 물건은 땅속에서 확인된다. K2와 마풍구브웨에서는 수입 유리구슬이 수천 점 넘게 발굴되었고, 언덕의 한 무덤에서만 수만 점이 나왔다. 고고학자들은 이 구슬들을 모양과 성분에 따라 여러 계열로 나누는데, 인도양 둘레 여러 공방에서 만들어졌으며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가 유력한 산지로 꼽힌다. 양식의 변화는 지층의 연대를 정하고 교역 상대의 변화를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구슬은 하찮은 장신구가 아니었다. 과시와 교환에 쓰였고, 무덤에서는 죽은 이를 기리는 데 쓰였다.

1934년에는 언덕 꼭대기에서 녹색 유약을 입힌 중국 청자 조각 몇 점도 발견되었고, 1991년에는 같은 그릇의 다른 조각이 나왔다. 처음에는 남송(1127–1279) 말기의 룽취안요 청자로 판정되었지만, 2005년의 유약 분석은 이보다 조금 늦은 원대나 명대 초의 것일 수 있다고 보았다. 어느 쪽이든 중국 남동부에서 만든 그릇이 림포포강 위 언덕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비록 여러 손을 거쳤더라도 이 왕국의 연결이 얼마나 멀리 뻗었는지를 생생히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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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황금 코뿔소와 왕족 무덤

언덕 꼭대기에는 작은 묘역이 있었다. 1930년대 발굴에서는 무덤 20여 기가 기록되었고, 그 가운데 세 기에서 금이 유난히 많이 나왔다. 오늘날 ‘최초의 황금 무덤’이라 부르는 무덤에서는 유명한 황금 코뿔소가 다른 금 유물들과 함께 나왔다. 그릇 조각, 구슬, 금 철사 띠, 무늬를 새긴 수많은 금판 조각이다. 또 다른 부유한 무덤에는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금 팔찌 100개 이상, 금구슬과 유리구슬 수천 점과 함께 묻혀 있었다.

코뿔소는 나무로 깎은 심 위에 얇은 금박을 대고 모양을 잡은 뒤 아주 작은 금못으로 고정해 만들었다. 머리와 뿔은 따로 만든 조각이다. 나무는 오래전에 썩었다. 처음 파냈을 때 금박은 찌그러지고 부서져 있었고, 조각들은 그것을 찾아낸 일행이 나누어 가졌다. 뒤에 프리토리아 대학교가 이를 사들였고, 여러 차례 조각을 맞추려는 시도가 있었다. 오늘날 전시된 모습은 1999년 영국박물관의 보존 전문가가 복원한 것이다.

코뿔소가 무엇을 뜻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코뿔소는 힘센 동물이었고, 후대의 쇼나·벤다 사회에서는 특정 동물이 씨족과 계보의 상징 구실을 했다. 흔히 왕권의 상징으로 소개된다. 고고학자 앨릭스 더피는 같은 무덤에서 나온 금 코뿔소·소·고양잇과 동물이 크기가 비슷하고 발에 못 구멍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 이것들이 원래 정교하게 조각한 나무 점술 그릇에 붙어 있었으며 후대 벤다의 점술 그릇과 비교할 만하다고 주장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뒤 황금 코뿔소는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2002년 제정된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 훈장인 마풍구브웨 훈장의 휘장 한가운데에 들어가 있고, 2016–2017년에는 런던 영국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유물 자체는 프리토리아 대학교의 마풍구브웨 컬렉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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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쇠퇴와 그레이트짐바브웨의 부상

통설 연대에 따르면 마풍구브웨 언덕의 중심지는 1290년 무렵 버려졌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허프먼과 우드번이 2021년에 발표한 새 방사성탄소 연대들은 마풍구브웨 양식 토기를 쓰던 사람들이 1320년 무렵까지 골짜기에 남아 있었음을 시사하며, 치리쿠레도 1290년 이후의 거주를 주장했다. 이후 수십 년 사이 짐바브웨 고원에서 북동쪽으로 250km 넘게 떨어진 그레이트짐바브웨가 이 지역의 으뜸 중심지가 되었다. 그곳에는 더 큰 석벽 구역이 있었고 지배층과 평민의 구분이 뚜렷했다. 더 뒤에는 권력이 서쪽의 카미로 옮겨 갔다.

