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아이작 뉴턴

Sir Isaac Newton · 대표작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

1665–1687년 ·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잉글랜드 왕국)

한 문장으로

아이작 뉴턴(1642~1727)은 미적분의 한 형태를 고안하고, 흰빛이 여러 색의 혼합임을 보였으며, 『프린키피아』(1687)에서 떨어지는 사과와 행성의 궤도를 함께 설명하는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 법칙을 세운 잉글랜드의 수학자·자연철학자다.

아이작 뉴턴
이미지: Godfrey Kneller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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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아이작 뉴턴은 1642년 크리스마스에 잉글랜드의 울스소프라는 마을 농가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는 주로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농사일에는 소질이 없어서 가족은 그를 케임브리지 대학에 보냈어요.

그가 젊은 대학생이던 때, 무서운 전염병(페스트)이 돌아 대학이 문을 닫았어요. 뉴턴은 거의 2년 동안 고향 농장으로 돌아가 있었어요. 거기서 혼자 생각하고 연구하며 과학 역사상 가장 큰 생각들을 떠올렸어요.

그는 유리 프리즘과 햇빛으로 실험했어요. 그리고 흰빛이 사실은 무지개의 모든 색이 섞인 것이라는 걸 보여 주었어요. 떨어지는 공의 속도처럼 계속 변하는 것을 다루는 새로운 수학, 지금 ‘미적분’이라 부르는 것도 만들었어요.

뉴턴은 나중에 친구에게,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궁금해졌다고 말했어요. 왜 사과는 늘 곧장 아래로 떨어질까? 그는 사과를 떨어뜨리는 바로 그 끌어당기는 힘, 곧 중력이 달을 지구 둘레에, 행성을 태양 둘레에 붙잡아 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1687년 그는 라틴어로 된 유명한 책 『프린키피아』를 펴냈어요. 이 책은 물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한 간단한 세 가지 법칙과 중력의 법칙을 설명했어요. 이 법칙들로 사람들은 행성과 혜성의 길, 바다의 밀물과 썰물까지 계산할 수 있게 되었어요.

뉴턴은 잉글랜드의 동전을 만드는 왕립 조폐국을 이끌었고, 과학자 모임인 왕립 학회의 회장도 지냈어요. 뛰어나지만 까다로운 사람이라 다른 과학자들과 자주 다퉜어요. 세상을 떠난 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어요.

한눈에 보기

생애
1642년 12월 25일 ~ 1727년 3월 20일(당시 잉글랜드의 율리우스력). 오늘날 달력으로는 1643년 1월 4일 ~ 1727년 3월 31일
출생지
잉글랜드 링컨셔 울스소프 매너
주요 활동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1661년 입학, 1667년 펠로, 1669~1701년 루카스 석좌교수), 1696년부터 런던
분야
수학, 광학, 역학, 천문학. 그 밖에 연금술(‘키미스트리’), 신학, 연대학
주요 저술
『프린키피아』(1687, 제2판 1713, 제3판 1726), 『광학』(1704), 『보편 산술』(1707), 사후 출판된 여러 글
핵심 업적
운동의 세 법칙, 만유인력, 미적분(‘유율법’), 흰빛의 복합성, 반사 망원경
공직
케임브리지 대학 선출 하원 의원, 왕립 조폐국 감사(1696)·국장(1699년 말부터), 1703년부터 왕립 학회 회장, 1705년 기사 작위
묘소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 그곳에 묻힌 첫 과학자

쉬움

뉴턴은 누구인가

아이작 뉴턴은 잉글랜드의 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 당시 말로 하면 ‘자연철학자’였다. 그는 흔히 『프린키피아』라 부르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687년 처음 나온 이 책에서 그는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 법칙을 세웠고, 이 둘로 지상의 물체와 하늘의 행성·달·혜성의 운동을 함께 설명했다.

