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 쉬움
- 중급
- 심화
어린이를 위한 설명
시드니라는 도시가 생기기 훨씬 전, 그곳의 커다란 만은 원주민 가족들의 삶터였어요. 사람들은 ‘컨트리(Country)’라고 부르는 자기 땅에서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고, 노래하고, 의식을 치렀지요. 1764년 무렵 왕갈 씨족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어요. 그에게는 이름이 여러 개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베넬롱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어요.
1788년, 베넬롱이 젊은이였을 때 영국에서 군인과 죄수를 태운 배들이 와서 식민지를 세웠어요. 새로 온 사람들은 허락을 구하지 않았어요. 나무를 베고, 물고기와 땅을 가져가고, 병을 옮겼지요. 1789년에는 천연두라는 무서운 병이 돌아 만 주변의 원주민이 아주 많이 목숨을 잃었어요.
영국 총독 아서 필립은 원주민의 말과 풍습을 알려 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1789년 부하들이 베넬롱과 콜비라는 남자를 붙잡아 억지로 식민지로 데려왔어요. 콜비는 곧 달아났고, 베넬롱은 여섯 달쯤 머물며 영어를 아주 빨리 배우고 영국인들에게 자기 사람들에 대해 알려 준 뒤 몰래 빠져나갔어요.
나중에 베넬롱은 스스로 돌아와 총독과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둘은 이름을 서로 바꾸기도 했는데, 베넬롱의 문화에서는 존중과 우정을 보여 주는 방법이었어요. 만의 한 곶에 그를 위한 작은 벽돌집이 지어졌어요. 그곳이 오늘날 베넬롱 포인트이고, 지금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서 있어요.
1792년 베넬롱은 젊은 친척 예머라와니와 함께 먼 영국까지 배를 타고 갔어요. 런던을 구경하고 극장에도 가고 유명한 건물도 찾아갔지요. 하지만 베넬롱은 고향이 그리웠고, 안타깝게도 예머라와니는 그곳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베넬롱은 1795년 시드니로 돌아왔어요.
돌아온 베넬롱은 자기 사람들과 함께 살며 자기네 법을 따랐어요. 일부 식민자들은 못마땅해했지만, 그건 베넬롱의 선택이었어요. 그는 패러매타강 가에 사는 무리의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었고, 1813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원주민 약 200명이 모여 그를 기렸어요.
한눈에 보기
- 생애
- 1764년 무렵 ~ 1813년 1월 3일
- 사람과 컨트리
- 시드니만(포트잭슨) 남서쪽 기슭의 왕갈 씨족. 이웃 씨족들과 긴밀한 관계였다. 시드니 해안 사람들은 흔히 ‘사람’이라는 뜻의 ‘에오라’로 묶어 부른다
- 언어
- 시드니 언어(다룩/에오라). 영어도 빠르게 익혔다
- 알려진 까닭
- 원주민 씨족과 영국 식민지 사이의 중재자·외교가. 영국에 갔다가 돌아온 것으로 알려진 첫 원주민
- 글
- 1796년 영국의 필립스 부부에게 보낸, 그가 구술한 편지는 원주민이 쓴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영어 글이다
- 그의 이름을 딴 곳
- 베넬롱 포인트(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자리), 연방 선거구 베넬롱(1949), 베넬롱 공원, 베넬롱 다리
- 죽음과 매장
- 패러매타강의 키싱 포인트. 친구 제임스 스콰이어의 과수원에 묻혔다(무덤 자리는 오늘날 퍼트니에서 확인)
쉬움
베넬롱은 누구인가
베넬롱은 시드니만 남서쪽 기슭과 패러매타강 일대를 컨트리로 둔 왕갈 씨족의 원주민 남성이다. 1764년 무렵 태어났으니 1788년 1월 영국 제1함대가 왔을 때 스물넷쯤이었다. 그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첫 25년을 겪었고 1813년 1월 3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기억되는 까닭은 두 세계가 만나는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1789년 그를 통역자로 쓰려고 납치했다. 그 뒤 그는 자기 방식으로 아서 필립 총독과 길고 때로 거친 관계를 쌓았고, 지역 씨족과 식민지 사이의 정기적인 접촉을 여는 데 힘을 보탰으며, 영국에 다녀온 뒤 자기 사람들의 공동체를 이끌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명사전』의 표현대로 그는 원주민 화해자이자 외교가였다.
