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스티유 습격

Prise de la Bastille

1789년 · 파리, 프랑스

한 문장으로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오래된 왕실 요새 겸 감옥인 바스티유를 공격해 점령한 사건으로, 이날은 프랑스 혁명과 절대 왕권에 맞선 민중의 상징이 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이미지: Jean-Pierre Houël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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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230여 년 전 프랑스는 루이 16세라는 왕이 다스렸어요. 왕은 거의 무엇이든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나랏일에 목소리를 낼 수 없었지요. 1789년 여름에는 빵값이 아주 비싸서 굶는 사람이 많았고, 나라 곳간도 텅 비어 있었어요.

파리에는 바스티유라는 오래된 돌 성이 있었어요. 높고 둥근 탑이 여덟 개, 벽은 아주 두꺼웠지요. 왕은 이 성을 감옥으로 썼어요. 왕이 편지 한 장에 서명만 하면 재판 없이도 사람을 가둘 수 있었어요. 그래서 많은 파리 사람에게 바스티유는 ‘불공평한 것’의 상징이었어요.

1789년 7월, 왕이 파리 근처로 군대를 모은다는 소식이 퍼졌어요. 사람들은 군대가 도시를 공격할까 봐 두려워서 무기를 찾아 나섰어요. 7월 14일, 커다란 무리가 화약이 보관된 바스티유로 몰려갔어요. 몇 시간 동안 싸움이 이어지다가, 시민 편에 선 군인들이 대포를 끌고 오자 요새가 항복했어요.

안에는 죄수가 겨우 일곱 명뿐이었어요. 그래도 이 승리는 아주 크게 느껴졌어요. 보통 사람들도 왕에게 맞설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었거든요. 얼마 뒤 일꾼들이 요새를 돌 하나하나까지 모두 허물어 버렸어요.

오늘날 7월 14일은 프랑스의 국경일이에요. 프랑스 사람들은 그냥 ‘7월 14일’이라고 부르고,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바스티유의 날’이라고 해요. 행진과 음악, 불꽃놀이가 열린답니다.

한눈에 보기

날짜
1789년 7월 14일 화요일(오전 늦게부터 오후 5시 30분경까지 전투)
장소
옛 파리 동쪽 끝의 바스티유 생탕투안 요새(오늘날 바스티유 광장), 프랑스
대립 세력
생탕투안 성외 지구 주민이 많던 무장 파리 군중과 이에 합류한 프랑스 근위대 병사들 대 총독 베르나르르네 주르당 드 로네가 지휘한 상이군인·스위스 병사 소수 수비대
사상자
공격 측 약 98명 사망(부상 후 사망 포함), 약 73명 부상. 수비 측은 전투 중 1명, 항복 뒤 드 로네를 포함한 여러 명이 살해됨
풀려난 죄수
7명: 위조범 4명, 정신 질환자로 수감된 2명, 가족의 요청으로 갇힌 귀족 1명
결과
왕이 군대를 철수하고 파리의 새 시 정부와 국민방위대를 받아들임. 1789년부터 요새 철거
기념
1790년 7월 14일 연맹제. 1880년 법률로 7월 14일을 국경일로 지정

쉬움

1789년 7월 14일에 무슨 일이 있었나

1789년 7월 14일 아침, 수천 명의 파리 시민이 도시 동쪽의 중세 요새 바스티유 앞에 모였다. 대부분은 죄수를 풀어 주려던 것이 아니라 화약과 탄약을 원했다. 전날 파리 시민들은 다른 왕실 건물에서 수만 자루의 소총을 손에 넣었지만 화약이 없으면 소총은 쓸모가 없었다. 그런데 많은 양의 화약이 안전한 보관을 위해 바스티유로 옮겨져 있었다.