마풍구브웨가 왜 버려졌는가는 이 유적을 둘러싼 핵심 질문 가운데 하나다. 유네스코의 유산 가치 설명은 기후를 원인으로 든다. 그 설명에 따르면 이 척박한 골짜기의 농사는 알맞은 강수에 달려 있었는데, 1300년 무렵 건조한 시기가 오자 사람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밖에 토양 고갈과 과잉 방목, 북쪽에 유리한 항구와 교역로로의 해안 교역 이동, 비를 보장하지 못하게 된 지배자에 대한 신뢰 상실 등이 거론된다.

허프먼과 환경과학자 스테판 우드번은 기우 의례와 불탄 곡식 창고라는 고고학 증거를 바오바브나무에서 얻은 1,000년간의 강수 기록과 결합해, 14세기 초에 실제로 가뭄이 있었지만 마풍구브웨가 버려진 데에는 “환경 압력 못지않게 문화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결론지었다. 이들의 2021년 연대는 마풍구브웨기의 끝을 바오바브 기록이 1310년 무렵으로 잡는 심한 가뭄과 가까이 놓는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은 기후가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부터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는 ‘여러 관점’ 부분에서 다룬다.

마풍구브웨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후손들은 이웃 공동체와 섞였고, 왕국의 문화 양식은 짐바브웨 고원의 국가들 속에 이어졌다. 벤다족과 칼랑가족(쇼나족과 가까운 민족) 등 오늘날 여러 집단이 마풍구브웨와의 조상 관계를 주장해 왔지만, 역사가들은 특정 한 집단이 직계 후손이라는 증거는 제한적이라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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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마풍구브웨는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 금과 상아는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교역 체계로 들어갔고, 이 왕국을 세계사 속에 놓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물품들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스와힐리 해안에서는 킬와 같은 도시들이 중개 무역으로 부유해지고 있었다. 『킬와 연대기』가 12세기 말로 전하는 킬와의 소팔라와 금 교역 장악은 K2가 한창이던 때의 일이다. 이븐 바투타가 찾아온 1331년을 포함한 킬와의 14세기 전성기는 마풍구브웨가 쇠퇴하고 그레이트짐바브웨가 내륙의 주된 금 공급지가 된 뒤에 왔다.

바다 반대편에서 남송(1127–1279)은 해상 교역에 크게 의존했고, 푸젠의 취안저우는 그 대표적 항구였다. 1225년 무렵 취안저우의 시박(市舶) 업무를 맡은 조여괄(趙汝适)은 상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외국 안내서 『제번지(諸蕃志)』를 엮었다. 동아프리카 해안의 일부를 가리키는 ‘층발(層拔)’ 항목에서 그는 그곳의 산물로 코끼리 상아, ‘자연산 금’, 용연향, 황단향을 꼽고, 해마다 구자라트와 아랍 항구에서 배들이 흰 무명, 자기, 구리를 싣고 온다고 적었다. 그의 글에 마풍구브웨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13세기 초 중국 관리들이 동아프리카를 바로 마풍구브웨가 내보내던 물품의 산지로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조여괄의 정보는 외국 상인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었고, 물품은 여러 단계를 거쳐 바다를 건넜다. 개별 물건이 어떤 경로로 림포포강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다. K2와 마풍구브웨의 유리구슬(상당수는 남아시아산으로 보인다)과 언덕 위 중국 청자는 이런 교류가 남긴 물리적 흔적이다. 다만 청자는 송대가 아니라 원대 이후의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림포포강의 왕국, 스와힐리 해안, 인도 서부의 항구, 그리고 중국은 13세기에 하나의 인도양 세계를 이루는 서로 연결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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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발견, 발굴, 그리고 정치

현지 공동체는 오래전부터 이 언덕을 알고 있었고, 신성하며 함부로 올라서는 안 되는 곳으로 여겼다. 1932년 12월, 농부의 아들이자 프리토리아 대학교 학생이던 J. C. O. 판흐란은 “신성한 언덕” 이야기를 들었다. 1932년에서 1933년으로 넘어가는 새해 무렵, 그는 아버지와 다른 남자 세 명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이들은 기록에 ‘모웨나’라는 이름으로만 남은 현지 남성을 압박해 꼭대기로 오르는 숨은 길을 알려 달라고 했고, 그는 마지못해 겁에 질린 채 길을 가리켰다. 꼭대기에서 일행은 금구슬과 팔찌, 금판 조각을 찾았고, 1933년 1월 2일에는 코뿔소가 묻힌 무덤을 파헤쳤다.