뉴턴은 광학에서도 근본적인 발견을 했다. 햇빛이 여러 색의 혼합임을 보였고, 처음으로 실용적인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수학에서는 변화의 수학인 미적분을 독일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거의 같은 때에 발전시켰는데, 이는 과학사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 가운데 하나로 이어졌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그의 생애를 네 시기로 나눈다. 케임브리지에 들어가기 전의 유년기, 『프린키피아』까지의 케임브리지 시절, 명성과 커지는 불만 속의 약 10년, 그리고 왕립 조폐국을 이끈 런던에서의 30년이다. 그의 위대한 발견은 거의 모두 케임브리지 시절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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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혼란의 시대, 농가의 소년

뉴턴은 링컨셔 그랜섬 근처의 울스소프 매너에서, 당시 잉글랜드가 쓰던 달력으로 1642년 크리스마스(오늘날 달력으로 1643년 1월 4일)에 태어났다.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채 안 된 때였다. 농부였던 아버지는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이작이 세 살 때 어머니 해나가 재혼해 떠나면서 그는 외조부모 손에 맡겨졌다. 어머니는 두 번째 남편이 죽은 뒤인 1653년 아이 셋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는 그랜섬의 학교에 다녔고, 1659년 농장을 맡으라는 부름을 받고 집에 돌아왔지만 농사를 잘 꾸리지 못했다. 외삼촌과 교장이 어머니를 설득해 대학에 보내기로 했고, 1661년 그는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은 채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1664년 장학금을 받기 전까지 시중드는 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이 시기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가장 격동의 시대였다. 1642년 내전이 시작되었고, 1649년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되었으며,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다스리다가 1660년 찰스 2세 아래 왕정이 복고되었다. 런던 왕립 학회가 생긴 것도 이해였다. 이 혼란이 뉴턴 집안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잉글랜드의 지적 풍경은 크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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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페스트의 해: ‘기적의 해’

케임브리지의 공식 교육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에 바탕을 두었지만, 1664년 무렵 뉴턴은 혼자서 르네 데카르트의 저작을 읽고 최신 수학을 독학하고 있었다. 1665년 여름부터 1667년 봄까지 페스트로 대학이 문을 닫자, 뉴턴은 그 기간의 거의 전부를 울스소프에서 보냈다. 이 시기를 흔히 그의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라 부른다.

그 몇 달 동안 그는 빛과 색에 관한 첫 실험적 발견을 하고, 원운동의 수학을 풀었으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과 행성의 주기와 거리를 잇는 케플러의 규칙 사이의 관계를 알아차렸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1666년 말 그는 그가 ‘유율법’이라 부른 미적분을 발견해 사실상 세계 최고의 수학자가 되어 있었다.

유명한 사과 이야기도 이 무렵의 일이다. 말년의 뉴턴은 벗 윌리엄 스터클리에게, 정원에 앉아 있다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계기로’ 중력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왜 사과는 늘 지구 중심을 향해 곧장 떨어지는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조카딸의 남편 존 콘딧도 비슷하게 전했다. 세부를 의심하는 학자도 있지만 이야기의 출처는 뉴턴 자신이다. 사과가 그의 머리에 떨어졌다는 증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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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빛과 색, 그리고 새로운 망원경

뉴턴 이전에는 유리 프리즘이 어떻게든 흰빛에 색을 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뉴턴은 어두운 방에서 가는 햇빛 줄기를 프리즘에 통과시켜, 그가 ‘스펙트럼’이라 이름 붙인 색의 띠가 둥글지 않고 길쭉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흰빛이 서로 다르게 꺾이는 빛살들의 혼합이라고 결론지었다. 렌즈와 두 번째 프리즘으로 색들을 다시 모아 흰빛을 만들 수 있었고, 한 가지 색만 다른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그 색은 바뀌지 않았다.

이로부터 그는 보통 망원경의 렌즈는 늘 색 테두리로 상을 흐리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문제를 피하려고 그는 렌즈 대신 휘어진 거울로 빛을 모으는 망원경을 만들었다. 첫 반사 망원경은 1668년 말 완성되었고, 1671년 왕립 학회가 시연을 요청했으며, 그는 1672년 왕립 학회 회원이 되었다.