군중의 대표들이 요새 안으로 들어가 총독 드 로네 후작과 협상했다. 협상이 길어지는 사이, 몇몇이 경비 초소 지붕에 올라가 바깥 도개교의 쇠사슬을 끊었다. 다리가 떨어지자 군중이 바깥뜰로 밀려들었고 수비대가 발포했다. 몇 시간 동안 총격전이 이어졌다. 공격 측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두꺼운 벽 뒤의 수비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환점은 오후에 왔다. 원래 왕을 지켜야 할 프랑스 근위대 병사들이 시민 편에 서서 대포를 끌고 와 정문을 겨누었다. 수비 병력이 적고 식량과 물도 부족했던 드 로네는 항복에 동의했다. 오후 5시 30분쯤 문이 열리고 군중이 요새를 차지했다.

승리는 폭력으로 끝났다. 드 로네는 시청으로 끌려가던 길에 살해되었고, 잘린 머리가 창끝에 꽂혀 거리를 돌았다. 수비병 몇 명도 목숨을 잃었고, 같은 날 시민을 배신했다는 의심을 받은 파리 상인 대표 자크 드 플레셀도 살해되었다. 이 살육은 당시에도 일부 목격자를 충격에 빠뜨렸으며, 사건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로 남아 있다.

[1][3][6]

쉬움

바스티유는 어떤 곳이었나

바스티유는 백년전쟁 중이던 1370~1380년대에 샤를 5세 때 지어졌다. 파리의 동쪽 관문인 생탕투안 문을 지키는 요새였다. 높이 약 24미터의 둥근 탑 여덟 개가 두꺼운 성벽으로 이어져 있었고 둘레에 해자가 있었다. 도시가 커지며 요새를 둘러싸자 군사적 쓸모는 사라졌다.

17세기부터, 특히 리슐리외 추기경 시대 이후 바스티유는 국사범 감옥이 되었다. 사람들은 ‘봉인장(lettre de cachet)’, 곧 왕이 서명해 재판 없이 투옥을 명하는 봉인된 편지 한 장으로 이곳에 갇혔다. 정부를 비판한 작가, 종교적 이단자, 궁정 추문에 얽힌 사람, 때로는 가족의 요청으로 갇힌 젊은 귀족도 있었다. 젊은 볼테르가 두 차례 이곳에 갇혔고, ‘철가면’으로 알려진 수수께끼의 죄수가 1703년 이곳에서 죽었다.

실제 수감 생활은 전설만큼 끔찍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감옥 기록을 연구한 역사가들에 따르면 루이 16세 시대에는 죄수 수가 적었고 수감 기간도 짧은 편이었으며, 부유한 죄수는 가구와 책을 들여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핵심은 비밀이었다. 밖에서는 누가 왜 갇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 비밀주의가 바스티유를 자의적 권력의 완벽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1789년 무렵에는 왕실도 철거를 검토하고 있었고, 습격 당시 죄수는 일곱 명뿐이었다.

[2][9]

쉬움

파리 시민들은 왜 분노하고 두려워했나

1789년 프랑스는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미국 독립 전쟁 지원을 비롯한 막대한 전쟁 비용 탓에 정부는 파산 직전이었다. 세금 제도도 불공평해서 성직자와 상당수 귀족은 평민보다 훨씬 적게 냈다. 1788년의 흉작과 혹독한 겨울로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인 빵값은 수십 년 만에 가장 높이 치솟았다.

루이 16세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성직자·귀족·평민의 세 ‘신분’ 대표가 모이는 옛 의회인 삼부회를 소집했다. 삼부회는 1614년 이후 처음으로 1789년 5월 베르사유에서 열렸다. 6월에 제3신분 대표들은 스스로를 국민의회라고 선언하고, 6월 20일 헌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코트의 서약’을 했다.

왕은 물러서는 듯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외국인 연대를 포함한 2만 명 이상의 왕실 군대가 파리와 베르사유 일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7월 11일 왕은 인기 높던 재무 총감 자크 네케르를 해임했다. 이 소식이 7월 12일 파리에 전해지자, 많은 사람은 왕이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파리를 짓밟으려 한다고 여겼다.

