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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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군이 조선에 쳐들어온 끔찍한 전쟁이 끝난 뒤, 두 나라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어요. 많은 조선 사람이 포로로 일본에 끌려가 있었고, 가족들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랐어요.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새 지배자가 권력을 잡자, 그는 평화와 무역을 원했어요. 조선은 사신을 보내기로 했어요. 1607년 조선의 관리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일본으로 건너갔고, 포로 가운데 일부가 그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그 뒤 200년 동안 조선은 이런 사절단을 12번 보냈어요. 대부분의 사절단에는 우두머리 세 사람과 함께 글 쓰는 사람, 의사, 화가, 통역관, 악사, 군인, 요리사, 뱃사람 등 수백 명이 갔어요. 이들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쓰시마섬을 거쳐 일본의 세토내해를 지나, 대부분은 땅길로 지금의 도쿄인 에도까지 갔어요. 갔다가 돌아오는 데 여러 달이 걸렸어요.
일본 사람들은 화려한 행렬을 구경하러 길가에 몰려나왔어요. 학자와 화가들은 조선 손님들을 찾아와 시를 주고받고, 한자를 써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과 글씨를 부탁했어요. 일본의 몇몇 마을에서는 지금도 조선 손님들과 연결된다고 전하는 축제 춤을 춰요.
마지막 사절단은 1811년 쓰시마까지만 갔어요. 오늘날 한국과 일본은 이 여정을 전쟁 뒤의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기억하고, 두 나라의 단체들이 2016년 함께 신청해서, 2017년 유네스코가 이 사절단의 기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어요.
한눈에 보기
- 시기
- 도쿠가와 쇼군에게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통신사라 불린 사절은 15세기 무로마치 쇼군과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갔다
- 명칭
- 처음 세 차례(1607·1617·1624)의 공식 명칭은 ‘회답겸쇄환사’였고, 1636년부터 ‘통신사’라 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를 ‘내빙(來聘, 라이헤이)’이라 불렀는데, 이 말에는 공물을 바치러 온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 규모
- 대개 300–500명. 삼사(정사·부사·종사관) 아래 관리·제술관·의원·화원·역관·군관·악대·마상재, 그리고 격군(노 젓는 사람, 1682년 규정상 270명)이 있었고, 쓰시마가 많은 호위 인원을 더했다
- 경로
- 한성 – 부산 – 쓰시마 – 이키 – 아이노시마 – 아카마가세키(시모노세키) – 세토내해 – 오사카 – 강배로 요도 – 교토 – 도카이도 육로 – 에도. 12차례 가운데 10차례가 에도까지 갔고, 1617년은 교토 인근 후시미, 1811년은 쓰시마에서 의례를 치렀다
- 목적
- 처음에는 강화, 일본의 의도 탐색, 피로인 쇄환. 뒤에는 새 쇼군의 습직 축하, 현안 처리, ‘교린’ 관계의 유지
- 계속 보낸 이유
- 재침략을 막기 위한 일본 정세 탐색과 남쪽 국경의 안정, 대등한 교린 질서의 유지. 사절은 막부의 요청으로 갔고 일본 안의 비용은 일본이 댔으며, 생계가 걸린 쓰시마가 관계를 이었다. 원수의 기억은 끝까지 남았다
- 중개자
- 조선과의 무역에 기대어 살던 쓰시마의 소(宗) 가문이 교섭을 맡았다. 처음에는 국서를 위조해 가며 교섭을 성사시켰고, 이 사실은 1630년대에 드러났다
- 국교 재개(1599–1609)
- 1599년부터 쓰시마의 교섭 → 1604–1605년 유정(사명대사)의 일본행과 후시미 회견 → 1606년 조선의 두 조건(국서 선행·범릉적 압송)과 이에야스 명의 국서(쓰시마의 위조·개작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 → 1607년 첫 회답겸쇄환사 → 1609년 기유약조(세견선 20척, 부산 한 곳)
- 기록
- 신유한의 『해유록』(1719) 같은 사행원들의 사행록, 조선 정부의 등록, 쓰시마번의 문서, 일본의 행렬도 두루마리·병풍·창화 시문집
- 세계기록유산
- 한국과 일본에 나뉘어 있는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111건 333점이 한일 공동 신청으로 201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지도 위에서
같은 시기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 서재에 있는 글 가운데 비슷한 시기,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입니다.
쉬움
조선통신사란 무엇인가
조선통신사는 조선 국왕이 일본의 최고 권력자에게 보낸 공식 외교 사절이다. ‘통신(通信)’은 믿음을 통한다는 뜻으로, 서로 대등하게 대하는 두 나라 사이에 오가는 사절을 가리켰다. 조선은 15세기 무로마치 쇼군과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이런 사절을 보냈지만, 오늘날 ‘조선통신사’라고 하면 대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도쿠가와 쇼군에게 보낸 12차례의 사절단을 가리킨다.
사절단은 조선 국왕이 쇼군에게 보내는 국서와 함께 인삼·호피·고급 옷감·붓·먹 같은 예물을 가져갔다. 보통 고위 문신 가운데서 뽑힌 세 사신이 이끌었고, 그 밑에 수백 명이 따랐다. 조선의 배는 부산에서 쓰시마를 거쳐 세토내해를 지나 오사카에 이르렀고, 거기서부터 대부분의 사절단은 육로로 에도까지 가서 쇼군의 성에서 격식을 갖춘 의식으로 국서를 교환했다. 1617년 사행은 교토 근처 후시미에서 접견을 받았고, 1811년 사행은 쓰시마에 머물렀다.
통신사는 임진왜란 뒤 강화의 일부로 시작되었고, 처음 세 차례는 일본에 끌려간 조선 사람들을 데려오는 일도 맡았다. 뒤에는 대개 새 쇼군의 습직을 축하하러 갔다. 막부에게 조선은 정식 국교를 맺은 유일한 완전 독립국이었으므로 통신사는 가장 위신 있는 외국 사절이었고, 조선에게는 위험한 이웃과 평화를 지키고 그 사정을 살피는 방법이었다.
가는 길마다 통신사는 큰 문화 행사가 되었다. 일본의 학자·시인·의사·화가들이 조선 사람들을 찾아와 시와 생각을 나누었고, 길가에는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2017년 두 나라에 남아 있는 통신사 기록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평화 구축과 문화 교류’의 역사로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쉬움
임진왜란 뒤의 강화
1598년 말 마지막 일본군이 조선을 떠났을 때, 조선이 일본을 믿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조선과의 무역으로 살아가던 쓰시마의 소 가문은 일찍이 1599년부터 사신을 보내고 포로를 돌려보내기 시작했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 노력을 뒷받침했다. 조선으로서는 끌려간 백성을 되찾고 싶었고, 북쪽에서 여진이 강해지는 가운데 남쪽의 평화가 필요했으며,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지 알아야 했다.
1604년 조정은 전쟁 때 승병을 이끈 승려 유정(사명대사)을 손문욱과 함께 일본에 보내 그 사정을 살피게 했다. 유정은 1605년 봄 교토 근처 후시미성에서 이에야스를 만났다. 일본 측 서술에 따르면 도쿠가와 측은 자신들이 침략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포로 송환을 약속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유정이 돌아올 때 남녀 3천여 명을 데려왔다고 적지만, 정확한 인원은 자료마다 다르다.
조선은 이어 조건을 내걸었다. 『선조실록』의 1606년 논의와 동북아역사재단의 설명에 따르면 핵심은 일본(이에야스)이 먼저 국서를 보낼 것, 그리고 전쟁 중 한성 남쪽의 왕릉을 파헤친 범인을 잡아 보낼 것 두 가지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유약조」 항목은 여기에 포로 송환을 더해 세 조건으로 정리한다. 1606년 말 쓰시마는 이에야스 이름의 국서와 범릉적이라는 두 사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 스스로 두 사람이 쓰시마의 사형수였다고 적었고, 그 국서도 오늘날 쓰시마가 꾸며 내거나 고쳐 쓴 것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이를 바탕으로 1607년 초 첫 사절단이 한성을 떠났다. 사절단은 에도에서 쇼군 히데타다를, 돌아오는 길에 슨푸에서 이에야스를 만났다. 2년 뒤인 1609년 조선과 쓰시마는 기유약조를 맺어, 엄격한 규칙 아래 쓰시마 도주의 배가 해마다 20척까지 부산에 올 수 있게 했다. 일본 사신은 더 이상 한성에 올라올 수 없었다. 1592년 침략군이 예전 일본 사신의 상경로를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일본 사신은 부산의 왜관(1607년부터는 두모포 왜관)에서만 접대를 받았다. 이 과정은 아래 1599년부터 1609년까지의 네 절에서 자세히 다루고, 두 나라가 왜 다시 국교를 열었는지는 ‘원수가 된 두 나라는 왜 다시 국교를 열었나’ 절에서 정리한다.
쉬움
한성에서 에도까지 먼 길
사행은 여러 달의 준비로 시작되었다. 새 쇼군이 즉위하면 쓰시마는 부산에 사자를 보내 이를 알리고, 다시 사절 파견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다. 조선 조정은 파견을 결정하고 사신을 뽑은 뒤 쓰시마와 세부 사항을 협의했다. 사절단은 한성에서 부산까지 약 두 달을 갔다. 바다를 건너기 전 사신들은 부산 영가대에서 바다의 신에게 제사(해신제)를 지냈다.
사절단은 사람이 타는 배 세 척과 짐을 싣는 배 세 척, 모두 여섯 척의 조선 배에 나누어 탔고 쓰시마의 배들이 호위했다. 먼저 쓰시마에 닿아 도주의 접대를 받고, 이키, 지쿠젠 앞바다의 아이노시마, 아카마가세키(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내해로 들어갔다. 도모노우라·우시마도·효고 같은 항구는 숙소와 연회를 마련해 맞았다.
오사카에서 조선 사람들은 다이묘들이 마련한 강배로 갈아타고 요도강을 거슬러 요도까지 올라간 뒤, 육로로 교토를 지났다. 비와호 근처에서는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 뒤 지났다는 특별한 길, 뒷날 ‘조선인 가도’라 불린 길을 쓰도록 허락받았고, 이어 도카이도를 따라 에도로 향했다. 세 사신은 가마를 타고, 상관들은 말을 타고, 나머지는 걸어서 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왕복에는 대개 5개월에서 8개월이 걸렸고, 일본 측 설명은 8개월에서 10개월을 들며, 더 오래 걸린 사행도 있었다. 1719년 사행의 경우 쓰시마에서 오사카까지 뱃길에 45일, 오사카에서 에도까지 육로에 18일이 걸렸다. 에도에서 사신들은 성에 들어가 국서와 예물을 전했고, 며칠 뒤 쇼군의 회답서와 답례품을 받아 같은 길로 돌아왔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 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서는 한성에서 에도까지 왕복 거리를 4,500km가 넘는 것으로 적는다.
쉬움
누가 갔나: 세 사신과 수백 명의 수행원
사절단의 우두머리는 보통 ‘삼사’, 곧 국서를 받드는 정사, 부사, 그리고 기록을 맡은 종사관이었다. 정사는 대개 참의 품계의 고위 문신이었다. 세 사신은 저마다 자기 수행원 무리를 거느리고 각자의 배를 탔다. 규모를 줄인 1811년의 마지막 사행에는 정사와 부사만 있었다.
그 아래에는 여러 직책의 관원이 있었다. 왜어 역관들이 날마다의 실무를 처리했다. 일본 학자들이 가는 곳마다 시를 청했기 때문에 제술관과 서기들은 한시 실력으로 뽑혔다. 의원·화원·사자관·군관·악대·기수·요리사·마부도 있었다. 1636년부터 막부가 곡마 공연을 청했고, 1680년대부터는 마상재 두 사람을 보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1682년에 정비된 편성 규정에서 가장 큰 무리는 격군 270명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사행별 인원을 1607년 504명, 1617년 428명, 1624년 460명, 1636년 478명, 1643년 477명, 1655년 485명, 1682년 473명, 1711년 500명, 1719년 475명, 1748년 477명, 1764년 477명, 1811년 328명으로 적는다. 다른 자료는 1607년 468명, 1811년 334명 또는 336명처럼 조금씩 다른 수를 들며, 그 차이의 이유가 늘 분명하지는 않다.
