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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180년 전, 오스만 제국은 남동유럽·중동·북아프리카에 걸친 아주 오래되고 큰 나라였어요. 수도는 이스탄불이었지요. 그런데 제국은 어려움에 빠져 있었어요. 전쟁에서 지고, 몇몇 지방은 떨어져 나가고, 나라 살림에 돈도 모자랐거든요.
1839년, 새로 즉위한 어린 술탄 압뒬메지트는 신하에게 궁전 옆 장미 정원에서 특별한 발표문을 읽게 했어요. 그 정원의 이름은 ‘장미의 집’이라는 뜻의 귈하네였어요. 발표문은 모든 사람의 목숨과 재산과 명예를 지켜 주고, 세금을 공정하게 걷고, 공개 재판 없이는 벌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가장 놀라운 약속은 이 권리가 종교와 상관없이 술탄의 모든 백성에게 적용된다는 것이었어요. 그전까지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은 서로 다른 규칙 아래 살았어요. 이제 정부는 모두가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 뒤 40년 가까이 정부는 집을 방마다 고쳐 짓듯 많은 것을 바꾸었어요. 새 법전을 쓰고, 새로운 학교를 열고, 전신선과 철도를 놓고, 지폐를 찍고, 인구를 세고, 지방을 다스리는 방식도 바꾸었어요. 이 시기 전체를 ‘재편’이라는 뜻의 ‘탄지마트’라고 불러요.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에요. 어떤 무슬림들은 자기들의 특별한 자리를 잃는다고 느꼈고, 어떤 기독교인들은 차라리 독립된 나라를 원했어요. 어떤 곳에서는 끔찍한 폭력도 벌어졌어요. 정부는 유럽에서 돈을 많이 빌렸다가 갚지 못하게 되기도 했어요.
1876년 개혁가들은 제국에 처음으로 헌법, 곧 나라 전체의 규칙 책과 선거로 뽑은 의회를 만들어 주었어요. 새 술탄이 곧 의회를 닫아 버렸지만, 평등한 시민권과 글로 쓴 법 같은 탄지마트의 생각은 오늘날의 튀르키예를 비롯해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에 이어졌어요.
한눈에 보기
- 기간
- 1839~1876년(귈하네 칙령부터 첫 오스만 헌법까지)
- 장소
- 오스만 제국. 결정은 이스탄불에서 내려져 발칸에서 이라크·북아프리카까지 적용되었다
- 술탄
- 압뒬메지트 1세(재위 1839~1861), 압뒬아지즈(재위 1861~1876), 끝 무렵 압뒬하미트 2세(1876~)
- 주요 개혁가
-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 메흐메트 에민 알리 파샤, 메흐메트 푸아트 파샤, 미트하트 파샤, 아흐메트 제브데트 파샤
- 주요 문서
- 귈하네 칙령(1839년 11월 3일), 개혁 칙령(1856년 2월 18일), 토지법·형법(1858), 주(빌라예트)법(1864), 국적법(1869), 메젤레 민법전(1869~1876), 헌법(1876년 12월 23일)
- 주요 목표
- 생명·재산의 안전, 공정한 과세, 정기적 징병,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법적 평등, 중앙집권적이고 효율적인 국가
- 결과
- 근대적 관료제와 법체계가 자리 잡았으나, 외채와 1875년 파산, 이어지는 민족주의 봉기가 뒤따랐고 헌법은 1878년 정지되었다
쉬움
탄지마트란 무엇인가
탄지마트는 ‘재편’ 또는 ‘규정들’을 뜻하는 오스만 튀르크어이다. 역사가들은 오스만 정부가 법·행정·군대·조세·교육을 잇달아 개혁한 1839년부터 1876년까지를 이 이름으로 부른다. 이 시기는 1839년 귈하네 칙령이라는 공개 선포로 시작해 1876년 첫 오스만 헌법의 선포로 끝났다.
