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쉴레이만 대제

سلیمان اول Süleyman I (오스만 튀르크어 별칭 قانونی 카누니 ‘입법자’, 필명 محبی 무힙비)

1520–1566년 · 이스탄불 (오스만 제국)

한 문장으로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으로, 46년(1520~1566) 동안 다스리며 헝가리에서 이라크까지 열세 차례 원정을 이끌고, 제국의 법을 정비했으며,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건축·시·궁정 예술의 황금기를 연 군주이다.

쉴레이만 대제
이미지: Circle of Titian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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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친 커다란 제국이 있었어요. 이름은 오스만 제국이고, 수도는 좁은 바다 양쪽에 걸쳐 있는 큰 도시 이스탄불이었지요. 이 제국의 임금을 ‘술탄’이라고 불렀어요.

1520년, 쉴레이만이라는 젊은이가 술탄이 되었어요. 스물다섯 살쯤이었지요. 그는 4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오스만 술탄 가운데 가장 긴 기간이에요. 그가 왕위에 오를 때 태어난 아기가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할아버지·할머니가 되었을 만큼 긴 시간이지요.

유럽 사람들은 그의 궁정이 무척 화려하고 군대가 강했기 때문에 그를 ‘장려한 자(대제)’라고 불렀어요. 제국 사람들은 나중에 그를 ‘카누니’, 곧 ‘입법자’라고 불렀어요. 여기저기 흩어진 오래된 쪽지들을 한 권의 깔끔한 책으로 정리하듯, 제국의 규칙을 가지런히 정리한 임금으로 기억되기 때문이에요.

쉴레이만은 평생의 많은 시간을 말 위에서 군대를 이끌며 보냈어요. 베오그라드라는 도시와 로도스섬을 차지했고, 헝가리에서 유명한 전투에 이겼으며, 서쪽으로는 빈, 동쪽으로는 바그다드까지 나아갔어요. 하지만 전쟁은 큰 고통도 가져왔어요. 마을이 부서지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지요.

그는 아름다운 것도 사랑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무힙비’라는 이름으로 시를 썼어요. 그의 건축가 시난은 이스탄불의 언덕 위에 거대한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를 지었는데, 주변에 학교와 병원, 가난한 사람에게 밥을 나눠 주는 부엌까지 함께 지었어요. 지금도 가 볼 수 있답니다.

쉴레이만은 포로로 궁전에 들어왔다가 제국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된 휘렘과 결혼했어요. 그의 가족 이야기에는 아주 슬픈 부분도 있어요. 쉴레이만이 자기 아들 둘을 죽이라고 명령했거든요. 오늘날 역사가들은 그를 위대한 건설자이자 법을 정비한 군주로, 동시에 폭력적인 시대의 통치자로 함께 이해하려고 해요.

한눈에 보기

생몰
1494년 11월 6일(트라브존) ~ 1566년 9월 6일(헝가리 시게트바르 포위전 중)
재위
1520년 9월 30일 ~ 1566년 9월 6일(46년), 오스만 제국 제10대 술탄
수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의 중심은 톱카프 궁전
부모
술탄 셀림 1세와 하프사 술탄
별칭
유럽에서는 ‘장려한 자(the Magnificent)’, 튀르키예에서는 ‘카누니(입법자)’. 카누니라는 호칭은 18세기 무렵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원정
베오그라드(1521), 로도스(1522), 모하치(1526), 빈(1529), 이라크·바그다드(1534~35), 사파비 왕조와의 전쟁과 아마시아 조약(1555), 시게트바르(1566)
치세의 주요 인물
휘렘 술탄, 파르갈르 이브라힘 파샤, 법학자 에뷔쉬우드 에펜디, 건축가 미마르 시난, 제독 하이레딘 바르바로스
매장
이스탄불 쉴레이마니예 복합 단지의 영묘(내장은 시게트바르 근처에 묻힘)

쉬움

쉴레이만은 누구인가

쉴레이만 1세(튀르키예어 Süleyman)는 오스만 왕조의 제10대 술탄이다. 1520년에 즉위해 156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스렸는데, 오스만 술탄 가운데 가장 긴 재위이다. 이 46년 동안 제국은 국력의 정점 가운데 하나에 이르렀다. 헝가리 중부까지의 남동유럽, 이라크·시리아와 이슬람의 성지 메카·메디나를 포함한 중동 대부분,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 해안의 긴 구간을 지배했다.