[1][8]

중급

습격에 이르는 사흘(7월 12~14일)

7월 12일 일요일, 팔레루아얄 정원에 군중이 모였고 젊은 언론인 카미유 데물랭 같은 연설가들이 무기를 들자고 외쳤다. 사람들은 네케르의 흉상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튀일리 정원에서는 랑베스크 공이 이끄는 왕실 기병대가 군중과 충돌했고, 일부 프랑스 근위대 병사가 왕실 군대와 맞서 싸웠다. 밤사이 파리를 둘러싼 성벽의 입시세 징수소 여러 곳이 불탔다. 도시로 들어오는 물건에 세금을 매기던 곳이라 미움을 받던 시설이었다.

7월 13일, 삼부회 파리 대표를 뽑았던 선거인들이 시청(오텔 드 빌)에 상설 위원회를 꾸리고 질서 유지와 도시 방어를 위한 시민 민병대를 만들었다. 생라자르 수도원은 곡식을 노린 약탈을 당했다. 모두가 무기를 찾고 있었다.

7월 14일 아침, 거대한 군중이 군인 요양 시설인 앵발리드로 가서 약 3만 자루의 소총과 대포 몇 문을 손에 넣었다. 근처 샹드마르스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파리 왕실 군 사령관 브장발 남작은 개입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시민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따를지 의심했기 때문이다. 소총은 얻었지만 화약이 없던 군중은 바스티유로 향했다.

바스티유에서 드 로네는 약 80명의 상이군인(야전에 나설 수 없게 된 노병)과 증원된 스위스 척탄병 30여 명을 지휘했다. 오전 중에 시 위원회의 대표단이 여러 차례 요새에 들어갔다. 도개교가 떨어진 뒤 누가 먼저 쏘았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며, 수비대가 일부러 군중을 함정에 끌어들였다는 믿음이 빠르게 퍼졌다. 피에르오귀스탱 윌랭, 자코브 엘리 같은 이들이 이끈 프랑스 근위대가 대포를 가지고 도착하면서 승부가 갈렸다. 드 로네는 화약고를 폭파하겠다고 위협했으나 부하들의 설득으로 항복했다고 전한다.

[1][6][8]

중급

습격한 사람들은 누구였나

바스티유를 점령한 사람들은 무작위 폭도가 아니었다. 사건 뒤 파리시는 국민의회로부터 명예를 받은 ‘바스티유의 승리자(vainqueurs de la Bastille)’ 명단을 만들었다. 역사가 조지 루데는 『프랑스 혁명의 군중』(1959)에서 이 명단을 분석했다. 그 결과 대부분은 목수, 가구 장인, 자물쇠공, 구두장이 같은 숙련 장인과 직인이었고, 상당수가 요새 바로 옆 가구 공방 지구인 생탕투안 성외 지구 출신이었다. 상점 주인, 일부 군인, 소수의 부유한 시민도 섞여 있었다.

루데의 연구가 중요했던 것은 그 이전의 서술이 혁명 군중을 적대적이든 찬양하든 틀에 박힌 모습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한쪽은 범죄자와 부랑자로, 다른 쪽은 추상적인 영웅 ‘인민’으로 그렸다. 사회사가들은 실제로 누가 참여했고 무엇을 원했는지를 밝히려 했다. 그 답은 빵값, 군대에 대한 공포, 동네를 지키려는 마음 같은 구체적 관심사가 ‘국민’과 ‘권리’라는 새로운 정치 언어와 결합했다는 것이었다.

7월 14일 전투에서 여성의 역할은 1789년 10월 베르사유 행진 같은 뒷날의 혁명적 날들보다 작았지만, 여성들도 군중 속에 있었고 소식을 전했으며 부상자를 돌봤다.

