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학생들이 몇 년씩 머물며 안뜰을 둘러싼 작은 벽돌 방에서 자고, 종소리에 일어나 큰 연못에서 몸을 씻은 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스승의 말을 듣고 큰 질문을 두고 토론하는 학교를 떠올려 보자. 그곳이 바로 오늘날 인도 비하르주에 있던 불교 사원 날란다다.
날란다는 약 1,600년 전인 427년 무렵, 굽타 왕조의 한 왕이 땅과 재물을 내어 세웠다. 뒤의 왕들도 계속 건물을 더했다. 승원과 사당이 늘어났고, 여러 층 높이였다고 전하는 큰 도서관도 생겼다.
학생들은 아주 먼 곳에서도 왔다. 중국의 승려 현장은 사막과 산맥을 건너 몇 해를 걷고 말을 타서 이곳에 닿았고, 약 2년 동안 머물렀다. 한국(신라), 티베트,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승려들이 왔다. 이들은 불교 가르침뿐 아니라 문법, 논리학, 의학 등도 배웠다.
들어가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문지기가 어려운 질문을 던졌고, 들어가고 싶어 한 사람 가운데 많은 이가 돌아가야 했다.
1200년 무렵 군대가 이 지역을 공격했고, 날란다는 불에 타 크게 부서졌다. 그 뒤 점점 버려져 흙에 묻혔다. 1800년대와 1900년대에 고고학자들이 이곳을 다시 파냈고, 지금은 누구나 붉은 벽돌 유적 사이를 걸어 볼 수 있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한눈에 보기
- 성격
- 불교 마하비하라(대사원)이자 학문의 중심지
- 위치
- 인도 비하르주 라즈기르 근처, 파트나에서 남동쪽으로 약 90km(고대 마가다 지방)
- 창건
- 427년 무렵. 인장에 창건자로 적힌 샤크라디티야는 보통 굽타 왕조의 쿠마라굽타 1세로 본다
- 주요 후원자
- 굽타 왕들, 카나우지의 하르샤(7세기), 팔라 왕조(8~12세기), 샤일렌드라 왕 발라푸트라데바 같은 외국 후원자
- 이름난 방문자
- 현장(630~640년대), 의정(670~680년대), 신라와 티베트의 승려들
- 쇠퇴
- 1200년 무렵 바흐티야르 할지가 이끈 튀르크계 세력의 비하르 정복 과정에서 약탈당함. 작은 규모의 활동은 수십 년 더 이어짐
- 발굴 범위
- 약 488×244m(약 12ha). 승원 11곳과 큰 벽돌 사당 6곳
- 지위
- 유네스코 세계유산 ‘날란다 마하비하라 고고 유적’(2016)
쉬움
날란다는 어떤 곳이었나
날란다는 동인도의 옛 마가다 지방에 있던 불교 ‘마하비하라’, 곧 여러 승원(비하라)과 사당, 불탑이 모인 ‘대사원’이었다. 옛 왕도 라자그리하(오늘날 라즈기르) 가까이, 파탈리푸트라(오늘날 파트나)에서 남동쪽으로 약 9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5세기부터 1200년 무렵까지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불교 학문의 중심지였다.
날란다는 흔히 ‘세계 최초의 기숙형 대학’이라 불린다. 이 비유는 규모와 역할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수천 명의 승려가 함께 살며 이름난 스승 밑에서 공부하고 다른 학파와 토론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곳을 현대적 의미의 대학으로 보는 데 신중하다. 종교적 계율과 의무를 지닌 승가 공동체였고, 배움은 학위를 얻는 길이 아니라 수행 생활의 일부였다.
날란다라는 지명은 사원보다 오래되었다. 초기 불교와 자이나교 경전은 라자그리하 근처의 날란다라는 곳을 언급하며, 붓다와 자이나교의 스승 마하비라가 모두 이곳을 찾았다고 전한다. 붓다의 으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리불(사리푸트라)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입적했다는 불교 전승도 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5세기보다 오래된 승원 건물을 찾지 못했다.