그에게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별명이 있다. 서유럽에서는 ‘장려한 자(the Magnificent)’로 불렸는데, 유럽의 대사와 문필가들이 그의 궁정의 화려함과 군대의 힘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보여 준다. 튀르키예에서는 제국의 법을 모으고 조화시키려는 큰 노력이 그의 치세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카누니(입법자)’로 기억된다. 두 이름은 각각 누가 그를 바라보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려 준다.

쉴레이만은 전사이자 행정가일 뿐 아니라, ‘무힙비’라는 필명으로 오스만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 시를 쓴 시인이었다. 그의 치세는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설계하고 이스탄불 궁정 공방이 만들어 낸,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건축·필사본·공예품과 이어져 있다.

[1]

쉬움

그가 물려받은 제국

오스만 국가는 1300년 무렵 아나톨리아(오늘날 튀르키예의 아시아 쪽) 북서부의 작은 군후국으로 출발해, 두 세기에 걸쳐 큰 제국으로 성장했다. 1453년 쉴레이만의 증조부 메흐메드 2세가 비잔티움 제국의 옛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해 오스만의 수도로 삼았고, 튀르키예어로 이스탄불이라 불렀다.

쉴레이만의 아버지 셀림 1세는 겨우 8년(1512~1520) 다스렸지만, 그동안 맘루크 술탄국을 무너뜨리고 시리아·이집트와 메카·메디나가 있는 히자즈 지방을 오스만 영토로 만들었다. 그래서 쉴레이만은 갑자기 훨씬 넓고 부유해졌으며, 이슬람의 가장 거룩한 성지를 지킬 책임까지 지게 된 제국을 물려받았다.

오스만 세계는 매우 다양했다. 무슬림, 정교회 기독교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등이 술탄의 통치 아래 살며 튀르크어·그리스어·아랍어·슬라브어·아르메니아어·히브리어 등을 썼다. 제국의 큰 경쟁자는 서쪽의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를 다스렸고, 가문의 수장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황제였다)과 동쪽 이란의 사파비 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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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술탄이 되기까지

쉴레이만은 1494년 11월 6일, 아버지가 지방 총독으로 있던 흑해의 항구 도시 트라브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하프사 술탄은 출신을 알 수 없는 후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이었고, 1534년까지 살며 아들의 치세 초기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스만의 왕자들은 지방을 다스리며 통치를 익혔다. 쉴레이만은 역사·문학·종교·군사를 배웠고, 젊은 시절 크림반도의 카파(오늘날 페오도시야) 총독을 거쳐 아나톨리아 서부 마니사의 총독을 지냈으며, 잠시 에디르네에도 머물렀다. 마니사에서 그는 파르가 출신의 그리스어권 젊은이 이브라힘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데, 이 사람이 훗날 대재상이 된다.

1520년 9월 셀림 1세가 죽자, 살아남은 유일한 성인 아들이던 쉴레이만이 9월 30일 즉위했다. 이전의 왕위 계승 때처럼 형제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다툼은 없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무렵이었다.