베넬롱 생전에 그에 관해 쓰인 기록은 거의 모두 영국 장교들이 남긴 것이다. 그들은 본 것을 적었지만, 그가 무엇을 왜 하는지는 자주 오해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 기록들을 원주민의 법·친족·문화에 대한 이해와 함께 조심스럽게 읽어, 베넬롱을 식민자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자기 목표를 지닌 사람으로 이해하려 한다.
쉬움
컨트리, 가족, 그리고 여러 이름
1788년 이전 시드니만 주변의 땅과 물은 여러 씨족의 삶터였고, 씨족마다 특정한 컨트리와 이어져 있었다. 베넬롱의 왕갈 씨족은 패러매타강 남쪽 땅의 관리자였다. 아버지 이름은 구라 구라, 어머니 이름은 가굴(또는 가골)로 기록되어 있다. 누이가 여럿 있었는데, 이들이 이웃 씨족의 남자들과 혼인하면서 오빠에게 정치적 연줄이 생겼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만 안의 작은 섬 메멜도 그의 소유로 기록되어 있다.
베넬롱에게는 이름이 다섯 개 있었고, 영국인들은 이를 울라레바레(울라라와레), 워굴트로, 배넬런(베넬롱), 보인바, 번데번다로 적었다. 일부는 의례 생활의 여러 단계에서 받은 이름이며, 마지막 이름은 ‘매’를 뜻하는 토템 이름이었을 수 있다. 장교 왓킨 텐치는 그가 울라라와레로 불리기를 좋아했다고 썼다. 이름을 주고받는 것은 그의 사람들 사이에서 존중과 우정을 나타내는 흔한 방법이었다.
베넬롱의 친족·언어 관계는 남쪽으로 보터니만(카마이), 북쪽으로 만 건너 피트워터, 서쪽으로 패러매타까지 이어졌다. 시드니 해안 씨족들은 오늘날 흔히 다룩어 또는 시드니 언어라고 부르는 말의 여러 변이를 썼다. 이들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자주 쓰이는 ‘에오라’는 제1함대 장교들의 낱말 목록에서 원래 ‘사람’을 뜻했으며, 19세기 말부터 외부인이, 20세기 말부터는 많은 원주민이 집단 이름으로 쓰고 있다.
쉬움
1788년: 낯선 이들이 오고 병이 뒤따르다
1788년 1월, 아서 필립이 이끈 영국 배 열한 척이 먼저 보터니만에 닿았다가, 포트잭슨 남쪽 기슭에서 현지 사람들이 ‘와란’이라 부르던 작은 만으로 옮겨 갔다. 영국인들은 이곳을 시드니 코브라 이름 붙이고 죄수·군인·관리 약 1,300명으로 유형 식민지를 세웠다. 땅은 이미 원주민 씨족들의 것이었지만, 영국인들은 그것을 차지해도 되는 땅으로 여겼다.
관계는 처음부터 팽팽했다. 원주민들은 대체로 정착지를 피하면서 땅과 어장을 지키려 했고, 충돌이 잦았다. 필립은 우호 관계를 맺으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현지 사람들이 거리를 두자 납치라는 방법을 택했다. 1788년 말 부하들이 아라바누라는 남자를 붙잡아 통역자로 가르치려 했다.
그리고 1789년 4월 천연두가 만 주변 씨족들을 휩쓸었다. 해변과 후미에서 시신이 발견되었고, 물 위의 카누가 자취를 감추었다. 베넬롱은 훗날 만 주변 자기 사람들의 절반가량이 죽었다고 식민자들에게 말했다. 그의 첫 아내와 아라바누도 목숨을 잃었다. 병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아직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식민지가 커 가던 바로 그때 가족과 씨족이 무너졌다.
