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낮에 하늘을 보면 해가 동쪽에서 떠서 하늘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보여요. 수천 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와 달, 행성과 별이 모두 지구 둘레를 돌고, 지구는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다고 믿었어요.
약 500년 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라는 사람이 깜짝 놀랄 생각을 했어요. 지구가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어서 해가 하늘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거라면? 그리고 지구도 다른 행성들처럼 태양 둘레를 커다랗게 돌고 있다면?
코페르니쿠스는 지금의 폴란드에 있는 토룬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어요. 크라쿠프와 이탈리아의 대학에서 수학, 천문학, 법학, 의학, 고대 그리스어를 배웠어요. 그리고 평생의 대부분을 발트해 가까운 작은 도시 프롬보르크에서 교회를 위해 일했어요.
그는 무척 바빴어요. 교회의 땅과 돈을 관리하고, 의사로서 아픈 사람을 돌보고, 돈(동전)에 관해 조언하고, 전쟁 때는 성을 지키는 일까지 도왔어요. 틈이 날 때면 밤에 행성을 관찰하고 아주 긴 계산을 했지요.
그는 큰 책을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썼어요.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난 1543년에야 인쇄되었어요.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그의 계산 방법은 좋아했지만, 지구가 정말 움직인다고는 믿지 않았어요.
나중에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같은 과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의 큰 그림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어요. 오늘날 우리는 오래된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새 생각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러요.
한눈에 보기
- 생애
-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
- 출생지
- 토룬(토른), 폴란드 왕국 왕관령의 왕령 프로이센
- 주 활동지
- 프롬보르크(프라우엔부르크) — 바르미아 대성당 참사회 소재지, 1510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 교육
- 크라쿠프 대학(1491~1495년 무렵), 볼로냐(교회법, 1496~1501), 파도바(의학), 페라라에서 교회법 박사(1503)
- 역할
- 바르미아 참사회원, 행정가, 의사, 화폐 개혁 자문, 천문학자
- 주요 저술
- 『짧은 해설(코멘타리올루스)』(필사본, 1514년 이전), 화폐론 『화폐 주조의 방법』(1526),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뉘른베르크, 1543)
- 언어
- 라틴어로 저술. 독일어와 폴란드어를 썼고 그리스어·이탈리아어도 알았던 것으로 본다
- 유산
-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연 태양 중심설. 화학 원소 코페르니슘(Cn)이 그의 이름을 땄다
쉬움
코페르니쿠스는 누구인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천문학자·수학자이자 성직자였다. 그는 하나의 대담한 생각으로 유명하다. 행성계의 중심 가까이에 있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며, 지구는 하루에 한 번 자전하고 한 해에 한 번 태양 둘레를 도는 행성이라는 것이다.
이 생각을 태양 중심설(지동설)이라 한다. 그리스어 ‘헬리오스(태양)’에서 온 영어 이름은 heliocentrism이다. 지구를 중심에 두는 옛 견해는 지구 중심설(천동설)이라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여섯 권으로 된 대작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에서 자신의 체계를 펼쳤고, 이 책은 1543년 뉘른베르크에서 인쇄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전업 교수가 아니었다. 어른이 된 뒤 대부분의 세월을 발트해 연안의 작은 교회령 바르미아에서 대성당 참사회원으로 지냈다. 참사회원은 대성당과 그 영지를 다스리는 성직자 모임의 일원이다. 그는 영지를 관리하고 환자를 돌보고 정치와 전쟁을 치르고 남은 시간에 천문학을 했다.
쉬움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비스와강 가의 교역 도시 토룬에서 태어났다. 같은 이름의 아버지는 크라쿠프에서 옮겨 온 상인이었고, 어머니 바르바라 바첸로데는 토룬의 유력한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네 남매의 막내였다. 불과 몇 해 전인 1466년 토룬을 비롯한 서(왕령) 프로이센이 튜턴 기사단에서 폴란드 왕관령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독일어를 쓰는 집안의 이 소년은 폴란드 왕의 신민으로 자랐다.
