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1846–1881년 ·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한 문장으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가짜 사형 집행과 시베리아 감옥살이를 견뎌 낸 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소설로 죄와 자유, 신앙, 그리고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고든 19세기 러시아의 소설가입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이미지: Vasily Perov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위에서부터 읽으면 쉬운 설명으로 시작하고, 아래로 갈수록 더 깊은 내용과 학술적 논의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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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설명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의 의사였고, 가족은 병원 안에서 살았어요. 어린 표도르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해서 손에 잡히는 책은 모두 읽었답니다.

청년이 되어 큰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던 그는 첫 책 『가난한 사람들』을 썼어요. 가난한 두 사람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이야기예요. 유명한 비평가들이 이 책을 아주 좋아해서, 스물네 살의 도스토옙스키는 하루아침에 이름난 작가가 되었어요.

그런데 무서운 일이 일어났어요. 도스토옙스키는 새로운 생각, 그중에는 러시아의 황제인 차르가 금지한 생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던 젊은이들의 모임에 들어갔어요. 경찰이 그들을 붙잡아 갔지요. 도스토옙스키와 친구들은 총살당하기 위해 광장으로 끌려갔어요. 그런데 마지막 순간, 황제가 목숨을 살려 주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대신 도스토옙스키는 꽁꽁 얼어붙은 시베리아의 감옥으로 보내져 4년을 지냈어요.

감옥에서 그는 강도, 살인자들과 함께 살았어요. 그러면서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도 착한 마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감옥에서 읽을 수 있었던 책은 신약 성경 한 권뿐이었어요. 이 시간은 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뒷날 그의 책들은 옳고 그름에 관한 깊은 질문으로 가득하게 되었어요.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장 훌륭한 소설들을 썼어요. 『죄와 벌』에서는 가난한 대학생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자기 양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세 형제가 하느님과 선함에 대해 논쟁해요.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어찌나 열정적으로 말하고 다투는지, 독자들은 지금도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고 느껴요. 그의 책은 오늘날 온 세계에서 읽히고 있답니다.

한눈에 보기

생몰
1821년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모스크바 ~ 1881년 2월 9일(구력 1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활동
1846년(『가난한 사람들』)~1881년.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베리아 유형(1850~1859)과 서유럽 체류(1867~1871)
직업
소설가, 단편 작가, 언론인, 잡지 편집인
주요 작품
『가난한 사람들』(1846), 『죽음의 집의 기록』(1860~1862), 『지하로부터의 수기』(1864), 『죄와 벌』(1866), 『백치』(1868~1869), 『악령』(1871~1872), 『작가의 일기』(1873~1881),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9~1880)
전환점
1849년 페트라솁스키 서클 사건으로 체포, 모의 사형 집행 뒤 옴스크에서 4년 강제노동
가족
마리야 이사예바(1857년 결혼, 1864년 사망), 속기사였다가 뒷날 출판인·회고록 작가가 된 안나 스니트키나(1867년 결혼)
주제
자유와 책임, 고통과 구원, 신앙과 의심, 가난과 근대 도시, ‘러시아 이념’
유산
세계 문학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소설가 가운데 하나. 실존주의, 심리학, 신학에도 중요한 영향

쉬움

도스토옙스키는 누구인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삶의 가장 깊은 질문을 파고든 러시아 작가입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사람은 왜 자신과 남을 해치는 선택을 하는가? 고통은 좋은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그는 동시대의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흔히 꼽힙니다.

