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볼테르는 1694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어요. 진짜 이름은 프랑수아마리 아루에였지만, 젊었을 때 ‘볼테르’라는 새 이름을 스스로 지었고, 온 세상은 그 이름으로 그를 기억해요.
볼테르는 아주 똑똑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어요. 잔인하거나 어리석은 권력자들을 놀리는 걸 좋아했지요. 그 때문에 곤란한 일도 많았어요. 파리의 유명한 감옥 바스티유에 두 번이나 갇혔고,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가야 했어요. 나중에는 경찰이 잡으러 오면 재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스위스 국경 가까이에서 살았어요.
영국에서 그는 새로운 생각들을 만났어요. 특히 중력과 빛에 관한 아이작 뉴턴의 발견, 그리고 종교의 자유였지요.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이런 생각을 프랑스 사람들에게 알리는 책을 썼어요. 뛰어난 과학자였던 친구 에밀리 뒤 샤틀레와 함께 물리학과 수학도 공부했어요.
그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캉디드』예요. 우리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에 산다고 배운 젊은이가 전쟁, 지진, 배가 부서지는 사고 같은 불행을 잇따라 겪는 이야기지요. 웃기면서도 슬픈 이 이야기는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한다”는 말로 끝나요. 꿈만 꾸지 말고 쓸모 있는 일을 하자는 뜻이에요.
볼테르가 나이가 들었을 때, 장 칼라스라는 개신교도가 자기 종교에 대한 편견 때문에, 거의 틀림없이 저지르지 않은 죄로 고문당하고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볼테르는 판결이 뒤집힐 때까지 쓰고 또 썼어요. 그는 공정함과 관용, 자유로운 생각을 믿는 사람들의 영웅이 되었답니다.
한눈에 보기
- 생애
- 1694년 11월 21일 파리 ~ 1778년 5월 30일 파리
- 본명
-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1718년부터 ‘볼테르’라는 이름을 씀
- 주요 거처
- 파리, 영국(1726~1728), 샹파뉴의 시레(1734~1749), 프로이센 포츠담(1750~1753), 제네바의 레 델리스(1755~), 제네바 근처 페르네(1759~)
- 장르
- 비극, 서사시·풍자시, 철학 콩트, 역사서, 에세이, 논쟁 팸플릿, 편지
- 주요 저작
- 『철학 서간』(1733~34), 『뉴턴 철학의 요소』(1738), 『루이 14세의 시대』(1751), 『캉디드』(1759), 『관용론』(1763), 『철학 사전』(1764)
- 주장
- 종교적 관용, 표현의 자유, 형사 사법 개혁, 뉴턴 과학, 이신론
- 저작 규모
- 2만 통이 넘는 편지와 약 2,000종의 책·팸플릿
- 안장
- 처음에는 셀리에르 수도원. 1791년 파리 팡테옹으로 이장
쉬움
볼테르는 누구인가
볼테르(1694~1778)는 프랑스 계몽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다. 계몽주의는 이성과 증거로 전통·종교·권위를 따져 보자고 한 18세기의 사상 운동이다. 생전에 그는 무엇보다 시인이자 극작가로 찬사를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주로 『캉디드』 같은 철학 콩트와 불관용에 맞선 활동으로 기억된다.
볼테르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처럼 체계를 세운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재치와 풍자를 무기로 삼은 비평가이자 대중 전달자, 공적 활동가였다. 아이작 뉴턴의 과학과 존 로크의 철학을 프랑스에 퍼뜨리고, 가톨릭교회의 권력을 공격했으며, 종교 박해와 잔혹한 재판의 희생자들을 변호했다. 그러면서 넓은 대중에게 말을 걸어 사회를 바꾸려는 공적 지식인이라는, 철학자의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냈다.
말년에 그가 내건 구호는 “파렴치한 것을 쳐부수자(Écrasez l’infâme)!”였다. 여기서 ‘파렴치한 것’은 종교적 광신과 그것이 낳는 박해를 가리킨다. 그는 창조주 신을 믿었지만(이신론), 계시 종교와 기적, 교회의 권위는 거부했다.