오늘날 발굴된 유적은 붉은 벽돌 승원이 길게 늘어서고 ‘제3사당’이라 불리는 거대한 계단식 사당이 서 있는 세계유산이다. 근처에는 출토품을 모은 박물관과 날란다의 이름을 이은 현대 대학이 있다.
쉬움
사원 안의 생활
날란다의 승원은 가운데 안뜰을 회랑이 두르고, 그 바깥으로 승려들이 살며 공부하는 작은 방들이 줄지어 있는 네모난 벽돌 건물이었다. 입구 맞은편에는 불상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여러 건물이 2층 이상이었다. 승려들은 벽에 붙여 만든 돌이나 벽돌 침상에서 잤고, 방마다 등불과 책을 두는 벽감이 있었다.
7세기 후반 날란다에서 약 10년을 지낸 중국 승려 의정은 일과를 자세히 기록했다. 하루는 종소리로 시작되었다. 승려들은 열 개의 큰 연못 가운데 하나로 가서 목욕했는데, 목욕 천을 두르는 방법까지 정확한 규칙이 있었다. 식사, 의식, 독송, 공부가 정해진 시간표를 따랐다. 공동체의 일은 대중 회의에서 정했고, 승려 한 사람만 반대해도 안건이 통과되지 않았다.
사원은 토지 기증으로 운영되었다. 현장에 따르면 왕은 약 100개 마을의 세입을 사원에 주었고, 몇십 년 뒤의 의정은 200개 마을을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쌀, 버터, 우유를 바쳤기 때문에 승려들은 밭일을 하지 않고 공부와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인원은 분명하지 않다. 현장의 기록을 옮긴 후대 전기에는 승려 약 1만 명과 스승 1,500명이 나오지만, 의정은 3,000명 남짓이라고 했다. 고고학자들은 사원이 지금까지 발굴된 범위보다 훨씬 크지 않았다면 발굴된 방들로 1만 명을 수용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쉬움
날란다에서는 무엇을 배웠나
날란다는 무엇보다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티베트로 퍼져 나간 ‘큰 수레’ 전통, 곧 대승 불교의 중심지였다. 현장의 전기에 따르면 모든 학생이 대승 경론과 함께 초기 불교 18부파의 문헌도 공부했다. 티베트 전통은 뒤에 이곳에서 가르친 주요 철학을 네 체계로 정리했다. 설일체유부의 두 갈래(비바사사와 경량부), 나가르주나(용수)와 연결된 ‘중도’의 중관학파, 아상가(무착)와 바수반두(세친)의 ‘오직 마음’을 말하는 유가행파(유식)다.
학생들은 불교 교리 밖의 과목도 배웠다. 산스크리트 문법, 논리학과 토론술, 의학, 그리고 베다와 상키야 철학 같은 브라만 전통의 문헌이다. 논리학은 필수였다. 승려들은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상가를 비롯한 다른 학파와의 공개 토론에서 불교의 입장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현장은 경론 20부를 풀이할 수 있는 스승이 약 1,000명, 30부를 풀이할 수 있는 스승이 500명, 50부를 풀이할 수 있는 스승은 10명뿐이었다고 기록했다. 당시 주지 계현(시라바드라)은 그 모두를 통달했다고 한다. 이런 수치는 지식이 텍스트를 설명하고 변호하는 능력으로 가늠되었음을 보여 준다.
후기 인도 불교의 중요한 사상가 다수가 날란다와 연결된다. 호법(다르마팔라), 계현, 월칭(찬드라키르티), 법칭(다르마키르티), 적천(샨티데바), 적호(샨타락시타) 등이다. 나가르주나, 아상가, 바수반두 같은 이전 인물들도 전통적으로 날란다의 스승으로 꼽히지만, 이들은 아마 사원이 세워지기 전에 살았기 때문에 실제로 이곳에서 가르쳤는지는 불확실하다.
중급
창건과 후원자들
399년부터 412년 무렵까지 인도를 여행한 중국 순례승 법현은 이 지역을 찾았지만 날란다의 큰 사원은 언급하지 않는다. 아직 사원이 없었다는 뜻으로 보인다. 유적에서 나온 인장은 샤크라디티야라는 왕을 창건자로 적고 있으며, 현장의 기록도 이와 일치한다. 학자들은 대체로 샤크라디티야를 굽타 왕조의 쿠마라굽타 1세(재위 415~455년 무렵)로 보고, 날란다에서 나온 주화도 그의 치세에 창건되었음을 뒷받침한다. 관례적인 창건 연대는 427년 무렵이다.