그의 삶은 소설만큼이나 극적이었습니다. 첫 소설로 하루아침에 유명해졌고, 정치 활동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총살대 앞에 섰지만 그것은 연출된 의식이었습니다. 시베리아에서 4년을 죄수로, 6년을 병사로 보냈고, 뇌전증을 앓았으며, 유럽의 도박장에서 돈을 날렸고, 첫 아내와 가장 가까운 형, 두 아이를 잃었습니다. 걸작 대부분을 무거운 빚과 마감에 쫓기며 썼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열에 들뜬 대화, 갑작스러운 추문, 극한으로 몰린 인물들이 가득합니다. 살인자와 성자, 술꾼과 매춘부, 허무주의자와 수도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극적인 장면 뒤에는 철학, 종교, 러시아의 운명에 관한 치밀한 사유가 있습니다. 이 결합이 그의 작품을 전 세계 독자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만든 힘입니다.

[1][2][7]

쉬움

어린 시절과 첫 성공

도스토옙스키는 아버지 미하일이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문은 하급 귀족이었고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야는 1837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1839년 가족의 작은 시골 영지에서 죽었습니다. 오래된 집안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자기 농노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하지만, 후대 연구자 가운데는 이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어 정확한 경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표도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병학교에서 공부했지만, 관심은 온통 문학에 있었습니다. 푸시킨, 고골, 실러, 발자크, 디킨스, 조르주 상드를 읽었습니다. 1844년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나섰습니다. 처음 발표한 작품은 발자크의 소설 『외제니 그랑데』 번역이었습니다.

1845년 그는 가난하고 나이 든 필경사와 그가 돕고자 하는 젊은 여성이 주고받는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완성했습니다.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와 당대 러시아 비평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비사리온 벨린스키가 열렬히 칭찬했고, 작품은 1846년 1월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신을 만나는 관리의 기묘한 이야기 『분신』(1846) 같은 다음 작품들은 벨린스키를 실망시켰고, 도스토옙스키의 명성은 빠르게 식었습니다.

[2][7]

쉬움

체포, 모의 사형, 시베리아

1840년대 후반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금서와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을 토론하던 젊은이들의 모임인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드나들었습니다. 그 안에서 니콜라이 스페시뇨프를 중심으로 한 더 작은 비밀 모임은 혁명 행동을 논의했습니다. 한 모임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교회와 농노제를 공격한 벨린스키의 금지된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 이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어떤 반대의 조짐도 짓밟으려 했고, 1849년 4월 회원 60여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 여러 달을 보낸 뒤, 1849년 12월 22일(구력) 도스토옙스키와 다른 죄수들은 세묘놉스키 광장으로 끌려가 사형 선고를 듣고 흰 수의를 입었습니다. 첫 세 사람이 총살대를 마주한 기둥에 묶였습니다. 마지막 순간 한 장교가 황제가 형을 감해 주었다고 알렸습니다. 모든 장면이 연출된 것이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뒷날 『백치』에서 처형을 앞둔 사람의 생각을 그려 냈습니다.

그는 옴스크의 감옥에서 족쇄를 찬 채 일반 범죄자들과 함께 4년(1850~1854)을 보냈고, 이어 세미팔라틴스크(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병사로 복무했습니다. 그곳에서 1857년 과부 마리야 이사예바와 결혼했습니다. 뚜렷한 뇌전증 발작도 이 무렵 시작되었습니다.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 유형 중인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그에게 신약 성경을 건넸는데, 감옥에서 허락된 유일한 책이었던 이 성경을 그는 평생 간직했습니다. 1859년 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3][2]

중급

문단 복귀: 잡지, 유럽, 지하

수도로 돌아온 도스토옙스키는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Время)』(1861~1863)와 『세기(Эпоха)』(1864~1865)를 펴내며 경력을 다시 쌓았습니다. 두 잡지는 러시아의 교양 계층이 서유럽을 흉내 내지 말고 민중의 도덕적·종교적 삶과 다시 이어져야 한다는 ‘토양주의(почвенничество)’를 내세웠습니다. 감옥 생활을 소설 형식으로 그린 『죽음의 집의 기록』(1860~1862)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러시아의 형벌 제도를 독자 대중에게 처음 드러낸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1862년 그는 처음으로 서유럽을 여행했고, 『여름 인상에 관한 겨울 메모』(1863)에서 파리와 런던의 부르주아적 물질주의와 자기만족을 비판했습니다. 이 여행과 그 뒤의 여행에서 그는 룰렛에 대한 강박적인 열정에 빠져 거듭 빚을 졌습니다.