쉬움
젊은 시인과 바스티유
프랑수아마리 아루에는 1694년 11월 21일 공증인이자 관리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예수회가 운영하는 루이르그랑 학교에서 뛰어난 고전 교육을 받았고, 귀족 자제들과 친구가 되었다. 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는 날카롭고 재치 있는 시로 곧 파리 사교계에 이름을 알렸다. 섭정 오를레앙 공을 풍자한 시를 썼다는 혐의로 1717년 5월부터 1718년 4월까지 바스티유에 갇혔다. 풀려난 1718년 그는 ‘볼테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같은 해 비극 『오이디푸스』가 파리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름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흔한 설명은 라틴 대문자로 쓴 ‘AROUET L. J.(le jeune, 아들 쪽)’의 철자를 바꾼 것이라는 설이고, 집안과 관련된 지명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1726년 그는 귀족 로앙 기사와 다투었는데, 로앙은 하인들을 시켜 그를 때렸다. 볼테르가 결투로 명예를 되찾으려 하자 오히려 그가 다시 바스티유에 갇혔고, 영국으로 떠난다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 일로 그는 평민이 태생의 특권 앞에서 법의 보호를 얼마나 받지 못하는지 뼈저리게 배웠다.
쉬움
영국과 『철학 서간』
볼테르는 1726년부터 1728년까지 영국에서 살았다. 영어를 배우고, 조너선 스위프트, 알렉산더 포프 같은 작가와 정치가 볼링브로크 경을 만났으며, 1727년 아이작 뉴턴의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그는 영국의 자유라고 여긴 것들, 곧 의회의 힘, 비교적 자유로운 출판, 여러 종교 집단의 공존, 과학자와 상인이 받는 존경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결과가 1733년 런던에서 영어로 『영국 국민에 관한 편지』로, 1734년 프랑스어로 『철학 서간』으로 나온 책이다. 짧고 생기 있는 장들에서 그는 퀘이커교도와 종교적 관용, 영국의 정치와 상업, 베이컨·로크·뉴턴, 셰익스피어를 칭찬했다. 프랑스와의 비교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프랑스 당국은 이 책을 단죄했고, 파리 고등법원의 명령으로 책이 불태워졌으며, 볼테르에게는 체포 영장이 내려졌다. 그는 독립국 로렌 공국 국경에 가까운 샹파뉴의 시레 성으로 몸을 피했다.
중급
시레와 에밀리 뒤 샤틀레: 과학과 철학
볼테르는 약 15년 동안(1734~1749)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밀리 뒤 샤틀레와 함께 그녀 남편 소유의 시레 성에서 살았다. 두 사람은 성을 도서관과 과학 기구를 갖춘 연구소로 바꾸었다. 뉴턴과 성경과 역사를 공부하고, 실험을 하고, 불의 본성에 관한 과학 아카데미의 현상 공모에 응모하기도 했다.
1738년 볼테르는 『뉴턴 철학의 요소』를 펴내, 여전히 데카르트 물리학에 기울어 있던 프랑스 독자들에게 뉴턴의 광학과 중력 이론을 설명했다. 수학적 재능이 볼테르보다 뛰어났던 뒤 샤틀레는 뒤에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옮기고 해설을 붙였으며, 이 번역은 그녀가 죽은 뒤 출간되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시레에서의 작업을 예전 서술처럼 ‘유명한 남자와 그 연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진정한 지적 협업으로 본다.
이 시기 내내 볼테르는 무엇보다 연극인이었다. 종교전쟁을 끝낸 관용의 군주 앙리 4세를 기린 서사시 『앙리아드』는 1720년대부터 읽혔고, 『자이르』(1732), 『마호메트』(1741) 같은 비극은 18세기 최고의 흥행작에 들었다. 이슬람의 예언자를 광신적인 사기꾼으로 그린 『마호메트』는 사실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광신 일반을 겨냥한 작품이었지만, 이슬람에 대한 적대적 풍자라는 비판도 받는다. 이슬람과 그 창시자에 관한 볼테르의 후기 저술은 더 다양하며 때로는 찬탄을 담고 있다.
볼테르는 잔 다르크를 다룬 희극적 서사시 『오를레앙의 처녀』와 『자디그』(1747) 같은 첫 철학 콩트들도 썼다. 1740년대에는 한동안 궁정의 호의를 되찾아 왕실 사료 편찬관이 되었고, 174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뽑혔다. 뒤 샤틀레는 1749년 출산 뒤에 세상을 떠났다.
