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400여 년 전 이탈리아에 호기심 많은 갈릴레오라는 사람이 살았어요. 그는 네덜란드에서 새로 발명된 물건 이야기를 들었어요. 유리 렌즈를 끼운 통인데,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보이게 해 주는 물건이었지요. 갈릴레오는 금세 자기 것을 만들었고, 훨씬 더 잘 보이게 고쳤어요.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일을 했어요. 그것을 밤하늘로 향한 거예요. 달에서 산과 골짜기를 보았고,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수많은 별을 보았고, 목성 둘레를 도는 작은 ‘별’ 네 개를 발견했어요. 그건 바로 목성의 위성이었어요!
이 발견으로 갈릴레오는 유럽 전체에서 유명해졌어요. 그리고 옛 가르침이 틀렸다고 더 굳게 믿게 되었지요. 옛 생각은 모든 것이 지구를 돈다고 했어요. 그런데 목성에게 제 위성이 있으니, 모든 것이 우리를 도는 건 아니었어요.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에 찬성했어요.
갈릴레오는 물건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내는 것도 좋아했어요. 비탈에 공을 굴리고 흔들리는 추의 시간을 쟀어요. 그리고 떨어지는 물체는 규칙적이고 수학적인 방식으로 점점 빨라진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는 자연의 법칙이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고 믿었어요.
교회의 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말이 성경에 어긋난다고 했어요. 1633년 갈릴레오는 재판을 받았고, 자기가 틀렸다고 말하도록 강요받았으며, 남은 평생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래도 그는 거기서 계속 연구해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를 썼어요.
오늘날 갈릴레오는 흔히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려요. 1992년 교황은 그를 단죄한 재판관들이 잘못했다고 인정했어요.
한눈에 보기
- 생애
- 1564년 2월 15일(피사) ~ 1642년 1월 8일(피렌체 근교 아르체트리)
- 주요 활동지
- 피사, 파도바(1592~1610년 교수,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와 아르체트리(토스카나 대공국)
- 역할
- 수학자, 자연철학자, 천문학자, 기술자·기구 제작자. 1610년부터 토스카나 대공의 수석 수학자 겸 철학자
- 주요 발견
- 달의 산, 수많은 새 별, 목성의 위성 넷(1610), 금성의 위상 변화, 태양 흑점, 토성의 기묘한 모양
- 물리학
- 낙하 법칙(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 포물체의 포물선 궤도, 초기 형태의 관성 원리, 운동의 상대성
- 주요 저술
- 『별의 전령』(1610), 『태양 흑점에 관한 편지』(1613), 『크리스티나 대공비에게 보내는 편지』(1615), 『시금저울(분석자)』(1623),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1632), 『두 새로운 과학』(1638)
- 재판
- 1633년 6월 22일 ‘이단의 강한 혐의’로 유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택 연금
- 언어
- 라틴어, 그리고 후기 주요 저작은 이탈리아어로 저술
쉬움
갈릴레이는 누구인가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17세기 유럽 학자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세운 시기, 곧 과학 혁명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세 가지 큰 업적으로 기억된다.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한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관측 몇 가지를 해냈다. 아이작 뉴턴을 비롯한 후대 물리학자들이 딛고 선 운동의 수학적 과학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이것이 유명한 재판으로 이어졌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17세기 이후 많은 사람이 갈릴레이를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러 왔다고 소개한다. 동시에 그가 실험의 영웅, 수학의 영웅, 종교에 맞선 이성의 영웅 등 온갖 대의의 상징으로 쓰여 왔으며, 역사가들은 이런 이미지 뒤의 실제 인물을 이해하려 한다고 경고한다.
그는 넉넉지 않은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는 궁정 음악가이자 음악 이론서의 저자였다. 갈릴레이는 학위 없이 피사 대학을 떠났지만,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었다.
쉬움
피사에서 파도바로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피사에서 태어났다. 1572년 가족은 피렌체로 옮겼다. 어린 시절 한동안 발롬브로사의 수도사들에게 배웠고, 스스로 수도자가 될까 생각하기도 했다. 1580년 아버지는 그를 피사 대학 의학부에 보냈지만, 갈릴레이는 토스카나 궁정과 인연이 있던 교사 오스틸리오 리치에게 수학을 배우며 수학에 빠져들었다.