판흐란은 이 발견을 자신의 역사학 교수 레오 푸셰에게 알렸다. 푸셰는 발견자들에게 금값을 치러 금이 프리토리아 대학교로 가도록 했고, 정부가 그 농장 흐레이프스발트를 사들이도록 주선했다. 발견은 1933년 4월 8일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를 통해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같은 달 첫 발굴단이 도착했다. 뒤에 네빌 존스와 가이 가드너가 이끈 1933–1940년 발굴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수습했지만 오늘날 기준으로는 기록이 부실했고, 유네스코는 귀중한 증거가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1937년 푸셰의 보고서 제목은 『마풍구브웨: 림포포강의 고대 반투 문명』이었다.

정치적 환경은 곧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1930년대 프리토리아 대학교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의 영향 아래 들어갔고,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라는 평을 받던 푸셰는 다른 대학으로 떠났다. 백인 정착민의 역사관은 반투어를 쓰는 아프리카인이 유럽인과 거의 같은 무렵 이 지역에 들어왔다고 가르쳤다. 이른바 “빈 땅의 신화”다. 그보다 몇 세기 앞서 림포포강가에 부유한 아프리카 왕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와 모순되었다. 일부 형질인류학자는 유골을 인종주의적으로 해석해 오늘날 아프리카 주민과의 연관성을 깎아내렸는데, 1970년대 이후의 연구들은 이런 결론을 기각했다.

1947년 얀 스뮈츠 정부는 마풍구브웨를 포함하고 장차 국경을 넘는 보호구역의 일부가 될 국립공원인 동골라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만들었다. 1948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이기자 이 공원은 폐지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연구는 간헐적으로 이어졌지만 유적은 대중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1980년대에 K2와 마풍구브웨 언덕이 국가 기념물로 지정되었지만, 왕국의 이야기가 교과서와 국가 상징에 들어간 것은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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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재매장, 세계유산, 국경을 넘는 공원

1994년 이후 마풍구브웨는 아프리카의 성취,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정부가 내세운 “아프리카 르네상스”의 상징이라는 새 역할을 얻었다. 2003년 유네스코는 마풍구브웨 문화경관을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처음 등재된 문화경관이었다. 유산 구역은 약 2만 8천 헥타르이고 그보다 훨씬 넓은 완충 구역이 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립공원청(SANParks)이 관리한다.

마풍구브웨 언덕·K2·슈로다에서 수십 년에 걸쳐 발굴된 유골은 박물관과 대학 소장품으로, 무엇보다 프리토리아 대학교에 보관되어 있었다. 마풍구브웨 사람들을 조상으로 여기는 공동체들의 반환 요구가 이어지자, 소장 기관·청구 공동체·정부 기관으로 이루어진 운영위원회가 반환을 추진했다. 대부분의 유골은 먼저 표준적인 인류학 방법으로 기록되었지만, DNA 분석처럼 시료를 훼손하는 분석은 허용되지 않았다. 143명의 유골이 한 사람씩 밀봉 용기에 담겨 주요 유적에 다시 묻혔고, 마풍구브웨 언덕의 재매장은 2007년 11월 20일 청구 공동체와 전통 치유사들의 의례 속에 이루어졌다. 프리토리아 대학교 연구진에 따르면 계획되었던 공식 기념식은 정치적 갈등 속에 취소되었다. 금을 비롯한 부장품은 이 대학 박물관에 남아 있다.

주변 보호구역은 1990년대 말부터 SANParks가 관리해 왔으며, 처음에는 벰베-동골라 국립공원이라 불렸다. 2004년 마풍구브웨 국립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해 9월 24일 ‘문화유산의 날’에 공식 개원했다. 주로 문화유산 때문에 세워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지금은 고고 유적과 함께 코끼리를 비롯한 큰 동물들이 이 경관으로 돌아와 있다.