개혁은 하나의 법이 아니라 압뒬메지트 1세와 압뒬아지즈 두 술탄 아래서 40년 가까이 펼쳐진 계획이었다. 주로 외교와 외국어로 단련된 소수의 고위 관료들이 설계하고 밀고 나갔는데, 이들은 분명한 성문법을 갖춘 근대적 중앙집권 국가를 세워야만 제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탄지마트의 핵심에는 통치자와 피치자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있었다. 무슬림·기독교인·유대인이 서로 다른 권리와 의무를 지던 종교별 사회 대신, 개혁가들은 모든 신민이 법의 보호를 똑같이 받는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씨름이 제국의 마지막 한 세기를 형성했다.
쉬움
제국은 왜 개혁이 필요했나
18세기와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잇달아 졌다. 발칸에서는 세르비아인이 봉기했고, 그리스는 독립 전쟁(1821~1830) 끝에 독립 국가를 세웠다. 힘 있는 지방 유력자와 총독들은 중앙 정부를 무시하기 일쑤였고, 옛 군대는 더 이상 유럽 군대를 당해 낼 수 없었다.
이전 술탄들도 변화를 시도했다. 셀림 3세(재위 1789~1807)는 유럽식 신식 군대 ‘니잠 으 제디드(새 질서)’를 만들었지만 폐위되었다. 마흐무트 2세(재위 1808~1839)는 더 나아가 1826년 변화에 저항하던 옛 보병 군단 예니체리를 없애고, 국가를 중앙집권화하고 새 학교를 열고 관리들에게 유럽식 복장을 입혔다.
직접적인 위기는 이집트에서 왔다. 이집트의 오스만 총독 무함마드 알리는 강한 군대를 길러 술탄에게 맞섰고, 1839년 그의 군대가 오스만군을 무찔렀다. 같은 해 여름 마흐무트 2세가 세상을 떠났고, 새 술탄 압뒬메지트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정부는 유럽 열강, 특히 영국의 지원이 절실했고, 확고한 개혁 계획은 그 지지를 얻는 한 방법이었다. 1838년 오스만은 영국과 발타 리만 조약을 맺어 오스만 시장을 영국 무역에 열어 둔 상태였다.
쉬움
1839년 장미 정원 칙령
1839년 11월 3일, 외무대신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는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옆 귈하네(‘장미의 집’) 공원에서 관리·종교 지도자·비무슬림 공동체 대표·외국 외교관들 앞에서 제국 칙령을 낭독했다. 이것이 귈하네 칙령, 튀르키예어로 ‘귈하네 하트 으 셰리피’이다.
칙령은 먼저 제국이 약해진 까닭이 옛 법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뒤, 세 가지를 약속했다. 모든 신민의 생명·명예·재산의 안전을 보장하고, 개인 청부업자가 세금 징수권을 사들이던 징세 청부제를 끝내고 정기적이고 공정한 과세 제도를 두며, 복무 기간을 정한 정기 징병 제도를 만든다는 것이다. 또 누구도 법에 따른 공개 재판 없이 처형되거나 처벌받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이 보장이 “어떤 종교나 종파에 속하든” 술탄의 모든 신민에게 적용된다고 한 것이다. 칙령은 아직 대부분의 법을 바꾸지 않았고 많은 약속이 여러 해 동안 종이 위에만 머물렀다. 하지만 계획을 제시했고, 뒤의 개혁가들은 늘 이 칙령으로 돌아가 근거를 찾았다.
중급
‘포르트’의 사람들: 누가 개혁을 이끌었나
탄지마트는 무엇보다 새로운 유형의 오스만 관료가 이룬 일이었다.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1800~1858)는 파리와 런던에서 대사를 지내며 제국이 힘을 되찾으려면 유럽식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귈하네 칙령을 기초했고 여섯 차례 대재상을 지냈다. 그가 키운 메흐메트 에민 알리 파샤와 메흐메트 푸아트 파샤는 1850~60년대 대재상과 외무대신 자리를 번갈아 맡으며 정부를 이끌었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대재상 정부가 있던 ‘숭고한 문(바브 으 알리, 포르트)’의 번역국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프랑스어 실력은 외교와 고위직으로 가는 길이었다. 탄지마트 동안 권력은 궁정에서 이 관료 집단으로 옮겨 갔고, 카터 핀들리 같은 역사가는 이 시기 포르트를 정부의 실질적 중심으로 설명했다.