뒤의 굽타 왕들도 승원과 사당을 더했다. 굽타 왕들은 힌두 신을 섬겼고, 날란다에서 인장이 발견된 다른 후원자들 가운데도 불교도가 아닌 이가 많았다. 그들의 인장에는 락슈미, 가네샤, 두르가 같은 신이 새겨져 있다. 이름난 사원을 후원하는 일은 자기 신앙과 상관없이 명예와 공덕을 가져다주었다.
7세기에는 카나우지의 황제 하르샤가 큰 후원자가 되었다. 그의 치세에 이곳을 찾은 현장은 날란다를 여러 대에 걸친 왕들이 이룩한 곳으로, 벽돌 담장에 둘러싸이고 화려하게 꾸민 탑과 누각이 빽빽이 들어선 곳으로 묘사했다. 다른 인도 왕들과 외국 왕들도 기여했다.
8세기 중엽부터 불교도였던 벵골·비하르의 팔라 왕조가 약 4세기 동안 날란다를 후원했다. 제1승원에서 발견된 860년 무렵의 동판 비문은 수바르나드비파(수마트라·자와)의 샤일렌드라 왕 발라푸트라데바가 날란다에 승원을 짓고, 팔라 왕 데바팔라에게 유지비로 다섯 마을을 내려 달라고 청했다고 기록한다. 팔라 왕들은 비크라마실라와 오단타푸리 같은 새 사원도 근처에 세웠는데, 이들은 결국 학승을 두고 날란다와 경쟁하게 되었다.
중급
중국·한국·티베트에서 온 순례승들
날란다에 관해 아는 것의 많은 부분은 중국 순례승들에게서 나온다. 현장은 629년 중국을 떠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630년대 초 인도에 닿았다. 그는 날란다에서 노스승 계현에게 당시 중국에 일부만 알려져 있던 유가행파 가르침과 논리학,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모두 합쳐 약 2년을 머물렀고, 뒤에는 대중에게 강의도 했다. 645년 수백 부의 산스크리트 경전을 가지고 돌아와 남은 생애를 번역에 바쳤다. 그의 여정은 뒤에 중국 소설 『서유기』에 영감을 주었다.
의정은 동남아시아를 거치는 바닷길로 673년 인도에 닿아 날란다에서 약 10년을 보냈다. 1896년 다카쿠스 준지로가 영어로 옮긴 그의 기록은 계율과 일상생활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약 400부의 산스크리트 문헌을 가지고 돌아갔다.
한국의 승려들도 먼 길을 떠났다. 의정의 기록에는 날란다에 머물며 산스크리트 이름을 쓴 현조, 혜륜 같은 신라 승려가 나온다. 몇몇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같은 시기 티베트 학생들도 산스크리트어와 불교를 배우러 왔으며, 티베트 전통은 인도에서 공부한 대신 톤미 삼보타가 티베트 문자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사람과 책은 양방향으로 오갔다. 날란다의 학승들은 외국으로 초청되었고, 그 가르침은 동아시아와 티베트의 불교를 빚었다. 한편 동남아시아 등지의 왕들이 보낸 기증품은 사원을 유지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
중급
도서관과 건물들
날란다는 도서관으로 유명했다. 티베트 자료는 이를 ‘다르마간자’, 곧 ‘법(法)의 곳간’이라 부른다. 이 후대 전승에 따르면 도서관은 ‘보배의 대양’(라트나사가라), ‘보배의 바다’(라트노다디), ‘보배로 꾸민 곳’(라트나란자카)이라는 세 큰 건물을 차지했고, 그 가운데 하나는 9층이었다. 이런 묘사는 훨씬 뒤의 티베트 문헌에서 나온 것이라 고고학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순례승들이 가져간 엄청난 양의 문헌은 필사본 소장이 방대했음을 보여 준다. 습한 기후에서 야자잎 필사본을 베껴 쓰는 일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했다.
