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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 미국은 나라 안에서 서로 싸우는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어요. 남북전쟁이라고 해요. 남부의 11개 주가 따로 나라를 세우겠다며 ‘남부 연합’을 만들었지요. 남부에는 약 400만 명이 노예로 살고 있었어요. 돈도 받지 못하고 강제로 일했고, 사고팔리거나 가족과 헤어지기도 했으며, 글을 배우지도 못하게 막혔어요.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의 대통령이었어요. 처음에 그는 이 전쟁이 나라를 하나로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노예들은 이미 북부 군대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북부의 많은 사람도 전쟁이 노예제까지 끝내야 한다고 말했어요.
1863년 새해 첫날,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이라는 문서에 서명했어요. 이 문서는 미국과 싸우고 있는 주의 노예들이 그날부터 자유라고 말했고, 흑인 남성도 이제 북군의 육군과 해군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어요.
이 문서로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자유로워지지는 않았어요. 연방 편에 남은 몇몇 주는 빠졌고, 남부 대부분은 아직 남군이 지키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북군이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자유의 약속도 함께 나아갔어요. 많은 노예가 북군 쪽으로 탈출했고, 흑인 남성 약 20만 명이 북군의 병사와 수병으로 싸웠어요.
새해 전날 밤, 가족들은 교회에 모여 자정, 곧 자유가 오는 순간을 기다렸어요. 소식이 아주 늦게 닿은 곳도 있었어요. 텍사스에서는 1865년 6월 19일에야 북군이 해방을 알렸지요. 사람들은 지금도 이날을 ‘준틴스’라고 부르며 기념해요.
해방 선언은 큰 걸음이었지만, 노예제를 모든 곳에서 끝내려면 헌법에 새 조항이 필요했어요. 그 조항, 수정헌법 제13조는 1865년 말에 효력을 얻었어요. 링컨이 서명한 진짜 문서는 워싱턴 D.C.의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한눈에 보기
- 발표
- 1863년 1월 1일(1862년 9월 22일 예비 선언에서 예고)
- 발표자
- 제16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군 최고사령관 자격)
- 성격
- 대통령 포고이자 전시 조치. 훗날 국무부가 포고 제95호로 번호를 붙였다
- 적용 대상
- 반란 중인 남부 연합 10개 주의 노예(연방군 점령 예외 지역 제외). 전국 약 400만 노예 가운데 350만 명 이상
- 제외 지역
- 연방에 남은 경계주(델라웨어·켄터키·메릴랜드·미주리), 테네시, 버지니아·루이지애나의 지정된 연방 점령 지역
- 군사적 효과
- 흑인 남성의 입대를 허용. 1865년까지 흑인 병사·수병 약 20만 명이 북군에 복무
- 원본
- 리본과 국새가 달린 손글씨 5쪽 문서. 워싱턴 D.C.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 완성
- 1865년 12월 6일 비준된 수정헌법 제13조가 범죄에 대한 처벌을 제외한 노예제를 미국 전역에서 폐지
쉬움
노예 해방 선언이란 무엇인가
노예 해방 선언은 미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서 가운데 하나다.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서명한 이 선언은 당시 반란 중인 지역 안에서 “노예로 붙잡힌 모든 사람”이 “이제부터 자유롭고, 앞으로도 자유로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적합한 조건을 갖춘’ 해방된 남성을 미국 군대에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선언은 미국(연방)과, 스스로 독립국 ‘남부 연합’을 선포한 남부의 11개 노예주가 싸운 남북전쟁(1861–1865) 중에 나왔다. 링컨은 이를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이 아니라, 육해군 최고사령관의 권한을 쓴 군사 명령으로 발표했다. 그는 이것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적절하고 필요한 전시 조치”라고 불렀다.
전시 조치였기 때문에 선언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었다. 연방에 충성한 노예주가 아니라 반란 지역에만 적용되었고, 실제로 집행되려면 연방군이 이겨야 했다. 그럼에도 선언은 전쟁의 의미를 바꾸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표현대로, 1863년 1월 1일 이후 연방군이 전진할 때마다 자유의 영역도 넓어졌다.