1672년 빛과 색에 관한 그의 논문이 왕립 학회에서 낭독되고 『철학 회보』에 실렸다. 이는 로버트 훅과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를 비롯한 비판자들과 여러 해 논쟁을 불렀고, 이에 질린 뉴턴은 공개 토론에서 물러났다. 그의 전체 서술인 『광학』은 훅이 죽은 뒤인 1704년에야 영어로 나왔고, 뒤의 판들에는 빛과 물질의 본성에 관한 유명한 ‘질문들’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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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프린키피아』

1669년 뉴턴은 케임브리지의 루카스 수학 석좌교수가 되었다. 한동안 행성 궤도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1679년 말 훅이 편지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 약해지는 힘을 받는 물체는 어떤 곡선을 그리는지 물었다. 1684년 8월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가 케임브리지를 찾아와 같은 질문을 했다. 뉴턴은 곧바로 ‘타원’이라고 답했다. 계산한 종이를 찾지 못한 그는 11월 핼리에게 아홉 쪽짜리 논고 『궤도 위 물체의 운동에 관하여(De motu corporum in gyrum)』를 보냈다.

핼리의 격려를 받은 뉴턴은 이후 2년 반 동안 이 열 개의 명제를 192개의 명제가 담긴 약 500쪽의 라틴어 저작 『프린키피아』로 키웠다. 왕립 학회가 출판 예산을 이미 써 버려 핼리가 인쇄비를 직접 댔다. 1687년 7월 약 300부가 나왔다. 1권은 저항이 없는 운동을, 2권은 저항하는 유체 속의 운동을 다루며 행성이 물질의 소용돌이에 실려 돈다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반박한다. ‘세계의 체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3권은 이론을 태양계에 적용한다.

책은 정의와 운동의 세 법칙으로 시작한다. 물체는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정지해 있거나 직선으로 움직인다. 운동의 변화는 힘에 비례한다.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있다. 이 법칙들과, 모든 물체는 다른 모든 물체를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끌어당긴다는 법칙으로부터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을 이끌어 냈고, 혜성의 궤도, 조석, 지구가 조금 납작한 까닭, 지구 자전축이 천천히 흔들리는 현상을 설명했다. 하늘과 땅에 하나의 법칙이 적용된 것이다.

뉴턴은 로저 코츠가 편집한 1713년 제2판과 1726년 제3판을 위해 『프린키피아』를 꼼꼼히 고쳤다. 제2판에는 ‘일반 주해’가 더해졌는데, 여기서 그는 중력의 원인은 아직 찾지 못했다며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hypotheses non fingo)’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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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의회, 조폐국, 왕립 학회

『프린키피아』로 뉴턴은 유명해졌다. 명예혁명 뒤인 1689~1690년 케임브리지 대학 대표로 의회에 들어갔고, 철학자 존 로크와 벗이 되었다. 1693년에는 스스로 신경 쇠약이라 할 만한 일을 겪었다고 했고, 그해 가을 회복했다. 케임브리지 생활에 점점 불만이 커진 그는 1696년 왕립 조폐국 감사직을 받아들여 런던으로 옮겼고, 1699년 말 조폐국장이 되어 평생 그 자리를 지켰다.

조폐국에서 뉴턴은 일을 진지하게 했다. 대주화 개주 때 그는 거둬들인 주화의 5분의 1이 위조품이라고 추산했다. 그는 위조범을 직접 조사하고 기소했는데, 모두 28명이었고 그 가운데 악명 높은 윌리엄 챌로너는 교수형을 당했다. 주화의 정밀도도 높였다. 금의 가치 평가는 영국이 금본위제로 옮겨 가는 데 한몫했다. 그는 1720년 남해 거품 사건으로 큰돈을 잃기도 했다.

1703년 그는 왕립 학회 회장이 되었고, 1705년 앤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자리를 거칠게 썼다. 핼리와 함께 왕립 천문관 존 플램스티드의 관측 기록을 본인의 뜻을 거슬러 출판해 그를 평생의 적으로 만들었다. 뉴턴은 1727년 3월 20일(율리우스력) 84세로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고, 정식 안치를 거쳐 웨스트민스터 사원 본당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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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라이프니츠와의 미적분 논쟁

뉴턴은 1665~1666년 유율법을 발전시켰고 1671년까지 더 자세한 논고를 썼지만 출판하지 않았다. 긴 원고를 인쇄해 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1670년대 중반 그는 라이프니츠 등과 수학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그의 성과가 비밀은 아니었다. 라이프니츠는 1674년 자기 방식의 미적분을 발전시키기 시작해 1684년 첫 논문을 냈고, 그가 쓴 미분 기호는 지금도 표준이다. 뉴턴은 『프린키피아』(1687)에서 기하학적 형태의 미적분을 제시했지만, 유율 기호는 1693년에 일부, 1704년 『광학』에 붙인 논고에서야 더 온전하게 인쇄되었다.