발굴 구역은 남북 약 488m, 동서 약 244m다. 넓은 통로가 남북으로 뻗어 있고, 서쪽에는 사당이, 동쪽에는 승원이 늘어서 있다. 승원은 대부분 서쪽을 바라본다. 많은 건물이 옛 폐허 위에 새 건물을 올린 여러 건축 단계와 불탄 흔적을 보여 준다.
제1승원은 승원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곳으로 여겨지며, 무려 아홉 겹의 건축층이 확인된다. 아래층은 발라푸트라데바가 후원한 승원으로 본다. ‘사리불 탑’이라고도 부르는 제3사당은 가장 인상적인 유적이다. 적어도 일곱 번 증축된 거대한 계단식 벽돌 구조물로, 작은 봉헌탑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불상과 보살상을 표현한 치장 벽토 조각으로 꾸며져 있다.
그 밖에 힌두 신, 악사, 연인, 일상 장면을 새긴 판 200여 개가 있는 제2사당, 날란다에 유일하게 남은 벽화 조각이 있는 제14사당, 금속을 녹이던 가마가 있는 제13사당이 있다. 수많은 인장, 비문, 청동상, 석조상은 1917년에 문을 연 날란다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
중급
약탈, 화재, 쇠퇴
날란다는 여러 차례 재난을 겪었다. 후대 전승은 앞선 세기에도 침입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하고, 팔라 시대의 한 비문은 필사본을 태운 화재와 그 복구를 위한 지원을 기록한다. 가장 큰 타격은 1200년 무렵, 무함마드 바흐티야르 할지가 이끄는 튀르크계 군대가 새로 선 델리 술탄국을 위해 비하르와 벵골을 정복할 때 찾아왔다. 재물을 품고 때로 요새처럼 지어진 이 지역의 사원들이 공격받았고, 많은 승려가 죽거나 달아났다.
1920년대 발굴자들은 여러 건물의 윗층에서 두꺼운 재층을 발견했다. 큰 화재가 있었다는 증거다. 날란다의 약탈을 묘사한 것으로 흔히 인용되는 민하주 시라지의 연대기 『타바카트 이 나시리』는 실제로는 요새화된 사원 하나의 함락을 묘사하는데,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를 근처의 오단타푸리로 본다. 그렇다 해도 다른 증거들은 날란다도 약탈당했음을 보여 준다.
티베트 승려 다르마스바민은 1235년 무렵 날란다를 찾았다. 그는 사원이 크게 부서지고 황폐해졌지만, 아흔 살의 스승 라훌라 슈리바드라가 지방 통치자와 재가 후원자의 도움으로 여전히 약 70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음을 보았다. 그가 머무는 동안 근처 주둔군의 병사들이 공동체를 위협했고, 승려들이 달아나는 사이 그와 스승은 숨어 있었다. 작은 규모의 활동은 그 뒤로도 이어졌을 수 있지만, 날란다는 끝내 예전의 역할을 되찾지 못했다.
역사가들은 더 긴 호흡의 쇠퇴 원인도 지적한다. 팔라 왕조 아래 경쟁 사원들이 생긴 것, 팔라 왕조가 무너진 뒤 왕실 후원이 끊긴 것, 그리고 힌두 신애(바크티) 운동에 밀려 불교가 기반을 잃어 간 인도 종교 전반의 변화다. 많은 승려가 문헌과 전통을 티베트와 네팔로 가져갔고, 그곳에서 날란다의 지적 유산이 이어졌다.
중급
재발견, 발굴, 부활
여러 세기 동안 잊혔던 바르가온 마을의 둔덕은 1811~1812년 이 일대를 조사한 프랜시스 뷰캐넌해밀턴의 눈길을 끌었지만, 그는 이곳을 날란다와 연결하지 못했다. 1847년 마컴 키토가 이곳이 날란다임을 밝혔고, 인도 고고조사국(ASI)의 초대 책임자 알렉산더 커닝엄이 1861~1862년 현장의 기록을 길잡이 삼아 유적을 조사했다.