중급
납치: 식민지에서의 여섯 달
1789년 11월 영국 보트 한 척이 만 북쪽 맨리로 갔다. 베넬롱과 나이 많은 친척 콜비가 많은 사람과 함께 고래 잔치에 모여 있던 곳이다. 보트에서 물고기를 내밀자 두 사람이 물속으로 걸어왔고, 곧 거칠게 붙잡혔다. 해변의 사람들이 창을 던지자 영국인들은 총을 쏘며 포로를 싣고 떠났다. 작전에 참여한 윌리엄 브래들리 중위는 이것이 자신이 명령받은 일 가운데 가장 불쾌한 임무였다고 적었다.
두 사람은 감시 아래 족쇄를 찬 채 붙잡혀 있었다. 콜비는 한 달쯤 만에 달아났고, 베넬롱은 여섯 달가량 머물렀다. 영국인들이 그의 말을 배우느라 애쓰는 동안 그는 놀라울 만큼 빨리 영어를 익혔고, 영국인의 음식·예절·무기·계급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부 역사가는 영국인이 그에게서 배운 것보다 그가 배운 것이 더 많았다고 본다. 그가 떠나지 못해서 머물렀는지, 호기심이나 전략 때문에 스스로 머물렀는지는 지금도 논의된다.
1790년 5월 베넬롱은 몰래 빠져나갔다. 이후 몇 달 동안 그는 만 북쪽 가마라갈(캐머레이갈) 씨족의 존경받는 여성 바랑가루와 관계를 맺었다. 딸 딜붕은 아기 때 죽었다. 바랑가루는 1791년 세상을 떠났고, 베넬롱은 그녀 사람들의 관습대로 총독의 정원에서 그녀를 화장했다.
중급
맨리의 창, 그리고 새로운 관계
1790년 9월 필립 총독은 베넬롱이 맨리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찾아갔다. 베넬롱은 그를 반갑게 맞았지만, 윌레머링이라는 다른 남자가 던진 창이 총독의 어깨에 꽂혔다. 필립은 살아남았고 보복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며칠 뒤 베넬롱이 그를 찾아왔고 둘의 관계는 다시 이어졌다.
맨리 사건은 여러 방식으로 해석된다. 단순한 오해로 보는 견해가 있고, 아라바누·콜비·베넬롱 납치에 대해 원주민 법에 따라 치명적이지 않게 되갚은 의도적 보복, 곧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 반드시 치러야 했던 빚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베넬롱의 역할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그의 외교 시도가 다른 목적에 이용당한 구경꾼이었는지, 모든 것을 계획한 주역이었는지다. 윌레머링에 대해서도 기록마다 달라, 브로큰만 출신의 영적 치유자(카라지)라는 설명과 발고울라 지역 사람이라는 설명이 있다.
맨리 사건 뒤 베넬롱은 정착지와 총독 관저를 정기적으로 찾기 시작했고 씨족 사람들도 함께 왔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명사전』은 이를 베넬롱이 이끈 지역 선주민 집단의 정책 변화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와 필립은 이름을 주고받았다. 베넬롱은 자기 이름 가운데 하나인 울라라와레를 총독에게 주고, 자신은 때때로 ‘총독’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의 요청으로 시드니 코브 동쪽 곶, 가디갈 사람들이 ‘투보굴’이라 부르던 곳에 작은 벽돌집이 지어졌다. 오늘날의 베넬롱 포인트다.
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1790년 12월 군인들이 감자를 훔쳤다는 혐의로 베넬롱의 친구 방가이를 쏘아 죽이자, 베넬롱은 반격 습격으로 맞서며 그 군인의 이름을 대라고 요구했다. 그런데도 1791년 2월 두 사람은 다시 화해했다. 이런 위기를 거치며 둘은 거듭 보복의 악순환을 누그러뜨리고 양쪽을 불안한 공존 쪽으로 이끌었다.