1864년은 재앙의 해였습니다. 4월에 아내 마리야가, 7월에 형 미하일이 세상을 떠나면서 도스토옙스키는 빚과 형의 가족을 떠맡았습니다. 같은 해 그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발표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이며 언제나 자기 이익을 고른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고립되고 원한에 찬 전직 관리의 독백입니다. ‘지하 인간’은 사람이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일부러 자기 이익에 반하는 행동도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작품은 흔히 실존주의 문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집니다.

[2][7]

중급

위대한 장편들

『죄와 벌』(1866년 『러시아 통보』 연재)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전직 대학생 로디온 라스콜니코프가 ‘비범한’ 인간은 도덕률을 넘어설 권리가 있다는 자기 이론을 시험하려는 동기도 품고 늙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중심은 범인 찾기가 아니라 그의 심리적 고통, 예심판사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와의 두뇌 싸움, 그리고 가족을 먹여 살리려 몸을 팔게 된 소냐 마르멜라도바를 통해 자백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엄격한 마감에 맞춰 출판업자에게 중편 『노름꾼』도 넘겨야 했습니다. 그는 젊은 속기사 안나 스니트키나에게 한 달이 안 되는 기간에 이 작품을 받아 적게 했고, 1867년 2월 그녀와 결혼했습니다.

빚쟁이들을 피해 부부는 1867년부터 1871년까지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에서 살았습니다. 첫딸은 그곳에서 갓난아기 때 죽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완전히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려는 시도인 『백치』(1868~1869)를 썼습니다. 온화하고 뇌전증을 앓는 미시킨 공작의 선함은 탐욕과 정념의 세계에서 비극적으로 실패합니다. 1869년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혁명 조직이 저지른 실제 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악령』(1871~1872)은 정치적 급진주의에 대한 어두운 풍자이자, 사상이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지에 관한 연구입니다.

러시아로 돌아온 뒤 안나는 집안 살림을 맡고 남편의 책을 직접 출판하기 시작해 마침내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보수적인 주간지 『시민』을 편집했고, 이어 저널리즘·회고·단편·정치 논평을 섞은 개인 월간지 『작가의 일기』를 펴내 전국적인 공인이 되었습니다. 1878년 세 살배기 아들 알료샤를 잃은 뒤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9~1880)은 방탕한 아버지의 살해와, 열정적인 드미트리, 지적인 이반, 신앙심 깊은 알료샤, 사생아 스메르댜코프 네 아들이 나누어 진 죄를 이야기합니다. 이반의 서사시 「대심문관」과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은 문학사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장들로 꼽힙니다.

1880년 6월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 푸시킨 동상 제막식에서 푸시킨의 ‘전 인류적 공감 능력’이 러시아 정신의 본질이라고 찬양한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청중은 열광했습니다. 그는 채 1년이 되지 않은 1881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고, 수만 명이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까지 장례 행렬을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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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사상과 예술

도스토옙스키 사상의 중심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는 당대의 합리주의자와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이 자기 이익으로만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자유는 큰 악을 가능하게 하지만 사랑과 신앙과 도덕적 책임도 가능하게 합니다. 「대심문관」 이야기에서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자유를 주었다는 이유로 단죄되고, 교회는 그 대신 빵과 기적과 권위를 내밉니다.

그의 인물 상당수는 사상을 직접 살아 봄으로써 시험합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비범인 이론을 실행하고, 『악령』의 키릴로프는 자살로 자기 자유를 증명하려 합니다. 신도 불멸도 없다면 도덕의 근거도 없다는 이반 카라마조프의 주장은 흔히 ‘모든 것이 허용된다’로 요약되는데, 스메르댜코프는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사상이 실제 삶에서 낳는 결과를 보여 주며, 그래서 철학자들은 그를 소설가이자 사상가로 읽습니다.