법을 준비하고 심의하는 새 회의 기구도 생겼다. 최고사법회의(1838~)와 개혁회의(1854) 등이 그것으로, 1868년에는 국가평의회와 별도의 최고 법원으로 재편되었다. 뒤이은 개혁가로는 다뉴브 주 총독으로 이름을 떨친 미트하트 파샤, 민법 편찬을 이끈 학자 출신 정치가 아흐메트 제브데트 파샤가 있다.
중급
새 법과 새 법원
탄지마트의 가장 오래 남은 성과 가운데 하나는 성문 법전의 편찬이다. 1850년 주로 프랑스법을 본뜬 상법이 공포되었고, 외국인이 관련된 상사 사건을 다루기 위해 오스만인과 유럽인이 함께 참여하는 혼합 상사 법원이 세워졌다. 1858년에는 역시 프랑스법의 영향을 받은 새 형법이 나왔는데, 튀르키예에서 1928년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1864년 정부는 새 법전에 따라 민형사 사건을 다루는 세속 국가 법원인 니자미예 법원망을 세웠다. 이슬람 법관(카디)의 옛 법원은 특히 가족·상속 문제에서 계속 존재했으므로, 제국에는 여러 법원 체계가 나란히 있게 되었다.
민법에서는 다른 길을 택했다. 일부의 주장처럼 프랑스 민법전을 번역하는 대신, 아흐메트 제브데트 파샤가 이끈 위원회가 하나피 이슬람 법학을 바탕으로 하되 유럽 법전처럼 조문 번호를 매긴 민법전 ‘메젤레’를 만들었다. 1869년부터 1876년까지 16권 1,851조로 간행되었다. 메젤레는 매우 오래 살아남아 튀르키예에서 1926년까지, 여러 아랍 후계 국가에서도 효력을 유지했고, 이스라엘에서는 형식상 1984년까지 남아 있었다.
중급
1856년 개혁 칙령과 평등한 시민권
영국·프랑스가 오스만과 함께 러시아에 맞서 싸운 크림 전쟁(1853~1856)은 이스탄불에서 유럽 동맹국의 영향력을 크게 키웠다. 파리 강화 회의 직전인 1856년 2월 18일, 술탄 압뒬메지트는 두 번째 대칙령인 개혁 칙령(이슬라하트 페르마느)을 내렸다. 주로 알리 파샤가 영국·프랑스 대사와 긴밀히 협의하며 준비한 것이다.
1856년 칙령은 비무슬림에 관해 귈하네 칙령보다 훨씬 구체적이었다. 종교와 관계없이 관직과 학교에 똑같이 나아갈 수 있고, 예배의 자유와 강제 개종으로부터의 보호를 누리며, 무슬림과 비무슬림 사이의 사건은 혼합 법원에서 다루고, 비무슬림도 군에 복무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병역 대신 비무슬림이 내던 특별세가 대체되었다.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도 허용했다.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는 이 칙령을 외세의 압력에 대한 양보라고 비판했다.
반응은 엇갈렸다. 많은 무슬림은 전통적 우위를 잃는 데 분개했다. 일부 비무슬림 공동체는 관직 진출을 반겼지만 징병과 종교 지도자들의 옛 특권 상실을 싫어했다. 공동체 자체도 재편되어 1860년대에 그리스 정교회·아르메니아·유대 공동체가 새 내부 규정을 받았고, 특히 1863년 아르메니아 민족 헌법은 평신도에게 더 큰 발언권을 주었다.