중급
영국 여행, 1792~1795년
1792년 12월 필립이 귀국길에 오르자 베넬롱과 젊은 친척 예머라와니(열일곱 살쯤)가 애틀랜틱호를 타고 함께 떠났다. 이들은 영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진 첫 원주민이었다. 아메리카와 태평양에서 온 앞선 방문자들 일부와 달리 공식 사절로 대우받지는 않았다. 많은 글이 이들이 국왕 조지 3세를 알현했다고 쓰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정부에 제출된 경비 청구서에서 런던 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새 옷, 세인트폴 대성당과 런던탑 방문, 극장 구경, 멱을 감으러 빌린 배 등이다. 이들은 한동안 헨리 워터하우스의 집에 살았고, 나중에는 엘텀에서 필립스 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시드니 경을 만났다. 초상화도 그려졌다.
예머라와니는 심한 흉부 감염으로 1794년 세상을 떠났다. 베넬롱은 그를 돌보고 장례 의식을 치른 뒤 홀로 귀국을 기다렸다. 추위와 향수, 긴 지연에 시달렸고, 1795년 초 HMS 릴라이언스호가 출항하기까지 몇 달을 배 위에서 보냈다. 항해 중 군의관 조지 배스가 그를 간호했고, 베넬롱은 배스에게 자기 말을 가르쳤다. 3년 가까운 여정 가운데 약 18개월은 바다 위나 정박한 배 위에서 보냈다.
중급
귀향: 편지, 법, 그리고 키싱 포인트
1795년 9월 시드니에 돌아온 베넬롱은 아내 쿠루바라불라가 떠났고, 식민지가 커져 패러매타강과 호크스베리강을 따라 토지 불하가 빠르게 퍼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년 뒤 그는 영국의 필립스 씨에게 편지를 구술했다. 아내 소식을 전하고, 다시는 영국에 가지 않겠다고 밝히고, 필립스 부인과 시드니 경에게 안부를 전하며 스타킹·신발·손수건을 부탁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명사전』은 이 물건들이 고향에서 관계를 다시 쌓는 데 쓸 선물이었을 수 있다고 본다. 이 편지는 원주민이 쓴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영어 글로 인정받는다.
베넬롱은 점점 더 자기 사람들의 법에 따라 살았다. 1797년 포트잭슨에서 기록된 마지막 성인식을 비롯한 의식에 참여하고 이를 주관했으며, 의례적 보복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모임에서 벌을 받기도 하고 벌이 제대로 집행되도록 하기도 했다. 1797년 12월 동료 콜비에 대한 정당한 처벌에 군인들이 끼어들자 베넬롱은 군인 한 명을 창으로 찔렀고, 얻어맞고 하룻밤 갇혔다. 식민지 필자들은 그를 무례하고 골치 아픈 인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 과음에 관한 기록도 있다.
한편 1790년대 중반 왕갈 씨족은 패러매타강의 공동 관리자인 부라마타갈·왈루메다갈 사람들과 함께 왈루메다갈 컨트리의 키싱 포인트에 새 정착지를 이루었다. 베넬롱은 이 무리와 혼인으로 맺어져 원로 지도자가 되었다. 네 번째 아내 부롱은 부라마타갈 지도자 비지 비지의 누이였고, 아들 디기디기(식민지 기록의 ‘디키’)가 1803년에 태어났다. 1800년대 초 베넬롱은 약 100명의 무리를 이끌었고, 살아남은 보터니만 사람들에게서도 원로로 존경받았다.
그는 여전히 헌터·킹·블라이·매쿼리 총독을 이따금 찾았고, 지역 정착민들과도 관계를 유지해 자기 사람들이 안전하게 머물 자리를 지키려 했다. 이 시기 컴벌랜드 평원 곳곳에서 원주민과 식민자 사이의 폭력 충돌이 번졌고 비지갈 사람 페물와이가 이끈 저항도 있었지만, 베넬롱이 가담했다는 기록은 없다. 공동체를 지키려는 의도적 선택이었을 수 있다.