왕국의 영역이 오늘날의 세 나라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보츠와나·짐바브웨는 2006년 합류점 일대에 접경보전지역을 만들기로 하는 양해각서를 맺었고, 2009년 이 지역의 이름은 그레이터 마풍구브웨 접경보전지역으로 바뀌었다. 주변의 관개 농지와 광산 개발 같은 압력은 여전하며, 유네스코는 유산 구역 바로 바깥에 내준 석탄 채굴 허가에 우려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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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여러 관점

기후 탓이었나? 1300년 무렵 기후가 건조해져 골짜기가 많은 농경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견해는 유네스코의 유산 가치 설명에 들어 있으며, 오랫동안 표준적인 설명이었다. 특히 소빙기의 시작에 관한 허프먼의 연구와 연결된다. 허프먼과 우드번의 바오바브 연구와 새 방사성탄소 연대는 최종적인 이주를 14세기 초의 가뭄과 연결하면서도 문화적 요인을 함께 인정한다. 섀드렉 치리쿠레와 동료들을 비롯한 비판자들은 이런 추론이 지나치게 환경결정론적이라고 본다. 비슷한 환경의 상류와 하류 공동체들은 같은 기후 조건을 견디며 지속되었으므로, 가뭄만으로는 마풍구브웨의 중심지가 버려진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논쟁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마풍구브웨는 “국가”였나, 그리고 최초였나? 허프먼에게 1220년 무렵 지배층이 언덕 꼭대기로 옮겨 간 일은 고고학자들이 짐바브웨 문화라 부르는 것의 특징인 계층 구분과 신성한 지도력이 굳어진 순간이며, 따라서 그레이트짐바브웨로 이어지는 남부 아프리카 최초의 국가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2014년 치리쿠레와 동료들은 북서쪽으로 약 90km 떨어진 짐바브웨 남서부 마펠라 언덕의 연대를 발표해, 마풍구브웨의 언덕 시기보다 이른 11세기에 이미 석벽을 쌓아 만든 거대한 계단식 대지와 지배층 주거의 바닥이 있었음을 보였다. 이들은 마풍구브웨를 더 이상 짐바브웨 문화의 유일한 요람으로 볼 수 없다고 결론짓고, 여러 중심지가 나란히 발전했다는 모델을 내놓았다. 마풍구브웨의 중심적 역할을 옹호하는 연구자들도 여전히 있다. “왕국”이라는 말 자체도 유럽의 제도에 빗댄 것이어서, 역사학자 제인 캐러더스는 이 낱말에 따옴표를 친다.

유산 서사는 어떻게 바뀌었나? 마풍구브웨에 관한 이야기는 정치와 함께 달라졌다. 초기 발굴자들은 이곳이 아프리카인의 유적임을 받아들였지만, 그 주민에 대한 인종주의적 이론,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의 “빈 땅” 서사, 공적인 무관심이 수십 년 동안 이 유적을 대중의 역사에서 밀어냈다. 1999년 맘펠라 람펠레는 황금 코뿔소가 “조심스럽게 숨겨져”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프리토리아 대학교는 수십 년간의 언론 보도를 근거로 이를 반박했다. 한편 캐러더스는 대학이 이 유적을 국민의 의식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거의 힘쓰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이렇게 보면 유물은 비밀은 아니었지만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다. 1994년 이후 마풍구브웨는 국가의 상징이 되었고, 캐러더스 같은 학자들은 이 새 이야기 역시 단순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컨대 불평등과 수렵채집민의 배제 위에 선 사회를 그저 찬양하거나, 한 집단만을 유일한 계승자로 내세우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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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증거와 방법: 문자 없는 왕국의 연대 정하기

마풍구브웨는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 역사는 고고학과 과학에 기댄다. 슈로다–K2–마풍구브웨 언덕이라는 기본 순서는 토기 양식, 층위를 이룬 쓰레기 더미, 방사성탄소 연대에서 나왔고 수십 년에 걸쳐 다듬어졌다. 방사성탄소 측정값은 보정을 거쳐야 하는데, 보정 곡선의 굴곡 때문에 한 시료가 여러 개의 가능한 역년 범위를 낼 수 있어, 고고학자들은 층위와 지역 연대 모델로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 그래서 흔히 인용되는 연대(K2 약 1000/1030–1220년, 언덕 중심지 약 1220–1290년)는 마풍구브웨기의 끝을 1320년 무렵으로 잡는 허프먼과 우드번의 2021년 수정 연대와 차이가 난다.