148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외삼촌 루카스 바첸로데가 아이들을 맡았다. 바첸로데는 1489년 바르미아 주교가 되었고 조카를 교회의 길로 이끌었다. 코페르니쿠스는 1491년 수학·천문학·점성술 강의가 있던 크라쿠프 대학에 들어갔다. 학위를 받지는 않았지만(당시로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천문학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1496년 그는 이탈리아 볼로냐로 가서 교회법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천문학 교수 도메니코 마리아 노바라의 집에 살며 처음으로 관측 기록을 남겼는데, 1497년 3월 9일 달이 알데바란 별을 가리는 현상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어도 배웠는데, 중요한 그리스 천문학 저작 가운데 아직 라틴어로 옮겨지지 않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는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파도바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503년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쉬움
바르미아에서의 바쁜 삶
외삼촌 덕분에 코페르니쿠스는 1495년 프롬보르크의 바르미아 참사회원으로 선출되어 평생 안정된 수입을 얻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처음에는 리즈바르크의 주교 궁에서 외삼촌과 함께 지내며 교회 정치에 관여하고 주치의 노릇을 했다. 1510년 프롬보르크로 옮겨, 참사회 일로 자리를 비운 때를 빼고는 남은 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의 일은 많았다. 참사회의 땅을 관리하고 지대를 거두고 분쟁을 조정하고 장부를 기록했다. 1516년부터 1521년까지는 올슈틴(알렌슈타인) 성의 관리자로 일했고, 폴란드–튜턴 기사단 전쟁 때는 튜턴 기사단에 맞서 올슈틴 방어를 지휘했다. 주교와 동료 참사회원, 프로이센 곳곳의 유력자들을 돌보는 의사이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돈에 관한 글도 썼다. 프로이센에 돌던 질 나쁜 주화를 걱정한 그는 『화폐 주조의 방법(Monetae cudendae ratio)』(1526) 같은 화폐론을 썼다. 그 속에서 그는 질 나쁜 주화가 좋은 주화를 유통에서 몰아낸다는 생각, 곧 훗날 ‘그레셤의 법칙’이라 불리는 원리를 토머스 그레셤보다 수십 년 앞서 서술했다.
쉬움
코페르니쿠스 이전 사람들이 그린 하늘
1500년 무렵 유럽의 지식인들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생각으로 짜인 우주상을 따랐다. 움직이지 않는 지구가 한가운데 있고, 그 둘레를 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이 돌며, 그 바깥에 붙박이별(항성)의 천구가 있었다. 천체는 본래 완전한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특별한 ‘제5원소’로 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문제는 행성이 그렇게 단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화성·목성·토성은 이따금 멈춘 듯하다가 한동안 뒤로 가고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이를 역행 운동이라 한다. 이를 설명하려고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이 작은 원(주전원) 위를 돌고, 그 작은 원의 중심이 큰 원(이심원·대원)을 따라 돈다고 했다. 또 지구를 중심에서 조금 비켜 놓고, 행성이 그 둘레로 일정한 속도로 도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심(equant)’이라는 점을 더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행성의 위치를 꽤 잘 예측했고, 천문학자들은 천 년 넘게 이를 썼다. 그러나 불편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동시심은 하늘의 운동은 완전히 고르고 둥글어야 한다는 원칙을 어기는 것 같았고, 체계 전체가 하나로 맞물리지도 않았다.
중급
새로운 생각: 『짧은 해설』
코페르니쿠스가 언제 지구가 움직인다고 확신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대략 1508년에서 1514년 사이였을 것이다. 1514년 크라쿠프의 한 교수는 장서 목록에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은 멈춰 있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이론을 설명한 여섯 장짜리 필사본’을 적어 넣었다. 이것은 거의 틀림없이 오늘날 『짧은 해설(코멘타리올루스)』이라 부르는 제목 없는 짧은 논고로, 코페르니쿠스는 이를 손으로 베낀 사본으로 돌렸을 뿐 인쇄하지는 않았다.
『짧은 해설』은 몇 가지 가정을 내세운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무게의 중심이자 달 궤도의 중심일 뿐이다. 모든 행성의 천구는 중심 가까이에 있는 태양을 둘러싼다. 우주는 생각보다 훨씬 커서, 지구와 태양 사이 거리는 별까지의 거리에 비하면 아주 작다. 하늘이 날마다 도는 것은 사실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이고, 태양이 한 해 동안 움직이는 것은 지구가 공전하기 때문이며, 행성의 역행은 움직이는 지구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다.