중급
죽음과 매장, 그리고 기억의 장소
베넬롱은 1813년 1월 3일 키싱 포인트에서 마흔여덟이나 마흔아홉 살쯤에 세상을 떠났고, 그와 그의 씨족의 친구였던 양조업자 제임스 스콰이어의 과수원에 묻혔다. 『시드니 가제트』의 부고는 그를 자연이 준 성격에서 바뀌지 않는 ‘철저한 야만인’이라 부르며 경멸했다. 이 문장은 베넬롱보다, 점점 더 많은 땅에 울타리가 쳐지던 시기 식민 사회의 태도를 더 많이 보여 준다.
그의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그를 기렸다. 그가 죽고 석 달쯤 뒤 원주민 남성 200명가량이 모여, 많은 여성과 아이들의 응원 속에 성대한 추모 의례 전투를 벌였다. 같은 해 세상을 떠난 아내 부롱이 그의 곁에 묻혔고, 1821년에는 그와 함께 묻히기를 청한 가디갈 씨족의 난바리도 묻혔다. 비지 비지는 1820년대까지 무덤을 찾았고 여러 해 동안 키싱 포인트 공동체를 이끌었다.
2011년 매쿼리 대학교의 고고학자 피터 미첼은 오늘날 퍼트니의 한 주택 아래에서 무덤 자리로 보이는 곳을 찾았다고 발표하고, 지역 원주민 당국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는 이 집을 사들여 베넬롱 추모지와 함께, 식민 지배가 시드니 지역 원주민에게 끼친 영향을 기리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베넬롱의 이름은 시드니 곳곳에 남아 있다. 오페라 하우스가 선 베넬롱 포인트, 키싱 포인트 근처의 베넬롱 공원, 홈부시만을 가로지르는 베넬롱 다리(2016년 개통), 그리고 1949년에 만들어져 원주민의 이름을 딴 첫 연방 선거구가 된 베넬롱 선거구다.
심화
식민지 기록 읽기: 사료가 말해 주는 것과 말해 주지 못하는 것
베넬롱의 생애를 전하는 주요 사료는 제1함대 장교들의 일지와 출판물이다. 왓킨 텐치의 기록(1789·1793년 출판), 데이비드 콜린스의 『뉴사우스웨일스 영국 식민지 이야기』(1798), 윌리엄 브래들리의 일지, 총독의 공문서가 있고, 여기에 영국 정부의 경비 기록, 1803년부터 나온 『시드니 가제트』의 기사, 1796년 편지가 더해진다. 역사가 에마 도틴스가 『오스트레일리아 인명사전』에 썼듯, 수많은 언급 가운데 베넬롱 자신의 관점이나 그가 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차지한 자리를 제대로 전하는 것은 드물다.
식민지 관찰자들은 그의 식성, 기분, 싸움, 혼인을 자세히 적었지만 원주민의 법, 친족 의무, 외교는 거의 설명하지 않았다. 맨리의 창 사건, 총독 정원에서의 바랑가루 화장, 보복 의례 같은 일화는 우정·배신·야만이라는 영국식 범주로 서술되었다. ‘결을 거슬러 읽기’란 그 일화 뒤에 어떤 원주민의 절차·의례·전략이 있었을지 묻되, 남은 증거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사실조차 사료마다 다르다. 부모와 누이들의 이름, 아내의 수와 순서, 그를 위해 지은 것이 단순한 오두막이었는지 작은 벽돌집이었는지, 윌레머링이 누구였는지, 1796년 편지를 직접 썼는지 구술했는지 등이다. 이런 차이는 서로 다른 장교들이 서로 다른 때에 언어를 제한적으로만 이해한 채 기록을 남겼다는, 기록 생산 과정의 흔적이지 단순히 정리해 버릴 오류가 아니다.