일본 측도 호위를 붙였다. 쓰시마는 길잡이와 호위 인원을, 일본 측 한 설명에 따르면 1,500명가량 보냈고, 길목의 번들은 배·말·짐꾼·음식을 댔다. 움직이는 조선 사절단은 수천 명의 행렬이었던 셈이다.
중급
1599–1605년: 쓰시마의 교섭과 사명대사의 일본행
국교 회복이 가장 다급했던 곳은 쓰시마였다.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땅인 이 섬은 산이 많아 농사가 어려워 오래전부터 조선과의 무역으로 살아왔다. 도주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로, 임진왜란 때 고니시와 함께 제1군의 선봉으로 부산에 상륙했던 장수였다. 그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섰지만,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서두르던 이에야스는 그의 죄를 묻지 않고 영지를 그대로 맡겼다. 이때 그는 고니시의 딸인 정실과 이혼했다. 교섭의 실무는 가로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그 아들 가게나오(조선 기록의 평경직), 외교승 겐소가 맡았다.
쓰시마는 1599년부터 사람을 보내 포로를 돌려보내며 화친을 청했다. 처음에는 명군이 아직 조선에 머물러 있어 조선이 독자적으로 답할 수 없었고, 1599년에 온 쓰시마의 사자들은 명군에 넘겨지기도 했다. 『변례집요』 역주에 따르면 조선은 명의 인질 문제가 풀린 1600년 4월 이후에야 독자적인 대일 정책을 펼 수 있었다. 쓰시마는 위협도 섞었다. 1600년 일본에서 돌아온 울산 사람 장번석 등은 야나가와 시게노부가 ‘4∼5월 이전에 다시 회답이 없으며 곡식이 익는 7∼8월 사이에 대병을 출동시켜 불의에 습격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홍성덕의 연구는 조선의 회답사가 파견되기 전까지 온 일본의 강화 교섭 사절을 22회로, 동북아역사재단은 23차례로 센다.
조선도 사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1602년 초 이덕형의 건의로 조정은 전계신과 손문욱 등을 쓰시마에 보내 정탐하게 했다(동북아역사재단은 이 파견을 1601년으로 적는다). 손문욱은 전쟁 중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이었다. 1604년에는 승려 유정을 보냈다. 유정은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이끌었고,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와 네 차례 만나 일본군의 사정과 강화 조건을 캐물었던 인물이다. 피해를 입은 조선이 먼저 정식 강화 사절을 보내는 모양을 피하려고, 조정은 그에게 적의 사정을 살핀다는 ‘탐적사’의 임무를 맡겼다. 유정은 음력 6월 22일(양력 1604년 7월 18일) 하직했고, 음력 8월 20일(양력 9월 13일) 바다를 건너 쓰시마에 들어갔다. 넉 달 넘게 소식이 없자 선조는 ‘지금 반년이 되어가는데 무슨 연고로 돌아오지 않겠는가’라며 쓰시마가 그를 일본 본토로 보낸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유정은 쓰시마 사람들의 안내로 교토로 가서, 1605년 봄(음력 3월로 전한다) 후시미성에서 이에야스를 만났다. 정확한 날짜에는 이설이 있고 동석자도 확정하기 어렵다. 일본의 한 인명사전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를 함께 만났다고 적지만, 히데타다가 대군을 이끌고 후시미성에 들어온 것은 음력 3월 21일이었다. 회견 내용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쓰시마가 조선에 보낸 답서는 이에야스가 ‘조선에게 말한 바는 모두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속히 사절을 인도해서 오게 한다면 내 직접 만나서 우리의 성심을 말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전한다. 일본 측 서술은 혼다 마사노부 등이 ‘도쿠가와 정권은 침략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포로를 속히 돌려보내겠다’고 했다고 적는다. 이에야스가 조선에 군대를 보내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도 1592년 침략의 출발 기지였던 히젠의 나고야성에 와 있었으므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은 도쿠가와 측의 주장으로 읽어야 한다.
유정은 1605년 음력 4월 돌아왔고, 많은 포로가 함께 고향 땅을 밟았다. 『선조수정실록』은 남녀 3천여 명을 쇄환했다고 적고 일본의 인명사전도 ‘3000인 남짓’이라 하지만, 1차 집계로 확인된 수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야스의 국서를 받아 오지 못했다. 이듬해 선조는 ‘가강이 진실로 속히 화친하려는 뜻이 있다면 유정이 돌아올 때에는 어찌 한 장의 글도 부치지 않’았겠느냐고 의심했다. 유정이 일본에서 쇠로 만든 방의 불길을 견디고 도술로 왜왕을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임진록』 계열의 설화이지 당시의 기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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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1606년: 누가 먼저 국서를 보내나 — 두 조건과 고쳐 쓴 국서
이제 문제는 누가 먼저 고개를 숙이느냐였다. 1606년 음력 5월 선조는 일본의 속셈을 이렇게 의심했다. ‘적의 뜻은 바로 우리가 먼저 사신을 보내 글을 보냄으로써 「우리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고 말하거나, 혹은 「항복을 애걸하여 정성을 다해 섬겼다.」는 등의 말로 지칭하여 후세에 과시하려는 것이다.’ 비변사는 일본 집정에게 보낼 글에서, 이에야스가 정말 우호를 원한다면 왜 한 장의 글도 보내지 않느냐고 묻고, 왕릉을 파헤친 주모자를 잡아 ‘서계와 함께 압송하면’ 답서를 쓰겠다는 뜻을 담자고 했다. 1592년 음력 9월 일본군은 한성 남쪽(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던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을 파헤쳤고, 이는 조선이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렇게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낼 것과 범릉적을 압송할 것이 국교 재개의 조건이 되었다.
1606년 가을 쓰시마에 건너간 조선의 차관 전계신은 이에야스의 글이라는 문서를 보았지만, 불손하고 격식에 어긋나며 범인을 보낸다는 말도 없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쓰시마의 귤지정은 이 글도 이에야스가 처음에는 ‘어찌 먼저 글을 보내어 구구하게 화친을 청할 수 있겠는가’라며 내주려 하지 않던 것을 측근의 도움으로 어렵게 얻어 냈다고 말했다. 쓰시마는 다시 일본에 사람을 보내 글을 고치는 문제를 물었고, 이에야스가 이를 듣고 의심을 품어 쉽게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는 소식이 왔다고 전계신은 보고했다. 야나가와 가게나오는 ‘글 가운데의 한 어구가 혹 분명하지 못하더라도 사체에 크게 손상될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조선 관리들을 다그쳤다.
그런데 얼마 뒤 조선이 바라던 내용을 그대로 담은 이에야스 명의의 국서가 왔다. 『선조실록』 음력 11월 12일(양력 1606년 12월 11일) 조에 실린 이 글은 ‘죄인이 대마도에 있는 터이므로 의지에게 확고하게 명령하였으니 의지가 반드시 결박하여 보낼 것’이라 약속하고, 조선이 속히 사신을 보내 ‘우리 60여 주의 인민들이 화호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다시로 가즈이 등의 연구 이래 이 국서는 쓰시마가 꾸며 낸 것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야나가와 가게나오와 시마가와 다쿠미가 위작했다고 설명한다. 다만 처음부터 새로 만든 것인지 이에야스의 원래 글을 고친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쓰시마는 전쟁 전에도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벌 길잡이’ 요구를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는 요청으로 바꾸어 전하는 등 두 나라 사이에서 말을 바꾼 적이 있었다.
범인이라며 보내온 두 사람도 수상했다. 공초에서 37세의 마고사구는 ‘임진년 … 도주 군관의 노자가 되어 나와서 부산의 선소에 머물렀을 뿐 서울에는 올라오지도 않았’다고 진술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두 사람은 임진년에 각각 13세와 23세였다. 『선조수정실록』은 쓰시마가 ‘사형에 처할 죄인이었던’ 두 사람을 범릉왜라고 속여 보냈다고 적었다. 선조는 ‘진범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또한 적이니 바로 참수하는 것이 마땅하다’, ‘대마도의 왜인이면 누군들 우리 나라의 적이 아니겠는가’라며 두 사람을 처형하게 했다. 처형 날짜는 분명하지 않다. 수정실록은 이 일을 음력 11월 조에 몰아 적었지만, 『선조실록』에서는 음력 12월 23일에도 대신들이 처리 방법을 논의하고 있었다.
조정은 의심을 다 풀지 못한 채 회답 사절을 보내기로 했다. 1607년 음력 정월 비변사는 명나라에 아뢴 글에서도 ‘가강이 하는 짓이 이미 참인지 거짓인지 헤아리지 못하겠고 결박지워 보내온 왜적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나 저들이 이미 이런 내용으로 말을 해왔으니’ 회답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비변사는 ‘우리가 무단히 먼저 사신을 보내는 것은 옳지 않고 저들이 서계를 보내온 것을 인해서 회답하는 것이 사체에 당연’하다고 했다.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냈다는 형식이 갖추어졌기에, 조선은 사절을 ‘회답’사라 부를 수 있었다.
중급
1607년 첫 사행: 회답겸쇄환사의 여정
1607년 음력 정월 12일(양력 2월 8일), 정사 여우길, 부사 경섬, 서장관(뒤에 종사관이라 불림) 정호관이 이끈 504명의 사절단이 한성을 떠났다. 처음 이름은 ‘회답사’였으나 피로인 쇄환의 목적이 더해져 ‘회답겸쇄환사’로 정해졌다. 일본의 국서에 답하고 끌려간 백성을 데려온다는 뜻이다. 선조의 국서도 일본이 ‘먼저’ 글을 보내 ‘전대의 잘못을 고쳤다’고 했으니 사신을 보내 답한다는 형식을 취했다. 전 참판 윤안성은 ‘한강에 나가 강 위를 바라보라 / 두 능의 송백 가지가 솟지 않았으리’라는 전별시로, 왕릉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사신을 보낸다고 비판했고, 이 시는 한때 널리 애송되었다. 선조는 은을 넉넉히 주어 일본의 조총을 사 오게 했고, 사절단은 귀로에 사카이에서 조총 500자루를 샀다.
부사 경섬의 일기 『해사록』은 날마다의 여정을 남겼다. 사절단은 음력 2월 29일(양력 3월 26일) 부산을 떠났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배 밑창이 갈라져 ‘배 안의 물이 어깨를 넘었’다. 쓰시마·이키·아이노시마·아카마가세키(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내해를 지난 사절단은 양력 5월 2일 오사카 앞바다에 닿았고, 5월 7일 교토에 들어가 다이토쿠지에 묵었다. 교토 길가의 구경꾼 가운데에는 ‘고국 사람을 보고는 울먹이며 슬퍼하’는 조선 여인들이 있었다. 6월 2일에는 세키가하라를 지나며 이에야스의 진터를 보았다.
슨푸에 있던 이에야스는 ‘이미 전위하였으므로 나는 국서를 받을 수 없으니, 사신은 마땅히 강호로 바로 가서 새 관백에게 명을 전하고, 돌아올 적에 서로 만나볼 것’이라는 뜻을 전해 왔다. 사절단은 양력 6월 18일 에도에 도착해 6월 29일(조선력 6월 6일, 일본력 5월 6일) 에도성에서 쇼군 히데타다에게 국서와 예물을 전했다. 경섬은 히데타다가 ‘나이는 29세인데, 얼굴 모양이 용맹스럽고 담기가 많다’고 적었다. 돌아오는 길인 7월 13일에는 슨푸성에서 이에야스를 만났는데, 경섬은 ‘가강의 나이는 66세였다. 형체가 장대하고 … 쇠로하지는 않았다’고 적었다. 사절단은 8월 24일 부산에 돌아왔다. 1607년에는 일본력이 윤4월, 조선력이 윤6월을 두어 두 나라 기록의 월일이 한 달까지 어긋나므로, 이 절에서는 양력을 함께 적었다.