중급
프로이센, 제네바, 페르네
1750년 볼테르는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포츠담과 베를린의 궁정에서 살았다. 철학자와 ‘철인 왕’의 우정은 특히 볼테르가 베를린 아카데미 원장 모페르튀이를 조롱한 뒤 틀어졌다. 그는 1753년 프로이센을 떠났는데,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리드리히의 부하들에게 몇 주 동안 붙잡혀 있기도 했다.
파리에서 환영받지 못한 볼테르는 1755년 제네바 근처의 저택 레 델리스를 샀다. 하지만 그가 연극 공연을 벌이자 엄격한 칼뱅파 제네바 당국과 충돌했다. 1758~59년 그는 국경 바로 건너 프랑스 쪽의 페르네 영지를 사들였다. 프랑스 당국이 위협하면 스위스로, 스위스 쪽이 위협하면 프랑스로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거의 20년을 산 페르네에서 ‘페르네의 족장’은 유럽 곳곳에서 온 방문객을 맞고, 집과 교회, 시계 제조 등의 공방을 지어 마을을 일으켰으며, 방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관용과 정의를 위한 그의 싸움은 여기서 펼쳐졌다.
중급
『캉디드』와 악의 문제
1755년 11월 1일, 지진과 해일과 화재가 리스본의 상당 부분을 파괴하고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이 재난은 라이프니츠와 알렉산더 포프와 연결된 ‘낙관주의’, 곧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이며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는 견해에 대한 유럽의 믿음을 뒤흔들었다. 볼테르는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1756)에서 희생자들에게 그들의 고통이 최선을 위한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루소는 섭리를 옹호하는 편지로 응답했다.
볼테르의 대답은 1759년 초 익명으로 나온 『캉디드 또는 낙관주의』였다. 철학자 팡글로스에게서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배운 순진한 주인공은 성에서 쫓겨나고,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고, 리스본 지진에서 살아남고, 종교재판소의 화형식(아우토다페)을 목격하고, 남아메리카와 이상향 엘도라도를 여행하며, 노예와 사기꾼과 왕들을 만난다. 빠르고 무표정한 서술 덕분에 끔찍한 일들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책은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작은 농장에서 끝나고, 인물들은 일 속에서 어느 정도의 만족을 찾는다. 캉디드의 마지막 말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한다(il faut cultiver notre jardin)”는 여러 방식으로 읽혀 왔다. 형이상학적 사변 대신 실용적이고 소박한 노력을 하라는 권유로, 현실에서 물러나는 정적주의로, 노동으로 세상을 개선하자는 강령으로 읽힌다. 『캉디드』는 곧바로 단죄되고 금지되었지만 18세기에 가장 널리 읽힌 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중급
칼라스 사건과 불관용에 맞선 싸움
1761년 10월 툴루즈에서 개신교도 직물 상인 장 칼라스의 아들 마르크앙투안이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아버지가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못하게 하려고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증거는 자살을 강하게 시사했지만 툴루즈 고등법원은 장 칼라스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1762년 3월 10일 그는 고문 끝에 수레바퀴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볼테르는 사건을 조사해 칼라스가 결백하며 반개신교 편견의 희생자라고 확신했고, 편지와 팸플릿, 유럽 곳곳의 유력자들에 대한 호소로 운동을 벌였다. 1763년 그는 이 사건을 예로 들어 종교적 신념 때문에 박해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잔인하며 사회에 해롭다고 논한 『관용론』을 펴냈다. 1764년 국왕 참사회가 판결을 무효로 했고, 1765년 칼라스는 공식적으로 복권되었으며 가족은 배상을 받았다.
볼테르는 다른 사건들도 맡았다. 딸을 죽였다는 누명을 쓴 개신교도 시르방 가족 사건, 그리고 신성모독 혐의로 1766년 처형된 젊은 라 바르 기사 사건이 그것이다. 라 바르의 시신은 볼테르의 『철학 사전』 한 권과 함께 불태워졌다. 이런 활동은 여론을 프랑스 정치의 한 세력으로 만들었고, 훗날 형사 절차 개혁과 사법 고문 폐지에 이바지했다.