최근 연구는 장교들의 공책으로 시드니 언어를 재구성한 언어학 작업과 오늘날 시드니 원주민 공동체의 지식도 활용한다. 자기 사람들 속의 베넬롱에 주목한 키스 빈센트 스미스, 2023년 책에서 베넬롱과 필립을 함께 살핀 케이트 풀라가 같은 연구자들이 새로운 시각을 더했다.
심화
비극적 인물인가 전략가인가: 달라져 온 베넬롱 이야기
19~20세기 대부분 동안 베넬롱의 삶은 촉망과 몰락의 비극으로 이야기되었다. 식민자들이 거두어 영국에서 선보인 ‘고결한 야만인’이 술과 ‘야만’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역사가 매닝 클라크는 베넬롱이 그를 문명화하려던 이들을 역겹게 했고 자기 사람들에게서도 추방된 자가 되었다고 썼다. 『시드니 가제트』의 부고가 그 틀을 만들었다. 도틴스는 이런 이해가 이후 많은 전기를 ‘물들이고 더럽혔다’고 본다.
20세기 말부터 역사가와 원주민 논평가들은 이 서사에 이의를 제기했다. 베넬롱은 영국 사회의 가장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보고 의도적으로 자기 삶의 방식을 택한 사람으로, 식민자들의 화해 욕구를 자신과 자기 사람들을 위해 활용한 전사이자 외교가로, 그리고 친족망을 지키고 키싱 포인트에 공동체의 자리를 마련한 것을 가장 큰 업적으로 삼은 지도자로 볼 수 있다. 그의 죽음 뒤 약 200명이 모인 것은 그가 그 목표를 이루었음을 시사한다. 자기 사람들에게서 추방되었다는 주장은 키싱 포인트에서의 지도력과 맞지 않는다.
에마 도틴스의 『이야기들의 삶(The Lives of Stories)』(2018)은 베넬롱 이야기를, 그 다시 쓰기가 국가의 기억과 화해, 문화 부흥을 빚어 온 세 가지 원주민-정착민 우정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다룬다. 그는 세대마다 자기 목적에 맞게 이야기를 다시 쓰며, 역사가 역시 이야기꾼이라고 강조한다. 베넬롱과 필립의 이야기는 우정의 건국 신화로 쓰였지만, 납치·전염병·박탈의 이야기로 다시 읽히기도 했다.
대중적 역사는 흔히 ‘화해자’ 베넬롱과 ‘전사’ 페물와이를 대비한다. 페물와이는 1790년부터 1802년 살해될 때까지 식민지에 맞선 저항을 이끈 비지갈 사람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명사전』은 둘이 정반대가 아니었다고 경고한다. 둘은 베넬롱 포인트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고, 영국의 존재에 적응하면서 맞서는 전략을 논의했을 수 있으며, 둘 다 화해와 무력을 섞어 썼다. 침략에 대한 원주민의 대응을 협력과 저항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전략의 스펙트럼으로 보는 것이 최근 연구의 중요한 변화다.
심화
언어와 글, 그리고 원주민 저자라는 문제
베넬롱은 뛰어난 언어 능력을 지녔다. 영어를 빠르게 익힌 덕분에 초기 식민지의 가장 중요한 통역자가 되었고, 장교들과 조지 배스에게 자기 말을 가르쳤다. 시드니 언어는 전염병과 박탈로 두어 세대 만에 끊어졌고, 식민지 공책들, 특히 동반자 파티예가랑에게서 말을 배운 윌리엄 도스의 공책으로 일부가 재구성되었다. 딩고, 우메라, 왈라비, 웜뱃, 와라타 같은 낱말이 시드니 지역에서 영어로 들어갔다.
1796년 편지는 원주민이 쓴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영어 글로서 오스트레일리아 문학사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문학 선집』(2008)에도 실렸다. 필경자에게 구술한 글이기에 여기서 ‘저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논의된다. 가족 소식, 다시는 영국에 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말, 원주민식 교환에 쓸 물건 부탁이라는 내용은 베넬롱이 영국식 글쓰기를 자기 사회적 목적에 활용했음을 보여 준다.