사신들은 국서를 의심하고 있었다. 쓰시마에서 경섬은 겐소에게 지난해 전계신이 가져간 서계가 정말 이에야스의 것이었느냐고 묻고, ‘왕의 칭호가 없으면 인문을 어떻게 「일본국왕」이라고 새겼소’라고 따졌다. 겐소는 예전에 명나라 사신이 가져온 도장을 그대로 쓰는 것이라고 답했다. 귀국 뒤 문제가 된 것은 히데타다의 답서였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답서는 ‘원수충(源秀忠)’이라고만 쓰고 ‘국왕’을 쓰지 않았으며, 예조에 보낸 답서는 조선 사람을 ‘원인(遠人)’이라 했다. 앞서 받은 ‘이에야스의 국서’와 형식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장령 최유원은 여우길 등이 이를 고치지 못해 나라를 욕되게 했다고 논했다. 한편 조선 국왕의 회답 국서도 일본에 전해지기 전에 쓰시마가 위조 국서와 앞뒤가 맞도록 바꿔치기했다는 연구가 있으며, 이런 국서 개작은 1630년대 야나가와 사건 때 드러났다.
사절단은 돌아오는 길에 교토와 오사카 등에서 조선 사람들을 모았다. 이에야스가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을 일체 쇄환하게 하고 … 억류하는 주인이 있으면 죄를 주리라’ 했다는 전갈도 받았다. 그러나 경섬은 ‘그 주인들이 앞을 다투어 서로 숨겨서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였고, 또 포로인들도 머물러 사는 것을 편히 여겨 돌아오려는 자가 적었다’고 적었다. 그가 쓰시마에서 점검한 귀환자는 ‘남녀 합쳐 겨우 1천 4백 18명’이었고, 그는 이를 ‘아홉 마리 소 가운데 털 한 개 뽑은 정도도 못 되니’라고 탄식했다. 『선조수정실록』은 1,240여 명이라 적어 수치가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귀환이 적었던 이유로 일본 측의 비협조, 귀국을 원치 않은 경우와 함께 돌아온 피로인에 대한 조선 사회의 차별과 멸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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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1609년 기유약조: 부산 한 곳, 해마다 20척
전쟁 직후 조선은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절영도(지금의 영도)에 임시 왜관을 두었고, 1607년에는 군사 요지인 부산진성 안에 있던 옛 왜관 터 대신 두모포(지금의 부산 동구 수정동 일대)에 새 왜관을 세웠다. 1609년 음력 3월 겐소와 야나가와 가게나오(평경직) 등 300여 명이 부산의 왜관에 왔지만, 조선은 이들이 한성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부산에서 서계를 받았다. 역관 박대근은 ‘너희 나라가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의 무고한 백성을 살해했’다고 꾸짖고, 부산에서 약조를 정하는 것은 모두 쓰시마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게나오는 ‘조선이 전투는 겁내면서 쟁변에는 용감하여 한갓 예모와 문자에만 구구하게 굴고 있’다고 맞섰다.
그해 조선과 쓰시마 도주 사이에 기유약조가 맺어졌다. 정확한 체결 날짜는 자료마다 다르고, 조문 수도 『통문관지』를 따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3개조,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는 12개조로 설명한다. 『광해군일기』 음력 6월 28일(양력 7월 28일) 기사에는 ‘대마 도주에게 내려 보낼 약조’ 가운데 특송선 3척을 포함한 세견선 20척을 대·중·소선으로 어떻게 나눌지 논의하는 내용이 보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소개하는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주에게는 해마다 쌀과 콩 100석을 내리고, 도주가 해마다 보낼 수 있는 배(세견선)는 특송선 3척을 포함해 20척으로 한다. 조선에 오는 배는 모두 도주가 발급한 도항 증명서(문인)를 지녀야 하며, 문인이 없거나 부산포가 아닌 곳에 배를 대는 자는 적으로 다룬다.
이 약조는 전쟁 전보다 쓰시마에 훨씬 불리했다. 세견선은 전쟁 직전의 30척에서 20척으로 줄었고, 일본 배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은 부산포 한 곳으로 정해졌다. 이는 1547년부터 부산포 왜관만 남긴 전쟁 전의 제한을 다시 확인한 것이었다. 조선과 통교할 수 있는 상대도 일본 국왕(쇼군)·쓰시마 도주·조선 관직을 받은 쓰시마 사람으로 한정되었다. 일본 사신은 한성에 올라오지 못하고 부산 왜관에서만 접대를 받았으며, 한성의 일본 사신 숙소 동평관은 1609년 문을 닫았다. 그래도 쓰시마는 이 약조로 끊겼던 무역을 되찾았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유일한 창구라는 지위를 굳혔다. 기유약조는 메이지 정부가 쓰시마번의 외교 업무를 접수한 1872년 무렵까지 두 나라 관계의 기본 틀로 쓰였다.
중급
‘회답겸쇄환사’에서 ‘통신사’로
도쿠가와 시대의 첫 세 사행(1607·1617·1624)은 공식적으로 통신사라 불리지 않았다. 조선은 이를 ‘회답겸쇄환사’, 곧 일본의 국서에 회답하고 끌려간 조선인을 데려오는 사절이라 불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때만 해도 조선이 도쿠가와 막부를 신의를 통할 수 있는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일본은 처음 세 차례를 포함한 12차례 모두를 통신사로 여겼다.
물밑에서는 쓰시마의 중개자들이 양쪽의 국서를 위조하고 고쳐 가며 교섭을 이어 갔다. 그 덕에 각 정부는 자기가 기대한 것을 보았다. 조선 국왕은 대등한 ‘일본 국왕’에게 글을 보내는 셈이었고, 쇼군은 공손한 사절을 맞는 것처럼 보였다. 1631년 쇼군의 직속 가신이 되기를 바랐던 소 가문의 중신 야나가와 시게오키와 도주 소 요시나리가 서로 막부에 소송하면서, 그 과정에서 국서 위조와 개작이 드러났다. 1633~1634년의 심리를 거쳐 1635년 쇼군 이에미쓰가 직접 이 사건을 판결해, 소 가문의 당주는 처벌을 면하고 야나가와는 유배되었으며 관련자 일부는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후 교토 오산의 선승들이 돌아가며 쓰시마에 머물러 외교 문서를 맡게 되었다.
이 사건은 외교의 형식을 바꾸었다. 1636년 사행부터 조선은 ‘통신사’라는 이름을 썼고, 쇼군에게 보내는 국서에서는 ‘일본 국왕’ 대신 ‘대군(大君, 다이쿤)’이라 불렀으며, 일본 측은 국서에 일본 연호를 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통신사라는 이름의 부활을 북쪽에서 일어난 청나라와 연결해 설명한다. 명·청 교체가 조선과 일본 모두에게 관계를 안정시킬 이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1636–1637년 조선은 청의 침입(병자호란)을 겪었다.
1636·1643·1655년의 사행은 닛코의 이에야스 사당(도쇼구)에도 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사신들이 참배를 ‘강요받기도’ 했다고 쓰는데, 사행록은 그 압력의 모습을 보여 준다. 1636년에는 막부와 쓰시마의 간곡한 요청과 도주의 처지를 둘러싼 정치적 압력 속에서 논의한 끝에 응했고, 1643년에는 부산에서부터 연습해 간 헌향 의식, 1655년에는 효종의 어필을 전하는 의식으로 미리 준비된 공식 의례였다(아래 1636–1637년 절). 1655년부터는 새 쇼군마다 사절을 보내는 것이 관례가 되었지만, 쇼군 후계자의 탄생 같은 다른 경사를 겸한 사행도 있었다.
중급
열두 차례의 사행: 이름은 축하, 속뜻은 저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표(정사)와 일본 측 정리(쇼군)를 따라 열두 차례를 늘어놓으면 다음과 같다. 1607년 여우길(쇼군 히데타다), 1617년 오윤겸(히데타다, 후시미에서 접견), 1624년 정립(이에미쓰), 1636년 임광(이에미쓰), 1643년 윤순지(이에미쓰), 1655년 조형(이에쓰나), 1682년 윤지완(쓰나요시), 1711년 조태억(이에노부), 1719년 홍치중(요시무네), 1748년 홍계희(이에시게), 1763–1764년 조엄(이에하루), 1811년 김이교(이에나리, 쓰시마에서 의례). 처음 세 차례는 ‘회답겸쇄환사’였고, 1636년부터의 아홉 차례가 이름까지 ‘통신사’였다. 1643년 사행은 쇼군의 후계자 이에쓰나의 탄생을, 1655년 이후의 사행은 대부분 새 쇼군의 습직을 축하한다는 것이 겉으로 내건 목적이었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손승철 집필)은 겉으로는 대부분 습직 축하였어도 속뜻은 그때마다 달랐다고 설명한다. 1636년은 명·청 교체에 따른 일본과의 연대감 확립, 국서 개작 사건 뒤 쓰시마 도주의 옹호와 일본 사정 탐색, 1643년은 청의 압력에 대한 견제와 늘어난 무역량의 축소 교섭, 일본의 해금 정책과 시마바라의 난에 대한 탐색, 1655년은 일본이 ‘조선의 길을 빌린다(가도조선)’는 정보의 확인, 1682년은 쓰시마와의 무역을 통제하는 조시약정, 1711년은 아라이 하쿠세키의 의례 개정에 맞선 체면 유지와 우호의 지속, 1719년은 의례 복구에 대한 방침 전달과 표류민 송환 문제였다는 것이다. 같은 사전은 18세기 들어 대륙의 정세가 안정되자 1748년과 1764년 사행은 습직 축하와 교린 확인이 주목적인 의례적인 사행이 되었다고 본다.
중급
1624–1635년: 세 번째 회답겸쇄환사와 국서 위조의 폭로(야나가와 사건)
1623년 이에미쓰가 쇼군이 되자 막부는 축하 사절을 청했고, 이듬해 정사 정립, 부사 강홍중, 종사관 신계영이 이끈 세 번째 회답겸쇄환사가 떠났다. 강홍중의 『동사록』에 따르면 사절단은 음력 12월 19일(양력 1625년 1월 27일, 이때는 두 나라 달력이 같았다) 에도에서 이에미쓰에게 국서를 전했고, 쇼군은 ‘공복을 갖추고 맨발로 나와 서서 장검을 풀어 급사에게 주고 다만 단도를 차고 앉았다’. 그러나 피로인 쇄환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사행이 일본에서 21명, 쓰시마에서 15명을 데려오는 데 그쳤다고 적는다(다른 집계도 있다). 이것이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을 쓴 마지막 사절이었다.
그사이 쓰시마 안에서는 다툼이 자라고 있었다. 가로 야나가와 시게오키(1603–1684)는 할아버지 시게노부 대에 조선 외교의 실무로 올라선 집안의 후계자로, 어려서부터 인질로 이에야스·히데타다 곁에 머물러 막부 요인들과 인맥이 두터웠다. 아라노 야스노리는 시게오키가 이를 발판으로 막부의 직신이 되려 한 데서 1615년 가독을 이은 도주 소 요시나리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1631년(간에이 8) 시게오키가 소씨에게서 받은 영지와 무역선 권리를 반납하겠다고 나서면서 양쪽이 막부에 소송을 냈고, 시게오키는 국서 위조를 호소했다. 1634년 본격적인 심리가 열리는 동안 막부의 명령으로 쓰시마와 조선의 무역이 한때 중단되었다.