그는 러시아 정교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교 사상가였지만 의심에게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주었습니다. 죄 없는 아이들이 고통받는 세계에 대한 이반의 반역은 지금까지 쓰인 신앙에 대한 반론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으로 꼽힙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에 논리적 증명이 아니라 조시마와 알료샤가 보여 주는 실천적 사랑으로 답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모두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소설 전체를 관통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자체가 그의 소설에서 거의 하나의 등장인물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도시는 궁전과 열병식이 있는 화려한 제국의 수도가 아니라, 비좁은 셋방과 계단참, 선술집과 전당포가 있고 여름이면 숨이 막히는 곳, 하급 관리와 학생과 과부와 도시 빈민이 파산의 벼랑 끝에서 살아가는 곳입니다.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들을 이어받아, 그는 근대 도시를 고립과 가난, 소문, 낯선 사람들 사이의 갑작스러운 만남이 벌어지는 무대로 만들었고, 이런 조건이 인물들을 극단적인 사상과 행동으로 몰아갑니다. 비평가들은 이를 근대 도시 소설에 대한 그의 큰 공헌으로 봅니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점점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작가의 일기』에서 그는 러시아의 특별한 종교적 사명을 주장하고, 1877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지지했으며, 가톨릭, 사회주의, 서구 자유주의를 공격했습니다. 반유대주의적인 대목도 있는데, 1877년 ‘유대인 문제’에 관한 글에서 이를 변호하기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를 그의 유산에서 심각하고 불편한 부분으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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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세계에 끼친 영향

1880년대 프랑스어·독일어·영어 번역이 나온 뒤 도스토옙스키의 국제적 명성은 빠르게 커졌습니다. 1887년 프랑스어 번역으로 그를 발견한 프리드리히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그를 자신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심리학자라고 불렀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도스토옙스키와 부친 살해」(1928)를 썼고, 그의 소설은 정신분석의 핵심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20세기에는 『악령』을 무대에 올린 알베르 카뮈와 장폴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이 도스토옙스키를 선구자로 보았습니다. 프란츠 카프카, 앙드레 지드, 윌리엄 포크너처럼 서로 전혀 다른 작가들이 그를 깊이 읽고 그 중요성을 인정했습니다. 니콜라이 베르댜예프 같은 종교철학자들은 그의 작품 위에 사상을 세웠고, 1951년 『백치』를 영화로 만든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로베르 브레송에 이르는 영화감독들이 그의 작품을 각색했습니다.

소련에서 그의 평판은 복잡했습니다. 종교적 신앙과 『악령』의 혁명가 비판 때문에 의심을 받았고, 스탈린 시대에는 거의 가르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연구는 이어졌고 1950년대 중반부터 작품이 더 널리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러시아 작가 가운데 하나이며, 한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소설 번역본은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받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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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학계의 논쟁: 다성성, 이데올로기, 형식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적 해석은 미하일 바흐친의 『도스토옙스키 창작의 문제』(1929)와 그 개정판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문제』(1963)입니다.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가 새로운 종류의 ‘다성적(polyphonic)’ 소설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물들의 목소리와 사상이 작가의 단일한 관점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이고 온전한 의식으로서 끝나지 않는 대화 속에서 서로 부딪친다는 것입니다. 다성성 개념은 바흐친의 카니발 개념과 함께 러시아 문학 연구를 훨씬 넘어 문학 이론 전반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흐친이 어디까지 옳은지는 논쟁거리입니다. 정교 신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도스토옙스키가 예컨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구조를 통해 독자를 분명히 특정한 결론으로 이끈다고 보는 비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의 천재성은 바로 이반 같은 반대 목소리가 온전한 힘으로 말하게 한 데 있다고 보는 비평가도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가 바랐던 대로 조시마의 가르침이 「대심문관」에 제대로 답했는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소설가와 논객 사이의 관계도 논쟁거리입니다.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담긴 『작가의 일기』를 소설을 읽는 열쇠로 보는 학자도 있고, 독단적인 저널리스트와 열린 예술가 사이의 간극을 강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종교사 연구자들은 그가 1878년 철학자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와 함께 찾아간 옵티나 수도원의 장로들처럼 러시아 정교의 영성을 얼마나 정확히 그렸는지를 검토합니다.