코페르니쿠스는 『짧은 해설』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동시심이 마음에 걸려, 모든 것이 고르게 움직이는 ‘더 합리적인 원들의 배치’를 찾았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학자는 동시심에 대한 불만이 출발점이었다고 보지만, 그 불만이 다른 문제들을 알아차리게 했고 그것이 그를 지동설로 이끌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중급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집필, 인쇄, 그리고 뜻밖의 서문
코페르니쿠스는 이 생각을 완전한 수리 천문학으로 만드는 데 수십 년을 들였다. 작업은 더뎠다. 새 관측이 필요했지만 프롬보르크는 자주 안개가 꼈고, 여러 직무가 일을 끊었으며, 인쇄소와 학식 있는 동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교회 당국에 대한 두려움은 출판을 미룬 이유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었고, 과제 자체의 기술적 어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본다.
1539년 루터파 비텐베르크 대학의 젊은 수학 교수 게오르크 요아힘 레티쿠스가 그를 찾아와 배웠다. 레티쿠스는 1540년 단치히(그단스크)에서 이론을 요약한 『첫 보고(Narratio prima)』를 펴냈는데, 이것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처음 인쇄로 알린 책이다. 그는 코페르니쿠스를 설득해 전체 저작을 출판하게 했고, 원고를 뉘른베르크의 인쇄업자 요하네스 페트레이우스에게 가져가 인쇄의 대부분을 감독했다. 전승에 따르면 뇌졸중으로 마비된 코페르니쿠스는 세상을 떠난 날인 1543년 5월 24일 완성된 책을 받아 보았다.
레티쿠스가 라이프치히로 떠나야 하자 루터파 목사 안드레아스 오지안더가 일을 넘겨받았다. 오지안더는 서명 없는 서문 「독자에게」를 덧붙여, 이 책의 가설은 ‘참이거나 그럴듯할 필요도 없고’ 계산에 쓸모 있으면 된다고 적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 자신의 견해와 어긋났다. 레티쿠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벗 티데만 기제 주교가 항의했고, 수십 년 뒤 요하네스 케플러가 오지안더가 쓴 것임을 밝혀냈다. 교황 바오로 3세에게 바친 코페르니쿠스 자신의 헌정 서문은 ‘천문학은 천문학자를 위해 쓰인다’고 못 박았다.
책은 여섯 권으로 되어 있다. 1권은 태양 중심의 행성 배열을 제시하고, 2권은 1권의 내용을 더 자세히 다루며, 3권은 세차 운동과 태양, 4권은 달, 5·6권은 행성의 경도와 위도 위치를 다룬다. 코페르니쿠스의 자필 원고는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키 대학 도서관에 남아 있다.
중급
새로운 것과 그대로 남은 것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가장 강력한 논거는 통일성이었다. 지구를 행성들 사이에 놓으면 행성의 순서와 거리가 관측에서 곧바로 따라 나온다. 태양에서 멀수록 한 바퀴 도는 데 오래 걸린다. 코페르니쿠스는 토성 30년, 목성 12년, 화성 2년, 지구 1년, 금성 9개월, 수성 80일을 들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는 행성들을 이렇게 하나로 묶는 것이 없었다. 그는 수성과 금성이 늘 태양 가까이에 머무는 까닭과 바깥 행성이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자연스럽게 설명했다.
그러나 많은 것이 전통 그대로였다. 코페르니쿠스는 하늘의 운동은 완전히 둥글고 고르다는 옛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관측에 맞추려면 여전히 작은 원(주전원·소주전원)이 필요했다. 원의 개수로 보면 프톨레마이오스보다 단순하지 않았다. 태양은 행성 궤도들의 중심 가까이에 있었지만 정확히 중심은 아니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옛 관측에 크게 기댔고,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도 그대로 두었다. 그래서 곤란한 질문이 남았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면 무거운 것은 왜 지구로 떨어지는가?
강한 반론도 있었다. 지구가 정말 태양 둘레를 돈다면 가까운 별들이 한 해 동안 조금씩 자리를 옮기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연주 시차). 그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별들이 엄청나게 멀리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튀코 브라헤 같은 반대자들은 그렇게 멀다면 별들이 터무니없이 커야 한다고 맞섰고, 이 반론은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무거운 문제로 남았다.