ASI의 체계적 발굴은 1915년에 시작되어 해마다 이어지다가, 예산 삭감으로 1937년에 멈추었다. D. B. 스푸너, 히라난다 샤스트리, J. A. 페이지 같은 고고학자들이 승원과 사당을 드러내고, 노출된 벽을 보존 처리하며, 비문과 인장을 기록했다. 두 번째 발굴·복원은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이루어졌다. 발굴자들은 사원 단지가 발굴 구역을 넘어 현대 마을 아래까지 이어진다고 보았다.
날란다는 하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1951년 비하르 주정부는 유적 근처에 팔리어와 불교학 연구 기관인 나바 날란다 마하비하라를 세웠다. 중국이 참여해 현장 기념관도 지어졌다. 2010년 인도 의회는 동아시아 정상회의 참가국들의 지지를 받아 근처 라즈기르에 새 날란다 대학을 세우는 법을 통과시켰고, 이 대학은 2014년 수업을 시작했다.
2016년 유네스코는 이 유적을 ‘날란다 마하비하라 고고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다. 승원 학문과 아시아 불교 학문의 오랜 역사를 보여 주는 뛰어난 증거로 인정한 것이다. 유적은 ASI가 보호·관리한다.
중급
티베트와 동아시아에 남긴 유산
날란다의 영향은 티베트에서 가장 뚜렷하다. 8세기 티베트 왕은 날란다의 학승 적호(샨타락시타)를 초청했고, 그는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 삼예사를 세웠다. 그의 제자 연화계(카말라실라)가 그 일을 이었다. 뒤에 비크라마실라와 연결된 스승 아티샤가 11세기에 팔라 시대의 전통을 티베트에 전했다. 티베트 불교도는 자신들의 철학·승원 교과 과정을 날란다의 연속으로 여기며, 달라이 라마는 ‘날란다 전통’과 ‘날란다의 17대 스승’을 자주 이야기한다.
동아시아에서는 현장 등의 번역을 통해 유식 철학, 논리학, 여러 경전이 전해졌다. 현장의 번역에 바탕을 둔 중국의 법상종과 그 뒤를 이은 일본의 홋소종(법상종)은 날란다의 가르침을 직접 이어받았다. 날란다와 연결된 밀교 스승 선무외(슈바카라심하)와 금강지(바즈라보디)는 8세기 당나라로 건너가 뒤에 일본에까지 이른 밀교 전통의 기초를 놓았다.
날란다와 동남아시아의 관계는 미술에서 드러난다. 수마트라, 자와, 타이 남부에서 나온 청동상과 봉헌판은 날란다와 인근 팔라 유적의 것과 양식과 주제를 공유하는데, 이는 샤일렌드라·스리위자야 왕국과의 긴밀한 교류를 반영한다.
끝으로 날란다는 현대에 강력한 관념이 되었다. 아시아 지적 교류의 상징, 인도 학문 황금기의 상징, 그리고 상실의 상징이다. 이런 상징의 무게가 때로 과장된 주장을 낳기 때문에 증거를 꼼꼼히 읽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심화
논쟁: ‘대학’이라는 말, 인원, 파괴 이야기
날란다는 대학이었나? 이 표현은 날란다를 옥스퍼드나 볼로냐에 견준 19~20세기 저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하르트무트 샤르페 같은 학자들은 날란다 같은 대형 승원 기관을 인도에서 대학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았고, 다른 학자들은 그 본질이 종교적·승원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학위가 없었고, 입학은 곧 승가 공동체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이 비교는 규모와 조직을 이해하는 데는 쓸모 있지만 목적에 대해서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얼마나 컸나? 학생 1만 명, 스승 1,500명이라는 수치는 현장의 전기에서 나와 비판 없이 되풀이되곤 한다. 의정은 훨씬 적은 수를 제시했고, 프레더릭 애셔 같은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방들로는 그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수치가 과장되었거나 단지의 상당 부분이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는 뜻이며, 둘 다 어느 정도 맞을 수 있다.