[6][8][7]

심화

전기 자료와 그 신뢰성

도스토옙스키 생애의 주요 자료는 편지, 소설 창작 노트, 페트라솁스키 사건 조서 같은 공문서, 그리고 그를 알던 사람들의 회고록입니다. 표준 학술 판본은 초고·노트·편지를 포함한 소련 과학아카데미판 30권 전집(레닌그라드, 1972~1990)입니다.

회고록은 비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의 『회상』은 말년에 쓰여 1925년 출간되었는데, 매우 귀중하지만 남편에 대한 기억을 지키려는 성격이 있습니다. 딸 류보피의 회고록에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섞여 있습니다. 1883년 비평가 니콜라이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에게 보낸 악명 높은 편지는 어린 소녀를 학대했다는 소문을 포함해 도스토옙스키의 도덕적 타락을 고발했는데, 대부분의 전기 작가는 이를 근거 없는 험담으로 보며, 도스토옙스키의 출판인이 싣기를 거부한 『악령』의 한 장면을 되풀이한 것이라고도 봅니다.

널리 알려진 사실 가운데 일부는 근거가 약합니다. 아버지가 농노에게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는 공식 조사가 자연사로 기록했다는 점을 들어 의심하는 연구자도 있고, 집안의 이야기가 사실일 수 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습니다. 프로이트 논문의 핵심인 뇌전증과 아버지 죽음의 연관은 현재 남아 있는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전기 작가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조지프 프랭크의 다섯 권짜리 전기(1976~2002, 2009년 한 권 축약본)는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19세기 러시아 지성사 속에 놓은, 현대에 가장 철저한 서술로 널리 평가받습니다.

[7][2][3]

핵심 개념

자유
도스토옙스키에게 인간을 규정하는 특징. 큰 악과 함께 참된 사랑과 신앙도 가능하게 한다.
고통과 구원
정직하게 받아들인 고통은 라스콜니코프가 자백에 이르는 길처럼 도덕적 거듭남으로 이어질 수 있다.
끝까지 살아 낸 사상
인물들은 이론을 몸으로 구현하고 그 결과까지 밀고 나가며, 사상이 실제 삶에서 무엇을 하는지 보여 준다.
신앙과 의심
이반 카라마조프의 반역처럼 의심에 가장 강한 목소리를 주고, 증명이 아니라 실천적 사랑으로 답했다.
모두에 대한 책임
각 사람이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대해 죄가 있다는 조시마의 가르침. 보편적 도덕적 연대의 비전.
토양주의(почвенничество)
교양 있는 러시아인이 민중의 종교적·도덕적 삶과 다시 이어져야 한다는 믿음.
다성성
하나의 권위적 관점 없이 여러 독립된 목소리와 관점이 서로 부딪치는 소설을 가리키는 바흐친의 용어.