중급
수용: ‘쓸모 있는 계산’에서 혁명으로
처음에 대부분의 독자는 이 책을 세계의 참모습이라기보다 뛰어난 계산 도구로 다루었다. 역사가들은 이를 ‘비텐베르크 해석’이라 부른다. 에라스무스 라인홀트를 비롯한 비텐베르크의 천문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모델로 『프로이센 표(Prutenic Tables)』를 계산했지만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망원경 이전 최고의 관측자 튀코 브라헤는 코페르니쿠스를 ‘제2의 프톨레마이오스’라 불렀지만, 행성들은 태양을 돌고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 지구를 도는 절충 체계를 따로 내놓았다.
종교적 반대는 일찍 나타났다. 마르틴 루터는 1539년 식사 자리에서 이 생각을 비웃었다고 전하며, 그의 동료 필리프 멜란히톤도 이를 비판했다. 로마에서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1533년 요한 비트만슈테터의 설명을 듣고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도미니코회 검열관 바르톨로메오 스피나는 이를 단죄하려 했으나 1546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벗 조반니 마리아 톨로사니의 비판문은 출판되지 않았다. 출간 60년 뒤에도 유럽에서 코페르니쿠스를 공공연히 지지한 천문학자는 15명 안팎이었다고 한다.
모든 것은 17세기 초에 바뀌었다. 확고한 코페르니쿠스주의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원을 타원으로 바꾸어 태양 중심 천문학을 훨씬 정확하게 만들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은 금성의 위상 변화와 목성을 도는 위성들을 보여 주었다. 논쟁이 커지자 가톨릭교회의 금서성성은 1616년 지구가 움직인다는 설을 ‘성경에 완전히 어긋나는 거짓 피타고라스 학설’이라 부르며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수정될 때까지’ 금지했다. 태양 중심설 책에 대한 일반 금지는 1758년에 풀렸고, 수정되지 않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대한 마지막 금지는 1835년 금서 목록에서 사라졌다.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은 마침내 행성이 왜 태양을 도는지 설명했다.
심화
선구자들: 아리스타르코스와 마라게 천문학자들
지구가 움직인다고 상상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3세기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지구가 자전하며 태양 둘레를 돈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초기 원고에서 피타고라스학파 필롤라오스와 아리스타르코스의 ‘움직이는 지구’ 생각을 언급했고, 플루타르코스가 전한 아리스타르코스의 견해가 실린 책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저작은 짧은 전언으로만 남아 있어서, 학자들은 대체로 코페르니쿠스가 독자적으로 자기 체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더 전문적인 문제는 이슬람 세계 천문학자들에게 진 빚이다. 역사가들은 코페르니쿠스가 13~14세기 마라게 천문대와 그 계승자들이 개발한 기하학적 장치를 썼음을 밝혀냈다. 나시르 앗딘 앗투시의 ‘투시 쌍원’, 무아이야드 앗딘 알우르디의 ‘우르디 보조정리’, 그리고 다마스쿠스의 이븐 앗샤티르와 똑같은 달·수성 모델이다. 노엘 스워들로와 오토 노이게바우어는 코페르니쿠스가 이 장치들을 썼다고 논증했고, F. 자밀 라게프는 레기오몬타누스가 쓴 이론이 사마르칸트에서 배운 천문학자 알리 쿠슈지에게서 나왔음을 보였다.
이런 생각이 어떻게 코페르니쿠스에게 닿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관련 아랍어 문헌의 라틴어 번역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한 가지 가능한 경로는 비잔티움 그리스어다. 그레고리오스 키오니아데스가 앗투시의 저작을 그리스어로 옮겼고, 투시 쌍원이 담긴 그리스어 필사본들이 코페르니쿠스가 공부한 이탈리아에 남아 있다. 직접 전해졌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독자적으로 재발견했을 가능성을 열어 두는 학자도 있다. 이 논쟁은 코페르니쿠스를 홀로 선 천재가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고치려던 여러 문명의 긴 노력 속에 놓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심화
사료, 동기, 그리고 ‘아무도 읽지 않은 책’
이토록 중요한 인물치고 1차 사료는 빈약하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저술로 남은 것은 『짧은 해설』, 『베르너 반박 서한』(1524),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화폐와 교회 업무에 관한 글이다. 레티쿠스가 전기를 썼지만 사라졌다. 그래서 그가 왜, 언제 태양 중심설을 받아들였는지는 추론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신플라톤주의나 헤르메스주의 철학이 그를 이끌었다는 옛 견해를 물리치고, 행성 모델에 대한 그의 꼼꼼한 기술적 분석을 강조한다.