[7][1]

중급

즉각적인 결과: 왕이 물러서다

군사적으로 바스티유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그 함락은 결정적이었다. 왕은 군대로 파리를 되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7월 15일 그는 국민의회에 나와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잘 알려진 일화에 따르면 라로슈푸코리앙쿠르 공작이 소식을 전하자 루이가 “반란인가?” 하고 물었고, 공작은 “아닙니다, 전하. 혁명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뒷날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라 정확한 표현은 믿기 어렵지만, 당대인들이 변화를 얼마나 빨리 알아차렸는지 잘 보여 준다.

파리에는 새 정부가 들어섰다. 천문학자 장실뱅 바이이가 시장이 되었고,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 라파예트 후작이 새로 만든 국민방위대 사령관을 맡았다. 네케르는 복직되었다. 7월 17일 왕은 파리를 방문해 파리시의 색인 빨강과 파랑의 모표를 받았다. 뒤에 왕실의 흰색이 더해져 삼색기가 되었다.

소식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다. 많은 도시에서 비슷한 ‘시정 혁명’이 일어나 옛 관리들이 물러났다. 농촌에서는 귀족의 음모와 도적 떼에 관한 소문이 ‘대공포’라 불리는 공황을 낳았고, 농민들은 영주의 저택을 습격해 봉건 부과조 문서를 불태웠다. 농촌을 진정시키려고 국민의회는 1789년 8월 4일 밤 봉건적 특권의 상당 부분을 폐지했고,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했다. 왕의 동생들과 주요 궁정 귀족 일부가 국외로 떠나면서 귀족 망명이 시작되었다.

[1][4][3]

중급

허물고, 상징으로 만들다

철거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건축업자 피에르프랑수아 팔루아가 수백 명의 일꾼을 동원해 공사를 맡았고, 몇 달 만에 요새는 거의 사라졌다. 팔루아는 뛰어난 선전가이기도 했다. 그는 요새의 돌로 바스티유 축소 모형을 깎아 프랑스 각 도(道)에 보냈고, 돌과 쇠로 만든 메달·잉크병 같은 기념품을 팔았다. 요새는 들고 다닐 수 있는 ‘자유의 유물’이 되어 가정과 시청에 전시되었다.

라파예트는 1790년 바스티유의 정문 열쇠를 조지 워싱턴에게 보내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연대를 표시했다. 이 열쇠는 지금도 버지니아주 마운트버넌에 걸려 있다. 팸플릿과 판화, 연극은 지하 감방의 해골과 고문 도구를 묘사했는데 상당 부분은 지어내거나 과장한 것이었다. 시몽니콜라앙리 랭게의 『바스티유 회고록』(1783)이나 유명한 탈옥수 라튀드의 이야기 같은 옛 수감기도 다시 찍혀 널리 읽혔다.

첫 돌인 1790년 7월 14일, 연맹제가 열려 프랑스 전역의 국민방위대가 파리 샹드마르스에 모였고 왕도 참석한 가운데 단결을 맹세했다. 거의 백 년 뒤 제3공화국은 1880년 법률로 7월 14일을 국경일로 정했다. 이 선택은 일부러 넉넉하게 해석할 여지를 남긴 것이었다. 공화파는 1789년의 습격을, 온건파는 1790년의 평화로운 국민 화합 축제를 기념할 수 있었다.

요새 자리는 바스티유 광장이 되었다. 한가운데 선 7월 기념탑은 사실 다른 혁명, 곧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한다. 바닥의 포석 줄이 옛 요새 윤곽 일부를 표시하고, 지하철 공사 때 기초 일부가 드러나기도 했다. 혁명 200주년인 1989년에는 근처에 오페라 바스티유가 문을 열었다.

[1][2][5][9]

중급

세계의 반응

프랑스 밖에서 이 소식은 열광과 경계를 거의 같은 크기로 불러일으켰다. 영국의 휘그 정치가 찰스 제임스 폭스는 이것이 세상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좋은 사건이라고 썼다. 반면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에서 전통을 공격하는 혁명이 무질서와 폭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토머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1791)가 버크를 반박했고, 이 논쟁은 근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상을 빚어내는 데 한몫했다.