대학을 떠난 뒤 그는 피렌체와 시에나에서 수학 가정교사로 일했다. 1586년에는 자신이 고안한 정수 저울에 관한 짧은 글을 써서 처음으로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예수회 수학자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와 기술자 귀도발도 델 몬테의 도움으로 1589년 피사 대학 수학 강사가 되었고, 1592년에는 보수가 훨씬 나은 베네치아 공화국 파도바 대학의 수학 교수직으로 옮겨 18년 동안 머물렀다.
파도바에서 그는 강의하고 개인 제자를 받았으며, 고용한 장인들이 자신이 설계한 계산 기구인 ‘기하학적·군사적 컴퍼스’ 같은 도구를 만드는 작업장을 운영했다. 마리나 참바와 오랜 관계를 맺어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딸들은 뒤에 아르체트리의 수녀원에 들어갔는데, 큰딸 비르지니아는 마리아 첼레스테라는 이름을 받고 아버지에게 많은 편지를 썼다.
쉬움
망원경과 『별의 전령』
1609년 갈릴레이는 네덜란드에서 최근 발명된 망원경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원리를 알아내 직접 만들었다. 네덜란드 기구가 두세 배 확대했다면, 갈릴레이는 곧 약 20배로 확대하는 망원경을 만들었다. 1609년 늦가을에는 이것으로 하늘을 연구하고 있었다. 영국의 토머스 해리엇이 몇 달 앞서 달을 보았으니 처음은 아니었지만, 자세한 연구를 처음 출판한 사람은 갈릴레이였다.
1610년 1월 7일 그는 목성 가까이에 일렬로 놓인 작은 ‘별’ 세 개를 보았고, 이어지는 밤들에 앞뒤로 움직이는 네 개를 찾아냈다. 그는 이것이 목성을 도는 위성이라고 결론지었다. (독일 천문학자 시몬 마리우스도 거의 같은 때 독자적으로 관측했고, 오늘날 쓰는 이오·에우로파·가니메데·칼리스토라는 이름은 그가 붙였다.) 갈릴레이는 또 달에 산과 골짜기가 있고 은하수가 셀 수 없이 많은 별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았다.
그는 이 발견을 서둘러 라틴어 소책자 『별의 전령(Sidereus Nuncius)』으로 펴냈다. 1610년 3월 13일 나온 이 책에는 70개가 넘는 그림이 실렸다. 그는 목성의 위성을 토스카나의 지배 가문 메디치의 이름을 따 ‘메디치의 별’이라 불렀다. 이 헌정은 효과가 있었다. 그해 그는 토스카나 대공의 수석 수학자 겸 철학자가 되어 피렌체로 옮겼다. 1611년 로마에서는 콜레조 로마노의 예수회 천문학자들이 그의 관측을 확인하며 그를 환영했고, 그는 초기 과학 단체의 하나인 린체이 아카데미에 가입했다.
쉬움
물체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망원경을 들기 훨씬 전부터 갈릴레이는 운동을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물리학은 무거운 것은 아래로 가는 것이 본성이라 떨어지고, 불처럼 가벼운 것은 본성대로 올라간다고 했다. 갈릴레이는 원리는 오직 하나, 무거움뿐이며, 물속에서처럼 더 무거운 것이 밀어 올릴 때에만 물체가 올라간다고 보게 되었다.
그는 떨어지는 운동을 느리게 만들어 잴 수 있도록 빗면을 썼고, 진자를 연구했다. 1601년 무렵에는 길이가 같은 진자는 한 번 흔들리는 데 같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실험을 통해 그는 낙하 법칙을 찾아냈다. 정지 상태에서 떨어지는 물체가 지나는 거리는 걸린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2초 뒤에는 1초 뒤보다 네 배 멀리 떨어져 있다.