수입품은 교차 검증 수단이 된다. 유리구슬은 모양·색·화학 성분으로 분류할 수 있고, 퇴적층에 새 구슬 계열이 나타나는 시점은 지층의 연대를 정하고 교역 상대의 변화를 추적하는 데 쓰인다. 그러나 수입품이 그림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2005년 분석은 청자가 원대(1279–1368)나 명대 초의 것일 수 있다고 보았다. 원대는 통설의 거주 연대와 겹치지만, 이 그릇이 14세기 제품으로 밝혀진다면 언덕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늦게까지 쓰였다는 뜻이 된다. 재연대를 제안한 연구자들은 언덕에서 방사성탄소 연대를 더 확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금에는 금 나름의 문제가 있다. 금속은 방사성탄소로 연대를 잴 수 없지만, 2009년 우드번·피에나르·틸리-넬은 나선형 금 발찌 안에 남은 유기 섬유의 연대를 측정해 이것이 언덕 거주 시기와 같은 때의 것임을 보였다. 1933년 제대로 된 기록 없이 서둘러 파낸 코뿔소와 다른 금박 유물들은 이런 연대 측정이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해석은 후대 민족지에서 끌어온 모델에 기댄다. 신성한 지도력과 기우 언덕에 대한 허프먼의 해석은 후대의 쇼나·벤다 등 남부 아프리카 사회와의 비교에 크게 의존한다. 비판자들은 독립적인 증거 없이 최근의 관습을 8세기 전으로 투사하는 것을 경계한다. 2007년의 재매장도 앞으로의 연구를 제약한다. 유골은 보존을 위해 밀봉 용기에 담겼지만 재매장 전에 시료를 훼손하는 분석은 허용되지 않았고, 새로운 연구를 하려면 다시 합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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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계층에 따른 거주
1220년 무렵부터 지배층은 언덕 꼭대기에, 평민은 그 아래에 살았다. 사회적 불평등을 공간으로 드러낸 것으로, 많은 고고학자는 이를 국가 형성의 이른 징표로 본다.
신성한 지도력
토머스 허프먼의 영향력 있는 해석에 따르면 지배자는 격리된 채 기우 같은 의례적 권능과 연결되었으며, 단지 부유한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권력이 된 금
주로 수출품이던 금이 언덕 위에서는 왕족 지위의 상징이 되었다. 황금 코뿔소와 부유한 무덤들이 이를 보여 준다.
인도양과의 연결
금과 상아는 중개자를 거쳐 해안으로 갔고, 유리구슬과 중국 청자 그릇이 들어왔다.
중심지의 이동
권력은 슈로다에서 K2, 마풍구브웨 언덕으로 옮겨 갔다. 1300년 무렵 이후 그레이트짐바브웨가 으뜸 중심지가 되었지만, 그것이 마풍구브웨에서 곧바로 이어졌는지는 논쟁 중이다.
논쟁 중인 원인
기후 변화, 교역 변화, 정치적 요인이 모두 마풍구브웨가 버려진 원인으로 제시되었으며, 각각의 비중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유산과 정치
인종 분리와 아파르트헤이트 아래에서 주변으로 밀려났던 마풍구브웨는 1994년 이후 국가 상징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기록