심리에서 드러난 부정은 조선 사절이 올 때마다 국서를 고치거나 바꿔친 일, 그리고 쇼군의 사절(국왕사)을 사칭해 조선에 사람을 보낸 일 등이었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1617년과 1624년 사행 때 쓰시마가 국서를 위조하거나 고친 경위를 설명한다. 1624년에는 막부의 외교승 곤치인 스덴이 쓴 답서의 ‘日本國主’를 쓰시마 가신이 ‘日本國王’으로 고쳤다고 한다. 조선이 대등한 군주의 칭호로 기대한 ‘왕’ 자를 몰래 넣어 준 것이다. 다만 세부는 자료마다 달라, 일본 백과사전의 「수호 사건(殊号事件)」 항목은 ‘王’ 자를 넣은 일이 발각된 국서를 1616년의 것으로 적는다. 위조 자체는 밝혀졌지만 책임 소재는 분명하지 않았다. 이 재판이 1606년의 이른바 ‘이에야스 국서’까지 공식으로 확인했는지도 분명하지 않으며, 국서 개작의 전모는 다시로 가즈이 등 현대 연구가 정리한 것이다.
1635년 음력 3월 11일(양력 4월 27일), 이에미쓰는 고산케와 다이묘·하타모토를 에도성에 모아 놓고 두 사람을 직접 대질시켰다. 처음에는 시게오키가 유리하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튿날(양력 4월 28일) 내려진 판결은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 주었다. 시게오키는 쓰가루로 유배되었고, 국서 위조와 바꿔치기에 관여한 이들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으며, 쓰시마의 외교승 기하쿠 겐포도 유배되었다. 아라노 야스노리는 요시나리의 부인이 쇼군 부인과 친척이라는 점이 판결에 작용했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막부의 대외 정책과 다이묘 통제 노선에 맞는 결정이었다고 보고, 국서 개작은 소씨나 야나가와씨의 죄라기보다 중세 이래의 관행을 방치한 막부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한다.
판결 뒤 막부는 조선 외교를 소씨에게 그대로 맡기되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교토 오산의 학승을 차례로 쓰시마의 이정암에 보내 외교 문서를 맡기고 국서 개작을 감시하게 했고(이정암 윤번제), 조선 국서에서 쇼군을 ‘일본국왕’ 대신 ‘일본국대군(日本國大君)’이라 부르게 하며, 일본 쪽 국서에는 일본 연호를 쓰게 했다. 아라노는 이 개혁이 조선에도 받아들여져 이듬해 통신사가 오면서 근세의 ‘대군 외교 체제’가 자리 잡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조선이 그대로 따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636년 사행의 부사 김세렴의 『해사록』을 소개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에 따르면 사신들은 국서의 일본 연호와 ‘왕’·‘대군’ 같은 칭호를 고치거나 빼 달라고 요구했고, 연호 문제는 원만히 풀지 못한 채 칭호 일부를 빼는 정도의 성과만 얻은 것으로 보인다. ‘대군’ 칭호의 고안자는 예전에 나카무라 히데타카가 막부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으로 추정했고 헤이본샤의 옛 백과사전도 라잔의 안이라고 적었지만, 한일역사공동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나카오 히로시의 검증으로 이정암 윤번승인 교쿠호 고린임이 밝혀졌다.
중급
1636–1637년: 첫 ‘통신사’, 닛코, 그리고 병자호란
전쟁 뒤 처음으로 ‘통신사’라는 이름을 단 사행은 정사 임광, 부사 김세렴, 종사관 황호가 이끌었고, 세 사람은 각각 『병자일본일기』, 『해사록』, 『동사록』을 남겼다. 새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이 아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사행의 속뜻으로 명·청 교체에 따른 일본과의 연대감 확립, 국서 개작 사건 뒤 쓰시마 도주의 옹호와 일본 사정의 탐색을 들고, 황호의 『동사록』 항목은 쓰시마 도주가 국서 위조 사건을 해명하고, 쇼군이 조선의 마상재와 악공의 연주를 보고 싶어 사행을 요청해 와 이에 응한 것이라고 적는다. 일본 쪽 서술에 따르면 요시나리가 막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파견을 주선했다. 피로인 쇄환도 임무였지만,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어 일본에서 자손을 두고 사는 이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아 성과가 없었다.
사절단은 음력 8월 11일(양력 1636년 9월 9일) 한성을 떠나, 음력 12월 7일(양력 1637년 1월 2일) 에도에 들어갔다. 국서를 전하기도 전에 쓰시마 측이 닛코 유람을 청하자 사신들은 ‘국서가 아직 전해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유람을 청하니, 이것이 무슨 일의 체모인가?’라고 물리쳤고, 그날 저녁 국서를 전할 날이 정해졌다. 종사관 황호는 그날 일기 끝에 ‘일본의 13일은 우리나라의 14일이다’라고 적었다. 두 나라의 달력이 하루 어긋나 있었던 것이다. 사신들은 조선력 12월 14일, 일본력 12월 13일, 곧 양력 1637년 1월 9일 에도성에서 쇼군 이에미쓰에게 국서를 전했다.
막부는 사신들이 이에야스를 모신 닛코 도쇼구에 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쓰시마의 가신은 역관 홍희남에게 ‘주인집에 불이 났는데 손님이 불을 끄려고 하지 않으니 어찌 인정이겠습니까?’라고 호소하며, 막부 안의 반대파가 사신이 거절한 것을 빌미로 도주를 모함하려 한다고 털어놓았다. 역관들은 ‘도주의 형세가 극히 위태롭습니다… 유람하러 나들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별로 손해되는 바가 없으나, 저들에게는 매우 관계가 됩니다’라며 수락을 권했고, 사신들은 고려의 정몽주도 일본에서 많이 유람했다는 전례를 들어 한 번 가는 것은 손상될 바가 없다고 의논했다. 그들은 음력 12월 22일(양력 1637년 1월 17일) 닛코에 갔다. 금빛으로 꾸민 사당을 본 정사 임광은 ‘하늘은 반드시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데, 처사가 이와 같으니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고, 일광사 주지가 보낸 백금 80매는 물리쳤다. 그날 밤 쓰시마의 가신은 ‘조흥(시게오키)은 비록 패배했으나 그의 당여가 여전히 많아… 만일 허락을 아니하셨더라면 〈도주의〉 사생은 알 수 없었을 것’이라며 고마워했다.
닛코 방문은 1643년과 1655년 사행으로도 이어졌지만 성격은 달라졌다. 1643년 사절은 부산에서부터 일광산에 향을 올리는 의식을 연습했고, 1655년 사절은 닛코 도쇼구에서 효종의 어필을 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통신사」 항목은 이 참배를 ‘강요받기도’ 했다고 쓴다. 사행록으로 보면 1636년에는 정치적 압력 속에서 논의한 끝의 수락이었고, 1643·1655년에는 미리 준비해 간 공식 의례로 자리 잡았다. 『증정교린지』에 따르면 일광산 치제는 1682년에 중지되었다.
사신들이 에도에 있던 바로 그 무렵, 조선은 북쪽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병자호란」에 따르면 청군은 음력 12월 9일(양력 1637년 1월 4일) 압록강을 건넜고, 인조는 음력 12월 14일 밤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사신들이 에도성에서 국서를 전한 바로 그날(양력 1637년 1월 9일)이었다. 인조는 음력 1월 30일(양력 2월 24일)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항복했다. 귀국길의 사신들은 음력 2월 21일(양력 3월 17일) 쓰시마에서야 부산에서 온 배를 통해 ‘서방의 오랑캐가 깊숙이 침입하여 경성이 함락됐다가 곧 회복되고, 대가가 서울로 돌아오셨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싸움인지 강화인지도 모른 채 사신들은 ‘밤새도록 모여서 울며 지냈다’. 남쪽에서 이어진 외교와 북쪽의 전쟁 사이에 어떤 인과가 있었는지는 사료로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김세렴의 『해사록』을 소개한 백과사전 항목은 이 시기를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과 화호할 필요를 느낀 때로 설명한다.
중급
같은 무렵의 일본: ‘쇄국’과 네 개의 창구
통신사가 자리를 잡아 가던 1630년대, 일본도 바깥으로 향한 문을 좁히고 있었다. 막부는 이미 1612년 직할 도시에서, 1616년에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를 금지했고, 각지에서 신자들에 대한 고문과 처형이 이어졌다. 1633년 나가사키 부교에게 내린 지시를 시작으로 1639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내려진 법령(흔히 ‘간에이 쇄국령’이라 부른다)은 일본인의 해외 왕래를 묶었고, 1635년부터는 일본 배의 해외 도항을 모두 금하며 해외에 사는 일본인이 돌아오면 사형에 처하게 했다. 같은 해 중국 배의 입항도 나가사키로 한정되었다.
1637년 음력 10월(양력 12월), 규슈의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에서 가혹한 연공과 기독교 탄압에 맞서 농민과 신자들이 봉기했다(시마바라의 난). 2만 수천에서 3만 7천 명으로 전하는 봉기군은 폐성이 된 하라성에 들어가 버텼고, 막부는 십수만, 일설에 12만 4천에 이르는 군대를 동원했으며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에 명해 배에서 성을 포격하게 했다. 하라성은 1638년 음력 2월 말(양력 4월) 총공격으로 함락되었고 농성자는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 막부는 1639년 포르투갈 배의 내항을 금지하고, 1641년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 앞바다의 인공섬 데지마로 옮겼다. 아사오 나오히로는 이 1641년에 이른바 쇄국이 확립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쇄국’은 당시의 말이 아니다. 1801년 나가사키 통사 출신의 난학자 시즈키 다다오가 독일인 의사 켐퍼의 『일본지』 한 장을 번역하며 ‘쇄국론’이라는 제목을 붙인 데서 비롯되었고, ‘쇄국령’도 메이지 이후 연구자들이 붙인 이름일 뿐 그런 이름의 법령은 없었다. 막부 안에서 이 말이 처음 쓰인 것은 1853년으로 본다. 1980년 무렵부터 아라노 야스노리는 일본이 나가사키(네덜란드·중국), 쓰시마(조선), 사쓰마(류큐), 마쓰마에(아이누와 그 너머의 청)라는 ‘네 개의 창구(四つの口)’로 바깥과 이어져 있었다고 보았고, 로널드 토비 등과 함께 ‘쇄국’ 대신 같은 시기 중국·조선의 ‘해금’과 견주어 보는 연구가 늘었다. 다만 ‘쇄국’이라는 말을 아예 버리는 데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이 체제 안에서 조선은 특별한 자리에 있었다. 아사오 나오히로는 1635년 조선과의 관계가 수복되고 이듬해 정규 통신사가 왔으며, 조선과 류큐는 ‘통신의 나라’로, 중국과 네덜란드는 ‘통상의 나라’로 자리매김되어 쇼군 중심의 대외 질서를 떠받쳤다고 설명한다. 아라노는 정식 외교 관계를 맺은 독립국은 조선뿐이었으므로 통신사의 방문이 도쿠가와 쇼군의 국제적 지위를 검증하는 자리로서 큰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고 본다. 나라 밖으로 향한 문을 좁힌 일본에게도 조선은 국서를 주고받는 상대였다.
중급
부산의 왜관: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전쟁 뒤 조선은 일본 사신이 한성까지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부산의 왜관이 두 나라 외교와 무역의 무대가 되었다. 전쟁 직후에는 절영도(지금의 영도)에 임시 왜관이 있었고, 1607년부터는 군사 요지인 부산진성을 피해 두모포(지금의 부산 동구 수정동 일대)에 왜관이 있었다. 두모포 왜관은 좁고 선창의 물이 얕으며 남풍을 정면으로 받아, 일본 측은 처음부터 옮겨 달라고 요구했다. 1640년부터 이전이 결정된 1673년까지 여덟 차례 교섭이 있었다.