[1]

중급

유럽 원정: 베오그라드, 로도스, 모하치, 빈

쉴레이만은 빠른 승리로 치세를 시작했다. 1521년 메흐메드 2세도 함락하지 못한 요새 베오그라드를 차지해 헝가리로 가는 길을 열었다. 1522년에는 십자군 기사단인 구호기사단이 지키던 로도스섬을 포위했고, 약 다섯 달 만에 기사단이 항복하고 섬을 떠나는 것이 허락되었다. 기사단은 결국 몰타에 자리 잡았고, 오스만은 1565년 몰타를 다시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가장 결정적인 전투는 1526년 8월 29일 헝가리 남부 모하치에서 벌어졌다. 수가 훨씬 많고 대포를 잘 갖춘 오스만군은 몇 시간 만에 헝가리 왕국군을 무너뜨렸다. 국왕 러요시 2세는 달아나다 물에 빠져 죽었고,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의 상당수가 함께 전사했다. 헝가리에서는 지금도 이 전투를 민족의 대참사로 기억하며, 불행한 일을 두고 “모하치에서는 더 많은 것을 잃었다”고 말한다.

모하치 이후 헝가리 왕위를 두고 쉴레이만이 지지한 서포여이 야노시와 카를 5세의 동생인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가 맞섰다. 1529년 쉴레이만은 빈까지 진군했다. 포위는 9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이어졌지만, 폭우 때문에 중포 상당수를 두고 와야 했고 보급이 모자랐으며 수비군은 성벽을 지켜 냈다. 1532년의 두 번째 진군은 작은 요새 귄스(쾨세그)에서 발이 묶여 빈에 닿지 못했다.

1541년 쉴레이만은 부다를 포함한 헝가리 중부를 오스만의 주로 편입했다. 이후 약 한 세기 반 동안 헝가리는 오스만령 헝가리, 북부·서부의 합스부르크령 ‘왕령 헝가리’, 오스만의 종주권을 인정한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나뉘었다. 이 전쟁들로 국경 지대의 마을들은 약탈과 노예사냥, 피난의 위험 속에서 큰 파괴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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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동방과 바다의 전쟁

동쪽에서 오스만의 큰 경쟁자는 사파비 왕조의 이란이었다. 두 제국은 영토를 다퉜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이슬람을 대표했다. 오스만은 수니파였고, 사파비는 12이맘 시아파를 국교로 삼았다. 쉴레이만은 샤 타흐마스프를 상대로 세 차례 큰 원정을 벌였다. 첫 원정(1533~1536) 중 1534년 바그다드에 입성해, 오스만이 따르던 하나피 법학파의 창시자 아부 하니파의 묘를 복구했다. 1548~49년과 1553~55년의 원정에서는 사파비군이 후퇴하며 초토화 전술을 썼다.

동방의 전쟁은 1555년 아마시아 조약으로 끝났다. 두 제국 사이의 초기 공식 평화 조약 가운데 하나로, 캅카스 지역을 나누고 바그다드를 포함한 이라크를 오스만령으로 인정해 오스만이 페르시아만으로 나아갈 길을 열었다.

바다에서는 해적 출신 하이레딘 바르바로스를 오스만 함대의 제독으로 삼았다. 1538년 바르바로스는 그리스 서쪽 프레베자 앞바다에서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끈 신성 동맹 함대를 물리쳤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오스만은 지중해에서 강한 위치를 차지했다. 합스부르크라는 공동의 적을 둔 오스만과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1530년대 중반 동맹을 맺었고, 1543~44년 프랑스·오스만 연합 함대가 툴롱에서 겨울을 나 많은 기독교인을 놀라게 했다.

오스만의 힘은 인도양에도 미쳤다. 1538년 아덴을 차지했지만 같은 해 인도의 포르투갈 요새 디우 공략에는 실패했다. 아프리카의 뿔 지역 아달 술탄국에 병사를 보냈고, 치세 후반에는 포르투갈에 맞설 도움을 청하는 수마트라 아체의 사절을 맞았다.

[1]

중급

법과 통치: 왜 ‘입법자’인가

오스만 제국에는 두 종류의 법이 있었다. 하나는 무슬림 법학자들이 해석하는 이슬람 종교법 샤리아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토지 보유·형벌·군대·지방 조직을 다루는 술탄의 행정법 카눈이다. 이전 술탄들도 카눈 칙령을 많이 냈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중복되거나 서로 어긋나기도 했다.