  1. 약 900년 — 지조 토기를 쓰는 공동체가 샤시–림포포 골짜기에 정착하고, 슈로다가 그 중심지가 된다.
  2. 약 1000년 — 레퍼드코피 전통의 사람들이 K2(밤반디아날로)를 세운다. 1000년에서 1030년 사이의 연대가 제시된다.
  3. 약 1220년 — 지배층이 마풍구브웨 언덕 꼭대기로 옮겨 가고, 평민은 그 아래에 산다.
  4. 약 1225년 — 취안저우의 시박 관리 조여괄이 『제번지』를 엮어 동아프리카 해안의 산물로 상아와 금을 꼽는다.
  5. 약 1290년 — 언덕 중심지가 버려진 통설 연대. 새 연대는 마풍구브웨기 사람들이 1320년 무렵까지 골짜기에 살았음을 시사한다.
  6. 약 1300년 — 그레이트짐바브웨가 이 지역의 으뜸 중심지가 된다.
  7. 1933년 — 1월 2일 판흐란 부자가 이끈 일행이 언덕 위 무덤에서 금을 꺼낸다. 프리토리아 대학교의 발굴은 4월에 시작된다.
  8. 1947년 — 마풍구브웨를 포함한 동골라 야생동물 보호구역이 만들어진다. 1948년 총선 뒤 폐지된다.
  9. 2003년 — 마풍구브웨 문화경관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다.
  10. 2004년 — 9월 24일(문화유산의 날) 마풍구브웨 국립공원이 공식 개원한다.
  11. 2007년 — 수십 년에 걸쳐 마풍구브웨 언덕·K2·슈로다에서 발굴된 유골이 주요 유적에 다시 묻힌다. 마풍구브웨 언덕의 재매장은 11월 20일에 이루어진다.

용어 풀이

K2(밤반디아날로)
마풍구브웨 언덕 이전의 중심지. 언덕에서 남서쪽으로 1km쯤 떨어져 있으며 약 1000/1030년부터 1220년까지 사람이 살았다.
지조(Zhizo)
900–1000년 무렵 이 지역의 토기 양식, 그리고 그 토기를 쓴 공동체를 가리키는 이름.
레퍼드코피(Leopard’s Kopje)
K2를 세운 사람들과 연결되는 짐바브웨 고원의 고고학 전통.
쓰레기 더미(미든)
재·뼈·깨진 물건이 쌓인 더미. 그 지층에 시간에 따른 변화가 기록된다.
다카(dhaka)
집의 바닥과 벽에 쓴, 흙과 점토를 다져 굳힌 건축 재료.
신성한 지도력
지도자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비를 내리게 하는 것 같은 의례적 권능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통치 형태.
짐바브웨 문화
돌담과 계층 분리를 갖춘 지배층 중심지의 고고학 전통. 마풍구브웨·마펠라에서 그레이트짐바브웨·카미까지 이어진다.
청자
녹색 유약을 입힌 중국의 도자기. 인도양 곳곳으로 널리 수출되었다.
교역용 유리구슬
인도양 둘레에서 만들어져 내륙까지 교역된 작은 유리구슬. 오늘날 유적의 연대를 정하고 교역을 추적하는 데 쓰인다.
문화경관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결과가 탁월한 가치를 지닌 곳을 가리키는 유네스코의 범주.
접경보전지역
이웃한 나라들이 국경을 넘어 함께 계획하고 관리하는 보호구역.

묻고 답하기

마풍구브웨에는 누가 살았나요?

아프리카의 농민, 목축민, 금속 장인, 상인들로, 이 지역 후대 사람들의 조상이에요. 지배자는 언덕 꼭대기에, 보통 사람들은 그 아래에 살았어요.

황금 코뿔소는 통금인가요?

아니에요. 나무로 깎은 형상 위에 얇은 금박을 씌워 모양을 잡고 아주 작은 금못으로 고정한 거예요. 나무는 썩어 없어졌어요.

마풍구브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중국까지 갔나요?

그랬다는 증거는 없어요. 물건은 해안 항구와 인도양 둘레의 여러 상인을 거쳐 단계적으로 옮겨졌고, 중국 청자 그릇도 그런 교류를 통해 언덕까지 왔어요.

사람들은 왜 마풍구브웨를 떠났나요?

아마 여러 이유가 겹쳤을 거예요. 기후가 건조해졌다는 설명이 가장 흔하지만 교역과 정치의 변화도 중요했을 수 있고, 기후가 결정적이었는지 의심하는 연구자들도 있어요.

마풍구브웨와 그레이트짐바브웨는 무슨 관계인가요?

마풍구브웨가 쇠퇴한 뒤 그레이트짐바브웨가 이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지배층의 석조 건축과 지배자·평민의 뚜렷한 분리 같은 특징을 공유했어요. 마풍구브웨가 그 직접적인 조상인지, 아니면 여러 초기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는지는 논쟁 중이에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이 발견이 숨겨졌나요?