제자 빈첸초 비비아니가 전한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에서 무게가 다른 공들을 떨어뜨려 함께 떨어진다는 것을 보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것이 기껏해야 사고 실험이었거나 전해지는 대로 일어나지는 않았다고 보지만, 스틸먼 드레이크처럼 실제로 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분명한 것은 『두 새로운 과학』에서 갈릴레이의 대변인이 저항이 전혀 없는 매질에서는 모든 물체가 같은 속도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중급
움직이는 지구를 옹호하다
갈릴레이는 1597년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믿는다고 사적으로 밝혔지만,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태양 흑점에 관한 편지』(1613)에서였다. 망원경의 발견들은 완전하고 변치 않는 하늘이라는 옛 그림을 무너뜨렸다. 달은 지구처럼 생겼고, 목성은 지구처럼 위성을 거느렸으며, 흑점은 태양도 변하고 자전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1610년 후반에는 금성이 달처럼 차고 이지러지는 위상 변화를 모두 보인다는 것을 관측했다. 이는 금성이 태양을 돈다는 뜻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배열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관측들이 지구의 운동을 엄밀히 증명하지는 못했다. 행성들은 태양을 돌고 태양은 지구를 도는 튀코 브라헤의 체계로도 금성의 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갈릴레이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물리학에 있었다. 반대자들은 지구가 움직인다면 탑에서 떨어뜨린 돌은 탑에서 한참 뒤에 떨어지고, 새와 구름은 뒤에 남겨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갈릴레이는 오늘날 관성과 운동의 상대성이라 부르는 것으로 답했다. 잔잔히 항해하는 배 위의 물건이 배와 함께 움직이듯 지구 위의 물체도 지구의 운동을 함께 지니고 유지하므로, 지상의 실험으로는 지구의 운동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적극적인 증거라고 여긴 것도 내놓았다. 바로 밀물과 썰물로, 그는 이것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합쳐져 바닷물이 출렁이는 현상으로 설명했다. 이 논증은 틀렸다. 정해진 시각에 하루 한 번의 주된 조수를 예측했고, 케플러 등이 이미 짐작하던 달의 역할은 무시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이 ‘증명’의 약점이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중급
과학과 성경: 1616년으로 가는 길
1613년 12월 토스카나의 크리스티나 대공비가 갈릴레이의 제자 베네데토 카스텔리에게 지구의 운동에 대한 성경적 반론을 제기했다. 갈릴레이는 『카스텔리에게 보내는 편지』로 답했고, 1615년 이를 『크리스티나 대공비에게 보내는 편지』로 늘렸다. 그는 성경과 자연이 모두 신에게서 왔으므로 참으로 모순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경은 보통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며 신앙과 도덕을 가르치므로, 자연에 관한 진리가 증명되면 해석자들이 성경 읽기를 그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 종교재판소의 대표적 신학자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지구의 운동이 참으로 증명된다면 성경을 달리 해석할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천문학 모델이 그런 증명을 줄 수 있다고 보지 않았고, 모델을 실재의 묘사가 아니라 계산 장치로 여겼다. 1615년 그는 ‘참된 물리적 증명’ 없이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옹호할 수 없다고 썼다.
1616년 2월 종교재판소에 자문하던 신학자들은 태양 중심설이 성경에 어긋난다고 판정했다. 1616년 3월 금서성성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수정될 때까지’ 금지했다. 갈릴레이는 벨라르미노에게 불려 가 이 학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훈계를 받았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도 지지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더 엄격한 서면 금령까지 받았는지는 이 사건 전체에서 가장 논란이 큰 문제 가운데 하나다. 그렇게 적힌 문서가 1633년 그에게 불리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중급
『대화』와 1633년 재판
1623년 갈릴레이는 혜성에 관한 논쟁서 『시금저울(분석자, Il Saggiatore)』을 펴냈다. 여기에는 자연이라는 책이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는 유명한 말이 담겨 있다. 같은 해 그의 벗이자 찬미자였던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가 되었다. 용기를 얻은 갈릴레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비교하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교황은 양쪽 논거를 모두 제시하고 태양 중심설을 주장하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는 1632년 피렌체에서 인쇄되었다. 코페르니쿠스 편에 선 살비아티, 지적인 교양인 사그레도, 그리고 이름이 ‘얼간이’를 떠올리게 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옹호자 심플리치오가 나흘 동안 나누는 생생한 이탈리아어 대화다. 중립을 표방했지만 분명히 코페르니쿠스 편이었고, 어떤 독자들은 심플리치오가 교황 자신의 논거를 조롱한다고 여겼다. 종교재판소는 곧 판매를 금지하고 갈릴레이를 로마로 소환했다.