쉴레이만 치세에는 이런 규정을 모으고 비교해 제국 전체와 각 지방의 법전(카눈나메)으로 좀 더 통일된 형태로 다시 냈다. 이 작업은 술탄 혼자가 아니라 제국 서기국과 법학자들이 수행했고, 이전 군주들 때 시작된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 결과 만들어진 틀은 수백 년 동안 오스만 행정을 규정했다.

중심인물은 1545년부터 1574년까지 셰이훌이슬람(최고 무프티)을 지낸 에뷔쉬우드 에펜디였다. 그는 특히 토지 소유와 조세라는 어려운 분야에서 술탄의 카눈이 샤리아와 어긋나지 않음을 논증했고, 명확한 절차를 갖춘 공식 기관을 통해 파트와(법적 견해)를 내도록 조직했다. 그의 파트와는 쉴레이만의 전쟁과, 사파비를 지지한 크즐바시처럼 이단으로 여겨진 집단에 대한 박해에도 종교적 정당성을 주었다.

쉴레이만의 정부는 거대한 관료 집단이 움직였고, 그 가운데 다수는 기독교도 소년을 징집해 개종시킨 뒤 군인이나 관리로 키우는 데브시르메 제도를 거쳐 들어왔다. 대재상이 어전 회의를 이끌었다. 치세의 잘 알려진 조치 가운데 하나로, 1553년 또는 1554년 유대인에 대한 ‘피의 비방’ 고발을 배격하는 칙령이 있는데, 술탄의 유대인 주치의 모셰 하몬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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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궁정과 가족: 이브라힘, 휘렘, 왕자들

1523년 쉴레이만은 친구 이브라힘을 원로 관료들을 제치고 대재상으로 앉혀 관례를 깨뜨렸다. 이브라힘 파샤는 헝가리와 사파비 원정에서 군을 이끌고 유럽 여러 나라와의 외교를 맡았다. 그러나 1536년 3월 15일 그는 술탄의 명으로 궁전에서 교살되었다. 이유는 지금도 논쟁거리이다. 이브라힘의 커져 가는 자만과 권력, 다른 정치가들과의 경쟁, 술탄이 더 직접 통치하려 한 뜻 등이 거론된다.

쉴레이만의 가장 유명한 관계는 유럽에서 록셀라나로 알려진 휘렘 술탄과의 관계이다. 그녀는 루테니아(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태어나 크림 타타르의 노예사냥으로 잡혀 와 궁전의 하렘에 들어갔다. 쉴레이만은 오스만 관례를 깨고 그녀를 해방해 정식으로 결혼했으며(1534년 무렵으로 본다), 이스탄불 궁정에 머물게 했다. 휘렘은 정치 조언자로서 폴란드 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같은 외국 군주와 편지를 주고받았고, 이스탄불의 모스크 복합 단지와 예루살렘의 무료 급식소 같은 자선 시설을 세웠다. 1558년 세상을 떠났으며, 쉴레이만이 그녀에게 바친 연시 몇 편이 전한다.

오스만 왕조에서 왕위 계승은 위험한 문제였다. 아들 가운데 한 명만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53년 쉴레이만은 다른 부인 마히데브란에게서 난 인기 있는 맏아들 무스타파를 반란 모의 혐의로 군영에서 처형했다. 뒤에 휘렘의 두 아들 셀림과 바예지드가 서로 싸웠고, 사파비 이란으로 달아난 바예지드는 1561년 샤와의 합의에 따라 아들들과 함께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셀림이 셀림 2세로 뒤를 이었다.