쉬움
1863년 이전 미국의 노예제
1860년 미국에서는 약 400만 명이 노예 상태에 있었고, 거의 모두 아프리카계였으며 대부분 남부에 살았다. 노예는 법적으로 재산 취급을 받았다. 사고팔리고, 가족과 떨어지고, 폭력적인 처벌을 받고, 교육을 금지당했다. 그들의 무임 노동이 생산한 면화·담배·설탕·쌀은 나라 부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1777년부터 1804년 사이 북부의 모든 주가 즉시 또는 점진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정했지만 남부의 주는 하나도 그러지 않았다. 1787년 미국 헌법은 ‘노예제’라는 낱말을 피하면서도, 대표 수를 정할 때 노예를 5분의 3으로 계산하고 도망친 노예의 반환을 요구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노예제를 보호했다. 1857년 연방 대법원은 드레드 스콧 판결에서 흑인은 시민이 될 수 없고 의회는 서부 준주에서 노예제를 금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노예제 확산에 반대하던 링컨이 1860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부분의 노예주가 연방 탈퇴를 시도했다. 이어진 전쟁은 그 기원에서 노예제와 깊이 얽혀 있었지만, 처음에 연방 정부는 오직 연방을 회복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했다.
쉬움
해방으로 가는 길, 1861–1862
자유의 문제를 전쟁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은 것은 노예들 자신이었다. 1861년 5월 노예 상태에서 탈출한 세 남성이 버지니아의 먼로 요새에 닿았다. 그곳의 연방군 장군 벤저민 버틀러는 이들을 ‘전시 밀수품(contraband)’이라 부르며 돌려보내지 않았다. 곧 수천 명이 연방군 전선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노동자로 일했고, 그들의 수용지 가운데 여럿은 학교와 새 공동체가 생기는 곳이 되었다.
의회도 한 걸음씩 나아갔다. 1861년과 1862년의 몰수법은 반란을 돕는 데 쓰인 노예, 이후에는 연방군 전선에 닿은 반란자 소유 노예를 해방했다. 1862년 3월에는 군대가 도망 노예를 돌려주는 것을 금지했다. 1862년 4월 수도 워싱턴 D.C.에서 소유주에게 보상하는 방식으로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6월에는 모든 연방 준주에서 노예제를 금지해 드레드 스콧 판결을 사실상 뒤집었다.
링컨은 신중했다. 그는 켄터키·메릴랜드 같은 충성 노예주와, 연방을 위해서는 싸워도 흑인의 자유를 위해서는 싸우지 않으려는 많은 북부 유권자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는 보상을 곁들인 점진적 해방, 심지어 해방된 사람들의 자발적 해외 이주까지 제안했다. 그러나 1862년 여름 무렵 그는 반란 지역의 노예를 해방하는 것이 전쟁에 이기는 데 꼭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중급
초안, 지연, 그리고 ‘100일’
링컨은 1862년 7월 22일 내각에 선언 초안을 읽어 주었다.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는 이 조치가 지고 있는 쪽의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이지 않도록 군사적 승리를 기다리라고 조언했다. 기다리는 동안 링컨은 더 빠른 해방을 요구한 신문 편집자 호러스 그릴리에게 공개적으로 답했다. 1862년 8월 22일의 유명한 공개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최우선 목표’는 연방을 구하는 것이며, “일부는 해방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썼다. 역사가들은 링컨이 이미 선언 초안을 써 둔 뒤에 이 편지를 썼다는 점에 주목하며, 해방을 연방 수호의 수단으로 제시해 북부 여론을 준비시키려 한 것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1862년 9월 17일 메릴랜드의 앤티텀 전투에서 연방군은 남군의 침공을 물리쳤다. 닷새 뒤인 9월 22일 링컨은 예비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다. 1863년 1월 1일에도 반란 중인 주나 그 일부 지역의 모든 노예는 “그때부터 영원히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반란 주들에게는 연방에 돌아와 적어도 한동안 노예제를 유지할 수 있는 100일이 주어졌다. 돌아온 주는 없었다.
예비 선언은 정치적 대가가 컸다. 민주당은 이를 위헌이고 선동적이라고 공격했고, 1862년 가을 선거에서 하원 의석을 늘리고 뉴욕 주지사 자리를 차지했다. 링컨이 물러설까 걱정하는 지지자도 있었다. 그러나 1863년 1월 1일, 링컨은 약속대로 최종 선언에 서명했다.