1869년 국적법은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신민에게 하나의 오스만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 바탕에 깔린 정치 이념을 흔히 ‘오스만주의’라 부른다. 공통의 오스만 조국에 대한 충성이 여러 신앙과 언어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중급
근대 국가 만들기: 지방, 토지, 학교, 철도
개혁가들은 인구를 파악하고 직접 과세할 수 있는 국가를 원했다. 1844년 남성 인구 조사가 실시되고 신분증이 도입되었다. 1864년 주법은 지방을 ‘빌라예트’라는 큰 단위로 재편하고 총독, 무슬림과 비무슬림 선출 지역민이 참여하는 행정 회의, 새 법원을 두었다. 이 모델은 미트하트 파샤가 다스린 다뉴브 주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1858년 토지법은 토지를 국유지(미리), 사유지(뮐크), 종교 기진지(와크프), 공유지 등으로 분류하고, 보유자가 땅을 등록해 토지 증서(타푸)를 받도록 했다. 목적은 세수와 국가 통제의 강화였다. 그러나 실제로 시리아·팔레스타인·이라크 일부에서는 마을 땅이 상인·관리·부족장 이름으로 등록되는 일이 많아, 농민이 부재지주의 소작인이 되었다.
교육도 바뀌었다. 국가는 세속 중등학교, 관리 양성 학교, 대학(다륄퓌눈)을 열었는데, 대학 설립 시도는 처음에 순탄치 않았다. 1868년 세워진 갈라타사라이 리세는 프랑스어로 가르치며 여러 종교의 학생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와 함께 전신선(1850년대부터), 철도, 증기선, 오스만 은행(1856), 지폐, 새 부처들이 정부의 실제 운영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탄지마트에는 노예제와 노예 무역에 맞선 조치도 들어 있었다. 1847년 이스탄불 노예 시장이 폐쇄되었고, 1850년대에는 체르케스·조지아인 노예 무역과 아프리카인 노예 무역이 금지되었다. 다만 집행은 고르지 않았다.
중급
갈등, 폭력, 부채
평등의 약속은 희망만큼이나 폭력적 저항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1860년 레바논산 지역에서 드루즈와 마론파 기독교도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뒤, 다마스쿠스에서 기독교도 학살이 일어났다. 두 곳에서 각각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가 군대를 보냈고, 오스만 외무대신 푸아트 파샤가 전권을 받아 시리아로 가서 관리와 폭도를 엄하게 처벌했다. 1861년 레바논산은 기독교도 총독이 다스리는 특별 자치구(무타사리피야)가 되었다.
발칸에서는 개혁이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 세르비아인·루마니아인·불가리아인 등은 흔히 유럽 열강, 특히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점점 자치나 독립을 추구했다. 1870년 불가리아 정교회는 그리스 총대주교구에서 분리된 독자적 엑사르흐 교회를 얻었고, 이는 불가리아 민족 정체성으로 가는 한 걸음이었다.
개혁은 전쟁과 더불어 돈이 많이 들었다. 제국은 크림 전쟁 중 처음 외채를 들였고 이후로도 크게 빌렸다. 1875년에는 이자를 갚지 못해 부분적 채무 불이행을 선언했다. 같은 무렵 헤르체고비나·보스니아·불가리아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1876년 불가리아 봉기 진압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면서 유럽 여론이 오스만에 등을 돌렸다.
중급
청년 오스만인과 1876년 헌법
1860년대에는 새로운 비판 세력이 나타났다. 작가 나므크 케말 등 지식인들이 1865년 결성한 비밀 결사 ‘청년 오스만인’은 탄지마트 정치가들, 특히 알리와 푸아트가 권위적으로 통치하고 제국 고유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유럽을 베낀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헌법과 의회를 주장했고, 자유(휘리예트)와 조국(바탄) 같은 관념을 이슬람 정치사상에 뿌리내리게 하려 했다. 다수는 유럽 망명지에서 글을 썼다.
1876년 5월, 재정 파탄과 발칸 위기 속에서 미트하트 파샤가 이끄는 대신들이 술탄 압뒬아지즈를 폐위했다. 무라트 5세의 짧은 재위 뒤 헌법 수용에 동의한 압뒬하미트 2세가 즉위했다. 유럽 외교관들이 발칸 위기를 논의하려고 이스탄불에 모인 1876년 12월 23일 헌법이 선포되었다. 헌법은 모든 오스만 신민의 법 앞의 평등을 선언하고, 임명직 상원과 선출직 하원으로 이루어진 의회를 두었다.