베네치아 대사를 비롯한 유럽 관찰자들은 이 사건들을 생생하게 기록하며 이브라힘과 무스타파의 죽음을 흔히 휘렘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외국 외교관은 하렘 안을 거의 볼 수 없어 소문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현대 역사가들은 이런 이야기를 신중하게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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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시, 건축, 예술

쉴레이만은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필명 무힙비로 오스만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 시를 쓴 뛰어난 시인이었고, 그의 시집(디반)이 전한다. 몇몇 구절은 튀르키예어 속담이 되었다. 그의 치세는 대표 시인 바키와 주로 바그다드에서 활동한 푸줄리, 그리고 쉴레이만의 원정로를 그림으로 남긴 역사가이자 화가 마트라크츠 나수흐와도 이어져 있다.

궁정은 ‘재능 있는 이들의 공동체’라는 뜻의 에흘리 히레프라는 큰 장인 조직을 후원했다. 1526년의 급여 대장에는 화가·제본공·금세공인·직물 장인 등 600명 넘는 인원이 약 40개 집단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작업에서 튤립·카네이션·길게 휘어진 잎을 쓰는 오스만 특유의 장식 양식이 나왔다. 공문서 맨 위에 넣는 술탄의 화려한 서예 문장인 투으라도 그 자체로 예술품이 되었다.

건축에서 이 시대의 가장 큰 인물은 1538년부터 158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궁정 수석 건축가를 지낸 미마르 시난이다. 그는 쉴레이만을 위해 요절한 왕자 메흐메드를 기리는 셰흐자데 모스크(1543~48)를 짓고, 이어 이스탄불의 한 언덕에 쉴레이마니예 복합 단지(1550~57)를 세웠다. 이 모스크는 거대한 중앙 돔과 반돔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대돔에 응답하며, 둘레에는 마드라사(학교), 의학교, 병원, 무료 급식소, 대상 숙소, 목욕탕, 상점이 배치되었다. 쉴레이만과 휘렘은 그 옆 영묘에 잠들어 있다.

쉴레이만의 건축 사업은 이스탄불을 훨씬 넘어섰다.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게 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성벽이 대체로 이때의 것이며, 바위의 돔을 새 타일로 보수하고, 메카에서도 공사를 벌이고, 다마스쿠스에 복합 단지를 세웠다. 이런 사업은 그를 이슬람과 성지의 수호자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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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마지막 원정과 시게트바르에서의 죽음

1566년 5월, 일흔한 살의 쉴레이만은 다시 헝가리로 열세 번째 원정을 떠났다. 군은 크로아티아·헝가리 출신 지휘관 니콜라 즈린스키(즈리니 미클로시)가 지키는 시게트바르 요새를 포위했다. 쉴레이만은 요새가 함락되기 직전인 1566년 9월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밤 막사에서 숨졌고, 수비군은 마지막 돌격에서 전멸했다.

대재상 소콜루 메흐메드 파샤는 군의 사기가 꺾이지 않고 셀림 2세가 무사히 즉위할 수 있도록 몇 주 동안 그의 죽음을 비밀로 했다. 쉴레이만의 내장은 시게트바르 근처에 묻혀 뒷날 추모지가 되었고, 시신은 이스탄불로 옮겨져 쉴레이마니예의 영묘에 안장되었다.

시게트바르 포위전은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의 기억 속에서 영웅 서사가 되었다. 즈린스키의 증손자인 시인 즈리니 미클로시는 17세기에 이 싸움을 다룬 서사시를 썼다. 튀르키예의 기억에서 같은 사건은 군대를 이끌고 원정 중에 평온히 세상을 떠난 늙은 술탄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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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장려한 자’인가 ‘입법자’인가: 이름과 이미지

두 별칭은 서로 다른 전통에서 나왔다. ‘장려한 자’는 과시를 통해 드러나는 군주의 덕목으로서 ‘장려함(magnificence)’을 말하던 르네상스 유럽의 어법을 반영하며, 경외에 찬 베네치아·합스부르크 보고서들의 어조와도 맞는다. 1550년대 이스탄불에 머문 합스부르크 사절 오지에 기슬랭 드 뷔스베크는 오스만의 규율과 능력 위주의 등용을 유럽 귀족의 특권과 대비한 편지를 남겨 큰 영향을 주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썼다.