독일 지역에서는 클롭슈토크 같은 작가들이 처음에 혁명을 반겼고, 튀빙겐의 학생이던 젊은 헤겔과 셸링도 혁명을 축하했다고 전한다. 이런 초기 지지자 상당수는 1793~1794년의 공포정치를 거치며 환멸을 느꼈다. 아메리카에서는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까지 번져, 자유 유색인과 1791년 이후에는 노예가 된 사람들까지 혁명의 약속을 자기 것으로 요구했다.

1830년과 1848년의 유럽에서 20세기의 반식민 운동에 이르기까지, 후대의 혁명가들에게 ‘바스티유 습격’은 불의한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흔한 비유가 되었다. 동시에 보수적 전통은 7월 14일을 뒤따른 폭력 중심으로 기억해 왔고, 이날은 한 번도 논쟁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1][9]

심화

사료, 그리고 건국 신화의 형성

7월 14일의 사건은 유난히 풍부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시청 파리 선거인 회의록, 왕실 관리와 장교의 보고, ‘승리자’로 인정받으려던 참가자들의 진술, 살아남은 바스티유 문서, 신문과 수많은 회고록이 있다. 군중이 흩뜨린 바스티유 문서는 일부가 회수되어 지금은 대부분 파리 아르스날 도서관에 있다. 그러나 이 자료의 상당수는 사건 뒤에, 그리고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다. 참가자는 보상을, 수비 측은 명예 회복을, 언론인은 여론 형성을 원했다. 그래서 누가 먼저 쏘았는지, 드 로네가 협상단에게 발포할 뜻이 있었는지, 몇 명이 모였는지 같은 세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자크 고드쇼의 『바스티유 점령』(1965)은 그날을 자세히 재구성하고 1789년의 더 넓은 위기 속에 자리매김했다. 혁명 200주년에 나온 사이먼 샤마의 『시민들』(1989)은 처음부터 군중의 폭력을 강조하는 생생한 서사를 제시했는데, 이는 혁명을 주로 계급 갈등으로 설명하던 방식에서 벗어나는 더 넓은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스위르겐 뤼제브링크와 롤프 라이하르트는 『바스티유: 전제와 자유의 상징의 역사』(영역본 1997)에서 요새를 건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로 연구했다. 그들은 1789년 훨씬 전부터 수감 회고록과 팸플릿이 바스티유를 ‘전제정’의 압축된 기호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 함락이 곧바로 전제정 자체의 몰락으로 읽힐 수 있었다고 보았다. 1789년 이후에는 판화, 노래, 연극, 물건이 그 의미를 되풀이하며 퍼뜨렸다. 이 관점에서 사건의 상징적 힘은 우연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정치적 소통의 결과였다.

이런 연구가 사건이 사소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군사적으로 작은 일화가 어떻게 근대 프랑스의 건국일이 되었는지 설명해 준다. 군중이 얼마나 자발적으로 움직였고 선거인 같은 조직된 집단이 얼마나 이끌었는지, 인민 주권의 승리라는 의미와 그에 따른 폭력을 어떻게 저울질할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거리다.

[6][8][9][1]

심화

해석의 흐름: 계급 혁명, 정치 문화, 기억

20세기 대부분 동안 주류 해석은 조르주 르페브르, 알베르 소불 같은 역사가와 연결된 것으로, 1789년을 떠오르는 부르주아지가 도시 노동자와 농민의 지지를 받아 봉건 질서를 무너뜨린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았다. 이 해석에서 7월 14일은 파리 민중 계급이 혁명에 뛰어들어 왕실의 탄압으로부터 국민의회를 구한 순간이다.