1633년 4월부터 심문이 이어졌고, 6월 22일 갈릴레이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수도원에서 무릎을 꿇은 채 판결문을 들었다.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움직인다고 믿은 ‘이단의 강한 혐의’로 유죄가 선고되었고, 그는 이 견해를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저주하는 이단 포기 선서를 해야 했다. 투옥형은 가택 연금으로 바뀌어, 처음에는 시에나 대주교 곁에서, 1633년 12월부터는 아르체트리의 자기 별장에서 지냈다. 그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Eppur si muove)’고 중얼거렸다는 전설은 당대의 증거가 없다.
중급
말년과 『두 새로운 과학』
아르체트리에서 갈릴레이는 1634년 4월 2일 딸 마리아 첼레스테를 잃는 큰 슬픔을 겪었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 책이자, 많은 과학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두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증명』을 완성했다. 두 과학이란 재료의 강도에 관한 과학과, 등가속 운동과 포물체의 포물선 궤도를 포함한 위치 운동의 과학이다. 원고는 이탈리아 밖으로 빼내야 했고, 1638년 네덜란드 공화국 레이던의 엘제비르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는 1638년 완전히 눈이 멀었다. 그런데도 진자시계의 탈진기를 설계했다. 다만 실제로 작동하는 첫 진자시계는 1650년대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만들었다. 젊은 조수이자 제자 빈첸초 비비아니가 곁을 지켰고, 뒤에 그의 원고를 모았다. 갈릴레이는 1642년 1월 8일 아르체트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웅장한 묘를 세우려던 대공의 계획은 로마의 항의로 무산되었다. 그의 유해는 1737년에야 성당 본당의 기념묘로 옮겨졌다. 1741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대화』를 조금 검열한 형태로 포함한 전집 출판을 허락했지만, 『대화』 자체는 1835년까지 금서 목록에 남았다.
심화
갈릴레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갈릴레이 사건은 흔히 과학과 종교 사이 ‘전쟁’의 대표 사례로 이야기된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더 복잡하게 본다. 갈릴레이는 가톨릭 신자였고 교황의 벗이었으며, 예수회 천문학자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가 그의 연구를 높이 샀다. 반대자 가운데에는 신학자뿐 아니라 대학의 철학자들도 있었다. 정치 상황도 중요했다. 반종교개혁, 30년 전쟁, 우르바노 8세 교황청 내부의 긴장, 그리고 메디치 가문에 기댄 갈릴레이의 처지가 얽혀 있었다. 마리오 비아졸리는 궁정 후원이 갈릴레이의 경력과 문체를 어떻게 빚었는지 연구했다.
법적 문제도 논쟁거리다. 1616년 내부 위원회는 코페르니쿠스 학설을 이단으로 판정했지만 이를 공포하지 않았다.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이단이라고 공개적으로 처음 밝힌 것은 바로 갈릴레이의 판결문에서였다. 1633년 서류철에서 발견된 1616년의 엄격한 금령 기록은 갈릴레이를 재범자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것이 실제 있었던 일을 반영하는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피에트로 레돈디는 1983년 코페르니쿠스 혐의가 성체와 관련된 더 위험한 원자론 혐의를 덮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이 가설은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교회의 재평가는 천천히 이루어졌다. 태양 중심설 책에 대한 일반 금지는 1758년에 풀렸고,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책은 1835년 금서 목록에서 빠졌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사건을 새로 연구할 것을 요청했다. 1981년부터 위원회가 활동했고, 1992년 10월 31일 교황은 신학자들이 성경과 성경 해석을 구별하지 못했다며 갈릴레이를 단죄한 재판관들이 잘못했다고 인정했다. 일부 역사가는 1992년의 발표가 모호하고 불충분했다고 평가했다.