튀르키예어 호칭 ‘카누니’는 뜻밖에도 늦게 등장한다. 16~17세기 오스만 사료에는 보이지 않고, 후대 문필가들이 쉴레이만 치세를 질서의 모범으로 돌아보던 18세기 무렵부터 쓰인 것으로 보인다. 곧 ‘입법자 쉴레이만’이라는 이미지의 일부는 자신들의 이상을 그에게 투영한 후대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재위 번호에도 모호함이 있다. 옛 서양 문헌 가운데 일부는 그를 쉴레이만 2세라 부르는데, 1402년 이후 내전기에 오스만 영토 일부를 다스린 바예지드 1세의 아들 쉴레이만 첼레비를 셈에 넣었기 때문이다. 오스만의 용법과 현대 학계는 쉴레이만 첼레비를 정통 술탄으로 치지 않으므로 쉴레이만 대제는 쉴레이만 1세이다.

쉴레이만 자신도 이미지를 가꾸는 데 힘썼다. 당대 오스만 문헌은 그를 세계의 군주, 그리고 이름(솔로몬의 튀르크어형)에 빗대 ‘당대의 솔로몬’으로 그렸고, 치세 초기에는 일부 문필가가 그를 종말의 마지막 세계 군주라는 관념과 연결하기도 했다. 코넬 플라이셔 같은 역사가들은 이 제국 이데올로기가 치세 동안 메시아적 주장에서 법을 지키는 정의로운 수니파 술탄이라는 좀 더 절제된 이미지로 옮겨 갔음을 연구했다.

[1]

심화

황금기와 ‘쇠퇴’: 역사 서술의 논쟁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쉴레이만 치세를 오스만 위대함의 정점으로, 그 뒤를 긴 ‘쇠퇴’로 보았다. 이 관점은 부분적으로 오스만 사료 자체에서 비롯했다. 16세기 후반부터 무스타파 알리, 뒤이어 코치 베이 같은 권고문학(나시하트나메) 작가들은 부패와 무질서를 개탄하며 쉴레이만 시대를 정의가 살아 있던 이상적 시대로 가리켰다.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오스만사 연구자는 단순한 쇠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권고문학 작가들은 흔히 티마르(봉토)를 받던 기병처럼 군사·재정 변화로 입지가 약해진 특정 집단을 대변했으며, 그들의 황금기 향수는 중립적 묘사가 아니라 하나의 주장이었다는 것이다. 1566년 이후 제국은 군대·조세·정치를 바꾸었지만, 여전히 제 기능을 했고 한 세기 더 영토를 넓히기도 했다.

오늘날 학자들은 쉴레이만 이후를 흔히 ‘변형’의 시기로 설명한다. 예컨대 바키 테즈잔은 왕조·궁정·예니체리·법학자들 사이에 권력이 더 넓게 나뉜 ‘제2의 오스만 제국’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보면 쉴레이만 치세는 몰락 직전의 정점이라기보다 긴 국가 형성 과정의 한 단계이다.

레슬리 피어스의 제국 하렘 연구도 이 치세에 대한 이해를 바꾸었다. 휘렘의 영향력을 해로운 ‘치마 정치’의 시작으로 보는 대신, 피어스는 왕실 여성을 포함한 왕조의 가정이 주권 구조의 일부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면 뒷날의 ‘여인 천하(여성의 술탄 시대)’도 쇠약의 징후라기보다 왕조 권력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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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사료와 관점

쉴레이만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유난히 풍부한 자료를 쓸 수 있다. 오스만 쪽에는 궁정에서 만든 『쉴레이만나메』를 비롯한 연대기와 삽화 역사서, 어전 회의와 재무 대장, 법전, 파트와 모음집, 그의 건물들의 와크프(기진) 문서, 술탄 자신의 시와 편지가 있다. 유럽 쪽에는 베네치아 대사들의 보고서(렐라치오네), 합스부르크 외교 서신, 뷔스베크의 편지 같은 기록이 있다.