중급
사상: 이신론, 경험론, 자유, 역사
종교. 볼테르는 이신론자였다. 그는 자연의 질서가 우주의 ‘시계공’인 최고 존재를 보여 주며, 도덕은 보편적이고 자연적이라고 믿었다. 계시, 기적, 그리스도의 신성, 교회의 권위는 거부했다. 한편 상벌을 내리는 신에 대한 믿음은 사회적으로 쓸모 있다고 보았다. “신이 없다면 신을 발명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이 자주 인용된다. 그가 무엇보다 공격한 것은 전쟁·학살·박해의 원인이라고 본 광신과 성직자 권력이었다.
지식. 로크와 뉴턴을 따라 그는 지식이 경험과 관찰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거창한 형이상학 체계를 의심했다. 짧고 흔히 반어적인 항목을 알파벳순으로 모은 휴대용 『철학 사전』(1764)은 이런 회의적 정신을 신학·성경·철학에 들이댔다.
정치. 볼테르는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계몽 군주를 통한 개혁을 기대했고, 편지를 주고받은 프리드리히 2세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처럼 이성과 관용을 장려하는 강력한 군주를 높이 샀다. 시민적 자유, 출판의 자유, 법 앞의 평등, 재산권을 옹호했으며, 고등법원과 성직자의 특권을 억제하려는 왕정의 시도를 지지했다.
역사. 『루이 14세의 시대』(1751)와 『여러 민족의 풍속과 정신에 관한 시론』(1756) 같은 저작에서 볼테르는 왕과 전투만이 아니라 중국·인도·이슬람 세계까지 아우르는 문명의 역사를 쓰려 했고, 역사를 세속적이고 비판적인 탐구로 다루었다. ‘역사철학’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으로도 자주 꼽힌다.
중급
죽음, 팡테옹, 유산
1778년 2월, 여든셋의 볼테르는 자신의 비극 『이렌』 공연을 보려고 거의 30년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한 공연에서는 무대 위에서 그의 흉상에 월계관이 씌워졌다. 그는 1778년 5월 30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회가 인정할 만한 고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리에서 그리스도교식 장례를 거부당하자, 조카가 샹파뉴의 셀리에르 수도원에 몰래 묻었다.
프랑스 혁명기에 볼테르는 자유의 선구자로 추앙되었다. 1791년 7월 11일 그의 유해는 성대한 행렬 속에 위인들을 위한 새 국가 성소 팡테옹으로 옮겨졌다. 그의 전집은 보마르셰가 주도한 호화로운 켈판(1784~1789)으로 출간되었다.
볼테르의 이름은 사랑받든 미움받든 계몽주의 그 자체, 곧 반교권주의, 사상의 자유, 풍자, 인권의 상징이 되었다. 후대의 자유주의자·공화주의자·세속주의자는 그를 내세웠고, 보수주의자와 가톨릭 작가들은 신앙과 질서를 무너뜨렸다고 그를 탓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권리는 목숨 걸고 지키겠다”는 유명한 말은 볼테르가 쓴 것이 아니다. 영국 작가 이블린 비어트리스 홀이 1906년 그의 태도를 요약하려고 지어낸 문장이다.
심화
한계와 모순: 유대인, 인종, 노예제, 계급
오늘날 독자는 볼테르 글 속의 편견과 마주해야 한다. 그의 많은 저작에는 유대인과 고대 유대교에 대한 적대적이고 경멸적인 언급이 들어 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아서 허츠버그는 『프랑스 계몽주의와 유대인』(1968)에서 볼테르가 오래된 반유대 편견에 세속적이고 근대적인 형태를 입혔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히브리 성경에 대한 공격이 그리스도교의 토대를 겨냥한 것이었다고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그의 언어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볼테르는 종교재판소의 유대인 박해를 규탄하기도 했다.
볼테르는 인종들이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다는 다원발생설을 지지했고, 아프리카인과 다른 민족들을 깎아내리는 글을 썼다. 이런 견해는 훗날 과학적 인종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캉디드』에는 주인에게 손발을 잘린 수리남의 노예가 “당신들이 유럽에서 설탕을 먹는 것은 이런 대가를 치르고서다”라고 말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는데, 18세기 문학에서 가장 강렬한 노예제 고발 가운데 하나다. 볼테르가 노예무역에 직접 투자했다는 주장은 분명한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지만, 당대의 많은 부자처럼 그도 식민지·상업 사업에 투자했다.