긴장은 1710년 스코틀랜드 수학자 존 케일이 『철학 회보』에서 라이프니츠를 표절로 고발하면서 공개적인 충돌이 되었다. 왕립 학회 회원이던 라이프니츠는 학회에 시정을 요구했다. 1712년 위원회 보고서는 뉴턴 편을 들었는데, 뉴턴이 사실상 이를 주도했다. 1715년 뉴턴은 이 보고서를 칭찬하는 익명 서평까지 발표했다. 오늘날에는 두 사람이 각자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명했다는 것이 학계의 합의다.

이 다툼은 오래 영향을 남겼다. 왕립 학회 주변의 잉글랜드 수학자들과, 요한 베르누이를 비롯해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으로 연구하던 대륙 수학자들 사이의 골이 깊어졌고, 이 분열은 1716년 라이프니츠가 죽은 뒤에도 오래 이어졌다. 이미 아무런 매개 없이 멀리서 작용하는 뉴턴의 중력을 불편해하던 대륙 학자들은 한동안 그의 물리학에 더 적대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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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사적인 뉴턴: 연금술과 신학

뉴턴은 물리학보다 연금술과 종교에 관해 훨씬 많은 글을 썼다. 1669년 그는 화학 기구와 연금술 책을 사들였고, 역사가들이 ‘키미스트리(chymistry)’—17세기의 연금술과 화학이 섞인 분야—라 부르는 실험을 수십 년 동안 했다. 1690년대 초에는 주요 연금술 논고 『프락시스』를 썼지만 끝내 출판하지 않았다.

그의 종교 연구는 치열했고, 당시로서는 위험했다. 그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를 거부하게 되었다. 학자들은 그를 반삼위일체론자, 어쩌면 고대 아리우스파에 가까운 인물로 본다. 그는 이 믿음을 대체로 숨겼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애초에 케임브리지 교수직에 따르는 종교적 서약 문제가 그를 삼위일체 연구로 이끈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경 예언을 연구하고, 성경 본문으로 솔로몬 성전을 복원했으며, 천문학으로 고대사의 연대를 정하려 했다. 『고대 왕국 연대기 수정판』(1728), 『다니엘서와 요한 묵시록 예언에 관한 고찰』(1733) 같은 글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이 원고들은 두 세기 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카딸 캐서린 바턴과 남편 존 콘딧을 거쳐 포츠머스 백작 가문에 넘어갔다. 케임브리지 대학이 1888년 이후 과학 관련 원고를 보관했고, 나머지는 1936년 소더비 경매에서 팔렸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연금술 원고의 상당 부분을 사들여 1946년 케임브리지에 기증했다. 이 원고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에야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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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뉴턴의 방법: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뉴턴이 이룬 것의 핵심을 이론과 증거를 잇는 새로운 방식에서 찾는다. 그는 대담한 설명을 내놓고 그 결과 몇 가지를 확인하는 ‘가설의 방법’을 불신했다. 대신 구체적인 현상이 이론의 각 요소를 결정해야 하며, 잠정적인 단계는 그 현상들로부터 일반화하는 것 하나뿐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프린키피아』 제3판에 더해진 넷째 ‘추론 규칙’은, 현상에서 귀납으로 모은 명제는 다른 현상이 그것을 더 정확하게 하거나 예외를 보여 줄 때까지 정확히 또는 거의 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 덕분에 뉴턴은 질문을 열어 둘 수 있었다. 그는 중력의 원인이 무엇인지,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입자 쪽이 더 그럴듯하다고 여기기는 했다). 라이프니츠와 하위헌스 같은 비판자들은 접촉 없이 빈 공간을 건너 작용하는 힘은 ‘신비한’ 성질이라고 불평했다. 뉴턴은 증거가 그런 힘이 있고 정확한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보여 주며, 원인을 몰라도 과학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답했다. 역사가들은 이렇게 해서 그의 연구가 경험 과학을 사변적 자연철학에서 떼어 내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광학과 역학은 서로 다른 두 뉴턴 전통을 낳았다. 『광학』에서는 꼼꼼한 실험의 전통이, 『프린키피아』에서는 수학 이론의 전통이 나왔다. 둘 다 경험을 이론의 심판자일 뿐 아니라 이론을 받아들이는 근거로 삼는다는 뉴턴의 원칙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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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유산, ‘뉴턴주의’, 그리고 사료의 문제