새 왜관은 1675년 공사를 시작해 1678년 4월 완공되었다. 지금의 용두산 공원 일대인 초량 왜관은 약 33만㎡(10만 평)로 두모포 왜관의 10배쯤이었고, 일본어 위키백과는 약 4천 평인 나가사키 데지마의 25배에 해당한다고 비교한다. 용두산을 사이에 두고 동관에는 왜관을 총괄하는 관수의 관저와 교섭·무역 시설이, 서관에는 일본에서 온 사절이 묵는 세 대청이 있었다. 보통 쓰시마에서 온 성인 남자 400~500명, 많을 때는 1,000여 명이 살았고, 가족을 데려올 수 없었으며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식료품은 왜관 문밖에서 날마다 열리는 아침 시장에서 샀다.
왜관은 통신사 외교를 떠받친 일상의 창구였다. 새 쇼군이 들어서면 쓰시마는 막부의 명으로 그 사실을 알리는 사자와 통신사를 청하는 사자를 차례로 부산에 보냈고, 사행의 세부도 왜관에서 협의했다. 아메노모리 호슈가 조선어를 배운 곳도 부산이었다. 왜관은 메이지 정부의 일본 외무성이 1872년 이를 접수한 뒤 성격이 바뀌었고, 1876년 조일수호조규로 두 나라 관계의 틀 자체가 달라졌다.
중급
피로인을 데려오다
전쟁 중 군인·농민·여성과 아이·학자·장인 등 수만 명의 조선 사람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추정치는 크게 엇갈린다. 일본의 역사학자 나이토 슌스케는 2만–3만 명을, 다른 학자들은 5만 명가량을 제시했으며, 한국 측 추정 가운데에는 이보다 훨씬 큰 것도 있다. 많은 이가 전쟁으로 줄어든 일본의 노동력을 메우는 데 부려졌고,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 등에게 노예로 해외에 팔려 갔다.
그들을 데려오는 일은 첫 세 사행의 주요 임무였다. 1607년 첫 사행이 데려온 사람은 부사 경섬의 『해사록』에 따르면 1,418명,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1,240여 명이며, 일본 측 설명은 약 1,300명을 든다. 그러나 포로 생활이 길어질수록 귀환은 어려워졌다. 많은 이가 일본에서 결혼해 자식을 두었고, 주인에게 빚을 진 이도 있었으며, 해외로 팔려 간 이도 있었다. 1624년 사행의 부사 강홍중은 일기에 일본 측이 협조를 약속하고도 실제로는 비협조적이었다고 적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사행이 데려온 사람이 수십 명에 그쳤다고 전한다. 같은 사전은 사절 등을 통해 쇄환된 사람이 6천 명을 넘지 않는다고(쓰시마 사절 768명, 탐적사·회답겸쇄환사 4,885명, 통신사 14명) 집계하고, 일본 측 연구로는 나이토 슌스케가 약 7,500명 이상으로 셌고, 요네타니 히토시는 같은 사람을 겹쳐 센 가능성을 지적하며 약 6,100명으로 다시 셌다. 어느 쪽이든 끌려간 사람의 극히 일부였다.
일본에 남아 일본 문화에 자취를 남긴 이들도 있었다. 사가의 나베시마 가문 같은 다이묘들이 규슈와 서일본으로 데려간 조선 도공들은 대륙식 자기 제작 기술을 전했다. 조선 도공 이삼평이 1616년 아리타에서 자기 원료를 발견해 일본 자기를 열었다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현지에서 기려지고 있지만, 나카무라 다다시 등 역사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18–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며 당대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혔다.
조선의 유학자 관료 강항은 1597년 도도 다카토라의 수군에 붙잡혀 오즈를 거쳐 후시미에 억류되었는데, 그곳에서 에도 시대 성리학의 개척자 후지와라 세이카와 교유하며 유교 경전에 관한 그의 작업을 도왔다. 그는 1600년 후시미를 떠났고 뒤에 포로 생활을 기록한 『간양록』을 남겼다. 그의 이야기는 전쟁의 폭력과 그 문화적 결과가 얼마나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중급
시와 그림, 그리고 필담
조선 관리와 일본 학자는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둘 다 한문을 쓸 줄 알았다. 사절단이 머무는 곳마다 일본의 유학자·의사·시인들이 숙소를 찾아와 한시를 주고받고(창화), 종이에 글을 써서 대화하는 ‘필담’을 나누었다. 이런 교류를 모은 책들이 일본에서 간행되었다. 글씨를 청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막부는 1682년부터 사신들에게 직접 휘호를 부탁하는 것을 금지했다.
통신사는 양쪽으로 지식을 실어 날랐다. 조선 의원들은 일본 의사들과 의학을 토론했고, 김명국·김유성 같은 조선 화원들은 일본에 작품을 남겼다. 김유성은 이케노 다이가 같은 일본 화가들과 교류했다. 일본 화가들은 행렬을 두루마리와 병풍에 그렸고, 우키요에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후가쿠 햐케이(부악백경)』에서 후지산 아래를 지나는 조선 사절 행렬을 그렸다. 사절단원의 이름과 직책을 적은 판화 인쇄물이 구경꾼들의 안내서로 팔리기도 했다.
사절단이 지난 곳들은 그 기억을 간직했다. 1711년 사행의 종사관은 도모노우라 후쿠젠지의 객전에서 바라본 경치를 ‘일동제일형승(日東第一形勝, 조선 동쪽에서 으뜸가는 경치)’이라 칭찬했고, 1748년 정사는 이 객전에 ‘대조루(對潮樓)’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 편액이 지금도 걸려 있다. 지식은 일본에서 조선으로도 건너왔다. 1763–1764년 사행의 정사 조엄은 일본으로 가는 길에 1763년 음력 10월(양력 11월) 쓰시마에서 고구마를 보고 씨고구마를 구해 부산진으로 보내 심게 했고, 돌아오는 길에도 더 구했다. 그는 1764년 음력 6월 18일자 『해사일기』에 고구마가 ‘흉년을 지낼 밑천으로 좋을 듯하다’고 적었다. 조선의 고구마 재배는 전통적으로 그와 연결된다.
통신사는 일본의 민속 문화에도 흔적을 남겼다. 쓰의 도진오도리, 우시마도의 가라코오도리처럼 조선 행렬과 연결되는 공연이 지금도 지역 축제에서 이어지며(가라코오도리는 통신사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있으나 기원은 확정되지 않았다), 에도 사람들은 간다 마쓰리 행렬에서 조선 사신으로 분장하기도 했다.
중급
서로가 본 상대
조선 쪽에서 통신사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일본을 살피는 일이었다. 많은 사행원이 사행록을 썼고, 이들은 뒤에 『해행총재』로 엮였다. 가장 유명한 것은 1719년 사행의 제술관 신유한이 쓴 『해유록』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책은 일본의 지리·풍속·제도는 물론 초목까지 기술하고, 일본 승려들과 나눈 필담을 기록하며, 끝에 일본의 풍속과 주자학에 관한 「문견잡록」을 실었다.
조선 사람들은 교토·오사카·에도의 번화함에 놀랐다. 신유한은 일본의 높은 식자율, 출판, 의학, 청결함을 높이 평가했지만, 관직이 과거가 아니라 세습으로 이어지는 점을 비판했다. 조선 사신들은 교토의 천황과 에도의 쇼군의 관계를 두고도 고심했는데, 1763–1764년 사행의 정사 조엄은 쇼군이 국왕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반응도 엇갈렸다. 막부는 통신사를 자기 위신을 보여 주는 기회로 삼아 막대한 비용을 들였다. 막부가 쓴 ‘내빙(라이헤이)’이라는 말에는 예를 바치러 왔다는 뜻이 담겨 있었고, 1748년의 『영조실록』 기사는 막부가 여러 지방에 내린 패문에 ‘조선이 조공을 바치러 들어온다’고 적었으며 사신들은 일이 생길까 두려워 못 들은 체했다고 전한다. 물론 조선은 이 관계를 대등한 나라 사이의 외교로 이해했다. 대중서의 영향 속에 많은 일본인은 조선이 다시 침략당할까 두려워 조공을 바친다고 믿었다. 야마가 소코나 모토오리 노리나가 같은 저술가들은 통신사를 조공으로 보며 그런 관점에서 히데요시의 침략을 높이 평가했고, 이런 생각은 뒤에 19세기의 정한론으로 이어졌다.
다르게 본 사람도 있었다. 쓰시마번에 봉직하며 부산 왜관에서 조선어를 배우고 1711년과 1719년 사행을 수행한 학자 아메노모리 호슈는 조선 외교 지침서 『교린제성(交隣提醒)』에서 상대의 풍속을 존중하라고 강조했으며, 현대 학자들은 여기서 일종의 문화상대주의를 읽어 낸다. 그는 이 책에서 전쟁 때 조선 사람의 코를 묻은 귀무덤 옆 호코지에서 사신을 접대하려 한 계획도 비판했다.
중급
마찰: 칭호, 비용, 그리고 살인 사건
통신사를 맞는 데에는 큰돈이 들었다. 막부는 일본 안에서의 음식·숙소·교통을 부담했고, 일본의 사전들은 한 번의 사행 비용을 금 50만 냥에서 100만 냥까지로 다르게 추산하는데, 어느 사행의 어떤 비용을 센 것인지가 늘 분명하지는 않다. 부담은 짐꾼·말·배를 대야 했던 길목의 번과 마을에 떨어졌다. 조선도 예물과 준비에 많은 비용을 썼다.
1711년 쇼군 이에노부의 측근 학자 관료 아라이 하쿠세키는 길목의 연회를 줄이고, 조선 국서에서 쇼군을 ‘대군’이 아니라 ‘일본 국왕’으로 부르게 했다. 이 변경이 사절단 도착 직전에 통보되면서 심각한 외교 마찰이 일어났고, 아메노모리 호슈는 이 문제로 하쿠세키와 대립했다. 1719년 쇼군 요시무네는 예전 형식을 되살렸다.
전쟁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1719년 사절단은 히데요시가 세운 교토의 호코지, 귀무덤 바로 옆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일본 관리들은 이 절이 히데요시와 무관하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정사와 부사만 형식적으로 참석하고 무덤은 가려 두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이에 앞서 1625년에는 조선의 부사가 귀무덤을 찾은 일도 있었다.
1764년 오사카의 사절단 숙소에서 조선 관원 최천종이 쓰시마의 통사 스즈키 덴조에게 살해되었다. 동기는 자료마다 다르다(아래 1763–1764년 절). 이 사건은 가부키와 인형극의 소재가 되었다. 이런 오해와 조선을 조공국으로 보는 믿음이 양쪽의 편견을 굳혔다고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중급
1711–1719년: 하쿠세키의 개혁, 방광사 논쟁, 호슈와 신유한
1711년 쇼군 이에노부의 측근 학자 관료 아라이 하쿠세키는 통신사 접대를 크게 바꾸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한 번에 약 100만 냥이 드는 접대를 이유로 처음에는 초빙 자체에 반대했으나 로주 쓰치야 마사나오의 반대로 물러섰고, 대신 길목의 연회를 몇 곳으로 줄이고 다른 숙소에서는 음식만 대게 했다(연회 장소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오사카·교토·나고야·슨푸와 갈 때의 아카마가세키, 돌아올 때의 우시마도를 들고, 일본어 위키백과는 여섯 곳을 드는 등 자료마다 조금 다르다). 접대비가 60만 냥으로 줄었다고도 하지만 이 수치들의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또 조선 국서에서 쇼군을 ‘대군’이 아니라 ‘일본국왕’으로 부르게 했다. 미야자키 미치오에 따르면 하쿠세키는 ‘대군’이 일본에서는 천황의 칭호를 침범하고 조선에서는 왕자를 가리켜 오히려 대등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 변경이 사절단 도착 직전에 일방적으로 통보되면서 심각한 외교 마찰이 일어났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조선이 문제 삼은 것은 절차였고 ‘국왕’ 호칭 자체는 대등한 외교에서 바람직한 것이었다고 설명하며, 브리태니커 일본판은 조선도 반대했으나 하쿠세키의 설득으로 국서를 고쳤다고 적는다. 부사 임수간의 『동사일기』에는 1711년 음력 11월 일본이 보낸 국서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한 시말(「국서청개시말」)이 실려 있고, 그는 하쿠세키와 중국 역사·서양 문물·양국 정세를 두고 필담(「강관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이 칭호 문제로 하쿠세키와 날카롭게 맞섰다. 귀국한 정사 조태억은 이듬해 ‘왜인의 국서가 격식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관작을 빼앗기고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하쿠세키의 개혁은 한 번으로 끝났고, 1719년 쇼군 요시무네는 ‘대군’ 호칭과 이전의 접대로 되돌렸다.