사회관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투자와 귀족에 대한 대부로 큰 부를 쌓았고, 민중에게 계몽을 퍼뜨리는 데 회의적이어서 그들을 ‘천민(la canaille)’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를 조너선 이스라엘의 주장처럼 스피노자 계승자들의 더 민주적인 ‘급진 계몽주의’와 대비되는 엘리트적 ‘온건 계몽주의’의 대표자로 볼 수 있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이 논쟁한다.
심화
사료와 연구
철학자로서의 볼테르. 체계적인 논저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볼테르를 사상가라기보다 뛰어난 대중 전달자로 다루었다. 최근 연구는, 예컨대 J. B. 섕크가 쓴 스탠퍼드 철학 백과 항목에서 보듯, 그의 의의가 철학을 ‘실천한 방식’에 있다고 본다. 문학과 과학과 사회 활동을 녹여 붙임으로써 공적 비평가로서의 ‘필로조프’라는 모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편지와 판본. 그의 생애를 알려 주는 가장 풍부한 자료는 방대한 편지다. 시어도어 베스터먼이 이를 결정판으로 편집했고, 베스터먼은 훗날 옥스퍼드 대학의 볼테르 재단이 되는 기관을 세웠다. 이 재단은 전집 비판 정본을 펴냈다. 볼테르는 익명이나 가명, 가짜 출판지로 책을 내는 일이 많았고 필요하면 자기 작품을 부인했기 때문에, 저자 판정과 연대 결정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수용사. 볼테르의 명성 상당 부분은 사후에 만들어졌다. 켈판 전집, 그를 팡테옹에 안치한 혁명가들, 그를 반교권 공화주의의 깃발로 삼은 19세기의 정치 투쟁이 그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런 상징으로서의 볼테르와, 흔히 신중하고 전략적이며 모순된 태도를 보인 18세기의 작가를 구별한다. 뒤 샤틀레와의 협업, 출판업자와 편지 상대들의 역할, 그의 저작을 퍼뜨린 연결망은 모두 활발한 연구 분야다.
핵심 개념
- 파렴치한 것을 쳐부수자
- 종교적 광신, 미신, 박해에 맞선 볼테르의 구호.
- 관용
- 사람을 신념 때문에 박해해서는 안 된다. 불관용은 비이성적이고 잔인하며 사회에 해롭다.
- 이신론
- 계시·기적·교회 권위 없이, 이성과 자연을 통해 알 수 있는 창조주 신에 대한 믿음.
- 뉴턴식 경험론
- 지식은 사변적 형이상학 체계가 아니라 관찰과 실험에서 나온다.
- 낙관주의 비판
- 『캉디드』는 실제 고통 앞에서 이 세계가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주장을 조롱한다.
- 우리의 밭을 가꾸자
- 『캉디드』의 마지막 권고. 헛된 사변 대신 실용적이고 쓸모 있는 일을 하자.
- 공적 비평가로서의 철학자
- 볼테르는 철학자를 재치와 여론으로 사회를 바꾸는 공적 인물로 만들었다.
기록
- 1694년 — 11월 21일 프랑수아마리 아루에가 파리에서 태어난다.
- 1718년 — 1717년 5월부터 갇혀 있던 바스티유에서 풀려나 ‘볼테르’라는 이름을 쓰고, 비극 『오이디푸스』로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 1726년 — 로앙 기사와의 다툼 뒤 잠시 투옥되었다가 영국으로 건너간다.
- 1734년 — 『철학 서간』이 단죄되어 불태워지고, 에밀리 뒤 샤틀레와 함께 시레로 옮긴다.
- 1750년 —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으로 간다(1753년까지).
- 1755년 — 제네바 근처 레 델리스에 정착한다.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이 일어난다.
- 1759년 — 『캉디드』가 나오고, 볼테르가 페르네로 옮긴다.
- 1762년 — 3월 10일 장 칼라스가 툴루즈에서 처형되고, 볼테르가 운동을 시작한다.
- 1763년 — 『관용론』을 펴낸다.
- 1765년 — 장 칼라스가 공식적으로 복권된다.
- 1778년 — 파리로 개선하듯 돌아왔다가 5월 30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다.