심화
방법: 실험가인가, 수학자인가, 수사가인가
갈릴레이의 과학이 정확히 무엇이 새로웠는지는 그 자체로 오랜 논쟁거리다. 알렉상드르 코이레 등은 그를 이상화된 기하학과 사고 실험에서 추론한 수학적 플라톤주의자로 읽었다. 토머스 세틀 등은 실제 실험과 측정이 그에게 중요했음을 강조했고, 스틸먼 드레이크의 『작업하는 갈릴레오(Galileo at Work)』는 그의 과학 활동을 다룬 고전으로 남아 있다. 다른 학자들은 그를 단순 기계에 관한 아르키메데스 전통, 기술자·장인의 실용 지식, 후기 스콜라 철학의 논증 관념과 연결한다. 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갈릴레이가 정해진 방법 따위는 따르지 않았다고 도발적으로 주장했고, 그의 수사학을 성공의 열쇠로 연구한 학자들도 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그의 경력을 관통하는 통일성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나눈 하늘의 원소와 땅의 원소를, 수학으로 운동을 서술할 수 있는 단 한 종류의 물질로 바꾸려는 노력이다. 저울·부력·빗면에 관한 초기 연구, 하늘과 땅이 닮았음을 보여 준 망원경 발견, 『두 새로운 과학』이 모두 이 기획에 속한다. 그의 관성 원리가 아직 뉴턴의 것은 아니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갈릴레이는 방해받지 않는 운동을 흔히 지구 둘레의 원운동으로 생각했기에, 학자들은 ‘원형 관성’이라는 말을 쓴다.
갈릴레이에 관한 사료는 유난히 풍부하다. 인쇄된 책과 원고, 마리아 첼레스테의 편지를 포함한 방대한 서신이 남아 있고, 그 상당 부분은 그가 죽은 뒤 비비아니가 보존했다. 비비아니의 초기 전기는 귀중하지만 미화된 면이 있고, 피사 대성당의 흔들리는 등잔, 피사의 사탑,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같은 가장 유명한 일화 몇몇은 당대의 증거가 아니라 후대 전승에서 나왔다.
핵심 개념
- 망원경 천문학
- 망원경으로 하늘에 관한 새 증거—달의 산, 목성의 위성, 금성의 위상—를 모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에 도전했다.
- 낙하 법칙
- 정지 상태에서 떨어지는 물체가 가는 거리는 걸린 시간의 제곱에 비례하며, 공기 저항이 없다면 모든 물체가 똑같이 떨어진다.
- 관성
- 물체는 무언가 방해하지 않는 한 정지나 운동 상태를 유지한다. 갈릴레이의 관성은 뉴턴 제1법칙의 초기 형태였다.
- 운동의 상대성
- 함께 움직이는 운동은 그 안에서 알아챌 수 없으므로, 지구의 운동은 일상의 실험에 드러나지 않는다.
- 자연의 언어로서의 수학
- 우주라는 ‘책’은 수학의 문자로 쓰여 있어 그것을 아는 사람만 읽을 수 있다고 갈릴레이는 주장했다.
- 두 진리, 하나의 근원
- 1613~1615년의 편지에서 갈릴레이는 성경과 자연은 참으로 충돌할 수 없으며, 증명된 자연의 진리가 성경 해석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후원과 과학
- 갈릴레이의 경력은 메디치 가문 같은 후원자에게 달려 있었고, 그의 헌정·논쟁·문체에는 궁정 문화가 배어 있다.
기록
- 1564년 — 2월 15일 피사에서 태어난다.
- 1589년 — 피사 대학 수학 강사가 된다.
- 1592년 — 파도바 대학 수학 교수가 된다.
- 1609년 — 개량한 망원경을 만들어 하늘을 관측하기 시작한다.
- 1610년 —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고(1월 7일) 『별의 전령』을 펴내며(3월 13일) 피렌체의 궁정 수학자 겸 철학자가 된다.
- 1613년 — 『태양 흑점에 관한 편지』로 코페르니쿠스를 공개 지지하고, 『카스텔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 1616년 —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수정될 때까지’ 금지되고,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이를 훈계한다.
- 1623년 — 『시금저울』이 나오고, 마페오 바르베리니가 교황 우르바노 8세가 된다.
- 1632년 —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가 피렌체에서 인쇄된다.
- 1633년 — ‘이단의 강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6월 22일) 가택 연금에 처해진다.
- 1638년 — 『두 새로운 과학』이 레이던에서 출판되고, 갈릴레이는 완전히 시력을 잃는다.
- 1642년 — 1월 8일 아르체트리에서 세상을 떠난다.
용어 풀이
- 태양 중심설(지동설)
- 지구와 행성들이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견해.