뉴턴의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은 1740년대를 전환점으로 본다. 라플란드와 페루로 간 프랑스 원정대가 뉴턴의 예측대로 지구가 극 쪽으로 납작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클레로·달랑베르·오일러 같은 수학자들이 그가 남긴 문제들을 풀었다. 1750년대 말 핼리 혜성의 귀환을 맞힌 클레로의 예측은 교양 대중의 상당수를 설득했다. 우리가 ‘뉴턴 역학’이라 부르는 것의 많은 부분, 이를테면 『프린키피아』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F = ma라는 익숙한 식은 사실 18세기에 오일러가 정식화했고, 라플라스의 『천체 역학』(1799~1805)이 그 기획을 완성했다.

뉴턴은 계몽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볼테르 같은 저술가들이 프랑스에 ‘뉴턴적’ 세계관을 퍼뜨렸고, 로크와 버클리 이후의 철학자들은 『프린키피아』의 과학이 왜 그토록 성공했는지 물었다. 흄과 애덤 스미스는 인간사에 관한 비슷한 과학을 꿈꾸었고, 이 질문은 칸트에서 시작되는 과학철학을 낳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18세기 ‘뉴턴주의자’ 가운데 어려운 『프린키피아』를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않았고, 대중화한 이들이 뉴턴에게 돌린 생각이 그가 실제로 쓴 것과 크게 다른 경우가 많다고 경고한다. 20세기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뉴턴의 이론이 극히 좋은 근사로만 성립함을 보였다.

인간 뉴턴을 해석하기는 어렵다. 출판된 저작 속의 공적인 뉴턴과, 1936년 이후에야 널리 알려진 연금술·신학 원고 속의 사적인 뉴턴 사이에는 뚜렷한 대조가 있다. 무엇이 그를 움직였는지에 대해 우리는 놀랄 만큼 아는 것이 적고, 한 학자의 말처럼 전기 작가들은 뉴턴만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1675년 훅에게 보낸 편지의 유명한 구절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도 논쟁거리다. 겸손의 표현으로 읽는 역사가도 있고, 키가 작았다고 전하는 훅을 은근히 비꼰 말로 읽는 역사가도 있으며, 이 문구는 뉴턴보다 훨씬 전부터 널리 알려진 속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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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개념

운동 법칙
관성, 운동의 변화를 낳는 힘,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세 원리.
만유인력
모든 물체는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다른 모든 물체를 끌어당긴다.
하늘과 땅의 통일
같은 법칙이 떨어지는 사과, 달의 궤도, 행성, 혜성, 조석을 설명한다.
미적분(유율법)
연속적으로 변하는 양을 다루는 수학. 뉴턴이 1660년대에, 라이프니츠가 독립적으로 발전시켰다.
흰빛의 복합성
프리즘 실험이 보여 주듯, 흰빛은 서로 다르게 굴절되는 여러 색의 혼합이다.
현상으로부터의 추론
관측으로부터 가능한 한 곧바로 이론을 끌어내고, 증거로 정할 수 없는 문제는 열어 두는 뉴턴의 방법.
원격 작용
중력은 접촉 없이 빈 공간을 건너 작용하는 듯했다. 비판자들은 이를 거부했고, 뉴턴은 원인을 안다고 주장하지 않은 채 받아들였다.