- 1791년 — 7월 11일 유해가 팡테옹으로 옮겨진다.
용어 풀이
- 계몽주의
- 이성, 과학, 관용, 전통적 권위에 대한 비판을 강조한 18세기 유럽의 사상 운동.
- 필로조프
- 사회·종교·정치에 비판적 이성을 적용한 18세기 프랑스의 문필가.
- 이신론
- 세계를 창조했지만 기적이나 계시로 개입하지 않는 신을 믿는 입장.
- 바스티유
- 왕의 명령으로 가둔 죄수들을 수용한 파리의 왕립 요새 감옥. 1789년 습격당했다.
- 고등법원(파르르망)
- 혁명 전 프랑스의 최고 사법 기관. 파리 고등법원, 툴루즈 고등법원 등.
- 낙관주의(철학)
- 라이프니츠와 연결되는,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이라는 학설.
- 철학 콩트
- 사상을 전하는 짧은 풍자 이야기. 『캉디드』, 『자디그』 등.
- 아우토다페
- 종교재판소가 판결을 공개적으로 선고하던 의식. 처형이 뒤따르기도 했다.
- 다원발생설
- 인종들이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다는, 오늘날 폐기된 이론.
- 팡테옹
- 1791년 프랑스 위인들의 묘소로 바뀐 파리의 옛 성당.
묻고 답하기
왜 ‘볼테르’라고 불렀나요?
1718년부터 이 이름을 썼어요. 정확한 이유는 몰라요. 성 ‘아루에’에 ‘아들 쪽’을 뜻하는 ‘l. j.’를 붙인 글자의 순서를 바꾼 것이라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어요.
『캉디드』는 어떤 이야기인가요?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배운 순진한 젊은이가 세계 곳곳에서 전쟁, 재난, 잔인함을 겪고, 마침내 쓸모 있는 일을 하며 ‘우리의 밭을 가꾸자’는 깨달음에 이르는 이야기예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말을 할 권리는 목숨 걸고 지키겠다”는 볼테르가 한 말인가요?
아니에요. 1906년 이블린 비어트리스 홀이 그의 태도를 요약하려고 쓴 문장이에요. 다만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그의 태도를 잘 보여 주기는 해요.
볼테르는 무신론자였나요?
아니요. 창조주 신을 믿되 계시 종교와 교회의 권위를 거부한 이신론자였어요. 그는 광신뿐 아니라 무신론도 비판했어요.
칼라스 사건은 무엇인가요?
툴루즈의 개신교도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1762년 처형된 사건이에요. 볼테르의 운동으로 1765년 사후 복권되었고, 종교적 불관용의 상징이 되었어요.
오늘날 볼테르는 왜 비판받나요?
그의 글에는 반유대적·인종주의적 언급이 있고, 민중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시각도 있습니다. 이것이 관용의 옹호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두고 학자들이 논쟁합니다.
볼테르는 독창적인 철학자였나요?
체계를 세우지는 않았지만, 철학을 공적 비평으로 새롭게 만들고 뉴턴 과학과 로크 경험론을 유럽에 퍼뜨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학자들은 봅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J. B. Shank, Voltair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Voltaire. Wikipedia
- Candide. Wikipedia
- Letters on the English. Wikipedia
- Jean Calas. Wikipedia
- Treatise on Tolerance. Wikipedia
- François-Jean de la Barre. Wikipedia
- Poem on the Lisbon Disaster. Wikipedia
- Émilie du Châtelet. Wikipedia
- Arthur Hertzberg, The French Enlightenment and the Jew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8
함께 보기
- 장자크 루소불평등, 정치 권위, 교육에 관한 논의로 유럽 사상에 영향을 준 제네바 출신 작가.
- 바뤼흐 스피노자자연과 인간의 자유, 이성과 종교의 관계를 엄밀하게 탐구한 네덜란드 철학자.
- 르네 데카르트체계적인 회의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 이마누엘 칸트지식, 도덕적 의무, 판단에 관한 논의로 근대 철학의 방향을 바꾼 프로이센 철학자.
- 바스티유 습격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요새 겸 감옥을 점령한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 초기의 상징이 되었다.
- 미국 독립선언서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가 채택한 문서로, 영국에 대한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