1950년대부터 앨프리드 코번, 뒤이어 프랑수아 퓌레 같은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이 사회적 해석에 도전했다. 그들은 혁명의 전개를 뚜렷한 계급 이익보다 정치, 이데올로기, 인민 주권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퓌레는 공포정치로 이어지는 혁명의 논리가 처음부터 있었다고 보았는데, 비판자들은 이 접근이 전쟁, 반혁명, 굶주림이라는 실제 압력을 가볍게 본다고 반박했다.

1980년대 이후 피에르 노라가 이끈 공동 연구 『기억의 장소』를 비롯한 정치 문화·기억 연구는 7월 14일이 시대마다 어떻게 새로 만들어졌는지를 살폈다. 혁명 축제였다가 왕정복고기에 억눌렸고, 제3공화국이 되살려 군대 행진으로 바꾸었으며, 1989년 200주년에 다시 해석되었다. 프랑스 안에서도 정치 세력마다 이날을 다르게 기억하고, 프랑스 밖에서는 자유의 축제로 보기도 하고 혁명적 폭력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시각들을 나란히 놓고 보는 것 자체가 이 사건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다.

[8][7][9]

핵심 개념

자의적 권력
정해진 법이나 법원의 제약 없이 행사되는 권력. 재판 없이 투옥할 수 있게 한 봉인장 때문에 바스티유는 이런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인민 주권
정치권력이 혈통이나 신권을 가진 왕이 아니라 인민·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생각. 바스티유 습격은 이 원칙에 따라 인민이 행동한 사건으로 기념되었다.
민중 행동
보통 사람들이 거리에서 직접 벌이는 행동. 7월 14일의 민중 행동은 우려되던 왕실의 탄압에서 국민의회를 지켜 내고 힘의 균형을 바꾸었다.
혁명적 폭력
항복 뒤 드 로네 등이 살해된 일은 혁명 첫날부터 혁명이 폭력과 복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정치적 상징
더 큰 생각을 대신하는 건물이나 사건. 바스티유의 가치는 군사적이기보다 상징적이었으며, 그 함락은 전제정의 몰락으로 읽혔다.
집단 기억
사회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 7월 14일의 의미는 1790년, 1880년, 1989년의 축제·법률·논쟁을 거치며 거듭 다시 만들어졌다.

기록

  1. 약 1370년 — 샤를 5세 때 파리 동쪽 관문을 지키려고 바스티유 건설을 시작하다.
  2. 1703년 — ‘철가면’으로 알려진 신원 미상의 죄수가 바스티유에서 죽다.
  3. 1783년 — 랭게가 감옥을 고발한 『바스티유 회고록』을 펴내 널리 읽히다.
  4. 1789년 —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삼부회 개회. 6월 17~20일 국민의회 선언과 테니스코트의 서약.
  5. 1789년 — 7월 11~13일 네케르 해임. 파리 봉기, 입시세 징수소 방화, 시민 민병대 결성.
  6. 1789년 — 7월 14일 앵발리드에서 소총 탈취, 바스티유 습격과 점령. 드 로네와 플레셀 피살.
  7. 1789년 — 7월 15~17일 왕의 군대 철수, 바이이 시장 취임, 라파예트 국민방위대 사령관 취임, 루이 16세 파리 방문.
  8. 1789년 — 8월 4일 봉건적 특권 폐지,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채택.
  9. 1790년 — 7월 14일 첫 돌을 기념하는 연맹제. 라파예트가 바스티유 열쇠를 조지 워싱턴에게 보내다.
  10. 1840년 —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는 7월 기념탑이 바스티유 광장에 세워지다.
  11. 1880년 — 법률로 7월 14일을 프랑스 국경일로 정하다.
  12. 1989년 — 혁명 200주년 기념. 오페라 바스티유 개관.