첫 오스만 의회는 1877년 무슬림·기독교도·유대인 의원이 함께 모인 가운데 열렸다. 그러나 헌법은 위험하다고 여긴 인물을 추방할 권리를 비롯해 술탄에게 큰 권한을 남겼고, 압뒬하미트는 이를 미트하트 파샤에게 썼다. 참담한 러시아와의 전쟁 중이던 1878년 2월 14일 그는 의회를 정지하고 30년 동안 친정했다. 헌법은 1908년 청년 튀르크 혁명으로 비로소 되살아났다.
심화
서구화인가 오스만의 쇄신인가: 기원 논쟁
오래된 질문 가운데 하나는 탄지마트가 어디까지 유럽 모델의 모방이었느냐이다. 스탠퍼드 J. 쇼는 귈하네 칙령이 1789년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이상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반면 부트루스 아부만네는 칙령이 서구의 영향보다 정의로운 통치에 관한 오스만·이슬람의 관념, 그리고 궁정의 낙슈반디-무자디디 수피 집단의 개혁 정신에 기댔다고 주장했다. 칙령 본문 자체도 샤리아와 옛 법의 회복이라는 언어에 유럽 자유주의 헌법을 닮은 새 약속을 섞고 있다.
로더릭 데이비슨의 고전적 연구 『오스만 제국의 개혁, 1856~1876』은 탄지마트 정치가들의 진정성과 추진력을 강조하면서도 그들의 지지 기반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보여 주었다. 뒤의 연구는 개혁을 더 넓은 비교의 틀에 놓았다.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카자르 왕조의 이란, 메이지 시대 일본, 알렉산드르 2세의 러시아처럼 오스만 제국도 유럽의 군사·경제력에 대응해 ‘방어적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최근 역사가들은 셀림 3세·마흐무트 2세 때의 개혁과의 연속성, 그리고 이스탄불 밖 오스만 사회의 역할도 강조한다. 지방 엘리트·상인·종교 공동체는 새 법을 협상하고 이용하고 거부했다. 이렇게 보면 탄지마트는 위에서 강요된 것만이 아니라 중앙 국가와 수많은 지역 행위자의 만남 속에서 모양이 잡힌 것이다.
심화
종이 위의 평등과 현실의 평등
탄지마트의 유산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것은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평등 문제이다. 한스루카스 키저는 종이 위에서 평등을 수사적으로 내세운 것과 현실에서 무슬림의 우위가 이어진 것 사이의 간극을 지적했다. 비무슬림은 새 권리를 얻었지만 많은 곳에서 여전히 취약했고, 무슬림 유력자들이 지방 회의와 법원을 계속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바논산을 연구한 우사마 마크디시의 『종파주의의 문화』는 근대적 의미의 종파 정체성이 오래된 증오가 아니라, 오스만 개혁·유럽의 개입·지역 엘리트가 모두 종교를 따라 정치를 조직하기 시작한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보면 1860년의 폭력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근대와 개혁의 산물이다. 다른 역사가들은 지주에 맞선 농민 봉기 같은 사회·경제적 갈등에 더 무게를 둔다.
개혁은 공동체 내부도 바꾸었다. 새 공동체 헌법은 성직자에 비해 상인·전문직 같은 평신도에게 더 큰 힘을 주었고, 아르메니아인·불가리아인 등의 민족의식을 북돋웠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들은 탄지마트가 억누르려던 민족주의를 뜻하지 않게 부추겼다고 보고, 다른 이들은 민족주의가 발칸과 유럽 외교에 독자적 뿌리를 두었다고 본다.