베넬롱의 삶은 제국의 시대에 유럽을 찾았고 그 경험이 주로 유럽인의 손으로 기록된 세계 여러 선주민의 역사 속에도 놓인다. 이런 사례들을 비교하면 제국이 선주민 방문자를 어떻게 전시하고 이용하고 오해했는지, 그리고 방문자들은 어떻게 자기 목표를 추구했는지를 물을 수 있다.
오늘날 베넬롱은 시드니의 지명, 역사·예술 작품 속 재현, 그리고 원주민 공동체와 역사가들이 시드니 지역의 역사를 원주민의 관점에서 쓰려는 꾸준한 작업 속에서 기억된다. 무덤 자리에 계획된 추모지와 식민 지배의 영향을 다루는 공간은 베넬롱에 대한 공공의 기억이 1813년의 경멸적인 부고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보여 준다.
핵심 개념
- 중재자
- 베넬롱은 원주민 씨족과 영국 식민지 사이의 통역자·외교가로 활동했고, 점점 자기가 정한 조건에 따라 움직였다.
- 정책으로서의 납치
- 초기 식민지는 소통을 강제하려 아라바누, 이어 베넬롱과 콜비를 붙잡았다. 오늘날 역사가들이 강조하는 출발점이다.
- 보복과 법
- 맨리의 창 사건 같은 일화는 식민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원주민의 의례적 보복 관행을 반영할 수 있다.
- 이름 교환
- 필립과 이름을 바꾼 것은 베넬롱의 문화에서 존중과 친족 관계를 뜻했다.
- 컨트리로의 귀환
- 영국에서 돌아온 베넬롱은 자기 법과 친족을 택해 키싱 포인트 공동체를 이끌었다. 단순한 ‘몰락’이 아니다.
- 기록 읽기
- 거의 모든 기록이 영국인의 것이어서, 역사가들은 비판적으로 읽어 베넬롱 자신의 목적을 되살린다.
- 화해자와 전사
- 베넬롱과 페물와이는 정반대가 아니었고, 둘 다 침략에 대응해 외교와 무력을 섞어 썼다.
기록
- 약 1764년 — 패러매타강 남쪽의 왕갈 씨족에서 베넬롱이 태어난다.
- 1788년 — 영국 제1함대가 와서 와란(시드니 코브)에 식민지를 세운다.
- 1789년 — 4월 천연두가 만 주변 씨족을 휩쓸고, 11월 베넬롱과 콜비가 맨리에서 납치된다.
- 1790년 — 5월 베넬롱이 정착지를 떠나고, 9월 맨리에서 필립이 창에 맞는다. 이후 정기 방문과 베넬롱 포인트의 집이 이어진다.
- 1791년 — 바랑가루가 세상을 떠나고, 방가이 사살 뒤 베넬롱과 필립이 화해한다.
- 1792년 — 12월 베넬롱과 예머라와니가 필립과 함께 영국으로 떠난다.
- 1794년 — 예머라와니가 영국에서 세상을 떠난다.
- 1795년 — 9월 베넬롱이 HMS 릴라이언스호로 시드니에 돌아온다.
- 1796년 — 필립스 부부에게 편지를 구술한다. 원주민이 쓴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영어 글이다.
- 1797년 — 포트잭슨에서 기록된 마지막 성인식에 참여하고, 12월 콜비의 처벌에 끼어든 군인을 창으로 찌른다.
- 1813년 — 1월 3일 키싱 포인트에서 세상을 떠나고, 약 200명이 모여 추모 의례 전투를 벌인다.
- 2018년 —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가 무덤 자리 위 주택을 사들여 추모지를 만들기로 한다.
용어 풀이
- 컨트리(Country)
- 원주민 영어에서 한 집단이 속하고 돌보는 땅·물·장소. 영적·법적 의미를 지닌다.
- 왕갈
- 베넬롱의 씨족. 패러매타강 남쪽 땅의 관리자.