중급
본문 읽기: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선언은 건조한 법률 문체로 쓰였다. 먼저 9월 선언을 인용한 뒤 반란 중인 주와 지역을 열거한다. 아칸소, 텍사스, 루이지애나(뉴올리언스와 지정된 13개 패리시 제외), 미시시피,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웨스트버지니아가 된 48개 카운티와 몇몇 카운티 제외)다. 이 지역에서 노예는 “이제부터 자유”이며, 육해군을 포함한 정부가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유지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선언은 해방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기방어가 아니면 모든 폭력을 삼가라”고 당부하고, “적정한 임금을 받고 성실히 일하라”고 권한다. 그들을 요새와 거점을 지키고 배를 운용하는 군 복무에 받아들이겠다고 밝힌다. 그리고 이 조치를 “정의의 행위이자 군사적 필요에 따라 헌법이 보장하는 행위”라고 부르며 “인류의 신중한 판단과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며 끝난다.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한 것만큼 중요했다. 델라웨어·켄터키·메릴랜드·미주리 네 충성 노예주는 빠졌다. 링컨은 자신의 전시 권한이 반란하지 않은 주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연방군이 장악한 테네시와 버지니아·루이지애나의 예외 지역도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빠진 사람이 약 80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와 후대의 비판자들은 이 역설을 지적했다. 연방이 아직 닿지 못하는 곳의 노예는 해방하고, 닿을 수 있는 곳의 많은 노예는 제외했다는 것이다.
중급
현장의 자유: 탈출, 전쟁, 흑인 병사
해방 선언이 “아무도 해방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가끔 나오지만 정확하지 않다. 사우스캐롤라이나·조지아의 시 아일랜즈, 노스캐롤라이나 동부와 미시시피 계곡 일부처럼 예외로 지정되지 않은 남부의 연방군 점령지에서는 1863년 1월 1일 수만 명이 법적으로 자유를 얻었다. 목격자들은 선언문이 낭독될 때 벌어진 축하를 기록했다. 새해 전날 밤, 노예든 자유민이든 흑인들은 ‘와치 나이트’ 예배에 모여 자유의 순간을 기다렸다.
연방군이 진격하면서 선언도 함께 퍼졌다. 소식은 노예들 사이의 연락망을 타고 번져 많은 이들이 연방군 전선으로 탈출하게 했다. 이는 식량을 기르고 요새를 쌓고 철도를 운영하던 남부 연합의 노동력을 빼앗았다. 당시 버지니아의 소년이던 부커 T. 워싱턴은 훗날, 연방군 장교가 “꽤 긴 문서—아마 노예 해방 선언”을 읽었고 어머니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에게 입을 맞추었다고 회고했다.
흑인 남성을 입대시키겠다는 약속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대부분 해방 노예 출신인 흑인 병사와 수병 약 20만 명이 연방을 위해 복무했고, ‘미국 유색인 부대(USCT)’ 연대들은 육군 병력의 약 10분의 1을 이루었다. 국립문서보관소는 이를 “해방된 이들이 해방자가 되었다”라고 표현한다. 남부 연합은 붙잡힌 흑인 병사와 그 백인 장교들을 반란 선동자로 다루겠다고 위협했고, 1864년 필로 요새에서는 남군이 흑인 연방군 병사들을 학살했다.
중급
국내외의 반응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해방 선언을 “우리 나라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 어쩌면 이 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불렀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한계를 비판하면서도 환호했다. 반전파 ‘코퍼헤드’ 민주당원들은 위헌이라고 비난하며 인종 폭력을 경고했다. 북군 병사들의 감정도 엇갈렸지만,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은 1863년 해방과 흑인 무장이 “남부 연합이 지금까지 받은 가장 큰 타격”이라고 썼다.
남부 연합 지도자들은 격분했다.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은 선언 적용 지역에서 붙잡힌 연방군 장교를 ‘노예 반란 선동’ 혐의로 주 법정에 넘기겠다고 위협했고, 로버트 E. 리 장군은 이를 “야만적이고 잔인한 정책”이라고 했다. 일부 남부인은 선언이 전쟁이 처음부터 노예제에 관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며 남부 백인들을 더 굳게 뭉치게 할 것이라고 보았다.
해외에서 선언은 전쟁을 분명한 반노예제 투쟁으로 만들어 영국과 프랑스의 여론을 연방 쪽으로 돌리는 데 이바지했다. 영국 맨체스터의 노동자들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원칙을 실현하려는 링컨의 조치를 칭송하는 지지 서한을 보냈다. 이탈리아의 애국자 주세페 가리발디는 링컨을 ‘위대한 해방자’라고 불렀다. 앤티텀의 결과와 더불어 선언은 유럽이 남부 연합을 승인할 가능성을 크게 낮추었다.