무엇이 끝을 불렀나? 널리 퍼진 이야기에 따르면 바흐티야르 할지가 날란다 도서관을 불태웠고 몇 달 동안 연기가 났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핵심 페르시아 자료가 날란다가 아니라 오단타푸리를 묘사한다는 점, 불타는 도서관의 생생한 세부는 후대에 덧붙은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다르마스바민의 목격담이 수십 년 뒤에도 줄어든 공동체가 활동했음을 보여 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동시에 고고학적 재층과 티베트 증언은 이 지역에서 폭력적 파괴가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그래서 많은 역사가는 이 침입을 후원 상실과 다른 사원과의 경쟁으로 이미 약해진 기관에 가해진 결정적 타격으로 본다.
이 이야기는 현대 인도에서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어, 종교와 역사를 둘러싼 논쟁에 쓰이기도 한다. 신중한 서술은 여러 점을 함께 붙든다. 사료의 한계, 비하르 정복 과정에서 사원들이 겪은 폭력의 실재, 그리고 인도에서 불교의 쇠퇴를 빚은 더 긴 종교적·경제적 변화다.
심화
증거: 순례기, 비문, 고고학
날란다에 관한 사료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중국 순례승의 기록이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제자 혜립이 쓴 현장의 전기, 그리고 인도 승가의 관행과 인도로 떠난 중국 승려들을 다룬 의정의 기록이다. 소중한 목격 증언이지만 중국 불교 독자를 위해 쓰였고, 때로 대상을 이상화한다.
둘째는 유적에서 나온 비문과 인장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왕과 개인 후원자가 기부하고 땅을 내리고 건물을 지은 일을 기록한다. 발라푸트라데바의 기증을 기록한 데바팔라의 동판, 야쇼바르만 시대의 비문, 12세기에 승원을 짓거나 고친 승려들의 기록 등이 있다. ‘날란다 대사원의 거룩한 비구 승가’의 점토 인장은 이 기관의 이름과 단체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해 준다.
셋째는 고고학이다. 발굴된 건물의 평면, 이어진 건축 단계, 화재층, 조각과 청동상, 그리고 티베트와 네팔로 옮겨진 필사본이 여기에 든다. 날란다에서 베꼈거나 날란다와 연결된 필사본 몇 점이 박물관과 사원에 남아 있는데, 간기(刊記)에 티베트에서 쓰인 내력이 적힌 채색 『반야경』 필사본이 그 예다.
타라나타(17세기) 같은 티베트 역사서는 날란다의 도서관과 스승들에 관한 이야기를 더해 주지만, 사건보다 한참 뒤에 쓰였고 역사와 전설이 섞여 있다. 역사가들은 이를 더 이르고 직접적인 사료와 함께 조심스럽게 쓴다.
핵심 개념
- 마하비하라
- 여러 승원, 사당, 불탑이 한 단지에 모인 ‘대사원’.
- 왕실과 재가 후원
- 날란다는 신앙이 서로 다른 왕들이 내린 마을 세입과 외국 왕, 개인 후원자의 기증에 기대어 운영되었다.
- 대승 학문
- 날란다는 중관과 유식 철학, 논리학, 토론의 중심지로서 아시아 전역의 불교를 빚었다.
- 국제 공동체
- 중국, 한국, 티베트,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승려들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문헌과 사상을 고향으로 가져갔다.
- 토론과 논리학
- 승려들은 다른 학파에 맞서 불교의 입장을 지키도록 훈련받았고, 논리학은 핵심 과목이 되었다.
- 티베트로의 전승
- 티베트 불교는 스스로를 날란다 전통의 직계 계승자로 여긴다.
- 신화와 증거
- 학생 수부터 불타는 도서관까지, 날란다에 관한 대중적 이미지는 사료와 대조해 보아야 한다.
기록
- 399년 — 법현이 인도 여행(399~412년)을 시작한다. 날란다의 사원은 언급하지 않는다.
- 약 427년 — 전통적으로 쿠마라굽타 1세(샤크라디티야)가 사원을 세웠다고 본다.
- 606년 — 하르샤가 카나우지에서 왕위에 오르고, 뒤에 날란다의 큰 후원자가 된다.
- 약 637년 — 현장이 날란다에서 계현에게 배운다.
- 673년 — 의정이 인도에 도착하고, 뒤에 날란다에서 약 10년을 보낸다.