책의 수용도 다시 검토되었다. 아서 케스틀러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 불렀다. 천문학자이자 과학사가 오언 깅거리치는 약 35년에 걸쳐 초판(1543)과 제2판(1566)의 현존본을 찾을 수 있는 대로 조사해—초판 276부, 제2판 325부—여백에 남은 독자들의 메모를 연구했다. 그는 16세기의 주요 천문학자 대부분이 이 책을 갖고 읽었으며, 다만 많은 이가 1권의 우주론보다 기술적 모델에 훨씬 많은 메모를 남겼음을 보여 주었다.
근대 민족사도 한 겹을 더했다. 19~20세기 독일과 폴란드의 저술가들은 저마다 코페르니쿠스를 자기 민족의 인물로 내세웠다.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와 작가 체스와프 미워시 등은 이것이 프로이센과 바르미아에 소속감을 느끼고, 라틴어로 쓰고, 독일어와 폴란드어를 썼으며, 폴란드 왕관을 섬긴 르네상스 인물에게 근대 민족주의를 덧씌우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고고학도 한몫했다. 2005년 프롬보르크 대성당 바닥 밑에서 발견된 유골은 2008년 그가 소장했던 책에서 나온 머리카락과의 DNA 비교 등을 거쳐 코페르니쿠스로 확인되었고, 2010년 그 자리에 다시 안장되었다.
핵심 개념
- 태양 중심설(지동설)
- 태양이 행성계의 중심 또는 그 가까이에 있고 지구가 그 둘레를 돈다는 견해.
- 지구의 자전
- 해와 별이 날마다 뜨고 지는 것을 하늘 전체가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도는 것으로 설명했다.
- 겉보기 역행 운동
- 행성이 뒤로 가는 고리는 실제가 아니라, 행성을 앞지르거나 뒤처지는 움직이는 지구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다.
- 체계의 통일성
- 코페르니쿠스 배열에서는 행성의 거리와 주기가 맞물린다. 태양에서 멀수록 느리다. 이 정합성이 그의 가장 강한 논거였다.
- 등속 원운동
- 하늘의 운동은 참으로 고르고 둥글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프톨레마이오스의 동시심을 거부했다. 이 고대의 이상은 그대로 지켰다.
- 광대한 우주
- 연주 시차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별은 지구–태양 거리에 비해 엄청나게 멀다고 주장했다.
- 코페르니쿠스 혁명
- 코페르니쿠스에서 케플러·갈릴레이·뉴턴으로 이어지며 지구 중심 우주를 대체한 천문학과 물리학의 긴 변혁.
기록
- 1473년 — 2월 19일 토룬에서 태어난다.
- 1491년 —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한다.
- 1496년 — 볼로냐에서 교회법 공부를 시작하고 천문학자 도메니코 마리아 노바라와 함께 일한다.
- 1503년 — 페라라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고 바르미아로 돌아온다.
- 1510년 — 프롬보르크에 자리 잡아 여생을 보낸다.
- 1514년 — 크라쿠프의 장서 목록에 태양 중심설의 첫 스케치 『짧은 해설』로 보이는 필사본이 기록된다.
- 1520년 — 폴란드–튜턴 기사단 전쟁(1519~1521) 중 올슈틴 성 방어를 지휘한다.
- 1526년 — 화폐 개혁을 다룬 『화폐 주조의 방법』을 쓴다.
- 1539년 — 게오르크 요아힘 레티쿠스가 배우러 프롬보르크에 온다.
- 1540년 — 레티쿠스가 단치히에서 이론을 처음 인쇄로 알린 『첫 보고』를 펴낸다.
- 1543년 —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뉘른베르크에서 인쇄되고, 코페르니쿠스는 5월 24일 프롬보르크에서 세상을 떠난다.
- 1616년 — 금서성성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수정될 때까지’ 금지한다.
용어 풀이
- 지구 중심설(천동설)
- 움직이지 않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두는 모델.
- 주전원
- 행성이 그 위를 도는 작은 원. 그 중심이 더 큰 원(이심원)을 따라 돈다.