1719년 사행(정사 홍치중)은 전쟁의 기억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제술관 신유한의 『해유록』에 따르면 교토에 들어가기 전날(양력 12월 10일) 오쓰에서 쓰시마 측이 관백의 명으로 대불사(방광사, 호코지)에서 연회를 열겠다고 하자, 사신은 ‘대불사는 수길의 원당이라 하더이다. 이 적은 우리나라 백 년의 원수로서 의리상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는데 어찌 그 절에서 술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라며 거절했고, 실랑이는 교토에 들어간 음력 11월 1일(양력 12월 11일) 종일 이어졌다. 쓰시마의 봉행과 아메노모리 호슈(조선 기록의 우삼동) 등이 원당이라는 말은 일본인으로서 듣지 못한 바라고 했지만, 사신은 ‘비록 10년이 되더라도 머물기가 어려울 것이 없소’라고 버텼다. 이튿날 교토 쪽에서 내준 『일본연대기』를 보고 대불사가 이에미쓰 때 중건된 것이라고 설득되자 정사와 부사는 잠깐 들르기로 했으나, 종사관은 끝까지 반대했다. 정사는 ‘우리가 원수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 또한 족히 일본에 알려졌다’고 정리했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실제 방광사 대불은 히데요시가 세운 것이며, 호슈 자신이 뒤에 『교린제성』에서 이 연회 계획이 사신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고 ‘히데요시와 무관하다’는 거짓을 거듭했다고 비판했다고 설명한다. 연회 동안 귀무덤을 가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신유한과 호슈의 관계도 미담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음력 12월 28일(양력 1720년 2월 6일) 쓰시마에서의 이별 때 신유한이 필담 중에 ‘이승에서는 다시 그대를 만날 길이 없구나’라는 구절을 쓰자, 호슈는 ‘나는 지금 늙었습니다… 섬 가운데에서 귀신이 될 것입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신유한은 같은 날 일기에 그를 ‘겉으로는 문장을 한다고 핑계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창과 칼을 품었으니’라고 평하고, 그 눈물은 ‘곧 자신을 슬퍼한 것’이라고 적었다. 신유한은 오사카에서 글을 청하는 사람이 몰려드는 것을 ‘마치 가난한 사람이 묵은 빚에 쪼들리면서 다시 새 빚이 쌓이는 것 같아서’라고 표현했고, 김성일의 『해사록』, 유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이 오사카에서 출판된 것을 보고는 ‘적을 정탐한 것을 적에게 고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한탄했다. 문화 교류와 경계심은 같은 사행 안에 함께 있었다.
중급
1763–1764년: 영조의 눈물과 오사카의 살인
1763년 음력 8월 3일(양력 9월 9일), 영조는 일본으로 떠나는 정사 조엄, 부사 이인배, 종사관 김상익을 불러, 임진왜란 때 파헤쳐진 선릉과 정릉을 가리키는 ‘두 능의 송백(二陵松柏)’ 구절을 외우며 목이 메어 눈물을 머금었고, ‘잘 갔다 오라(好往好來)’ 네 글자를 써 주었다. 조엄은 그날 일기에, 경연 자리에서 이미 ‘통분함을 참고 원통함을 삼키지만 절박하여 어쩔 수 없어서이다(忍痛含寃 迫不得已)’라는 여덟 자를 아뢰었다고 적었다. 전쟁이 끝난 지 160년이 넘었어도 그 상처는 왕실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사행은 이듬해 봄 에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사카에 머물렀다. 조엄의 『해사일기』에 따르면 1764년 음력 4월 7일(양력 5월 7일, 이날은 두 나라 달력이 같았다) 꼭두새벽, 정사를 모시던 도훈도 최천종이 숙소에서 자다가 가슴을 타고 앉은 자에게 목을 찔렸다. 그는 범인이 ‘분명 왜인’이었다고 말하고, ‘나는 이번 길에 어떤 왜인과도 다투었거나 원망을 맺을 꼬투리가 없는데’라고 한 뒤 해가 뜬 뒤 숨졌다. 방에 남은 흉기에는 일본의 표식이 있었다. 조엄은 최천종이 자신이 경상 감사로 있을 때 신임하던 장교였다고 적고, 통신사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변괴라고 했다.
사행의 서기였던 성대중에 따르면 쓰시마 측은 모르는 체하며 떠나기를 재촉했지만, 조엄은 오사카에 머물며 떠나지 않았고 쓰시마도 범인을 숨길 수 없었다. 범인은 쓰시마번의 통사 스즈키 덴조였다. 음력 4월 19일 조엄이 들은 바로는 덴조가 신문에서 ‘최천종이 거울 하나를 잃고 그가 훔쳐갔다고 의심하면서 말채찍으로 때렸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해 죽였으며 공모자는 없다고 자백했다. 덴조는 음력 5월 2일(양력 6월 1일) 조선 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성대중은 조엄이 ‘한 달 만에 옥사가 이루어져 처형하는 것을 지켜보고야 돌아왔다’고 썼다.
동기는 지금도 단정하기 어렵다. 조선 쪽 기록은 덴조의 자백(거울 도난 의심과 매질에 대한 원한)을 전한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최천종이 ‘일본인은 도둑질을 잘한다’고 한 말을 덴조가 따진 것이 발단이었다는 설명을 싣고, 일본의 한 인명사전은 두 사람이 짜고 바닷물에 상했다고 속인 예물 인삼을 팔아 큰돈을 얻었는데 덴조가 몫을 주지 않으려 최천종을 죽였다는 금전설을 싣는다. 성대중은 사건을 쓰시마 사람들의 소행으로 보았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사건은 1767년 가부키로 각색되었다가 곧 상연이 금지되었고, 뒤에도 ‘도진고로시(唐人殺し)’라 불린 연극들로 이어졌다. 같은 항목은 막부가 경과를 쓰시마를 거치지 않고 조선에 직접 알리려다 소씨의 반대로 거두었다고 전한다.
중급
마지막 통신사와 한 시대의 끝
1787년 쇼군 이에나리가 취임한 뒤,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덴메이 대기근 뒤의 어려운 재정 속에서 조선에 사절 파견을 미뤄 달라고 요청했다. 1791년 막부는 의례를 에도가 아니라 쓰시마에서 치르자고 제안했다. 조선은 처음에 거절했고 교섭은 20년을 끌었지만, 조선도 비용을 줄이고 싶었기에 1810년 순조가 이를 받아들였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788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보낸 연기 요청은 전례가 없고 이유도 분명하지 않아 조선이 한때 가짜 사신으로 취급할 정도였다. 1791년 쓰시마에서의 의례를 타진할 때 막부가 내세운 이유는 거듭된 흉작으로 사절을 맞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쓰시마 의례는 따를 수 없지만 파견은 미루겠다고 답했고, 1805년에는 역지빙례를 성사시키려고 쓰시마번의 뇌물을 받은 조선 역관들이 드러나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본격적인 교섭은 1806년에 시작되었다.
1811년 음력 2월 12일(양력 3월 6일) 한성을 떠난 정사 김이교와 부사 이면구의 열두 번째 통신사는 쓰시마로 건너가, 음력 5월 22일(양력 7월 12일) 쓰시마 부중에서 막부가 보낸 상사·부사에게 조선 국서를 전했다(장소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객관으로, 의례를 분석한 연구는 쓰시마 도주의 저택으로 본다)(쇼군의 회답서를 받는 의식은 따로 치렀다). 종사관 없이 규모를 크게 줄인 이 ‘역지통신(易地通信, 일본에서는 역지빙례)’은 비용을 줄였지만 에도로 가는 행렬이라는 공개적인 장관은 사라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전과 달리 막부가 일본 백성이 통신사 일행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적는다.
왜 쓰시마였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일본의 사전들은 덴메이 기근 뒤의 재정난을 들고, 일본어 위키백과는 조선에도 비용 부담을 피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사록(유상필)」 항목은 일본에서 존왕 사상과 국학이 대두해 조선 사행을 통한 유교 수용의 의미가 줄었다는 해석을 내놓고, 군관 유상필의 일기가 소략한 것을 일본의 관심이 줄어든 탓으로 보며, 일본 측에서 ‘이제 배워야 할 것은 다 배웠다는 태도’를 읽는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막부가 비용은 줄였지만 쇼군의 권위를 국내에 드러낸다는 또 하나의 의미는 잃었다고 평가한다.
이후 오사카나 쓰시마에서 치르는 사행이 거듭 결정되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두 정부 모두 재정이 어려웠고, 그 뒤 수십 년 동안 서양 배들이 동아시아를 압박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811년 사행이 1876년 이후 수신사가 파견될 때까지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간 마지막 사행이었다고 적는다. 1868년 메이지 유신 뒤 새 일본 정부는 옛 관계를 새로운 조건으로 바꾸려 했고, 1875년 강화도 사건 뒤 강요된 1876년의 조약(조일수호조규)은 일본이 한 걸음씩 조선 지배로 나아가는 전혀 다른 시기를 열었다.
심화
원수가 된 두 나라는 왜 다시 국교를 열었나
7년 동안 전쟁을 치른 두 나라가 10년 만에 다시 국교를 연 것은 세 당사자의 서로 다른 계산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먼저 쓰시마에게 국교 회복은 생존의 문제였다. 조선 무역 없이는 섬이 버틸 수 없었고,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에 섰던 소씨는 새 권력자 이에야스에게 쓸모를 보여야 했다. 1606년 조선 비변사도 시게노부가 죽은 뒤 요시토시와 가게나오가 ‘형세가 외로와지자 이 일로써 가강에게 잘 보여 자신을 보호하는 계책을 삼으려는’ 것이라고 보았다. 쓰시마가 국서를 꾸미거나 고쳐서라도 교섭을 성사시키려 한 동기가 여기에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조선과의 평화는 필요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설명에 따르면 1603년 막부를 열었지만 서부의 다이묘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이에야스는 대외 관계를 안정시켜 국내 통치에 힘을 쏟아야 했고, 조선 사절의 방문을 다이묘들에게 정치적 우위를 확인시키는 계기로 삼으며 명과 통하는 길도 찾으려 했다. 1606년 조선 비변사는 ‘가강에게 있어서는 화친을 하면 뽐낼 수 있고 화친하지 않더라도 손해볼 것이 없’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쓰시마 측은 이에야스가 먼저 화친을 청하는 국서를 보내려 하지 않는다고 전했고, 이것이 교섭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다만 이는 쓰시마를 거쳐 전해진 말이어서, 전계신도 ‘가강의 말은 우리가 친히 들은 것이 아닌데 어찌 그 진위를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조선은 명분으로는 원수와 화친할 수 없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남쪽 변방의 안정, 일본 국정의 탐색, 피로인 쇄환을 국교 재개의 실질적 동기로 꼽는다. 전후 복구에 힘을 쏟으려면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야 했고, 북쪽에서는 여진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일본의 새 정권이 다시 쳐들어올지 알아야 했다. 끌려간 백성을 데려오는 일은 왕도정치를 내세운 조정이 외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쓰시마가 더 절박했던 만큼 조선은 국서 선행과 범릉적 압송이라는 조건을 내걸어 명분을 챙길 수 있었고, 기유약조에서는 전쟁 전보다 훨씬 엄격한 통제를 관철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조선이 일본의 조건 수락과 함께 도쿠가와 정권이 도요토미 정권을 대신했다는 명분을 바탕으로 국교를 재개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다시 열린 평화는 서로 다른 계산과 고쳐 쓴 국서 위에 서 있었다. 조선은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내고 범인을 잡아 바쳤다는 형식을 얻어 ‘회답’의 명분을 지켰고, 막부는 조선 사절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새 정권의 위신으로 삼았다. 그 사이를 이은 것이 생계가 걸린 쓰시마의 국서 개작이었다. 조선 조정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해석이 엇갈린다. 조정은 범인이 가짜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회답을 택했고, 사신들은 국서의 칭호와 도장을 따졌으며, 히데타다의 답서가 이에야스 명의 국서와 맞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했다. 일본 쪽 서술에는 조선이 위조를 알고도 묵인했다는 설명도 있지만, 조정이 국서 위조를 확신하고 문제 삼았음을 보여 주는 당대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쓰시마의 국서 개작은 1631년 도주 소 요시나리와 가로 야나가와 시게오키의 다툼이 막부 소송으로 번지면서 드러났고, 1633~1634년의 심리를 거쳐 1635년 쇼군 이에미쓰의 친재로 매듭지어졌다(야나가와 사건). 그 뒤 외교 문서의 형식이 정비되고 1636년부터 ‘통신사’라는 이름이 다시 쓰였다. 평화를 만든 것은 화해의 감정이 아니라 각자의 이해와 그것을 이어 붙인 중개자였지만, 그렇게 열린 관계는 1811년까지 열두 차례의 사절과 260여 년의 부산 무역으로 이어졌다.