기록

  1. 1642년 — 12월 25일(율리우스력, 오늘날 달력으로 1643년 1월 4일) 울스소프에서 태어난다.
  2. 1661년 —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다.
  3. 1665년 — 페스트로 케임브리지가 문을 닫고, 울스소프에서(1665~1667) 미적분·광학·운동에 관한 초기 발견을 한다.
  4. 1668년 — 첫 반사 망원경을 완성한다.
  5. 1669년 — 케임브리지 루카스 수학 석좌교수가 된다.
  6. 1672년 — 왕립 학회 회원이 되고, 빛과 색에 관한 논문이 발표된다.
  7. 1684년 — 핼리가 찾아오고, 뉴턴은 핼리에게 『궤도 위 물체의 운동에 관하여』를 보낸다.
  8. 1687년 — 핼리의 비용으로 『프린키피아』가 7월 런던에서 출판된다.
  9. 1696년 — 왕립 조폐국 감사가 되어 런던으로 옮긴다.
  10. 1703년 — 왕립 학회 회장으로 선출된다.
  11. 1704년 — 『광학』이 출판되고, 미적분에 관한 그의 글이 처음 인쇄된다.
  12. 1727년 — 3월 20일(율리우스력) 런던에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다.

용어 풀이

자연철학
오늘날 물리학·천문학이라 부르는 것을 포함한, 자연 연구의 옛 이름.
프린키피아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을 제시한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
역제곱 법칙
거리가 두 배가 되면 힘이 네 배 약해지는 규칙. 중력이 이를 따른다.
유율(fluxion)
뉴턴식 미적분에서 변화율을 부르는 이름.
스펙트럼
프리즘으로 흰빛을 펼쳤을 때 생기는 색의 띠. 뉴턴이 이 이름을 붙였다.
반사 망원경
렌즈 대신 휘어진 거울로 빛을 모아 색 테두리를 피하는 망원경.
기적의 해(annus mirabilis)
뉴턴이 울스소프에서 첫 위대한 발견들을 한 1665~1667년의 시기.
루카스 석좌교수
케임브리지의 수학 교수직. 뉴턴은 1669년부터 1701년까지 맡았다.
왕립 조폐국
잉글랜드의 주화를 만든 기관. 뉴턴이 감사를 거쳐 국장으로 이끌었다.
일반 주해
1713년 『프린키피아』에 덧붙인 결론 글. 여기서 뉴턴은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고 썼다.

묻고 답하기

정말 사과가 뉴턴의 머리에 떨어졌나요?

머리에 떨어졌다는 증거는 없어요. 하지만 뉴턴은 정원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중력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친구들에게 직접 말했어요.

뉴턴이 중력을 발견했나요?

물건이 떨어진다는 건 사람들이 늘 알고 있었어요. 뉴턴이 발견한 것은 같은 힘이 우주까지 뻗어 달과 행성을 궤도에 붙잡아 두고, 정확한 수학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이에요.

미적분은 뉴턴과 라이프니츠 가운데 누가 발명했나요?

두 사람이 각자 독립적으로 발명했다. 뉴턴이 1660년대에 먼저 발전시켰지만, 라이프니츠가 먼저 출판했고 오늘날 대부분이 쓰는 기호를 만들었다.

뉴턴의 출생 연도가 왜 1643년으로 나오기도 하나요?

1642년 잉글랜드는 아직 옛 율리우스력을 썼다. 그 달력으로는 1642년 12월 25일에 태어났고, 오늘날의 그레고리력으로는 1643년 1월 4일이다.

뉴턴의 중력 이론은 틀렸나요?

일상적인 속도와 보통의 중력에서는 매우 정확한 근사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아주 강한 중력과 매우 빠른 속도에서 더 정확하며, 뉴턴의 이론을 극한의 경우로 포함한다.

뉴턴은 왜 연금술과 예언을 연구했나요?

뉴턴에게 이것들은 곁다리 취미가 아니라 자연과 신에 대한 진지한 탐구였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를 그의 지적 세계의 일부로 보지만, 그의 물리학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논쟁 중이다.

『프린키피아』가 유럽에서 받아들여지기까지 왜 오래 걸렸나요?

읽기가 매우 어려웠고, 초판이 약 300부밖에 인쇄되지 않았으며, 많은 대륙 학자가 멀리서 작용하는 힘에 반대했다. 1740~1750년대의 확증들이 여론을 바꾸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George Smith, Isaac Newt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 Newton’s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3. Isaac Newton. Wikipedia (영어)
  4. 아이작 뉴턴. 위키백과
  5.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Wikipedia (영어)
  6. Opticks. Wikipedia (영어)
  7. Leibniz–Newton calculus controversy. Wikipedia (영어)
  8. Richard S. Westfall, Never at Rest: A Biography of Isaac Newt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함께 보기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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