여성의 지위와 노예제도 연구 분야이다. 탄지마트는 여성에게 정치적 권리를 주지 않았지만 여교사 양성 학교를 비롯한 여학교가 세워졌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여성들이 새 언론의 필자이자 독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심화
사료, 기억, 나라별 시각
탄지마트는 기록이 유난히 풍부하다. 이스탄불의 오스만 문서고에는 법령 원문, 회의록, 지방 서신, 토지 대장, 인구 조사 기록이 있다. 이 시기의 관보와 민간 신문은 오스만 튀르크어·그리스어·아르메니아어·불가리아어·아랍어·라디노어·프랑스어로 발행되어 공론의 흐름을 따라가게 해 준다. 유럽 영사·외교 보고서는 흔히 비판적인 또 하나의 시각을 더한다.
탄지마트를 어떻게 기억하는지는 누가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다. 튀르키예 공화국에서는 오랫동안 아타튀르크의 개혁으로 이어지는 서구화의 첫 단계로 그려졌고, 진보적이라고 칭송받기도 하고 이슬람 전통을 약화시킨 피상적 유럽 모방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아랍 역사 서술에서는 새 지방 행정, 토지 등록, 도시 명사층의 성장, 그리고 아랍 문예 부흥의 시작과 연결된다. 발칸 민족사에서는 자기 민족이 빠져나가던 제국을 붙잡아 두려던 실패한 시도로 나타나는 일이 많다.
셰리프 마르딘의 청년 오스만인 연구를 잇는 역사가들은 탄지마트의 지적 유산을 강조한다. 입헌 정부라는 생각, 권리와 시민권의 언어, 그리고 이슬람과 근대 제도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이런 질문은 1876년 이후에도 오랫동안 제국의 후계 국가들에서 이어졌다.
핵심 개념
- 법의 지배
- 귈하네 칙령은 신민이 합법적인 공개 재판 없이는 생명·명예·재산을 잃지 않는다고 약속해 자의적 권력을 제한했다.
- 법적 평등(오스만주의)
-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포함한 모든 신민이 법 앞에 평등하고 공통의 오스만 시민권을 누린다는 원칙으로, 1869년 제도화되었다.
- 중앙집권화
- 국가는 징세 청부업자나 지방 유력자 같은 중개자 대신 봉급 관리·대장·획일적 지방 제도를 통해 직접 통치하려 했다.
- 법전 편찬
- 법을 체계적인 법전으로 성문화했다. 일부는 프랑스 모델을, 메젤레는 이슬람 법학을 근대적 형식으로 따랐다.
- 방어적 근대화
- 개혁의 원동력은 유럽의 군사·경제·외교 압력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필요였다.
- 관료 지배
- 권력이 궁정에서 외교와 외국어에 능한 새 관료층이 움직이는 포르트로 옮겨 갔다.
- 입헌주의
- 청년 오스만인 같은 비판자들은 진정한 개혁에는 헌법과 의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1876~1878년 잠시 실현되었다.
기록
- 1826년 — 마흐무트 2세가 예니체리 군단을 없애 중앙집권 개혁의 길을 열다.
- 1838년 — 발타 리만 조약으로 오스만 시장이 영국 무역에 열리다.
- 1839년 — 마흐무트 2세가 죽고, 11월 3일 압뒬메지트 1세 치하에서 귈하네 칙령이 선포되다.
- 1850년 — 상법과 혼합 상사 법원이 도입되다.
- 1856년 — 개혁 칙령(2월 18일)이 비무슬림에게 평등을 약속하다. 오스만 은행이 세워지다.
- 1858년 — 토지법과 새 형법이 공포되다.
- 1860년 — 레바논산 내전과 다마스쿠스 학살이 일어나다.
- 1864년 — 주법으로 지방이 재편되고 니자미예 법원이 세워지다.
- 1865년 — 청년 오스만인 결사가 결성되다.
- 1869년 — 국적법으로 공통의 오스만 시민권이 생기고 메젤레 간행이 시작되다.
- 1875년 — 오스만 정부가 외채 상환 불이행을 선언하다.
- 1876년 — 압뒬아지즈가 폐위되고 12월 23일 첫 오스만 헌법이 선포되다.
용어 풀이
- 탄지마트
- ‘재편’이라는 뜻. 1839~1876년 오스만 개혁 시대.
- 하트 으 셰리프 / 페르만
- 술탄이 내리는 칙령. 귈하네 칙령과 1856년 개혁 칙령이 이에 해당한다.