사료마다 치우침이 있다. 오스만 궁정 사서는 술탄을 찬양하고 전쟁을 신앙의 승리로 그리며, 베네치아·합스부르크 보고서는 날카로운 관찰에 소문과 ‘튀르크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섞는다. 문서고의 대장은 덜 극적이지만 조세·토지 보유·국가 운영 문제에서는 더 믿을 만해, 현대 역사가들이 크게 의존한다.

쉴레이만에 대한 기억도 나라마다 다르다. 튀르키예에서 그는 민족의 영웅이자 제국의 위대함을 상징하며, 그의 삶을 다룬 인기 텔레비전 드라마는 궁정 묘사를 두고 역사가들과 일부 보수층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헝가리·크로아티아·세르비아·그리스에서 그의 치세는 독립의 상실, 전쟁의 파괴, 포로의 노예화로도 기억된다. 균형 잡힌 이해를 위해서는 업적과 폭력을 함께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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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카눈과 샤리아
오스만 통치는 술탄의 행정법(카눈)과 이슬람 종교법(샤리아) 두 가지 법 위에 서 있었다. 쉴레이만 치세에는 에뷔쉬우드 에펜디와 함께 둘을 조화시키려 했다.
보편 군주권
쉴레이만과 궁정은 그를 세계의 군주, 새로운 솔로몬, 로마의 계승자이자 이슬람의 수호자로 내세우며 합스부르크의 보편 제국 주장과 경쟁했다.
변경 전쟁
헝가리와 지중해는 오스만과 합스부르크 세계 사이의 오랜 변경으로, 포위전·약탈·포로 사냥과 함께 교역·외교도 이루어졌다.
수니·시아 경쟁
사파비 이란과의 전쟁은 영토 전쟁이자 이념 전쟁이었고, 오스만을 수니 이슬람의 수호자로 규정하는 데 이바지했다.
후원과 고전 양식
시난과 궁정 공방을 통해 쉴레이만 치세는 건축·서예·도자기·서책 예술에서 알아볼 수 있는 오스만 ‘고전’ 양식을 낳았다.
왕조의 가정
궁정·하렘·왕자들은 통치의 일부였다. 왕위 다툼과 왕실 여성의 역할이 정치를 좌우했다.
후대가 만든 황금기
쉴레이만 치세를 완벽한 황금기로 보는 그림은 후대 문필가와 근대 민족주의가 짙게 만든 것이어서, 역사가들은 이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기록

  1. 1494년 — 11월 6일, 훗날의 셀림 1세의 아들로 트라브존에서 태어나다.
  2. 1520년 — 아버지의 죽음 뒤 9월 30일 술탄으로 즉위하다.
  3. 1521년 — 오스만군이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다.
  4. 1522년 — 약 다섯 달의 포위 끝에 로도스가 항복하고 구호기사단이 섬을 떠나다.
  5. 1526년 — 8월 29일 모하치 전투에서 승리, 헝가리 왕 러요시 2세가 죽다.
  6. 1529년 — 빈 포위(9월 말~10월 중순)가 실패하다.
  7. 1534년 — 바그다드에 입성하다. 이 무렵 휘렘과 결혼하다.
  8. 1536년 — 3월 15일 대재상 파르갈르 이브라힘 파샤가 처형되다.
  9. 1538년 — 바르바로스의 함대가 프레베자 해전에서 승리하다. 시난이 궁정 수석 건축가가 되다.
  10. 1541년 — 부다와 헝가리 중부가 오스만의 주가 되다.
  11. 1555년 — 사파비 이란과 아마시아 조약을 맺다.
  12. 1566년 — 9월 6~7일 시게트바르 포위전 중 숨지고 셀림 2세가 뒤를 잇다.