심화
원수의 나라에 왜 200년 동안 사신을 보냈나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열두 번, 200년 넘게 일본에 사절을 보낸 것은 일본을 용서해서가 아니었다. 1763년 사행의 정사 조엄은 영조 앞에서 사행의 뜻을 ‘통분함을 참고 원통함을 삼키지만 절박하여 어쩔 수 없어서이다’라는 여덟 자로 아뢰었다. 원수라는 기억과,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현실이 200년 내내 함께 있었다. 사료와 연구가 보여 주는 이유는 대략 네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여러 설명을 묶은 정리이며, 각 요소의 비중은 시기와 학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첫째, 안보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선 후기 통신사의 목적으로 전쟁 상태의 종결, 피로인 쇄환, 일본 사정의 탐색, 쇼군 습직 축하를 든다. 북쪽에서 여진(뒤의 청)이 커 가는 동안 남쪽만큼은 안정시켜야 했고,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기미가 없는지 알아야 했다. 통신사는 부산에서 에도까지 일본 안을 수천 리 지나며 정세를 살필 드문 기회였다. 1643년 사행은 일본의 해금 정책과 시마바라의 난을, 1655년 사행은 ‘가도조선’ 정보를 확인하는 임무를 띠었고, 사행원들은 일본의 지리·제도·군비·정치를 적은 사행록을 남겨 뒤에 『해행총재』로 엮였다. 다만 남쪽의 외교 덕분에 북쪽의 전쟁을 버틸 수 있었다는 식의 인과는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다. 1636년의 사신들은 정작 본국이 청에 침략당한 사실을 두 달 넘게 몰랐다.
둘째, 명분과 질서였다. 조선은 중국에는 ‘사대’, 이웃 나라에는 ‘교린’이라는 틀 속에서 일본의 최고 권력자와 대등한 형식의 국서를 주고받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636년 이후 명·청 교체로 중화 질서가 무너지자 통신사가 청 중심의 책봉 체제 바깥에서 두 나라의 독자적인 대등 외교를 세웠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한다. 구조도 조선에 크게 불리하지 않았다. 사절은 막부의 요청을 받아 보냈고, 일본 안에서의 교통·숙박·접대 비용은 일본이 댔다. 조선은 일본 사신이 한성에 오는 것을 원칙적으로 막아 1592년의 침략로가 된 옛 상경로를 다시 열지 않았고, 일본과의 일상적인 교섭과 무역은 부산 왜관 안에 가두었다.
셋째, 상대의 필요와 중개자였다. 도쿠가와 막부에게 조선은 정식 국교를 맺은 유일한 독립국이었고, 아라노 야스노리와 로널드 토비는 수백 명의 외국 사절이 쇼군에게 국서를 바치러 오는 행렬이 쇼군의 국제적 지위와 정당성을 국내에 보여 주는 무대였다고 본다. 쓰시마에게 조선 무역은 생존의 문제였으므로, 소씨는 새 쇼군이 설 때마다 사절을 청했고, 국서를 고쳐 쓰면서까지 관계를 이었다. 관계를 더 간절히 원한 쪽이 일본과 쓰시마였기에, 조선은 국서의 형식과 조건을 따질 수 있었다.
넷째, 그래도 잊지 않았다. 1719년 사신들은 ‘우리나라 백 년의 원수’의 절에서 술을 마실 수 없다고 버텼고, 1763년 영조는 파헤쳐진 두 능을 떠올리며 목이 메었다. 통신사는 우호의 사절이었지만 원수의 기억을 지운 사절은 아니었다. 길 위에서 꽃핀 시와 그림, 필담의 교류는 이 관계가 남긴 큰 결실이지만, 파견의 이유라기보다는 그 결과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유가 약해지자 사행도 끝났다. 18세기에 대륙이 안정되자 사행은 의례가 되었고, 덴메이 기근 뒤 일본의 재정난, 조선의 비용 부담, 일본 쪽에서 통신사의 정치·문화적 의미가 줄었다는 해석까지 여러 사정이 겹쳐 1811년 쓰시마의 역지빙례가 마지막이 되었다. 200년의 통신사는 침략의 기억을 간직한 조선과 위신·안보·무역을 셈한 일본이 평화를 관리해야 했던 계산, 그리고 그 계산을 이어 붙인 쓰시마가 함께 만든 관계였다. 이 관계를 대등한 교린으로 볼지, 막부의 위신 연출로 볼지는 아래 ‘해석의 문제’ 절에서 다룬다.
심화
대등한 이웃인가, 조공인가, 정당성의 연출인가: 해석의 문제
역사학자들은 통신사의 의미를 두고 논쟁해 왔다. 중국에 대한 ‘사대’와 이웃 나라에 대한 ‘교린’이라는 조선의 외교 틀에서 일본은 대등한 이웃이었고, 통신사는 조선 국왕과 일본 지배자의 대등함을 드러내는 사절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의 집필자 손승철 같은 한국 학자들은 1636년 이후의 통신사가 청 중심의 책봉 체제 바깥에서 조선과 일본이 독자적인 대등 외교를 세운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에도 시대 일본의 일부 저술가와 뒤의 일부 학자는 일본이 한성에 상응하는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통신사를 조공으로 보았다. 한국 학자들은 이것이 전쟁 뒤 조선이 일본 사신의 상경을 금지했기 때문이며, 통신사는 막부의 요청으로 파견되었고 일본 안에서의 비용도 막부가 부담했다고 반박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손승철 항목이나 일본 사전류의 아라노 야스노리 항목처럼 두 나라 학자들이 쓴 참고서는 이 관계를 두 군주 사이의 형식상 대등한 관계로 설명한다. 동시에 양쪽은 의례를 각자 국내 정치의 목적에 맞게 해석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로널드 토비는 막부가 조선과 류큐의 사절을 이용해 쇼군을 외국 왕국이 사절을 보내오는 지배자로 국내에 보여 줌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쌓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구는 아라노 야스노리 등의 연구와 함께, 도쿠가와 일본을 ‘쇄국’ 국가로 보던 예전의 그림에 도전하며 일본이 조선·류큐·아이누·중국인·네덜란드와 관리된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 주었다.
세부 사항을 둘러싼 논쟁도 있다. 사행 인원, 귀환한 피로인 수, 사행 비용은 자료마다 다르다. 다시로 가즈이가 자세히 연구한 야나가와 사건의 국서 위조는 각 정부가 자기 이름으로 무엇이 오갔는지를 얼마나 알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통신사가 조선에서 일본으로 문화를 일방적으로 전했다는, 대중서에서 아직 흔한 견해는 고구마에서 일본 유학자들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신들이 일본에서 배워 온 것에 관한 연구를 통해 수정되고 있다.
심화
재발견과 세계기록유산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통신사는 대중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1970년대부터 재일 한국인 학자들이 통신사의 유적·그림·문헌을 다시 찾아내는 일에 앞장섰고, 예상보다 따뜻한 일본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행사는 처음에 쓰시마에서, 이어 혼슈의 사행로 곳곳에서 열리기 시작해 한일 공동 축제로 커졌다.
한국에서는 2011년 부산에 조선통신사 역사관이 문을 열었다. 행렬 재현 행사가 부산과 일본의 여러 도시에서 열리고 있으며, 한국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복원한 통신사선은 2025년 4월 28일 부산을 떠나 5월 11일 오사카항에 들어갔다. 이는 오사카 엑스포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에 맞춘 항해였다.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은 부산문화재단과 통신사 연고지들이 모인 일본의 협의회가 함께 준비했고, 2017년 10월 등재되었다. 등재 기록은 1607–1811년 12차례 사행의 외교 기록·여정 기록·문화 교류 기록 111건 333점이다. 유네스코는 통신사가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끊긴 관계를 회복하고 평화로운 관계와 교류에 기여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통신사는 흔히 화해의 본보기로 소개된다. 역사학자들은 통신사가 상징하는 평화가 치열한 흥정, 위조, 서로에 대한 의심, 같은 의례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 위에 서 있었다는 점을 덧붙인다. 참혹한 전쟁을 치른 두 이웃이 그래도 200년 동안 대화를 이어 갔다는 이 복잡한 이야기야말로 더 쓸모 있는 교훈일지 모른다.
핵심 개념
- 전쟁 뒤의 평화
- 통신사는 임진왜란 뒤의 강화에서 생겨났다. 피로인 송환, 적대 관계의 종식, 부산에서의 통제된 무역 재개가 그 출발점이었다.
- 교린
- 조선은 조공을 바치던 중국과 달리 일본을 대등한 이웃으로 대했다. 통신사는 조선 국왕과 일본 지배자 사이의 그 대등함을 드러냈다.
- 중개자
- 조선 무역에 기대어 살던 쓰시마의 소 가문은 국서를 위조해서라도 관계를 굴러가게 했고, 야나가와 사건으로 그 사실이 드러났다.
- 누가 먼저 고개를 숙이나
- 조선은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내야 한다고 고집했고, 쓰시마 측은 이에야스가 먼저 화친을 청하는 글을 쓰려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쓰시마가 국서를 고쳐서라도 그 형식을 맞추었기에 1607년 사절은 ‘회답’사가 될 수 있었다.
- 참고 삼킨 평화
- 통신사는 원한을 잊은 화해가 아니라, 1763년 정사 조엄의 말처럼 ‘통분함을 참고 원통함을 삼키지만 절박하여 어쩔 수 없어서’ 이어 간, 관리된 평화였다.
- 하나의 의례, 두 가지 해석
- 조선은 통신사를 대등한 외교이자 일본을 살필 기회로 보았고, 많은 일본인은 쇼군의 위신을 높이는 예방으로 보았다.
- 길 위의 문화
- 시의 창화, 필담, 그림, 의학, 축제가 부산에서 에도까지 이어지는 길 위에서 몇 달에 걸친 문화 교류를 만들어 냈다.
- 함께하는 기억
- 2016년 한일 공동 신청을 거쳐 201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통신사는 화해의 상징이 되었지만, 역사학자들은 그 복잡한 실상을 함께 강조한다.
기록
- 1590년 — 황윤길·김성일이 이끈 통신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남. 2년 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함.
- 1592년 — 일본군이 한성 남쪽의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을 파헤침.
- 1598년 —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군이 조선을 떠남.
- 1599년 — 쓰시마의 소 요시토시가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기 시작함.