- 갈릴레이 위성
- 1610년 갈릴레이가 발견한 목성의 가장 큰 위성 넷—이오, 에우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
- 금성의 위상
- 가는 초승달 모양에서 거의 둥근 모양까지 변하는 금성의 밝은 부분. 금성이 태양을 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 빗면
- 떨어지는 운동을 느리게 해 시간을 재고 측정할 수 있게 한 경사면.
- 종교재판소(검사성성)
- 이단을 심판한 가톨릭교회의 법정. 1633년 갈릴레이를 재판했다.
- 금서 목록
- 교회가 금지하거나 제한한 책의 목록. 『대화』는 1835년까지 여기에 올라 있었다.
- 이단 포기 선서
- 어떤 믿음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맹세. 갈릴레이는 지구의 운동을 부인하도록 강요받았다.
- 린체이 아카데미
- ‘스라소니 아카데미’라는 뜻의 로마의 초기 과학 단체. 갈릴레이는 1611년 가입했다.
- 사고 실험
- 추론으로 생각을 시험하는 머릿속 실험. 갈릴레이가 즐겨 쓴 기법이다.
- 포물선
- 수평 운동과 낙하가 합쳐질 때 포물체가 그리는 곡선. 갈릴레이가 밝혔다.
묻고 답하기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발명했나요?
아니에요. 망원경은 1608년 무렵 네덜란드에서 발명되었어요. 갈릴레이는 그것을 크게 개량했고, 그것으로 한 발견을 자세히 출판한 첫 사람이에요.
정말 피사의 사탑에서 공을 떨어뜨렸나요?
이 이야기는 제자 비비아니가 전한 거예요. 대부분의 역사가는 전해지는 대로 일어났는지 의심하지만, 실제로 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어요. 갈릴레이의 진짜 증거는 빗면과 진자를 이용한 꼼꼼한 실험이었어요.
갈릴레이는 고문을 받거나 감옥에 갇혔나요?
마지막 심문에서 고문 위협을 받았지만 실제로 고문당했다는 증거는 없다. 투옥형은 가택 연금으로 바뀌었고, 연금은 평생 이어졌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나요?
그렇게 말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 말은 후대 전승과 1640년대의 한 그림에 나타난다.
갈릴레이가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을 증명했나요?
결정적으로는 아니다. 그의 관측은 옛 체계를 흔들었고 그의 물리학은 핵심 반론을 걷어 냈지만, 조수를 이용한 ‘증명’은 틀렸다. 결정적 증거는 뒤에 뉴턴 물리학과 새로운 관측으로 왔다.
갈릴레이 사건은 단순히 과학 대 종교의 싸움이었나요?
대부분의 역사가는 아니라고 본다. 과학적 불확실성, 성경 해석을 둘러싼 논쟁, 대학과 궁정의 정치, 개인적 다툼, 반종교개혁의 긴장이 모두 얽혀 있었다.
『두 새로운 과학』은 왜 네덜란드에서 나왔나요?
1633년 이후 갈릴레이는 가톨릭 지역에서 출판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원고를 나라 밖으로 보내 1638년 레이던의 엘제비르에서 인쇄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David Marshall Miller, Galileo Galilei.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Galileo Galilei. Wikipedia (영어)
- 갈릴레오 갈릴레이. 위키백과
- Galileo affair. Wikipedia (영어)
- Sidereus Nuncius. Wikipedia (영어)
- 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 Wikipedia (영어)
- Two New Sciences. Wikipedia (영어)
- Stillman Drake, Galileo at Work: His Scientific Biograph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 J. L. Heilbron, Galileo.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 Maurice A. Finocchiaro, The Galileo Affair: A Documentary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9
함께 보기
-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지구가 날마다 자전하며 태양 둘레를 돈다고 주장해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연 르네상스 천문학자이자 참사회원.
- 아이작 뉴턴운동 법칙과 만유인력 법칙을 세우고, 미적분을 발전시키고, 흰빛의 구성을 밝힌 잉글랜드의 수학자·자연철학자.
-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의 스승. 리케이온을 세우고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자연학을 두루 저술했다.
- 르네 데카르트체계적인 회의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기원전 30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그리스 수학자. 몇 개의 정의와 공준에서 기하학과 수론을 쌓아 올린 『원론』은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수학 교과서가 되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