용어 풀이

술탄
오스만 군주의 칭호. 쉴레이만은 왕조의 제10대 술탄이었다.
대재상
술탄의 수석 대신. 어전 회의를 이끌고 흔히 군을 지휘했다.
카눈 / 카눈나메
술탄의 행정법, 그리고 그런 법을 모은 법전.
셰이훌이슬람
오스만 제국의 최고 무프티로, 이슬람법에 관한 최고 권위자.
파트와
자격을 갖춘 무슬림 법학자가 질문에 답해 내리는 법적 견해.
데브시르메
주로 발칸의 기독교도 소년을 징집해 개종시킨 뒤 궁정·군대·행정에 쓰던 제도.
예니체리
주로 데브시르메로 충원된 술탄의 정예 보병 군단.
하세키 술탄
술탄의 으뜸 부인을 가리키는 칭호로, 휘렘이 처음 받았다.
투으라
공문서에 넣는 술탄의 서예 문장(花押).
나시하트나메
군주에게 바치는 오스만의 ‘권고문학’. 흔히 현재를 이상화된 과거와 대비했다.

묻고 답하기

왜 ‘장려한 자(대제)’라고 불렸나요?

유럽 사람들이 그의 궁정의 화려함과 군대의 힘을 표현하려고 붙인 이름이에요. 튀르키예에서는 ‘카누니(입법자)’라고 부르는데, 이 호칭은 후대 오스만 문헌에서야 나타나요.

쉴레이만이 법을 모두 직접 썼나요?

아니다. 법을 모으고 조화시키는 일은 이전 술탄들의 칙령을 바탕으로 관리와 법학자들, 특히 에뷔쉬우드 에펜디가 오랫동안 수행한 사업이었다. 술탄의 권위가 그 결과를 뒷받침했다.

빈을 정복했나요?

아니요. 1529년 빈 포위는 실패했고, 1532년의 두 번째 진군은 빈에 닿지도 못했어요. 빈은 그의 정복이 멈춘 서쪽 끝이었어요.

휘렘 술탄은 누구인가요?

루테니아 출신으로 포로가 되어 하렘에 들어왔다가 쉴레이만의 정식 부인이자 조언자가 된 여성이에요. 후계자 셀림 2세의 어머니이고, 큰 자선 건물들을 세웠어요.

왜 자기 아들들을 처형했나요?

오스만 체제에서는 아들 한 명만 왕위를 이을 수 있었고, 경쟁하는 왕자는 군대를 일으킬 수 있었다. 쉴레이만은 1553년 반란 모의 혐의로 무스타파를 처형했고, 바예지드는 후계자 셀림에게 반기를 든 뒤 1561년 처형되었다. 당시에도 논란이 컸다.

쉴레이만 이후 오스만 제국은 쇠퇴했나요?

옛 역사서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는 그 뒤를 쇠퇴가 아닌 변형과 적응의 시기로 설명한다. 제국은 1922년까지 이어졌다.

그의 치세를 알려 주는 가장 좋은 증거는 무엇인가요?

국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오스만 문서고의 대장·법전·파트와가 가장 믿을 만하다. 궁정 연대기와 유럽 대사들의 보고서는 생생하지만 치우침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Suleiman the Magnificent. Wikipedia
  2. Hürrem Sultan. Wikipedia
  3. Ebussuud Efendi. Wikipedia
  4. Battle of Mohács. Wikipedia
  5. Süleymaniye Mosque. Wikipedia
  6. Transformation of the Ottoman Empire. Wikipedia
  7. Halil İnalcık, The Ottoman Empire: The Classical Age 1300–1600. Weidenfeld & Nicolson, 1973
  8. Leslie P. Peirce, The Imperial Harem: Women and Sovereignty in the Ottoman Empire.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9. Baki Tezcan, The Second Ottoman Empire: Political and Social Transformation in the Early Modern Wor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10. Cornell H. Fleischer, Bureaucrat and Intellectual in the Ottoman Empire: The Historian Mustafa Âli (1541–1600).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6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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