기록

  1. 1821년 —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난다.
  2. 1839년 — 아버지가 가족 영지에서 죽는다. 사망 경위는 뒷날 논란이 된다.
  3. 1846년 — 『가난한 사람들』이 출간되어 벨린스키의 찬사를 받는다.
  4. 1849년 — 페트라솁스키 서클 사건으로 체포되고, 12월 22일(구력) 모의 사형 집행을 겪는다.
  5. 1850년 —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의 강제노동을 시작한다.
  6. 1859년 — 세미팔라틴스크 군 복무를 마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7. 1864년 — 『지하로부터의 수기』 발표. 아내 마리야와 형 미하일이 세상을 떠난다.
  8. 1866년 — 『죄와 벌』이 연재되고, 안나 스니트키나에게 『노름꾼』을 구술한다.
  9. 1867년 — 안나 스니트키나와 결혼하고 4년간 해외로 떠난다.
  10. 1871년 — 러시아로 돌아온다. 『악령』이 연재된다(1871~1872).
  11. 1880년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성하고 모스크바에서 푸시킨 연설을 한다.
  12. 1881년 — 2월 9일(구력 1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난다.

용어 풀이

구력 / 신력
1918년까지 러시아가 쓴 율리우스력(구력)과 그레고리력(신력). 19세기에는 12일 차이가 났다.
페트라솁스키 서클
1840년대 공상적 사회주의에 관심을 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토론 모임. 1849년 탄압받았다.
카토르가
주로 시베리아에서 시행된 러시아의 강제노동형 제도.
허무주의(니힐리즘)
1860년대 러시아에서 전통적 권위, 종교, 예술을 거부하고 과학과 실용을 앞세운 급진적 흐름.
지하 인간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이름 없는 화자. 소외되고 자기모순에 빠진 근대적 주인공의 원형.
토양주의
도스토옙스키의 잡지들이 내세운 운동. 교양 계층과 민중의 화해를 주장했다.
장로(스타레츠)
러시아 정교에서 영적 스승으로 존경받는 수도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조시마가 그 예다.
대심문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들려주는 서사시. 스페인의 추기경이 다시 온 그리스도를 단죄한다.
다성성(폴리포니)
여러 대등한 목소리로 이루어진 소설을 가리키는 바흐친의 용어. 그는 이를 도스토옙스키에게서 발견했다.
연재
소설을 잡지에 여러 차례 나누어 싣는 것. 도스토옙스키의 장편 대부분이 이렇게 처음 발표되었다.

묻고 답하기

도스토옙스키는 정말 처형당할 뻔했나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대 앞에 섰지만, 처형은 연출된 의식이었습니다. 황제는 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감형을 결정해 두었습니다.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많은 독자가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죄와 벌』로 시작합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짧지만 어렵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흔히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힙니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서로 알았나요?

서로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썼나요?

정확히 그 문장은 아닙니다. 이 생각은 이반 카라마조프의 것으로 여겨지고 다른 인물들이 이를 두고 이야기하지만, 유명한 그 문장은 뒷날 만들어진 요약입니다.

왜 그렇게 빨리 썼나요?

도박과 형의 잡지 때문에 자주 빚을 졌고, 원고지 분량에 따라 돈을 받았습니다. 많은 장편이 엄격한 마감에 맞춰 잡지 연재용으로 쓰였습니다.

바흐친의 ‘다성적 소설’이란 무엇인가요?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이 작가에게 단순히 심판받지 않는 독립된 의식으로 말하며, 대등한 목소리들 사이의 끝나지 않는 대화를 만들어 낸다는 바흐친의 주장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반유대주의자였나요?

그렇습니다. 그의 저널리즘과 편지에는 반유대주의적 발언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소설과 어떤 관계인지 논의하지만, 그의 기록의 일부라는 점은 널리 인정됩니다.

출처와 더 읽을거리

  1.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위키백과
  2. Fyodor Dostoevsky. Wikipedia
  3. Petrashevsky Circle. Wikipedia
  4. Crime and Punishment. Wikipedia
  5. The Brothers Karamazov. Wikipedia
  6. Mikhail Bakhtin. Wikipedia
  7. Joseph Frank (조지프 프랭크), Dostoevsky: A Writer in His Tim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9
  8. Mikhail Bakhtin (미하일 바흐친), 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Caryl Emerson 영역).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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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공개 출처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으며, 새 연구가 나오면 고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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