- 에오라
- 시드니 언어로 ‘사람’을 뜻하는 말. 오늘날 시드니 해안 원주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흔히 쓰인다.
- 와란(Warrane)
- 영국인들이 시드니 코브라 부른 작은 만의 현지 이름.
- 투보굴(Tubowgule)
- 훗날 베넬롱 포인트가 된 조수 섬과 곶의 가디갈 이름.
- 보복(payback)
- 잘못에 대해 그에 걸맞은 의례적 처벌, 흔히 창으로 찌르는 방식으로 응답하는 전통적 정의 관행.
- 카라지
- 영적·의례적 권위를 지닌 지혜로운 사람 또는 치유자.
- 제1함대
- 1788년 뉴사우스웨일스 유형 식민지를 세우러 온 영국 배 열한 척.
- 키싱 포인트
- 베넬롱이 말년에 공동체를 이끈 패러매타강 가의 장소.
묻고 답하기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왜 ‘베넬롱 포인트’에 있나요?
1790년대 초 그곳에 베넬롱을 위한 작은 벽돌집이 지어졌기 때문이에요. 가디갈 사람들은 그곳을 투보굴이라고 불러요.
베넬롱은 식민지에 가고 싶어 했나요?
처음에는 아니에요. 납치당했지요. 나중에는 스스로 영국인들을 찾아가 상대했지만, 자기 조건에 따라서였어요.
베넬롱은 영국 왕을 만났나요?
많은 책이 그렇다고 하지만, 조지 3세를 알현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영국에서 돌아온 뒤 왜 식민지 생활을 떠났나요?
자기 법에 따라 자기 친족과 살기를 택했기 때문입니다. 식민자들은 ‘되돌아갔다’고 했지만, 많은 역사가는 이를 의도적 선택이자 지도력의 한 형태로 봅니다.
필립 총독이 창에 맞은 것은 베넬롱의 책임인가요?
역사가들의 의견이 갈립니다. 오해였다는 견해, 구경꾼의 외교가 어긋났다는 견해, 납치에 대한 계획된 비치명적 보복이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관한 사료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거의 모두 원주민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영국 식민자들이 썼으며, 가족 이름이나 혼인 순서 같은 세부가 기록마다 다릅니다.
베넬롱과 페물와이는 어떻게 비교되나요?
흔히 ‘화해자’와 ‘전사’로 대비되지만, 둘은 서로 알았고 둘 다 화해와 무력을 섞어 썼습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 Emma Dortins, Bennelong (c. 1764–1813). 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 Indigenous 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National Centre of Biography, ANU, 2026
- Bennelong. Wikipedia
- Eora. Wikipedia
- Wangal. Wikipedia
- Bennelong Point. Wikipedia
- Pemulwuy. Wikipedia
- Emma Dortins, The Lives of Stories: Three Aboriginal–Settler Friendships. ANU Press and Aboriginal History (Aboriginal History Monographs), 2018
- Kate Fullagar, Bennelong & Phillip: A History Unravelled. Scribner, 2023
- Watkin Tench, A Complete Account of the Settlement at Port Jackson, 1793
함께 보기
- 와이탕이 조약1840년 2월 6일 영국 왕실의 대표 윌리엄 홉슨과 마오리 랑가티라(추장)들이 처음 서명한 영어·마오리어 협정. 오늘날 뉴질랜드의 건국 문서로 여겨진다.
- 은동고와 마탐바의 은징가외교, 전쟁, 바뀌는 동맹으로 포르투갈의 정복에 맞서며 은동고와 마탐바를 40년 가까이 다스린 음분두족의 여왕.
- 투팍 아마루 2세잉카 후손인 안데스의 쿠라카로, 1780년 18세기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최대의 반식민 봉기를 이끌다 1781년 쿠스코에서 처형되었다.
- 콜럼버스의 첫 항해1492년 에스파냐 왕실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가 원주민들이 살던 카리브해 섬들에 도달했다.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