용어 풀이

바스티유
파리의 중세 요새. 17세기부터 왕실의 국사범 감옥으로 쓰였고 1789년 7월 14일 이후 철거되었다.
봉인장(lettre de cachet)
왕이 서명해 재판 없이 특정인의 투옥이나 추방을 명한 봉인된 편지.
삼부회
성직자(제1신분), 귀족(제2신분), 평민(제3신분)의 대표 회의. 1789년 1614년 이후 처음으로 소집되었다.
국민의회
1789년 6월 제3신분 대표들이(뒤에 다른 신분 일부도 합류) 전체 국민을 대표한다고 선언하며 만든 의회.
프랑스 근위대
파리에 주둔한 왕실 근위 보병 연대. 1789년 7월 많은 병사가 군중 편에 섰다.
앵발리드
상이군인·퇴역 군인, 또는 이들을 위한 파리의 군인 요양 시설. 7월 14일 이곳에서 소총을 탈취했다.
생탕투안 성외 지구
바스티유 동쪽의 장인 거주 지역. 습격자 상당수가 이곳 출신이었다.
바스티유의 승리자
습격에 참가했다고 사후에 공식 인정받은 사람들.
대공포
1789년 7월 말~8월 초 프랑스 농촌을 휩쓴 소문과 공황. 영주 저택 습격으로 이어졌다.
연맹제
1790년 7월 14일 파리 샹드마르스에서 열린 국민 화합 축제.

묻고 답하기

사람들이 죄수를 많이 풀어 주었나요?

아니에요. 안에는 죄수가 일곱 명뿐이었어요. 사람들은 주로 요새에 있던 화약을 원했어요. 죄수 해방 이야기는 나중에 사람들이 그날을 이야기하면서 더 중요해졌어요.

왜 7월 14일을 ‘바스티유의 날’이라고 하나요?

프랑스에서는 그냥 ‘국경일’ 또는 ‘7월 14일’이라고 불러요. ‘바스티유의 날’이라는 영어식 이름은 1789년 습격에서 왔지만, 1880년 법은 1790년의 화합 축제도 염두에 두었어요.

다친 사람이 있었나요?

네. 공격한 사람 가운데 100명 가까이 죽고 더 많은 사람이 다쳤어요. 항복한 뒤에는 총독 드 로네와 수비병 몇 명이 군중에게 살해되었어요.

바스티유는 정말 고문하는 곳이었나요?

전설만큼은 아니었어요. 1780년대에는 죄수가 적었고, 부유한 죄수는 꽤 편안하게 지냈어요. 사람들이 미워한 것은 재판 없는 투옥과 그것을 둘러싼 비밀이었어요.

바스티유 습격이 프랑스 혁명을 시작했나요?

정확히는 아닙니다. 정치 혁명은 1789년 5~6월 베르사유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7월 14일은 파리 민중이 무력으로 새 의회를 지킬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왕을 물러서게 만들었습니다.

7월 14일의 수치와 세부 사항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사상자와 죄수 수는 곧바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믿을 만합니다. 그러나 많은 증언이 보상을 원하거나 자신을 변호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나왔으므로, 누가 먼저 쏘았는지 같은 점은 여전히 논란입니다.

역사가들의 해석은 어떻게 바뀌어 왔나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부르주아 혁명에 민중 계급이 등장한 순간으로 보았고, 수정주의자들은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강조했습니다. 최근 연구는 바스티유가 상징이 된 과정과 7월 14일이 기억되어 온 방식을 탐구합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Storming of the Bastille. Wikipedia
  2. Bastille. Wikipedia
  3. 바스티유 습격. 위키백과
  4.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 Wikipedia
  5. Bastille Day. Wikipedia
  6. Jacques Godechot, La prise de la Bastille, 14 juillet 1789. Gallimard, 1965
  7. George Rudé, The Crowd in the French Revolution. Clarendon Press, 1959
  8. Simon Schama, Citizens: A Chronicle of the French Revolution. Alfred A. Knopf, 1989
  9. Hans-Jürgen Lüsebrink, Rolf Reichardt, The Bastille: A History of a Symbol of Despotism and Freedom. Duke University Press, 1997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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