- 1604년 — 승려 유정(사명대사)이 탐적사로 쓰시마에 건너가, 1605년 봄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남.
- 1606년 — 조선이 국서 선행과 범릉적 압송을 요구하고, 쓰시마가 이에야스 명의 국서와 ‘범인’ 두 사람을 보냄.
- 1607년 — 여우길이 이끈 도쿠가와 시대 첫 사절(회답겸쇄환사)이 양력 6월 29일 에도에서 히데타다에게 국서를 전하고, 7월 13일 슨푸에서 이에야스를 만남. 『해사록』 기준 1,418명이 귀환.
- 1609년 — 쓰시마와 맺은 기유약조로 부산 한 곳에서, 도주의 배는 해마다 20척까지로 통제된 무역이 다시 열림.
- 1617년 — 두 번째 사행. 후시미성에서 히데타다가 접견함.
- 1624년 — 세 번째 사행(정사 정립). 양력 1625년 1월 27일 에도에서 이에미쓰에게 국서를 전함.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을 쓴 마지막 사절.
- 1631년 — 쓰시마 도주와 가로 야나가와 시게오키의 다툼이 막부 소송으로 번져 국서 위조가 드러나기 시작함.
- 1635년 — 야나가와 사건: 쇼군 이에미쓰가 양력 4월 27일 에도성에서 두 사람을 대질시키고, 이튿날 소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 줌. 이정암 윤번제와 ‘대군’ 칭호가 정해짐.
- 1636년 — 임광 등이 이끈 전쟁 뒤 첫 ‘통신사’가 양력 9월 9일 한성을 떠남.
- 1637년 — 양력 1월 9일 통신사가 에도성에서 국서를 전한 날,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감. 1월 17일 닛코 방문, 2월 24일 인조 항복, 3월 17일 사신들이 쓰시마에서 처음 전란 소식을 들음. 12월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남.
- 1639년 — 막부가 포르투갈 배의 내항을 금지함.
- 1641년 — 네덜란드 상관이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겨짐.
- 1655년 — 이 사행부터 새 쇼군마다 사절을 보내는 것이 관례가 됨.
- 1678년 — 부산의 왜관이 두모포에서 초량(지금의 용두산 일대)으로 옮겨짐.
- 1711년 — 아라이 하쿠세키가 접대를 줄이고 쇼군 칭호를 ‘일본국왕’으로 바꾸게 해 외교 마찰이 일어남.
- 1719년 — 제술관 신유한이 『해유록』을 남긴 사행. 교토 방광사(대불사) 연회를 둘러싼 마찰.
- 1763년 — 영조가 떠나는 세 사신 앞에서 파헤쳐진 두 능을 떠올리며 목이 멤. 정사 조엄이 쓰시마에서 고구마를 보고 씨고구마를 부산진으로 보냄.
- 1764년 — 양력 5월 7일 사행원 최천종이 오사카 숙소에서 쓰시마 통사 스즈키 덴조에게 살해됨. 덴조는 6월 1일 처형됨.
- 1801년 — 시즈키 다다오가 켐퍼의 책을 번역하며 ‘쇄국’이라는 말을 만듦.
- 1811년 — 마지막 통신사. 양력 7월 12일 에도가 아니라 쓰시마에서 막부 사절에게 국서를 전함.
- 2017년 — 조선통신사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
- 2025년 — 복원한 통신사선이 부산을 떠나 오사카항에 들어감.
용어 풀이
- 통신사
- ‘믿음을 통하는 사절’. 조선이 대등한 일본 지배자에게 보낸 사절을 부른 이름.
- 회답겸쇄환사
- ‘국서에 회답하고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오는 사절’. 1607·1617·1624년 사행의 공식 명칭.
- 탐적사
- ‘적의 사정을 살피는 사신’. 1604년 정식 강화 사절 대신 유정에게 맡긴 임무의 이름.
- 범릉적
- 1592년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 그 압송이 국교 재개의 조건이 되었다.
- 세견선
- 쓰시마 도주 등이 해마다 조선에 보낼 수 있도록 허락된 무역선. 기유약조로 도주의 세견선은 20척이 되었다.
- 기유약조
- 1609년(기유년) 조선과 쓰시마 도주가 맺은 약조. 무역선 수와 기항지(부산)를 정해 1872년 무렵까지 관계의 틀이 되었다.
- 교린
- 일본 등 이웃 나라를 대등하게 대하는 조선의 외교 방침. 중국에 대한 ‘사대’와 짝을 이룬다.
- 삼사
- 사절단을 보통 이끈 정사·부사·종사관(1811년 사행에는 종사관이 없었다).
- 왜관
- 부산에 있던 일본인 거류·무역 시설. 쓰시마 관리들이 머물렀고 일본 사신도 이곳에서 접대받았다.
- 대군(다이쿤)
- 1636년부터 조선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 쇼군을 부른 칭호(1711년 제외).
- 필담
- 말이 통하지 않는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이 한문을 써서 나눈 대화.
- 마상재
- 조선의 기수들이 쇼군 앞에서 선보인 말 위의 곡예.
- 내빙(라이헤이)
- 막부가 조선 사절을 부른 말. ‘예를 갖추어 찾아옴’이라는 뜻으로, 많은 일본인이 이를 조공으로 이해했다.
- 역지통신(역지빙례)
- 1811년 에도 대신 쓰시마에서 국서를 교환한 방식.
- 이정암 윤번제
- 1635년 야나가와 사건 뒤 교토 오산의 학승을 차례로 쓰시마 이정암에 보내 조선 외교 문서를 맡기고 국서 개작을 감시하게 한 제도.
- 쇄국
- 에도 막부의 기독교 금지·무역 통제·해외 도항 금지 정책을 가리키는 뒷날의 말. 1801년 시즈키 다다오의 번역 제목에서 비롯되었다.
- 네 개의 창구(四つの口)
- 나가사키·쓰시마·사쓰마·마쓰마에. 에도 시대 일본이 바깥과 이어진 네 통로를 가리키는 연구 용어로, 1980년 무렵부터 아라노 야스노리가 썼다.
- 초량 왜관
- 1678년 지금의 부산 용두산 일대에 새로 지은 왜관. 약 10만 평으로, 쓰시마 사람들이 머물며 외교와 무역을 맡았다.
묻고 답하기
조선통신사는 모두 몇 번 갔나?
도쿠가와 쇼군에게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번이다. 무로마치 쇼군과 히데요시에게 보낸 앞선 사절까지 합치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선 시대 전체에 20번으로 센다.
조선은 왜 전쟁이 끝나자마자 강화에 나섰나?
끌려간 백성을 되찾고, 일본의 의도를 알아야 했으며, 북쪽에서 커 가는 여진(뒤의 청)의 위협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새 도쿠가와 정권도 평화와 무역을 원했다.
1606년 이에야스의 국서는 진짜였나?
오늘날에는 쓰시마가 꾸며 내거나 고쳐 쓴 것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조선이 요구한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었고, 1607년 히데타다의 답서와 형식이 맞지 않았으며, 쓰시마의 국서 개작 관행은 1630년대 야나가와 사건으로 드러났다(다만 이 재판이 1606년 국서까지 공식 확인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처음부터 새로 만든 것인지 원래 글을 고친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도술로 왜왕을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
아니다. 무쇠 방의 불길을 견디고 왜왕에게 항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임진록』 계열의 설화다. 실제 유정은 1605년 봄 후시미성에서 이에야스를 만나고 많은 포로와 함께 돌아왔지만, 이에야스의 국서는 받아 오지 못했다.
1607년 사절단은 포로를 몇 명이나 데려왔나?
부사 경섬의 『해사록』에 따르면 쓰시마에서 점검한 귀환자는 1,418명이고, 『선조수정실록』은 1,240여 명으로 적는다. 경섬은 일본에 남은 사람이 몇만인지 모른다며 ‘아홉 마리 소 가운데 털 한 개’에도 못 미친다고 탄식했다.
일본도 조선에 사절을 보냈나?
도성까지는 오지 못했다. 전쟁 뒤 조선은 일본 사신을 부산의 왜관까지만 받았고, 쓰시마가 쇼군을 대신해 그곳으로 사자를 보냈다.
한 번 다녀오는 데 얼마나 걸렸나?
계절과 도중의 사정에 따라 한성을 떠나 돌아올 때까지 대개 다섯 달에서 1년쯤 걸렸다.
통신사는 조공 사절이었나?
조선은 대등한 나라 사이의 사절로 보냈다. 당시 많은 일본인은 이를 예방이나 조공으로 불렀고, 막부는 위신을 보이는 데 이용했다. 한국의 손승철, 일본의 아라노 야스노리 같은 현대 역사학자들은 두 군주 사이의 형식상 대등한 관계로 설명하며, 양쪽은 이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어떻게 보았나?
그들의 사행록에는 일본의 도시·책·질서에 대한 감탄과 일본의 정치·풍속에 대한 비판이 뒤섞여 있고, 다시 침략할 기미가 없는지 꼼꼼히 살핀 흔적이 있다.
유네스코 등재 기록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한국과 일본에 나뉘어 있는 외교 기록·여정 기록·문화 교류 기록 111건 333점으로, 2017년 함께 등재되었다.
조선은 왜 원수의 나라에 200년 동안 사신을 보냈나?
용서해서가 아니었다. 다시 침략당하지 않도록 일본을 살피고 남쪽을 안정시키며, 일본의 최고 권력자와 대등한 국서를 주고받는 교린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사절은 막부의 요청으로 갔고 일본 안의 비용은 일본이 댔으며, 생계가 걸린 쓰시마가 관계를 이었다. 1763년 정사 조엄은 이를 ‘통분함을 참고 원통함을 삼키지만 절박하여 어쩔 수 없어서’라고 표현했다. 자세한 설명은 ‘원수의 나라에 왜 200년 동안 사신을 보냈나’ 절에 있다.
1636년 통신사는 병자호란을 알았나?
몰랐다. 사신들이 에도성에서 국서를 전한 양력 1637년 1월 9일,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사신들은 3월 17일 귀국길의 쓰시마에서야 전쟁 소식을 처음 듣고 밤새 모여 울었다.
일본이 ‘쇄국’을 했는데 어떻게 조선 사절을 받았나?
‘쇄국’은 1801년에 만들어진 말이고, 막부는 바깥과의 관계를 모두 끊은 것이 아니라 나가사키·쓰시마·사쓰마·마쓰마에의 ‘네 개의 창구’로 관리했다는 연구가 많다. 그 가운데 조선은 국서를 주고받는 정식 외교 상대였다.
최천종은 왜 살해되었나?
단정할 수 없다. 조선 기록은 범인 스즈키 덴조가 거울 도난 의심과 매질에 대한 원한을 자백했다고 전하고, 일본 쪽에는 말다툼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과 인삼을 둘러싼 금전설이 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손승철, 통신사(通信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아라노 야스노리(荒野泰典)(닛포니카·헤이본샤 항목), 朝鮮通信使(조선통신사), 『日本大百科全書』·『世界大百科事典』·『山川 日本史小辞典』 등. 쇼가쿠칸·헤이본샤·야마카와 출판사, 코토뱅크
- Documents on Joseon Tongsinsa/Chosen Tsushinshi: The History of Peace Building and Cultural Exchanges between Korea and Japan from the 17th to 19th Century.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2017
- 朝鮮通信使. 위키백과(일본어)
- Joseon Tongsinsa. 위키백과(영어)
- 조선 통신사. 위키백과(한국어)
- Joseon missions to Japan. 위키백과(영어)
- 姜沆(강항). 위키백과(일본어)
- 아메노모리 호슈. 위키백과(한국어)
- 柳川一件(야나가와 사건). 위키백과(일본어)
- 기유약조(己酉約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손문욱(孫文彧).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동사록(東槎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1748) 윤7월 30일 2번째 기사: 통신사 일행의 일본 강호에서의 견문.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해유록(海遊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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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