유물은 출판되고 보도되었지만, 아프리카인이 이 지역에 늦게 들어왔다는 주장과 모순되었기 때문에 대중의 역사에서는 주변으로 밀려났어요. 그것을 의도적인 은폐로 볼 수 있는지는 의견이 갈려요.

지금 가 볼 수 있나요?

네. 언덕과 박물관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림포포주의 마풍구브웨 국립공원 안에 있고, 금 유물은 프리토리아 대학교에 전시되어 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Mapungubwe Cultural Landscape.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2. Kingdom of Mapungubwe. Wikipedia
  3. Jane Carruthers, Mapungubwe: an historical and contemporary analysis of a World Heritage cultural landscape. Koedoe 49(1): 1–13, 2006
  4. Shadreck Chirikure, Munyaradzi Manyanga, A. Mark Pollard, Foreman Bandama, Godfrey Mahachi and Innocent Pikirayi, Zimbabwe Culture before Mapungubwe: New Evidence from Mapela Hill, South-Western Zimbabwe. PLoS ONE 9(10): e111224, 2014
  5. Stephan Woodborne, Marc Pienaar and Sian Tiley-Nel, Dating the Mapungubwe Hill Gold. Journal of African Archaeology 7(1), 2009
  6. Linda C. Prinsloo, Nigel Wood, Maggi Loubser, Sabine M. C. Verryn and Sian Tiley, Re-dating of Chinese celadon shards excavated on Mapungubwe Hill, a 13th century Iron Age site in South Africa, using Raman spectroscopy, XRF and XRD. Journal of Raman Spectroscopy 36: 806–816, 2005
  7. Thomas N. Huffman and Stephan Woodborne, Archaeology, baobabs and drought: Cultural proxies and environmental data from the Mapungubwe landscape, southern Africa. The Holocene 26(3): 464–470, 2016
  8. Thomas N. Huffman and Stephan Woodborne, New AMS dates for the Middle Iron Age in the Mapungubwe landscape. South African Journal of Science 117(3/4), 2021
  9. Shadreck Chirikure, Foreman Bandama, Michelle House, Munyaradzi Manyanga and Robert Nyamushosho, Archaeology, climate change and human adaptation in southern Africa: Evidence from Mapela and Little Mapela, southern Africa. Quaternary Science Advances 15: 100219, 2024
  10. Mapungubwe not the origin of Great Zimbabwe. University of Cape Town News, 2012
  11. Tim Forssman, Unmasking the forgotten foragers of the Mapungubwe landscape. Koedoe 66(2), 2024
  12. Alex Duffey, Mapungubwe: Interpretation of the Gold Content of the Original Gold Burial M1, A620. Journal of African Archaeology 10(2): 175–187, 2012
  13. John Giblin, Meet the 800-year-old golden rhinoceros that challenged apartheid South Africa. The Conversation, 2016
  14. Golden Rhinoceros of Mapungubwe. Wikipedia
  15. Gold rhinoceros, Mapungubwe Hill 1933, before its final restoration (colour slide record). University of Pretoria, UPSpace repository
  16. Xolelwa Kashe-Katiya, Carefully Hidden Away: excavating the archive of the Mapungubwe dead and their possessions (MPhil dissertation). University of Cape Town, 2013
  17. Mapungubwe. South African History Online
  18. Mapungubwe National Park reveals its royal secrets. Peace Parks Foundation
  19. Limpopo Shashe Transfrontier Conservation Area renamed Greater Mapungubwe TFCA. South African Government, 2009
  20. Kilwa Sultanate. Wikipedia
  21. Friedrich Hirth and W. W. Rockhill (translators), Chau Ju-kua: His Work on the Chinese and Arab Trade in the Twelfth and Thirteenth Centuries, entitled Chu-fan-chï. Imperial Academy of Sciences, St Petersburg, 1911
  22. Thomas N. Huffman, Mapungubwe: Ancient African Civilisation on the Limpopo. Witwatersrand University Press, 2005
  23. Zhu Fan Zhi. Wikipedia
  24. Willem C. Nienaber, Natalie Keough and Maryna Steyn, Repatriation of the Mapungubwe human remains: an overview of the process and procedure (poster). University of Pretoria, Faculty of Health Sciences Faculty Day, 2008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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