- 동시심(equant)
- 프톨레마이오스 모델에서 행성이 일정한 속도로 도는 것처럼 보이는 기준점. 코페르니쿠스가 거부했다.
- 역행 운동
- 행성이 한동안 별들을 배경으로 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 연주 시차
- 지구의 공전 때문에 가까운 별이 조금 자리를 옮기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코페르니쿠스 시대에는 너무 작아 관측할 수 없었다.
- 참사회원
- 대성당과 그 영지의 운영을 돕는 성직자 모임(참사회)의 일원.
- 바르미아
- 주교와 대성당 참사회가 다스린 발트해 연안의 영역. 코페르니쿠스 시대에는 폴란드 왕관 아래 있었다.
- 짧은 해설(코멘타리올루스)
- 1514년 이전에 돌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 개요 필사본.
- 투시 쌍원
- 두 원운동으로 직선 운동을 만들어 내는 기하학적 장치. 나시르 앗딘 앗투시가 고안했고 코페르니쿠스도 썼다.
- 금서 목록
- 가톨릭교회가 금지하거나 제한한 책의 목록. 1616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금지했다.
묻고 답하기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처음 말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인가요?
아니에요. 그리스 천문학자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약 1,800년 전에 이미 말했어요. 하지만 움직이는 지구를 바탕으로 행성 전체의 수학 체계를 처음 완성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예요.
코페르니쿠스는 망원경을 썼나요?
아니요. 망원경은 그가 죽고 한참 뒤인 1600년대 초에 발명되었어요. 그는 간단한 기구와 맨눈으로 관측했고, 옛 관측 기록에 많이 기댔어요.
코페르니쿠스는 신부였나요?
그는 바르미아 대성당 참사회원으로, 행정 업무를 맡는 교회 직책이었다. 참사회원이 되기에 충분한 하급 성품은 받았지만, 사제 서품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왜 그렇게 오래 출판을 미뤘나요?
주로 수학과 관측이 어렵고 여러 직무 때문에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롱이나 종교적 반대에 대한 걱정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고 본다.
그의 체계가 프톨레마이오스보다 더 정확했나요?
크게 그렇지는 않았다. 예측의 질은 비슷했고 원도 여전히 많이 썼다. 장점은 정합성과 역행 운동의 자연스러운 설명이었다. 정확도의 큰 도약은 케플러의 타원에서 왔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인인가요, 독일인인가요?
그는 폴란드 왕관령 도시의 독일어 쓰는 집안에서 태어나 폴란드 왕국 소속 영역을 섬겼다. 많은 역사가는 스스로를 주로 프로이센 사람으로 여긴 르네상스 인물에게 근대 민족 개념을 들이대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본다.
살아 있을 때 교회가 그를 단죄했나요?
아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이론에 반대하는 가톨릭의 공식 입장은 없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갈릴레이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1616년에야 금지되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Sheila Rabin, Nicolaus Copernicu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Nicolaus Copernicus. Wikipedia (영어)
-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위키백과
-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Wikipedia (영어)
- Commentariolus. Wikipedia (영어)
- Copernican heliocentrism. Wikipedia (영어)
- Owen Gingerich, The Book Nobody Read: Chasing the Revolutions of Nicolaus Copernicus. Walker & Company, 2004
- N. M. Swerdlow, O. Neugebauer, Mathematical Astronomy in Copernicus’s De Revolutionibus. Springer, 1984
함께 보기
- 갈릴레오 갈릴레이망원경으로 천문학을 뒤바꾸고 운동의 수학적 과학을 세웠으며, 코페르니쿠스를 옹호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이탈리아의 수학자·천문학자.
- 아이작 뉴턴운동 법칙과 만유인력 법칙을 세우고, 미적분을 발전시키고, 흰빛의 구성을 밝힌 잉글랜드의 수학자·자연철학자.
-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의 스승. 리케이온을 세우고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자연학을 두루 저술했다.
- 이븐 알하이삼(알하젠)바스라에서 태어나 파티마 왕조의 카이로에서 활동한 수학자·물리학자. 『광학의 서』에서 빛이 눈으로 들어와 보게 된다는 것을 기하학과 실험으로 설명했다.
- 구텐베르크 성서1450년대 마인츠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한 라틴어 성서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