중급
선언에서 헌법 개정으로
해방 선언은 전시 권한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면 법원이나 후임 대통령이 이를 무효로 볼지 모른다는 우려가 컸다. 예외 지역에서는 노예제가 여전히 합법이었다. 그래서 링컨은 연방이 장악한 주들이 스스로 주 헌법으로 노예제를 폐지하도록 압박했고, 메릴랜드·미주리·테네시·웨스트버지니아와 루이지애나·버지니아의 연방 점령지가 전쟁 중에 그렇게 했다. 또 헌법 개정을 1864년 재선 운동의 핵심으로 삼았다.
상원은 1864년 4월 8일, 하원은 1865년 1월 31일 수정헌법 제13조를 통과시켰다. 링컨은 비준 전인 1865년 4월 암살되었다. 1865년 6월 19일 연방군 고든 그레인저 장군이 갤버스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남부 주 텍사스에서도 이제 선언을 집행한다고 발표했다. 이날은 ‘준틴스’로 기억되며 2021년 연방 공휴일이 되었다. 수정헌법은 1865년 12월 6일 비준되어 켄터키와 델라웨어에 남아 있던 노예들까지 해방했다.
수정헌법의 예외 조항—‘범죄에 대한 처벌로서의 경우를 제외하고’—은 뒷날 전후 남부의 죄수 임대처럼 강제 교도소 노동을 허용하는 근거가 되었다. 해방은 또한 해방된 사람들의 시민권, 투표권, 토지 문제를 열어 둔 채 남겼고, 재건 시대와 수정헌법 제14·15조가 이를 해결하려 했지만 많은 면에서 실패했다.
심화
논쟁: 링컨인가, 군대인가, 노예 자신인가
해방 선언과 링컨이 얼마만큼의 공을 받아야 하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오래 논쟁해 왔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1948년 이 선언에 “선하증권 같은 도덕적 장엄함”밖에 없으며 효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노예를 해방했다고 꼬집었다. 반대 극단에서 언론인 러론 베넷 2세는 『영광으로 떠밀려』(2000)에서 링컨을 백인 우월주의에 매인 마지못한 해방자로 그렸다. 대부분의 학계 역사가는 링컨이 생애 초반 인종주의적 견해를 가졌음을 인정하면서도 베넷의 결론은 일방적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 아이라 벌린이 이끈 ‘해방민과 남부 사회 프로젝트’ 등 사회사 연구자들은 ‘자기 해방’을 강조했다. 노예들이 탈출하고 노동을 거부하고 병사로 싸움으로써 연방이 노예제와 마주하게 했고 해방을 군사적 필요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제임스 M. 맥퍼슨은 이것이 링컨의 정책과 연방군의 결정적 역할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것 없이는 탈출이 지속적인 법적 자유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 연구 대부분은 두 관점을 함께 담는다.
앨런 C. 겔조의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2004)은 문서의 건조한 법률 문체가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변호사이자 ‘마지막 계몽주의 정치가’였던 링컨이 법정에서 살아남도록 가능한 가장 튼튼한 헌법적 토대 위에 해방을 세웠다는 것이다. 에릭 포너의 『불의 시련』(2010)은 노예제와 인종에 대한 링컨의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추적하며, 그가 폐지론자가 아니었고 당대의 전형적 견해를 가졌지만 “도덕적·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었다고 결론지었다.
심화
법적 권한과 헌법 문제
1865년 이전 링컨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국인은 연방 정부가 평시에 노예제가 존재하는 주에서 이를 폐지할 권한이 없다고 믿었다. 링컨의 주장은 더 좁았다. 무장 반란 중에 최고사령관은 적을 약화하기 위해 적의 재산—재산 취급을 받는 사람을 포함해—을 몰수하거나 해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이 선언의 지리를 설명한다. 선언은 1863년 1월 1일 반란 중인 지역에만 미쳤고, 예비 선언은 몰수법을 언급했지만 최종 선언은 어떤 법률도 인용하지 않았다.