- 약 750년 — 동인도에서 팔라 왕조가 일어나 4세기 동안 날란다를 후원한다.
- 약 860년 — 데바팔라의 동판이 수바르나드비파 왕 발라푸트라데바가 지은 승원을 기록한다.
- 약 1200년 — 바흐티야르 할지와 연결된 튀르크계 세력이 비하르를 정복하고, 날란다가 약탈·방화당한다.
- 약 1235년 — 다르마스바민이 부서진 날란다에서 여전히 가르치는 작은 공동체를 본다.
- 1847년 — 마컴 키토가 바르가온의 유적을 날란다로 비정한다.
- 1915년 — 인도 고고조사국이 체계적 발굴을 시작한다(1937년까지).
- 2016년 — 날란다 마하비하라 고고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용어 풀이
- 비하라
- 불교 승원. 보통 안뜰을 둘러싸고 방들이 있는 건물.
- 스투파(불탑)
- 사리를 모신 봉분 모양의 기념물. 신자들이 그 둘레를 돈다.
- 대승
- ‘큰 수레’. 보살의 길을 강조하는 불교의 큰 갈래.
- 중관
- 나가르주나와 연결된 ‘중도’ 철학. 공(空)을 중심에 둔다.
- 유가행파(유식)
- 의식을 분석하는 불교 철학 학파. 아상가와 바수반두와 연결된다.
- 금강승(밀교)
- 비밀스러운 의례와 명상을 중시하는 불교. 팔라 시대와 티베트에서 영향력이 컸다.
- 팔라 왕조
- 750년 무렵부터 12세기까지 벵골과 비하르를 다스린 불교 왕조.
- 간기(刊記)
- 필사본 끝에 누가, 언제, 왜 베꼈는지 적은 기록.
- 인도 고고조사국(ASI)
- 인도의 유적을 발굴하고 보호하는 정부 기관.
묻고 답하기
날란다는 정말 세계 최초의 대학이었나요?
흔히 그렇게 불리고, 당시 가장 큰 배움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학위가 없는 사원이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거대한 승원 학문 중심지’라고 부르는 편을 선호합니다.
학생은 몇 명이었나요?
정확히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료마다 약 3,000명에서 1만 명까지 다르고, 고고학은 큰 수치가 과장되었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불교도만 공부했나요?
거주자는 불교 승려였지만 문법, 논리학, 의학, 브라만 문헌도 공부했고, 후원자 가운데는 힌두교도가 많았습니다.
도서관이 몇 달 동안 불탔나요?
후대에 덧붙은 이야기에서 나온 대중적인 설명입니다. 1200년 무렵 유적이 불탄 것은 사실이지만, 극적인 세부는 가장 이른 사료로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현장은 누구인가요?
7세기에 인도로 여행해 날란다에서 공부하고 수백 부의 경전을 중국으로 가져간 중국 승려입니다. 그의 여정은 소설 『서유기』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한국 승려도 갔나요?
네. 의정은 7세기에 날란다에서 공부한 신라 승려들을 기록했고, 그 가운데 몇몇은 인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 날란다에 가 볼 수 있나요?
네. 비하르주 라즈기르 근처에서 발굴 유적, 박물관, 현장 기념관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Nalanda mahavihara. Wikipedia (영어)
- 날란다. 위키백과
- Xuanzang. Wikipedia (영어)
- Yijing (monk). Wikipedia (영어)
- Pala Empire. Wikipedia (영어)
- Muhammad Bakhtiyar Khalji. Wikipedia (영어)
- Nalanda University. Wikipedia (영어)
- Hartmut Scharfe, Education in Ancient India. Brill, 2002
- Samuel Beal (trans.), The Life of Hiuen-Tsiang, by the Shaman Hwui Li (translation). Kegan Paul, Trench, Trübner, 1911
- J. Takakusu (trans.), A Record of the Buddhist Religion as Practised in India and the Malay Archipelago (A.D. 671–695), by I-Tsing (translation). Clarendon Press, 1896
- George Roerich (trans.), Biography of Dharmasvamin (Chag lo-tsa-ba Chos-rje-dpal). K. P.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59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