- 숭고한 문(바브 으 알리, 포르트)
- 대재상의 관청, 나아가 오스만 정부 자체를 가리키는 말.
- 밀레트
- 자체 지도자와 내부 법을 가진 공인 종교 공동체(그리스 정교회·아르메니아·유대 등).
- 징세 청부제(일티잠)
- 개인 청부업자가 세금 징수권을 사들이던 제도로, 귈하네 칙령이 폐지를 약속했다.
- 빌라예트
- 1864년 지방법으로 만들어진 큰 주.
- 메젤레
- 하나피 이슬람법에 바탕을 둔 오스만 민법전(1869~1876).
- 니자미예 법원
- 새 법전을 적용하기 위해 1864년 세운 세속 국가 법원.
- 타푸
- 토지를 보유·이용할 권리를 기록한 증서.
- 청년 오스만인
- 1865년부터 입헌 정부를 요구한 지식인 집단.
묻고 답하기
왜 ‘장미 정원’ 칙령이라고 하나요?
1839년 11월 3일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옆 귈하네(‘장미의 집’) 공원에서 낭독되었기 때문이에요.
탄지마트로 모두가 평등해졌나요?
법 앞의 평등을 약속하고 공통의 시민권을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무슬림과 비무슬림, 부자와 가난한 사람,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이 이어졌어요.
개혁은 유럽이 오스만에 강요한 것인가요?
특히 1856년에는 유럽의 압력이 중요했지만, 개혁은 이전 오스만의 노력과 오스만 정치가들의 신념에서도 자라났다. 어느 쪽이 더 컸는지는 역사가마다 의견이 다르다.
탄지마트가 제국을 구했나요?
중앙 국가를 강화해 제국이 몇십 년 더 버티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영토 상실·민족주의 봉기·재정 파탄을 막지는 못했다.
1876년 헌법은 어떻게 되었나요?
술탄 압뒬하미트 2세가 1878년 의회를 정지했어요. 헌법은 1908년 청년 튀르크 혁명 뒤 되살아났어요.
개혁가들은 왜 프랑스 민법 대신 이슬람 민법전을 만들었나요?
아흐메트 제브데트 파샤 등은 하나피법에 바탕을 둔 법전이 판사와 대중에게 더 익숙하고 받아들이기 쉽다고 보았다. 동시에 조문별로 정리한 근대적 형식 덕분에 새 법원에서 쓰기 좋았다.
탄지마트는 오늘날 튀르키예와 관련이 있나요?
그렇다. 성문 법전, 세속 법원, 국립 학교처럼 공화국의 많은 제도와 생각이 탄지마트 때 놓인 토대 위에 세워졌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Tanzimat. Wikipedia
- Edict of Gülhane. Wikipedia
- Ottoman Reform Edict of 1856. Wikipedia
- Mecelle. Wikipedia
- Ottoman Land Code of 1858. Wikipedia
- 1860 civil conflict in Mount Lebanon and Damascus. Wikipedia
- Young Ottomans. Wikipedia
- Constitution of the Ottoman Empire. Wikipedia
- Roderic H. Davison, Reform in the Ottoman Empire, 1856–1876.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3
- Ussama Makdisi, The Culture of Sectarianism: Community, History, and Violence in Nineteenth-Century Ottoman Leban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함께 보기
- 쉴레이만 대제헝가리에서 이라크까지의 정복, 오스만 법의 정비, 건축과 시의 융성을 이끈 오스만 제국 제10대 술탄(재위 1520~1566).
- 메이지 유신1868년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되면서 일본의 정부와 사회에 폭넓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 1861년 농노 해방러시아 제국의 사유지 농노 약 2,300만 명에게 법적 자유를 주었지만, 수십 년에 걸친 상환금으로 땅을 사게 한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
- 제1차 아편 전쟁아편 무역과 대외 교역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된 1839~1842년 영국과 청나라 사이의 전쟁.
- 바스티유 습격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요새 겸 감옥을 점령한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 초기의 상징이 되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