이 토대는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링컨은 의회 없이 행동할 수 있었고, 조심스러운 북부인들에게 해방을 군사 조치로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얻은 자유가 평화 뒤에도 유지될지는 의문이었다. 1862년 말 링컨은 법무장관 에드워드 베이츠에게 이렇게 해방된 사람을 다시 노예로 만들 수 있는지 물었고, 베이츠는 그럴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선언은 법정에서 직접 다투어진 적이 없지만, 이 불확실성은 링컨과 의회가 수정헌법 제13조를 추진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선언이 국제법과 전쟁 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연구 대상이다. 1863년 연방은 군대의 행동 규범인 ‘리버 법전’도 발표했다. 이 법전은 선언과 보조를 맞추어, 붙잡힌 흑인 연방군 병사를 도망 노예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남부 연합의 위협에 맞섰다. 해방 선언은 이렇게 헌법, 전쟁법, 그리고 이미 연방군 전선을 자유의 경계로 여기기 시작한 노예들의 요구가 만나는 자리에 있다.
심화
문서, 사본, 그리고 기억
1863년 1월 1일의 공식 선언문은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다. 본문은 손글씨 5쪽이며, 원래 좁은 빨강·파랑 리본으로 묶여 서명 쪽에 미국 국새 봉인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다른 포고들과 함께 제본되어 국무부가 보관했고, 국무부가 나중에 95번이라는 번호를 붙였으며, 1936년 국립문서보관소로 옮겨졌다. 훼손되기 쉬워 짧은 기간만 공개된다. 링컨이 손으로 쓴 예비 선언 원고는 뉴욕주립도서관이 소장한다. 전쟁 중에는 링컨이 서명한 것을 포함해 공인된 인쇄본도 유통되었다.
선언에 대한 기억도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해방민과 후손들은 실제로 자유가 도착한 때에 따라 지역마다 다른 날—많은 곳에서는 1월 1일, 텍사스에서는 6월 19일—에 해방 기념일을 지켰다. 전쟁 뒤 100년 동안 백인 미국인은 남북전쟁에서 노예제가 한 역할을 흔히 축소했고, 해방은 국가 기념에서 희미해졌다.
민권 운동 시기에 선언은 이행되지 않은 약속으로 되살아났다. 1962년 마틴 루서 킹 주니어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인종 분리를 금지하는 ‘제2의 해방 선언’을 발표하라고 촉구했다. 1963년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은 해방 선언을 가리키는 “100년 전”이라는 말로 시작해, 100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은 아직 자유롭지 않다고 선언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5년 투표권법을 제안하며 “해방은 선언일 뿐 아직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핵심 개념
- 전시 조치
- 링컨은 적을 약화하는 최고사령관의 권한에 해방의 근거를 두었고, 이것이 선언의 범위와 한계를 함께 정했다.
- 전쟁 목적의 전환
- 연방 회복을 위한 전쟁이 노예제 종식을 위한 전쟁이 되었다.
- 자기 해방
- 노예들의 탈출과 노동 거부가 정부를 해방으로 이끌었고 선언에 실질적 힘을 주었다.
- 해방된 이가 해방자로
- 흑인 남성에게 군 복무를 열어 약 20만 명이 연방과 자유를 위해 싸우게 했다.
- 제한된 범위, 넓어지는 효과
- 충성 지역과 점령지는 제외했지만 연방군이 전진할 때마다 자유가 남부로 더 깊이 퍼졌다.
- 포고와 헌법 개정
- 전시 명령은 평화 뒤에 살아남지 못할 수 있었기에, 영구적 폐지에는 수정헌법 제13조가 필요했다.
- 미완의 약속
- 민권 운동 지도자들은 법적 자유를 실제 평등으로 만들라고 요구하며 선언을 불러냈다.
기록
- 1857년 — 연방 대법원의 드레드 스콧 판결이 흑인의 시민권과 준주 노예제 금지 권한을 부정한다.
- 1861년 — 남북전쟁이 시작되고, 5월 버틀러 장군이 먼로 요새의 도망 노예를 ‘전시 밀수품’으로 선언한다.
- 1862년 — 4월 16일 워싱턴 D.C. 노예제 폐지, 6월 준주 노예제 금지, 7월 17일 제2차 몰수법.
- 1862년 — 7월 22일 링컨이 내각에 선언 초안을 읽고, 8월 22일 호러스 그릴리에게 공개 편지를 보낸다.
- 1862년 — 9월 22일 앤티텀 전투 뒤 링컨이 예비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한다.
- 1863년 — 1월 1일 최종 노예 해방 선언이 효력을 얻고 흑인 병사 모집이 확대된다.
- 1864년 — 4월 8일 상원이 수정헌법 제13조를 통과시키고, 11월 메릴랜드가 노예제를 폐지한다.
- 1865년 — 1월 31일 하원이 수정헌법 제13조를 통과시키고, 4월 링컨이 암살된다.
- 1865년 — 6월 19일 텍사스 갤버스턴에서 해방이 발표되고(준틴스), 12월 6일 수정헌법 제13조가 비준된다.
- 1936년 — 선언 원본이 국무부에서 국립문서보관소로 옮겨진다.
- 1963년 — 100주년. 마틴 루서 킹 주니어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에서 선언을 불러낸다.
- 2021년 — 준틴스가 미국 연방 공휴일이 된다.
용어 풀이
- 해방(emancipation)
- 사람들을 노예 상태나 다른 법적 속박에서 풀어 주는 일.
- 포고(proclamation)
- 정부 수반이 공식적으로 공표하는 발표.
- 남부 연합
- 1860–1861년 미국을 떠나려 한 11개 노예주가 세운 아메리카 연합국.
- 연방(Union)
- 남북전쟁 동안의 미국 정부와 그에 충성한 주들.
- 경계주
- 연방에 남은 노예주. 델라웨어·켄터키·메릴랜드·미주리(뒤에 웨스트버지니아).
- 전시 밀수품(contraband)
- 연방군 전선으로 탈출한 노예를 처음에 노획한 적 재산처럼 부른 전시 용어.
- 군 최고사령관
- 군대의 우두머리라는 대통령의 헌법상 지위.
- 수정헌법 제13조
- 범죄에 대한 처벌을 제외하고 노예제를 폐지한 1865년의 헌법 개정.
- 미국 유색인 부대(USCT)
-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로 이루어진 북군 연대.
- 준틴스(Juneteenth)
- 1865년 텍사스에서 해방이 발표된 6월 19일. 지금은 미국 연방 공휴일이다.
묻고 답하기
노예 해방 선언으로 모든 노예가 자유로워졌나요?
아니요. 반란 지역에만 적용되었고 충성 노예주와 일부 연방 점령지는 빠졌어요. 연방군이 전진하면서 실제 자유가 되었고, 노예제는 1865년 12월 수정헌법 제13조로 모든 곳에서 끝났어요.
링컨은 왜 모두를 한꺼번에 해방하지 않았나요?
헌법이 자신에게 준 권한은 반란 중인 주에 대한 전시 조치로서만 노예를 해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충성 노예주와 북부의 지지를 잃을까도 걱정했어요.
진짜 선언문은 어디에 있나요?
서명된 원본은 워싱턴 D.C.의 국립문서보관소에 있어요. 약해서 한 번에 며칠씩만 공개돼요.
준틴스는 무엇인가요?
1865년 6월 19일 연방군 장군이 텍사스의 노예들이 자유라고 발표한 날을 기념해요. 지금은 미국의 국경일이에요.
선언이 아무도 해방하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아니에요. 남부의 연방 점령지에서 수만 명이 곧바로 자유를 얻었고, 전쟁 동안 연방군이 전진하면서 수백만 명이 더 자유를 얻었어요.
오늘날 역사가들은 링컨의 역할을 어떻게 보나요?
대부분 해방을 링컨의 정책, 연방군, 노예들의 행동이 함께 만든 결과로 봐요. 각각에 얼마만큼의 무게를 둘지, 링컨의 인종관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두고 논쟁해요.
후임 대통령이 선언을 취소할 수도 있었나요?
법적으로 대통령의 전시 명령이었기 때문에 영구성이 불확실했어요. 수정헌법 제13조를 통과시킨 핵심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어요.
출처와 더 읽을거리
- Emancipation Proclamation. Wikipedia
-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Featured Documents). U.S. National Archives
- Emancipation Proclamation (Milestone Documents). U.S. National Archives
- Thirteenth Amendment to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Wikipedia
- Juneteenth. Wikipedia
- Contraband (American Civil War). Wikipedia
- United States Colored Troops. Wikipedia
- Lieber Code. Wikipedia
- Allen C. Guelzo, Lincoln’s Emancipation Proclamation: The End of Slavery in America. Simon & Schuster, 2004
- Eric Foner, The Fiery Trial: Abraham Lincoln and American Slavery. W. W. Norton, 2010
함께 보기
- 미국 독립선언서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가 채택한 문서로, 영국에 대한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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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랭스턴 휴스흑인의 삶과 언어, 음악에서 소재와 리듬을 끌어온 할렘 르네상스의 미국 시인·작가.
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